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막 10:13-16)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상태인가 사회적으로 무력하고 천한 위치인가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 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 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3-16)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사실 어린아이라면 보통 천진무구한 순수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천진무구란 눈과 같이 희고 한 점의 때도 없는 순진함을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험악한 세상살이 하다 보니 세상의 때가 많이 묻게 되고 속을 일도 많다 보니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어른들에겐 본문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저 가르쳐 주는 대로 믿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훈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나라의 치열한 교육 현실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어른만큼이나 경쟁적이고 사회의 개인주의로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이기적이 되어 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척박해도 대체로 아이는 아이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지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아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이들의 미소와 눈빛을 바라보면 내 맘도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욱이 한 발짝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어린아이는 이런 순수함, 가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요? 학자들 사이에서 60년대까지는 이 어린아이에 관한 내용을 "아이의 수용력"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습니다(예를 들어 Vincent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Macmillan & Co. 1955, 412-422). 어린이의 특성이 모든 것을 순수히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분명히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습니다. 본문처럼 예수님의 팔에 안겨서 어떠한 계산 없이 축복을 순수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믿음인 것은 틀림없지요. 그래서 어린아이가 의미하는 비교의 중점이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수용적인 자세", 그리고 타인들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의존 상태"로 보았습니다(D. E. Nineham, Saint Mark, Baltimore: Penguin, 1963, 268).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성품인 것이 틀림없음에도, 본문이 진정 말하려는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의 의도는 어린아이의 "무력하고 천한 사회적 위치"로 보입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었을까요? 어린아이는 당시 여성의 천함, 가난한 자 부정한 자와 같은 무력함과 소외됨과 같은 계층의 사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어린아이 말고 제3세계의 아이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부유한 집 아이들이 아니고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 허다하고 어떤 아이들은 일부 어른들의 범죄에 가까운 행동,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역사 속에서 빈곤과 기아로 시달리는 시절일 때 어린아이들은 자주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어른들의 범죄에 이용당하거나 영양실조로 아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올리버 트위스트"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이야기가 그런 상황을 반영하지요. 어린아이는 당시 가정에서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종속되었기에 쉽게 군림당하고 착취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아이가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당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 분개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다니신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하대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많은 노력으로 말미암아 당시 어린이를 부르던 보편적이었던 '아 새끼'란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어린이란 표현이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의 어린아이는 부유층이나 귀족 같은 특권계층이 아닌 다음에는 현대사회와 같은 위치와 권리를 누리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부모는 신생아를 버려 노출에 죽게 내버릴 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때론 낯선 사람이 신생아를 데려갔는데, 대부분 그런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답니다. 이방 문화에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체벌은 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이었던 스파르타 문화에서는 사내아이들을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내아이들이 7세가 넘으면 모두 막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면서 때론 이유 없이 정기적인 채찍질과 폭력을 가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음식을 부족하게 제공해 훔치는 기술을 터득하게 했고 아이들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는 심한 채찍질로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타처럼은 아니더라도 로마의 학교교육도 꽤 엄격했는데 주로 그리스출신 노예들로 이루어진 선생들은 학생들을 심한 체벌로 다스렸습니다.
유대의 어린아이도, 당시 주변 문화처럼 대체로 천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방어 능력도 없고 생산능력이 없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종해야 할 뿐 그 어떤 높임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1960년대 이후 학자들은 마가복음 10:15절을 어린아이의 "낮은 위치"를 말하는 마가복음 9:23~27절을 통해 읽어나감으로 아이의 성품이 아니라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5~37)
마가복음 10:13~16절의 본문이 위치한 큰 문맥인 8:22~10:52절에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하여지고 낮아져야 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삶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를 언급하며, 그리고 그 이후에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
사회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은 그러나 비천하게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사형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공포를 느끼기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 9:32)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만 관심을 보이며 한심한 논쟁을 벌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3~34)
9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답답해하시며 진정 높아지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당시 낮고 보잘것없는 약자였던 어린아이를 예로 드신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가 되어야 높은 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천한 자를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가장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는 역설적 진리입니다(막 9:35~37). 예수님은 어린이의 예를 통해 천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력하고 천한 자의 자리까지 낮아짐이 진정 높아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과 소외된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특히 37절 말씀은 마태복음 25:40절을 연상시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어린아이란 표현 대신 직접 "작은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가복음 10장 13~16절에서 사용된 어린아이의 의미라 생각됩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은 세 단락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마 그들을 만져주시며 축복해 주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16). 제자들은 그러나 그들을 꾸짖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러하듯 그들도 어린아이를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자리에 서라고 바로 전에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막 9:30~37).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신분상승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음을 당할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막 8:33).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모두 여전히 영적으로 장님인 상태입니다(비교 막 8:17~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회적으로 낮은 자와 소외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그런 모습이 되어야겠지요.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4~16).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은 낮아짐에 대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력하여 공격당하기 쉽고 천한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마가복음 10장 14~16절에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결코 이상적인 순수함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그리 존중받지 못했는데 본문은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위치를 예로 든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전체 문맥인 8:22~10:52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낮아짐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공격당하기 쉬운 천한 자의 위치로 낮아지는 자세가 오히려 높아지는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고 천한 자의 겸손과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천한 자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16절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자들은 무력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의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의도를 지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 자신을 천하게 낮추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했고, 제자들을 그들을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13, 14) 어린아이를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까지 해 주시십니다(16). 이는 세상에서 천하고 낮은 자인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귀하고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낮고 천한 자로 자신을 낮추고 그런 위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떠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높이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떠받드는 우리 사회에서 이 표현은 이제 새로운 문화 번역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들어갈 자격으로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천한 자의 의미입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어린 아이를 축복하심(막 10:13-16)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역에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예수님의 결혼관과 이혼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인 겸손함의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하는 사역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린아이가 내게 나오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뜻을 거역하고 내 뜻을 고집하는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다.
1.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3-14)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3),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
몇 사람이 자기 아이들(파이디아: 갓난 아이부터 10세까지의 아이)을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한 것을 보면, 이 어린 아이들 중에는 매우 어린 아이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모들을 책망하고 그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지 못하게 했습니다(13). 제자들은 사역으로 바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로 인해서 사역에 방해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금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가 내게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제자들처럼 어린아이들을 소홀히 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귀중히 여기시며 그들을 사랑하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들을 귀중히 여기고 축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시받거나 멸시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14). 그러므로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막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을 막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반기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가야 합니다.
2. 어린아이가 천국에 들어간다(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5)..."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15)." 이 선언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선언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받든다(받는다)"는 말은 복음을 선포할 때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신뢰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의심하고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들을 때에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3.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예수님(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16 ).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 상황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헬라 세계는 어린아이들을 경시하고 매우 엄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존경받는 선생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안수하며 축복하는 모습은 당시에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주전 1년 6월 17일로 서명된 알렉산드리아의 한 파피루스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사본에는 한 남자가 장차 아내가 될 사람에게 지시한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남자는 아내가 될 사람에게 장차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살려두고 여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 당시에 아이들이 매우 멸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당시에는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외부에 노출시키는 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교사가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저스틴의 변증서 1장 27절).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하신 행동은 어린아이의 인격이 진정으로 귀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어린아이의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와 같이 따뜻하게 영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하나님은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교만하고 자만하는 사람보다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3.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야한다.
<최영찬 목사>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마가복음 10:13-16
오늘 우리는 자녀들과 함께 한마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어른들에게 묻겠습니다. “자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또한 자녀가 된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자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자녀란 한마디로 보석함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석함에는 온갖 좋은 보석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보석함 자체는 보잘 것 없을 수 있습니다. 낡고 못생긴 상자일 수 있습니다. 평범한 항아리일 수 있습니다. 땅에 감춰져 흙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보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의 어릴 때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키도, 체구도 작고 그리 잘 생긴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소년이 장차 2차 대전에서 영국을 구할 위대한 정치인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석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영국의 시골 소년 속에 영국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가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팔려 눈물을 흘리며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한참동안 노예로, 죄수로 고생했습니다. 이 소년은 바로 애굽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살린 총리 요셉입니다. 팔려가는 작은 소년 속에 위대한 요셉의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베들레헴에서 양 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막내였습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아버지 심부름하는 일, 형들을 대신하여 늦게까지 양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다윗 속에 훗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구할 위대한 왕의 보석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속에도 이 위대한 보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값진 보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어떻게 우리 자녀를 보석처럼 키우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자녀가 우리의 희망이 되고 이 나라의 소망이 되고 하나님이 꿈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자녀들 모두가 우리 부모들이 정말 아끼는 값진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을 보석 같은 존재로 키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통해 배워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첫째, 자녀들을 용납된 존재로 키워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정이 빠듯하고 그 날도 갈 길이 바쁜 데 아이들이 예수님을 막아서자 제자들이 아이들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마가복음 10:14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급하셨으면 노하셨겠습니까? 온유하신 예수님이 분노까지 하셨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무조건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용납과 격려입니다. 사람은 격려 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한다고 하면 잘하고 못한다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교육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 라고 합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가진 대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시원찮아” 하면 그는 계속 나에게 시원찮은 존재가 됩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 하면 이상하게 그는 나에게 좋은 존재가 됩니다. 좋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좋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좋아진 것입니다. 기대한대로 됩니다. 그런가 하면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도 있습니다. 환자가 급하게 약을 찾습니다. 그런데 마침 찾는 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다른 약을 주면서 말합니다.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 며칠 있다 보니 환자가 나았습니다. 약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의사의 말 때문에 나았습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약이나 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신뢰입니다. 최고의 약은 신뢰입니다.
지금 우리 자녀들은 마음대로 꿈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삽니다. 온갖 고생과 수고를 해야 겨우 대학가고 직장잡고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교육부장관이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수상자가 많아지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나라에 노벨상 받을만한 천재 세 명만 보내주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세 명을 보냈는데 아인슈타인, 에디슨, 퀴리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이들이 진전이 없고 노벨상은 그만두고 점점 평범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교육부장관이 먼저 아인슈타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인슈타인은 대학에도 못 들어가고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인슈타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수학을 잘하고 수학만 하면 신이 나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고 했습니다.
다음 에디슨을 만났습니다. “에디슨은 본래 대학을 안 나왔으니까 잘 되었겠지” 생각했는데 그는 골방에 들어가서 육법전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에디슨이 발명은 많이 했는데 특허를 얻기가 어려워 특허 관계법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퀴리 부인을 만났습니다. 역시 놀고 있었습니다. 왜 놀고 있냐고 물었더니 “여자라고 교육도 안 시켜주고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도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공감을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웠지만 우리 자녀들은 훨씬 더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납이 필요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0:13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왜 아이들은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만져주기를 바래서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만져주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드러운 손과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 주실 때 아이들은 사랑받는 기쁨으로 “나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94년에 있었던 지존파 사건을 아십니까? 살인공장을 차려 사람을 죽이고 인육까지 먹은 대한민국 범죄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지존파도 처음부터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지존파의 두목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했습니다. 17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에 학교 선생님한테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너무 가난해서 크레파스 살 돈도 없었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선생님은 ‘왜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느냐’며 화를 내고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를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준비물을 못 가져오면 훔쳐서라도 가져와야 할 것 아니야?” 선생님의 이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나쁘게 바꿔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사람을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받아주지 않고 용납해주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 한마디 때문에 사람이 달라진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을 지닌 로널드 레이건의 이야기입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 주 시골 마을에서 구두 수선을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백화점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깨가 축 쳐져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오늘도 안됐구나.” 하고 생각하며 아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로널드야. 너무 낙심하지 마라. 오늘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생길거야. 하나님은 나쁜 일을 통해서 선한 일을 만들어 낸단다.” 이 말이 어린 레이건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때부터 레이건은 낙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일리노이에서 직장이 잘 구해지지 않자 아이오와까지 가서 구인광고를 보았는데 라디오 아나운서를 구한다는 광고였습니다. 레이건은 합격했고 6개월 후 지역 대표로 할리우드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영화배우의 길이 열렸습니다. 레이건의 일을 회고하면 그때 백화점에 취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나운서가 되고 영화배우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 말이 맞습니다. “오늘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생길거야.”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에게 그렇게 말해 주십시오. “오늘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생길거야.” 또 이렇게 말하십시오. “너는 할 수 있어. 네 속에는 온갖 보석이 있어. 나는 너를 믿는다.”
자녀를 용납하는 방법 중에 안아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쌍둥이 중 하나는 정상적으로 건강한데, 또 하나는 너무 아파 인큐베이터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날, 간호사가 쌍둥이 둘 다 인큐베이터 안에 넣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서로 인사나 하고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자마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건강한 아이가 아픈 아이를 향하여 팔을 뻗더니 껴안았습니다. 둘은 한참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아픈 아이의 심장과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활기가 돋기 시작했습니다. 인큐베이터에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아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안아 줘야 합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 안아줘야 합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 힘내라고 안아 주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집안일 하느라 피곤한 아내, 안아줘야 합니다. 지금은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우리의 부모님, 안아줘야 합니다. 매 주일 정기적으로 만나는 성도들, 서로 안아줘야 합니다. 안아주면 살아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었습니다. 접촉의 기적입니다. 마가복음 10:16입니다.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녀들을 안아주고 용납해서 그 아이들을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둘째, 자녀들을 축복 받는 존재로 키워야 합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 두 번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16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해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사람의 좋은 말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말을 넘어 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축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매주 금요일 밤, 안식일 저녁이 되면 식사 전에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주여, 이 아들이 요셉의 아들들 같고 아론의 후손들 같게 하옵소서.” 그리고 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들이 우리 믿음의 조상 사라와 같고, 리브가와 같고, 라헬, 레아같이 되게 하옵소서.” 유대인들은 그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하면 그대로 된다고 믿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동생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 에서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야곱은 장자의 축복받기 위해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온 몸을 털을 붙여 눈이 나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의 태도는 축복은커녕 저주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못된 야곱의 태도를 성경 어디에서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그 후에 더 많은 복을 받고 에서는 더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복을 받은 야곱이 옳았다는 것입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열망의 문제입니다.
야곱은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창세기 25:34입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열망입니다. 열망이 있는 사람이 선교도 하고 열망이 있는 사람이 교회도 부흥시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자로 키우면 에서처럼 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애굽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습니다. 두 아들을 위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의 임종 직전에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창세기 48:9입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당시 세계 최강의 애굽 총리 요셉이 무엇이 더 필요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겠습니까? 요셉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애굽 총리로서 없는 것이 없는 요셉이 그 아들들에게 무엇을 못줘서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하겠습니까? 야곱과 요셉이 사모했던 것은 새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복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 목회자의 안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학기가 시작될 때. 또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어머니가 말씀했습니다. “목사님 기도 받고 오너라.” 항상 “너 목사님께 인사했냐?” “이것 전도사님 갖다 드려라.”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찾아가면 그분들은 꼭 저를 위해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 있으면 목사님 먼저, 첫 곡식, 첫 열매 나오면 전도사님, 생일 되면 “목사님 모시고 와라.” 어릴 때는 싫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자녀들을 공부 잘 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아이로 키우는 것입니다. 다시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해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가정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최선의 방법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는 세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축복입니다. 둘째 부모가 신앙으로 바로 서고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축복입니다. 셋째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가 잘 자라는 축복입니다. 예배할 때 아빠가 자녀 머리에 손을 얹고 엄마는 자녀의 손을 붙잡으세요. 어릴 때 머리에 올린 아버지의 손과 옆에서 붙잡아 주는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는 자녀가 자라서 어떻게 잘못되겠습니까? 가정 예배를 드립시다. 오늘부터 드립시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게 해야 합니다.
셋째, 자녀들을 남을 위한 존재로 키워야 합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 세 번째는 자녀들을 남을 위한 존재로 키워야 합니다. 아이들을 받아주고 안아주고 축복해주신 예수님이 아이들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에는 그 대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아이들을 안아주고 만져주고 축복해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착하게 자라라.” “공부 잘해라.” 이런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남을 위해 살아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남을 위한 일생이었습니다.
장애인으로서 미국 백악관 정책 비서관을 지낸 강영우 박사가 쓴 “원동력”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강영우 박사는 두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하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주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한 것이 자기의 생일과 같은 날 태어난 세계적인 인물을 조사해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큰 아들 생일이 4월 23일인데 같은 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아들에게 “네 생일이 셰익스피어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인으로 쓰시기 위해 같은 날 태어나게 하셨다.” 말했다고 합니다. 동생의 생일은 6월 15일인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너는 왕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했답니다. 자기 부부도 찾아보았답니다. 강영우 박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날, 아내는 케네디 대통령과 같은 날 태어났답니다. 이를 통해 강영우 박사 가족은 “우리 모두는 이 땅에 귀하게 태어났다. 우리는 귀한 존재이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두 번째 자녀교육 방법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자녀들에게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들은 아버지 같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의과대학에 가고, 동생은 아버지 같이 약한 사람을 돕겠다고 법학대학에 갔습니다. 나중에 소원대로 큰 아들은 의사가 되고 작은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둘이 고등학교 때 들어간 학교가 미국 최고의 명문 사학 필립스 아카데미입니다. 이 학교의 교훈이 “Not for self”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이란 뜻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학교의 연간 수업일이 150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220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습니다. 공부도 아침 8시에 시작되면 오후 2시15분에 끝납니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대통령, 국무장관, 공직자, 경영인 등, 미국 저명인사중 가장 많은 사람이 이 학교 출신입니다. “Not for self”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 이 믿음이 인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공부가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과 가치관이 인물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키워야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적 가치관은 “Only for myself” “오직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가치관은 “Only for others”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Jesus first, 예수님 먼저, Others second, 다른 사람 두 번째, You last, 나 마지막의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영어로 JOY “기쁨”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선 땀을 흘려라. 이웃을 위해선 눈물을 흘려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선 피를 흘려라” 이런 사람이 인물입니다. 세상은 지금 이런 인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자원이 묻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을 받고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대한 유전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정답은 무덤입니다. 왜요? 무덤에는 자신의 가능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석함인지 모르고 하루하루 살다가 그 찬란한 보석함을 무덤 속에 묻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무덤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자원이 묻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 오면 그 위대한 자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그 위대한 보물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인물이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여기 있는 자녀들도 모두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만지면, 그 분이 축복하면,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시면 여러분이 위대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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