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년경~기원전 1170년경), 미노아 문명 또는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이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했다.[1] 그 후로는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미노스 문명은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1939년 윌 듀런트는 미노스 문명을 "연속된 유럽의 첫 고리"라고 하였다.[2]
미노스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칭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노스의"를 뜻하는 "미노안(Minoan)"이라는 낱말은 아서 에반스가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Minos)에서 만들어낸 말이다.[3] 미노스는 그리스 신화의 미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데, 아서 에반스는 그 곳이 크노소스라고 비정했다. 혹자는 시리아 마리(Mari) 문서고에 나오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 "케프티우"(Keftiu, *kaftāw)와 셈어 "카프토르"("Kaftor" 혹은 "Caphtor") 그리고 "카프타라"(Kaptara)가 크레테 섬을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지 수 백년 뒤에 나온 오디세이아에는 크레테 원주민을 "에테오크레테 사람"(Eteocretans, "진짜 크레테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아마도 미노스인의 후손일 것이다.
미노스 문명의 궁전들은 이 섬에서 발굴된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거대한 장서고를 통해 이 곳이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발굴된 각 궁전은 제각각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건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궁전은 내외부 계단, 작은 우물, 육중한 기둥, 창고와 정원을 갖춘 다층 건물도 있다.
미노스 사람들은 미케네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가령 초기 그리스의 문자인 선문자 B는 미노스 문명의 선문자 A를 받아들인 것이다.
발굴[편집]
에게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로 테라라고 하는 섬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오랜 옛날, 큰 분화가 일어났다. 그때 매몰된 도시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용암 속에서 장식 무늬가 있는 도자기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2년 후, 후기 청동기 시대(이른바 미케네 시대)의 분묘가 로도스섬의 이말리수스에서 새로 발견되어, 특색 있는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어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후인 1876년에 미케네의 발굴을 시도하여, 이름 높은 사자문(獅子門)의 남쪽에 있는 왕족의 분묘에서 대량의 금은과 기타 세공품을 발견했다.
슐리만의 발굴로 그리스 태고문화 탐구가 점차 활기를 띠고 진행되어, 1900년, 영국인 아서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손을 댔다. 에번스는 그리스 본토 및 그 밖의 여러 섬들의 소위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것이 에게 세계의 구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출토의 유품, 특히 항아리의 형태나 장식 양식의 변화에서 크레타 청동기 시대의 연대 구분법을 안출(案出)하고, 또 크레타 문명에 '미노스 문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술[편집]
크노소스의 궁전은 낮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궁전의 가운데에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거실이나 침실·목욕탕 내지는 신전(神殿)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방의 배치가 아주 불규칙하여 전체적으로 긴밀한 통일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위한 고려(考慮)를 비롯하여 완전한 하수(下水)장치 등 위생시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장실(貯藏室)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열을 지어 있어, 크레타 왕족의 부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현재로는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復元)되어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玉座)가 놓인 방의 건축에 있어서, 크레타인은 석재(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했다. 흥미있는 것은 낮은 주춧돌 위에 고정시켜 세운 나무기둥이, 상부(上部)에서 하부(下部)를 향해 차차 가늘게 되어 있는 점이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서는 기복(起伏) 있는 땅 위에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옥좌의 양측에 우아한 형체를 가진 신화·전설상의 동물이 가로누워 있다. 또한 크레타의 벽화에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나 남녀의 행렬 등을 그린 것도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노소스의 궁중 여관(宮中女官)을 그린 벽화에서는, 여자들이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크레타 문명의 세련된 일면과 동시에 여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이 엿보인다.
미케네 문명
뮈케나이 문명 또는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북동부 아르골리스의 미케네의 유적지에서 이름을 따온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일컫는다. 아테나이, 필로스, 테바이, 티린스도 미케네 문명의 주요 영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청동기 시대 말기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등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신화가 탄생한 시기이며, 고대 그리스의 최대 전성기에 해당한다.
무역의 혜택을 입은 미노스 문명과 달리 미케네인들은 전쟁과 무역을 통해 발전했다.
설명[편집]
미케네 문명은 헬라도스 문화(Helladic culture)가 미노스 문명의 영향으로 발달하던 3700년 전부터 동부 지중해에서 청동기 문명이 쇠퇴하던 3200년 전까지 번성했다. 미케네의 멸망은 흔히 도리아인의 침략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 밖에 화산 분화로 인한 자연 재해나 기후 변화 같은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미케네 문명의 주요 도시는 아르골리스의 미케네와 티린스, 메세니아의 필로스, 아티카의 아테네,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오르코메노스, 테살리아의 이올코스이다. 크레타에서 미케네인들은 크노소스를 정복했다. 또 전형적 가내 성소의 형태인 레르나 신앙 같은 의식이 치러진 지역도 있는데, 미케네인들은 일반적인 형태의 신전 건물을 건설하지 않았다. 미케네의 취락은 에페이로스[1], 마케도니아[2], 에게 해의 섬들, 소아시아 해안, 키프로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형문자 B로 비문이 쓰인 미케네의 유물은 심지어 독일[3]에서도 발견되며, 조지아에서 미케네의 검이 발견되기도 했다.[4]
미케네 문명은 귀족 전사 계급이 통치했다. 약 3500년 전에 미케네인들은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까지 진출했으며, 미노스 문자(선형문자 A)를 받아들여 선형문자 B로 발전시켰다.
미케네인들은 미노스인들을 패배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미케네의 강력한 적수였던 도시국가 트로이아를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한다. 이 멸망의 증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그 밖에 신화에 경도된 사료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미케네와 트로이아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876년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소아시아(터키) 서부 히살리크에서 유적을 발굴하고, 이 지역을 트로이아라고 주장했다. 이 유적은 트로이아에 대한 호메로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5]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6]
미케네 귀족들은 아치형으로 된 높은 천장에 크고 둥근 매장실이 있고, 돌로 만든 직선 통로가 있는 벌집 무덤(tholoi)에 매장됐다. 미케네인들은 이런 무덤에 망자와 함께 검과 같은 여러 무구들을 함께 묻었다. 귀족들은 황금 가면, 관, 갑주, 보석 박힌 무기 등도 부장품으로 묻었다. 망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처럼 화장되어 철기 시대식으로 황금 항아리에 담긴 것이 아니라 앉은 자세로 묻혔다. 미라로 매장된 귀족 무덤도 있다.
사제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장, 반지, 이들의 몸짓을 묘사한 봉납한 조상(彫像)을 통해 신과 숭배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상을 보면 숭배자들은 팔을 접거나 오른팔을 들거나 한 손을 이마에 얹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신은 예수가 나타날 때 취하는 자세처럼 두 손을 들거나 팔을 뻗어 무언가를 주거나 받는 모양이다. 미케네의 범신전에는 필로스와 미케네 시대의 크노소스에서 나온 선형문자 B 비문이 모여 있다. 몇몇 신의 이름은 올림포스의 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알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가령, 아레스 신은 별명인 에니알리오스(Enyalios)로 나온다. 아폴론은 크노소스에서 "PA-JA-WO"(Paian)이라고 나온다. 더 유명한 것으로는 "A-TA-NA PO-TI-NI-JA"(Athena Potnia, 여신 아테나), "E-RE-U-TI-JA"(Eileithyia, 나중에는 그저 출산 때 숭배되던 신이 되었다), 디오뉘소스, 포세이돈도 있다. 포세이돈의 경우 이미 "지구를 뒤흔드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고전기 그리스에는 전하지 않는 배우자 포세이다(Poseida)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필로스에서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로 보이는 두 여신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도 등장한다.
미케네의 궁정 프레스코화[7]도 발견됐다. 특히 필로스, 미케네, 오르코메노스, 테바이, 티린스가 유명하며, 궁정이 아닌 개인 소유의 것도 일부 있다. 초기 프레스코 장식은 LH IIA 시기(약 3500년 전)의 것이다. 키클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과 미노아에서 직접 유래된 것 모두 미노아 전통을 고수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장식을 줄이고 자신들 지역에 맞는 주제로 꾸민 것도 있다. 가령, 알현실 안에 사자나 날개 없는 그리핀을 두거나, 복도에 조상을 줄지어 놓거나 하는 식이다. 미노아식 동물 장식과 달리, 미케네는 자연에 대해서도 동물을 묘사할 때 오직 인간에 중점을 두거나 사냥물로만 나타나고 있다. 황소가 뛰는 프레스코판은 미케네와 티린스에서 발견된다.
미케네 문명은 3180년 무렵에 멸망한다. 수많은 도시들이 약탈되고 학살의 흔적이 있었다. 이후에 이 지역은 역사가들이 그리스 암흑기로 부르는 시대로 넘어가며, 일부 미케네인들은 아나톨리아, 다른 그리스 섬들 혹은 키프로스로 도주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 인구는 엄청난 감소를 겪었으며, 궁정과 관련된 제한적 문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쇠퇴의 원인을 외부나 다른 그리스인(이 지역 주민을 복속시켰다는 도리스인)의 침략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련의 지진, 대규모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나 기후 변화와 같은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미술[편집]
크레타 문명과 달리 미케네의 경우는 전사(戰士)인 남자가 지배적이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에 씌운 엷은 금판(金板)의 <마스크>(미케네의 수갱 분묘에서 발굴된 것, 3600년 전, 아테네국립미술관 소장)는 남자다운 전사의 얼굴을 꾸밈 없이 잘 묘사한 작품이다. 수염이 있는 이 얼굴은, 아직 예술적 숙련을 거치지 않은 조형(造形)의 경직성을 보여주나, 그 표정에는 의지의 강인성, 끈기, 결단력이 반영되어 있다. 마스크는 고대 예술이 대개 그렇듯, 장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여 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매장된 죽은 사람의 몸을 보존하고 그 모습을 영속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굴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나타낸 것은 그 때문이다.
미케네 예술의 특색은 특히 건축에 나타나 있다. 미케네 궁전은 크레타 궁전과 달리 관(館)이 아니고 언덕 위에 쌓아 올린 거대한 성이다. 미케네나 티린스의 산성이 대표적인 예다. 미케네에는 '사자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남아 있다. 그 구조를 보면, 한 쌍의 통돌에 문중방(門中枋)을 얹고, 그 위에 두 마리 사자를 부조한 삼각형의 커다란 석판이 얹혀 있다. 이 사자문의 안쪽 오른쪽에 있는 수갱분묘 다섯 기 속에서 슐리만은 무수한 재보를 발견했다.
성 입구에서 차례로 통로를 더듬어 궁전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귀중품의 배치나 구조에서 미케네인 고유의 풍습이 나타난다.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앞뜰을 가진 메가론(megaron)을 채용한 것이다. 확실히 이 메가론은 미케네 문명의 소유자가 인도유럽어족임을 말해 주고 있다. 메가론은 그리스어로 '넓은 방'이란 뜻이고, 본래 원시 그리스의 주거 형태였다. 소위 '남자의 크고 넓은 방'의 평면도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장방형으로서 현관 다음에 전실이 있고, 그 뒤에 커다란 주실(主室)의 있다. 주실 중앙에는 난로가 비치돼 있다.
미케네 궁전은, 이와 같이 거주 건축의 근본 형식에서, 그리스적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여기에서도 크레타 미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의 세부나 내부 장비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점이 많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거실이나 욕탕의 설비를 갖추고, 그들은 넓은 방을 좋아하는 벽화로 장식했다. 그런 경우, 회화에서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벽화의 한 예는 티린스의 성을 장식한 프레스코의 단편인 <멧돼지 사냥>(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이다. 얼핏 보아 크레타풍이라고 판단되는 동물이 경묘한 필치로 벽면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프레스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얼핏 본 유사성에도 크레타 양식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멧돼지에게 덤벼들고 있는 개를 보면 한 마리 개가 멧돼지 등에 뛰어들어 물어뜯고 있다. 크레타 미술에서는 모두가 특수한 의도라는 것을 갖지 않아서 여유가 있고 옹색하지 않는 취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개들이 멧돼지를 유일한 목표로 쫓고 있는 식으로, 그림 전체가 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케네 미술은 크레타인의 유화(柔和)하고 미려(美麗)한 예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고, 아주 늠름한 것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미케네 외에 티린스나 오르코메노스 그 밖의 여러 곳에 산재하는 지하 묘실 건축도 미케네 문명의 한 특색이다. 이것은 언덕의 경사면이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쪽으로 긴 통로를 파내고, 그 막바지에 입구가 있어, 여기에서부터 지하의 원추형의 묘실로 통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묘실의 입구는 각별히 아름답게 장식한 형적(形跡)이 있다. 덧붙인다면, 그리스 왕후들의 장례식에서는 개나 말 내지 노예까지도 공물로 도살하는 풍습이 있었다.
에게 문명
그리스의 역사Ιστορία της Ελλάδας
에게 문명은 그리스와 에게 해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 문명이다. 에게 문명은 서로 교류하던 크레타섬,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 세 개별 지역의 문명을 이르는 말이다. 청동기 시대 초기에 크레타섬에 미노스 문명—크레타 문명이라고도 한다—이 들어섰으며, 키클라데스 제도와 그리스 본토에는 각자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초기 헬라딕 시대에 키클라데스 문명은 그리스 본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그리고 중기 미노스 시대에는 크레타섬에도 영향이 미쳤다. 기원전 1450년(후기 헬라딕, 후기 미노스 시대)부터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에 진출하였다.
발굴[편집]
19세기 중엽만해도 전설 속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아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했다.
이에 1900년부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섬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아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섬 발굴에서 선형 문자(線上 文字)가 기록된 여러 점토판 문서(土版 文書)를 발견하였다. 1952년 벤틀리스는 선형 B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미케네 문명에 관한 연구가 획기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에게 문명은 미노스 문명과 그리스와 트로이를 포함한 미케네 문명으로 크게 구분한다.
미노스 문명[편집]
크레타를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스 문명(기원전 3650년경-기원전 1170년경)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기원전 3000년 중엽에 청동기 시대로 들어섰으며,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선문자 A를 쓰게 되었다. 이 문명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했다기보다는 소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에 접어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크노소스(Knossos)의 궁전은 기원전 1570년과 기원전 1500년에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는데 그 원인은 지진이라고도 하고 이 무렵 이집트에서 추방된 힉소스의 침입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원전 1450년에는 선문자 A 대신 선문자 B가 나타나는데, 이는 이 무렵 미케네인들이 크레타섬을 지배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크노소스의 문명은 기원전 1400년 크노소스 궁전이 파괴되어 재건되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1960년대의 새로운 발굴에 의해 산토리니섬의 화산폭발로 인한 화재와 지진 해일이 원인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미노스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하였고 도자기 제조술이 뛰어났다. 미노스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달하고 유복하고 상류층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미노스의 예술은 화려하고 생생하며, 인간성과 개성에 충만해 있다. 바다와 태양, 수목과 꽃, 축제와 스포츠에 도취되어 있었다."M.Rostovtzeff, Greece(Galaxy Books, 1963), pp 28~29[출처 필요] 위와 같이 미노스 예술은 고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미노스 예술의 대표적인 사례는 궁전의 프레스코화이다.
미케네 문명[편집]
미케네의 문자인 선형 B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미케네 문명(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100년경)의 담당자는 그리스인의 선조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하였다. 그들은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여러 작은 왕국을 건설하였고,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부강한 맹주가 되었다. 미케네는 미노스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테세우스의 전설은 미노스와 그리스 본토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원전 15세기 중엽에는 미케네가 크노소스를 지배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미노스 문명이 몰락한 뒤에는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되었다.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240~30; 일설에는 기원전 1260년경)은 전설과는 달리 강대해진 그리스 본토의 소왕국들이 미케네를 맹주로 결합하여 소아시아로 진출한 원정이었다. 미케네는 기원전 12세기에 결국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인에 침략을 받고 몰락하였다.
미케네는 미노스와는 달리 상무적이며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정치적으로 공납제를 기초로 한 왕정으로 호메로스에 나오는 그리스의 여러 왕들에 비하여 약한 편이었다. 공유지와 사유지가 공존하였는데, 공유지가 있다는 것은 즉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하다는 것을 말하며, 사유지가 있음은 평민이 경제적 자립을 누리고 있으며 미케네의 국왕이 오리엔트적 전제군주화하는 것을 억제한 요인임을 보여준다. 미케네 사람들도 제우스나 포세이돈 등의 후대 그리스 사람이 믿었던 신들을 믿었으나 미노스인들이 믿었던 뱀의 여신을 더 신봉했던 것 같다. 미케네의 사회구조는 국왕 밑에 귀족적인 전사계급이 있었고 다음에 관료인 서기, 그 밑에 상인과 농민이 있었으며 최하층에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미케네 사회는 오리엔트 사회와 그리스 사회의 중간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