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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성화 보기

by 은총가득 2024. 1. 30.

독창적 성경해석 드라마같아 매우 극적인 느낌

성화 이삭! 순종 단호함과 인간적 부성의 동시성

성화 씨름! 천사 포용적 자애심 야곱 필사 혈투

 

벨사살! 오만한 왕 최후 삶과 죽음 비극적 연출

갈릴리 폭풍! 절체절명 순간 교차적 일말의 희망

탕자 모든 것 잃은 아들 감싸는 부성의 무한성

 

 

 구약과 신약 모두 그린 화가 렘브란트가 유일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아버지는 엄격한 칼뱅파 개신교도였다. 부모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렘브란트는 틈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렘브란트는 잠시 다니던 고향의 레이던(Leiden) 대학에서 라틴어를 공부해 법률이나 성경 연구의 시간을 마련했다.

 

미술 역사상 구약과 신약을 모두 그린 화가는 렘브란트가 유일하다. 렘브란트는 기독교적 테마가 급속히 쇠락하는 시대 상황에서도 유화 160, 에칭 동판화 80, 드로잉 6백점 등 총 9백여 점의 성화를 그렸다.

 

렘브란트의 성화(聖畫)는 매우 독특하고 무척 인상적이다. 렘브란트는 신구약 성화에 있어서 그의 독창적인 성경해석을 통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렘브란트의 성화는 성경과 역사 속의 이야기를 바로 드라마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매우 극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렘브란트의 성경 속 작품 색채는 붉은색과 갈색이 주를 이루었고 고독한 인물들의 쓸쓸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구약! ‘이삭의 희생’(The Sacrifice of Isaac, 1635)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인 만큼이나 그의 생애에는 일어난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100세의 아브라함과 99세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는 사연은 신의 은총의 힘을 다시 생각게 한다. 이는 무척 행복한 일이지만 이어 일어나는 이삭의 희생을 요구 당하는 사정에 이르면 우선은 당혹스러워진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과단성 있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다.

 

렘브란트의 성화 이삭의 희생은 창세기 22장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1-12)

 

이 성화는 1635, 그의 나이 30세에 그렸다. 얼굴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렘브란트의 손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단호함과, 그래도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부정(夫情)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찰나를 잡은 숨 막히는 듯 한 묘사가 압권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이삭은 꼼짝없이 뒤로 묶여 있고, 아브라함은 손으로 그의 입과 턱을 틀어막고 있다. 젖힌 목에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천사가 그 손을 붙잡았고, 놓친 칼은 그 다급함을 보여주듯 공중에 떠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아브라함의 표정인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말리는 천사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다.

 

 

 

 

 

 구약!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es with the Angel, 1660)

 

1660년경에 그린 렘브란트의 성화 작품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창세기 32장이 배경이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 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22-28)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아내 넷과 아들 열둘, 딸 하나를 얻은 후 형 에서가 사는 곳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브니엘’(Peniel)이란 곳에 머물렀다. 야곱은 장인 라반에게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형 에서를 만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야곱은 수십 년 전에 형을 속여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고, 형의 보복이 무서워 고향을 등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면 렘브란트가 야곱과 천사가 씨름하는 장면을 단순하게 그린 것 같지만, 두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그는 성경을 심리적으로 재해석했다. 야곱의 표정을 보면 마치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수심에 가득 차 있으며, 의기소침해 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다.

 

그런데, 힘센 야곱을 상대하는 천사의 표정은 의외다. 천사의 얼굴엔 밤새 씨름을 하느라고 힘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긴장된 모습은 천사에게서 찾을 수 없고, 사랑스럽고도 슬픈 표정이다. 야곱을 가뿐하게 끌어안은 천사의 애정 어린 포옹은 오히려 측은지심의 얼굴이다. 천사의 조용하고 의연한 태도에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확고한 제압 사랑스런 포옹의 융화(融和)를 읽어낼 수 있다.

 

야곱은 씨름을 통해 이스라엘(Israel)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스라엘의 어미 엘(El)은 신을 뜻한다. 히브리어로 신과 싸우는 자란 뜻이다. 성경 구절에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했으니, 상대가 하나님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어찌 인간이 하나님과 싸울 수 있겠느냐며, 야곱의 씨름 상대가 주님의 천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구약! ‘벨사살의 향연’(The Feast of Belshazzar, 1639)

 

렘브란트의 1639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성화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5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빌론 왕국 최후의 왕 벨사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성화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이었던 벨사살은 부귀와 사치 속에서 오만함을 감추지 못했던 인물이다. 벨사살 왕이 왕궁에서 고관들과 외국의 사신들을 거느리고 큰 연회를 벌리면서 금은동철이나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는데, 돌연 손 하나가 나타나 손가락으로 왕궁 벽에 광채 찬란한 글자를 쓰고 있음을 보고 왕은 새파랗게 놀라고 기겁을 한 시녀는 술잔을 쓰러뜨린다.

 

놀란 귀족들은 비명을 지를 엄두 조차내지 못한다. 겁이 난 왕은 예언자 다니엘을 불러 이상한 글자를 풀어 보라고 명령하자,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보시고 마감하셨다는 신의 계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다니엘이 해석한 그 글자의 의미는 당신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벨사살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렘브란트의 이 성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냉혹한 빛과 어둠으로 화폭을 갈라놓았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는 이 극적인 공포의 순간을 포착하여 실감나게 빛과 어두움의 효과를 이용하여 숨 막히는 장면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 빛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다. 명암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가파른 교차점이다. 세 사람의 눈동자가 커졌다. 벨사살이 제일 크다. 섬광처럼 빛나는 글씨는 주변의 어두운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며 비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신약! ‘갈릴리 호수의 폭풍과 그리스도’(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갈릴리 바다의 폭풍과 그리스도는 렘브란트가 1633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마태복음 8장에 배경을 두고 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 8 23-27)

 

이 성화는 렘브란트가 그린 유일한 바다풍경이다. 그림속의 풍경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지만 예수와 12제자 외에 한명이 더 그려져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그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비바람으로 제 정신이 아니다. 거센 파도가 배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처럼 달려들고, 도저히 힘을 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돛은 심한 바람에 찢겨나가 침몰 직전이다. 배의 상단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놓친 밧줄을 잡아볼까 안간힘을 쓰고 기둥에 모여 있는 네 명은 파도에 못 이겨 물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제자 중 몇 명은 예수께 달려간다. 그리고 주무시는 예수를 깨운다. 체면이나 공손을 차릴 겨를이 없다. 그들의 바램은 오직 하나! 애타는 구조의 손길이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짧고 분명하게 외쳤다.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태복음 8:25)

 

이 그림의 엇갈리는 구도에서 빛과 어둠의 대칭 배분은 인간의 삶속에 갑자기 닥친 폭풍의 절체절명 순간 앞에 인간의 참담한 무기력함과 일말의 희망을 붙잡으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인간의 고뇌를 잘 보여준다.

 

 

 

 

 신약!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이 그림의 주제는 한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객지로 떠돌며 환락과 유흥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먹이로 끼니를 때우다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를 구한다는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복음 15:11-20)

 

렘브란트는 지나친 낭비벽으로 파산한 말년에는 아들에게 생활비를 의존해야만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렘브란트는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된 말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1669년의돌아온 탕자이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최후의 미완성 성화 중 하나로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에 자신이 걸어온 삶을 담아냈다.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 검은 모자의 콧수염의 사나이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두 여인을 살펴 볼 수 있다. 기둥 뒤에서 내다보는 한 여인이 중앙 상단에 있다. 그리고 왼쪽 위쪽에 약간의 형체만을 드러내는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쉽게 알아볼 수 없다.

 

사랑에 충만한 늙은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그리고 자비로운 손길을 밝은 빛으로 비쳐 강조한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손가락들이 펼쳐져 있고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싼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양 손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왼손은 가늘고 길다. 반면 오른손은 넓적하고 커 보인다. 그래서 왼쪽 손은 여성성이고, 오른쪽 손은 남성성이다. 하나는 섬세한 사랑을, 다른 하나는 넓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작은아들의 헤어진 옷과 신발에서 그 삶이 비참했음을 읽을 수 있다.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다. 샌달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달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오른쪽의 단도는 왜 차고 왔을까. 이 단도는 바로 신분을 표지한다. 자신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 집에서 가지고 나간 그 모든 것을 다 처분하였지만, 최악의 순간까지도 이 작은 단도만큼은 팔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으로 인한 지난 날의 괴롭고 복잡했던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사랑과 포용의 손길로 아들의 등을 어루만진다.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은 깊은 품위와 함께 숭고한 미를 극대화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