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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보는 다니엘서 9 -12장

by 은총가득 2021. 7. 18.

다니엘9장 70이레의 비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원년에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기간이 70년임을 알고, 금식하며 유다 민족과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을 통해 메시아에 관한 계시를 주셨으며 다니엘은 예루살렘 멸망과 거짓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한다.

 

다니엘 9장은 다리오 왕 원년, 즉 6장의 사자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한 다니엘의 중보기도와 70이레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1-19절까지는 민족의 사죄와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행한 다니엘의 중보기도가 소개되고 있는데,

본문에 제시된 다니엘의 중보기도의 주 내용은,

1)선민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의 수치를 당하게 된 원인이

긍휼과 인자가 많으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규례를 범한 데 있었음을 회고하며,

2)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포로생활 중에도 회복의 은총을 간구치 않은 사실에 대해 회개하며,

3)주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 사죄와 선민의 회복 및 예루살렘성의 회복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다니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회개와 중보기도를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선민 이스라엘의 포로기간이 70년이라고 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록한 책을 발견하고

이제 그 연수가 되었다는 깨달았기 때문이다.(렘25:11-13 읽기)

이같은 다니엘의 중보기도는 실로 롯을 살리기 위해 간구했던 아브라함의 기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한 모세의 기도,

그 외에도 사무엘의 기도, 다윗의 기도 등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중보기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나아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예표라 할 수 있다.

 

20-27절까지는 다니엘의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70이레 예언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 전개 과정과 종말에 대해 밝힌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유대인과 성전을 극심히 핍박하여 말세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대표적 예표가 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C175-163)를 직접 가리키고 있지만,

동시에 말세에 일어날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 자체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70이레 비밀과 다니엘서에 나타난 역사 전개에 대한 다중적 묵시들은 아래의 도표 참고)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다니엘은 선지자로서 평소 놀라운 계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직접 받은 계시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다니엘의 겸손한 성품을 드러내어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독선적인 태도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또한 기도와 관련된 것인데, 23절에 보면, (23절 읽기)

다니엘이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기를 막 간구할 즈음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가르쳐준다.

실로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간구할 때에, 이미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신속히 응답하신다.

요즘은 도시가스가 연결된 곳이 많다.

 

이미 도시가스는 배관을 통해 우리 집까지 연결되어 있다. 나는 밸브를 열기만 하면 된다.

기도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집에서 밸브를 여는 작업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바로 코밑에까지 와 계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를 열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때로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거절되거나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조급해 하거나 안절부절할 필요가 없다.

불평불만, 걱정근심할 필요가 없다.

오늘은 어떤 기도의 제목으로 주님을 불렀는가?

혹시 아무런 기도의 제목도 없이, 이 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는가?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제목을 내어 놓자.

우리의 십자가를 내려놓자.

기도야말로 은혜의 통로이다.

 

(기도)

주님,

매일 정한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매일 문안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때만 찾아뵙고 연락드려도 늘 기뻐하시는 부모님처럼,

연약한 무릎을 조아릴 때마다

넘치는 은혜와 사랑으로 감싸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자식들은 늘 그렇게 불효자일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말씀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 소망의 약속들이 담겨 있으나,

세상 욕심과 온갖 염려로, 눈과 귀, 마음까지 닫혀 있으니

늘 조급하고 불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지혜의 성령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어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다니엘서에 나타난 역사 전개에 대한 다중적 묵시들

 

성경의 예언들은 대부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다중성, 복합성을 갖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도 마찬가지다. 아래 도표의 내용들은 다니엘의 예언을 미래 시간에 적용한 일례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성경의 예언들이 성도들의 세상 끝에 대한 온갖 기대를 일깨우고

그런 기대를 형성하는 데 표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세상 끝’에 관한 한, 신약성경에서 경고하는 바는, 심판에 대한 기대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이

마침내 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를 계산하거나

성급하게 이미 채워진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막13:7-8,10,32-33, 벧후3:8).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구원이 이미 결정적으로 임해 있음을 깨닫고,

불안감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삶을 충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다니엘10장 다니엘의 금식기도

 

바사 왕 고레스 3년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인자의 이상을 보고 두려워한다. 이때 천사가 격려하고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만 다니엘은 다시 두려워하였고 천사는 또다시 그에게 힘을 주고 말을 하게 한다.

 

 

다니엘 10장은 70이레 예언이 주어진 지 약 2년 후,

다니엘이 3주간 동안 힛데겔 강가에서 금식기도하던 중에 받은 묵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이미 선민 이스라엘의 제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져,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재건 사업이 개시된 이후였다.

그리고 이 당시 다니엘의 나이는 적어도 90세가량은 되었을 때이다.

힛데겔 강가에서의 묵시가 앞선 7-9장 사이에서 기록하고 있는 묵시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묵시의 내용이 짐승이니 뿔이니 숫양, 숫염소니 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보다 직설적으로 후대의 실제 역사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다니엘이 슬퍼하며(2절) 금식한(3절) 이유는 추측컨대,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귀환한 인원은 약 5만 명가량이라는, 너무나 적은 숫자에 불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귀국한 이들이 곧 착수한 성전 재건 공사마저

기존 사마리아 거주자들의 방해에 부딪쳐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수가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오랜 기간 고생스럽게 이루어 놓은 생활 기반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여호와 신앙이 약화된 데 있었다.

다니엘은 이러한 상황을 심히 안타까워하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주신 이상을 볼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실한 자들의 결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10장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13절 이하의 내용으로,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한 첫날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세 이레, 곧 21일이라는 기간이 지나서야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당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21일 동안 앞길을 가로막았다고 가브리엘이 말한다.

여기서 ‘바사 왕국의 군주’란 문자대로 해석하면 바사 제국의 통치자란 뜻이나,

실제로는 바사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돕기 위해 파송되었으나

악령의 방해로 늦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군장 중의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가브리엘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다고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밝힌다.

미가엘은 천사장(유1:9)으로, 다른 많은 천군천사들을 지휘하는 이스라엘의 수호천사(12:1)이다.

계12장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어 미가엘의 사자들과 용의 사자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는 예언이 나오는데,

이처럼 영계에서는 천사들과 악한 영들 사이에 엄청난 영적 전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소식을 전했으므로,

이제는 돌아가서 바사 군주, 즉 바사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악한 영들과 싸울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바사 다음에는 헬라가 등장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10장에서 우리는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통하여

귀한 깨우침을 받게 된다.

민족과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나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한번 돌아보자.

혹시 기도의 범위가 내 자신과 내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에만 치우쳐 있지는 않은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이기적인 기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가득 찬 기도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세상 욕망으로 질펀한 대화를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겠는가?

11,12절을 보라. 다니엘은 참으로 매사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응답 받지 못한 기도 때문에 낙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무슨 일이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보자.

겸손한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신속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자신이 본 이상의 장엄함에 압도되어 기운이 빠져 쓰러져 있던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다니엘 10장에서는 특히 기도하는 사람을 돕는 천사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10절에 보면, 한 손이 있어 다니엘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기력이 쇠진한 다니엘의 몸을 일으켜 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다니엘을 격려한다.

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겸비하면 천사가 돕기 위하여 달려온다.

16절에 보면, 이번에는 인자(그리스도)가 직접 다니엘을 만지신 것으로 보인다.

18절에 보면, 강건케 한다. 19절에 보면 위로하며 격려하여 힘이 나게 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는 우리만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기도가 드려지는 순간,

천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도와주신다.

 

(기도)

주님,

택하신 종들로 하여금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이 시대의 다니엘들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압도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힘 앞에 압도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당신께 압도되고 정복당하게 하소서.

당신 앞에 쓰러지고 죽어짐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힘으로 소생하게 하시어

어떤 세상의 힘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소서.


 

 

 

다니엘11장 역사의 주관자

 

계속되는 예언은 바사에 일어날 네 왕과 헬라의 분열을 말하고, 이후에 애굽 프톨레미 왕조를 가리키는 남방 왕조와 수리아의 셀류쿠스 왕조를 가리키는 북방 왕조 사이에 일어날 전쟁과 외교를 말하고 있다. 이어 핍박자 에피파네스의 행적에 대해 밝히고 있다.

 

 

1절은 앞장의 끝부분에 붙은 부분으로 보아야 하는데,

다리오의 군대가 바벨론제국을 점령할 때 하늘이 도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2절은 바사제국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간추린 것이다.

여러 왕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은

바사제국을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를 바탕으로 세계 최강의 군대를 조직하여 헬라와 싸웠다.

그러나 헬라의 능력 있는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패망한다.

하지만 헬라제국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제국은 네 장군들에 의해 4개의 지역으로 분할된다.

알렉산더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살해되었고,

알렉산더와 혈연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네 명의 장군들에게 제국이 상속되고 말았다.

 

5절 이하에서는 알렉산더 사후 분열된 헬라제국의 네 왕국 중,

남방의 애굽 왕국과 북방의 시리아 왕국간에 전쟁에 관해 예언한다.

알렉산더의 네 장군 중 가장 유능한 장수였던 프톨레미가 남방 애굽을 통치했다.

네 장군 중 북방의 시리아를 통치했던 셀류쿠스는 세력이 약해 프톨레미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나 셀류쿠스 왕조는 점차 번성하여 프톨레미의 왕국을 압도했고,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딸을 애굽 통치자와 결혼시킴으로써

애굽 왕국 전체를 자기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이때 안티오쿠스는 남왕국의 영토였던 영화로운 땅 유대땅을 빼앗아

북왕국의 수중에 넣어 다스리게 된다.

안티오쿠스는 헬라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했으나

한 장군(로마)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패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안티오쿠스는 여러 신전(산성)의 보물들을 약탈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흥분한 군중의 손에 명예롭지 못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21절 이하는 셀류쿠스 왕조 8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해 예언한 부분이다.

이 임금 아래서 유대 사람들은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어야 했다.

에피파네스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남방 애굽을 침공하여 승리하는데,

본국 시리아로 귀환하던 도중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땅을 정복하고

거기서 온갖 가증한 짓들을 자행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같은 예언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난 다음,

실제로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을 것을 이용해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대부분 약탈당하고 불태워졌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잡혀갔다고 한다.

 

그는 유대교를 말살하고 헬라 종교를 강요하게 되는데,

유대인들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안식일 준수, 각종 절기행사, 번제 제사, 할례 등

율법준수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율법서를 모두 불태우며

성전 제단에서 부정한 제물로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가증스러운 행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B.C.167년 12월 16일이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번제단 위에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다.

그리고 이같은 제사를 매월 25일에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에피파네스의 생일이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에피파네스 자신을 위해 제우스 신상 앞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정책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한 것이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마카비 혁명이라는 유대독립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 되고 말았다.

 

다니엘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마카비 혁명은 성공하여,

유다인들은 그 땅에서 헬라인들을 몰아내고 100년 이상, 독립국가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다가 유대나라는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하여튼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같은 예언들은 남김없이 성취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증한 일을 행했던 에피파네스는

엄청난 군사력으로 애굽과 다시 싸우려고 준비했으나,

출병하기 전 BC164년 바사에서 급작스럽게 병들어 죽고 말았다.

 

다니엘에서 예언된 내용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옛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사람들 역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들임도 불구하고,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며,

스스로 높이고 크다 하며, 거짓말하며, 속이며, 난폭하며, 무자비하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고 가증스러운 짓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45절을 보라! “...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으리라.”

 

세상의 끝날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그 누가, 그 무엇이 나를 도울 수 있겠는가?

금은보화, 어떤 재물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떤 자랑스러운 경험과 지식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오늘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온갖 것들이, 나를 높이고 우쭐하게 만드는 온갖 수식어들이,

그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속히, 진심으로, 역사의 절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도움의 근원되시는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기도)

주님,

오늘 나는 무엇으로 나를 높이려 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어 줍니까?

아니면, 무엇 때문에 상실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무엇으로 인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까?

역사를 공부는 하지만, 배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훨씬 배부르고, 편리하고, 제 말 다하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종살이하던 애굽 땅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마찬가집니다.

출애굽은 했으나 탈(脫) 애굽은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

어둠이 너무 깊어 두려움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인도하여 주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끝까지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다니엘12장  지혜 있는 자

 

고레스 3년 힛데겔 큰 강가에서 3주간의 금식기도 중에 받은 계시로, 말세의 환난과 대종말에 대한 예언과 함께 강변의 두 천사의 결론적인 예언을 말하면서 글을 종결하고 있다.

 

 

다니엘10장~12장은 고레스 왕 3년에 다니엘이 힛데겔 큰 강가에서

3주간의 금식기도 중에 받은 묵시이다.

그런데 11장까지 바벨론제국 이후 바사제국, 헬라제국,

분열왕국 중 에피파네스의 만행까지 예언했는데,

마지막 장에 들어오면 갑자기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 끝날에 있을 대환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1절)‘그때’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성도들에게 닥칠 대환난의 때를 말한다.

곧 다니엘이 예언한 칠십 이레의 마지막 한 주간 중 후 삼일 반의 기간을 뜻한다.

종말의 대환난의 때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전대미문의 환난과 핍박이 닥칠 것인데,

이때 천사장 미가엘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할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환난 때에 적그리스도의 핍박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 곧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된 자는

반드시 핍박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환난에 처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보여준 바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확신과 끝까지 신앙지조를 사수하는 것이라 하겠다.

 

(2절)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부활관, 종말관과 일치되는 내용으로,

신학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본절은 마지막 때에 죽은 자들이 깨어날 것이라는 내용을 처음으로 밝힌 부분이며,

동시에 이는 구약성경에서 영생이란 개념을 쓰는 유일한 구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란 죽어 땅으로 돌아가는 자,

곧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전인류를 지칭한다.

그런데 1절에서 말한 대환난이 끝나고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르렀을 때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육신의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인 종말이 아니며,

모든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장차 부활하여 영생과 영벌로 나눠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종말과 영생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마라톤을 뛰는 선수와 단거리를 뛰는 선수의 주법이 다르듯

그 양상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3절)여기서 ‘지혜 있는 자’는 1절과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종말의 때에 환난을 당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는 자들을 말하며,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여,

환난에서 벗어나게 한 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같은 사람들이 받을 영광이 궁창의 빛과 같고,

하늘의 별과 같이 심히 클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췰 것을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약속의 상급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한번 되돌아보자.

기회가 있을 때, 아직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자.

노아 방주의 문은 한번 닫히자 그 누구도 열 수 없었다.

 

(4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종말이 가까이 되면,

사람들이 빠르게 오고가며 지식, 정보의 양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럴싸한 내용이지만 본문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왕래하며’로 해석된 히브리어 ‘에쉬테투’는

문자적으로는 ‘노를 젓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통상적으로는 ‘(책을) 통독하다’, ‘(책을) 철저히 검토하다’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책을 샅샅이 훑어보는 모습을 마치 책에 담긴 지식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비유한 데서 유래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본서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될 종말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의 내용을 연구하며,

그에 따라 이 예언의 의미가 밝히 드러나 많은 사람이 깨닫게 될 것을 뜻한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성경해석은 언제나 위험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막는 태도는 더욱 위험하다.

비진리와 오류, 아집과 독선, 자기주장만 난무하는 이 시대에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화평의 길을 걸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5-13절)은 다니엘서 전체의 종결부분으로,

강변의 두 천사가 결론적으로 묵시에 대해 답변하며 다니엘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한 때, 두 때 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의 후반부 절반에 해당하는 3년 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10절)은 환난날에 의인과 악인에게서 각각 나타날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즉 똑같이 환난을 당할지라도 의인은 이를 선용하여 연단의 기회로 삼아

더욱 정결한 신앙을 유지할 것이나,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악인은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육신을 위하여 악을 행함으로써

멸망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1290일과 1335일이라는 기간은 대략 삼년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나,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불확실하다.

이단사이비들이 이 숫자를 가지고 영해(靈解)를 한답시고 갖가지 억척을 주장하기도 하나,

명확한 답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단지 우리는 이것이 적그리스도에 의한 극심한 환난의 기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고난의 기간을 견디어 인내하고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 확신할 뿐이다.

 

마지막 절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며 충성을 다한 다니엘에게

축복과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받을 것임을 확증해 줌으로써 위로, 격려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다니엘처럼 성경에 약속된 대로

영생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통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아무리 힘겨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급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믿음의 용사에게는 하나님께서 빛나는 면류관으로 씌우실 것이며,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실 것이다.

 

지금 내가 가장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고자 힘쓰고 있는가?

내가 힘쓰고 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말해 줄 것이다.

허망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준비하는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아무리 어지럽고 불안하며 불신앙의 도가니 가운데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끝까지 인내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합당한 은혜를 주신다.

긴 호흡으로 다시 한 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자.

 

(기도)

주님,

거짓과 오류투성이인 매스컴의 뉴스나 광고는 곧잘 믿으면서도

하늘의 약속, 말씀의 약속에는 적극 반응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능력과 기회를 포기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할 때가 많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이 겨자씨만큼도 안 되는 믿음을...

지금 내가 가장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에 목말라 하며 무엇 때문에 안달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무엇을 얻고자 애쓰고 힘써 달려가고 있습니까?

내 마음이 있는 곳, 내 보물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내 존재의 현주소가 아닙니까?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

죽어 썩어 문드러질 이 육체 가운데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

남아 있는 시간들, 생명의 순간들이

빛이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

 

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