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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교회[Epenetus Church](계1-7)

by 은총가득 2022. 9. 14.

 

에베소[Epenetus]- 에베소교회에 관련하여

인내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의 아데네의해 BC 7-6세기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이오니아의 항구에 건립된 식민도시로 BC 620년경 아테미신전을 세우고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면서 상업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였지만 잦은 지진과 태풍 등으로 파괴 되면서 영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 항구와 바다는 볼 수 없지만 발굴이 계속되는 신비한 곳으로 셀쭉에 그 화려한 유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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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교회[Epenetus Church](1-7) - AD 100년 초대교회

1세기 사도바울이 1(AD 54) 2(AD 55~57) 전도여행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아시아에서 1번째로 세운 제일 큰 교회이며 3차 전도여행에서는 성령이 강림하여 방언과 예언의 일어났으며 많은 술객들이 개종하였다. 바울이 순교한 후 요한은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를 이곳에서 모섰으며 요한 1,2,3서를 썼다. 고난과 박해에도 흔들림 없이 항거해 왔으며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릴 것이요, 회복하면 낙원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는 칭찬과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동시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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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 선교여행 통합지도

 

에베소교회[Epenetus Church] 유적지

에베소교회는 비잔틴시대에 바울이 3차 여행 시 3년을 머물러 세운교회로 현재의 에베소교회 유적지는 셀쭉에 있는 사도요한무덤교회를 말한다. 교회 유적지 위에는 셀쭉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교회 유적지 아래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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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 3차 전도 여행지도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사도바울

 

▲에베소에서 마술책을 불 태우며 설교하는 사도 바울

 

사도요한 기념교회[The Church(Cathedral) of St. John]

사도 요한과 성모마리아가 살았던 곳으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생을 마감하여 쎌축[에베소] 서쪽 해안 언덕위에 묻힌 곳에 AD 4세기경 나무로 된 교회가 세웠으며 AD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재건되었다. AD 7, 8세기에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AD 8세기에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AD 14세기에는 이슬람사원이 되었고, 지금은 가로110m, 세로140m의 터와 당시교회의 모형과 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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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 기념교회 정문[St. John's Church front gate]

 

비잔틴시대에 세운 거대한 돌문으로 에베소의 원형대경기장에 있는 돌을 가져다가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되새기는 뜻으로 세웠다하여 박해의 문 또는 대 경기장에서 순교자의 피가 튀었을 돌들로 만들어졌기에 통곡의 문이라고도 한다.

 

 

사도 요한 기념교회 정문앞 도로

 

 

사도 요한 기념교회 정문 맞은편 모스크

 

 

사도 요한 기념교회 지형도 모형

 

 

AD 4세기경 세운 사도 요한 목조교회 [St. John's Church front gate]

 

AD 4세기경 세운 사도 요한 목조교회 [St. John's Church front gate]

 

사도 요한의 이콘

 

사도 요한(Απόστολος Ἰωάννης, c.6 AD ~ c. 100 AD)은 어부 세베대(Ζεβεδαῖος)의 아들이었으며, 사도 야고보(Απόστολος Ἰάκωβος)의 형제였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Σαλώμη)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가 품꾼들을 고용한 것(막 1:20)으로 보면, 그의 가정은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세례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인도되었던 세례 요한의 알려지지 않은 제자(요 1:35~37)와 자주 동일인물로 간주되었다.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깁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아버지와 어업을 버리고 곧바로 그분을 따르게 되었다(마 4:21~22, 막 1:19~20).

I. 성격

요한은 급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Βοανεργές)라는 이름을 붙이셨다. 이러한 성격적인 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실 때, 그분을 위해 준비하기 위해 한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갔다가 거절당한 후에, 형제가 일으킨 분노에서 잘 나타난다(눅 9:54). 또 예수님께 드린 '주님께서 마실 잔을 마실터이니 그들을 주의 나라에서 주의 좌우편에 앉게 명해달라'는 살로메와 그들의 간청은 주님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인해 일어났다(마 20:20~28).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면서 그의 급한 성경은 온화해졌고, 이윽고 불같은 사도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히에로니모스는 요한을 사랑의 제자로 묘사하길, 요한이 노년에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가서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II.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그의 형제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 5:37)나 변화산에서 변화할 때(마 17:1)나 겟세마나 동산에서 기도할 때(막 14:33)에 열두 제자 중 이 세 제자만 특별히 동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제자가 요한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의 행적 또한 식별된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에 품에 의지하여 누웠으며'(요 13:23),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도록 위탁받았고(마 19:26~27), 베드로보다 앞서

달려가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맨 먼저 보았으며(요 20:1~10), 디베랴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있었던 그 사람이었다(요 21:6).

III. 주의 승천 이후의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와 항상 함께 등장한다. 곧 성전 문 앞에서 앉은뱅이를 고칠 때(행 3:1~10) 성전에서 사두개인들에게 답변할 때(행 4:1~22),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중에서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함께 파송되기도 했다(행 8:14~25).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인 갈라디아서에서 요한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언급했다(갈 2:9).

IV. 교회 전승에서의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했던 것처럼 몇몇 후대의 전승들은 사도 요한이 순교했다고 전한다. 특히 파피아스의 기록에서 그가 그의 형제처럼 순교했다고 기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승보다 더 신빙성이 높은 전승은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로 가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2세기 후반의 에베소 주교 폴리크라테스가 로마 주교 빅토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증인이자 교사인 요한은 주님에 품에 누었으며... 에베소에서 잠들었다'고 증언한다. 또 이레네오는 기록하길, 그가 영지주의자 케린투스와 대중목욕탕에서 만나자 대중목욕탕이 무너져 내릴까봐 그와 한 지붕에 있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레네오는 그의 저작인 《이단 논작》에서 요한이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남아있었다고 저술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자 모시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가서 거주하였다. 소아시아 교회를 지도하다가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요한은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받아 에베소로 귀환하여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항상 사랑으로 가득한 사도 요한이 되어 교회를 사랑으로 사목하다가 트라야누스 시대에 주님에 품에 안식하였다. 사도 요한은 복음과 부활의 증인이자 교회의 교사, 사랑의 사도로서 기독교 보편교회에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사도 요한 교회를 재건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재건한 당시의 6개의 돔이 있는 십자가 형태의 교회모형을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3개의 회중석이 있었는데 푸른 무늬 대리석 기둥들의 줄지어서 있었고 기둥에 새겨진 모노그램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부인의 이름으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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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 교회를 재건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부인 터오도라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와 그의 수행원들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터오도라 황후와 시종들

 

 

AD6세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시대 재건한 사도요한 교회모형[Model of St. John's Church]

 

 

AD6세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시대 재건한 사도요한 교회모형[Model of St. John's Church]

 

 

성모 마리아(Maria)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는 사도 요한(Joannes)

 

▲조반니 란프란코 - 슬픔의 성모와 성 요한(Joannes)

 

아르테미스 신전[Artemis Tapnagi]

BC 6세기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시작하여 120년을 결처 완성 되었다. 규모는 길이120m, 높이60m 크기의 순 백색대리석 장엄한 건물이며, 지름1.2m, 높이19m의 기둥이 127개로 웅장한 신전으로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은 화재와 지진 등으로 7번 파괴되고 7번 재건되었다고 한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신전은 사도요한교회 아래쪽 마을 한가운데에 있으며 현재는 1개의 원기둥 만 서 있을 뿐이다. 사도요한교회를 지을 때 아르테미스 신전을 헐어 건축 자재로 사용하면서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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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교회 아래 마을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Artemis Tapınağı]

 

 

에페소교회 유적지 아래에 있는 아르테미스신전 복원도

 

 

100년에 가까운 공사 기간에 탄생한 아르테미스신전

 

 

▲아르테미스 여신 - 에페소 박물관아르테미스 여신 상

 

 

에페소스인들이 숭배했던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 여신 - 에페소 박물관

 

 

▲에페소스아르테미스 신전(神殿) 상상도져<가져온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1-7)

 

Ⅰ. 수고와 인내의 행위들에 정통교리를 사수함

1. 교회가 칭찬 받은 일들은 수고와 인내

언제나 편견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만, 특히 보통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인식이 그렇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나 또는 “촛대를 옮기기라.”는 주님의 말씀만 생각했을 때는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 집중하면 에베소 교회는 아주 잘못된 교회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정말 그렇게 문제만 있는 교회일까요? 2:2-3절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소아시아 일 곱 교회 지도

 

여기서 “행위들”이라는 단어는 복수로 기록되어 에베소 교회의 여러 가지 “행한 일들”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실천한 행위들이 있는데 여러 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뭔가 행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행함과 함께 “수고”와 “인내”가 따르는 교회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에베소 교회의 행함은 뭔가 힘서 수고한 것입니다. 대충 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뒤에 나오는 다른 교회들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그 지역의 모교회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 힘써서 수고해야만 했던 일들을 감당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일도 에베소 교회는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지역은 가장 큰 신전이 있고, 온갖 길드라는 조합단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우상숭배와 이방신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교도의 유혹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견디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일인데, 교회 권사 집사들이 신천에 빠져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여 어렵게 하더랍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은 서로 아는 사이로 여러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일이 있을 때 참으로 교회가 힘들더랍니다.) 에베소 교회에 그런 일이 있을 때 인내하여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 부분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내용입니다.

 

2.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교회의 수고와 인내

경험한 일들이지만, 교회마다 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무의미한 일들에 매달리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많은 일들 속에서 진정으로 그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때로는 교회가 감당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일 때문에 부끄러운 교회를 들어낼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무슨 일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일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2: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인내와 함께 에베소 교회는 인내의 동기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은 얼마든지 인간의 야망을 펼치려고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야망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한 때, 자신들의 야망에 맞는 방식으로 교회를 섬겼스빈다. 각각 분파를 따라 줄을 섰습니다.(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교회를 섬긴 것이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할지라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인정하고 대단한 섬김이라고 평가할지라도 주님은 아십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할 때, 우리 주님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그들의 수고와 인내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많았다는 것만을 살피지 않으십니다. 누구를 위한 수고와 인내였는지를 보신 것처럼 우리의 섬김도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와 사회에서 수고와 인내할 가치가 있는 일들에 매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일의 목적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한 일들이 무엇이었을까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주님의 일의 모양은 갖춰도 얼마든지 주님의 일이 아닌 것과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양은 주님의 일이지만, 목적이 달라지고, 겉으로는 주님의 일이지만 속마음에서는 주님을 오히려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의하고 철저히 살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토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가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에서 생각할 할 때, 때로는 모여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주님의 일이라고 했던 시기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홀로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주님의 일을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쟁의 시기에는 전쟁의 시기에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비상한 상황입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에 따라 주님의 일이 되어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공적을 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대인들의 행위와 행위에 따르는 공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때로는 그런 오만한 생각과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들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존재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성도라는 존재의 심령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뜻을 받드신 예수님의 생애

사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구원사역을 성취해 가실 때 가장 많은 논쟁 중에 하나가 노동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안식일에 병인을 치유하시는 일들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사실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밝혀주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백성들을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보내주신 자들을 아들이신 주님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변경될 수 없는 주님 당신 자신만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안식일에도 일하셨습니다. 분명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격 당하실 일을 아시면서도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구원과 사랑을 영혼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처럼 그 모든 주님의 일들은 일들마다 가치가 있었고, 의미가 있었으며, 그 일들마다 주님은 생명의 역사를 기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그 일들마다 생명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사적인 집안 일 같았지만, 처음의 기적은 혼인잔치에서 베푸셨습니다. 즉 “포도주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일에 힘을 쏟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철저히 사신 우리 주님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생애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 교회가 나름 그런 행위와 업적들이 있을 텐데 그 일들에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는”(3)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한 일들은 또다시 아버지의 뜻을 받으신 주님의 삶을 이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인식들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섬기는 교회에서 말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인지, 자신의 야망을 위한 일인지를 구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외향으로 볼 때는 분별하기 어렵겠지만, 자신의 양심에서는 분명 소리가 들립니다. 자신이 감당하는 일이 주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하면서는 아무리 신앙적인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어코 그만두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수고하지만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다가오는 신앙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깨달은 신앙지식으로 말미암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신앙양심을 속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4. 진리를 파수한 교회

에베소 교회는 또 하나 칭찬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함으로 어떤 성취감에 젖어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파수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2)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6절에서는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이라는 용어로 다 알 수는 없지만, “니골라”라는 원어 상 의미를 보자면, “니콘(삼키다. 이기다)”+“라오스(백성)” 합성어입니다. 즉, 백성을 삼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원적인 의미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니골라당이 저지른 일이 밝혀집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살펴보면, 14-15절입니다. 니골라당은 교회에 침입하여 “14b 우상 제물을 먹게 하였고,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기서 볼 때, 그들은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백성을 멸망케 하는 방식으로 교회에 잠입하여 삼키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이단을 들춰냈습니다. 그들을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에베소 교회는 진리와 바른 교훈을 지키려는 수고와 인내의 삶을 살았던 교회였습니다.

5. 오늘날 우리를 살펴보자면

오늘날 신앙의 행함을 강조하기를 좋아 합니다. 진리를 포기해서라도 행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구원교리와 참된 진리를 간직한 교회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진리를 버리고 그 중임에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참다운 교리를 붙잡으면 사람들은 곧바로 편협한 기독교인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행함을 중심에 두려는 사람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붙잡은 참된 교리를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리고 사회정의와 정치 문화에 참여해서 이루는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항상 해오던 방식입니다. 사회운동으로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방식입니다. 나름 자신들의 교회가 정의로운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버리고서라도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가 행함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좀 더 살펴 깊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일들입니다. 바울사도의 경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20장29-31절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 이처럼 바울의 경고에 따라 에베소 교회는 그 후로 쉬지 않고 수고하며 인내 하면서 그 완악한 이단을 들춰내고, 정통교리를 지킨 교회로 섰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정통 교리와 수고하는 행위에 인내하는 일까지 겸비한 교회가 있을까? 우리 주변에 이만한 교회가 있을까요? 정통교리를 강조하며, 머리도 든든하고, 손발도 건강하여 여러 일들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교회로 건강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에베소 교회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Ⅱ. 그러나 첫 사랑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문제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선 요한 사도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베소 교회는 요한 사도가 시무하던 교회였습니다. 심지어 요한 사도는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이 있는 사도였습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사랑의 사도가 시무한 교회가 첫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1.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 있어서 첫 사랑은 무엇입니까?

9절에서 “처음 행위들을 가지라.”고 하셨는데 이는 처음 행위를 다시 행하라는 말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는 곧 에베소 교회가 처음 행위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처음 행위들은 특히 에베소 교회에서는 어떤 의미일까? 에베소 교회가 처음 세워지던 시기로 돌아가 행19:1-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A.D 53년경입니다. 교회 초기의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개하면서 세례를 베푸는 일과 성령의 임하심을 에베소 교인들이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2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얻고, 이후에 회당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장소를 옮겨서 ‘트란누스’라는 철학자의 이름으로 세워진 철학 강의실이 있었습니다. 그 “누란도 서원”에서 바울은 무려 2년 동안이나 매일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열정이 대단했는데,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칠 때 사람들이 듣고, 바울의 손길에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베푸는 일로, 더욱 더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게 53 년경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에베소 초대 교회의 상황입니다. 그렇게 성경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에 누가는 증언하기를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행19:20)을 얻었다는 증언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얼마나 영적 갈망이 대단했던지 대단한 열심과 사랑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 목사님의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가난한 마음은 곧 하나님을 갈망이고 하나님을 향한 가난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분명 첫사랑이 대단했습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지던 시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2. 성도들 간의 사랑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는 그 사랑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20:17-35절에서 A.D 55 년경에는 바울사도가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놓고, 유언 설교를 할 때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장로들과 바울을 서로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 하니라.” 간절한 기도와 서로간의 정이 묻어나는 장면입니다. 성도들 간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초기에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욕적으로 청종했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와 장로가 한 자리에서 서로를 안고 기도하며 기도하는 깊은 관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3. 책망 받은 에베소 교회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습니다. A.D 95 년경 요한 계시록을 기록할 무렵에는 에베소 교회가 그 첫 사랑의 행위들을 버렸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사도가 얼마나 마음아파 했겠습니까? 자신이 목양하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 요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기부터는 조금씩 교회가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기를 맞이했습니다만, 교회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해 식상한 태도를 우리가 품고 있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이단들이 난무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면서 교회를 소란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이단을 몰아내고, 그러면서 교리의 바른 가르침에 열심이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우들과 이웃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식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불태우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4)

 

Ⅲ. 기억하고, 회개하여 행하라.

하지만 주님은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하셨습니다. 5절에서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서는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고 하셨는데, 3개의 명령형으로 이뤄졌습니다.

 

1. 기억하라.

“기억하라.”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해서 그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의 그 열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첫 감격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기쁨과 행복의 자리를 기억해 내도록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맛보았던 처음 사랑과 감격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회고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회고신앙은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탄핵하고, 그들에게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서 외쳤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과거에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동일하게 모두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선지자들의 외침에 참다운 성도들이 깨어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다시 돌아가 여호와의 구원을 회고하며 현재의 신앙을 깨우는 방식으로 구원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어디서나 회고하여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명령한 말씀은 여러 곳에 나옵니다. 바울사도의 서신은 모두가 십자가를 감경을 회복하도록 외쳤던 말씀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제 처음 복음을 듣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던 것처럼 회고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마음에 역사하시는 우리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신앙에 다시 촉구하시는 것은 돌아가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생각하고 돌아가 그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2. 회개하라

참다운 신앙의 회고를 통해서 기억하면 그 구원의 감격과 회복해야 할 길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지는 일을 예고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 과거형으로 과감하게 단호하게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첫 사랑에는 말씀을 사모하는 일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2년 동안 매일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흥왕함을 경험 했던 사람들이 에베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고한 다음 그 떨어진 자리에서 무엇이 잘 못된 것이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생각과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3. 행하라.

“행하라.”는 말씀도 부정과거형으로 과감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회고하고 돌아볼 때 자신이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해야 할 일이 들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행하는 일은 곧바로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Ⅳ. 결론과 적용

주님은 이렇게 회복의 대책을 제시하여 주시면서 동시에 에베소 교회를 격려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막연하게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이 아니라,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하고, 회개하여 참다운 길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길이 곧 승리하는 길입니다.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여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3:22절의 말씀의 회복입니다. 계시록 22장2절의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듬 신자는 이런 원리의 신앙생활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선한 목자로 오셨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목적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과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여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이처럼 본문의 말씀대로 회복을 원하는 성도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고, 회곡된 감격으로 회개에 이르고, 회개한 영혼은 다시 첫사랑을 다시 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결과 그는 영생과 영생의 풍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리게 되어 약속하신 생명나무 실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와 깊은 연합을 이루고, 그분의 생명을 누리면서 진리를 따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이단을 몰아내고, 사이비 같은 가르침이 얼마나 미련한 것들인지를 밝혀내되, 그들은 구원의 감격과 말씀을 사랑하는 일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꿀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