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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적극적인 신앙이란?-크리스챤의 자기 성찰

by 은총가득 2022. 1. 3.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인 신앙이란?-크리스챤의 자기 성찰-안토니 A. 후크마 저

 

1. 이 책을 읽고 얻게 된 자기자신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개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통치의 대리자이다. 타락한 후에도 인간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또한 타락한 인간도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한한 값을 주고 구속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 믿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생명에서 보아야 하며 계속되는 부패와 실패로서 보면 안된다. <이와같이 너희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롬 6:11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다. 나는 예수 믿기 이전에도 심지어 예수 믿고나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생명이며, 새로운 생명이 참 나이다. 주안에 있는 것이 나이다. 주밖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죄이다.

  

2.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단 하나를 인용하라.

 

57쪽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된 자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새사람은 단호히 옛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옛 생활 방식에서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더이상 옛 사람과 동일시되기를 거부한다.

 

이 문단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구원받은 내가 새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옛사람이 아니다. 옛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을 거부한다. 사탄이 또 어떨 때는 나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싶을 지라도 나는 결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고, 그렇게 여겨야 할 사실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없으며 더 분명한 사실도 없다. 예수 믿으면 중생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없으며 더 확실한 사실도 없다. 그 어떤 역사적 사실도, 그 어떤 과학적 사실도 ,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그 어떤 사실도 이 사실에 비추어보면 희미하고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나는 나를 믿지 않고, 내 생각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무엇이라고 말해주는 것을 믿겠다.

 

3. 이 책이 앞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에서 적용하는 마지막 부분은 좀 촛점이 흐린 감이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내가 아이를 키울 때 어떻게 해야할 지 참고가 되는 점이 있었다. 앞부분은 참 좋았다. 은혜에 대해서 이 책이 설명해준 것으로 여겨지고, 나 자신을 은혜 안에서 바라보고 다른 사람도 은혜 안에서 바라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 안에서 보시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기준해서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절대 사람 원망하지 않는다는 나의 결의를 새삼 확고하게 했다.

중국 단기 선교 사역을 하고, NSM에서 섬기면서 목사님들에게 배운 내용이 이렇게 책에서 확인되어서 참 좋았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과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아가페, 새창조하는 일에 초청받았음을 생각해 보았다.

 

책 내용

 

이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보다 분명히 아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크리스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크리스챤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계속적으로 범죄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와진 새로운 피조물임을 강조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에 관한 문제다.  

프롬,마스로우,로저스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찾도록 자극한다. 인간의 본성은 중립적이거나 선하며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 이론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인문주의 철학자들이 제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긍정적인 자아 형상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고찰해야 한다.

   

제 1 부 성경적 배경

 

바울은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큰 죄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를 용납해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를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하는 죄인으로는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결코 자기의 죄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예를 들면 딤전 1:15에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같은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묘사하고 있다. 엡 3:8의 요점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이 특별한 지위를 주시는 것을 대조하는 것이다. 고전 15:9-10에서 바울은 자기의 과거 교회 핍박을 뉘우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주장하고 있다. 이유는 은혜를 믿기 떄문이다. 비록 바울이 자기의 이전 생활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하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이다.(빌 3:13)

바울은 자신의 죄를 조금의 허식 없이 돌아보면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딤전 1:12-14) 그는 탁월하게 긍정적인 자아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 자랑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4-5.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고후 4:7.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9-10.

 

바울은 그의 업적들을 손을 흔드는 것과 같이 금방 털어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쳤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감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 15:10 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이라고 하였다. <딤후 4:7> (빌 3:12-14) 그리고 그는 여러번 강조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11;1,빌 3:17,살후 3:7>고 한다. 바울은 내가 죄인의 괴수이다라는 현재형을 쓰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보았다.

 

죄의 문제와 죄의식의 문제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죄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제이다. 롬 3 장에서 죄의 보편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롬 3:24-25)은 하나님에 의하여 무죄 선고 받는 것과 완전히 의인이 되며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속죄라는 말은 구약에서 언약궤의 뚜껑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덮개에는 피흘림을 통해서만이 사람의 죄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죄의 날에 제물의 피를 뿌렸다.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로 그의 백성의 죄를 제거할 수 있다. (롬 3: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를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니라)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 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미워하시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죽음에 의해서 아버지의 마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법적 근거인 속죄 희생을 제공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명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고후 5:21,고후 5:19께서 대속 사역의 主語는 하나님 이시다.

 

믿는 자는 잘못을 범했을 대 그의 죄를 하나님과 그가 잘못한 사람에게 고백하여야 하며 필요하다면 보상하기도 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죄의식을 영원히 끊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챤들은 죄로부터의 자유 때문에 다시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자유스러운 은혜의 복음을 형식적인 속박의 체계로 변화시켰다.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결코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한 말씀을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요 3:16,5:24 사도행전에서도 13:38-39, 바울 서신에서도 죄에서의 구속을 증거한다. 롬 5:1,8:1,8:33-34, 엡 1:7-8, 히 9:26. 용서의 확신을 전하는 구절로는 요한 1서의 1:9 계시록 1:5-6이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 성구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하여 어떤 비난도 없으며, 그의 죄는 모두 용서받았고, 그의 죄는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옷입은 것으로 보시며 더 이상 죄인으로 보시지 않는다. 그의 죄는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 버려졌고, 그는 즐겁게 찬송할 수 있다.

 

옛사람과 새 사람

 

존 머리는 그의 저서 <기독교 윤리>에서 믿는 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의 신자를 생각해야 한다. 비록 아직 완전하게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렇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그의 저서 <바울>에서 바울이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는 일차적으로 회심한 후에 각 크리스챤의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한 번의 전적 변화에 관계한다고 말했다.

 

믿는 자는 자신에게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한다. 바울 자신은 믿는 자의 자아형상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롬 6:11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 때문에 우리는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았고, 믿음으로 그의 모든 유익들을 소유하였다. 우리는 옛 사람과 우리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새 사람과 동일시하여야 한다. 자신을 부분적으로는 옛 사람이고 부분적으로는 새 사람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옛 사람의 생활 방식으로 빠져들때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거스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형상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된 자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새사람은 단호히 더이상 옛 사람과 동일시되기를 거부한다. 중생한 사람을 <부패했다> 또는 심지어 <전적으로 부패된> 자로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를 묘사하여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것과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6-8장) 신앙인은 자신이 더 이상 육신의 노예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자유로와졌다는 사실을 보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이 일부분은 육신에 일부분은 성령의 길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크리스챤은 성령 안에 있고 그리고 단호하게 육신의 삶의 길을 경험한다. 크리스챤의 생활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믿는 자로 하여금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하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승리하는 신앙을 반영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은 성경이 정확하게 우리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크리스찬의 자아형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한 측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우리 자신을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올바른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은 우리 자신 속에 자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계속하여 행하시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챤이 비록 육에 대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한다고 할찌라도 그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할 것을 알고 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라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로마서 7장

 

저자가 믿기로는 롬7:13-25 말씀이 지니는 의미는 거듭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성령의 능력 주심을 떠나서 홀로 율법을 통하여 죄와 싸우고 있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즉 이 말씀은 거듭난 자의 눈을 통하여 보여진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묘사라는 뜻이다.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생활을 묘사한 말씀이 아니다.

(1) 롬 7:13-25의 말씀은 롬 7:5의 말씀 즉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의 반영이며 자세한 설명이다.

(2) 롬 7:13-25의 말씀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에 관하여 적어도 16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령에 관하여, 죄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베푸시는 능력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3) 롬 7:13-25의 말씀의 패배적인 분위기는 갈 5:16-25의 믿는 자의 투쟁을 묘사할 때 승리의 분위기로 기록한 것과 대조된다.

(4) 롬 7:25의 특별한 단어에 관심이 집중된다. <내 육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스스로 투쟁하려는 사람,성령의 힘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5) 롬 8 장에서 갑자기 돌연한 분위기의 변화가 있다. 롬 7:13-25의 말씀은 7:5에서 서술한 상황에 대하여 세분해주며 생생하게 극화시켜주는 일종의 중간극(interlude)을 구성하고 있다. 8:2에서 말한 것은 실제로 7:6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찌라>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말씀은 로마서 7장이 아니라 8 장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크리스챤 자아형상관은 로마서 7장에서부터가 아니라 8장에서 부터 나오고 있다.

 

죄없는 완전함인가?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중생한 사람은 여전히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에 빠졌을 때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용서함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대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시간>에서 크리스찬인 우리는 D-day와 V-day에서 산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미 새생명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시작이요 첫열매이다. 가장 좋은 것은 곧 올 것이다. 새 사람은 계속적으로 새롭게 함을 받는 생활의 새로운 방법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점진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크리스챤의 용납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절하게 감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긍정적 자아형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아를 자유스럽게 잊어버릴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자기 변명이나 체면따위는 완전히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것이다. 빌 2:3, 롬 12:10,롬 12:4-5,15:7에서 동료 크리스챤을 용납하는 것은 크리스챤의 일반적인 의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동료 크리스챤의 실수를 용납하여야 한다. 바울은 서로가 심판하는 자리에 앉지 않기를 촉구하였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한다. 우리가 서로 용납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공동체로서 산다. 우리는 서로를 용서받은 죄인 혹은 깨끗함을 받은 죄인으로 대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혹독하게 판단하지 말고 최후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전 4:5)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서로를 인하여 매일 감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차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를 인하여 즐거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연합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은 우리의 현재 생활에서 죄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우리가 계속적으로 살고 있는 삶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을 고찰하여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독자들은 비록 믿는 자들이 결정적으로 옛 사람의 생활 방식으로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한다. 우리가 새롭다는 것을 믿는 것은 크리스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새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은 죄없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옛 사람의 부분은 여전히 죄를 짓고, 새사람의 부분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골 3:10에 근거한 새 사람의 개념은 더욱 실제적인 것이다. 새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와져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실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기본적인 방향을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들의 긍정적인 자아형상의 근본적인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목사, 상담자, 교사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취급하려고 한다.

교사 특별히 초등학교 교사에 대하여 생각코자 한다. 무엇보다 <학생 각자에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또한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믿도록 해야한다. 또한 교사는 <각 어린이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의하여 용납되어졌다는 것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학생 각자에게 많은 격려를 한다. 또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실재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즉 자기보다 재능있는 급우를 시기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자기 자신의 재능도 얕보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크리스챤 부모는 하나님과 어린이의 관계를 가르쳐야 한다. 성숙해감에 따라 복음을 교육시켜야 한다. 기도로 인도해야 한다. 아이들을 전적으로 용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해야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징계를 자기의 인격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의 감정까지를 포함한 능동적 청취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행동을 적당하게 규제해야 한다. 크리스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지혜로우면서 단단하게 훈련시켜야 한다.

 

크리스챤 친교의 기쁨

 

예정은 내가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나의 형제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은 마치 머리와 지체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를 해칠 때 우리는 그 형제가 속하여 있는 그리스도를 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놀라운 성도의 교제를 누렸다. 우리느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첫째, 우리들은 동료 크리스챤을 사랑하고 관용해야 한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둘째, 경청이 중요하다. 깊이 듣는 법을 배우라. 당신의 자아를 죽이는 것을 배우라.

셋째, 우리는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의 혀를 붙잡는 사역이다. 해가 되는 말, 불친절한 말, 잔인한 말등 부주의하게 말해진 말로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해를 입었는가. 그것은 사실인가? 그것은 격려하는 말인가? 그것은 필요한가? 이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한다.

마지막으로 형제들에게 행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인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모임을 형성케하고, 서로 친교하며,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생활의 최고의 경험 가운데 하나인 크리스챤 친교의 기쁨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의 事役

 

제1장 神的 作定 槪觀

 

제1절 神的 作定 性質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될 일체의 사건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을 말한다. 위디한 가능성의 저장고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발생할 사건들만을 그의 작정에서 구체화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그의 계획에 따라 이성적 괴조물들에 의하여 확실히 실현된다. 작정은 창조하시며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의 조행과 함께 그들의 행위를 포함한다.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 작정인 것이다.

 

제2절 신적 작정의 특성

 

[1] 그것은 신적 지혜를 기초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세우시되 지혜로 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2] 그것은 영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적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시간의 시작 이전에 세워졌음을 뜻할 뿐 아니라, 그 행동은 변함없이 지속한다는 데 있다.

 

[3] 그것은 효과적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한 것은, 확실히 실현된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지 못한다(시 33:11; 잠 19:21; 사 46:10).

 

[4] 그것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시며 참되시기 때문이다(요 23:13-14; 사 46:10; 눅 22:22; 행 2:23).

 

[5] 그것은 무조건적이다.

작정은 피조물의 자유행위 또는 그들의 예지된 불순종, 혹은 예지된 신앙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앞으로 실현되는 조건도 역시 결정하신다.

 

[6] 그것은 전포괄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엡 2:10)와 악한 행위(잠 16:4; 행 2:23; 4:27-28), 우발적인 사건들(창 45:8; 50:20; 잠 16:33), 목적과 수단들(살후 2:13; 엡 1:4), 인명의 기간(욥 14:5; 시 39:4), 인간의 지체(행 7:26)등을 포함하고 있다.

 

[7] 그것은 죄에 관하여는 허용적이다.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보통 헝용적 작정이라고 불리워진다. 이 작정은 미래의 죄행을 절대적으로 확실케 하는 것만은 사실이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로 그것을 실현시키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자기 결정의 죄행을 방해하지 않으시고, 그 결과를 조정, 관할하기로 작정하셨다(시 78:29; 106:15; 행 14:16; 17:30).

 

 

제3절 작정교리에 대한 이론

 

개혁파권 밖에서는 작정의 교리는 거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펠라기우스파와 소씨니안파는, 그것이 죄성서적이며 죄합리적이라하여 거절하였다. 알미니안파는 그성을 전적으로 무시하든가, 혹은 그것이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다음에 특히 이 교리에 대한 세가지 이론이 있다.

 

[1]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고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작정 하셨다면, 인간을 반드시 자기가 하기로 되어 있는 그대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행동에 대하여는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행위를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유이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역시 가르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동의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인간의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2] 그것은 구원에 대한 인갅거 노력의 모든 동기를 제거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 일것이다.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다.① 하나님의 감추어진 작정은 도저히 인간행위의 규칙이 될 수 없다 ② 수단도 역시 작정하셨다. ③ 작정은 전적으로 수단과 목적을 연결하며, 그리고 목적은 오직 수단의 결과로만 작정되었기 때문에, 작정은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는 것이 된다(엡2:10; 빌2:13).

 

[3]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고 한다.

 

작정은 다만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들인 자유적 도덕적 존재들의 창조주임을 말해 줄 뿐이다. 하나님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제2장 豫 定

 

제1절 예정의 대상

 

예정은 하나님의 모든 이성적 피조물, 다시 말하면, 온 인류 선한천사와 악한 천사들을 내포하고 있다.

 

제2절 예정의 두 부분

 

[1] 選擇

 

①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

② 어떤 직무와 특별봉사를 하도록 결정된 개인의 선택

③ 하나님의 자녀와 영원한 영광의 후사로 되기 위한 개인의 선택

선택이란, 인류의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또는 그에 의하여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2] 遺棄

 

유기는 사실 두가지 목적을 가지게 된다.

① 중생과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신다,

②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수치와 분노에 임하게 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그는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마 20:14,15; 롬 9:14,15)

 

제3절 墮落前선택說과 墮落後選擇說의 問題

 

그 차이점이란 근본적으로 신적작정의 순서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1] 타락전 선택파의 순서

 

a. 하나님은 먼저,작정하셨다.

b. 하나님은 이미 선택되고, 혹은 유기된 자들을 창조

c. 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타락을 허용

d. 하나님께서는 선택자를 위하여는 구원의 길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는 간과하셨다.

 

[2] 타락후선택파의 순서

 

타락전 선택파의 순서가 양론 중에서 보다 이상적인 것이라고 하면, 타락후 선택파의 순서는 보타 역사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a.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다.

b. 그리고나서 그는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c. 다음으로, 하나님은 일정한 수의 타락자를, 곧, 정죄 받은 무리를 영생얻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간과하시어 그들 죄때문에 영원토록 멸말받도록 작정하셨다.

d.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선택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준비하기로 작정하셨다.

돌트회의에서 개혁파회가 공적으로 채용한 순서이다.

 

 

제3장 創 造

 

제1절 창조개관

 

[1] 창조의 관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하여, 세계와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창출하여내신 하나님의 행위 세계가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여, 매일같이 그의 권능에 의항여 유지되도록 하셨다.

 

[2] 창조의 시기

 

여기의 ‘태초’라는 말은, 모든 일시적인 사물의 시초와, 심지어는 시조 그 자체의 시초도 의미한다.

 

[3] 창조의 방법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하다’라는 말은 무에서부터 무엇을 산출한다는 것, 기존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질상 부적당한 어떤 기존자료에서부터 무엇을 산출하여 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4] 창조의 궁극적 목적

 

⒜ 인간의 항복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교리

고대 희랍과 로마 철학자들의 얼마와, 종교개혁 시대의 인문주의자들과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선언적 영광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교리

다만 그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의 안녕과 완전한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5] 창조교리에 관한 여러가지 이론

⒜ 이원론

이 이론의 취지는, 하나님과 물질은 다같이 영원적이라는데 있다.

⒝ 유출론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과 세계는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세계는 신적 존재로 부터 필연적으로 유울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관념은 범신론의 모든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 진화론

진화론은 마치 창조의 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자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진화는 발전하는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것은 마침내는 영원한 것이거나, 창조된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2절 영적세계 창조

 

[1] 천사의 존재와 성질

성서는 일관하게 천사의 존재를 전재하고, 그들에게 참 인격성을 부여하였다.

천사는 결혼하지 않으며(마 22:30),보이지 않으며(골 1:16),골육이 없으며(눅24:39),또는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도 다수로 임재할 수 있다(눅 8:30)

 

[2]천사의 계급

(a)그룹

그들은 낙원의 입구를 지키며(창 3:24),속죄소를 덮는다고 묘사되었다(출 25:18)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과 영광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성을 지키는 것이다.

(b)스랍

그들은 하나님께 시종들며, 하나님을 찬양하며,하나니므이 명령을 준행하기로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스랍은 화목의 목적을 이루어,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접근하게 한다.

(c)가브리엘과 미가엘

분명히 인간에게 신적계시를 전달하고,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 그의 특별직무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불리워졌고, 용감한 천사임을 보게 된다.

(d)정사,권세,보좌, 주관

이것들은 역시 천사들을 부르는데 사용되었다. 천사들중에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 뿐이다.

 

[3] 천사의 봉사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들은‘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들에게 심판을 집행하기도 한다.

 

[4] 악한 천사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공인된 수령으로서, 분명히 천사들 사이에서 왕자의 하나였다. 이 사단들은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데 그 능력을 사용한다.

 

 

제3절 물질세계의 창조

 

[1] 창조설화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모세나 혹은 고대족장들 중의 한 사람에게 계시되었고,마지막에는 그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모세가 기술하였을 것이다.

(a)원시창조

창1:1 우주의 원시적 직전적 창조의 기술로 보는 것이 좋다

(b)육일간의 창조의 완성

어떤 학자들은, 창세기 제1장이 말하는 날들은 지질학상 년대와 일치하는 장기간의 시간이라고 가정한다. ‘날’이라는 말이 보통 의미로 채용되어야 한다.

(c)각일의 사역

① 첫째 날에는 빛이 창조되었다.

② 둘째 날의 일도 분리의 사역이었다. 궁창이 성립되었다.

③ 세째 날에도 분리의 사역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일이었다.

④ 네째 날에는, 일월성신이 여러가지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 빛의 휴대자로 창조되었다.

⑤ 다섯째 나라에는, 공중과 수중의 거주자인 새들과 물고기들이 창조되었다.

⑥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에는,창조의 사역이 그 절정에 달하였다.동물 중의 최고 계급들이 창조되었다.

⑦ 하나님의 안식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깊은 만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었다.

 

[2] 창조의 교리 진화론

(a)자연주의적 진화론

자연주의적 진화론 의하며, 일체의 식물과 동물(인간도 포함하여)그리고, 감각,지성,도덕,종교와 같은 생의 여러가지 현상은 물질과 생명의 단순한 형태에서 부터, 완전한 자연과정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b)유신적 진화론

하나님께서 발전의 과정, 곧 자연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설명하며, 또한 하나님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있어서와 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기적적인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기독교의 역사관과 역사의식 문제 

 

I 기독교와 역사

 

1 기독교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삶과 역사는 동일선 상에 서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산다. 또한 역사적인 존재다. 이와 같이 역사를 삶의 중요한 것으로 볼 때 삶 속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앙과 역사의 관계가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란 말은 아주 보편적으로 그리고 쉽게 사용되고 있지만 막상 역사란 무엇인가? 대한 답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넓게 보면 시간 속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를 말할 수 있으나,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역사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탐구되고 기록된 것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기록된 역사라도 그 구분은 다양하게 되며, 또 역사를 움직이는 힘에 따라서는 구속사적 입장과 일반사 즉 세속사적인 입장으로도 말 할 수 있다.

보편적 입장의 역사의 의미를 규정지어 놓고 구속사와 세속사의 위치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역사란 먼저 단순한 역사의 사실들이라기 보다는 의미가 탐색되고 부여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역사는 역사 본질의 불완전성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역사란 보편적인 성격을 무시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개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무엇이 공통성을 갖고 있느냐를 추구하기 보다는 무엇이 다른가에 더 중점이 주어지며 그래야만 역사는 계속적으로 그 존재기능을 확충해 나갈 수 있다. 이점에서 역사관이란 본질적으로 역사성의 추구와 대립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논의는 주로 아카데미즘적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것이 갖는 성격과 한계를 대략 살펴 보았다. 이것이 세속사이다. 세속사의 특징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간 중심적 역사이다. 아카데미즘적 역사는 자료나 가설, 합리적 근거에 기초하고 서술된다. 반면 구속사적 역사 접근은 우선 성경적 원리가 역사 설정의 기본을 이룬다.

 

기독교의 역사성

 

기독교와 역사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이고, 또 삶과 역사를 신앙 속에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가장확실한 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사건이다. 이것은 역사적 확실성에 기초하고 있다. 토인비는 종교의 생명성은 그 종교가 얼마나 역사성에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기독교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하였다. 구약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속 역사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역사기록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역사의식은 모든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이 두 관계는 약속 즉 계약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역사는 약속의 파기와 재성립의 과정이기도 하다. 구약의 전반부를 읽으면서 히브리인들의 얼마나 역사를 중시하고 역사의 신을 따르며, 이것을 전수하는데 열심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그들의 이같은 역사의 신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바빌론 유수 이후보다 법률에 대한 신뢰로 바꾸어지기는 한다. 가히 이들의 역사사상은 신을 역사적 존재로 파악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기독교적 역사이해의 특징

구약에서의 강한 역사의식은 두 가지 성격을 띠며 변질하는 것 같다. 하나는 종말적 기대이며, 다른 것은 율법주의이다. 이 두 문제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완성을 보게 된다. 신약에서의 모든 역사적인 설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사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이라는 두 사건에 집중된다

이상의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있을 것 같다.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다는 믿음과 하나님의 간섭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다.그런데 이같은 구원계획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지만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는 역사를 주관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그리스챤의 역사인식은 몇가지 점에서 아카데미즘적 역사인식과 크게 다른 요인을 안고 있다.

 

상이한 역사인식의 교차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 역사인식의 틀을, 믿음의 틀로서 교체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교차되는 원리적 공통점은 우선 나는 하나님의 역사계획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 역사 사이의 교차점은 인간 개인에게서 발견된다고 본다. 하나님과 지상 역사 사이의 연결 고리는 인간 개인 개인이라는 것이다.개인 개인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역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버터 필드의 말은 그 점에서 옳다.

 

일반사학에서의 개인의 역사적 역할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개인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카알라일이나 토인비의 입장과, 개인은 단지 부분적 역할 만을 담당한다는 두 가지 입장이다. 인간의 개인의지는 역사형성의 중요 요인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나 지형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이제 두 가지 점은 분명해진 것 같다. 하나는 내자신의 개인의지 또는 선택의 자유가 나의 개인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또 한발 더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외적 요인 즉 외적 힘에 의해서 나의 삶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이 만일 어떤 목적지에 왔을 때 왜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세 가지의 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오고 실어서 왔지요”와 “기차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주었기 때문”에 라고 답하거나 “하나님의 뜻으로”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역사의식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이란 것도 개인의 의식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크게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분명한 역사의식의 기준들일 있다. 하나는 개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는 언제나 벌이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민족이나 국가를 벌하였다. 그러나 회개하는 개인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죽어간다는 공통된 사실이 있다. 우리들은 삶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자기만 영원히 살것처럼 타인을 수단화해서는 안된다. 역사 앞에 진정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삶이 이세상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저세상까지 연속된다는 믿음에서만 이같은 현세적 억울함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2 어거스틴의 역사관

1. 어거스틴 사관의 문제

기독교사관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다. 그의 사상은 서구인들의 정신속에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다.

J.Figgis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그가 역사와 신학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철학자로 간주하는 강력한 입장이 또한 대두되고 있다. 모든 인정된 역사철학이란 그 나름대로의 결함을 갖고 있다. 역사철학자는 또한 사실에 약하다는 어려움이 있다. Dawson의 지적처럼, 어거스틴은 어떤 형태이든 비젼을 제시한 역사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2. 역사가로서의 어거스틴

St.Paul의 역사의식이 어거스틴에 이르러 체계화 되었으며, 고대의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중세질서를 마련하였다. 어거스틴의 역사

  인용은 대부분 로마의 역사가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Sallust와 Livy가 그 애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자라온 교육적 배경과 역사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의 과정을 보면 그의 교과 과정은 문학과 수사학이었다. 수사학 교실에서 학생들이 Livy의 역사책을 큰 소리로 읽고 그 문체의 장단점을 토의하는 것은 그때의 학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진정한 역사란 성경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진실의 기준은 그것이 성경과 합치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시험받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역사를 해석하는데 3가지 기본점을 항상 배려하였다.

 

첫째는, 성경기록에 대한 그의 충실한 태도요, 두번째는 목적을 향해 역사는 진행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이며, 세번째는 신의 행위는 무엇인가 목적을 갖고 있다는 세가지 관점이다. 그는 인식의 방법을 또한 두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는 이성에 의한 인식으로서, 이는 영원을 지향하는 지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을 통한 인식으로서, 이것들을 지식이라고 불렀는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 시간의 경과속에서,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지각되는 사물에 관한 지식 등이 이에 속한다.

어거스틴의 역사연구 목적은 사건들의 유형을 발견하는데 있다. 어거스틴 자신도 역사를 하나의 신앙의 대상으로 인지하고 있다. “신앙과 역사적 사건들”에서 어거스틴은 믿음의 대상을 3종류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항상 믿어지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두번째로 믿어지자마자 이해되는 것들, 세번째로 처음에 믿어지고 다음에야 이해되는 것으로 신앙이 이에 속한다.

 

3. 어거스틴 사관의 구성요소

그의 사관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은 크게 나누어 천지창조와 종말의 문제, 원죄와 약의 문제, 일단의 선택적 행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예정론 그리고 그의 시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결정의 주체는 항상 의지라고 믿고 있었으며, 영혼을 죄짓게 하는 것은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썩게하는 죄에 찬 영혼이라고 보아, 주체는 항상 의지임을 밝혔다. 그는 바울의 예정론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론화시켰는데 즉 예정과 자유의지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입장을 견지하려고 부실한 흔적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현실적으로는 사실인 것을 이해하는 방법론이다.

어거스틴의 시간론은 시간이전에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시간의 창조자이신 그에 의해서 시간은 단절될 수도 있음도 말하고 있다.

 

3 크리스챤의 역사인식

역사종교

 

기독교는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종교다. 기독교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볼 때, 역사는 곳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뜻이 역사하여 전개되는 시현장의 의미를 지닌다.

성경의 역사성

구약성경 39권 중 17권이 역사서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 역사서들에서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구속사적인 요소를 제외시킨다면, 그 역사적 사실성이나 그 기술방법이나 시대성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세속사적 역사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역사학 발전에 미친 영향

서양사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은 사실 기독교적 시대구분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그리고 4국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계사적인 역사안목을 배태시킨 것도 기독교적 역사시각에 기원한다. 또한 역사철학의 시작을 기독교적인 역사인식의 전통에서 구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인식은 목적론적이라는 접에서 진보적이다. 그래서 K.뢰빗트와 버터필드는 서양의 지보사관은 기독교적 역사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 역사와 인식

기독교 역사인식은 세가 확신 위에 서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주장, 두번째는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믿음, 세번째로 그가 계획했던 의도대로 역사의 종결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세속사를 구속사에 종속시키려는 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 인식이다.

 

인식과 역사이해와의 관계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하면, 어거스틴은 인식론 또한 자신으로 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바로 자신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존재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의 근거로 삼았다. 무릇 “무엇이 참이다”라는 것은 이미 진리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믿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성 속에 조명하는 것을 말하며, 신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이 수용성을 뜻했다.

역사의 평범화를 위한 제언

기독교의 진정한 이해는 역사적 접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감히 지적하였다. 기독교 역사인식의 기본 출발점은 역사학이 아니라 신앙에서 부터라는 점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같다.

 

4 역사와 개인

1. 문제의 제기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정주의적 입장에 있는가 아니면 개인의 역할과는 무관하게 필연적인 과정을 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요약된다.

역사해석의 출발은 사실의 탐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기독교인 역사학도로서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한 바 있다. 고대사가들은 인간의 탐구로부터 역사연구를 시작했고 오늘날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와 개인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몇 사람의 대표적인 사학도의 입장을 밝히고, 성경적 입장에서 본 역사와 개인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영웅과 지도자

역사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사는 지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은 소수 지도자의 출현으로 이루어졌다. 안병욱 교수는 편의상 이들 영웅을 4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그 기준은 “창조의 내용과 방향에 따라 첫

째는 성자형의 인물, 둘째는 영웅형의 인물, 세째는 천재형의 인물, 네째는 기능형의 인물로 나누었다. 영웅형의 인물은 “강한 의지”를 추구한 사람들로서 타인의 지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로 영웅은 다방면에 걸친 지도적 입장에 선 뛰어난 인물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동류의 의미로 사용될 수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자형 인물이나 영웅형 인물, 재능형의 지배는 두가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같은 강제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합법적 지배라 했고, 전통적 지배라고 했으며,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했다. 엄격한 의미로 베버의 지배형 중에 카리스마적 지배만이 영웅적 지배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그의 추론으로 볼 때 고전적 의미의 영웅은 사라져 간다 하더라도 지배관계의 측면에서 결코 영웅이나 지도자는 사라질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오히려 절실히 요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대의 지성 카알 야스퍼스는 지도자 출현의 필요성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라고 했다.

 

3. 헤로도터스가 본 개인과 역사

그는 결국은 인간의 행위는 선택인데 선택하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방황과 한계성을 성격적으로 잘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이 행하는 선택은 주로 필연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역설적으로 필연은 인간이 행한 선택을 통하여서도 나타난다.

 

4. toynbee에 있어서의 문명과 개인

그가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려 한 점, 민족단위의 역사를 문명단위의 역사로 확대하여 포괄적으로 문명상호간의 연관을 지으며 그 성쇠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와 그를 뒷받침한 해박한 지식을 통한 공헌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문명을 크게 두 막으로 나누었는데 제1막은 성장이고 제2막은 쇠퇴로서 붕괴되는 과정이다. 성자의 기본원리는 도전과 응전으로서 이 도전과 응전의 원리에서 도전을 수행하는 인간의 역할이 매우 중시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문명의 성장, 쇠퇴, 붕괴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요인에 있는 것이며 그것도 인간 개인의 창조력 유무에 의존한다고 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사회란 인간 사이의 여러 관계에 대한 체계라고 보고 사회란 “개인간의 여러 관계에서 빚어지는 소산”이라고 보았다.

 

창조적 인격은 어떻게든 다수인들을 자기개인의 모습과 흡사하게 변모시키려고 한다. 이들을 변모시키는 방법은 훈련과 신비주의 즉 영감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인데 앞서의 것은 도덕적 습관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것이요 후자의 경우는 인격을 모방하고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성장기의 문명이란 그 사회체 안에서 창조적 개인의 다이나믹한 운동이 행하여지고 있는 문명이며 그렇지 못한 경우일 때 그것은 정지 되었거나 미개한 문명사회라고 했다. 확실히 토인비에게 있어서 개인은 역사의 주체였다.

 

5. E.H.Carr의 사회적 산물론

Carr는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 힘을 더 중요시 하였다는 점이다. “역사상의 사실은 확실히 여러 개인에 관한 사실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개인이 독립해서 행한 것도 아니고 새인 본인들은 그렇게 상상하거나 오해하고 있지만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 동기였다고 생각하는 동기에 의해 자기가 움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인 행동에 자신의 사회적인 힘에 관한 사실들이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개인의 행동은 사회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관심을 두었던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 바로 그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역사관은 구약에 전부 요약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 전체는 역사적 성경이라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역사는 Jahweh의 원대한 계획에 의하여 결정되고 목표를 향해서 진전하는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역사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 과정은 신이 자기를 계시하는 과정이며 구속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것은 약속인 동시에 명령이다. 여기서 지도적 개인들을 통해 계약을 맺고 개인을 통해 민족과 국가와의 약속을 맺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일개의 개인도 중요하지만 사건을 담당하는 지도적 개인이 있었음을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다

 

7. 역사와 자유의지

과연 인간 개인은 어느 정도까지 역사형성의 참여자이며 그렇게 현실주의적 위치에 설 때 그가 자유주위 문제를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인정해야 하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성경에서 이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는 존재로, 의무를 가진 존재로, 따라서 자유의지가 주어진 존재로 반영되는 인간은 하나의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 혹은 의인으로 나타나며 하나의 자동기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역사는 창조적인 작업이며 인간은 단순한 꼭둑각시가 아니라 한정된 것이긴 해도 자유의지를 가진 대리자이며 활동사진에 나오는 무생명 무감각의 기계적 인간이 아니라, 드라마에 직접 등장하여 숨쉬고 활동하는 실제의 연기자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지의 자유뿐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의지를 또한 인정하고 있다.

 

8. 결어;경험주의적 역사연구의 지향점을 찾아서

허버트경의 말에 의하면 그가 수십년간 걸친 경험주의적 역사 연구를 해왔으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목적을 규명하는데 대립적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이상들과 세속적인 이상들과를 통합시키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의 역사접근 태도를 그의 저서에서 역사는 하나의 교향악이다. 인간은 그것을 연주하며 작곡가이신 하나님은 화음을 창조하며 선율을 계획한다.

 

5 역사와 인성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시간과 인간이란 두 요소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로 역사란 과거를 대상으로 시간적 체계 속에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 개념 없는 역사란 상상할 수 없다. 과거의 시간 속에 계열화되지 않은 역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두번째로 시간이 역사화 되는 것은 인간들의 행위와 관계되었을 때만 의의를 갖는다. 인간 없는 역사의 구성이란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나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며 역사는 인간의 결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과 반대로 역사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굴러가고 있으며 인간은 다만 그 같은 흐름을 따라가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을 따름이라는 상반된 입장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도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요, 하나님이 라고 본 점에서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종속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을 역사의 하나님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간의 등장 없는 역사의 무대란 결코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 무엇인가를 탐구해 보아야 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변함이 없이 일관된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다른 기본 근거 인성의 일관성이란 것을 현대의 사학자들은 심리적으로 파악하려고도 했는데, 감정, 가치선택, 욕망과 이기심 같은 요인을 배제한 역사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루소나 맹자와 같은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의 본성을 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은 자유선택의 자유를 허락받았으나 이를 잘못 사용함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고 이 죄의 행위로 말미암아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대악의 존재는 아니다. 다만 죄로 인하여 부패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선성이 내재해 있다. 인간의 죄성은 마치 방향기와 같아서 놓여진 방향에 따라 선의 역사나 악의 역사의 어느쪽이 택해진다.

 

인간들이 얼마나 선과 악이라는 선택과 인간의 죄성,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를 가지고 크리스챤에게 역사의 완성은 외형적인 완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을 통하여서만 자기 완성이 가능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크리스챤에게 구원이란 역사 과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자기 주장의 성취에 있다기보다는 죄와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다.

 

6 기독교와 역사서술의 객관성

근대적 의미의 역사의식은 기독교를 떠나서 생각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이해는 본질적으로 반역사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비역사적이다. 이러한 것은 새로운 역사이해의 폭넓은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역사의 본원은 창조주이며,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고 역사는 시작에서 끝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같은 선적인 역사관은 시간성을 띠게 되고 목적을 향해 가기 때문에 진보적 개념을 배태시킬 수 있었다. 기독교적 진보관이 근대적 세속적 진보개념으로의 탈바꿈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 역사관 뿐만 아니라 중세를 정점으로 한 역사서술 조차도 계몽주의 시대에는 그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역사주의가 등장하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는 형용사와 역사적 객관성과는 별개의 문제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문제는 결국 역사가 기독교와의 관계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Harbison이 말한 것처럼, 이 두개념 사이에는 정도 이상의 구분과 대립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역사가가 갖추어야 할 첫째 요건은 좁은 지역주의나 파당주의를 극복하고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두번째의 상사점은 판단의 문체이다. 크리스챤 사가와 비기독교 역사가 간에는 차이점 보다는 유사성을 더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의 특질적 자세는 양편 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는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되는 크리스챤 사사와 비기독교 역사가와의 공통점은 양쪽 다 현실의 평가에 있어서 보다 더 상대적 입장을 취하며, 역사적 현상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를 삼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 문제는 H.Butterfield는 갈등관계보다는 포용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Harbison과의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첫째는 전인간 드라마 개념의 관건이 되는 역사의 방향지침을 제시하고, 둘째로 기독교적 신앙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의 범위를 축소하고, 역사가의 과업은 어느 의미에서 한정적이라는 사실은 인식케 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 역사가가 선택하는 사료는 곧 그 역사가가 처한 상황의 제한을 받는다. 19세기의 과학적 방법에 의해 기술된 역사라는 것도 어떤 의미 있는 자료가 새로이 발견될 경우에 전체를 다시 써야 할 처지에 이를지 모른다. Butterfield는 역사의 고유성을 정신적 판단, 특수 과학적 성격 독자적 타당성으로 세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사실로서 제기되었을 때, 크리스챤이나 무신론자나,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 다같이 인정을 받는 독자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이점에서 Butterfield는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일반사를 읽더라도 이들을 섭리의 줄로 연결시켜 나갈 수 있지만, 우리가 갖게 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성 밑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역사 속의 개인, 제도, 어떤 역사적 행위도 “내제적인 고유한 가치에 의해 판단”이되므로, 사실상 어떤 고정된 합리적 기준을 설치할 수 없었던 것이 역사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이었다. 역사적 방법에 의해 해답하려 했던 19세기 사학이 목표로 했던 “결정적 역사”의 이상은 도리어 상대적 역사에 의해서 대치되고 말았다.

 

역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순수개관이 무엇이며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게다가 순수한 객관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역사가가 다루는 대상은 선택적이어야 한다.

역사적 지식은 단순한 과거의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역사가가 갖고 있는 그의 개성, 정신자세, 학적 수준, 그의 정신영역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철학, 그의 판단원리의 총체적 내용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역사는 은밀한 자료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전제에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을 역사가의 탐색을 통해 재발견하는 것에 불과하며 엄밀한 의미의 재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여갓가의 역사적 탐구정신에 의해 조명되었을 때 만이 그것은 역사적 자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역사 자체가 갖고 있는 객관서의 문제는 종교적 전제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역사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 때문에 안아야 할 한계적 과제라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기독교와 역사적 객관성의 문제는 이해적 입장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역사가가 서술하는 역사가 모두 편견적도 아니며, 사회과학도 또는 무신론적 입장에 서 있는 사가가 쓴 역사가 완전한 객관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어떤 당위론적 이유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연구태도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역사가와 일반 역사가간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무엇일까? 그것은 Florovsky는 기독교도인 사가는 인간본성이나 신의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보다 더 중심적인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기술적인 역사보다는 역사적 이해를 성취시키는 것과 같은 보다 더 큰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역사적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들에 직면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탐문하고 타인의 삶과 관심을 이해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가는 삶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해석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지식의 맥락에서 실제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과 역사신학의 입장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잘 본존하면서 상호간의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서야 할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을 추구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인정하며 역사신하가적 조명을 통해 역사적 사실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난제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도 크리스챤으로서의 역사가는 “왜”를 탐색하는 것이 궁극적인 과제이만 역사적 운동이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두게 되는 태도도 취해야 될 것이다. 역사가의 궁극적 기대는 역사의 진실 객관적인 역사의 서술에 도달하고져 하는 것임을 우리는 공히 동의하고 있다.


기독교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서론: 기독교 윤라학은 두가지 과제를 가진다. 하나는 세속적 또는 무신론적 윤리학의 내용을 해석하고 다른 하나는 기독인들을 위하여 기독교윤리학 자체의 의미와 근본적인 원리들을 제시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윤리들 가운데서 기독교 윤리는 독특하다.

 

본론: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관습화된 행위에 대한 학문적 반성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어떤 사회 안에서 바른 행동방식으로 인정받은 관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란 기독교인들의 관습화된 행위에 대한 학문적 반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관습화된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범이 필요하게된다. 이 규범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일반 자연 속에서(피조물가운데서) 윤리의 기준과 성경 속에서의 윤리의 기준은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도출된 규범들은 일반계시를 통하여 도출된 규범에 대하여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일반 윤리는 인간의 개인의 유익과 공동체의 유익에 근거하여 윤리의 규범성을 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상대적인 기준이며 보편적인 윤리의 기준이 될 수 없게된다. 결국 기독교 윤리학이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와 일반계시로부터 인출된 규범을 유념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삶의 현실태에 대한 주의깊은 분석을 진행하는 가운데 그 현실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관습이 과연 바르고 타당한 행동관습인가를 학문적으로 따지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삶의 목적을 기술하여 놓았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알고 그 법을 지켜야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두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범주를 벗어나 하나님의 심판에 이른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신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의 범주를 다시 정하신다. 이 자유의지의 범주와 관련하여 인간의 윤리가 형성되었고 다시 한번 확인 되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알아 볼 수 있는 영적인 지식을 허락하셨다. “인간에게 지식을 깨우쳐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이성이 이것을 알아서 의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역사로 의로운 선택을 하게 하신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선을 알수 없다. 인간은 이성을 따라서 살 때 완전한 행복을 소유 할수 있다는 철학적 사고는 인간의 이성의 판단을 신뢰하거나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이성의 판단의 기준에서 선택한 선은 인간이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고의 선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인간보다 저열한 것이 될 수 도 없다. 최고의 것이어야 한다. 육체의 최고의 것은 인간의 이성일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수요의 최고의 것은 이성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영혼의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우리의 모든 선한 것들의 완전한 선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이것에 모자라도 안 되고 지나쳐도 안 된다. 전자는 위험하고 후자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추앙하는 것은 행복이요, 하나님을 도달하는 것은 행복 그 자체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추종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분과 같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그분에게 가까워짐으로써 그리고 그분과의 놀라운 영적인 접촉으로써 그리고 그분의 진리와 거룩함에 의하여 내적으로 조명되고 점령됨으로써 그분에게 도달하게 된다. 그분은 빛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시는 수준의 삶을 인간으로 하여금 살게 한다. 이일을 하나님도 자신의 덕으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다. 인간으로 하여금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덕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정의한다. 절제는 사랑하는 것에 자기를 전적으로 내어주는 사랑이며, 용기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참는 사랑이며, 정의는 사랑하는 대상만을 위해 봉사하며 그리하여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랑이며, 신중은 자기를 방해하는 것과 도와주는 것 사이를 슬기롭게 식별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최고의 선, 최고의 지혜, 완전한 조화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절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그리고 부패하지 않게 자기를 지키는 사랑이며, 용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참는 사랑이며, 정의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리하여 사람을 섬김으로써 모둔 다른 것을 잘 다스리는 사랑이며, 신중은 무엇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을 도와주며 무엇이 방해하는지를 올바르게 구별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고 그의 요구인 인간의 윤리를 이루신다. 이러한 가운데서 인간의 의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이 시점에서 죄의 본성과 인간의 의지와의 관계가 언급 되여야 한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의지는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의지를 갖지 않았다면 그는 올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적극적인 일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로부터 떠나 인간 자신의 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아니하고 의지 그 자체의 목적을 따르는 행동의 결과는 악하였다.

원죄란 영혼 전반에 걸친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으로서 규정될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위에 있는 것에 복종케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위에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겸손은 우리를 하나님께 복종시킴으로써 우리를 높인다. 그러나 교만은 손상된 본성인데 지존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분께 반역함으로써 낮은 상태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의 판단이나 이성의 선택은 의를 선택할 수 없다. 거듭난 이성은 가능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회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위의 표준은 두 가지 인데, 즉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첫째 표준인데 그것에 의해 인간 이성도 규정되기 때문이다.

 

행위의 표준이 세워지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이 행동의 방향성의 문제이다. 행동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사랑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자기의 자신으로부터 사랑하며, 죄인들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구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존재인 자신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죄인이며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해야하며, 원수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필수 적인 요소인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이웃 사랑의 일반적인 범위에서 원수 사랑을 배제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모든 사랑은 인간의 감정에 의한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이요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행위이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그 어떤 윤리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행하게 하는 이 윤리는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안간이 획득할 수 없었던 자유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이루어 졌으며 인간은 믿음으로 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안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말은 성경에서 바울이 한말이다. 즉, [고전9:1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롬13:8]"(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위의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말은 합당하다. 영혼은 자유하나 스스로 자유를 누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섬김으로 종이 된 것이다. 이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행위인 이러한 삶은 안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 자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은 게을리 하지 못하게 하며 사악함 가운데서 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윤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윤리의 기준을 알아가게 한다. 영혼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할 때 영혼은 하나님을 참되고 의롭다고 여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귀한 예배는 우리가 진실함과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할 때 영혼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된다. 따라서 영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자신이 다루어지도록 허용한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진리와 의를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의를 칭찬하신다. 하나님께서 참되시고 의로우신 것이 사실이고 당연하며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참되고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만이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이다. 왜냐하면 첫번째 계명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모든 계명을 이루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신앙이 있다면 행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질 수는 있지만, 행위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앙의 전제하에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윤리적인 요구를 이루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자유자가 섬김으로 종노릇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상에 나타나신 모습이며 인간에게 요구한신 기독교의 윤리인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영향이 없이는 조금의 선이나 의를 이룰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닮게 하고 나서 감사함으로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 기독교윤리학도 이런 면에서는 다른 어떤 윤리학보다 우월한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의 기준을 먼저 인간에게 나타내신 후에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그 한계를 인간을 위하여 넘으시는 것을 보여주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 후에 인간에게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게 하셨다.

 

믿는 자의 행위도 이와 같다.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낙원으로 회복되어 새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의롭게 되거나 의롭기 위하여 행위를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게으르지 않고, 자신의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보존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이러한 행위를 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다시 지음받지 못하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아직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외적인 행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커져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고 인간은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로 인하여 인간을 가치있게 그리고 충분히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오직 신앙뿐만 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모든 율법에서 자유롭고 모든 것을 순수한 자유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행하는 까닭에 구원을 받기 위하여 어떤 행위난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자로 만들고 나서 또 이자유자에게 멍에로서가 아닌 자유자로서의 섬김과, 스스로 낮아짐, 소망을 가진 자들의 겸선, 은혜의 구원에대한 감사로 자신의 뜻을 이루시게 하였다.

 

이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뜻을 부정하여야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인들에게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아는 우리가 조금만 기회를 주면 곧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인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룩한 산제사로 드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행위나 의견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무엇이 우리의 본성에 일치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지 말도록 해야한다. 그리도 우리는 우리의 자신의 것이 아님으로 따라서 가능한 한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잊어버리도록 해야 한다. 자기 부정이란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관계되어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에게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덕은 보편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참된 덕이란 어떤 조건을 달지 않고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참된 덕은 조건 없이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참된 덕이란 마음의 내적인 자질과 작용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드워즈의 윤리학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에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참된 덕을 가진 자는 인간을 중요성과 내재적 존재로 보지 않고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그가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자신 안에 내재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을 향한 사랑은 신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오히려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일부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독교 윤리학의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까지 무한히 승격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은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전심을 다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사랑마저 포함시킨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먼저 사랑한 후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한였다. 이러한 사랑의 방법은 기독교인의 윤리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시고 자유함가운데서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며 하나님의 속성인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게 한다. 즉 [요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구절에서 부활하신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아가페적 사랑을 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랑은 제자로서 주님을 끝까지 따를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이 사랑이 있으면 주님의 양을 치는 사역을 잘감당할수 있기 때문이고 또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독교인들의 윤리도 완전하게 이룰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기독교윤라학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사랑이다. 그러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고 일반적인 인간의 윤리도 정으로 잘 지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