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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마21:28-32)

by 은총가득 2021. 11. 4.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마21:28-3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다 쉽게 교훈하기 위하여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와 같이 대적하는 자들을 보다 완벽하게 반증하시기 위하여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깨닫게 하셨는데,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등장시키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와 같이 나단 선지자도 비유를 사용하여 다윗을 깨닫게 하였고(삼하 12:1), 또한 드고아의 여인이 그와 같이 하여 다윗을 놀라게 하였다(삼하 14:2). 책망하는 비유가 대적하는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인데, 첫 번째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28절) 

이 구절에는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의 목적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이것을 알고 인정한 세리나 창기에 의해서까지 창피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두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 그 자체. 

 

맏아들(역주:한글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은 자신이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한 사람으로 표현되었고, 둘째 아들은 실행한 것보다는 약속한 것이 더 나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1. 그들은 동일하면서 오직 하나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그에게서 은혜를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그에게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 그들은 동일한 명령을 받았다. 즉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게으르게 길러서는 안 된다.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즐겁고 그러면서도 귀찮은 것은 없다(애 3:27). 하나님께서는 비록 상속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자녀들을 일하러 보내신다. 이 명령은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종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종교적인 일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인데, 이는 믿을 수 있고 유익하며 즐거운 일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황무지에서 일하도록 내쫓김을 당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들의 목초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2) 복음은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고 있으며,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얘, 오늘 가서 일하라." "오늘"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게으름을 피우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에게 낮이 주어진 것은 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일찍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작정하였었다면 왜 지금 하지 않는가? 왜 오늘 하지 않았는가? 

(3)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권고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이 말씀되어지고 있다(히 12:5). "얘 가서 일하라." 그것은 권위와 애정을 가진 아버지, 즉 자기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의 명령이며 또한 그들의 체질을 알고 과도하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아버지, 즉 "자기를 섬기는 아들"(말 3:17)을 잘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명령이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해야만 한다. 

3. 그들의 행위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1) 그 아들 중의 하나는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낫게 행동하였으며, 그가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하였다. 그의 대답은 나빴지만 그의 행동은 좋았다. 

[1] 여기에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퉁명스러운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단조롭고 솔직하게 "싫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실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나온 거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러한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대답하다니! 굽히지 않으려는 자들은 정녕코 부끄러워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일말의 겸손을 가지고 있었던들 차마 "싫소이다"(렘 2:25)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명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인 거부는 더욱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만한 거부가 종종 복음의 부르심을 얻게 할 수도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락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물 속에 사는 악어와 같이(시 104:26) 세상에 살며 그 속에서 놀려고 한다.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들판에 너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직무를 사랑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감각의 즐거움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직업 때문에 그들이 세상으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그 큰 일들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온 종일을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다." 

[2] 여기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길을 바꾼 행복한 변화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처음에는 사악하고 악의적이며 장래성이 없는 사람이 후에 뉘우치고 고쳐 정신을 차리게 될 때가 많이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 함부로 날뛰며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고전 6:11). 이러한 것들을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고"있다(딤전 1:16). "그는 후에 뉘우쳤다." 회개는 metanoi,a─즉 때늦은 지혜(an after-wit)이다. 또한 metamelei,a) ─즉 병 치료후의 몸조리(an after-care)이다. 나중이 오히려 더 좋은 회개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회개하였을 때 즉시로 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에 항거하던 것에 대해 회개한 오직 유일의 증거는 즉시로 순응하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 지나간 것은 사함을 받게 되며 모든 것은 잘 되어질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친절하신가를 살펴 보라. 그는 당연히 우리들이 그의 명령을 거부해버린 무례함에 대하여 분을 내셔야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있다. 아버지 면전에서 자기는 그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 자는 마땅히 문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또한 상속권을 박탈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기다리시며" 또한 우리가 전에 저지른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기만 한다면 우리를 호의적으로 영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는 이러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계약 아래에 놓여 있다. 

(2) 다른 아들은 그가 행한 것보다 더 잘 말했으며, 그가 실천한 것보다는 오히려 더 잘 약속하였다. 그의 대답은 좋았지만, 그의 행동은 나빴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같이 말하였다"(30절). 복음적인 부르심은 비록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또한 대등한 목적을 가지고 수행한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명령과 계약과 격려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떤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가 된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다른 아들은 얼마나 명백하게 약속하였는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어르신님"(sir, 역주:개역 성경에는 아버지로 되어 있음)이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녀가 그 부모님께 존경하여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가겠소이다"라고 순종할 채비가 다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점차적으로 가려고 합니다"가 아니라 "아버지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나 지금 곧 가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답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또한 그의 말씀의 명령에 대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만 한다(렘 3:22; 시 28:8 을 보라). 

[2] 그는 이렇게 이것을 실천하지 아니했는가? "그는 가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많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종교적으로 분명한 약속들을 하며 그 당시에는 몇 가지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 그냥 머물러 버리고 말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헛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말한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경우는 특별히 바리새인에게 해당된다(마 23:3).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많이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졌지만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을 행해야만 하며 때로는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떠나야만 할 때도 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목적 은거의 예상 밖의 것이 될 때가 있다. 새로 돋아나는 싹이나 또는 꽃은 열매가 아니다. 

 


Ⅱ. 이 비유에 대한 평범한 호소.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들은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하나는 무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릇된 것이었다. 부모들은 때로 그들의 자녀들의 기질에 따라 이러한 다양한 실천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알 수 있는 많은 지식과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둘 중에서 누가 더 낫고 덜 잘못했는가? 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결정되었다.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사람이다(역주: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의 행동이 그의 말보다 더 나았으며 그의 나중 결과가 처음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인간의 상식으로부터 배웠다. 즉 사람이란 자신의 말에 거짓된 자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말에 앞서 실천하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에 대하여 제시하신 규칙에 근거하여 이 사실을 배웠는데(겔 18:21-24), 그것은 곧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난다면," 그는 사함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한다면" 그는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성경의 취지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즉 비록 그 뜻을 거역했을 지라도 회개하고 더 나은 행동을 하는 자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Ⅲ. 특별히 이 사실을 가까이 있는 일에 적용하심(31, 32절). 

 

이 비유의 원래적인 목적은, 메시야를 크게 기대하였고 그의 분량에 충분히 이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세례요한을 업신여기고 또한 그의 사명의 목적들에 대하여 반대하였지만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결코 이야기된 것이 없는 세리들과 창기들은 어떻게 그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교훈을 환영하였으며, 그 훈련에 복종하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즉 이방인은 "종종 불순종하였으며 맏아들과 같이 오랫동안 불순종의 자녀였다"(딛 3:3, 4).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믿음에 대해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약속했던 유대인들(출 24:7; 수 24:24)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에게 아첨하였다(시 78:36).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 대해 적용하신 사실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만일 너희가 단정하여 말할 수 없더라도 추론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1) 그의 사역의 목적에 의해. "요한의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요한이 그의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시험의 법칙, 즉 "그들의 열매, 즉 그들이 교훈의 열매, 그들의 행위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의 방법(또는 길)을 살펴보아라. 그리하면 그들의 기원과 그들의 경향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의의 도로" 왔다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과 의의 일을 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대화에 있어서 엄격과 진지함 그리고 세상을 멸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서 큰 본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세례에 순종하신 것은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와 같이 의의 도로 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그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2) 그의 사역의 성공에 의해.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그는 가장 나쁜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선을 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표를 가지고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고 있다(고전 9:2). 만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이러한 놀라운 성공의 면류관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영혼을 회개케 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리와 창기들이 그의 설교를 믿었다고 한다면 이는 정녕 하나님의 팔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소득은 사역자들의 최고 기념품이다. 

2. 그는 요한의 세례에 대한 그들의 멸시에 대해 어떻게 책망하고 있는가?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불신앙과 패역을 더욱 악화시켰던 세리들과 창녀들의 신앙과 회개 그리고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가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보여 주신 대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가 회개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과 같이 여기에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들이 회개하였다. 

(1) 세리들과 창녀들은 이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았는데, 그들에게서는 종교적으로 아무 것도 기대될 수 없었다. 그들은 선한 것에 대해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아는 자들도 그들과 더불어 아무런 선한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사악하였으며, 그들의 대화는 난잡하고 퇴폐 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었다. 누가복음 7장 29절을 보라.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휘트비 박사가 생각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은 계열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창기나 또는 창기에게서 태어난 자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요 8:41).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참으로 일반적인 유대국가는 말만 하게 하였던 둘째 아들(역주:개역 성경에는 맏아들)과 같았다. 그들은 특별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정작 메시야의 왕국이 요한의 세례에 의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업신여겼고 등을 돌려댔으며, 아니 "그들에 대항하여 발꿈치를 들어올렸던 것이다. 위선자는 악한 죄인들보다도 죄를 깨닫거나 회개하기가 더 어렵다. 사탄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그것으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1] 요한은 탁월한 사람으로서 "의의 도"로 그들에게 왔다는 사실이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짙게 하였다. 수단이 좋으면 좋을수록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세리들과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을 보고도 그 후에 회개하고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경쟁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아니하였다(롬 11:14). 세리들과 창기들은 은혜와 영광을 가지고 달아나 버릴(go away with) 것인가? 그러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우리보다 더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동생 야곱의 본을 따라 그가 행하였던 것보다는 다른 조처를 취하려고 했던 에서의 재치와 매력도 가지지 못하였다(창 28:6). 지도자로 자처했던 이 거만한 제사장들은 그것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리들을 따라가는 것을 업신여기고 말았다. 그들은 거만한 얼굴 때문에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려고 하였다(시 10:4). 

 


 악한 농부의 비유 (마21:33-46)

 

이 비유는 유대 국가의 죄와 파멸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농부이다.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말해지고 있는 것은 보이는 지상 교회의 특권을 즐기는 자들로 하여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할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말해지고 있다. 

Ⅰ. 우리는 여기에서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는 것으로써 표현된 유대교회의 특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위대한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by), 하나님으로부터(from), 하나님 아래에(under), 고용된 소작인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어떻게 이 세상에 교회를 설립하였는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여기에서 포도원과 비교되고 있으며, 이 포도원은 흑자의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경영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1) 그는 이 포도원을 심으셨다. 교회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것"(사 61:3)이다. 교회의 형성은 포도원이 심겨지는 것 같다 독자적인 일로서, 많은 비용과 배려를 요구한다. 그것은 "주의 오른손이 심은"(시 80:15) "극상품 포도나무"(사 5:2)와 "귀한 포도나무"(렘 2:21)로 심은 "포도원"이다. 땅 그 자체는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심기어져야만 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닌 정해진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2) 그는 포도원을 산울로 둘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에 두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산울은 욥이 두른 것과 같았으며(욥 1:10), 불로 된 담벽(슥 2:5)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그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며 또한 언제나 받게 될 것이다. 할례의 언약과 의식적인 율법은 유대교회에 쳐진 울타리이며 칸막이 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헐리워졌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복음의 명령과 훈련을 그의 교회의 울타리로 정하셨다. 그는 밖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포도원을 황무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안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날뛰도록 포도원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이 거룩한 산을 울타리 두르도록 배려하실 것이다. 

(3) "그는 거기에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지었다." 번제단은 즙 짜는 구유로써, 모든 번제물이 여기에 드려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규칙을 정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적절히 보살피고 그 열매맺는 것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형편이 좋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2. 그는 어떻게 이 가시적인(visibel) 교회의 특권을 유대인의 국가와 백성들에게, 특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위탁하셨는가? 그는 그들을 농부로 임명하여 이 포도원을 맡겼다. 그것은 소작인을 거느린 땅 주인으로서의 그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유대에 하나님이 알려지고 그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그의 이름과 칭의가 되게 하려고"(렘 13:11) 했을 때, 그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셨을 때"(시 147:19), "생명과 평강의 언약"(말 2:4, 5)이 레위와 더불어 맺어졌을 때 이 포도원은 임대가 되었다. 임대 계약의 내용을 보라(아 8:11, 12). 포도원의 주인은 "은 일천"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사 7:13 과 비교하라). 주요한 이득은 그의 것이었고, 관리자는 이백을 가지기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적당하고 충분한 장려금이다. 그 후 그는 "타국에 갔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시내산에 유대인교회를 세우신 후 그는 얼마간(in a manner) 물러나셨다. 그들은 더 이상 이러한 현상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말로 기록되어 남겨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세가 없어진 것으로 상상했듯이 그들은 그가 먼 타국으로 가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때로부터 사악한 나날을 보냈다. 



Ⅱ. 하나님께서 이 농부들로부터 세를 받기를 기대하심(34절). 

 

그것은 당연한 기대였다. "포도원을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 즉 사역자들과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이에 준한 열매를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1. 그는 서둘러서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 포도원에 대해 비용을 많이 들였지만, 미리 세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세례요한이 "하늘 나라가 가까웠다"라 말한 것과 같이 "실과 때가 가까이 이를 때"까지 보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로 기다리신다. 

2. 그이 기대는 높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일 그들이 체불한다면 그 모든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도록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궁들을 그들에게"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의무와 세를 바치는 날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들이 추수하는 것을 거들고 그것을 되돌려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유대백성들에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3. 그의 기대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실과를 받는 것이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그들이 만들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그 자신이 심은 것에서 딴 약간의 열매였다. 즉 이 열매는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율법과 규례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적합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텅빈 포도나무였다. 아니, 그것은 타락한 이상한 포도나무가 되어 야생의 포도열매를 맺었다. 



Ⅲ. 그 농부들은 그들에게 파송된 심부름꾼을 무참히 죽였다. 

1. 그가 그들에게 자기의 종들을 보내었을 때, 그 종들은 주인을 대리하였고 또한 그의 이름으로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 종들을 무참히 죽여버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로 부르거나 비난하는 것은 그것들이 호의를 얻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욱 분노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실한 종에게 돌아갈 다소간의 몫(lot)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고난받은 것이다. "그들 선지자들은 매우 핍박을 받았는데," 잔인한 증오자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리 고 이사야를 죽였으며,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에서 돌로 쳤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한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권고하는 자들이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학대하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옛적에 다투신 것이다(대하 36:16). 

(2)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은 그들의 주인의 소작인들에게서 고난을 받게 되어있다(역주:그것이 그들의 몫이다). 이와 같이 그들을 취급한 농부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대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의 선지자를 가장 비참하게 박해한 원수들이었으며, 그들은 내어 던지고 죽였으며,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지어다"(사 66:5)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 20장 1, 2절, 26장 11절을 보라. 

[1]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들에 대하여 선하심으로 참으셨는가? 그는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었다. 첫 번째 보낸 종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지만 주인은 두 번째로 종들을 또다시 보내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그들에게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를 목베어 죽여버렸다. 하나님은 또다시 그의 제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오 하나님의 인내와 참으심의 부요함이여,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멸시를 받고 박해받는 사역을 멈추지 아니하시는도다! 

[2]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계속하였는가?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하나의 죄는 동일한 다른 죄에 대한 통로를 만들어 준다. 성도의 피에 취한 자들은 더욱 더 목말라 하면서 여전히 "피를 달라, 피를 달라"고 외친다. 

2. 마침내 그는 자기의 아들을 보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들을 보내시는 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들을 죽이는 데서 나타난 농부들의 사악함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나중의 예에서 농부들은 그 도를 넘고 있다. 

(1) "아들을 보내는 것"보다 더 은혜스러운 은혜가 나타난 일이 없다. 이것은 맨 "나중에" 행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지막에 보내어졌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그들에게 효력을 주지 못하였다면 이 일 밖에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마지막 수단"(ratio ultima)으로 보류되었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를 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왔을 때는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기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실하고 순종을 하는 능력 있고 효과적인 원리가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아들을 존경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점은 얻은 셈이 된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종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위하여 그에게 심판권이 위임되어 있다. 모세의 율법을 경시하는 것보다 그를 거절하는 것이 더 위험스러운 일이다. 

(2) 그 아들을 죽인 것보다 더 사악한 죄가 나타난 일이 결코 없다. 이 죄는 이, 삼 일 안에 행하여졌다. 

[1] 이 죄는 어떻게 계획되었는가(38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즉 백성들이 메시야로 인정하고 따른 그가 온 것을 보고, 세금을 받거나 또는 압류할 수 있는 그가 온 것을 보고, 이것은 그들의 등본 보유권(cap hold)을 자극시켰으며, 따라서 그들은 담대하게 그를 밀어내고 유일한 장해물이며 경쟁자인 "그를" 길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와 위엄을 유지하려고 결심하였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이 세상의 군주인 빌라도 와 헤롯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8).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사람이 상속자"이며, 적어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 그를 죽이자"고 하였다. 가진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며 두려워한 주요한 이유는 백성들 가운데서의 그의 인기와 호산나 찬미 소리였는데 만일 그가 이를 떼어버리면 그들은 이를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백성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죽어야만 하다고 주장하였다(요 11:50). 그러나 실제로 그는 죽어야만 했으니, 이는 메시야의 기대되는 나라가 위선과 폭력을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혁명적인 기대에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자." 그 토지는 물론 점유자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이 예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교회에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유권들도 부과할 수 있으며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복종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자"를 "대적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자"가 그들이 "활을 당기는 것을 보고 비웃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그의 유업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안 그는 십자가를 지고 산꼭대기에까지 걸어 가셨다. 그들은 천장으로 깨뜨려졌고 그들의 유업을 빼앗겼다(시 2:2, 6, 9). 

[2] 이 음모는 어떻게 실행되었는가?(39절) 그들이 자신들의 위엄과 세력을 확고히 할 목적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며 또한 그가 사탄을 정복하고 그의 택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에, 그의 때가 이르매 그들이 즉시로 그를 잡아죽이려고 할지라도 결코 놀라지 말라. 로마의 권력이 그를 정죄하기는 했지만, 그를 잡아죽인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주요한 앞잡이들이었으며,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못 박아 죽였도다"(행 2:23). 아니, 그들은 그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자로 여겼으므로 "포도원,"즉 자신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교회로부터 "내어쫓았으며" 또한 거룩한 성으로부터 내어쫓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문 밖에서"(히 13:12)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와 비난임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영광이었다. 이와 같이 종들을 박해한 자들은 아들을 박해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대하듯이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를 이와 같이 대하려고 하였다 

 


Ⅳ. 여기에는 그들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40,41절).

 

그는 그들에게 직접 이것을 묻고 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이것을 그들에게 직접 물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인데, 즉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는데 대하여 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함으로써" 더욱 더 변명할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것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에 죄인들은 다만 자신들을 공평하게 다루도록 간구 할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할 때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그들은 쉽게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해야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타인의 죄에 대한 비참한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자신들의 죄에 대한 결과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 우리 주님은 그의 질문에서 "포도원 주인이 올 것"과 그들과 더불어 청산하실 것을 예상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그 모든 재산은 그의 것이며 지금 그 기업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실 것이다. 포도원의 주인은 장차 오실 것이다. 박해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그는 "더디 오시며," "보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그들과 더불어 참으시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며, 심판자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라 오시면 겉으로만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잔인한 박해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들은 문책을 당해야만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전성기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날이 이르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 

2.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에서 그것이 무서운 보복임을 예상하고 있다. 범죄는 그와 같이 매우 어둡게 나타나지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1) 그는 "악한 자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될" 파멸이다. 

kako,j kakw/j avpole,sei-Malos male perdet(역주:사악한 자는 사악하게 멸망한다). 사악한 일을 하지 말라. 그리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질 것이다.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성취되었는데, 그들은 로마인에 의해 무참히 멸망하였으며 또한 이 일 후의 약 사십 년 되던 해에 성취되었다. 즉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무참한 상황들로 얼룩진 미증유의 파멸이었다. 그것은 사악한 발자취를 밟는 모든 자들에게 성취될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파멸 장소로써, 그것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보람있게 향상시키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가장 비참한 파멸 장소가 될 것이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외식가들과 박해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2) 그는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새로 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특권을 남용하는 s자들의 멸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교회를 소유하실 것임도 사실이다. 사람의 불신앙과 완고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익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남긴 찌꺼기가 이방인들의 진수성찬이 되었다. 박해자들은 사역자들을 파멸시킬 수 있으나 교회를 파멸시킬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들은 택한 백성"이며 또한 지혜와 거룩함은 "우리들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기들이 잘리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유지시키려고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가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도 아니며, 또한 그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황폐하게 되고 놀라운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한 폐허 위에 번창하는 교회를 세우실 수가 있으시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우리나 우리의 처소나 국가에 어떤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의 위대한 이름을 위해 어떻게 할까를 망설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Ⅴ.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에게 실제로 자신들이 옳게 판단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에 대해 더 설명하시고 적용하신다. 

1. 그는 이로 말미암아 성취된 성경 말씀을 언급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42절). 즉 "너희가 성경에서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그렇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종종 이 말씀을 읽고 낭송하였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깊이 명상하지 않기 때문에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상실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가 인용하신 성경 구절은 시편 118편 22, 23절인데, 어린아이들이 호산나라고 외친 동일한 본문이다. 동일한 말씀이 확신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이 된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찬송과 위로를 가져오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좌우에 날선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성경 말씀은 앞의 비유,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1) 건축자들이 돌을 버리는 것은 농부들이 그들에게 파송된 아들을 버리는 것과 동일하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건축자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대인의 교회를 관할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소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았으며, 그의 교훈이나 율법들을 그 자신들의 조직 속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마치 깨어진 그릇처럼, 밟고 다니는 계단에 쓰이는 돌처럼 따로 제쳐놓았다. 

(2) 이 돌을 모퉁이 돌로 끌어올린 것은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준 것"과 동일하다. 유대인들에 의해 버림받았던 자는 이방인들에 의해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할레자나 무할레자에게 차별이 없는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시다." 복음적인 교회에 대한 그의 권세, 그것에 대한 영향력, 머리가 되시어 교회를 지배하심. 모퉁이 돌로서 교회를 연합하심 등은 그의 승귀(昇貴)의 위대한 표식이시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그들이 자신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했을지라도 "위대한 자와 분깃을 나누셨으며" 또한 "그의 나라"를 받으셨던 것이다. 

(3) 하나님의 손길로 이 모든 것 안에 있었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비록 유대인의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적인 섭리와 예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허락하셨고 관장하셨다. 더욱이 그가 모퉁이 돌로 끌어올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이 이를 수행하셨다. "그는 높이시고," 또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눈에 기이한 것이다." 그를 버린 유대인들의 사악함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 자신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서 29장 9, 10, 14절을 보라. 그는 비록 자기 백성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였지만, 이방인들에 의해 놀라운 영광을 받으셨다. 멸시받고 미움받던 자가 왕들에 의해 찬미를 받아야만 한다(사 49:7). 그러나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2.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적용하고 계시는데, 적용이야말로 설교의 생명이다. 

(1) 그는 그들이 인정했던 선고를 적용하고 계시며(41절), 이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농부들의 처참한 멸망에 관한 앞부분이 아니라(그는 차마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으셨다),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준" 후반부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어둡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방인들에게는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은 교회원의 특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게 될 것이다." 농부들을 이와 같이 내어쫓는 것은 그 포도원을 걷어버리고 황무지로 만들게 되는 것과 같다(사 5:5).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양자됨과 양"(롬 9:4)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롬 3:2)이 맡겨졌으며 또한 계시 종교의 성스러운 신뢰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시 76:1, 2)이 위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사용함에 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선을 가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권리들을 박탈당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 모든 것들이 몰수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특권을 이용하여 범죄한 자들(계 2:4, 5)에게서 그것들을 박탈해버리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서 빼앗김을 받았으니, 이는 그들에게 떨어진 일시적인 심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해있는 영적인 심판과, 또한 마음의 우맹과 마음의 강퍅과 복음에 대한 멸시에 의해서였다(롬 11:8-10; 살전 2:15). 

[2] 이방인들은 취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교회를 가지실 것인가의 여부를 우리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으시다. 비록 그의 포도나무가 어떤 곳에서 뽑혀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심을 다른 장소를 물색하실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과를 맺을 수 있는" e;qnei ─즉 이방 세계에 주실 것이다. 택한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 긍휼을 입지 못했던 자들이 하늘의 은총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많은 영향을 받았고(롬 11:30, 33) 유대인들이 많이 대적을 했던(행 22:21, 22) 신비(mystery)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처음 심기워졌을 때 "이방인들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부요함이 되었다"(시 135:10, 11).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제거되었을 때 그들의 멸망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롬 11:12).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의 열매를 맺을 자를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매맺는 것은 그 자신이 손수 하시는 모든 사역이며 "그에게 알려지는 모든 것이 그의 사역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맺었던 것보다 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교회에서보다는 신약 교회에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바꾸실 때 그것은 그의 손해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자신이 인용하신 성경 말씀(42절)을 그들의 공포심에 적용시키고 있다(공포심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44절). "건축자들이 버린" 이 "돌'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에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종류의 백성들의 운명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떨어지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고 있다. 

[1] 어떤 사람은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비천의 신분에 계셨을 때에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고 있다. 이 돌이 건축자들이 던져버린 땅 위에 놓여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함과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것에 걸려 넘어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깨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저지른 범죄가 그를 상하게도 하지 못할 것이며, 더욱이 넘어진 자가 넘어지게 한 돌을 깨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돌이 그들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넘어지고 깨어지게 될 것이며, 덫에 걸리게 될 것이다(사 8:14; 벧전 2:7, 8). 죄인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은 악의를 품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이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는 승귀의 신분에 있을 때의 그를 무시해버리고 만다. 이 돌이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소서"라고 외치며 도전했던 것처럼 그 돌을 자신들의 머리 위로 끌어 당겼기 때문이며, "그 돌은 저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전자는 아마도 모든 불신앙자들의 죄와 파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송곳을 발로 차며" 그것을 계속하는 박해자들에게 있어서 큰 죄이며 처참한 파멸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것을 전복시키려하거나 그것을 그 장소에서 들어내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무거운 돌이 될 것이다(슥 12:3).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쪼개어진 이 돌은 모든 반대 세력을 산산조각으로 깨어버릴 것이다(단 2; 34, 35). 어떤 사람은 이 표현이 유대인들 가운데 돌로 쳐죽이는 방법을 암시한 것이라고 한다. 악인은 높은 장소에서부터 그들을 크게 상하게 할 큰 돌 위에로 난폭하게 던지움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을 박살내게 될 또 다른 큰 돌 위에로 내던져졌다. 여러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대적하여 싸운 모든 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실 것이다. 만일 그들이 완고한 마음 때문에 이 돌 위에 떨어져 파괴도지 않는다면 이 돌이 그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파괴해버릴 것이다. 그는 "열광을 쳐서 파하실 것이며," "시체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다"(시 110:5, 6). 하나님께 대하여 강퍅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번창해진 일은 결코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의 비유를 들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았다."(45절).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말한 것에서(41절) 그들 자신들의 운명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범죄한 양심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종종 사역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역주:나단이 다윗에게 한 말)고 말하는 수고를 덜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즉 단지 이름만을 바꾼 것일 뿐, 그 이야기는 당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으며 또한 생각을 분별하고 마음을 의도하기 때문에 사악한 사람이(만일 양심이 완전히 화인맞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2. "그들은 그를 잡고자 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책망하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이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만일 그 말씀이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며 그것은 확실히 그들을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와 같이 죄책과 통회함으로 마음이 찔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사도행전 5장 33절에서와 같이 분노와 성냄으로 마음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3. 그들이 그를 과감히 붙잡지 못한 것은 "무죄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는데. 무리들은 그를 비록 메시야는 아닐 망정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에 대해 나쁘게 말할 수 없었으며(27절),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악행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소리를 질러 그를 찬송하게 만드신 것처럼 남아있는 분노를 억제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시 76:10).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마20:16)

 

[질문]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마20:16)의 의미와 그 적용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가복음 10:31)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13:30)

신앙의 열심이 떨어져 있는 자뿐 아니라 현재 잘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경각심을 깨우치는 말씀으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를 의미하는지요?

[답변]

취소되지 않는 구원

질문자님의 의도가 이미 믿은 신자들이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죄악에 빠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못 받거나 천국에서의 상급이 달라지고 심지어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는지에 관한 의문인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신자가 게으르고 죄에 빠지면 하나님의 징계는 분명히 받습니다. 스페인 속담에 “하나님은 연기는 하시지만 잊지는 않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의 잘못에 일 대 일로 그 자리 그 순간에 벌을 주시지는 않지만 신자의 죄가 차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징계를 위한 징계가 아니라 사랑의 매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5,6) 징계를 주시는 이유는 신자를 사랑하는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이며 당신이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 또한 온전하게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신자가 복을 받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품 안에서 뿐이므로 신자를 다시 그 자리로 돌려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거듭남으로 한 번 구원 받은 성도는 비록 시험에 빠지고 죄악을 저질렀다 해도 그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따라서 교회에서 신자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시험과 죄에 빠졌을 때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영적인 회복을 위해 징계는 강조할 수 있습니다만 구원이 취소된다고 가르쳐선 안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징계를 논하기 직전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히12:4) 했기 때문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히12:5) 권한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무시로 기도하며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정말 피 흘리기까지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또 교회는 함께 그 일을 독려하고 서로 힘을 합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하는 어떤 권면이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듯이 당사자의 영적 회복과 유익만을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겁을 주거나 강제력을 동원해 어떤 다른 목적에 이용 하려거나 비난 정죄하는 뜻으로 해선 안 됩니다. 신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 갈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그 가장 잘못된 권면의 예입니다. 신자 개인은 교회의 이런 잘못된 권면을 구별할 줄 아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잘 묵상하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진리를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상당히 유감스럽게도 질문자께서 염려(?)하셨듯이 본문이 그 뜻과는 달리 교회의 외적 활동에 참여토록 신자를 독려하고 심지어 겁을 주는데(?) 남용되다시피 합니다. 본문의 정확한 뜻은 이미 성도가 된 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계를 받거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한 문단 안에서 성경을 읽어라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앞 뒤 문맥을 연결하여 최소한도 한 문단(sentence가 아니라 paragraph) 안에서의 주제로 그 뜻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로 떼어 생각하고 그것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순간적으로 떠 오르는 생각과 기분대로 임의로 해석해 버립니다. 목회자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신자 가운데는 한 문단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주석 성경과 자습(self-study)서 형식의 성경이 많이 나와 평신도 혼자서도 충분히 말씀의 깊은 의미를 찾아 내고 묵상할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그런 성경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꼭 주석 성경이 아니라도 모든 성경에는 문단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도록 조그만 동그라미로 새 문단이 시작되는 부분에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어떤 구절이라도 반드시 그 구절이 속해 있는 문단 전체 뜻을 생각하기 위해 이 동그라미 표를 주시해야 합니다. 동그라미로 시작하는 구절에서 다음 동그라미 표시되기 바로 앞 구절까지는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지금 질문하신 구절의 의미도 특별한 신학적 지식 없이 이렇게만 따져도 금방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의미

(1)“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이 구절은 사실은 그 앞 19:30에 이미 나온 말씀의 반복으로 그것을 더 상세하게 비유로 풀어서 하신 말씀의 결론으로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마19:30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동그라미를 찾으면 19:23-30이 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앞 문단 16-22절까지 부자 청년과 천국에 관한 논쟁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19:30과 20:16은 그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6)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연장으로 제시된 말씀입니다. 이제 앞뒤 문맥을 간단하게 따져 보아 질문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9:13-20:16까지 자세히 묵상하며 여러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19:21)고 한 말씀에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19:22)가 버렸습니다.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에 비록 세상에서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율법대로 살았던 청년이지만 종국에는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천국을 간절히 사모해야만 가능한데도 그는 이 땅에서의 부귀를 더 귀하게 여겼으니 구원을 받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낙타의 바늘 구멍 비유를 통해 부자는 천국 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그런 선한 부자 청년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누가 감히 천국 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19:26)고 대답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은 한마디로 사람이 선행을 하며 율법을 지킨 것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부자 청년과는 달리 세상의 모든 것 대신에 주님을 선택해 따랐으니 과연 영생을 얻을 것인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천국보좌에서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영광에까지 이른다고 하면서 바로 이어서 30절의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럼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는 직접적으로는 누구를 대비한 셈입니까? 부자 청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 왜 먼저 되고 나중 된 것으로 구분했습니까? 유대인으로 태어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먼저 된 자입니다. 반면에 갈릴리 변방에서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무식한 어부들이지만 오직 세상 대신에 주님을 선택한 자들이 나중 된 자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먼저 된 자이고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자가 나중 된 자입니다.

살펴 본대로 앞뒤 문맥상 믿은 지 오래된 신자가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죄와 시험에 빠지면 나중 된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듯이 장로가 되어 제대로 봉사 안 하면 현실에서도 복을 못 받고 천국에서도 상급이 적어지지만 대신에 이제 갓 믿은 초신자라도 열심히 봉사하고 뜨겁게 믿으면 금방 장로 되고 복도 많이 받는다는 식의 해석이 성립될 여지는 없습니다. 순전히 외양적인 모습으로만 따지면 신자도 인간인지라 초신자일 때는 은혜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교회 활동에 열심이고 뜨거울 수 밖에 없고 대신에 장로는 연륜이 오래 되어 좀 시들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단순하게 그런 것으로 신앙 수준을 나누거나 심지어 축복의 차별  혹은  구원 여부 자체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러한지 다음 비유도 살펴 봅시다. 과수원 주인이 오전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나 일이 끝나기 직전에 와서 잠깐 일한 자나 그 삯을 똑 같이 주자 먼저 온 자들이 집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먼저 일한 자로선 억울할 만도 하고 집 주인이 불공평해 보입니다. 이 비유는 세상적인 경제 원칙의 공평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구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집 주인의 대답을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19:13-15)

이 비유의 초점은 모든 사람에게 일한 시간과 상관 없이 한 데나리온 씩 주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주인의 뜻 때문이라 것입니다. 그 품삯은 영생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일한 것과 상관 없이 당신 뜻대로 모든 자에게 오직 자신의 주관적 선택과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만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일군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선민이 되었고 율법을 받아 열심히 율법을 준수했으므로 자기들은 이방인들과 다른 특별한 취급을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지 못하자 하나님을 악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구원을 잃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맡기신 제사장 나라의 역할 – 즉 먼저 불려와 일을 하는 계약을 제대로 이행했으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먼저 뽑힌 자의 축복입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다른 나라의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늦게 왔더라도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기들 할 일은 제대로 못해 놓고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조차 잘못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오직 자기들만 구원 받고 상급이 당연히 더 많아야 한다고 하나님에게 주장한 셈입니다.  

집 주인이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중에 택함을 받은 이방인이든 먼저 선택 받은 유대인이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누구나 주께로 오는 자는 공평하게 다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수원에 와서 먼저 일한 자는 유대인이고 나중에 불려와 일한 자는 이방인입니다. 나중 된 이방인은 구원 받았고 먼저 된 유대인은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 또한 이미 구원 받은 신자가 죄 짓고 게으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2)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3:30)

마가 복음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0:31)가 포함된 문단의 내용은 마태 복음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이 구절만 한 번 더 살펴 보기로 합시다.  

누가 복음의 경우 본문이 포함 된 문단(13:22-30)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와는 다르지만 그 주제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가 왜 적느냐는 질문에 주님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시작으로 영생에 관한 동일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의 포도원 비유처럼 이번에도 집주인이 임의로 문을 닫습니다.(25절)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절)라고 항의합니다. 메시야되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지만 그 복음에 항복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나 이미 여호와를 알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특별히 28절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선지자들이 천국에 있음에도 저희들은 문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또 다시 유대인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공로로 자기들 선민이 당연히 구원 받아야 한다는 교만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동서남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29절) 이방인들이 복음에 항복하여 주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또 누구를 지칭한 것입니까? 여기서도 먼저 된 자는 유대인들이고 나중 된 자는 이방인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공적과 능력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교만한 자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아져 항복한 자들의 비교입니다.  

결론

성경을 한 절만 두고 생각하는 것과 전체 문맥에서 분석해 보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앞뒤 줄거리와 주제만 따져 보아도 신학적 지식이나 주석을 참고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용을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성경 본문의 일차적 해석으로는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 된 자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종적 구분만은 아닌 것임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 오직 십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자의 구분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에 관한 설명으로 요약하면;

1)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관계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구원되며(엡1:4,5)

2) 그 주권에 관해 인간은 누구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롬9:20,21)

3)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며(엡2:8,9)

4)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항복하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롬3:22)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해 보일 온당한 반응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결코 자랑하지 않고 혹시라도 영적으로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이 게으르고 죄에 빠진 신자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언급될 때의 취지가  만약 자칫 구원의 확신에 너무 도취되어 영적인 교만과 태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으로 인해 신자의 구원이 취소된다고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또 징계 혹은 상급에 차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해 신자에게 두려움을 주고 어떤 다른 목적으로 유도하려 든다면 성경의 본문의 의미와는 너무 동떨어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히려 남을 죽이는 경우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징계는 분명히 있지만 심판은 더 이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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