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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상징들 2

by 은총가득 2021. 12. 7.

성경의 신체상징 눈(EYE)

  • 성경에 나타난 눈에 대한 상징과 문학적 표현을 정리한 글입니다. 수시로 필요에 따라 수정 증보됩니다.


1. 용어


눈의 히브리어는 ‘아인’이다. 헬라어 눈은 상당히 많은 단어가 사용된다. 가장 많이 사용되며 보는 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단어는 '호프(ὤψ)'이다. 그 외에도 눈빛, 눈꺼플 등의 의미로 아래와 같은 단어들이 사용된다. 문맥 속에서 표현되는 단어들이기에 다른 단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δράκος, σποῦ, ὄσσε, ὀφθαλμός, κανθός

2. 눈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눈은 두상(頭上)의 앞부분에 달린 신체 기관으로 물체를 보는 기능을 감당한다. 눈은 빛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기 때문에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신화 속에서 눈은 대부분 인지 지혜 등과 관련되어 신을 표시하고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눈의 형상으로 신을 표시한 가장 유명한 신은 이집트의 호루스의 눈일 것이다. 호루스의 눈은 고대 이집트의 신격화된 파라오의 왕권을 보호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태양신을 섬겼던 탓에 호루스의 눈은 태양의 눈, 라의 눈, 달의 눈 등으로 불린다. 더 제사한 내용은 [신화와 상징 -호루스의 신화]를 참조 바람.

호루스의 눈 [출처는 하단에]



인도의 최고신 중의 하나로 섬기는 시바신은 3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시바의 눈은 세계를 비추는 빛이다. 파르바티의 장난에 의해 생겨난 눈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인지적 눈이다.


3. 성경 안에서의 눈

 


눈은 성경 안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눈 자체의 기능보다 의인화 되거나 상징적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본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 등의 뜻이 있다. 또한 눈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오만한 눈, 긍휼히 여기는 눈 등이 그렇다.


1) 보는 눈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에서는 보는 것을 단지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영적 의미로 해석할 때가 많다. 특히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앎과 긍휼, 심판의 다양한 의미들로 사용된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다룬다. 보는 것은 대상과 주변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어떤 물건을 집어야 할지 등을 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창세기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세기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세기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 통찰하는 눈


눈 또는 ‘보다’는 동사는 지식과 지혜과 깊이 연관이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성과 연관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보다’는 동사가 사용된다. 가장 아담과 하와는 타락 직후 눈을 떠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닫는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눈이 밝음이 이해(理解)하는 것이라면 눈이 어둡게 되는 것은 무지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죄와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출 23:8) 여기서 어둡다는 표현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뜻이다. 뇌물은 욕심을 의미한다.

출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3) 아름다운 눈

 


눈의 아름다움은 성적 매력과도 연관이 있다.


창 29: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시력이 약하다(라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하다는 뜻이다. 반면 라헬의 눈은 곱고(라크) 아리따웠다(말레흐)가 사용된다.

눈짓하다(카라츠)는 ‘물다’ ‘꼬집다’의 의미도 함께 있다. 귀여움과 애교의 뜻과 함께 죄와 교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의 표현도 종종 등장한다.

쉼과 평안의 눈


눈을 붙이라는 말은 잠은 잔다 또는 쉰다는 의미다.

창세기 31: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자료 출처]

<성경 문화 배경사전>생명의말씀사



 

성경의 신체상징 귀(ear)

 

귀는 머리에 붙어 있는 기관으로 소리를 분별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성경 안에서는 청각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의 의학의 일부인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은 등장하지 않는다.

 

 

구약은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존한다. 계시는 다양하나 가장 명확하고 빈번한 도구는 음성이다. 그렇기에 계시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앞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귀의 역할을 계시를 이해하는 또는 수납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이 중대하다.

 

2. 성경 속 귀의 의미

 

들으라 이스라엘

'쉐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반드시 암송해야할 구절이다. 출애굽은 신관의 혁명이다. 애굽의 신은 보는, 보이는 신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말씀하시는 신이다. 천지도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율법도 계명도 들어야 한다. 들음 존재와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듣는 것은 곧 순종의 의미로 이해했다. 즉 지성과 행위가 다르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지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순종으로 드러난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청종은 곧 순종이다.

  •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할례 받지 못한 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할례 받지 못한 귀'로 표현된 곳이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됨의 근본적인 표지였다. 율법의 행위보다 할례가 앞섰다. 할례 받지 못한 귀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이 되지 못한,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을 뜻한다. 몸에는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과 영적으로는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을 말한다. 그들은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영적으로 이방인들을 말한다.

  • 예레미야 6장 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 사도행전 7장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의례 속의 귀

제사장의 오른쪽 귀 엄지 발가락에 희생제물의 피를 바른다.(레 8:23-24) 귀의 청결, 거룩이라 할 수 있다.

  • 레위기 8: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 레위기 8: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모세가 그 오른쪽 귓부리와 그들의 손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들의 발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모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자발적 노예

자발적 노예는 자신의 귀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출 21:6) 귀고리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듣지 못하는 우상

우상은 듣지 못한다. 우상은 신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듣지 못한다는 말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을 우상에 절을 한다.

  • 시편 115:4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시편 115: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편 115: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시편 115: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 요한계시록 9장20절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신가? 우리의 귀를 만드시고, 눈을 만드셨다. 그분이 듣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신다.

  • 시편 94장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예수님은 귀머거리를 고치친다.

예수님은 귀를 고치신다. 말씀을 듣게 함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귀머거리는 육신적 귀머거리가 아니라 교만하고 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귀를 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 로마서 11장 8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의 상징 - 머리털

 

 

머리카락과 털은 성경 안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면 고대인들에게 머리카락과 털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 조문단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눈은 신하들의 고자질로 인해 조문단을 간첩이라 여기고 그들의 수염을 깎고 돌려보냅니다. 이 일로 다윗은 모욕을 당하고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실인이 서원할 때도 서원 기간 동안은 머리를 깎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화와 문학 속의 머리카락

신화와 문학 속에서 머리카락은 직접적인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긴 머리는 여성성을 극대화 시킨다. 머리카락의 의미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경 안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긴 머리카락은 곧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그 머리카락이 잘렸을 때는 여성성의 상실과 더불어 존재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했다. 성경 속에서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자신의 부정과 신에게의 헌신을 뜻했다.

 

머리털자리 별자리 이집트 여왕 베레니케 2세

  • 신에게 바쳐진 머리카락, 자신의 아름다움은 신에게 바친다.

기원전 243년경, 이집트의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자신의 누이를 죽인 시리아와 전쟁을 치른다. 이때 왕비였던 베리니케 2세는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그녀의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면 자신의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머리카락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다행히 왕은 무사히 돌아왔고,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아프로디테 여신의 사원에 바친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라진다. 왕과 왕비는 이 사실을 알고 궁중의 천문학자인 코논은 왕비의 머리카락을 여신이 하늘에 갖다 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자의 꼬리로 알려진 성단을 지목했고, 이후 그곳을 베레니케의 머리카락으로 불렀다고 한다.

 

베레니케 2세(Berenice II, Βερενίκη Β, B.C 267/266년 - 221년)

 

 

 

라푼젤의 머리카락

신화와 신화적 성향의 세계관을 지닌 동화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다. 긴 머리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북유럽 신화의 시프(Sif)

  • 잘려진 머리카락은 그 여인의 존재 자체의 부정을 뜻한다.

시프(Sif)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천둥의 신 토르의 아내이자 울르와 스루도의 어머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로키가 시프의 으스대는 모습이 싫어 시프가 자고 있을때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다. 화가난 토르는 로키의 뼈를 부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로키는 드베르그를 시켜 전보다 더 좋은 머리카락을 만들어 줄테니 용서해 달라고 빈다. 로키는 드워프 이발디의 아들들을 시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카락을 만들어 온다. 시프의 머리에 옮겨 붙이자 진짜 머리카락처럼 자란다.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긴 머리카락은 여성성의 극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현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 속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아름다움과 영화의 상징이다.

긴 머리털은 정숙한 여인의 상징이다. 긴 머리카락은 여성의 상징이다.

 

나실인과 머리카락

나실인의 서원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하나님께 드리고, 서원의 기간이 끝났을 때 역시 자신의 머리를 밀어 삭발한다. 머리카락을 잘라 신에게 드리는 행위는 자신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을 말한다.

 

José Salomé Pina-Delilah’s betrayal

 

압살롬의 머리카락

그의 자랑이었던 머리카락은 아이러니하게 자신을 죽음을 앞당기는데 사용된다.

 

대머리는 멸시의 대상이었다.

엘리사의 대머리를 욕하는 청년들이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으로서 머리털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성경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

성경에 나타난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7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 사람은 슬플 때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내어 울거나 슬픈 노래를 보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방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나타납니다.

1. 눈물을 흘림

 

눈물은 슬플 때 몸이 보이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발설의 표현이다. 눈물을 98% 수분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염화나트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눈물은 슬플 때뿐 아니라 기쁨이 극에 달했을 때도 나온다. 분노의 눈물도있다. 분노의 눈물은 매워서 흘리는 눈물보다 염화나트륨의 농도가 높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는 주요 이유는 눈을 보하려는 것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물을 흘리게 되면 카테콜아민이 눈물을 통해 배출되어 마음의 안정이 온다고 한다. 눈물을 흘림으로 심신을 이완시키고, 혈압을 낮추게 된다. 자주 우는 사람들은 심장마비에 걸릴 확율이 낮다는 보고도 있다.

 

눈물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래서 눈물은 공감과 연대를 불러 일으키고, 긍휼을 일으킨다.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약하고 보고 도와주려 한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거짓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것을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라고 한다.

 

 

2. 애곡, 통곡함

 

눈물과 함께 슬픔의 소리를 내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통곡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곳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 아이들의 죽임을 뜻하는 '라헬의 통곡'이다. 고대 세계에서 애곡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죽음을 애도할 때 부유한 사람들은 우는 사람을 돈으로 사서 인위적 슬픔을 자신의 직위를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

 

3. 머리를 풀어헤침

 

머리를 풀어 헤치는 행위는 자신을 단정한 것을 풀어내는 것으로 슬픔의 상태를 말한다.

 

4. 머리에 재를 뿌림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고대의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아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주로 행하던 슬픔과 고통, 또는 회개의 표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나라를 잃을 때 머리에 재를 뿌렸다. 성경에서 머리에 재를 뿌리고 슬퍼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배다른 오빠인 암논에게 능욕당한 후 쫓겨났던 다말의 슬픔은 재가 가진 슬픔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5. 머리카락을 자름

 

머리는 모든 신체의 최상단에 자리한다. 머리를 존재를 대표한다. 머리를 가리는 것은 전체를 가리는 행위다. 특히 머리 위에 자리 잡은 머리카락은 머리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긴 머리는 아름다움과 관능의 상징이다. 머리는 보존하는 행위는 자신의 신체를 보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 정부는 삭발령을 내린다. 이러한 삭발령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머리털은 생명과 존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 그래서 신에게 자신을 드리거나 자신의 존재가 부정될 때 슬픔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일종의 자기부정이며 새로 태어남을 뜻한다. 민수기 6장의 나실인의 서원은 머리카락에 중요한 의미를 두어 서원의 시작과 끝에 머리카락을 자른다.

 

여성들은 이전에 사귀던 남성들과 헤어질 때 슬픔과 단절,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머리카락을 자른다.

 

애굽이나 가나안 인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가운데 머리털만 남기고 주변의 모든 머리털을 깎은 행위를 했다.(렘 9:26) 죽은 자 앞에서 머리털을 깎는 행위는 슬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엄하게 금하셨다.

 

6. 옷을 찢음

옷을 찢는 행위 역시 슬픔을 표현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다.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한 율법 책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슬퍼하며 회개했다.(왕하 22:11) 고대세계에서 옷은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옷이 전재산인 사람들도 있다.

 

  • 출애굽기 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 신명기 24: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옷은 가치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현저히 드러난다. 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중요한 재산의 일부를 버리는 행위이기도했다. 값비싼 옷을 찢음으로 자신이 극도의 슬픔에 빠져있음을 드러내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옷을 찢는 구절들

  • 창세기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사무엘상 4: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 열왕기하 19:1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 역대하 34:19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성경 옷을 찟는 행위 상징

옷을 찟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 구약에서 옷을 찟는 행위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슬픔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머리에 재를 뿌리고 세마포 옷을 입기도 한다. 성전을 수리하다 율

392766.tistory.com

 

7. 슬픈 노래를 부름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

 

삼하 1:17-27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슬픔을 표현하는 그 외의 방법들

신발을 벗음

 

신발을 자유 또는 권위를 뜻한다. 그러나 신발이 벗겨진 상황 또는 벗어야 하는 상황은 자신의 소유한 모든 권위와 안전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은 도망치면서 맨발로 울며 갔다.

 

  • 삼하 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베옷을 입음


 

성경의 상징 의복(옷)

옷은 크게 두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계급과 다른 하나는 몸의 보호이다. 패션의 역사에서 가장 언급하는 패션의 시작은 모호하다. 역시 두가지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첫번째 수단인 계급 즉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의 의복이다.

 

ancient babylonian clothing

 

의복에대한 성경의 첫번째 언급은 타락한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주실 때이다. 그보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것도 염두에 두자.

고대 사람들은 특정한 의복을 입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로 들면 사자의 의복(가죽)을 입으면 사자와 같은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것과 비슷한 동화가 전래된다. [소가된 게으름뱅이]라는 동화이다. 이곳에서 게으름뱅이가 어느 노인의 말을 듣고 소가죽을 입어서 소가되어 게으름을 참회하고 다시 사람이 된어 부지런한 삶을 살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있다. 이 외에도 문학 속이나 역사 속에는 비슷한 사례들과 이야기들이 많다.
고대 바벨론의 의례판 기록에 의하면 환자가 병을 나으려면 입고있던 의복을 벗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의복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의로 여기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제사장은 성막에 들어갈 때 반드시 제사장이 입는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저주를 받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흐르는 시샛물에 목욕하고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어야 했다. 옷은 새로운 장소 특별히 신성한 장소에 들어가기 위한 규례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도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역시 계시록에서도 천국은 세마포 옷은 입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이런의미에서 의복은 한 개인의 신분이나 자격등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옷은 그 사람의 직무와 소명에 관련된다.

모세는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입힘으로(민수기 20:28)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겉옷을 주고 언약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분 즉 왕자로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다윗에게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엘리야 역시 엘리사에게 자신의 외투를 던짐음으로 엘리사에게 소명을 주었다.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옷으로 요단을 가름으로 엘리사의 직무를 대신하게됨의 서막을 알린다.

 

옷은 의로운(악한) 행위를 상징한다.

스가랴 3:3에서 더러운 옷은 죄 많은 상징으로 나타난다. 욥기 29:14에서 의로 옷을 삼아 입는다는 표현과 공의는 그의 도포와 면류과 같다고 표현한다. 사도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로 옷입으라는 충고(롬13:14)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는다는 표현(갈3:27)역시 그리스도 다운 삶을 의미한다. 의로 옷입다는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구제와 동일시 되기도한다.

옷은 육체적인 몸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전통에도 사람의 죽으면 기존의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힌다.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해 채비하는 행위이다. 시리아의 교부 에후라엠은 의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질의 덮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덮는 덮개로 의복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의복은 곧 육체를 뜻하는 것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옷

빛을 입으신다(시104:2)
존귀와 권위를 입으신다(시104:1)
화려한 의복, 곧 능력으로..(사63:1)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는다(사59:17)

 

속이는 옷

바리새인들이 옷술을 길게하고 다님.. 외식적인 행위
야곱이 이삭 앞에서 동물의 옷을 입고 형이라고 속임(동물적인 탐욕의 죄를 짓는다는 영적의미를 가짐)
마태복음 7:5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양의 옷을 입고 오는 이리라는 표현은 사단의 속임수를 말한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마귀도 언급한다.

구원사 속에서의 옷

처음 사람은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죄 이후 부끄러워했다. 수치를 느낌 사람은 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를 반영구적인 가죽으로 대신함으로 수치를 가려주셨다. 이것은 인류의 수치 즉 죄악을 가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하기 위한 예언이요 암시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것을 말한다. 잔치에서의 예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천국 찬치로 비유된다.

 

신데렐라의 옷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가난한 소녀가 왕자를 만나 왕비가 되어 출세한 것을 말한다. 연예인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명해지고 스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작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는 원소설에서는 없는 만들어진 가짜이다.(이 부분은 이양호가 지은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을 참고바란다) 귀족의 딸이었던 재투성이(신데렐라)는 의붓 언니들에 의해 귀족 딸의 호화스런 옷이 벗겨지고 재투성이가 된다. 어느날 왕궁에서 혼인잔치가 열린다. 재투성이는 새로부터 받은 옷을 입고 왕궁의 잔치에 들어간다. 모든 사람들은 재투성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귀한 어느 나라의 공주로 생각한다. 왕자는 재투성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그를 찾아 결혼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상식적으로 재투성이가 어떻게 옷을 바꿔입는다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옷이 한 인간의 인격을 상징한다면, 어떤 사람을 두고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안에서 인격이 잘 여물어 마치 빛처럼, 그 인격이 밖으로 퍼저나오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빛으로 서있는 사람일 것이다. 재투성이는 겉보기일 뿐, 그의 속살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이야기꾼은 말하는 싶었던 것일까? 얼굴 예쁜 아가씨들 사이에, 그들과 생판 다른 사람 즉 빛을 품은 아가씨가 나타난 것이다. 놀람, 기적이다. 온 맘이 거기에 사로잡혔기 때문.. 한 조각의 마음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왕의 아들도 그런 사람들 즉 그 아가씨에게 온 맘을 빼앗긴 사람들 중 하나이리라'(106-107쪽)
재투성이가 고귀한 인품을 옷을 입고오자 그 찬란한 영광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지금까지 재투성이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활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동일하다.
이양호는 신데렐라가 매우 기독교적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옷은 하늘 신랑인 예수가 준 옷이며 이 땅에서 신부로서의 거룩한 삶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 땅에 가짜 예수의 신부가 판을 치고 있다고 냉소한다.
"지금 이 땅엔 천만 명이나 되는 예수의 신부가 있다. 그런데도, 아니 예수의 신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땅은 더욱 메말라가고 살벌해진다.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예수의 각시들은 말한다. '그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가짜 신부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신부일 뿐'이라고"(207쪽)
 

시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성경의 상징 죽음


성경에서 최초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계명을 어길 시에 경고로 주어진다. 그렇다고 죽음 자체가 영원한 파멸이나 저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 자체를 통해 새로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2:6-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죽음은 이중적 의미를 부여 받는다.


1. 성경에 나타난 죽음의 정의들


● 죽음은 죄의 형벌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죽음은 죄에 대한 형별이라는 점이다. 모든 죽음은 죄를 전제한다. 우리는 이것이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셨지만 나머지 과일은 먹을 수 있었다. 창세기 3:22을 근거로 죽음을 본다면 영생은 생명 나무 실과를 먹을 때 가능하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 자체가 죽음을 몰고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영생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작업, 즉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한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러한 전제는 예수의 대속 사건을 믿어야(먹어야)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일시된다.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소개한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죽음 필연적이다.

성경에서 죽지 않고 승천(昇天)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에녹과 엘리야이다. 사람은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필연적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삼하 14: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2. 죽음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 흙으로 돌아가다.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욥 34: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시 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 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숨이 끊어지거나 호흡을 멈추는 것을 죽음이라 말한다.

●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이다.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음부로 내려간다.

창세기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세기 49:29절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민수기 20: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신명기 32: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출처:  [Pensé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