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Suffering)에 대한 이해
I. 들어가는 글
올해 3월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 2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들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깊은 아픔과 고통을 당했다. 또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사고로 발전소 주변에 살던 일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까지도 방사능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2004년 12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하여 거의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이 발생한다. 이러한 고통은 때로는 개인적 차원의 경험일 수도 있고, 또는 공동체 전체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고통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실존적 이슈에 대하여 성경적 시각을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구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유의미한 작업이라 하겠다.
성경은 고통을 단 하나의 시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고통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성경도 고통의 다양한 모습(육체적 병과 아픔, 외로움, 죽음, 전쟁에서의 패배, 나라의 패망, 영적인 고뇌, 영적인 소외 등) 속에서 고통을 다양하게 이해한다.
본 논문은 고통에 대한 구약 신학적, 그리고 해석학적 작업이다. 본 논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의 주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글이라기보다는 구약성경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고통의 주제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신학적 작업이고, 이러한 신학적 작업에 근거하여 고통의 문제를 오늘날 우리들이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비록 신약성경에도 고통이 매우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지만 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의 주제로 제한하는 이유는 지면의 한계와 연구자의 학문적 한계 때문이다.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고통의 주제에 대하여는 이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고통의 경험은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다윗 왕조가 멸망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고통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1) 역사에 따라 고통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학문적으로 가치 있는 작업이겠지만, 본 논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본 논문은 구약성경이 고통에 대하여 어떤 증언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정리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근본적 관심이 구약성경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증언 자체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의 주제를 구약성경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구분에 따라 네 부분(오경, 역사서, 시가문학, 예언서)으로 다룰 것이다. 본 논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의 주제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통은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구약성경의 고통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실제로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고통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이웃의 입장에서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성경적인지 제시할 것이다.
II. 오경(창세기-신명기)에 나타난 고통
구약성경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통치된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하신 뜻에 따라 통치하는 이 세상 가운데 여러 종류의 악과 고통이 존재하고 있음도 언급한다.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이 세상에 선하지 않은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고통은 어디서부터 기원되었을까? 왜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이 세상 가운데 허용하실까? 이러한 질문들은 이 세상 가운데 고통을 경험하는 많은 성도들이 품고 있는 고민들이다. 구약성경의 첫 부분인 오경은 고통과 연관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기본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A. 원역사(창 1-11장)에 나타난 고통
구약성경에서 고통과 연관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에덴에 거하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하와와 아담에게 심판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은 여자에게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창 3:16)라고 말씀하셨고, 남자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19)고 말씀하셨다. 여자에게 준 심판의 말씀 가운데 표현된 ‘고통’과 남자에게 준 심판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수고’라는 히브리어는 모두 ‘이차본’(ןובצּע)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주어진 잉태의 고통과 남자에게 주어진 일하는 수고가 동등한 것임을 보여준다.2) 이와 같이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고통’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심판의 모습이다. 첫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이러한 심판의 말씀은 이 세상에 고통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창세기 3장의 사건은 고통이 첫 남자와 여자의 죄로 인하여 이 땅 가운데 존재하게 되었고, 이후의 모든 인류는 이러한 고통에 노출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벌로써 고통을 이해하는 시각은 이후의 원역사(창 1-11장) 사건들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심판을 받았다(창 4:10-12).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행악과 포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홍수의 심판을 받았다(창 6:5-7; 7:11-24). 바벨탑의 인간들은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성과 대를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는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결국 흩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였다(창 11:1-9).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인간이 경험하는 아픔과 고통을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B. 족장 역사(창 12-50장)에 나타난 고통
창세기 22장에는 ‘고통’과 유사한 용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고통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큰 아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결박하여 죽이려 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가 이제야···아노라.”(יתעדי התע, 아타 야다티; 참조. 출 18:11; 삿 17:13; 왕상 17:24; 시 20:7 등)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새롭게 알게 될 때, 또는 지금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을 재확인할 때 사용된다.3)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이 순간 아브라함의 믿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이 표현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고통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받아들였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재확인하셨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이 사건의 서론적 언급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시험은 대부분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다.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신 8:2)이고,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신 8:16)이라고 설명된다(참조. 출 16:4; 히 12:5-11).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시험도, 비록 시험을 받는 순간에는 아브라함에게 큰 고통이었겠지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의 주제는 요셉 이야기(창 37-50장)에서도 등장한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고, 그곳에도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살이까지 하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가나안에서 기근 가운데 고통당하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인생의 고통을 결론적으로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여기서 요셉의 고통은 많은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목적으로 설명된다.
C. 출애굽 역사(출애굽기-신명기)에 나타난 고통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할 때(출 1-12장)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로로부터 온 것으로 설명된다. 바로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고역으로 학대했고(출 1:11-14; 5:4-14), 산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남아를 죽이도록 했으며(출 1:15-16), 남아를 하수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출 1:22). 이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자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바로로 인해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출 2:23-24).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다. 고통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족장 이야기(창 12-50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녀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축복하셨고(창 16:11; 21:16-18), 라헬의 탄식을 들으셔서 그녀에게 태를 여셨다(창 30:6). 그러므로 애굽 생활에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바로라는 악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며, 이러한 고통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탄식을 듣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하였다. 출애굽기 15:22-17:7에서는 물과 양식의 결핍이라는 환경적 요인이 고통의 한 이유로 설명되고, 출애굽기 17:8-16에서는 아말렉이라는 외부적인 대적자들이 고통의 한 이유로 제시된다. 이러한 고통의 모습은 민수기 10:11-36:13에 나타나는 시내산 이후의 광야 생활에도 나타난다(민 11:4-23; 20:2-13; 21:4-9 등). 그러나 민수기의 광야 생활은 출애굽기의 광야 생활과는 달리5)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으로 또 다른 고통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말로 하나님께 불평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로 징벌하셨다(민 11:11). 고기가 없다고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셨다(민 11:33). 모세를 반역한 미리암과 아론에게는 문둥병을 내리셨다(민 12:9-10). 광야에 머무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는 백성들에게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출애굽 1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는 고통을 주셨다(민 14:26-35). 모세를 반역한 고라, 다단, 아비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셨다(민 16:31-35). 음식으로 인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는 성난 뱀을 통하여 물려 죽게 하셨다(민 21:6). 이와 같이 민수기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으로 설명된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고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시킨다. 에발산에서 선포되는 저주의 말씀(27:11-26), 계명의 순종 여부에 따라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28:1-68), 그리고 모압에서 선포된 언약의 말씀(29:1-30:20)에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임할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화가 그들이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따라 주어짐을 분명히 말씀한다. 이러한 이해는 신명기 30:15-20에 요약되어 잘 나타난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7-18). 이와 같이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당할 고통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다.
D. 오경에 나타난 고통의 구약 신학적 이해
앞에서 다룬 내용에 따르면, 오경은 고통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이해를 제시한다.
첫째, 오경은 고통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실체임을 전제한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셨다. 이 사건은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고통은 첫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이다.
둘째, 오경의 많은 부분은 고통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으로 설명한다. 원역사와 민수기에 나타난 광야 생활, 그리고 신명기는 고통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하는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한 모습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오경은 고통을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해석한다.
셋째, 오경은 고통이 인간의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위하여 인간들에게 주시는 훈련의 한 모습으로도 설명한다(참조. 롬 5:3-4; 고후 12:7-10).6)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고통의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재확인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에서 경험한 많은 아픔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넷째, 고통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뱀의 유혹으로부터 왔고,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과 압제를 통해 고통을 주었으며, 광야에서의 양식의 결핍이라는 자연적 상황도 이스라엘에게 생존하기 힘든 아픔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현장 가운데서 고통 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심으로 그 고통과 관계를 맺으신 분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으며, 광야의 결핍 가운데 외치는 아픔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III.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에 나타난 고통
역사서에서 고통의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 사건은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이민족을 통해 압제를 당하는 것, 열왕기서에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것, 그리고 역대기에서 많은 왕들이 질병에 걸리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A. 사사기에 나타난 고통
사사기는 사사 시대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네 단계가 순환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1) 이스라엘의 범죄(삿 2:11-12; 3:7, 12; 4:1; 6:1; 10:6; 13:1), 2)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삿 2:14; 3:8, 12-14; 4:2; 6:1; 10:7; 13:1), 3)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삿 3:9, 15; 4:3; 6:6; 10:10), 4) 하나님의 구원(삿 2:16; 3:9, 15; 4:4이하; 6:8이하; 11:29이하). 여기서 이스라엘의 범죄와 악행은 대부분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설명되고, 하나님의 심판은 이민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압제와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고통의 상황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이러한 패턴에서 고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이민족을 통해 압제하는 형태로 언급된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B. 열왕기에 나타난 고통
열왕기에 나타난 대표적 고통의 모습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한 사건이다.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는 열왕기하 17:3-23에 잘 나타난다. 이 부분은 크게 아래와 같이 두 문단으로 구성된다:7) 1)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보도(17:3-6), 2)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에 대한 설명(17:7-23). 여기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는 크게 2가지로 언급된다.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죄를 행한 것이었고(왕하 17:7-18), 둘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것이었다(왕하 17:19-23). 이와 같이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를 통해 멸망되는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말씀도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비슷한 형태로 설명된다.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고통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즉 므낫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우상을 숭배하고 성전을 더럽힌 것, 그리고 백성들을 죄의 길로 이끈 것 등으로 해석된다(왕하 21:1-18; 23:26-27; 24:1-4).
그러나 현재 형태의 텍스트에서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기사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기사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기사는 멸망의 사건(왕하 17:3-6) 이후에 멸망의 이유(17:7-23)가 제시되는 반면,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기사는 멸망의 사건(왕하 25장) 이전에 멸망의 이유(왕하 21:10-15; 23:26-27; 24:1-4)에 대하여 기술된다. 즉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는 멸망에 대한 이후의 설명이라면, 남유다의 멸망의 이유는 멸망에 대한 예언적 언급이다. 므낫세의 죄로 인하여 남유다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첫 번째 언급은 구체적으로 “모든 선지자로 말씀하여 가라사대”(왕하 21:10)라는 이야기 도입부와 함께 시작됨으로 남유다의 멸망이 므낫세의 죄에 근거한 예언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요시야의 통치에 대한 기사(왕하 22:1-23:30)에서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왕하 23:26-27)은 요시야의 신앙 개혁으로도 무효화 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된 뜻으로 이해된다. 열왕기하 22-23장에서 요시야의 신앙 개혁은 열왕기하 21장에서 언급된 므낫세의 모든 죄를 무효화 한 것으로 묘사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므낫세의 죄로 인한 남유다 심판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신명기와 역사서에 나타난 기본적 신학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지만, 이스라엘이 이방신으로부터 돌이켜 여호와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신명기와 역사서는 대부분 이러한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고통의 문제를 접근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했다는 이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응보의 신학은 요시야의 개혁과 므낫세의 죄로 인한 남유다의 멸망과의 관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므낫세의 죄악을 극복한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야 하는데,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의 죄로 인한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계획이 취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신학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로 이해된다.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남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이다.9)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고통은 므낫세의 죄와 연관해서는 인과응보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요시야의 개혁과 연관해서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으로 이해된다.
C. 역대기에 나타난 고통
역대기에 나타난 신학적 교리 가운데 중요한 한 주제는 ‘즉각적인 보복’(immediate retribution) 사상이다.10) ‘즉각적인 보복’이란 단순히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교리는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기본적 신학이지만, 역대기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상급이나 심판이 연기되지 않고 인간의 행동에 이어서 즉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대상 22:11-13; 28:8-9; 29:23; 대하 7:14; 12:5, 12; 14:2-7; 16:7-13; 17:2-6; 20:20-23; 26:4-5, 16-20; 31:21; 32:27-30; 33:10-13; 34:20-24 등).
이러한 교리는 고통과 연관된 역대기의 이해를 잘 드러낸다. 역대기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전쟁에서의 패배, 병, 죽음 등)은 모두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역대기는 기본적으로 고통과 아픔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보복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기본적 이해에 더하여 역대하 36:21은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 70년의 고통의 기간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토지가 안식하는 기간으로 이해한다. 바벨론 포로 기간을 70년으로 보는 의견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11) 첫째, 70년은 바벨론 제 1 포로였던 주전 605/04년부터 시작하여 고레스의 칙령이 선포되었던 주전 539년까지의 기간이다. 둘째, 70년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던 주전 586년부터 시작하여 성전이 재건되어 봉헌되었던 주전 516년까지의 기간이다. 셋째, 70년은 완전수로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징적인 기간이다. 위의 세 의견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이든, 역대기는 70년이라는 고통의 기간을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히 마감되고 약속의 땅이 왜곡되어진 상태에서 회복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긍정적인 기간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역대기는 고통의 기간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심판의 마무리 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회복이라는 긍정적 의미로도 이해한다.
D. 역사서에 나타난 고통의 구약 신학적 이해
역사서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해석한다. 비록 이러한 고통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역대기), 또는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열왕기), 기본적으로 고통을 인간의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서의 몇 구절은 고통을 단순히 인과응보적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요시야의 통치에 대한 기사(왕하 22-23장)에서는 남유다를 향한 심판의 이유로 언급되는 므낫세의 모든 죄악을 제거했던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남유다를 멸하시겠다는 계획(왕하 23:26-27)은 인과응보적 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보여준다. 또한 바벨론 포로의 70년을 안식년으로 이해하는 역대기 36장의 말씀은 고통의 기간을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히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회복의 기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역사서에서 고통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되지만, 고통이라는 징계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속성과 연관되기도 하고 회복을 위한 과정으로도 이해된다.
IV. 시가문학(욥기-아가)에 나타난 고통
시가문학의 여러 부분에서 고통의 문제가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고통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시가문학의 책으로는 시편과 욥기를 들 수 있다. 비록 구약성경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인과응보의 신학이 시가문학의 여러 부분에도 나타나지만(시 1편; 잠 10:23-30 등), 시편의 여러 시들과 욥기는 고통의 문제를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해석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시편의 탄원시에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음성과 그 후에 이어지는 감사 찬양이 등장한다. 욥기에는 의인의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이와 같이 고통을 대부분 범죄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오경과 역사서와는 달리, 시편과 욥기는 무죄한 자가 겪게 되는 고통의 문제까지도 심도 있게 다룬다.
A. 시편에 나타난 고통
시편은 외형적 특징에 따라 구원시, 탄원시, 감사시, 찬양시, 지혜시, 제왕시, 신뢰시 등으로 구분된다.12) 이러한 시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탄원시이다.13) 탄원시는 이스라엘이 공동체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부르짖는 간구이다. 비록 탄원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탄식하기도 하지만,14) 이것은 탄원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는 분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탄원자가 이러한 자신의 소외된 심정까지도 아뢰는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탄원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궁극적 도움의 근원자로 이해된다.
탄원시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탄원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대표적 탄원시 가운데 하나인 시편 22편을 보면, 시편기자는 1-21절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러한 탄식은 22-31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탄원시는 탄원에서 시작하여 감사와 찬양으로 마감된다.
탄원시는 탄원자의 고통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고통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탄원시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간구자의 부르짖음이 해결되는지에 대하여도 보여주지 않는다. 탄원시 안에서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탄원자의 간구가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원시는 고통과 연관하여 그것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지만,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탄원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고통의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이심을 강조한다.
B. 욥기에 나타난 고통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주제를 가장 심도 있게, 그리고 주된 주제로 다루는 책은 욥기이다.15) 욥기는 의인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주로 다룬다. 욥기는 크게 산문체로 씌어진 서론(욥 1:1-2:13)과 결론(욥 42:7-17)을 테두리로 하여 그 중앙에 운문체로 씌어진 본론(욥 3:1-42:6)이 배열된 형태로 구성된다. 서론에서는 욥이 받는 고난과 고난 가운데 순결함과 인내심을 보여주는 욥의 모습이 그려진다. 결론에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시련 후에 더 큰 복을 받은 욥의 모습이 묘사된다. 이러한 서론과 결론의 테두리 안에 배열된 운문체의 본론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문단으로 구성된다: 1) 욥과 세 친구의 논쟁(욥 3:1-31:40), 2) 엘리후의 연설(욥 32:1-37:24), 3) 하나님과 욥의 대화(욥 38:1-42:6). 서론은 욥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그 사람(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이러한 욥의 모습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도 반복된다(욥 1:8; 2:3 등). 의인인 욥에게 사단이 시험하여 큰 고통을 주었다. 사단은 욥의 재산을 빼앗고, 자녀의 생명을 취했다(욥 1:13-22). 또한 사단은 욥의 전신에 악창이 나도록 하여 그의 육체를 괴롭혔다(욥 2:7-10). 욥기의 서론 부분은 고통의 주제와 연관하여 고통당하는 욥이 죄가 없으며, 욥의 고통이 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이 아닌 사단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어지는 욥과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쟁(3:1-31:40)에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시각이 등장한다. 세 친구는 욥의 고통에 대하여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접근한다. 세 친구는 모두 욥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벌로 고통이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강하게 요청하였다(참조. 욥 4:7-8; 8:3-5; 11:14-15).16)
이러한 세 친구의 권고에 대하여 욥은 친구들을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욥 13:4)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징벌로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욥 6:10, 24, 29).17) 또한 욥은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을 내리신 하나님께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탄원까지 하였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욥의 친구는 욥의 고통이 욥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 설명했지만, 욥은 이러한 친구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친구와 하나님께 항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백을 주장한 후에 욥은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고통의 이유에 대하여 질문했던 욥에게 계속적인 질문을 던지셨다(욥 38:1-41:3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그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었느냐···”(욥 38:4 이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연속되는 질문을 통하여 욥에게 자신을 창조자로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한한 피조물인 욥과는 다른 능력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마침내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굴복하였다: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의인이었던 욥은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합리적인 설명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진지한 대면과 대화를 통하여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은 왜’라는 욥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를 계시함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이다.
욥기는 죄에 대한 처벌로써 고통이 아니라 무죄한 자의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전통적 신학으로 욥의 고통을 설명하였지만 욥의 고통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아니었다(참조. 욥 42:7-9). 또한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면서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외쳤지만, 하나님께서도 욥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해 주시지 않으셨다. 욥기는 욥에게 왜 고통이 왔는지에 대하여 사단의 시험이라는 것 외에는 언급하지 않는다(참조. 욥 1-2장; 대상 21장; 슥 3장).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허용하셨는지, 왜 의인인 욥이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하여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욥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어떤 것에도 제한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의 영역이기에 유한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는 이러한 고통이라도 오직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대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C. 시가문학(시편, 욥기)에 나타난 고통의 구약 신학적 이해
시편과 욥기는 전통적인 인과응보 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문제까지 다룬다. 시편에 있는 탄원시는 탄원자의 고통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탄원자의 간구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해결되는지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탄원시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탄원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고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자 되심을 보여준다.
욥기는 무죄한 자의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욥의 고통을 설명한 욥의 친구들의 접근은 잘못된 것이었고,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면서 ‘왜 자신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께 울부짖은 질문도 해결 받지 못했다. 그러나 욥과 그의 친구들의 질문과 해석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고통, 즉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오직 탄원 가운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시편과 욥기는 고통의 이유를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설명하지 않는 가운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고통의 궁극적 해결자 되심을 강조한다.
V. 예언서(이사야-말라기)에 나타난 고통
예언서의 많은 부분들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인과응보의 전통적 신학으로 해석한다(사 1:2-20; 5:1-7; 렘 4:23-26; 13:20-23; 겔 4:4-6; 5:13; 호 13:4-8; 욜 2:1-3; 암 2:4-5; 미 1:2-7; 습 1:2-6; 말 4:1 등). 그러나 예언서에는 고통과 연관된 몇 가지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다.
첫째, 에스겔 18장과 예레미야 31:29-30에는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라는 시각이 등장한다. 오경에는 자녀가 받는 복과 화가 부모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한다(출 20:5-6; 34:6-7; 민 14:18; 신 5:9-10):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즉 조상이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처벌이 삼 사대의 자녀들에게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서는 아간이라는 개인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것과(수 7장),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북이스라엘 전체가 멸망되고(왕하 17장), 므낫세의 죄로 인해 남유다 전체가 멸망된 사건을(왕하 21장; 23:26-27; 24:1-4) 통하여 한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레미야 31:29-30과 에스겔 18장은 조상의 죄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만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개인 책임론에 대하여 제기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며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로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현재의 고통이 과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 돌아와야 함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사야 40-55장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의 죄를 대신 지는 대속적 고통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사야 40-55장에는 “에베드 야웨”(הוהי דבע,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4개 나온다(사 42:1-9; 49:1-6; 50:4-9; 52:13-53:12). 이 노래에는 고통과 연관하여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이 노래에도 유다의 고통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인과응보의 전통적 신학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사 42:18-22, 24-25; 43:24b; 47:6). 그러나 이 노래들은 고통을 단지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 노래 안에서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한 모습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여호와의 종은 “이방의 빛”(42:6; 49:6)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43:9-10)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통은 이방을 향한 여호와의 증인과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적에 합당한 한 모습이다. 그들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열방에 더 큰 역사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에는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통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이 구절은 여호와의 종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한다. 여호와의 종은 죄가 없는 자였다(사 53:9). 그러나 그는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 왜냐하면 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주고, 타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여호와의 종은 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그들의 죄를 지고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통은 타자를 대신하여 당하는 대속적 고통이다. 이러한 대속적 고통을 통하여 열방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초청되는 것이다.
셋째, 예언서는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이 극복되어지는 비전을 보여준다. 이사야 2:2-4와 미가 4:1-4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이사야 11:6-9는 야생동물과 가축들, 그리고 연약한 아이들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묘사하며, 아모스 9:11-15는 많은 열매와 곡식으로 모든 사람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미래를 언급하고, 예레미야 31:31-34는 미래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이사야 24-27장, 에스겔 38-39장과 40-48장, 다니엘서 전체, 그리고 스가랴 9-14장은 현 세상의 고통과 악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히 제거되는 미래의 승리에 대하여 언급한다.18) 특히 다니엘 12:1-2는 이 세상의 환난 날에 순교되었던 자들이 구원을 받고 다시 살아나는 비전까지도 보여줌으로 죽음이라는 고통의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임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언서에 있는 종말론적인 말씀들은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이 극복되어지고 창조의 질서가 온전히 회복되어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제시한다.
VI. 나가는 글
본 논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고통에 대하여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기보다는 고통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A. 죄와 관련된 고통
구약성경은 고통을 대부분 죄와 연관하여 설명한다. 고통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언급인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이 사건은 세상에 왜 고통이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기능을 할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구약성경의 기본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이 말씀처럼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고통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고통은 죄에 대한 즉각적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민수기의 광야 생활, 역대기), 지연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신명기, 사사기, 열왕기). 또한 고통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임하기도 하지만(출 20:5-6; 34:6-7; 민 14:18 신 5:9-10; 왕하 17장; 21장), 타인이 아닌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렘 31:29-30; 겔 18장).
고통을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이해하는 기본적 가르침 외에 구약성경에는 죄와 연관된 고통에 대하여 몇 가지 시각을 더한다.
첫째는 타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타인의 죄를 대신 지는 대속적 고통에 대한 개념이다. 이사야 40-55장에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는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통이 이방을 위하여 타인의 죄를 대신 지고 당하는 고통으로 설명된다.
둘째는 고통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라는 것이다. 요시야의 통치에 대한 기사(왕하 22-23장)는 남유다를 향한 심판의 이유로 언급된 므낫세의 모든 죄악을 요시야가 제거했지만 하나님께서 남유다에 대한 심판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한다(왕하 23:26-27). 이것은 고통이 인과응보의 신학을 넘어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임을 보여준다.
셋째는 비록 고통이 죄에 대한 징벌이라는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고통이라도 긍정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시각이다. 역대기 36장에서 바벨론 포로의 70년을 안식년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고통의 기간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회복의 기간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B. 죄와 관련 없는 고통
구약성경은 모든 고통을 죄의 문제와 연관하여 해석하지는 않는다. 어떤 고통은 죄와 관계없는 것으로 등장한다. 죄와 관계없이 언급되는 고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영적 유익과 신앙의 성숙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재확인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에서 고통의 삶을 경험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러한 고통의 훈련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요셉은 모두 영적인 거장이 되었다.
둘째, 어떤 고통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주변 환경, 악한 세력)를 통해서 주어진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유혹한 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과 아픔을 준 바로, 그리고 출애굽 시 이스라엘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고통을 준 광야의 환경은 모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죄와 관계없이 주어진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구약성경에는 의인이 당하는 고통도 나타난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였다. 그러나 그는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창이 나는 고통을 당했다. 욥기는 욥의 고통이 사단이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준 것이라고만 언급한다. 왜 하나님이 이러한 시험을 허용하셨는지, 왜 의인인 욥이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하여는 욥기는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욥의 고통 이야기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의인의 고통이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함을 보여준다.
C. 하나님은 고통의 궁극적 해결자
구약성경은 인간의 고통이 죄로 인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됨을 보여준다. 즉 오직 하나님이 고통의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이심을 강조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주어지는 고통은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죄에서 돌이킴으로 해결되어진다. 신앙의 성숙과 영적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고통도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자의 삶에 개입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고통으로부터 구원함을 얻었고, 시편에 있는 탄원시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결국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게 됨을 보여준다.
의인의 고통을 다루는 욥기에서도 욥은 비록 자신의 고통이 왜 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의 직접적인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고통과 연관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
묵시문학적 요소를 갖고 있는 예언서의 말씀들은 죽음을 포함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이 극복되어지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이러한 말씀에서 고통의 문제의 온전한 해결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된다. 즉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고통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D.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목회상담학적 이해
구약성경은 고통을 이론적으로 다루지 않고 실존적인 문제로 다룬다. 왜냐하면 고통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대면하는 실존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고통에 대한 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구약성경은 고통을 당하는 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의 이웃의 관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갖고 고통에 대한 태도를 제시한다. 먼저 고통을 당하는 자는 자신의 고통 자체에 집중하여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이 왔는지’ 과거 지향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나님과 대면하고 대화함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19) 구약성경에 따르면 고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발생하고, 어떤 경우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구약성경이 비록 고통의 이유에 대하여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통의 이유에 집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구약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측면이다. 그것은 고통의 궁극적 해결자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과 연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미래 지향적으로 어떻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통 받는 자는 하나님과의 대담한 대면을 통하여 자신의 고통의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해결할 수도 있고, 고통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위로함을 얻고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과의 만남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함으로 고통의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통 받는 자의 바른 태도는 고통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다.
고통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이웃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우리 주위에는 항상 고통당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고통을 당하는 자의 이웃으로 우리는 고통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욥의 친구는 욥의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욥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그들의 접근은 잘못된 것이었다(참조. 욥 42:7-9). 그러므로 남의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바른 태도를 이사야 40-50장에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통은 대속적인 고통이다. 즉 타인이 당해야 할 고통을 자신이 대신 지는 것이다. 이 고통의 전제는 대속적인 고통을 당하는 자가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참조. 롬 3:23). 그러므로 대속적인 고통을 통하여 타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타인의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적 고통과 부활을 통한 죽음을 포함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승리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참조. 요 16:33).
비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대속적 고통의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여호와의 종과 예수님의 대속적 고통을 통하여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바른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과 예수님이 타인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그들과 동질감을 유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타인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의 현장 가운데 함께 함으로 그들과 한 몸 됨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참여한다고 그들의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은 고통 받는 자에게 인내와 위로를 준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는 고통의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계속 대면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고통 받는 자는 고통의 이유와 고통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고통의 유일한 해결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고통의 문제를 다루어야하며, 고통 받는 자의 이웃은 고통 받는 자의 아픔에 동참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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