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마18:1-5)
예수님 일행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서 베드로의 고향인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에 성전세를 걷는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너희 선생님이 반 세겔(성전세)을 내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아들에게 세금을 받는 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아버지께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지혜롭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지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기의 입을 열어보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얻어서, 그 돈으로 베드로와 자신을 위해서 성전세를 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율법을 준수하시는 동시에, 베드로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변론하는 제자들
세상 나라에는 지도자가 있고 그 밑에 여러 계층의 관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리들도 여러 위계 질서가 있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관리들에 의해 운영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관리들은 백성들을 돌보고 관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도 이러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를 타도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후에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고 베드로를 총리로 삼고, 자신들을 관리로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반복해서 "인자가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모든 꿈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처형되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실패하고, 이로 인해 자신들의 모든 꿈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에 대해서 변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2.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18:1)"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33),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9:33-34)."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눅 9:46)..."
예수님 일행은 가버나움에서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에 종종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막 8:27,29,31). 제자들은 이 질문을 듣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논쟁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 일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섬김과 봉사에는 관심이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섬기기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3. 섬기는 종이 가장 큰 자이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자리에 앉으신 후에, 열 두 제자를 한 자리에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고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 즉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섬김을 받고 다스리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고 종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나라를 섬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다른 나라를 섬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높아지려고 싸우는 일은 현대 교회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섬기기 보다는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서 분당을 만들고 서로 싸웁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와 목사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 나라가 섬기는 종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권력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권위는 남을 섬길 때에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려고 하신 하나님 나라는 서로 이웃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을 위해서 종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겸손과 종의 도를 기초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제자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실물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겸손과 섬김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 지 이해하지 못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가버나움에 도착한 후에 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들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1.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3)."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6)..."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눅 9:4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아마도 이 어린 아이는 근처에서 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교만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 문은 문이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어린 아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어린 아이는 불완전합니다. 어린 아이는 성인으로 자라나는 사람입니다. 천국도 완전한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은헤를 구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는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는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하면 금방 얼굴에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하게 믿고 위선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도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셋째로 어린 아이는 순종을 잘 합니다. 다 자란 사람들은 무엇을 시키면 변명하고 빠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어른이 시키면 그대로 합니다. 물론 어린 아이 안에도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의 말에 쉽게 감동하고 믿고 신뢰합니다. 천국은 이와 같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나라는 "교만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자기 위치를 떠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곳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사단의 백성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서로 높아지려고 싸웁니다. 제자들은 사단의 백성처럼 서로 높아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겸손히 허리를 굽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진리를 알았더라면 서로 높아지겠다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는 하와에게도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그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만은 개인과 사회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이 파괴한 나라를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단이 파괴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용한 방법은 겸손과 섬김이었습니다.
사단은 왕이 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종이 되셨습니다. 사단은 섬김을 받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교만한 교훈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남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다툽니다. 교만은 사단이 인류에게 심어 놓은 가장 뿌리 깊은 성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을 가르치고 남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직접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으로 사단이 인류의 마음에 심어놓은 교만을 파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도 겸손과 섬김의 도를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효과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높아지려고 다투었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높아지려고 싸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그들에게 겸손의 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높아 지려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섬김받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처럼 겸손히 남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1.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눅 9:4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겸손히 연약한 형제를 돌보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에게 아부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멸시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훌륭한 교사사는 학생을 돕기 위해서 자기 눈을 학생의 눈 높이에 맞춥니다. 그들은 아이의 입장에서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이를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를 부담스럽고 귀찮게 생각합니다. 전에 제자들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보고 책망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영접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최선을 다해 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자신을 영접한 사람으로 간주하시고 대신 갚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잘 보여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는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겸손히 연약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이 큰 일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히 연약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면,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남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떠드는 사람보다, 주변의 연약한 형제를 돌보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종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아지라고 말하는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겸손히 남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겸손히 이웃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그 사람이 바로 가장 큰 사람이니라!(눅 9:48)"
형제를 실족케 하는 죄(마 18:6-9)
요한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사람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그 일을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신 후에, 요한에게 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 나를 비방할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있든지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제들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급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 행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평가절하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확실하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 전도자에게 시원한 냉수를 대접하는 일은 매우 친절한 행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찾아갈 때에 무관심하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그들에게 시원한 냉수를 대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그들이 자신을 대접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대접한 것을 자신을 대접한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2. 실족케 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자신을 믿는 평범한 성도들의 권위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중한 형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연자 맷돌은 여인들이 손으로 곡식을 가는 작은 맷돌이 아닙니다. 이 맷돌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이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이렇게 큰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지면 그는 다시는 살아나올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반역한 지도자를 처형할 때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진 경우도 있습니다(행 5:37 참조). 이러한 일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목에 연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중한 범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실족헤 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죄처럼 잔인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심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제자들의 교만을 교정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교만을 교정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는 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사람의 목에 연자 맷돌을 매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어린 영혼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요한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을 때에 주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 귀신을 쫓으면서 더욱 더 예수님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것은 성령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신실한 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로 인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떠난다면, 요한은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한 죄를 짓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은 사람의 목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3. 실족케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예수님은 제자의 범위를 열 두 제자로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천국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요한의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교단과 자기 교회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다른 교파나 다른 교회 사람들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악한 일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예수님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더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특히 이러한 실수는 전통적인 교단이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만심에 빠져서 자신과 다른 교파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신실한 형제들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영혼이라도 잃어 버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거부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편협한 마음으로 남을 무시하고 이로 인해 형제를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월 의식에 빠져서 형제를 무시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서 다른 민족을 정죄하고 멀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만심에 빠져서 다른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만심과 특권 의식에 빠져서 다른 형제를 배척함으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를 용납하고 섬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합시다.
요한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결코 그 상을 잃지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을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는 어린 영혼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형제를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 (44-없음)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5).(46-없음)(막 9:43-46)"
예수님은 앞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 경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손과 발, 또 우리의 눈이 우리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제거할 만큼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죄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죄에 대해서 수족을 잘라낼 만큼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죄와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적당히 타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처해야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해서 강력한 죄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얼마든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한 자들이 당할 형벌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7).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예수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고,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죄에 대해 전심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간교하고 또 강하기 때문에 전심을 다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적당히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방심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게 점령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사람은 큰 낭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인을 보고 음욕이 생겼을 때 과감하게 절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간음죄에 이어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죄는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에 한 순간에 우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로 인해서 일평생 뼈 아픈 경험을 해야합니다. 다윗은 후에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지은 죄로 인해 남은 생애를 눈물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이 간음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자기 아들이 반역하고 자기 아내들을 범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일순간의 방심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이로인해 일생 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교훈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애자가 되거나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당시에 로마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순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로마 황제를 "주"(Lord)라고 부를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때로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굶주린 야수의 먹이로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은 야수의 발톱에 찢겨졌고 또 그들의 눈이 뽑혀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불구자가 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면 평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안전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명을 위해서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문의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장애자가 되는 것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이 배교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배교자들이 갈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최악의 장소입니다. 살아 있는 생선에게 소금을 치면 그 생선은 고통으로 미친 듯이 날뜁니다. 이와 같이 배교자도 지옥에서 불로 소금치듯 함을 받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은 로마 당국이 성도들에게 가한 형벌보다 더 가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신을 죽이는 로마보다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들이 자주 나옵니다. 마카비서를 보면(7:2-41), 영생을 얻기 위해서 지체를 절단하거나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교회사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고문을 받거나 생명을 포기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수족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는 형벌을 기쁘게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잃은 양 비유(마 18:10-14)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배타적인 행동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은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케 만드는 죄에 대해서 단호하게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의 지체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면 그것을 제거할 각오를 가지고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장애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소자 중에 하나를 업신여기지 말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 후에, 이야기의 초점을 다시 어린 아이에게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예수님은 배타의식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인정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연약한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다투지 말고, 연약한 형제들을 잘 섬기라는 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은 천국에서는 어린 아이를 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우월 의식에 빠져서 예수님을 믿는 다른 성도들을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의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지 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주셨으며, 그 천사들이 어린 영혼을 돌보고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보고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천사들이 하늘 궁정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 영혼을 업신여기면, 그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어린 영혼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2. 소자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예수님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잃은 양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셨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과 어린 영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목자가 들에서 100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목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목자는 양이 한 마리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영이 광야나 산에서 길을 잃으면, 헤메다가 탈진하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양이 상하거나 죽기 전에 그 양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동료에게 맡기고 급히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영혼을 잃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영혼을 찾아다니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게 되면, "길잃지 않은 99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에만 마음이 있었고, 또 우월의식에 빠져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제자들은 높아지려고 싸웠고, 또 우월 의식에 빠져서 다른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선한 목자가 최선을 다해서 양을 돌보는 것처럼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과 우월의식에 빠져서 영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겸손한 마음과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3.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제자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었으며, 또 우월의식에 빠져서 다른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겸손한 마음과 영혼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소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에 나오는 소금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부패로부터 막는 소금과 같이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모든 물건 중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에 소금은 매우 귀중했기 때문에 현금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소금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 데도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을 대안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 제자들은 맛잃은 소금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여 교만한 마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고, 우월 의식에 빠져서 연약한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를 맺으면서 맛잃은 소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소금은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비로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겸손과 화평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서로 사랑하고 겸손하며 또 화평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인 교만과 다툼과 분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안에 꼐신 성령님을 따라 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게 되면, 겸손과 사랑과 화평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다투고 또 우월의식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맛잃은 소금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맛잃은 소금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겸손과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맺게될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에 대한 교훈 (마 18:21-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를 발견하면 먼저 그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 권면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과 함께 가서 한 번 더 그를 권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형제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 사실을 교회에 알려서, 교회의 이름으로 그를 권면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가 그 권면을 들으면 그 영혼을 얻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그 형제가 교회의 권면마저 거부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절차를 따라서 교회가 내린 결정은 하늘에서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이루실 것"이며,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교회의 권한에 대한 위대한 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당시에 랍비들이 가르쳤던 용서의 방법이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한 번 용서하라! 그리고 두 번째도 용서하라!, 그러나 세 번째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에 대해 들으면서, 이러한 랍비들의 가르침이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용서하는 범위를 세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관대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 범죄한 형제를 "7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재안은 매우 관대한 제안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잘못한 경우에 한 번도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관대한 사람이라도 한 두 번 용서한 후에 또 죄를 범하면 그를 외면하기 쉽습니다. 아마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인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대부분 동서 고금의 위인들도 두 세번으로 용서의 범죄를 제한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한 베드로의 제안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2.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1-22)."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아마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관대함에 대해서 칭찬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22)" 예수님은 완전 수인 7을 10으로 곱한 후에, 그 숫자에 또 다시 7을 곱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은 "완전히 용서하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하고 용서를 빌면, 끝까지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유한한 자비로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한한 자비로 형제의 허물을 덮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자비로 형제의 죄를 덮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듣는 제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계속해서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3. 큰 빚을 탕감 받은 종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3-27)..."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종들과 회계하려고 하던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왕이 회계를 하기 위해서 자기 신하들(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종"은 고대 근동의 전제 군주가 자기 신하를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 때에 한 신하가 왕에게 10,000달란트라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10,000"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당시에 가장 큰 단위의 화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 대왕이 왕궁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의 총수가 900달란트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10,000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은으로 된 한 달란트는 3000세겔이었고(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 임금에 해당했다), 금으로 된 달란트는 은으로 된 달란트의 15배 가치가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이렇게 큰 빚을 왕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그가 왕의 재정을 맏아 담당하는 신하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빚을 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왕의 재정을 담당하던 신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은 그 신하에게 "너와 너의 처와 자식들, 그리고 네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빚을 갚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그 신하는 모든 재상을 잃고, 또 온 가족이 노예가 되어 뿔뿔히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가족이 노예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급하게 왕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에게 간절하게 자비를 구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가 그 많은 빚을 갚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은 그의 모든 가족과 재산을 처분해서 그 빚의 일부라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신하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왕은 그가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가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들은 신하는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의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신하는 왕의 자비로 인해 모든 빚을 탕감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신하는 온 가족이 노예가 되어 흩어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하여 실수가 많기 때문에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형제를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신하가 왕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졌습니다. 계산할 날이 되게 되자, 왕은 그 신하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그 많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왕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왕은 그 신하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그를 불씽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무한한 죄와 조건 없는 용서
왕이 신하의 막대한 빚을 탕감해 준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죄가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일만 달란트처럼 많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하나님 앞에서 10가지 죄를 짓는 경우에, 우리는 1년에 3,650번의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평생 292,000번의 죄를 짓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전과 29만 2000범이라는 흉악범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때에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전과 10범이 넘는 사람을 만나면 위협을 느끼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과 292,000범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 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수 없이 많습니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죄를 무한한 자비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로만 덮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구태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아무도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비유에 나오는 왕도 아무 조건 없이 막대한 신하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는 종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마 18:29-31)..."
이제 이 비유는 제 2막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 2막에서 왕의 신하는 1막과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이제 남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신하는 막대한 빚을 탕감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 때에 그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 신하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하루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므로 100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이 돈은 그 신하가 왕에게 탕감 받은 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신하는 막대한 빚을 탕감받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마도 그 신하는 지금까지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에 신하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친구의 빚도 탕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혀 금방 큰 돈을 탕감받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친구의 멱살을 잡고 당장에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당장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친구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조금만 참아주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돈은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만 주면 그 친구는 그 돈을 갚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제로 친구를 감옥으로 끌고가서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가 모든 빚을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큰 자비에 비해 우리가 이웃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와 같이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용서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조그만 죄를 지은 친구조차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내가 손해 입은대로 돌려받기 전에는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태도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 전혀 합당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렇게 무자비한 삶을 살아가고 있있습니다.
3.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1-35)."
이제 이야기는 제 3막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 3막에서는 2막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신하의 무자비한 행동은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그 신하가 한 일을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즉시 군사를 보내서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이 즉시 가서 그 신하를 왕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 왕은 그 신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왕은 그 신하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종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빚 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은 그가 행한대로 그 신하도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종이 그가 진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할 곳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은 성도들이 다른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용서 받은 후에 중심으로 다른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일평생 실수하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허물은 유한한 자비로는 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덮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막대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받은 우리들도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가 죄를 범한 후에 용서를 구하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 힘으로 범죄한 형제를 무한히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기 어려운 형제를 만날 때에, 성령님께 그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넓고 자비로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영혼을 지키는 6가지의 길(마18:7-10)
< 마술봉을 찾는 신앙 >
지난 3월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펜실바니아의 웨스트 이스톤(West Easton) 지역에 살고 있는 조앤 잰스키(Joanne Zansky)라고 하는 한 여성이 피치스 밀러(Peaches Miller)라고 하는 점술사에게 갔습니다. 그때 밀러는 자기가 만든 마술봉을 사면 각종 저주가 풀린다고 해서, 잰스키는 1800불(200만원)을 주고 그 마술봉을 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카를 위해 마술봉을 하나 더 샀고, 다시 얼마 후에 죽은 어머니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마술봉을 하나 더 샀습니다.
세 번째 마술봉을 산 후에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잰스키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여동생은 즉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언론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밀러를 잡아넣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밀러가 법을 어긴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잰스키가 상식의 법칙을 어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잰스키를 "참 어리석다! 어떻게 그런 말에 속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속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3가지만 버리면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확천금, 불로소득, 만사형통'입니다. 이 3가지의 아비가 기복주의이고, 기복주의의 반대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마술봉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과 고집, 우리의 욕심과 의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진정한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고 하는 신학자는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를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sin)'로 알기보다는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hell)'로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지옥은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죄는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내어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죄와 유혹으로부터 영혼을 지키는 길 >
오늘 본문에는 "실족케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남을 넘어지게 한다"는 말인데, 더 정확한 의미로는 "남에게 죄를 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4가지 무기가 나옵니다. 그 4가지 무기를 잘 지키면 우리는 남의 영혼도 지킬 수 있고, 나의 영혼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8절에는 손과 발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9절에는 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0절에는 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4가지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각종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이 6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1. 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은 영혼의 창문입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오지만 죄는 대개 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장 약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왜 하와가 사단의 꾀임에 넘어갔습니까? 사단의 달콤한 말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선악과를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1900년대 평양에 이승은 목사님이라고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에 은혜를 받아 교회로 가니까 기생집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생 연합회에서 이 목사님을 넘어뜨리기로 작정하고 최고로 예쁜 기생을 뽑아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이 기생은 사명을 받고 장기 작전을 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출석하고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름다운 신앙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이 기생은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날 밤, 이 목사님은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번 죄를 짓고 나니 점차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동시에 설교는 점차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사실이 들통나서 목사님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후 그분은 평양 서문 밖의 안경점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지금도 미인계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마귀의 전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 마귀의 작전을 눈치채고, 마귀는 미워하되 원수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항상 "내가 이런 말을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해보지만, 어느새 그 말이 나와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절망을 심어주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거짓말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아내 하나는 잘 얻었어!" 하는 말과 물건을 비싸게 산 친구에게 "물건 잘 샀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남이 물건을 사면 꼭 그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얘기를 해서 남의 기분을 망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남이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하는 말도 "당신 어리석다"고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이미 산 물건입니다. 그의 기분을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어도 "잘 샀다!"고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 한 마디라도 남을 배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할 때에는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말하지만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놓고 나는 뒤끝이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말을 하고 나서 집에 가서는 "내가 참을 걸!"하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마음을 뒤집는 데에는 1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는 데에는 1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1초만 참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오랜 고통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항상 온유한 신사와 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란 뜻을 가진 헬라어 프라우스는 '열이 내린 상태'를 뜻합니다. 열이 오른 사람에게 의사 선생님이 약을 먹인 후에 열이 내리면 쓰는 말이 "프라우스"라는 말입니다. "열이 내렸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불은 받아야 하지만 열은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열 받지 말고 항상 온유한 입술이 되도록 지켜야 합니다.
3. 귀를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말은 물에 떨어진 잉크와 같습니다. 한번 잘못된 말을 들으면 영혼에 쫙 퍼져서 다시 맑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은 대개 말 한 마디 잘못 들어서 생긴 영혼의 질병을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우리 영혼도 좋아지고, 나쁜 말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도 나빠집니다. 영혼의 건강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지금 우리 영혼을 오염시키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가지 예로, 요새 영성을 강조하는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면 '기독교 영성'과 '기독교 윤리'가 아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성과 윤리는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을 강조하면서 윤리를 무시하는 영적 허영심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성과 윤리는 결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은 순간적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요새는 말씀 듣는 사람의 90% 이상이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매일 구원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2절은 "초보 신앙을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에 관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하지만 사실 진정한 축복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과 기적에 관한 말씀도 많이 듣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능력과 기적도 삶의 변화라는 전제 속에서 대부분 주어지고, 그리고 능력과 기적 후에는 다시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관한 도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은 우리의 평생 과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는 자연히 '삶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윤리성을 띌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단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윤리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며 믿음과 윤리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과 기적이 상관이 있는 것 이상으로 믿음과 윤리는 더 상관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상식의 기반 위에 '상식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상식 자체를 무시하는 비상식과 몰상식은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허영심입니다.
영적 허영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대가가 따릅니다. 그 첫 번째 징계가 '순수하고 물들지 않은 성도와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영적 허영을 가진 사람은 꼭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길로 갑니다. 자신은 더 깊은 영성을 찾아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공동체를 위해서 도려내야 하는 환부로 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이란 양식 있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삶의 자세인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식이 요구하는 기준'보다 더 소중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상식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설교에는 '성도답게'를 도전하는 말씀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를 도전하는 말씀을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라고 비하시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영성! 영성!" 하며 내용과 실체와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말을 하면서 영적 허영심에 젖은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도 죽고, 남의 영혼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처럼 애매 모호한 말 한 마디가 영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유혹자의 말은 독약과도 같습니다. 그런 말은 아예 듣지 말아야 합니다. 상식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이고,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영성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말에 영적 교만과 우월의식이 느껴지거든 속히 귀를 닫고 다리 아래 물처럼 그 말을 떠내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4.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잘 지켜도 유혹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즉 어떤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그 비판에 쏠리지 말고, 먼저 "나는 옳고 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만과 180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지금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첫 사랑에 빠진 분들을 보면 예배도 새벽예배까지 100% 참석하고, 기도도 매일 2시간 이상 하고,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교만한 마음이 싹터서 "왜 교회 중직이라는 분들이 저렇게 기도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절대 버려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우리의 어떤 헌신도 무효로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자존심의 장벽이고, 자존심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교만의 장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자존심의 장벽을 넘고,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교만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5. 손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삽니다. 그 손을 펼 수 있어야 우리의 영혼이 복된 영혼이 됩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많이 받았지만 손을 펴는데 인색한 삶은 결코 축복 받은 삶이 아닙니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항상 남을 돕고 살겠다는 구제의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미래에 돈을 벌어서 돕겠다"고 하기 전에 현재의 처지에서 힘써 손을 펴야 합니다. 도울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제가 주는 사람에게는 간증거리가 될 수 있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 어떤 집사님이 쓴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집이 없는 착한 할머니 10분을 식구처럼 모시고 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대로 저는 지금 10분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펴는 손이 크고 통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죄와 저주의 이끼가 끼는 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이 성경학교 공사를 하는데 약 3만 불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계속해서 목찬수 군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 백혈병이 재발되어 다시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치료비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현재까지 약 400만원 가까이 도움을 드렸지만 전체 치료비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소년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바쳐서 생겼습니다. 그 기적 후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5). 예수님은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 떡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예수님이 떡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떡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 손의 떡을 나눠주고, 내 몸을 떡으로 삼아 나눠줄 때 무엇인가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6. 발을 지켜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고, 들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들어선 후에 발을 빼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컴퓨터 게임도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모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저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저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한번 거기에 빠진 사람은 그 재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맛은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마약을 하면 쾌락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마약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마약을 맞고 그 쾌락을 맛보면 그 다음에는 마약을 끊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고, 결국 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에 빠집니까? "그 정도쯤이야! 한번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죄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술 좋아하는 분들은 항상 "딱 한잔만!" 하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딱 한번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둘째 딸 한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가 참을성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신발에 흙이 들어가는 것만은 조금만 들어가도 얼마나 짜증을 내는지 모릅니다.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제일 행군을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군화에 이물질이 들어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그만 죄가 우리 인생 행로에 제일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 작은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축복이 막힙니다. 자신의 작은 죄 때문에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작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죄의 유혹이 많은 이 시대에 오늘 말씀드린 6가지를 잘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영혼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마18:21-25)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인격적인 공격, 악한 말들과 뒤에서 귓속말들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여호와가 어떻게 하실가를 생각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피해를 당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성도로서 올바른 삶이나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한다면 어떠한 피해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본문을 통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도는 여호와로부터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다른 성도의 허물을 용서해야하는 첫째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와 여호와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우리를 여호와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과 같다. 일만 달란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무거운 죄 값을 모두 갚아 주셨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 그저 여호와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것이다.(엡 2:8).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죄수 중에서도 괴수(魁首) 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죄가 없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우리는 쉴새없이 많은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께서 어떠한 죄라도 모두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본문에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을 안 왕이 그의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만나자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 동관이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으나 그 종은 동관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때 그 소식을 들은 왕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고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우리가 여호와께 엄청난 죄를 용서함 받고도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죄 값을 도로 받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저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시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고 말씀 하셨다. 성도는 남을 용서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용서는 성도들에게 부과된 여호와의 절대적인 명령으로서 꼭 실천해야 한다.
3. 용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데 힘을 쏟으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해 주셨으며(요 8:1-11),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 낙원에 있을 복을 허락하셨고(눅 22:43), 정죄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던 분이시다.(눅 23;34).
성도들이 추구해야 되는 목표가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 하지 않는 사람은 평화의 왕(사 9:6)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다. 용서하기를 힘쓰는 자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될까? 그것은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여호와께서 무조건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사실 우리들은 입과 건성으로는 형제들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기도 하고 위로도 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을 통해서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용서는 위선적이거나 겉으로만 화해가 아닌 온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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