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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이해 / 유해무 교수

by 은총가득 2021. 5. 17.

구속사적 성경 이해 / 유해무 교수

 

I.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어 왔고 또 있을 것이다. 전에도 있어 왔지만 요사이 어떤 이들은 성경의 특정 부분만 강조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을 증명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을 성경에다 투입하여 채색한다. 이런 부류의 대표적인 예가 1992년을 기점으로 한 종말에 관한 예언이다. 이들은 성경을 무슨 '정감록'들의 예언서나 '주역' 등의 운명예견서로 취급한다. 물론 성경에는 요한의 계시록 등 장래 일에 관한 예언이 계시로서 주어져 있으나 이런 부류들이 해석하고 예언하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됨을 우리에게 동시에 가르쳐 준다(마24:36; 신29:29).


때로는 교회가 처해 있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성경은 오로지 정치적으로만 읽는 풍조도 있어 왔다. 특히 한국의 70년대, 80년대는 이의 대표적 예이다. 예수님을 정치적 순교자로 보고 로마서 13장을 타협의 문서로 볼뿐만 아니라 구약 중에서는 특히 호세아나 아모스 등 소선지서들을 즐겨 읽었고 출애굽을 정치적 해방의 사건으로 찬양했었다. 여기에는 이미 후기 자본주의의 병폐인 계층간의 경제적 부의 차이를 계층간의 차별로 보는 그릇된 경제적 성경 이해도 함께 작용했다.
여기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한국의 소위 보수주의 교회들의 정치적 무관심 내지는 잘못된 정부에 대한 침묵적 순복, 그리고 경제적으로 보아 생산과 분배 면에서 불균형을 이룬 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가 배경에 깔려 있다.
또 한 예를 들자면 최근에 '창조론'을 신봉하는 신실한 신자들이 본의 아니게 성경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응하는 창조론이 과학 이론으로만 부각될 경우 그것을 논증하는 성경 이해엔 모종의 문제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성경은 장래 문제나 정치 문제나 과학 문제 등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나 오직 그런 문제들만을 다루기 위하여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성경의 주제들을 다루는 방편으로써 언급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롬15: 4).


그러나 그 교훈은 도덕적 교훈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신앙을 도덕적 행위와 크게 연관시킨다. 그럴 때 성경은 도덕 교과서로 전락될 위험이 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이 말한 교훈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과 덕을 세우라고 권면하는 가운데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선행의 모범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든다.
그런데 이것이 "전에 기록한 바"(롬15: 4上)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울은 시편 69: 9의 인용으로써 설명한다. 즉 전에 기록되었던 다윗의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했고 이제는 그렇게 성취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II.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는, 바울이 언급한 교훈이 뭇 철학이나 처세술의 교훈이 아닌 것은, 이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교훈이 된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약한 자와 이웃을 돌보는 것은 내가 무한정 베풀 수 있는 강자나 부자이어서가 아니라, 약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통속적인 자선사업이나 박애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철저히 기독론적으로 무장된 교훈 때문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 5이하)라고 권면했다. 그리므로 부모 공경에 관한 교훈도 바울은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다(엡 6: 1). 그리고 부모들도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6: 4). 기독교적 교훈은 이미 기록된 예언대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교훈을 단지 도덕적이거나 교리적 교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교훈의 실체로 볼 때 바로 이해되어질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서 둘째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연관되나 예수님의 모범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거나 그 죽음이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모습도 있지만 삼을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고 본받을 수 있는 것은(롬 8:29), 바로 그분이 지니고 있는, 우리로서는 본받을 수 없는 그 부분 때문이다. 바로 대속주이신 그분인고로 우리는 대속주 되심을 믿을 뿐 본받을 수는 없다. 대속주의 사역을 홀로 감당하시려고 고난 당하시고 다시 사셨던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서 나타나는 교훈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식으로 파악되고 전달되는 교훈을 살피기도 한다.


누가복음 7:2-10을 보면 예수님은 한 백부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7: 9)고 극찬하셨다. 이는 종을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고치시려 하자 백부장이 다시 자기 친구들을 보내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한 전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였다.


그런데 이 발언이 정말로 큰 믿음에서 나온 발언인가? 우리는 늘 이적을 생각하고 우리 또한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파악하거나 전달받는다. 이는 성경의 내용보다는 교리적, 신앙적 교훈에 너무 집착하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이방인을 이스라엘과 대입시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기 전 그리고 승천하여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거의 금지되었다(마10:56; 15:21-28; 12:20-23).
바로 이점을 백부장은 존중했다. 그의 종의 구원이 중요하지만 그 일을 성취하려고 그는 역사의 흐름을 무력이나 아집으로 재촉하거나 훼방놓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큰 믿음의 소유요, 발언이었다.
그러면 더러는 그 이방인이 정말로 그런 구속역사의 흐름을 읽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것은 백부장과 그의 믿음을 은연중에 모범으로 생각하고서 나도 과연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내용 이해에 관건이 아니라 문제는 믿음의 주(히12: 2)이신 예수께서 직접 선언하신 믿음에 대한 칭찬을 우리가 누구 관대 반문할 수 잇는가?


(참조: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한 여자가 정말로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려고 그렇게 했겠는가?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지낸 바 된 줄을 아신 예수님이 그 여인의 행위를 그렇게 인정하셨는데 무슨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백부장의 경우처럼 우리는 역사적 배경을 성경을 읽을 때 크게 중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역사는 바로 구속의 역사와 연관되어져 있다. 즉 위 본문을 무시간적으로 접근하면서 백부장의 믿음으로 본받아 우리도 칭찬 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자고 본문을 파악하거나 전달하는 것은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한 신앙적 교훈만을 챙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에게 기록된 것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나 그 교훈은 역사적 인물이시고 육신이 된 말씀이신 예수님과 그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역사적 곧 구속역사적 이해 없이는 불가능해진다.



III.
구속역사적 성경 이해는 성경을 편파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보는 질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성령을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위에서 본대로 교훈은 도덕적이기 전에 이미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이라는 주제가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켜 주고 있음도 보게 된다. 즉 성경은 이 구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되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그러나 성경의 모든 부분이 동일한 강도로 이 구원과 구원의 주인 예수에 관하여 예언하거나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구원역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다른 말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이해이다. 신약보다는 구약이 예수님에 관하여는 보다 암시적이고 예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구원을 받을 대상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역사적인 교제를 묘사하고 있는데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구약은 신분상 동등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피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는 계속 그 형상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었다.
타락으로 인간은 형상됨을 상실하고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예언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에서 여자의 후손의 승리가 약속되었다(창 3:15). 이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성경은 운명 감정서나 정치 서적 또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듯이 전기들의 묶음도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동시에 방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땅과 씨와 번창에 관한 약속을 받았으나 가장 큰 약속은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창17: 7). 결국 아브라함이 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땅이 부수적으로 약속되었고 아울러 씨도 약속되었고 남들과는 달리 그 씨가 한 민족을 뜻하면서도 유일한 씨인 메시야를 동시에 의미했다.
그런고로 사라가 90세에 출산한 것은 한 늙은 여인의 생산이라는 의미에서 기적이 아니라 (그것도 사실은 기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득남은 약속된 씨의 출생이기 때문에 기적이다.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 20년만에 쌍둥이를 득남한 사실에서 그들이 기도하는 열심도 있었고 또 인내하는 훈련을 했다는 교훈을 얻기보다는 약속의 씨는 인간적 공로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인간의 도움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주도적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쳐 준다.


그 이후 야곱의 출생(창25:23), 요셉의 고백(45: 7-8, 50:20), 모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출애굽, 가나안 입성, 사사시대, 왕정시대, 그리고 분열과 포로시대 등은 역사적으로 유일회적 사건으로서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약속하셨던 씨의 출현을 섭리하시고 주장하셨다.
따라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갈 4: 4) 하시려고 역사는 진전되어야 했으나 진전 자체는 긍정적 의미의 발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진전되나 우리는 이스라엘 국가 전체로나 그 조상과 왕들과 백성의 타락을 읽게 된다. 구약 전체에 흐르는 경고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나 우리는 이것이 쉬임없이 반복됨을 보게 된다. 즉 이로써 구약에 나타난 타락의 역사는 회복과 구원의 주이신 메시야의 출현을 재촉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이해는 결국 하나님 중심적 성경 이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속역사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진전,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성취를 보여주면서도 그 구세주가 바로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분임을 보게 된다.


어떤 과정에서 구원의 주도자이신 하나님께 모세와 다니엘은 조상들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백성을 위한 사죄 기도를 드렸다(출32:13; 단 9: 3-19). 결국 우리를 위한 구원 계획과 집행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함을 알게 된다. 그 백성과 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가 됨이다(단 9:19).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당신을 의미한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요,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하신다.
이와 같이 구속역사란 하나님 중심의 성경 이해이다. 주도권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고 그 구원은 결국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심이다. 바로 이렇게 당신을 주심은 언약 관계에서 시발되었고 언약의 갱신에서 계속되었으며 완전한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구속역사적 성경 이해는 이렇게 기독론적이요,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영광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같은 영광된 몸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는 산 영이나 이제는 모든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는 영이 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지혜를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했다"(고전 2: 7). "주는 영이시며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를 것이다"(고후 3:18).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IV.
성경은 이야기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역사 이야기이다. 성경은 창조에서 출발하여 종말을 향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유일회적이며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구체적 사건들도 유일회적이다. 바로 그런 구체적 사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계시하고 인도하시고 기억나게 하셨던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오심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었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건들을 우리는 쉽게 모방할 수 없고 재생할 수 없다. 다만 그 사건들을 구속역사의 흐름에서 우선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모범적 의미를 파악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건을 보여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큰 일들"(행 2:11)을 우리에게 듣고 보게 한다.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핵심


1. 성경 권위와 그릇된 입장들

 

로마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지배하기 전, 교회사에서는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무시하던 조류가 교회 전체를 위협했었다. 이 운동은 역사적인 것은 가변적이요, 따라서 영원할 수 없다는 통속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역사적으로 계시되었고 형성된 성경의 여자적 본문 뒤에서 영원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었다.
이를 우리는 '풍유적 성경 이해'로 구정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이미 계시되어 지금 내 앞에 주어져 있는 바가 아니라 내 평생의 끝에나, 순례 길 뒤에나 얻을 수 있는 비밀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수도생활이 강조될 수 있고 아니면 맹종에 의한 성경 권위가 주장된다.


이에 반하여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성례'에다 감금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세례시에 주어지는 은혜의 주입으로 국한시키고 구체적으로는 사죄와 영의 갱신으로 보았다. 이것의 큰 오류는 성령을 하나님 곧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어떤 식의 은사로 못박은 데에 있다.
위에 언급된 풍유적 접근 방식과 성례전적 성령 이해는 결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개괄적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경의 권위가 결코 확립될 수 없고 성경이 내적 성찰의 도구이거나(동방교회) 아니면 제도적 교회의 도구로 전락한다(서방교회).


교회사를 볼 때, 종교개혁의 의의는 성령론의 확장에 있다. 성경 이해에서 성령이 도외시되거나 은사로만 파악될 경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상상조차도 못하게 된다. 물론 그들도 성령을 삼위일체의 고백에서는 언급하나 사변적 차원을 떠나기 힘든 형편에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심을 고백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던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계시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에 믿음을 주신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고백이 설교와 성경 이해에 직접적인 안목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내적 성찰을 한다해도 또한 맹목적인 성례집행을 한다해도 성령의 사역이 아니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으니, 믿음은 바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와 관련시켜서 확립했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도입된 기계적 영감론은 성령 사역을 제한하는 인간적 착상에 근거한 그야말로 '이론'이었다. 아울러 계시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에서 찾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전달로 봄으로 계시의 역사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했었다. 이는 우연한 역사적 사건은 영원한 계시의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계몽주의자 레씽의 입장과 너무나도 묘하게 연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방교회든 서방교회든,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 영감론이든 계몽주의든 성경의 역사적 배경은 거의 완전하게 무시하고 있음을 보면서 개혁주의 입장만이 이 배경을 존중할 수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2. 구속사적 성경 이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할 때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특히 중세기에 들어와서 계시와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크게 부각시켰으나 역사비평 방법에 확신을 가진 그들은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가장 초보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즉, 성경의 기록자가 성령이시라는 신앙고백적 원칙을 그들은 비전제성을 전제한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전제'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상기할 때, 이러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칼빈이나 우리의 신앙고백서와는 배치되며 종교개혁이 회복한 성경 권위와 성령 권위의 관계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령 구약의 폰 라드, 신약의 쿨만, 그리고 교의학의 판넨베르그이며, 이런 입장엔 상호 차이가 있겠으나 세계교회협의회 등 현대교회의 큰 움직임은 이런 류의 구속사 이해가 주도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신앙고백서에 입각하여 성령의 영감 사역과 말씀 이해에 나타나는 믿음을 성령이 직접 주관하심을 고백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역사성을 믿는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과 사랑의 관례로 함께 하시려는 작정을 실현시키시는 역사적 사실 전부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으며 그리고 구약을 직접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으며 그 후에 일어난 성령강림과 전도여행 및 종말에 관한 예언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있음을 믿는 것이 구속사적 이해이다.


이처럼 구속사에는 진전도 있고 아울러 매순간마다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교제도 있다. 그럴 경우 성경 전체에 기록된 사실은 진전되는 역사의 방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 사건을 이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분리시켜서 너무 부각시킬 때엔 성경 이해와 그 부분 이해에 의도하지 않았던 무리가 오게 된다. 우리는 어떤 부분이 특히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으나 그 부분은 일차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곧 계시역사의 맥락 속에 있었던 사실임을 유념하면서 그 사건을 통하여 지금 우리를 강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감사하며 영광돌려야 한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즉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를 크게 염두에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가령 갈라디아서 3:23, 25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라는 본문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전과 후는 바로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파악하기 힘든다.


성경 기록의 목적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함"(요20:31)에 있는 고로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요17: 3)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성령의 선물로 고백되어진다면 이 본문 말씀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성경 이해의 핵심이다. 이처럼 구속사적 성경 이해란 삼위일체론적인 성경 이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속사는 그분의 영이 우리를 살릴 때―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그분의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우리를 향함을 알도록 한다. 그런고로 갖가지 풍성함을 지닌 구속사는 이 사랑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서 하나님, 삼위 하나님과 교제토록 한다.
이처럼 교제가 없이 진전만을 강조하는 구속사도 그릇되며, 구속사적 맥락을 도외시하는 교제 위주의 성경 이해 또한 잘못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찬양할 때 구속사적 성경 이해는 충분하다.


{교회와 교육(1996. 10.), pp. 4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