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치료약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1-32)
< 깨진 꿈을 복원시키는 것 >
나약(Nyack) 대학은 기독교 선교연맹(C&MA, 미국 성결교)의 창시자인 심슨(Simpson) 목사님이 1882년에 세운 전통 있는 정규 기독교 대학입니다. 여러 비슷한 조건이 많은 1860년에 세워진 시카고의 휘튼(Wheaton) 대학은 장족의 발전을 이뤄 미국 최고 명문대 반열에 거의 들어섰는데 나약 대학은 전통과 명성에 비해 지난 수십 년 간 발전 속도가 많이 느렸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대학 발전은 기부보유금(endowment)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데 현재 휘튼 대학의 기부보유금은 4억 달러가 넘었는데 나약 대학은 천만 달러가 약간 넘는 정도입니다. 많은 대학들이 기부된 재정은 기부보유금으로 적립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 수익을 대학 발전에 쓰기에 기부보유금은 대학발전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기부보유금이 많은 것은 대학발전에 기여하는 인물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인물 한 사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인물 한 사람이 가정과 교회와 학교를 살리고 사회와 국가를 살립니다. 인물 한 사람 때문에 절망적인 분위기가 소망적인 분위기가 되고 흐린 물이 맑은 물이 됩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연약하고 부족하면 불평하는 일이나 문제점을 찾는 일에 골몰하지 마십시오. 대신 자신이 인물이 되어 공동체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극복하고 채워주는 데 보탬이 되겠다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물의 꿈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꿈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세파에 시달리고 여러 사람에게 시달리면서 꿈과 비전에 깨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깨진 꿈과 비전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깨진 꿈과 비전을 복원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본문은 새 사람의 행동양식으로서 용서의 중요성을 교훈하는 본문입니다.
< 용서를 훈련하십시오 >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직접 목회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리더가 목회했다면 온전한 제자나 천사들이 모인 교회가 될 것 같지만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본문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자가 목회해도 교회에는 늘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땅에 완벽한 교회나 교인은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누구에게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섭섭한 일이나 상처 입는 일이나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면 점차 교회에 대한 애정이 식고 “교회가 정말 희망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생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은 죄인이 갇힌 교도소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교인은 ‘대가족의 일원’입니다. 가족은 상처를 주고받고 살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삶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살면 상처 가능성도 적지만 가까이하면 상처 가능성도 큽니다. 교회도 가까이하며 삶을 나누는 신적 공동체이기에 상처를 주고받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순종하고 참고 용서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훈련하십시오. 큰 인물이 되려면 용서하는 삶은 필수적입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큰 인물 중의 하나는 산정현 교회의 조만식 장로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6대 담임목사로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기로 당회가 의결하고 조 장로님이 마산 문창교회로 가서 초빙 의사를 전하자 주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제가 학생 때 교장 선생님이셨던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제가 어떻게 목회합니까?” 완강히 거절하자 조 장로님이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때는 제가 교장이었지만 지금은 장로입니다. 목사님이 오시면 제가 잘 섬겨드리겠습니다.” 결국 평양 산정현 교회로 부임했습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조만식 장로님이 기도 당번인데 10분 늦게 왔습니다. 주 목사님이 “장로님! 거기 서 계시죠.”라고 하자 장로님이 들어오다가 가방과 중절모와 구두를 들고 벌을 서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중에 다 불안해하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존경받는 장로님에게 저렇게 무례하게 했으니 교회에 큰 시험이 생기겠구나.”
마침내 주 목사님은 설교를 끝내고 말했습니다. “조 장로님! 기도하시죠.” 조 장로님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예배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주의 종의 심기를 불편케 한 것을 용서하소서.” 그렇게 기도하자 불안해했던 교인들에게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주 목사님보다 조 장로님이 더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큰 인물은 순종과 겸손과 용서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그런 인물들이 많지 않은 편입니다.
어느 날, 한 똑똑한 젊은 목사가 주기철 목사님의 전기를 읽고 감동 받아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얼마 후 예배 시간에 장로님이 30분 늦게 오자 주 목사님처럼 말했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시죠.” 장로님이 오기로 서 있었습니다. 설교 후에 목사가 “장로님! 기도하시죠.”라고 하자 장로님이 못하겠다고 예배당을 박차고 나간 후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가 버릇없이 나이든 장로에게 그렇게 행동해서 이 교회에 안 다닌다!”
그 일로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고 젊은 목사는 결국 6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젊은 목사가 똑똑하기는 했지만 분수를 몰랐습니다. 권위란 지식적인 배움만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권위를 잘못 내세워 남을 함부로 망신 주면 대개 망신 준 사람도 망신당합니다. 그러나 정당한 질책이라면 망신당해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순종과 인내와 용서의 영성을 가질 때 큰 인물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받습니다.
< 용서가 아닌 것 4가지 >
용서가 중요한 것이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성도이기에 말로는 “용서했어요.”라고 해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용서 문제는 “용서했어요.”라는 간단한 영적인 비약의 말 한 마디로 쉽게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용서가 아닌 것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용서 같지만 용서가 아닌 것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잊고 끝내려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남으로부터 피해와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서 그냥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고통스런 상처를 계속 기억하면 피해를 준 사람과 똑같이 못난 사람이 되고 마음의 상처도 도지니까 그냥 잊고 끝내려는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용서는 아닙니다.
둘째, 잘못을 덮어주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누가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일에 대해 쉽게 “그냥 덮읍시다.”라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잘못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덮어주는 것은 사랑이 많은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 태도가 문제를 감추게는 해도 문제해결이나 치유는 주지 못합니다. 잘못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때 새로운 문제를 줄일 수 있기에 잘못을 잘 인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려 깊은 지혜도 발휘하십시오.
셋째, 사람 심리를 이해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는 어려서부터 고아처럼 자랐으니까 이해하십시오.” 그런 설명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이해가 용서는 아닙니다. 또한 사람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고 하면서 어떤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지 못해도 기꺼이 용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책감에 빠지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잘못을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사람은 잘못된 일에 대한 변명 구실을 찾다가 나중에는 모든 것을 무조건 자신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분명히 자기 잘못이 아닌데 자기는 용서하는 영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무조건 자신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주의하십시오. “내 탓이요!”를 잘하는 것은 대체로 좋은 태도지만 잘못에 대한 인식만은 분명해야 합니다.
한 여성은 그녀의 어머니가 어릴 때 그녀를 내팽개쳐서 다리가 부러졌었고 아버지가 금속 장식 혁대로 심하게 매질해서 그 자국이 몸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래도 부모의 잘못을 직시하기보다 “제가 어떤 잘못을 했겠지요.”라고 하면서 그 끔찍한 일을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용서를 오해해서 부모의 명백한 잘못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을 바른 태도로 여겼기에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지도 못했고 수시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늘 자기 탓으로 돌리면 참된 용서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자책감을 가지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릅니다. 지나친 자책은 참된 용서에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진실을 통해서만 참된 용서의 역사를 이뤄주십니다. 남의 잘못까지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진실이 아니기에 그런 자책감은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처럼 용서가 아닌 것들을 살펴보면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 용서를 위해 직시할 것 >
용서는 3가지를 직시할 때 생깁니다.
첫째, 용서는 잘못을 직시할 때 생깁니다.
구체적인 잘못을 인식하지 않고 막연히 그냥 용서한다고 하면 참된 평안이 없고 혼란된 감정의 앙금만 남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려면 자신에게 가해진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고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진선미의 우선순위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진리를 외면한 채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진정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둘째, 용서는 자신의 분노를 직시할 때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에서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가 성경을 보다가 우연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는 성경말씀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원수인 것이 보편적인 진리구나!” 그 말씀으로 마음이 잠시 편해졌지만 그 편해진 마음이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성도로서 미운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그런 감정이 실제로 있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투적인 믿음의 말로 분노의 감정을 부정하고 외면하면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상처를 묻어두는 것은 미움을 묻어두는 것이고 그것은 치유의 가능성도 묻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분노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참된 용서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셋째,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시할 때 생깁니다.
잘못과 상처와 분노를 직시한 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해주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용서이고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속성 중의 하나가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려면 무엇보다 용서를 잘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인이고 실수가 많은 존재라는 분명한 현실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행복과 직결됩니다. 사람의 선물 중에서 용서보다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용서는 그냥 되지 않고 참된 믿음을 통해 이뤄집니다. 심리학자들조차 “용서에는 신비한 종교적 향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 용서에 종교적인 향기가 있습니까? 용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한 최적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반응이 믿음이기에 참된 믿음이 참된 용서를 가져다줍니다. 결국 미움과 분노를 해결하는 최상의 해결책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본문 32절 말씀에서 언급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용서의 황금률입니다.
헬라어의 친절이란 단어인 ‘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란 단어인 ‘크리스토스’와 유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친절을 최대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또한 성도가 용서하려면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이해가 용서는 아니지만 용서의 중요한 바탕은 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면 상대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상대의 환경이나 상황을 이해하면 용서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남이 나를 용서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대로 남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힘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용서할 때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놓으신 축복을 현실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한 인도 관리가 유럽에 유학하면서 부도덕한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이중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신실한 아내는 그를 굳게 믿어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죄를 아내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지만 두려웠습니다. “아내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나를 버릴지도 몰라.” 그래도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방으로 아내를 부른 후 문을 닫고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 고백을 듣자마자 아내가 창백한 얼굴로 벽 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벽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죄가 아내를 십자가에 못 박는 느낌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그를 떠나지 않고 그의 새로운 삶을 돕겠다고 하자 그때부터 그는 영혼의 자유와 평안 가운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주기도문을 하면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용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그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진 빚이 우리가 예수님께 진 빚에 비해 얼마나 작은가?”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 용서는 영혼의 치료약 >
참된 용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각오해야 가능한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처럼 쉽지 않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큰 축복이 덧입혀집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복된 삶을 원하면 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게 용서하는 마음을 넘치게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평안과 위로가 주어질 것이고 마음에 품은 다른 소원까지 넘치게 응답될 것입니다. 때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가까이지냈던 사람을 멀리하는 한이 있어도 미움을 품지 말고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하고 그의 축복을 빌어주십시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마 6:21). 그 말씀에서 ‘보물’을 ‘재물’로 여겨서 흔히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해석하지만 ‘보물’은 단순히 ‘재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돈’보다 중요한 보물은 ‘꿈’입니다. 꿈이 있는 곳에 마음도 가게 됩니다. 꿈은 열정을 불태우게 하는 힘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늘 말했습니다.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행복한 삶을 원하면 자신을 어딘가로 돌진하게 만드는 ‘찬란하고 뚜렷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3가지 꿈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대한 꿈’과 ‘교회에 대한 꿈’과 ‘일에 대한 꿈’입니다. 그 꿈의 삼위일체를 품고 나갈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 꿈이 깨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꿈이 깨집니까?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꿈이 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 때문에 깨집니다. 그래서 깨진 꿈을 복구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주제가 ‘용서’입니다. 용서가 이뤄질 때 꿈이 회복되고 꿈이 회복되면 행복의 가능성도 크게 높아집니다.
용서는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도 풀어주고 사람과의 수평관계도 풀어주고 자신과의 내면관계도 풀어줍니다. 용서는 모든 얽힌 문제를 푸는 최상의 열쇠이고 깨진 찬란한 꿈을 복원하는 최상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통해 용서의 연쇄반응을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용서는 영혼의 치료약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자기 영혼의 치유도 온전히 이뤄질 수 없고 남도 치유해 줄 수 없습니다. 용서해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사랑의 연쇄반응이 일어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 받을 사람의 길을 예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내적인 변화와 치유로부터 온 세상의 외적인 변화와 치유가 시작됩니다. 영혼은 ‘용서하는 모습’에 가장 자석처럼 이끌립니다. 결국 영혼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어느 날, 파리에 살던 앙리코가 자신이 운영하는 목재소 뜰을 밤에 걷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두 명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목재더미로 접근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때 성령님이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곧 그는 목재들을 도둑질해 트럭에 싣는 사람들에게 가서 조용히 목재 싣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잠시 후 앙리코가 물었습니다. “이것들은 어디에 사용하려고 합니까?” 그들이 집짓는데 사용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는 다른 목재더미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저쪽 목재가 좋아요.” 거기로 가서 트럭에 목재를 가득 채운 후 한 도둑이 앙리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도둑질 솜씨가 아주 좋은데.” 앙리코가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이 아니오.” 도둑이 말했습니다. “도둑이 아니라고? 당신도 한밤중에 목재를 훔치는 우리를 돕고 있었잖소?”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을 돕긴 했지만 나는 도둑이 아니고 이 목재소의 주인이오.”
그 말을 듣고 두 도둑이 깜짝 놀라자 앙리코가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시오. 경찰을 부르지 않았소. 당신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이렇게 도운 것이오.”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해서 나중에 둘 중의 한 명은 목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한 트럭의 공짜 목재가 아니라 앙리코의 용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용서의 연쇄반응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인자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명절 때 가족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무장해야 할 것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속성과 축복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때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평안이 내 평안이 되고 하나님의 비전이 내 비전이 되고 하나님의 풍요가 내 풍요가 됩니다. 늘 용서하는 삶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변화의 초석이 되고 풍성한 축복을 얻어 누리십시오. <글: 이한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