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리겐
● 3세기 전반기에 기독교계에서 가장 훌륭했던 학자이자 수도가이며 순교자였던 오리겐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후 185년경,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헬라인 부모 아래서 태어나 양친으로부터 부드러운 사랑의 보살핌과 신앙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자랐다.
그의 부친 레오니데스의 가정교육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세심한 것이었다. 오리겐의 부친은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조숙한 아들의 면모를 엿보고서 그에게 자세한 성경 지식 습득 기회를 비롯해 훌륭한 성경 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클레멘트라는 뛰어난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는데, 오리겐은 그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겐이 17세 때 세르비안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때 그의 부친은 참수형을 받고 순교를 당하였다. 당시 오리겐은 투옥되어 순교의 위기에 처한 부친께 편지하기를, 절대 가족들 때문에 풀려나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지 말고 순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시라고 권면하며 ‘장차 천국에서 만날 것을 고대하며, 아버지와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를 사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로, 그가 받은 신앙교육은 철저한 것이었다.
오리겐 자신도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였으나, 그의 어머니가 오리겐이 너무 어린 나이에 순교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꼭 순교하는 것만이 참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만류하였고, 오리겐을 발가벗겨 방에 가두고 옷을 숨겨버려 순교를 막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친이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6명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살림이 어려워 처음에는 귀부인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신학공부를 했으나 그뒤 스스로 문법을 가르쳐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순교자의 자녀이자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부친이 순교한 이듬해인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스승 클레멘트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 학교를 관장하게 된다. 그는 새신자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외부로부터 즉 유대와 이방인 사회로부터 오는 공격은 물론 내부로부터 오는 이단들의 주장에도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헬라 철학은 물론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된다.
오리겐은 그의 무쇠 같은 근면으로 말미암아 ‘철의 사람’이라 불렸다. 그는 철저한 정신적 예리성과 지칠줄 모르는 인내로 금욕적인 기독교 신앙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탁월한 재능과 보기 드문 교수 능력, 그리고 그의 거룩한 행실은 그의 청강생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으며 이미 부친이 순교 당할 때, 순교자들을 도왔던 용기와 뚝심은 기독교인들로부터 높은 평판과 큰 위엄을 얻게 했다. 이로써 그는 학문 활동의 긴 여정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중에는 가이사랴에서 연구했으며 여러 면에서 전임자들을 능가하였다.
오리겐의 금욕주의는 당시의 초기 교회에서는 유명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가 일상 생활에서의 신앙 훈련에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했는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있다. 그가 마태복음 19:12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고환을 거세하였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오리겐은 자신이 관할하는 학교에서 젊은 여인들을 가르치면서 이방 세계에 하등의 추문거리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오리겐은 젊음의 정욕을 끊어버린 자였으며, 낮에는 엄숙한 모습을 보이고 대부분의 밤은 성경연구와 기도로 지새웠다고 한다. 그가 잠을 잔 곳은 마루바닥이었다. 오리겐은 자주 금식하였으며 음식을 빈약하게 먹었고 맨발로 걸어다니며 건강을 거의 파괴하다시피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고 후에는 가이사랴에서 교사로 있는 동안 받은 사례비도 지극히 적은 것이었다고 한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 역시 그의 종교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러한 면은 그의 일부 저술에서 엿볼 수 있다. 아가서 주석에서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배우자로 묘사하였다.
오리겐은 또한 신앙에 관한 완벽한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명상함으로써 영적 생명에 진보를 이룩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한 영적 명상이, 신자로 하여금 기독교적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어떤 시각을 영혼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기독교적 삶은 영혼을 순결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한편으로 하나님에 관한 명상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오리겐은 정열, 헌신, 학식, 비범한 지적 능력을 과제로 삼았다. 그는 금욕주의적 생활 양식을 따랐고 평범한 교리학습자를 가르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 세속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고급 수준의 반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별로 저작활동을 펼치지 않았지만 점차 쓰는 것이 많아졌다.
그는 쉴 새 없이 힘써 일했으며 제롬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한평생 읽어도 못 다 읽을 만큼 많은 책'을 저술했다. 어떤 사람은 편지와 논설 등을 포함하여 그의 저술이 6000여 편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헥사플라, 열 권의 주석, 제 1원리(조직 신학에 관한 최초의 저술) 및 가장 유명한 변증서인 켈수스 논박 등이다.
● 230년경 팔레스틴을 다시 여행하게 되었다. 이 여행중에 박해를 피해 왔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친구들의 권유에 의해 장로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감독 데미트리우스는 자기와 상의도 없이 외부에서 장로 안수를 받게 되자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 문제가 결국에는 두 사람사이의 감정 문제로 비화되었다. 데미트리우스는 오리겐이 돌아오자 그의 위치에서 오리겐을 탈락시켰다. 교리문답학교의 교사를 박탈했으며, 안수까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오리겐은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오리겐은 이집트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결국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따랐다.
그는 비록 비판을 받지만 성경연구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는데 약 2천권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헥사플라[성경을 6가지의 역본으로 기록하여 해석하고 연구하였던 그의 저서]를 저술하는 등, 금욕적이고 순교자를 지향하는 수도원적인 영성의 기초를 놓음과 동시에 맹목적인 신비주의가 아닌 지성과 영성을 하나로 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했던 천재성을 지닌 영성의 태두였다.
오리겐의 사상은 오늘날의 교리로 보면 많은 문제점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교리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참작해 보면 그의 주님을 향한 구도자적인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진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소원하였고 결국 순교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고자가 된 구도자 오리겐, 그는 오늘날 그저 외적으로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 목사들에게 훌륭한 스승이 아닐수 없다.
● 기독교 역사에서 오리겐 (184년- 254년) 만큼 찬양과 비판을 동시에 받는 사람도 드물다. 오리겐은 초대교회의 큰 사상적 줄기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좌장으로 많은 신학적 업적을 남기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후 역사가 170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존경의 대상이고 그의 신학 역시 연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사후 200년이 지날 무렵에 교회 회의가 그의 사상의 일부분을 이단적 내용이 있는 것으로 정죄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의 사상을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때 그의 이름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되었고, 그의 저서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 되기도 하였다.
오리겐의 삶은 아버지의 순교 이후에는 살아있는 순교의 삶이 되었다. 그의 노년기가 되는 251년 데키우스 황제 때 체포되어 순교의 길로 갈 기회가 생겼지만 모진 고문 끝에 풀려 나와 몇 해를 더 살다가 하나님께로 갔다. 결국 평생 소원이던 순교의 길을 육체적으로는 이루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삶은 사실 순교의 삶이었다. 심지어 생활 방편으로 한 철학 강의도 단지 경제적 목적만이 아니라 순교와 연관이 있었다. 철학 강의를 통해 전도를 하였고, 전도를 통해 교인이 된 제자들 여러 명이 순교의 길로 가게 되었다.
오리겐 자신은 교회에서 세례문답을 가르치는 교사로 그리고 장로로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교훈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젊은 날의 육체적 정욕을 피하고자 맨 땅에서 잠을 자는 훈련으로 시작해 결국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 오리겐은 극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순교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오리겐이 이렇게 순교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또는 신학적으로 협소한 교리주의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대교회사에서 오리겐 만큼 성서의 세계를 철학의 세계에 연결해 그 범위를 넓힌 사람이 없다. 오리겐이 이렇게 순교적 신앙과 열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버지가 베푼 교육의 힘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철학과 동시에 성경을 가르쳤다. 성경을 정독하고 암송하도록 했다. 어려서부터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보다 깊은 의미에 대해 아버지에게 질의하여 측량할 수 없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어렸을 때 이렇게 성경을 암송하고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오리겐 평생의 작업이 되었고, 이 작업에서 얻은 영적 열매는 그의 영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점이 오리겐의 영성을 오늘 다시 배워야하는 이유가 된다.
● 오늘날 흔히 우리는 '영성'하면 다른 종교의 실천적 프로그램도 마다 않고 관심 있어 하면서 정작 우리의 영적 삶의 원천인 성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을 본다.
오리겐의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은 성서 안의 영성, 성서를 통해서 얻는 영성이었다. 오리겐은 성서에서 영적인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 두 가지 길을 모색하였다.
첫 번째 길은 성서 원문에 대한 치밀한 연구였다. 소위 '영적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 원문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데 반해, 오리겐은 철저한 원문의 복원이 성서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길임을 믿었다. 그는 Hexapla라고 부르는 6개국어 대역 성경을 만들었다. 당시에 구약성경은 70인역으로 보고 있었는데 오리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히브리어 원문에다 다른 헬라어 번역본을 대조해 6개의 칸을 만들고 각기 6개 언어의 성서를 나란히 기록하였다. 이 작업을 위해 무려 27년을 보냈다. 오리겐은 Tetrapla라고 불리는 4개국어 대역 성경도 만들었다. 그는 성서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배웠고 오늘날의 용어로 쓴다면 성서 고고학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어 고대 사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두 번째 길은 성서 해석을 통한 길이었다. 이미 어려서부터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 뒤에 있는 의미를 질문해 왔던 오리겐에게 해석에 대한 길은 영적 원천에 이르는 핵심적인 길이었다. 성서 해석에는 문자적(역사적) 해석, 도덕적 해석, 영적 해석(allegorical)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서의 어떤 구절은 문자적인 의미만 파악하면 되는 반면, 어떤 구절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오늘날에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알레고리 해석의 주인공이 바로 오리겐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알레고리 해석은 오늘날 문제되는 알레고리 해석과 (실은 자의적 해석) 다르다. 오리겐은 성서의 계시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도록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여러 차원으로 주어진 것은 인간 삶의 깊이가 여러 차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문자적인 뜻으로 알려지지 않는 구절들은 더 깊은 연구를 통해 그 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성령이 성서의 저자임으로)를 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이 더 깊은 연구가 알레고리이다.
오리겐 영성의 두 번째 특징은 성서를 통해서 얻은 영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열매를 보여야함을 강조한다. 오리겐은 기독교인은 두 종류의 교인, 즉 대부분 교인이 보통의 신자이고 소수의 영적으로 진보된 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영적으로 진보된 자로 구분한 것 때문에 간혹 학자들은 오리겐이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 간신히 구원받을 만큼만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헌신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럼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인가. 순교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 즉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사람이 가장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자기처럼 육체적으로 순교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덕주의(asceticism)로 일상 생활에서 영적으로 순교하며 사는 것이 영적으로 완전에 이르는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것이 있다. 오리겐도 그렇지만 초대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완전에 이르는 길을 신비주의로 이해했어도 이 신비주의는 일상 생활에서 착하게 사는 일(덕스럽게 사는 일)을 의미했지 일상 생활을 벗어나 비사회적이고, 비이성적인 체험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십자가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덕스럽게 사는 일로 십자가의 삶에 참여하게 되고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경험했다. 덕스럽게 산다는 일은 남들에게 최대한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는 일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하게 훈련하고 절제하는 산다는 것을 뜻했다.
'영성'이 유행이고 다른 종교의 실천적 프로그램도 무분별하게 교회 안으로 도입되는 시점에서 오리겐의 영성을 배우는 일은 기독교 역사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되돌아감이 바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기독교 영성, '성서와 삶'을 배우게 한다.
●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을 당하자 하는 수 없이 가이사랴로 가서 자신의 두 번째 경험을 갖게 된다. 목회 뿐만 아니라 여러 문학 활동을 아울러 했다. 아마도 그곳의 경험 가운데 거의 3백여 편의 설교를 썼다. 오리겐은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막시미누스(235-237)의 핍박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잠시 피했다. 240년에 그는 아테네로 여행했고, 244년 아라비아로 여행했고, 그 후 보스트라 감독 베릴루스를 방문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250-251)의 핍박으로 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거의 죽게 될 정도에 이르렀는데, 그 후 고문 결과 로마제국 황제 갈루스 시기, 즉 254년이나 255년에 69세의 나이로 베니키아의 두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오리겐의 7가지 큰 죄
1)음욕 2)탐식 3)인색함 4)분노 5)시샘 6)교만 7)나태
알렉산드리아 항구
●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북부 나일강 델타(삼각주) 서쪽 끝에 있는 항만도시. 인구 333만 9000(1996). 수도 카이로에서 북서쪽 약 180㎞ 지점에 있으며, 카이로 다음가는 대도시이다. 시가지는 지중해와 마레오티스호 사이의 길쭉한 사주(砂洲) 위에 있으며, 지중해풍의 흰색 빌딩이 12㎞에 걸쳐 이어져 휴양·관광지로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상업·금융의 중심지이며 증권거래소가 있다. 공업은 석유정제·섬유·플라스틱·시멘트·담배 등의 공장이 있다. 항구는 이집트 제1무역항이며, 목화·밀·사탕·야채를 수출하고 공업제품·식료품 등을 수입한다. 고대 건축물은 아랍인 지배 이후 거의 파괴되었으나 카타콤(지하식 분묘), 폼페이우스의 개선문, 로마극장 등이 남아 있으며, 알렉산드리아대학·그레코로만박물관 등 학술·문화시설도 있다. 카이로와 함께 최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BC331년 나일강 삼각주 서쪽 끝 페니키아인의 항구가 있던 라코티스 어촌 가까이에, 북으로 파로스섬을 끼고 남쪽에 마레오티스호가 있는 땅을 골라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것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래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이곳은 이집트에 창건된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수도가 되어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에 도시가 거의 완성되었다. 당시는 지중해 세계와 아라비아·인도와의 무역항으로서 상공업 중심지를 이루는 헬레니즘 최대의 도시로 번영하였는데, 인구는 약 80만에 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학문연구소와 그 부속 대(大)도서관을 설립하여 문헌학(文獻學)과 자연과학이 융성하였고,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등 헬레니즘문화의 중심도시이기도 했다. 제정로마시대에는 신플라톤 철학과 유대그리스도교 신학, 그노시스 사상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646년 아랍인에게 공략당하여 이집트의 정치·문화 중심은 카이로로 옮겨졌다. 1517년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에 따라 1803년까지 프랑스에게 점령당했다. 19세기 초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4000의 작은 도시로 전락하였으나, 이집트의 태수(太守) 무하마드 알리가 해군 근거지로 삼아 부흥을 기도했고, 이스마일 파샤는 항만시설 확장에 노력했다. 1882년 아라비 파샤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폭동으로 많은 유럽인 거주자가 살해되자, 영국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여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의 알렉산드리아는 이때 영국이 건설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에 따라 이집트의 종주국 터키가 독일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연합국 해군 근거지로 삼았다. 그 상황은 1922년 이집트왕국으로서 독립한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해군기지로 쓰였다. 영국은 194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철수하였고, 1952년 이집트공화국이 수립된 뒤 이집트의 군항·상항·관광지로 발전하였다.
알렉산드리아란 알렉산더대왕이 건설한 도시라는 뜻으로 맨처음 건설되어 지금도 번영하고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외에 이수스 부근의 알렉산드리아(지금의 터키 이스켄데룬 부근), 아라코시아인의 알렉산드리아(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또는 그 부근), 알리이인의 알렉산드리아(지금의 헤라트), 에스카테의 알렉산드리아(야크사르테스강변, 지금의 시르다리아강변)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파로스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3. 키프리안
●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은 A.D. 2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고 라틴어를 사용한 교회의 지도자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어거스틴은 서방 기독교의 교리적 기틀을 확립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키프리안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한다.
키프리안을 흔히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키프리안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르타고라는 지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카르타고는 비록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도시지만 로마와는 매우 근접해 있는 도시이다. 현재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속한 지역인데, 이곳은 아주 오래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할 즈음,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이다. 대략 5백년 가량 서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해상무역을 통해 크게 번영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이며,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는 인신공양이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 타니트와 남신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고, 지금도 돌비석이나 모자이크 등에 어린아이를 바친 흔적이 남아있다.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그리스인과 3세기에 걸쳐 충돌하였으나, 일찍이 로마와는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고, 유명한 한니발 장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패배하여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된다. 이후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성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의 유물들이다.
카르타고는 로마시대 수사학,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3세기에는 기독교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5세기에 반달인에게 점령당하고, 7세기 말에는 아랍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공중목욕탕 등이 남아 있어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카르타고 사람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모두 로마공화정 말기에 전멸당했다. 모두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 검투사로 죽거나 여자는 몸종이 되어 혼혈을 거쳐 인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 키프리안이 태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을 때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교도이기는 했으나 존경받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당시 최고의 로마교육을 받을 수 있어, 수사학과 법률을 공부했다. 그리고 훌륭한 웅변가로서, 또 교사로서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키프리안이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A.D.246년경, 그러니까 키프리안이 46세쯤 되었을 때, 평소 육신의 일락과 명예를 통해 삶의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당시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장로 캐실리아누스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의 글에 의하면, 사회의 타락한 권력과 부, 그리고 부패한 사법권을 바라보면서 어려움에 빠졌으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후,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종한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으며, 놀랍게도 세례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249년 초 도나투스감독을 이어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다.
그때 노바투스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5명의 장로 집단은 키프리안의 감독 임명을 반대하였는고, 이로 인해 키프리안은 감독직 수락을 주저하게 되나, 회중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감독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오랜 동안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카르타고 교회에서 목회의 직무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교회를 부흥시킨다.
키프리안이 감독직에 오른 바른 그 이듬해인 250년, 로마황제 데시우스는 로마의 옛 문화를 재생시킨다는 미명하에 기독교에 대한 범제국적이고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들에게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또 이를 준행하였음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소지하라는 요구가 주어졌다.
황제 데시우스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을 내렸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의도였다. 이것은 당시 그만큼 로마제국이 불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군사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황제의 영을 시행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지위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압류당하고, 감금되거나 심지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혼란 속에 빠졌다. 카르타고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위협을 당하기도 전에 즉각 뜻을 굽히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때 키프리안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이듬해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이 박해는 끝이 났다. 하지만 교회로 돌아온 키프리안 앞에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져 있었다. 박해기간동안 교회를 떠난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배교자들의 문제에 있어 키프리안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키프리안도 비록 배교는 하지 않았지만,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당시 순교한 로마교회의 감독과 그를 비교하여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그를 로마교회에 고발했다. 로마교회 지도자들 역시 키프리안에게 글을 써서 비난했으며, 교회가 혼란스러웠다.
키프리안이 질서를 회복하는데는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피신해 있는 동안 발생했던 문제들과 남은 생을 싸우면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던 252년 역병이 카르타고에 몰아쳤다. 이 역병은 전 로마제국을 15년 동안 휩쓸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데시우스황제의 아들도 이 역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이때 키프리안은 교회를 동원해 카르타고의 역병 희생자들을 도움으로써 상당한 칭찬을 받게 되고, 그후 몇 년간 키프리안은 유능한 행정가와 성실한 목회자로서 인정받게 된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다른 문제를 맞이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밝힌다.
참으로 겸손했던 키프리안은 글을 꼭 써야만 할 때를 제외하고는 명성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개의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의 근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이단에서 받은 세례의 무효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8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다. 바로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의 핍박이었다. 이 핍박으로 인해 교리논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핍박에서 키프리안은 담대하게 자신의 양떼들과 함께 맞섰다. 그러자 그는 쿠루비스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일 년 후 258년 그는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한다. 키프리안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나, 처형을 당할 때에도 평소 인격의 고매함을 그대로 보여 주었으며, 숭고한 신앙인답게 행동하였다.
258년 9월 14일 단두대 위에서 순교를 당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들었던 교인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도 키프리안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초대교회사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며 저술가였던, 키프리안은 이후 약 2세기 후에 어거스틴(354-430)이 등장하기 전까지 교회의 많은 존경과 명성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오랜 기간 누렸다. 키프리안은 어거스틴의 사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어거스틴 역시 그를 존경하였다.
터툴리안의 제자인 키프리안은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 교회의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감독이 주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사도들의 참된 후계자라고 생각했으며, 특히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기초로 해서 교회는 감독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키프리안의 교회관
1) 키프리안에 따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자는 타인이며,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든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키프리안의 견해는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의 신자들과 감독 사이의 관계가 어린아이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같기 때문에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교회와의 교제와 구원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감독에 대한 반역이 곧 감독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교회와 감독을 떠나 분리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는 “하나의 세례 이상 다른 세례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망상한다. 생명의 샘을 저버리고서라도 그들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물의 은혜를 약속한다. 그들은 거기서 씻음 받은 것이 아니라 더럽힘을 받는다. 그들의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증하게 된다. 그들의 신생은 하나님을 위한 자녀로서가 아니라 마귀를 위한 자식으로 만든다. 거짓으로부터 출생했으니 진리의 약속을 받을 수 없으며, 불신으로부터 태어났으니 그들은 믿음의 은혜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가 감독으로 대표되는 일치를 주장하고 교회 이외의 생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장차 중세 가톨릭교회를 위한 준비 단계를 이미 키프리안의 교회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키프리안은 감독이 사도의 계승자이며, 교회가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하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은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자들로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충실하고도 세밀하게 전달했으며, 사도들도 역시 감독들을 자신들의 계승자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교회들을 위탁하셨다”고 주장한다.
키프리안은 이 사도적 계승의 관념을 ‘승계의 언약’의 의미로 이해했으며, 감독은 누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취임하게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그때로부터 해가 바뀌고 계승됨에 따라 감독들의 임명과 교회의 모든 의결은 이들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에게 있어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의 감독들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의 관리를 통해 감독들 위에 입각하여 발전해 나가는 구성체였다. 이러한 키프리안의 주장은 결국 감독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며, 동시에 회중들을 위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신적 권위를 가지는 지도자로 인식되도록 하였다.
현재의 카르타고
고대 카르타고 유적(어린이 바친 돌비석)
[출처] 교회사인물(제4강)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작성자 예레미야
[출처] 교회사인물(제3강) 오리겐|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