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신약 성경에서 “닭”과 관련된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배반과 세 번의 닭 울음의 이야기에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3:37~38)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지금은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느냐?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35~36)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에 혹은 밤중에 혹은 새벽 닭이 울 때, 혹은 아침 무렵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갑자기 돌아와서, 너희가 자고 있는 것을 보지 않게 하라.”
기독교에서 닭은 어린 양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동물입니다. 닭을 통해 어두운 밤이 지나면 다시 밝은 아침이 온다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것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당의 돔 꼭대기에 있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려주는 풍향계는 쇠나 구리로 닭의 문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 많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었을 때, 방황하던 베드로가 수탉의 우렁찬 목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성서의 기록에 의한 것이며, 또 부활의 상징으로 다시 밝은 아침이 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닭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임신부가 꿈에서 닭의 꿈을 꾸게 되면 아들을 낳게 될 징조로 보았고, 암탉을 보면 기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습 중에서 “카파롯(Kaparot)”이라는 풍습이 있는데 이 풍습은 속죄일이 되기 이틀 전에 닭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이것을 나의 대속 제물로 바칩니다.”라고 말하면서 9번 돌린 후에 죽이는 관습인데, 랍비 문헌에 기록이 없는 풍습이지만, AD 10 세기에 바벨론의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풍습입니다.
Kaparot 예식 후에 닭을 피흘려 죽게 하는 예식
이러한 풍습은 성전에서 대속 제물로 아사셀 염소를 사용하였던 것처럼, 성전 파괴 후에는 성전에서 정결한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를 드릴 수 없었으므로 양이나 염소를 대신하여 닭을 대속 제물로 삼은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닭이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간 전후의 일로 보이며, 솔로몬 시대에는 닭을 키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 받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예루살렘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는 성벽을 쌓는 일을 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는데 먹을 때마다 황소 한 마리 그리고 기름진 양 여섯 마리와 닭들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5:16~18) “나는 성벽 쌓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곳에 모인 내 종들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밭을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우리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 말고도 유다 사람과 관리 백오십 명을 먹여 살렸습니다.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날마다 황소 한 마리와 기름진 양 여섯 마리와 닭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열흘에 한 번씩 각종 포도주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총독이 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음식을 한 번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백성들의 짐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던 유대 백성들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쌓을 때,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왔던 느헤미야가 부역과 높은 과세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유대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진 기록이며, 당시에 소, 양, 닭 등은 부자들이나 관료들이 식탁에서 먹었던 귀한 음식 중의 하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기록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닭을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시간을 헤아리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새벽닭이 우는 시간(gallicinium)으로 새벽 3 시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메추라기(Quail)
(출애굽기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민수기 11:31~32)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메추라기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고기였습니다.이렇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불리 먹었던 곳은 지금의 시나이 반도쯤으로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시나이반도와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를 오가는 철새들의 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봄, 가을이 되면 골란고원에 있는 훌라 습지에서 떼를 지어 날아드는 철새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그곳이 바로 철새들의 통로에 있기 때문입니다.
메추라기는 날개가 작은 편이어서 기러기처럼 아주 잘 날 수 있는 편은 아니지만, 가을에 아프리카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시리아 쪽으로 되돌아오는 철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나이반도에서는 여름에도 메추라기들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메추라기 떼가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중간에 뒤쳐진 것들로 보입니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동물로서 닭, 자고새, 공작새와 같은 분류에 속하는 새 종류입니다. 닭은 약 7,000년 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길러졌던 조류 동물이었으며, 메추라기는 암꿩(까투리)처럼 보이지만, 길이는 약 18 cm 정도로 작습니다. 몸은 갈색과 잿빛이 섞여 있어서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씨앗, 과일류, 곤충 등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알은 여름철에 10개 내외로 낳으며, 부화기간은 16~21일로서 닭과 같거나 약간 짧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를 공급한 사건은 민수기 11장에 잘 기록되어 있지만, 자연현상으로 볼 때 메추라기는 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탈진하여 시나이반도에서 쉬어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며, 시기적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이 메추라기를 먹은 시기가 출애굽 후 여섯 주쯤 되었을 때 (출 16:13)와 그 후 1년이 지났을 때(민 11;31)인 4월말 또는 5월 초순이므로 철새들의 이동 시기와 비슷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 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므로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룻길은 대체로 32km 정도로서 생각보다 짧은 거리이지만 옛날의 도로와 신발 사정, 남녀노소와 양과 염소, 그리고 소와 같은 짐승들도 함께 걸어야 하는 상황 등을 감안하면 메추라기가 내려왔던 장소를 시나이 반도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한 가족(또는 한 사람)이 모은 메추라기의 분량이 10 호멜이나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120말(2,200 리터)정도 되는 양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은 메추라기 전체 숫자가 900만 마리 정도 되었을 것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적은 사실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수기를 주석하였던 성경학자들은 과거 이집트가 100여년에 걸쳐 매년 200만~300만 마리의 메추라기를 수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타 (Camel)
Bactrian Camel
낙타는 등에 봉오리가 2개인 낙타(Bactrian Camel)과 봉오리가 하나인 낙타(Arabian Camel)가 있습니다. 봉이 하나인 Arabian 낙타는 목이 길고 몸통은 조금 짧지만 달리는 속도가 쌍봉낙타보다 빠르고 발바닥이 부드러워서 모래땅을 걷는데 더욱 적합합니다. 그러나 쌍봉낙타는 목과 다리가 짧으며 발바닥이 비교적 단단하여 바위길이나 자갈길을 걷는데 더욱 적합합니다.
낙타는 오랜 시간 물 없이도 견딜 수 있고 모래 땅을 잘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에 BC 약 3,000부터 아라비아에서 가축으로 사육되어 왔으며, 주로 상업적인 운송수단에 이용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낙타는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주로 군수품을 나르는데 이용되었을 뿐 직접적인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Arabian Camel
등에 혹은 물이 아니라 지방이 저장된 장소이며 3일정도 물을 마시지 않아도 전혀 지장 없이 견딥니다.
하지만 등의 혹이 작아지는데 그 이유는 필요한 수분은 혹 속의 지방을 분해시켜 충당하기 때문입니다.
낙타는 레위기의 정결법에 의하여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어 식용과 희생 제사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불 뱀
(민수기 21:4~9)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을 떠나, 홍해로 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 길로 들어선 것은 에돔 나라를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은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거요? 여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소. 이 형편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하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독사를 보내셨습니다. 독사가 백성을 물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여호와를 원망함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드려서 이 뱀들을 없애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는 백성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왕하 18:4~5)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돌기둥들을 부수고 아세라 우상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까지도 모세가 만든 놋 뱀에게 향을 피워 섬기는 것을 보고 그 놋 뱀도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놋 뱀을 느후스단(Nehushtan)이라고 불렀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유다의 모든 왕 가운데서 히스기야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 주었던 음식에 대하여 불평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문 “불 뱀(Fiery Serpent)”들을 히브리어로 “스랍(saraph, 타는 것)”들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이유는 그 독사들에게 물리면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 남단지역인 아라바 만 지역과 시내반도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는 불 뱀은 붉그레한 반점이 있는 뱀으로써 이 뱀에게 한 번 물리게 되면 치명적일 정도로 독성이 강한 뱀이었습니다.
(이사야 6:2~3) “주님의 위쪽에는 스랍이라고 하는 천사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saraph)들마다 각각 날개가 여섯 개씩 달려 있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렸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으며, 두 날개로는 날아다녔다. 천사들이 서로를 부르며 말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시여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사야 30:6) “이것은 남쪽 네게브의 짐승들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남쪽 네게브는 위험하고 거친 곳이다. 그 곳은 수사자와 암사자가 가득하고, 독사와 날아다니는 뱀(saraph)이 가득한 땅이다. 이런 땅을 사신들이 당나귀 등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낙타 등에 보물을 싣고 다닌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나라로 그것들을 싣고 간다.”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환상에 의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존재로 스랍(saraph)이라는 천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옛 중동지방에서 “스랍(saraph)”에 대하여 그려진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날개 달린 뱀 아니면 사람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새의 날개가 있는 혼합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느보 산 정상의 놋 뱀(Nehushtan)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내려주시던 만나를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원망하므로 하나님은 광야의 불 뱀을 보내어 감사하는 대신에 원망과 불평을 하던 백성들을 물게 하였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된 백성들은 회개하며 살려 달라고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걸어놓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는 주술적인 방법으로 치료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그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요 3:14)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불 뱀”은 바로 네게브 광야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는 독사(Fiery Serpent)였습니다. 이 독사는 독성이 매우 강한 독을 가지고 있는 독사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네게브 사막의 팀나(Timna)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단은 이집트의 여신 “하토르”를 위한 신전을 발굴하면서 신전의 내실에서 12.5 cm의 놋으로 만든 뱀 형상이 발굴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뱀의 치명적인 독을 무서워하였을 뿐만 아니라 뱀을 주술적인 동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마 23:33), 이렇게 “독사”를 인용하여 저주하는 것은 아주 심한 욕에 해당되었습니다. 더욱이 자기 어미의 배를 가르면서 태어나는 독사(살모사)를 묘사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독사들”이라는 표현보다도 더욱 심한 욕에 해당되는 표현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갈 즈음, 가나안 땅에서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고원지대의 사이에 있는 홍해의 아카바 만으로 향하여 나아가던 중에 에돔의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을 지나기를 간청하였으나 에돔 왕이 거절함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행군방향을 목적지였던 가나안과는 반대인 홍해로 가는 길로 바꾸게 되자, 38년 동안 광야생활에 시달려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모세와 여호와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기록한 성경을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매일 주셨던 만나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 뱀들을 동원하여 징계하신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광야와 사막에서 이쪽을 보아도 또 저쪽을 보아도 불 뱀과 같은 독사들이 가득한 곳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신명기 8:15)에서 약속하여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태껏 광야에 산재해 있는 불 뱀(Fiery Serpent)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던 것이었지만,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신 일을 기억하기는커녕, 그들이 하늘의 양식인 만나까지도 신물이 나서 못 먹겠다고 불평하자, 그 보호의 손길을 멈추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멈추게 되어 수많은 불 뱀들로부터 오는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때서야 잘못을 뉘우친 백성들의 간구를 다시 들으시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두도록 하시고, 불 뱀에게 물린 자가 이 놋 뱀을 쳐다보면 낫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리로 만든 뱀에게는 치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청동으로 만든 뱀을 쳐다보게 되면 낫게 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겠지만, 치료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 놋 뱀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여호와(여호와 라파, 출 15:26)”는 그 능력으로 백성들을 일시에 치료하실 수도 있었으나,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뱀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물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귀중함을 인식시키셨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치료하심을 경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죄의 결과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함을 얻게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그의 보호하심 아래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씌운 저주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사람은 다 저주를 받은 것이다.””
(골 2:14~15)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기고 따르지 않은 율법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빚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깨끗이 없애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과 능력을 꺾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이하여 가져온 결과(불 뱀의 공격)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뉘우치는 이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자신들의 회복을 위해 준비된 이 유일한 방법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후부터 “놋 뱀(Brass Serpent)”을 숭배하고 그 앞에 분향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이 “놋 뱀(Brass Serpent)”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숭배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례가 히스기야 왕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히스기야 왕은 이러한 관례의 의식이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여 그의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놋 뱀(Nehushtan)”의 형상을 부수어 버렸던 것입니다. (왕하 18:4).
중동의 고대 사람들은 뱀의 치명적인 독뿐만 아니라 뱀을 주술적인 존재로 여겨서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는 뱀과 뱀에게 물리는 것을 막아주는 주문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뱀은 주로 차가운 담장이나 집의 벽을 세운 돌 밑에 있는데 잘못 건드렸다가 물리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성서의 기록도 있습니다.
(전 10:8) “함정을 파는 자는 자신이 그 곳에 빠질 수 있고, 벽을 허는 자는 독사에 물릴 수 있다.”
(암 5:19) “사자를 피해 달아나다가 곰을 만나는 것과 같고, 집에 들어가 벽에 손을 대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
놋뱀과 십자가
3500년 전 최초로 유월절을 지키던 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벅찬 감동과 감사로 이집트를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했다.
그런데 광야 노정 중 에돔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더 멀고 험한 사막으로 가는 데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많은 사람들이 사막의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다. 사람들은 회개하며 모세에게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자, 뱀에게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
사실 놋뱀 그 자체는 누구를 구원할 만한 힘이 없다. ‘놋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놋뱀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든 놋뱀이 구원해주었다는 그릇된 신앙으로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이나 놋뱀을 숭배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
※느후스단: ‘놋조각’이란 뜻.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십자가 숭배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4)
모세가 만들어 달았던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단, 놋뱀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나 생명의 힘이 없었던 것처럼 십자가 자체도 아무런 힘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놋뱀을 숭배했던 역사가 어쩌면 이리도 신약시대 십자가를 숭배하는 역사와 똑 닮아 있을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놋뱀이 사람들을 살렸는가? 십가가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놋뱀은 놋조각일 뿐이고, 십자가는 사형틀, 나무일 뿐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하셨다면 밤마다 교회 꼭대기에는 밧줄이나 총이 불을 밝힐 것이고, 강대상과 사람들의 목에는 밧줄과 총 모양의 장식이 걸려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방 민족의 길을 따르지 말아라. … 이방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다. 그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 목공의 도구로 다듬어서 거기에 은과 금으로 장식하고 그것을 못과 망치로 고정시킨다. 그들이 이렇게 해서 만든 우상은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운반해 주어야 한다. … 그것은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예레미야 10:1~5, 현대인의성경)
나무로 만들어 은과 금으로 장식한 것, 허수아비처럼 생긴 것! 당신의 머릿속엔 지금 무엇이 떠오르는가? 그것은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 작성자 안수 집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