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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내적치유- 부모를, 나를 용서하기

by 은총가득 2010. 6. 19.

 

   

                                               

        용서를 통한 역기능 가정의 성인아이 치유

                부모를, 나를 용서하기

 

데이빗 스툼 &제임스 머스텔러 지음

  

 

제1부 가정의 보따리를 풀어라

 

1장 가정 :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당신이 가정에서 아파했던 고통과 가슴앓이들로 인해 당신의 가정을 뒤에 묻어버리고 다시는 끄집어내지 않으려는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을 떠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가장 건강한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모들이 초래한 많은 고통과 고초를 받고서 사람들은 왜 그냥 “그것들을 모두 뒤에 묻어버릴” 수 없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난 절대로 내 부모들처럼 하지 않을꺼야”라고 반항적으로 맹세하면서 집을 떠났다. 불행하게도,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무엇을 습득했는지에 달려 있다. 결국 부모들은 우리 속에 자리잡게 마련이다.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집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많은 면에서 우리는 우리 부모들의 복사판이다. 같은 게임을 하지만, 다른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모두 “혼란 속에 길 잃은” 동반 의존적인 유산의 산물이다.

가정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증거가 필요 없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하기를 두려워한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가정이란 무엇인가? 현재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나타나고 있지만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은 두 사람의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가족모델에 안정감을 갖는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과제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안전하고 의지할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사람과 애착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초의 임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알만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역할은 어머니가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 번째 과제는 사랑과 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분리된 독창적인 개인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것을 때때로 “개별화”, 즉 “나를 나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두 번째 과정의 성취 능력은 부모와 환경에 결속하는 첫 번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안정감을 경험했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가정의 개념은 언약이라고 하는 고대 개념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언약이란 당사자 각자가 신의를 지킬 것을 완전히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서약하는 관계형태이다. “일방적으로”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계약이나 협약에서 각자는 상대방이 “거래를 끝까지 지키는 경우에만” 그 관계에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만일 상대가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내 편에서도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은 다르다.

 

언약적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언약을 이행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각자에게는 자신이 충족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의 이해를 끌어낼 만한 것이 바로 결혼과 부모 자녀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두 가지 언약이 교차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수평적” 언약,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수직적” 언약. 역기능 가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역기능은 언약적 사랑의 결속, 특히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결속이 손상을 입거나 깨어진 상황을 말한다. 그러한 붕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깨어짐의 악한 영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가 이 책의 주제이다.

 

2장 가족 시스템

가정은 단순히 어쩌다가 같은 성과 주소를 쓰는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가정은 그 속에서 각자의 태도와 가치, 행동이 다른 모든 일원들과 상호 작용하는 유기체이다. 각자는 상대방을 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 형성된다. 부분적으로 각자가 행동하는 방식은 전체적인 조직, 즉 시스템에 적응된 방식이다.

개개인의 병적인 행동방식은, 분명히 어느 정도까지는, 가정에서 그들이 떠맡은 역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가족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맡겨진 역할에 대해 이해한다면,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감정과 행동을 열어볼 수 있게 된다.

 

고도의 역기능 가정에 있어서는 대체로 속죄양이 나타나곤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투사하는 대상이다. 즉 평범한 가정의 지극히 삐뚤어진 “문제아”의 경우, 그는 가족들의 문제를 환기시키고 주의를 다른 데로 끌게 하는 속죄양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가정은 변화한다. 무엇이 가정을 변화시키는가?

가족이 이전과 달라지도록 자극하면서 가정생활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은 많이 있다. 가족의 역사마다 자연스러운 “전환점”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첫아이의 출생, 그리고 그 후 연이은 자녀들의 출생, 맏아이의 입학, 졸업, 혹은 출가, 부모들의 은퇴, 부모의 죽음 등. 이러한 발달 과정은 가족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상황을 바라보는 가족의 관점이 변화되도록 자극한다. 문제는 이렇게 가족이 변화해야 하는 시점이 바로 스트레스 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쉽게 적응하는지가 그 가정이 건강한지, 아니면 역기능적인지 가늠하는 주된 척도가 된다.

 

가족 시스템에는 일종의 관성이 있어서, 지금까지 항상 해오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족 시스템은 외부의 압력을 견뎌내고 그것에 적응하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수치감에 묶여있는 가족은 고착된 모습을 띄며 변화에 대해서도 매우 저항적이다. 그러한 변화는 삶의 자연스러운 현실인데도 말이다. 이 시스템은 부서지기 쉬운 땅콩과 유사하다. 각 사람은 상투적인 모습, 융통성 없는 역할과 관계에 서로 매여있다. 어느 한 순간 완고한 시스템에 힘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변화가 일어나면, 그 시스템은 붕괴되거나 분열되기도 한다.

 

가족을 역기능적인 패턴에 묶여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한가지 주된 요소는 관성이며, 다른 하나는 가족 비밀이다. 가족 비밀은 과거에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것이다. 가족 비밀은 거실에 코끼리를 들여다 놓는 것과 같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신은 절대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 한가지 있다는 것을 습득했다. “왜 우리집 거실에는 코끼리가 있죠?”라는 질문이다. 친구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물으면 올바른 대답은 “무슨 코끼리 말이야?”이다. 코끼리가 성장함에 따라 당신은 코끼리 등에 전등과 레이스를 올려놓고 마치 그것을 가구의 일부인 것처럼 취급한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더 이상 거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당신은 코끼리에 관해 절대로 질문하거나 언급해서는 안된다.

가족 비밀의 반대는 가족 신화이다. 신화는 말은 하지만 결코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가족 신화에서 나타나는 무언의 합의는 상황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한다. 가족 누구에게 물어보든 거의 대부분에게 제일 먼저 듣게 되는 것은 가족신화이다.

 

가장 일반적인 가족 신화는 “우리 가족은 매우 친근해요”이다. 혹은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위했습니다” 등인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상은 친근함이나 따스함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 묘사된다.

비록 고통스런 일이긴 하겠지만, 자신이 신화 속에 살고 있었던 것에 대한 깨달음은 회복의 열쇠가 된다. 신화는 역기능 가정을 병적인 패턴에 묶여 있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신화를 직면하고 배후에 있는 진실을 폭로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바뀌지 않고 이전 그대로 있을 것이다.

 

 3장 가족과 나

 

*건강한 가족의 특징

 

1. 균형이 있다 : 변화에 대해 잘 적응한다.

2.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가족 차원에서 다룬다.

3. 세대 간에 견고한 결속이 있다.

4. 개개인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유지된다.

5. 가족들은 서로 문제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6. 차이가 수용되고 격려된다.

7.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수용한다.

8. 각 사람은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9. 긍정적인 감정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시 한다.

10. 각 가족들이 가정을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한다.

11. 각자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피드백을 장려한다.

12. 개개인이 자신의 공허감을 경험하는 것을 허락한다.

 

가정 생활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두 개의 척도가 있다. 한 가지는 유연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애착성과 관련된 것이다.

 

-완고한 가정

완고한 가정은 매우 권위주의적인 가정이다. 지도력은 분명하게 정의되고 인식된다. 누가 대장인지, 어떤 규칙이 있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규칙들은 매우 구체적이며, 그 수나 범위에 있어서 거의 끝이 없다. 대개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규칙을 어길 경우에는, 신속하고 단호한 처벌이 따른다.

 

-혼란한 가정

여기에는 리더십 스타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의 모순된 표현이다. 전통적으로 혼란한 가정에는 실질적인 리더십이 전혀 없다. 각자는 자기 자신이 법이다. 일관성 있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설사 리더십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규칙은 변변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며 대개 명시되어 있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그 순간에 우연히 “권좌에 앉게 된” 사람의 마음대로 아무런 경고 없이 규칙은 바뀐다.

혼란한 가정에서는 자녀를 키우고 훈계하는 것이 매우 변덕스럽다. 어떤 경우에는 행동의 결과가 추궁되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녀들에게 한 말을 잊기도 한다.

 

-유연한 가정

완고한 가정과 혼란한 가정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는 유연한 가정이다. 유연한 가정은 명확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리더십과 건강하면서도 조절이 가능한 훈계가 있다. 가정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분명하며 리더는 또한 언제나 다가가서 말할 수 있고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가 정직하게 거론되며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 결정은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차별 없이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의 입장을 반영한다.

 

-밀착된 가정

서로에게 지나치게 엉켜있어 한 사람의 경계가 어디서 끝나고 다른 사람의 경계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밀착된 가정은 극단적인 친근감이라는 특징이 나타난다. 너무 지나치게 친근하기에 독립적인 표현이나 개별적인 행동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종류의 거짓 충성심은 밀착된 가정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는 가치 기준이다.

 

-이탈된 가정

정서적 결속이 극단적으로 결핍되는 특징을 가진다. 이탈된 가정은 밀착된 가정과 달리, “친근감”이나 “충성”에 대해 그다지 격찬하지 않는다.

이탈된 가정은 독립성과 가족 외부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대개 자기 가족들의 계획이나 활동에 대해 아는 것보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 대해 더 많이 안다. 이탈된 가정에서는 가정 외부에서는 때때로 경계선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경계선이 유연한 반면 가정 내부에서는 경계선이 매우 엄격하게 집행된다.

 

-애착된 가정

밀착된 가정은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고, 이탈된 가정은 개개인에게 고립감을 남기는 반면, 애착된 가정은 건강한 균형감각을 느끼게 한다.

결속감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개성을 유지할 수 있다. 애착된 가정에서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숨겨진 협의 사항이 없이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상호 존중이 있다. 각자의 독특성을 지원하며 서로의 재능에 대해 감사함을 표현하면서 결속된다.

 

4장 아비의 죄

 

가족 시스템이 역동 관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도구 중의 한 가지는 가계도라 불리는 것이다. 가계도는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가정의 관계적, 정서적 측면을 도식화한 일종의 확대된 가족 계보이다. 가계도를 통해 드러나는 중요한 가족 역동 관계는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이것은 가족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 반복되는 개개인의 특징이나 관계 역학을 의미한다.

알코올 중독과 동반 의존성은 일반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부분적으로는 알코올이 유전인자를 통해 전수되는 생물학적 요인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친구나 배우자로서 알코올 중독자에 집착하는 취약성을 심화시키는 태도적, 행동적 패턴도 작용하는 것이다. 간음, 유기, 학대, 이혼 등은 모두 때때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패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들은 가계도를 사용함으로써 분간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가족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패턴을 더 쉽게 반복하거나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에 반항하기만 할 것이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자신이 다른 가족 구성원과 어떻게 유사하며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해야 자기의 삶을 가장 잘 걸어 나갈 수 있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가족 패턴에 대한 예를 성경에서 들어보자.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것이다. 몇 년동안 아이를 가지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있다. 좌절에 빠진 사라는 당시 관습에 따라 여종 하갈을 취해 아이를 낳으라고 아브라함에게 제안한다. 그리고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그러나 사라는 몇 년 뒤 아들을 낳았고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 사실상 두 아이의 부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라가 이스마엘을 거절하기 시작하면서 곧이어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여기서 후손들에게 반복되는 패턴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부모가 편애를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서, 부모는 누구를 편애할 것인지 동의한다. 이삭은 사랑 받고 이스마엘은 거절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라로부터 정서적으로, 그리고 나서는 사라와 아브라함 양쪽으로부터.

 

이제 다음 세대를 살펴보자.

이삭은 리브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결혼했고 리브가는 쌍둥이 에서아 야곱을 낳았다. 그의 이복형을 쫓아내는 비극적 결말을 낳았던 “편애가 난무하는” 가정에서 성장한 이삭은 이러한 파괴적인 역학관계에 빠지지 않으려고 상당히 경계했겠지만 그도 결국 같은 문제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기 시작한다.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한다.

 

이삭은 자신의 가정에서 건강하지 못한 역동관계가 생겨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하고, 또 정말 그랬다는 증거도 없지만 이삭의 가정에는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규칙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경우에든 편애주의는 가족을 분열시킨다.

이제 야곱의 가정에 대해 가계도를 그려보자.

 

야곱의 결혼 과정은 다소 복잡했다. 그는 삼촌의 속임으로 레아와 라헬 두 사람과 결혼했고 그 여종들까지 합해 네명의 아내에게서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 이 편애의 패턴은 야곱의 가정에서 또 반복된다. 그의 두 아내는 남편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했고, 이 경우에 라헬은 야곱이 가장 좋아하는 아내였으므로 야곱은 라헬이 처음으로 낳은 아들 요셉을 가장 총애하는 아들로 삼았다.

 

아브라함의 가계도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각각의 세대에서 아들 중의 한 명은 가정을 떠나야만 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라의 질투로 인해 강제 추방되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질투 때문에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노예로 팔려갔다.

 

또한 각각의 결혼한 배우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자녀들과 제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등을 돌리고 이삭과 제휴한다.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에게 등을 돌리고 에서의 편에 선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 등을 돌리고 요셉과 제휴한다. 각각의 세대에서 이전 세대의 가족 역동관계에 뿌리를 둔 문제를 어떻게 경험하고 볼수 있는가? 이것은 통상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가계도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도록 도움을 준다.

 

 

제2부 용서의 자유

 

6장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풀어주기

 

충동적 행동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묻혀져 있는 고통이다. 고통이 속에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자신이 그로 인해 더 이상 어렵지 않은 것처럼 가장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참는 것만이 해답이 아니다. 당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용서는 사이클을 깨뜨린다. 용서한다고 해서 비난, 정의, 공평의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용서는 종종 그러한 의문을 회피한다. 그러나 용서는 관계가 다시 시작되도록 허락한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용서받은 경험에서 흘러나온다.

 

많은 경우에 누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는지는 주된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도 주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주된 문제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만일”이나 “때까지는”과 같은 조건이 없다. 용서는 우리 자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대상이 그 사실을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의 용서에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자유롭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용서의 과정을 어떻게 거쳐나갈지 살펴보자.

 

 

용서에는 여섯 가지의 중요한 단계가 있다.

 

1. 손상을 인식하라.

-과거에 내게 행해진 잘못과 상처를 기억해내라.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은 핵심적인 첫 단계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라. 그 목적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단계들을 이해할 기초를 놓기 위한 것이다.

 

2. 연관된 감정을 파악하라.

 -대부분 세가지 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두려움과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그것이다. 대개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성인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종종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으로까지 흘러들어온다. 죄책감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에 관련이 있고 수치심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련이 있다. 뭔가 잘못을 범하고 그것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것은 죄책감이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 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 우리는 죄악된 행동이 수치스러운 자기 정의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분노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손상을 당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상담을 할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눈이 열려 진실을 볼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용서의 과정을 더욱 수월하게 한다.

 

 3.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라.

 -만일 당신의 위속에 유독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당신은 그것을 제거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현한다”는 단어가 실제로 뜻하는 것이다. 자신의 파괴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게 표현할 때 파괴적인 감정은 “우리의 시스템에서 빠져나가” 더 이상 우리를 오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4.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선을 설정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경계선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특별히 어려운 순간을 헤쳐 나가는 동안 좀 더 많은 공간을 허락해준다. 그러나 영구적인 경계선도 있다. 그러한 경계선은 우리의 가족 시스템의 역동관계 속에서 더 영구적이고 나은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5. 빚을 청산하라.

-이제는 용서해야 할 시간이다. 자신의 상처와 감정들을 처리해 나가면서 아마도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뭔가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유용한 경험이다.

 

6. 화해의 가능성을 고려하라.

-앞에서 우리는 용서는 일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협조하지 않거나 우리가 용서한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화해는 다르다. 화해에는 양쪽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내가 화해하기를 원해도 상대가 거부한다면 나는 오직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7장 용서하기, 잊기, 부인하기, 수용하기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해로운 일 때문에 생긴 고통을 없애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길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일들의 기억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되는 사건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상처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실제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상관없이 과거의 상처로 인한 해로운 영향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게 마련이다. 사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아야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히는 과거의 힘을 짜내 버리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 대신 잊으려고 노력할 때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부인”이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역기능 가정의 성인아이들에게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론 그것 역시 부인의 한 형태이다.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는 수용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것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억하고 있다 할지라도 용서한다는 사실에 능력이 있다. 만일 정말로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피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슬퍼하는 것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 애통은 치유이다. 애통은 우리의 쓴뿌리를 놓아 보내고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정서적인 차용증서를 청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이 더 이상 이전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말이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저기서 반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 그것이 기억하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수용하고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8장 표면적인 용서

 이제 우리는 결정으로서의 용서를 과정으로서의 용서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결정으로서의 용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감정적인 “빚”을 붙들고 있지 않겠다는 선택을 의미한다. 과정으로서의 용서는 우리에게 행해진 일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때까지 자신의 내적 반응을 철저히 다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는 상황에서는 회개와 용서 양쪽 다 표면적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회개에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그 선택권을 제시한다. 우리는 표면적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쓴뿌리와 적개심으로 끝이 나고 만다. 반대로 진정한 용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 바람직하게 형성하는 길이 된다.

 

 9장 분노는 용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당신은 다음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분노가 없다면, 용서는 대부분 표면적이다.” “진정한 용서는 거의 언제나 분노를 수반한다.”

분노와 용서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다루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종종 분노를 처리하는 작업은 용서의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단계인 것이다.

 

분노에 관해 혼란스러운 개념들이 많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조금 짜증난다” “기분이 언짢다” 또는 “기분이 상했다” 등으로 말한다.

우리는 올바르게 말하지 않으면서 갈 데까지 가다가 “나는 정말 화가 나 미치겠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미치도록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 그 자체로는 잘못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 그 자체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표준 장비”의 일부분이다.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건강하고 병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분노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그릇되게 사용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합당한 이유도 없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시 화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건강하지 못한 분노는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분리되게 만든다.

 

그러나 분노는 어떤 장애나 도전을 극복할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우리가 사람들과 경계선이나 한계를 설정할 필요를 느끼도록 경각심을 주기도 한다. 분노는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분노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은 건강한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부분이다. 분노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나 자신의 분노를 마음에 쌓아두는 데 전문가인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것을 미덕이 아니라 문제로 인식한다.

만일 자신의 분노를 대인관계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적인 차원에서라도 분노를 처리해야 한다. 우리 내면이 독으로 곪지 않도록 분노를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말이다. 감정을 글로 쓰거나 친구들과 나누고 자기 자신에게 소리내어 말할 수 있다.

 

강력한 감정을 무시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기서 의식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억압된 분노는 그와 같다. 당신은 마치 분노가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재되어 있다. 뭔가 처리하기 전까지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울증이나 쓴뿌리, 불신, 자기 연민, 불안, 비판적 태도, 적개심 등의 형태로 새어나올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특히 적개심은 기회가 오면 자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에게 앙갚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우리 속에 짊어지고 있는 독극물과 같다. 실제로는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이 독극물은 우리 자신에게 극도로 위험을 준다.

 

  10장 비난게임

때때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좌절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킨다. 그들은 짜증을 내고 무례하게 행동한다. 그들의 적개심은 그들 자신의 자유를 파괴하고 만다. 그들은 심술궂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적개심의 독이 그들의 시스템에 철저히 스며들게 된다. 이것이 비난게임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비난게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로 끝맺게 된다.

비난게임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비난은 우리를 문제의 수렁에 영원히 빠져있게 만든다. 비록 우리가 옳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용서의 과정에서 먼저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난과는 차이가 있다.

 

비난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건강하게 반응하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비난 게임은 스스로 자기 연민의 파티를 벌리게 하면서 우리의 쓴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지게 만든다. 용서의 길을 걷는 것은 많은 단계를 거치는 여정이다. 비난 게임을 포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용서의 길을 이탈하지 않고 쓴뿌리와 적개심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얻을 것이다.

 

  11장 직면, 복수, 화해 

용서와 화해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용서는 일방적이다. 용서는 전적으로 우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는 상대방의 참여를 요구한다. 우리는 화해가 없이도 용서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원상복귀”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어떤 불가능한 보상을 해야 하거나 어떤 건강치 못한 방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충동으로 갈등하게 될지도 모른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보상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절대로 보상을 통해서 용서를 획득할 수는 없다. 용서는 사랑의 행위로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겸손의 행위로서 값없이 받는 것이다.

화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반드시 직면이라고 하는 주제가 등장하게 된다.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가족 비밀, 가족 신화, 부인이라고 하는 산더미에 묻혀왔던 심각한 학대 행위들은 당사자에게 직접가서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직면하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고 직면이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점검해야 한다. 동기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보복이나 앙갚음의 충동, 원한, 앙심이 있다면 뿌리를 뽑는 것이 중요하다.

그릇된 행동이 피해가 막심할 때는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사소한” 상처라 할지라도 신중하게 직면한다면 유익이 될 수 있다.

 

  12장 부모를 용서하기, 나를 용서하기

만일 자신의 부모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증오로 갈등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만일 부모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용서의 과정을 거쳐나갈 때, 우리는 자기가 받은 상처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대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찾아낼 필요가 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기대들이 부적합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용서는 자신의 고통을 다루는 작업 뿐 아니라 회개도 필요로 한다.

기대에 대한 사고 방식과 마음가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 아무리 쓰라리게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충분하다. 그분의 용서는 부족함이 없다.

 

 용서는

“나는 인간이다, 나는실수한다.나는 그런 특권을 부여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 특권을 당신에게 부여한다.”

  

   고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거칠 때 흥미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죄책감이나 수치감이 없이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중요한 것들을 말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불완전하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비현실적인 기대들을 붙들고 있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그대로 살아가는데실패한다.

 

  우리가 이것들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믿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분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 밖에 더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한다.

   내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미래에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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