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마19:23,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과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약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 성경구절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마태는 이 예수님이 이와같이 답변을 한 질문자를 (마19:16)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하였고
20절에서는 "그 청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 18:18에서 "어떤 관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헬라어로 "아르콘"으로 회당의 지도자나 산헤드린의 일원을 가르킨다.(참조: 눅23:13. 24:20등)
즉 이 청년은 아직 젊은 나이로 매우 재물이 많았고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재물과 돈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10:22)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18:23)
즉 이 청년의 신분은 유대인으로 관원이었으며 큰 부자였다.
그가 아직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이 많은 큰부자였다는 사실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로마 성향의 반유대 민족적인 신분이었음을 시사하여 준다.
또한 그의 질문은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막10:17-18)
예수님은 그에게 즉각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다"고 공박한다. (참고: 막10:18)
즉 그 관원 청년은 "영생의 방법"을 예수님께 묻기 위하여 "선한 선생님"이라고 아부와 아첨을 한 것이다.
그는 또 결코 재물과 돈, 그리고 직분과 직위등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그가 예수님께 물었던 영생의 방법은 "어떻게 하여야만 영생을 얻는"하는 "인위적인 방법과 수단"이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도 않으면서도, 다만 기적과 이사를 행한다고 소문이 널리 퍼졌던 예수님을 만나고
아첨과 아부의 말로 영생을 얻을 방법을 알아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모두 예지하시고 그렇게 대답하셨다.
만일 그 청년이 가진 어느 정도의 부를 투자하여 영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은 기꺼이 그 재산의 일부를 투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하셨다.
즉 부를 포기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관원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눅18:22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막10:21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이와 같은 예수님 말씀은 삭개오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되는데 삭개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눅 19:8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중에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말씀하셨다.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그러나 부자 청년관원에게는 그 재산을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하심으로서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자가 무조건 천국에 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로 회개하며 믿음이 있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부의 일부를 천국에 가는 조건으로 투자하려는 사람은 천국에 가기 어렵지만,
스스로 회개하여 자신의 부를 구제사업에 사용하려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젊은 관원이며 부자인 청년은 예수께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막10:26)
만일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놀랄 일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것이 재물의 유무(有無)라는 기준에 있단 말인가?
솔로몬은 부자였고, 아브라함도, 다윗도 부자였다. 과연 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
제자들은 심히 놀랐고 예수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고 예수께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구원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역이신 것이다.
재물이 없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재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막10:27)
부자와 천국(마19:16-26)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는 것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후에 길을 떠나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에 한 청년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 밝히지 않았지만, 누가는 그가 유대인의 지도자급 인사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급을보면 그 사람은 상당한 재물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주님 앞에 와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청년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청년은 주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지켜 보면서, 주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게 되었으며, 기회를 타서 주님께 나아와서 자신이 가장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이라면 자기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영생을 얻는 길이 행위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었습니다.
* 율법과 영생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18),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7-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 10: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눅 18:19-20)."
주님은 그 청년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이 아직 주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러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다면, 주님은 그 청년이 자기를 선한 선새으로 부르는 일을 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주님을 단순히 훌륭한 선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는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느니라!" 주님은 당연히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장 선하시며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 자신을 선한 분이라고 고백하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알면서 아첨하는 말로 자신을 선한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은 선하다는 말을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왔으며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청년이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궁하시고,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그러자 그 청년은 주님에게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십계명에 나오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의 첫 번째 부분인 1-4계명은 생략하고,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이것을 지키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지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명은 다 지키다가도 한 가지만 어기면 모든 계명을 어긴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모든 계명을 하나도 안 어기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 내가 모든 율법을 지켰나이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막 10:20)."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눅 18:21)."
그러나 그 청년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모두 다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에게 아직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십계명이 아닌 색다른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12살 때부터 지금까지 율법에서 금하는 일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에게 내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는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금한 것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마음 한 가운데에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 자신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졌으며, 그것에 집착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물에 사로잡혀서 실제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로 율법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한 관원이 주님을 찾아와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주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선한 분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청년에게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냐?"고 무렀습니다. 주님은 십게명 중에서 제 5-10게명을 말쓴하신 후에,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자신이 이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십계명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 한 가지 부족한 것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 19: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좆으라 하시니(막 10:2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눅 18:22)...."
마가는 주님께서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이 마음으로 겪는 갈등을 아셨습니다. 그 청년은 영생의 길을 원하면서도 재물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의 마음은 갈등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장애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재물에 대한 사람과 집착을 떨치지 못한 것이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그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진정으로 하늘의 보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삭개오처럼 주님을 사랑했다면 그는 자기의 재산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재물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되찾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 준 후에 다시 와서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청년이 삭개오처럼 자기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면, 그의 마음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늘 창고에 재물을 쌓는 방법이 무엇인 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헌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께 순종했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재물을 위해 영생의 길을 버린 오명을 쓰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축복의 모델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하늘에서 영생의 축복을 만끽하며 신앙의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을 것입니다.
* 심히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3)."
그러나 결국 그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심히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재물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보화를 바라볼 눈이 없었습니다. 땅을 쳐다보는 사람이 하늘을 볼 수 없듯이, 세상의 재물에 집착된 그는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릴 용기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힘으로는 재물에 대한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러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일 이때에 그 청년이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구했다면, 주님은 그에게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하늘의 보물 대신 세상의 부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슬픔에 잠겨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모습은 마가 당시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마가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부와 명예를 포기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직업을 잃어야 했고, 유랑 생활을 해야 했으며, 지하에 숨어서(카타콤)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포기하지 못해서 슬픈 마음으로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일은 현대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결코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하늘의 보물을 포기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청년과 같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영생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주님 안에 있는 영생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영생을 얻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다.
2. 하나님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3. 진정한 영생은 주님 한 분만 자기 기업으로 삼을 때에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청년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을 위해 물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청년에게 그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이렇게 하면 하늘에 그의 보화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한 후에 돌아 와서 자신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것을 위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막 10:23)...."
주님은 청년이 슬픈 얼굴을 하고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 안에는 세상의 재물을 포기하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재물을 너무 사랑했기 때무에, 그가 가진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생의 길을 가기를 갈망하면서도,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청년의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주님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고 영생의 길을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재물과 명예를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이 주는 매력의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명예와 재물에 빼앗겨서 영원한 것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지 않나니..." 사도 요한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의 성도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명예와 재물과 생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해서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그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 19: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부자들이)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24),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막 10:24-25)..."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24),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눅 18:24-25)...."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물질을 많이 가진 것을 축복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욥 1:10, 42:10, 시 128:1-2, 사 3:10 참조).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겨외하는 자들이 물질적으로 부요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나,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 그리고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부자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러한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냐?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 약대(낙타)는 팔레스타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입니다. 그러나 바늘 구멍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구멍입니다. 그러므로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힘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세상 재물에 대한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힘으로 재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6-27)."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6-27)."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놀라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부유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경건한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축복받은 부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주님은 사람의 힘으로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은 부자를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부자가 구원을 얻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극한 고난을 통해서 부자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부자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십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 어린 아이와 부자 청년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된 어린 아이의 이야기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아이"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부자"는 세상의 소유를(권력, 재물, 지식 등) 포기하지 못해서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2. 하나님은 부자라도 그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어서 복음을 믿게 하실 수 있다.
3. 어린아이처럼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신앙(마19:23,24)
(마 19:23-24)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상징, 비유 설교로서 말씀 중에 있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 의미를 알아보면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약대(낙타)는 성경에서 구약에 57회, 신약에는 6회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낙타(CAMEL) "히-까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영어 번역본에는 "낙타"로 나와 있습니다. [히-수컷은=빠랄이라 부르며 -암컷은=버크라]라고 합니다.
이외에 단봉(單峰)낙타{KJV,ASV}, 낙타새끼{RSV}가 언급 되지만 이 부문은 이사야 60장 6절과 에례미야 2장 23절에만 나와있습니다.
낙타라는 말은 [헬:카멜로스]로서 모든 영어 번역본에 나와 있으나, 원래 낙타(ca-mel)라는 말은 어원이 히브리어로서 헬라어를 거쳐 파생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수 십년씩의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자주 목사님들로부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가는 문이 너무 좁아서 성문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배워왔다면..그것은 분명히 불충분한 증거라고 사전은 말합니다.솔직하게 인색한 부자 신자들 공격용으로 많이도 씌여왔고 너무 자주 듣다보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버젼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의 문들중에 바늘귀라고 불리우는 작은 쪽문이 있다'고 하시는 목사님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저 역시도 들은 것을 전하다보니 "바늘귀란 작은 쪽문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라고 하면서 그대로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셨을까?참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비유를 하실데가 없어서 큰 덩치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을까? 그래서 배경을 모르니 별 상상을 다 하여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미웠을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예수님은 없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이유 있는 말씀만 하셨고 실제로 전개되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물론 부자들에게 가진 재물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부자는 누구냐? 입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리, 로마의 앞잡이들, 권력가들, 이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부자들이 백성들의 고통을 몰랐을까요? 구약의 말씀중에 가난한 자에게 하라는 법을 생략했고, 안식일을은 지키려면 안식년 법을 지켜야했고, 안식년을 지키려면 희년의 법을 지켜야하는데 그런법은 생략하였기에 예수님은 부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였습니다.
문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보다 낙타(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약대는 수명이 깁니다. 보통은 50-60년. 길게는 80년도 넘기는 약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기 발로 걸어다니기만 하면, 그때부터 인간을 위한 봉사를 합니다. 등에 짐과 사람을 태우고 죽는 날까지 인간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는 종말에는 자기들이 희생하고 봉사했던 사람들에게 잡혀 가죽은 벗겨서 사람들의 옷이 되고, 살은 사람들의 음식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낙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지만 사마리아나 다른 유대 지역에선 낙타고기를 아주 즐겨 먹습니다.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도 낙타를 먹습니다만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유대민족들은 유목민 생활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집을 옮기는 생활도 해왔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짐을 실어다 날라 주는 낙타가 분명히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낙타를 수십 마리씩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목민들이 살아갈 집입니다. 반듯하게 브록크나 나무를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또 옮겨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을 깁기 위하여 바늘을 사용합니다. 대략 우리나라 이불을 깁는 바늘처럼 크지요, 길이는 15센치쯤, 두께는 이쑤시게 정도입니다. 그곳으로 낙타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상상이나 됩니까? 그런데도 낙타는 그곳으로 유유히 들어갑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희생이요, 봉사요, 사랑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천막을 자주 바꿉니다. 바람에 찢기고 이웃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그렇기 때문에 자주 만듭니다. 그래서 그만큼 실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마땅한 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족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각 족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약대(낙타) 한 마리씩을 선택하여, 전날 저녁에 잘 먹이고 나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그 생명도 끝이 났습니다.
유목민들은 큰 가마솥을 큰 아궁이에 올리고 그 속에 올리브기름을 3/1, 물을 3/1정도 넣고 300도 이상이 되는 열기로 펄펄 끓입니다. 그 솥 밑부분에는 아주 작은 바늘 구멍들이 20개 정도 있고, 그곳은 진흙으로 발라져 있으며 솥 주위는 1메타 정도의 도랑을 파서 차가운 물이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났을 때에 그 낙타의 껍질은 벗겨서 천막을 만드는데 가죽으로 쓰이고, 몸체는 가마솥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낙타가 가마솥에서 완전히 녹아 흔적도 없어질 때가지 뜨거운 열을 가합니다.
완전하게 녹아진 것을 확인하고 가마솥 밑에 있는 구멍을 막고 있는 진흙을 뜯어내면, 그 작은 구멍으로 하얀실 같은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도랑에 준비되어 있는 물로 떨어져서 새림새림의 모양을 갖추고 사람들은 그 실이 식었다고 판단 되었을 때에 낙타를 녹여 만든 그 실을 타래에 감아서 천막을 기울 때에 그 실을 바늘귀에 넣어서 사용을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다른 짐승을 다 보았지만 낙타처럼 질긴 실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나무를 붙히는 목공용 접착제인 아교를 만들때 소의 뼈를 녹여서 사용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분명히 낙타는 바늘귀로 쉽게 들어갔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녹아서 바늘귀로 유유히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너무도 어려운 길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인간을 위한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이것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죽여야만이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내 놓은 낙타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낙타는 녹아서 실이 되야 바늘귀로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마19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 내가 죽어야 삽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예수님이 살고 내가 살아 있으면 예수님은 죽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삽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기로 오신 희생양입니다. 예수가 살았다면 나는 아직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 내가 삽니다.예수님을 잡아서 그 피를 하나님께 보여주어야 내가 삽니다.
여러분의 손에 예수의 피가 들려 있습니까?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왕같은 제사장은 나를 다스리고 나의 죄를 예수의 피를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사장입니다.
지금 성도님은 왕같은 제사장의 역활을 충분히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들은 모두가 예수를 죽인 죄인 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든지 생명을 내어놓던지 우리는 아무것도아니요, 아무것도 유익되지 못하지만 낙타처럼 자기몸을 다 녹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갑니다. 이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역사입니다.
아직도 잘 몰라서 기도할 때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제부터는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죽여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마리아와 교황과 성인들과 착한 행실을 앞세워서 천국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가시길 원합니다. 예수이름과 그리스도이름은 의미가 다릅니다.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 하였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천국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듯이 낙타처럼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낙타의 실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 꿔매는 역활을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낙타의 희생이 인간들이 쓰기 좋은 실이 되어 바늘귀로 들어가서 천막을 만들고 인간들에게 봉사를 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온몸을 다 주신 것같이 그런 봉사와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갖추어져 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종태 목사
낙타가' 아니고 '밧줄'(마19:24) ?
[마19장24절]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런데 여기에서 '낙타' 가 아니고 밧줄이라고 한다.
이곳 낙타의 헬라어 원문은 낙타가 카멜론kamhlon 이고 밧줄은 카밀론 kamilon 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사용된 '바늘귀'와 '약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그 해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바늘귀'가 예루살렘성 '바늘귀문'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barclay).
이 견해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선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이 중 작은 문은 주로 밤에 사용되는 문으로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야 겨우 지날수 있어서 '바늘귀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문으로 약대가 지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음은 '약대'카멜로스(kamhlon)가 '밧줄'(kamilon)(i)를(h)번역시 혼동했다는것.
밧줄이 실보다 굵기 때문에 설들력 있게 보인다(calvin 이 주장).즉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도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두견해 모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palin de legw umin eukopwteron
파린 데 레고우 휘민 유코포테론
Again I tell you, easier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쉬우니라
estin kamhlon (kamilon )dia truphmatoV
에스틴 카멜론 카밀론 디아 트루페마토스
it is a camel a rope through the eye
낙타가 밧줄 귀로
rafidoV dielqein h plousion eiV
라피도스 디엘데인 헤 프루시온 에이스
of a needle to go than a rich man into
바늘 들어가는 것이 것보다 부자가
thn basileian tou qeou eiselqein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에이셀데인
the kingdom of God to enter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Calvin)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kamhlon )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kamilon )인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 으로 바벧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찌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http://blog.daum.net/ipssen/15409975
세계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예수님 당시의 바늘
“낙타가 바늘귀(Needle's eye)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19:26)’이라고 예수님이 못을 박으셨지만,
사람들은 가능한 방법들을 찾고 있다.
이 말은 바벨론 탈무드(B. Berakoth 55b, B. Mes 38b)에 나오는
“코끼리가 바늘귀로”라는 대칭속담에 팔레스타인의 낙타를 대입한 상용구로서,
예수님은 이 상용구를 사용하신 것이다.
부자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석가 랑게는 “낙타(카멜로스)가 바늘(라피스) 귀(트리페마)로 들어가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바클레이는 바늘귀가 아니라 성의 쪽문이라 했고,
칼빈은 헬라어 kamilos(밧줄)를 kamelos(낙타)로 잘 못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참고로 성서시대 예루살렘에 쪽문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람어(아랍어가 아님) Gamta(밧줄)를
Gamla(낙타)로 잘 못 쓴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약은 원래부터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낙타뼈를 가마솥에 고아서 가늘게 뽑아 낸 실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찾지 않는 것이 좋다.
달리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http://segibak.or.kr/index.php?mid=goods&document_srl=137290
낙타와 바늘귀 '야메'(마 19:24) 해석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24).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최근 "생명의삶" 본문 묵상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최근 헬라어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동시에 읽으며 묵상하고 나름의 주해를 하고 있기에 이 본문에 다시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아무런 근거 없는 괴이한 주장들이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괴이하지 않고 그럴법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근거’입니다. 근거 없는 해석은 야메 해석인 것입니다.
두 가지 다른 대안적 해석이 제시되었습니다.
첫째, 낙타의 아람어 ‘가믈라’(gamla)가 ‘밧줄’의 아람어 ‘가므타’(gamta)와 비슷한데 이 혼동에서 오역이 발생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즉, 예수님은 ‘낙타’(가믈라)를 말씀하지 않고 ‘밧줄’(가므타)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복음서가 잘못 기록했다는 주장이지요.
실제로 가치가 매우 떨어지는 극히 일부의 신약 사본은 가믈라(낙타)를 가므타(밧줄)로 번역해 놓기도 했습니다.
이것의 장점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는 비유라는 겁니다. 즉 밧줄이 어떻게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사본상의 증거는 고대 사본부터 후대 사본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낙타’(가믈라)입니다.
신빙성(가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일부 사본의 가므타(밧줄)로의 변경은 두 아람어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필사자의 의도적인 변경으로 추론됩니다.
말하자면, 이 견해는 흔히 말하는 시내산/알렉산드리아의 고대 사본(네슬-알란트 판)과 비잔틴 계열의 다수 사본인 후대 사본(킹제임스 판) 양쪽 모두의 지원을 못받습니다.
그럼에도 이 견해는 나름 그럴듯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 "야메"라고 매도하는 것은 조금 과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둘째, 다른 견해는 예수님이 ‘낙타’를 말씀하신 것은 맞는데, 이번에는 ‘바늘귀’가 실제 바늘귀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최근 부각된 것이 아니라 이미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어 유행되어온 해석의 하나입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문에는 ‘바늘귀 문’(eye of the needle)이 있었는데, 해진 뒤 성문이 닫히면 이 쪽문으로 사람들이 출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쪽문인 이유로 당연히 낙타가 통과하기 불가능했으며 이 쪽문이 ‘바늘귀’로 불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이 문을 두고 낙타 통과의 불가능을 말씀하셨다는 설명입니다.
그냥 야메 주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디서 떠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버무려 유통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런 걸 연구하는 학자들을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이런 경우 항상 권위 있는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우디에 20년 살면서 라오즈 산을 여러 차례 다니며 사진 촬영하고 고고학이나 고대 근동 전문가가 아닌 한의사가 나름 그럴듯한 해석을 했다고 라오즈 산이 시내산이 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학자들은 이 야메 주장이 이미 15세기에 유통된 것으로 보고 있고 나아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문에 쪽문이란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이것을 야메 학설로 보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성문 쪽문이 ‘바늘귀’로 불렸다는 증거, 그것의 역사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사례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국제판 성경(NIV) 적용 주석의 저자 <마이클 윌킨스>는 이런 야메 견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중세 시대에 기원한 이 대중적인 해석은 ,,. 하지만 이 문에 대한 역사적이거나 고고학적 지원이 전무하다.”
윌킨스는 예루살렘 성문에는 그런 쪽문 자체의 존재의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주석학자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면 이런 견해가 야메 학설이라는 저의 주장을 즉시 철회하겠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쪽문이라도 나귀나 낙타 역시 짐을 다 부린 뒤에는 통과가 어렵게나마 가능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물론 이것도 단지 추론인데, 만일 이 견해대로 힘들지언정 낙타의 통과가 가능했던 쪽문이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수사학적인 "전적 불가능성"의 비유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랍비들이 이와 비슷한 비유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다만 ‘낙타’ 대신 그보다 훨씬 큰 ‘코끼리’입니다.
"코끼리가 바늘귀로 통과할 수 없다"
예수님의 비유와 거의 동일한 이런 랍비들의 비유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불가능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 과장법입니다. 랍비들의 이 말에서 누구도 바늘귀를 성문의 쪽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랍비들도 비슷한 비유를 사용했는데, 그러니 낙타를 ‘밧줄’로, 혹은 바늘귀를 ‘쪽문’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수사학적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비유의 말씀의 본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부탁합니다. 성경해석의 경우 인터넷 글이나, 가십거리 글에서 유통되는 해석을 보지 마시고 권위 있는 대학자들과 주석가들의 글과 연구 결과를 들여다보세요.
김경열 선교사 (페이스북 글, 2021.3.16.)
[편집자 주: 야메는 일본어 야미(=やみ,暗)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착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외래어입니다. 글쓴이는 이 단어를 애칭으로 사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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