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
구원 개념은 이미 과거에 받았던 구원(중생)과 현재 받고 있는 구원(성화)과 장차 미래에 받게 될 구원(영화) 모두를 포함한다. 이 세 가지 구원에서 궁극적으로 중심된 역할을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비록 죄인인 인간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과 감화, 즉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과거적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 들어가면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맹인이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그는 눈이 밝아져 만물을 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다. 아직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그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라고 말하였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비로소 맹인이었다가 밝은 눈으로 보게 된 사람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첫 번째 진술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는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눈을 고쳐 주신 분을 믿고자 했다. "주여, 내가 믿으려고 합니다, 내가 믿겠습니다, 내가 믿고 싶습니다"라는 진술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믿음의 결단을 하지는 않은 상태다. 아직 불신의 상태요, 죄인인 상태요, 죄사함 받거나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다. 만약 비록 그러한 사람이 교회당(church building)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교회(church)나 교회회원(church member)이 아니다. 여전히 전도대상자(prospect)요, 방문자(visitor)요, 손님(guest)이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그의 두 번째 진술이 신앙고백이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믿고 있습니다"라는 진술은 믿음의 결단을 한 상태인 것이다. 침례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진술하는 사람을 교회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한 진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뱁티즘을 베풀지 않는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에게 뱁티즘을 베푼다(신자의 뱁티즘, Believer's Baptism). 그러한 고백을 뱁티즘(침례, Immersion Baptism)이라는 의식으로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선포하는 신자(Believer)를 교회회원으로 받아들인다(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16], 61-2).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진술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믿은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믿나이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은 신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에게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진술과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 사이에는 엄격하게 말하면 지옥과 천국을 가로지르는 구렁텅이가 있다. "내가 믿고 싶습니다"에서 "내가 믿습니다"로 나아가는 것을 "영적인 도약"(spiritual leap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은 무척 포괄적인 낱말이다. 성경에는 구원과 관련하여 시제를 달리하는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래서 구원을 과거적 구원과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William W. Stevens, 『조직신학개론』, 허긴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79], 315-37). "과거적 구원"이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던 순간에 받게 된 구원을 가리킨다. 이를 중생(regeneration) 혹은 거듭남(born-again)이라고 한다. 새 생명(신생, New Life)을 얻었다고도 하고,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 혹은 위로부터의 출생(birth from above)을 했다고도 말한다. 좁은 의미로 구원을 말할 때에는 대체로 이런 뜻으로 사용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예수님이 이르셨을 때 이런 의미로 말씀하셨다(Ibid., 326-31).
"현재적 구원"이란 예수를 믿은 신자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그 분을 닮아가는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를 가리킨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성령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화되어 가라는 의미다(Ibid., 331-7).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일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보다 거룩하게 변화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미래적 구원"이란 중생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가던 신자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아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에 들어가는 영화(glorification)를 가리킨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고린도후서 5장 9절에서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넓은 의미의 구원 개념은 이미 과거에 받았던 구원(중생)과 현재 받고 있는 구원(성화)과 장차 미래에 받게 될 구원(영화)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Ibid., 337-40). 이 세 가지 구원에서 궁극적으로 중심된 역할을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비록 죄인인 인간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과 감화, 즉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영적인 도약"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과거적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 성령은 죄를 책망하시고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The Holy Spirit is a holy spirit). 거룩하다는 말은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인데,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성령이시다. 죄가 어두움이라면 성령은 빛이시다. 어두움과 빛이 공존할 수 없듯이 성령과 죄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은 죄를 책망하시고,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것으로부터 떠날 것을 촉구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6:7-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보혜사 성령-필자 주)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서 "책망한다"(reprove)는 말은 "빛을 비추어 실상이 드러나도록 보여준다"는 의미다(Landrum P. Leavell II,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Nashville: Convention Press, 1983], 28-9). 성령께서는 죄인에게 빛을 비추어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신다. 성령께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도록 촉구하신다. 성령의 "책망"을 받은 죄인은 단순히 후회하거나 자책하거나 미안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죄로부터 180도로 방향을 돌이켜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진정한 회개(repentance)를 가리킨다. 잃어버려진 사람(a lost person)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죄인(a sinner)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행하시는 "책망"이 뼈저리게 느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임에 대한 깨달음과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만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역할이다.
여기서 성령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분리된 세 가지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것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성령의 한 가지 역할이다. 즉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여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고, 죄의 대칭점에 계신 의 자체이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고, 그리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오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는 심판이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요 16:9-1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여기서 "세상"이란 불신세상 혹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이요 관계적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대해 모른 채 태어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all)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지 않은 상태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인 것이다. 죄를 가리키는 희랍어 단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벗어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죄인(sinner)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든지 평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죄인인 것이다. 성령께서 죄의 본질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불신세상과 불신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신다(Ibid., 30-1).
성령께서는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의(righteousness)는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세상 사람치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따라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의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성육신, 요 1:14), 여느 인간들과는 달리 죄가 없으신 유일한 분이시다.
(히 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인인 인간이 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면 자신의 죄가 보이게 된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였다. 이른 새벽에 그는 육신적으로 몹시 피곤했고 밤새 헛수고를 했다는 공허감에 정신적으로도 피폐해 있었다. 그물을 정리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할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자신의 경험과 상식에 의하면 여명이 터오를 때에는 물고기들이 깊은 곳으로부터 호숫가 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아는데, 베드로는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그물을 내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이다. 베드로는 깊은 물속의 물고기 떼의 동향까지 꿰뚫어 알고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신성(divinity)을 본 것이다. 그의 즉각적인 반응이 이러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죄인 베드로는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 곁에 있는 것조차 몹시 불편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말은 성령께서 완벽한 의를 보여주시면서 불신세상과 불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됨을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Ibid., 31).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령은 죄인임을 깨닫고 돌이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기다리고 있지만,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사랑과 긍휼 그리고 공의와 심판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기다리고 있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 "세상 임금"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이다. "세상 임금"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성경은 그가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 3:18-19)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데 비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불신자나 회개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신다(Ibid., 31-2).
III. 성령은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신다

성령은 "생명의 영"(Spirit of Life)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또한 성령은 "살리는 영"(Life-giving Spirit)이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흙으로 지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생기(생명의 호흡, Breath of Life, 성령-필자 주)를 불어넣으셨던 순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being, 살아있는 존재, 산 생명-필자 주)이 된지라"(창 2:7).
에스겔 37장 1절-14절에는 골짜기에 있는 수많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죽어 있던 육체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겔 37:7-10)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성령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생명을 살리실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모든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존재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하기 이전, 즉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 "허물로 죽은 우리"(엡 2:5)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적으로 죽어 있던 인간을 살려내시는 분이 바로 "살리는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인간이 반성을 하고 후회를 하고 개선된 삶을 살려고 하고 심지어 아무리 믿으려고 몸부림치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죽어 있던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5-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송장(corpse, 시신)은 육체적으로 죽은 것이지만 죄인(sinner)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송장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듯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죄인 역시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살아날 수 없다.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만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Ibid., 3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롬 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렇기 때문에 한번만 태어난 사람(육체적 출생)은 두 번 죽고(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 두 번 태어난 사람(육체적 출생과 영적 출생)은 한 번만 죽는다(육체적 죽음). 성령께서는 육체적 출생(physical birth)을 한 사람(죄인)으로 하여금 영적 출생(spiritual birth)을 하게 하신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죄인을 살려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이다.
IV. 예수님은 신자로 하여금 성령으로 뱁티즘(침례, 세례)을 받게 하신다
물뱁티즘(Water Baptism)이 상징이라면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은 상징하려고 하는 본질이다. 물뱁티즘이 가시적이고 외면적인 의식이라면 성령뱁티즘은 비가시적인 내면적 체험이다. 물뱁티즘이 상징적인 물리적 의식이라면 성령뱁티즘은 본질적인 영적 체험이다. 마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거니와 그(예수님-필자 주)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막 1:8)라고 말했다. 마태와 누가는 침례 요한의 입을 빌어 불뱁티즘(Fire Baptism)과 대비하면서 성령뱁티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마 3:11-12) "나(침례 요한-필자 주)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뱁티즘을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참조)
여기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것은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고, 불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것은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결국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은 "알곡," 즉 신자에 대한 구원을 설명하는 표현이고, 불뱁티즘(Fire Baptism)은 "쭉정이," 즉 불신자에 대한 심판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그는 신자(알곡)가 되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게 되는데, 이러한 영적 체험을 "예수님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은 신자는 중생(거듭남, Regeneration), 혹은 회심(개심, Conversion)의 순간에 전신(the whole body)이 성령의 강물에 풍덩 빠져서, 자신의 옛 사람은 죽게 되고 자신의 죄와 죄악된 삶은 장사지낸 바 되고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영적인 체험(spiritual experience)을 하게 되는 것이다(롬 6:3-5). 이러한 내면적 체험을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Being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가시적인 성령뱁티즘을 받은 자가 가시적인 물뱁티즘을 통해 교회(이미 성령뱁티즘과 물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의 회중)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저도 회개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저도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도 성령뱁티즘을 받았습니다. 저도 신자들의 공동체인 이 교회의 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교회를 저의 신앙생활의 터전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가시적인 내면적 중생의 체험이 없는 불신자나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물뱁티즘을 베푸는 것(유아세례, Infant Baptism)은 의미 없는 의식이다. 물뱁티즘 자체가 죄사함이나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뱁티즘을 받은 자가 성령을 받은 자이고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자이다. 성령뱁티즘을 받은 자가 물뱁티즘을 받음으로써 회중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도 죄사함 받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신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체험하게 되어 그 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게 되고,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여 한 몸, 즉 교회를 이루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전 12:12-13, 27)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지체들의 다양성"(diversity of many parts)과 "몸의 통일성"(unity of one body)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몸은 교회를 가리키고 있음이 자명하며 "한 몸"(One Body)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를 의미하고 있다.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등(골로새서 3장 11절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라는 비슷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졌던 죄인들이 "다(all)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예수 믿도록 하셔서 예수와 연합하게 하시고 동시에 다른 신자들과도 연합하게 하시어 한 몸, 즉 통일된 하나의 교회(unified one church)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들이 "다(all) 한 성령(One Spirit)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을 방언이나 진동이나 쓰러짐이나 공중부양이나 소리지름이나 거룩한 웃음 등 육체적인 체험들(physical experiences)이나 성령의 은사들(gifts of the Holy Spirit)과 연관지어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모두 한 몸인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fact)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이 교회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육체적인 체험을 하거나 성령의 은사들을 받음으로써 교회가 되는가? 특별한 기적적인 능력을 받아야 교회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진정한 회개와 믿음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encounter)으로, 죄인이 죄사함 받고 구원 받아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사도 바울은 죄인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음으로써" 교회가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유사한 말씀을 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경건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임하셨던 일을 회상하면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예루살렘의 할례받은 유대인 교회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행 11:15-18)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5-필자 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the same gift)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방언의 은사일까? 육체적인 체험들일까? 아니다. 여기서 "선물"은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시는가? "선물로서의 성령"(Gift of the Holy Spirit, "선물인 성령")을 주시지 않는가?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예언 즉 "너희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를 잠잠히 듣고 있던 할례받은 유대인 교회지도자들도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repentance unto life)를 주셨도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는 말과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일어난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현상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결국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교회론 신학에 접목시키면서 "우리가 다(all)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all)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고 예수 믿게 하셔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를 이루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공동체의 지체들(Branches)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V. 성령은 신자에게 인치심(Sealing)의 사역을 하신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에 로마제국의 황제나 총독이 공식적인 문서를 만들어 하부기관에 발송할 때에는, 문서작성자의 이름 옆에 밀랍(wax)을 발라 붙이고 그 위에 인장반지로 인(seal)을 쳤다. 인장반지의 인은 그 서류가 공적인 문서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공문서에 직인을 찍거나 압착직인을 누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에게 인을 치신다.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다"는 표현이 신약성서에 세 번 등장하고 있다:
(고후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로, 소유권(ownership)의 표시이다(Roger S. Oldham, "God the Holy Spirit: His Role in Salvation," SBC Life, 인터넷자료 http://sbclife.net/Articles/2009/06/sla6, 2018년 3월 15일 접속). 부동산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은 쌍방이 계약에 만족했으며 돈을 지불한 매입자가 그 부동산의 새로운 소유권자임을 확정짓는 행위이다. 소유권의 증표가 바로 계약서에 찍힌 매도인과 매수인 쌍방의 도장들인 것이다. 성령께서 신자에게 인을 치신다는 것은 이제 그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구원의 모든 계약의 과정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날(여기서 구원은 미래적 구원 즉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의 순간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필자 주)까지 인치심을 받은 자"(엡 4:30)이다. 이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둘째로, 인치심은 안전성(security)을 담보하는 것이다(Ibid.). 오늘날 소포나 소화물을 발송할 때 그 물품이 수신자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접수되고 확인될 때까지 이송의 과정에서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우체국이나 택배회사에서는 소인을 찍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안전할 것을 보증해 주셨다. 인치심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에는 "보증"(guarantee)이라는 말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고후 1:21-22, 엡 1:13-14).
특히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 5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다. "보증"이라는 말의 희랍어 단어는 arrabon인데,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 단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 구매자가 지불해야 하는 보증금(caution money)을 가리킨다.... 나머지 금액이 적절한 때에 지불될 것을 약속하고 보장하는 첫 번째 상환금(the first installment)이다"(William Barclay, New Testament Words [Philadelphia: Westerminster Press, 1976], 40). 성령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은 신자가 현세에서뿐 아니라 영원토록 하늘나라에서 안전할 것을 보증해 주신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장막 집"(tent house)을 벗게 되면 하늘나라에 "영원한 집"(eternal house)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은 말씀으로 확증해 주신다.
(고후 5:1-2, 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셋째로, 인치심은 권위(authority, 권세, 권능)를 대변해 준다("The Work of the Spirit in Relation to Salvation," Valley Bible Church Theology Studies, 인터넷자료 www.valleybible.net, 2018년 5월 1일 접속). 대통령의 싸인이 들어 있는 친서를 소지한 특사 또는 대사는 외국에서 자신을 파송한 대통령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성령의 인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로부터 파송받은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20:21-23)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승천하시기 직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하셨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신 후, 예수님은 성령받은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세와 권능을 부여받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One who was sent)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야심이나 기교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와 권능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변호할 특권을 부여받았고 동시에 그렇게 할 책임을 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성령의 권위와 권세와 권능까지도 부여해 주셨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충성스럽게 따르며 순종하여야 하겠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침례, 세례-필자 주)을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마지막 유언의 지상명령에서 "너희는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뱁티즘을 베풀어라"고 명령하셨다. 제자가 된 자, 즉 예수님을 믿은 신자, 다른 말로 하면,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하셨지, 제자가 된 자의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유언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신자에게만 뱁티즘을 베풀 것을 유언하셨다("신자의 뱁티즘," Believer's Baptism).
VI. 성령은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시키신다
"입양"(adoption)이란 친권이나 양육권을 포기한 자녀를 다른 어떤 부모의 아들이나 딸로 입적시키는 법적인 절차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 법률적으로 친자관계(親子關係)를 맺는 행위이다("입양," 『두산백과』, 인터넷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7114&cid=40942 &categoryId=31640, 2018년 5월 15일 접속). 성령께서는 고아처럼 버려져 있던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사함 받게 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시키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사도 바울이 다음의 성경구절에서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딸(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엡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갈 3:26, 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4-5, 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자녀)이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children, but of God)이란 "성령으로부터 난 자들," 즉 "위에서 난 자들," "거듭난 자들," "영적인 출생을 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이 된다. 성경은 성령을 "양자의 영"(Spirit of Adoption, 혹은 "입양의 영")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롬 8:14-17)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한번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되었던 자가 파양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신학적 주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가,"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그 은혜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인간사회에서는 합법적으로 입양이 되었던 자가 또 다른 합법적인 사유가 발생했을 때에는 법원에서 법적인 절차를 거쳐 파양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되었던 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딸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칠 수도 있는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도"(betrayal)를 행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공인된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이단(heresy)으로 빠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자도 구원을 상실하거나 은혜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번 구원받았으면 거의 구원받은 것이다"(Once Saved, Almost Saved)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배도로 말미암은 구원 상실의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갈 1:8-9)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히 6:4-8)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12:15-17)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체계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구원의 손길을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신다고 믿는다. 칼빈주의 5대 원리들(Five Points of Calvinism, 도르트신조, TULIP) 가운데 마지막 원리(P)가 "성도들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다(이성호, 『네덜란드 개혁교회 이야기』 [서울: 그 책의 사람들, 2015], 98-106). 견인이란 "참는다"(persevere)는 뜻인데, 한번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으신다는 의미다. 이 교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그리고 제한속죄설(Limited Atonement)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놓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택자들"(The Elect,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들 중 일부가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피는 헛되이 흘리신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O. Glenn McKinley, Where Two Creeds Meet: A Biblical Evaluation of Calvinism and Arminianism [Kansas City, MO: Beacon Hill Press, 1959], 45-6).
침례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침례교인들은 이 개념을 "신자들의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of the Believers)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자가 하나님께서 선택(election)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시며 돌보신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원히 입양(adoption)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아들과 딸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침례교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받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론을 믿기도 하지만, 한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하는 칼빈주의 구원론도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파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피값으로 산 자녀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없는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이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 갈라디아 1장 8-9절, 디모데후서 4장 10절, 히브리서 6장 4-8절, 히브리서 12장 15-17절 등과 같은 배도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좀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성경구절들을 적지 않은 이들이 믿음에서 탈선했거나 탈선하고 있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을 한다. "다시 한 번 더 이런 짓을 하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라고 호통치는 성난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도 불순종하는 목이 곧은 자녀들을 향하여 그렇게 경고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마음은 예수 믿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 아버지의 진심어린 마음은 한 자녀라도 버림받거나 잃어버려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한번 입양시킨 자신의 자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며 기다리시고,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얻게 된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eternal life)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은 "1년 생명"도 아니고 "5년 생명"도 아니고 "10년 생명"도 아니고 "유한한 생명"도 아니다. 무한한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이다. 영생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는 것이 "신자의 영원한 안전" 교리다(김승진, 466-7).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요 13:1). "한번 구원받았으면 언제나 구원받은 것이다"(Once Saved, Always Saved).
VII. 나가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 죄인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Savior)요 새로운 주인(Lord)으로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죄인의 신분을 가졌던 자가 의인의 신분을 가진 자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할이다. 성령은 살리는 영(a living spirit)으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죄인을 살리셔서 그에게 영적인 생명을 부여하신다. 한 죄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을 받아 죄와 자신의 죄악된 삶을 장사지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다. 성령은 또한 그에게 인(Seal)을 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음을 확신케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세와 권능을 덧입혀 주셔서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케 하신다. 성령은 죄인을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음을 확신케 하신다. 한 죄인을 구원해 내는 사역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꼭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극단적인 칼빈주의(Hyper-Calvinism) 신앙체계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을 매우 강조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명제이고, 동시에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믿을 능력도 없다는 것이 두 번째 명제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믿을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첫 번째 명제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두 번째 명제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그 죄인에게 감동을 주실 때 그 죄인은 회개를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회개할 능력이 없고 믿을 능력이 없다면 전도(evangelism)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신자(전도대상자)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여,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닌가?
성령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고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믿도록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개하고 믿는 것은 결국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시고 하나님께서 믿으시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감동하심을 힘입어, 그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를 해야 하고 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된다. 은혜를 베푸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회개하고 믿는 주체는 인간인 것이다. 인간이 선행의 공로(merit of good works)를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참 복음도 아니고 건전한 구원신학도 아니다. 인간이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인간이 믿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회개(repentance)와 믿음(faith)이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한 인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이 아닌가?
성경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라"(행 2:38)는 등의 말씀이 등장한다. "회개하라" 그리고 "믿으라"는 말씀이 명령형 동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사람이 회개할 수 있으니까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믿을 수 있으니까 믿으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또 사도 베드로는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사람들이 회개할 것을 이렇게 촉구하고 있다:
(벧후 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any, anyone)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all, everyone)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그래서 "모두가 다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이 이렇게 회개하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데, 회개할 능력과 믿을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물론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책망과 감동으로 역사하셔야만 인간은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밀레도 섬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행 20:20-21, 표준새번역)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우리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체류하였던 동안 장로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고 증언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죄인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회개할 것과 믿을 것을 촉구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동반하는 회개, 그리고 회개를 동반하는 믿음은 죄인이 죄사함 받고 구원받기 위해서 자발적으로(voluntarily) 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의무요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 성화 가운데 "문 밖에서 노크를 하시는 예수님"(Jesus Knocking on the Door)을 그린 그림이 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 문은 인간의 마음의 문을 상징하는데, 그 문의 가장 큰 특징은 문 바깥에 문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강압적으로 문을 열고 쳐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단지 노크를 하실 뿐이다. 문 안에 있는 사람이 노크 소리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문을 열면 그에게 들어가신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 예수님을 초청해 들이는 자에게 예수님은 들어가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를 하신다. 절대주권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 분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인격적인 분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배신할 수도 있는 자유까지도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의 금지명령(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을 불순종함으로 결국 인간은 죄인이 된 것이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로 전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게 되고 성령의 감동을 입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 문을 열게 된 죄인은 회개하고 믿는 결단을 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회개한다, 믿는다"는 말이 수동태로 쓰인 곳이 한 번도 없다. 회개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다. "회개된다, 회개하여진다, 믿게 된다, 믿어진다"는 수동태 표현이 성경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는다"는 말은 죄인이 성령의 책망케 하심과 깨닫게 하심과 감동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결단하는(decide to believe Jesus Christ) 것이다.
미국 장로교목사인 제임스 케네디 박사(Rev. & Dr. James Kennedy)에 의해 개발된 "전도폭발"(EE, Evangelism Explosion)이라는 훌륭한 전도훈련 프로그램이 있다. 한국에도 30여 년 전에 이 교재가 번역이 되었고, 한 때 여러 한국교회들이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풍성하게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기도 했다. 필자는 미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교포교회를 섬길 때,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전도활동을 하기도 했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좋은 점은 충분한 시간(40-50분 정도)을 가지고 복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전도인의 간증을 들려주기도 하고 성경구절들을 제시하기도 하고 적절한 예화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복음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전도대상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는데, 이를 "결신질문"(decision question)이라고 한다. "이 영생의 선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전도대상자로 하여금 "예(Yes)" 혹은 "아니오(No)"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이 있다는 전제 하에 "결신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예"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say "yes" or "no"),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think and judge),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 결단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decide), 고백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confess)이 있다고 보는 것을 침례교회에서는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The Competence of the Soul in Religion)이라고 부른다. 비록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복음과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은 최소한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결단할 수 있을 만큼은 "유능하다"(competent)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세 번째 이야기가 소위 말하는 "탕자의 비유"(Parable of Prodigal Son)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치고)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재산을 미리 가불받아, 아버지와 집과 고향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탕진하였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심히 궁핍하였는데,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었다. 둘째 아들은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겨 경원시 하던 돼지의 처지에까지 추락하게 되었고 끼니조차 때울 수 없어 비참하게 굶주리게 되었다. 그에게는 자연히 아버지와 아버지 집이 생각이 났을 것이다. 하인들까지도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배불리 먹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성령께서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그를 책망하시며 깨우쳐 주셨을 것이다.
이 때 등장하는 표현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 15:17)라는 문장이다. 이 표현은 개역한글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에서 사용되었는데, 마치 회개(돌이키는 것)를 의미하는 듯하게 번역되어 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그제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어서"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이라고 하였다. 킹제임스역 성경(KJV)에서는 "And when he came to himself"라고 번역했고, 새국제역 성경(NIV)에서는 "When he came to his senses"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탕자 그가 돌이켰다는 것이다. 탕자 그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이에 (그 둘째 아들은-필자 주)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라고 표현되었다. "스스로 돌이킨" 것도, "제 정신을 차린" 것도,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도 그 둘째 아들이다. 결국 회개(돌이키는 것)와 믿음(아버지를 향해 첫 발을 내딛는 것)의 주체는 둘째 아들이었던 것이다.
서론 부분에서 필자는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했던 두 가지 진술들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 - 이것은 자신의 바람을 진술한 것이지만 신앙고백이라고는 볼 수 없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 - 이것은 자신의 입으로 시인한 신앙고백적 진술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 "영적인 도약"(spiritual leaping)이 존재하는데, 후자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믿음이고, 믿음의 진술, 즉 신앙고백이다.
한 죄인을 구원시키는 사역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회개하고 믿는 것은 죄인의 몫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고 말씀하셨다. 불신앙의 자아와 죄악된 삶으로부터 돌이키고(회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의지적으로 달려나가는(믿음) 결단이 바로 구원받는 길인 것이다. 필자는 구원에 관한 다음의 정의를 좋아 한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전적인 공짜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의해 의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이다"(Salvation is an absolutely free gift from God, but which is to be wilfully received by man).
하나님께서 2000년 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의 선물(Gift of Salvation)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잔치에 참석하도록 초대장을 발부하셨다.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것을 등한히 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초대받기를 거부하는 죄인은 구원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뱁티즘(Fire Baptism)을 받고 영원토록 뜨거운 지옥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초대장을 받아들고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달려오는 자는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구원잔치에 참석하게 될 특권을 얻은 자이다. 물론 이 때 궁극적으로 그에게 책망과 깨우침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히 2: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such a great salvation)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계 19:9-10)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 3:16, 3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끝)
김승진 목사(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구원의 5대 교리
프랑스의 위대한 개혁자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사(敎會史)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정통기독교리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성경중심주의와 절대주권사상의 개혁의 물결에 로마 카톨릭은 힘을 잃게 되고, 개혁주의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대의민주제(代議民主制) 아래 제네바를 기점으로 교회는 날로 새로워져갔다.
그런데 칼빈이 소천(召天)된 후 40년이 지난 1603년 경 어느 날, 개혁주의 신앙의 본산지인 네델란드에 정부 관리출신인 코른헤르트(Coornhert)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칼빈주의의 '주권', '예정' 등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정부에 올림으로써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칼빈의 수제자 '베자'(Deodore Beza)는 분개하여 이 문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기와 같이 개혁주의를 표방해온 화란신학교 교수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를 불렀다. 그리고 그를 '코른헤르트'를 만나서 진상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은 '알미니우스'는 반박하기는커녕 그 글에 감동을 받아서 도리어 "절대주권은 잘못되었다. 예정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아주 타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고 선택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하며 칼빈주의를 공격했다. '알미니우스'는 1609년에 죽고, 다음 해인 1610년에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추종하던 무리들(Alminianists)이 이른바 '알미니안주의의 5대 항론(Remonstrance)'을 발표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완전 타락하지 않았고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자율 구원성).
②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고 선택하였다(예지예정 및 조건선택).
③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만인 구원).
④ 성령의 은혜는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자유의지).
⑤ 구원 얻은 사람도 잘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궁극적 구원 실패 가능). 등이다.
어처구니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칼빈주의 정통 신앙을 자랑스럽게 지켜오던 화란정부와 교회는 1618년 11월 13일 '돌트'(Dort)에서 세계적인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돌트 총회'(Synod of Dort)이다. 스위스, 영국, 신성로마제국, 독일 등 각지에서 온 27명의 사절과 84명의 교회지도자와 18명의 정부 고위층이 참가한 대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의 5대 항론(抗論)을 면밀히 분석하고 비판했다.
그리고 7개월에 걸쳐 총 154회의 회의를 거듭한 결과 칼빈주의가 승리하였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가장 흉악한 이설(異說)임을 확인했으며 만장일치로 알미니안주의의 5대 항론(抗論)을 기각(棄却)시켰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 5대 항론(抗論)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1619년 5월 9일 칼빈주의 5대 강령 (The Five Points)을 채택 발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듯이 이 강령은 칼빈 본인이 작성한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 입각한 구원론적 강령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전적(全的) 타락.
② 무조건 선택.
③ 제한 속죄.
④ 불가항력적 은총.
⑤ 성도의 견인(堅忍).
구원의 5대 교리(敎理)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1)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
중생 받지 못한 인간은 전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갈빗대 3개가 부러지고 다리를 다친 상태와 같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살아있고, 또 상처는 입었으나 의식이 있어서 의사를 부르며 구원을 요청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율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를 도와서 구원시켜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인협동(神人協動)에 의해 구원이 이룩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인간을 아직은 죽지 않은 병든 상태 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뻔했던 인간이 아니라 죽었던 인간이다. 구원의 요청은커녕 그럴 생각조차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4-6)
인간은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와 같다. 잘려진 가지는 잠시 푸른 기운을 보이지만 그것은 조만간 말라서 죽어버릴 것이 확실하다. 그 가지는 잠간의 잔존생애(殘存生涯)만 견디고 있을 뿐이다. 즉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 받지 못한 죄인은 전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잘려진 가지를 다시 원 둥치에 접을 붙였으니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이다(롬 11:17). 기독교의 구원은 자율이 아니라 타율이다. 전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죽은 인간을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 놓은 것이다. 이것이 중생(Regeneration)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따라 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아니하는 자들은 차라리 안 믿는 자보다 더 괘씸한 존재들이다.
2) 죄는 오염과 무능력을 가져왔다.
로마의 사형법에 산 사람을 벌거벗긴 채 죽은 시체와 마주 묶어서 광야에 내버리는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 시체에 함께 묶인 산 사람은 시체와 함께 썩어가는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어버린다. 죄에 물든 인간이 마치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산사람 때문에 시체가 살아나는 법이 없고 시체 때문에 산 사람이 죽어가듯이 인간은 자신의 생존성(生存性)을 가지고 사망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다. 죄는 인간을 오염 타락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도 선이나 의를 행할 수 없다. 완전타락(total depravity) 완전무능력(total inability)한 상태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상대적 선(善)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불신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돌트신조는 이러한 불신자의 선행을 "구원과는 관계 없는 선(善)"이라고 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하셨으니 불신자의 선(善)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중생한 자가 믿음으로 하는 선행만이 참되며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1) 선택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하나님의 작정(foreordination)이라고 한다. 작정은 전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다. 그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가장 핵심은 인간의 구원 문제이다. 성경은 인간의 장래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하는데 어떤 자는 천국이고 어떤 자는 지옥이다. 그것을 "선택"과 "유기(遺棄)"라고 한다. 즉 선택된 자는 천국이요, 유기된(버려진) 자는 지옥이다. 이처럼 구원(선택)이냐 아니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작정을 특별히 이름하여 "예정(Predestination)" 이라고 한다. 예정은 구원에 관한 용어로서 예정은 하나님의 작정의 일부이며 그것은 선택과 유기로 나눈다. 이외의 총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는 "작정"이라고 한다. 선택이란 골라서 뽑는 일이다. 누구를 골라서 뽑는가? 예정된 자만 골라 뽑는 것이다(마 22:14, 마 13:47-49, 24:). 그러므로 선택은 곧 예정이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으로 선택하시는가? 무조건(Uncondition)이다.
2) 무조건의 의미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되 인간의 조건(Condition) 즉 상태, 신분, 지위, 사정, 자격, 공로 등등을 따라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다. 선택이란 말은 조건을 따라 고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자를 찾아 뽑아내는(pick up) 것을 말한다. "잃은" 양을 찾으며,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다(눅 15:1-). 하나님의 예정, 선택은 인간편의 조건에 아무 관계 없이 "무조건 예정"이며 "무조건 선택"이다.
즉 "절대적 예정"이요 "절대적 선택"이다. 인간의 상대적 평가와는 관계 없는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인 계획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의 의미는 구원(선택)을 인간편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 조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왜 무조건이어야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다. 만약 선택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사역(主權使役)이 아니라, 인간과의 공동사역(共同使役)이 되어버린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른 바 "예지예정"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어서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이 말씀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믿을 가능성을 보고서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인간 사회에서는 그들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 그 물건의 조건(상태)을 보고서 고른다. 그러나 믿음은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예정, 절대선택을 송두리째 거부하려는 불효한 자녀들이다. 그리고 이 무조건 선택(예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4) 무조건 선택이 주는 결과
율법 613가지 중 하나만 범해도 죄인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율법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 중에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이 행하는 심령부흥회는 구원에 대한 감격이라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신앙의 고행행위일 뿐이다. 미친 듯이 부르짖고, 울고, 군중심리에 휩쓸려 황홀지경에 빠진 다음 성령충만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이 버려지지 않는 한 그들의 신앙은 불안하며, 유대인의 제사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집회는 교인들에게 무속신앙의 열정만 더해줄 뿐이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전적무능을 절감하는 진정한 신앙인은 선택은 나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 해주시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게는 선택받을 만한 조건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무조건 선택이 주는 결과는 "절대 안심"이다.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1) 제한속죄는 특별한 구속(救贖)이다.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은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는가? 그것은 선택된 자에게만 해당되는 희생이다. 이것을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라고 부른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특별한 구속(救贖)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제한이요 특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택된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이다. 그것은 오직 무조건 선택과 피 흘림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제한이요 특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택된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이다. 그것은 오직 무조건 선택과 피 흘림의 은혜이다.
2) 제한 속죄를 말하는 성경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 중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3-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
예수님이 염소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제한 속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속죄의 무제한 즉 "만인속죄설"을 주장한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다음과 같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 2:4-6)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고후 5:14-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위의 "모든" 또는 "세상"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든 인류"로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every)의 의미는 "모든 인류"가 아니라 "택한 자 모두"의 의미이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라는 말씀에서 "다"라는 말은 앞의 "너희"를 의미한다. 즉 "택한 자 너희 모두 다"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안에서(in Jesus)"의 구원이다. 기독교의 "모든 이"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말한다. "믿는 자마다(Whoever believes in Him)" 구원을 받는다.
3) 만인구원설의 모순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면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실패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단설이다. 만인구원이라면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구태여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도 없다. 그러나 제한속죄 즉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특별히 선택하시고 또한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 감사하게 한다.
4.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1) 반항할 수 없는 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 6:37)
선택된 자만이 주께로 올 수 있으며 선택된 자는 모두 실패하지 않고 주께로 오게 된다. 불가항력(不可抗力)이란 말 그대로 저항(반항)이 불가(不可)한 힘을 말한다. 성령께서 구원을 실시하시는 그 힘은 크고 완전한 효과가 있어서 누구도 거부하거나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다. 이것을 유효적 소명(有效的 召命)이라고 한다. 그물에 선택된 고기가 반항할 수 없이 끌려오듯이 하나님께 선택된 성도는 기어코 그 품 안에 들어오고야 만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와 믿음을 주시는 일련의 역사는 우리에게 은혜(Grace)이다.
2) 은혜의 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고전 5:14)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이 가진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서 구원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먼저 회개하고 믿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중생을 시켜준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만들어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엡 2:8-9)이라고 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믿음을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주장이다. 중생도 성령의 단독 역사(役事)이다. 중생과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협력이 아니라. 성령의 단독사역이다.
인간은 믿게 해야 믿을 수 있고, 회개의 영을 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 즉 중생된 자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 이것이 칼빈주의 신앙이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내가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한번 선택된 자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일단 성도(聖徒)로 부름 받은 자는 성령께 붙잡힌바 되어 기필코 천국에 들어가고야 만다. 이런 원칙을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궁극적 구원(Ultimate Salvation)이라고 부른다.
1) 견인(堅忍)
견인(堅忍)이란 "견고하게 붙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인내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는 자기가 아버지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은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더욱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은 그래서 안심이다. 하나님은 일단 선택한 성도는 놓았다 붙들었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도를 끝 날까지 계속해서 붙잡고, 믿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 눈이 불 꽃 같고“(계 1:14, 19:12)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출 13:21-22),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신다(시 23:4).
2) 영원한 보전(保全)
이는 궁극적으로 닿는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수나 실패가 없다. 영원한 보전(保全)이요, 궁극적 구원이다. 성도는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힘이 나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께 절대 의지하는 신앙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중생된 자도 지옥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믿었다가 낙심하고,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잃기도 하며, 처음에는 하나님의 자녀였다가 다시 마귀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교리이다.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택한 성도를 붙들고 가실 것이므로 구원의 실패는 없는 것이다. 전적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견인 등 이러한 구원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主權) 위에 세워진 한 고리에 메어진 동일한 사상이다.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떼어내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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