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들어가는 말
본고는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 또는 시로-팔레스틴 고고학의 연구에 대한 개요가 목적이다.
따라서 1장에서는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에 대한 개론적인 정리를 하고 2장에서는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권 pp354-367에 실린 William G. Dever의 “Archa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요약하여 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과 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고고학, 성서 고고학
1. 고고학의 역사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3.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따라서 고고학을 단순히 사료 수집을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고고학자는 동시에 역사가이어야 한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462.
고고학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양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주변에는 관련 과학이 매우 많다. 자연과학 계통으로는 자연인류학, 자연지리학, 암석학, 광물학, 야금학, 古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기상학 등이 있으며, 인문과학 계통으로는 문화인류학, 민족학, 종교학, 예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이 있다. 또 자연ㆍ인문 양 과학에 걸친 것으로는 선사학, 선사지리학, 농학, 환경학, 통계학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진 촬영ㆍ실층, 도법(圖法)ㆍ복원(復元)ㆍ복제(複製)ㆍ탁본(拓本)ㆍ보존과학(保存科學) 등의 기술이나 석기제작법ㆍ토기제작법ㆍ금공(金工)ㆍ칠공(漆工)ㆍ방적(紡績)ㆍ도량형(度量衡), 나아가 박물관이나 문화재 보호법 등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다. 즉 고고학은 이러한 학문을 산하에 거느린 하나의 거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p.462-463.
고고학과 성서고고학 개요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된 것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463.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 자동차나 카메라의 형식의 변천을 통해서 연대를 알 수 있듯이,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지만 새로운 형식은 오래된 형식을 기초로 하여 태어난 것이므로 원형으로부터 변형, 파생된 형태를 파악하여 연대를 구분하는 방법.
과 층위학적 방법(stratigraphy). 지층이 교란되어 있지 않은 한, 같은 지점에서는 하층이 오래되었다는 전제에 근거하여 유물이나 유적의 신구를 판정하는 방법.
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는 것과 탄소14법. 생물의 체내에 일정량 함유되어 있는 방사성 탄소가 세월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감소되었는가를 측정하는 방법.
(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글라스질(質)의 유물 속에 자연의 핵분열로 생긴 상처가 세월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증가되었는가를 산출하는 방법.
, 연륜연대법. 수목의 연륜 폭이 해마다 변하는 현상을 응용한 방법.
발열분석법(Thermoluminescence). 그릇들을 분석하여 언제 구워 냈는지 계산해 내는 방법.
,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전자파를 그릇에 발사하여 그 그릇에 있는 광물질에 화학 반응이 어떻게 반사되어 나오는가를 재어 보는 방법.
, 중성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 핵 반응기에 사기그릇을 갖다 대서 사기 그릇의 내용물인 진흙의 화학적 구성물에서 발산되는 전자파의 반응을 분석해서 그 그릇의 내용물을 분석하는 방법.
등이 있다.
2.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聖書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서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2000년기부터 신약성서가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16권, p.579.
성서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서를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서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소련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258-259.
즉 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성서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8.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 산에 있는 여러층의 지층 연구와 각 층에 속하여 있는 그릇들에 대한 연구 방법.
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9.
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서 속의 지명을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16권, p.579.
에드워드 로빈슨은 탐사보다는 지리학이나 지면 탐사에 더 비중을 두었는데, 1838년과 1852년에 성서에 기록된 지명과 현대의 지명이 비슷한 각 지역을 수십 군데 추적해 본 결과 성서 시대의 지명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성공하였다(예: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과 현대의 아나다). 거의 1세기쯤 지난 이후에 넬슨 글루엑이 요단강 건너 황폐한 땅과 네게브(브엘세바 주변의 상당히 건조한 지역)를 탐사하여 비슷한 결과를 거두기도 했다.
가 있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 올브라이트는 이곳을 성서에 나오는 데빌 혹은 기럇-세퍼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에는 반대가 많다고 한다.
을 발굴하였는데(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20.
(도표1.노광우121쪽)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267.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Kenyon)이 여리고와 그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20.
성서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동양학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150-151.
올브라이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팔레스틴의 고고학적 편년을 세운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미르심에서 발굴된 토기를 형식적이고 층위적인 발전 단계로 구분하면서 편년을 세웠다. 편년의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데 유적의 발굴 숫자가 증가되는 것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 등으로 좀 더 정확한 편년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상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정리된 3인의 편년을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도표2.한상인2,252쪽)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못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서의 기록만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 고고학은 미국의 성서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267-268.
그러나 학자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고학의 방법이나 목적은 그것이 성서와 관련이 있건 없건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고고학과 성서” 등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 James I. Packer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성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이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4.
팔레스틴 고고학은 성서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시대와 성서의 주제를 벗어난 다양한 내용을 다룬다. 또한 팔레스틴 고고학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동쪽 부분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서쪽 너머에 있는 이집트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량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화적 변천을 연구한다. 팔레스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 및 조사되었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유적은 28곳에 지나지 않고 발굴된 곳은 20곳이 못되며 발굴 결과가 발표된 곳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에. D. J. Wisemen, “고고학과 구약” 「엑스포지터스 성경연구주석(총론)」 (서울:기독지혜사,1983), p.372.
앞으로 팔레스틴 고고학이 계속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Ⅱ.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도 W.F. Albright, G. Glock, Toombs, Moory 같은 상당수 전문가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⑴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 ⑵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고심(elaboration) ⑶미국 학파의 특색 있는 접근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통용되는 인문과학의 범위(state of art)를 설명함으로써 토론을 새롭게 하려 한다.
field고고학을 구성하는 데에 공감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고학은 단순히 골동품을 추적하고 환상적인 유물을 발견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 경험을 꿰뚫고 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추상적 이론(speculation)이 아니라 고고학을 고고학 그 자체로 보는 기본적 방법으로써의 이론(theory)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 미국인의 지적 지평을 강조하는 변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자체라는 것은 없다.
1. 신 고고학의 성숙기
196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연구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신세계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의 개척된 다양한 이론적 방법론적 교리들은 연구 계획(resaerch design), 현장 답사(field work)와 분석 그리고 중요한 출판에 영향을 주었다.
1-1.복합 학문적(Multidisciplinary) 접근은 우리가 전통적 관점이라고 여겼던 건축학적, 요업(ceramic)적 국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는데 식물과 동물의 유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과거 생활양식의 흔적, 환경학적 변화의 증거, 고고학적 기록에 우연히 주어진 모든 물질문명의 자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 층위학자와 도자기 전문가(물론 성서역사 학자도) 원정발굴대가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많은 분야들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시작된 Gezer에서의 첫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의 충격은 신고고학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15년 전 만해도 고고학 분과는 종종 편협하고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었기 때문이다. 복합전공적 접근이 유발한 새로운 현장 방법들(firld methods)은 종종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그것들의 결과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거품을 일으키는 체(sieve)와 식물과 동물의 흔적을 구별해 내는 (꽃가루 분석 방법인)palynology와 고대 기후와 생활 수단과 음식물과 같은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
1-2.생태학적 지향(An Ecological Orientation) 복합전공적인 교수진(Staffs)을 고용한 것은 필연적으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과거 개인적인 고고학적 현장은 그들의 환경이나 다른 현장과의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왔다(몇몇 블레셋 발굴 현장(유적)은 네브라스카처럼 그들이 파고 발표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자들은 현장 사이(intersite)와 환경적 관계는 관심을 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당연히 가정하는데, 아마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전통적, 역사적(즉 성서적) 지향에서 기인했다. 그래서 문화적 변화를 위한 설명을 물질적 요인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곧 고고학이 주로 인류학적, 생태학적 지향을 차용하면서 어떠한 문화의 독특한 양식도 대체로 경제적인 요인들에 기인하고 이런 문화들의 양식(these)은 자연적 환경에 의해 빡빡하게 조건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란 지리학적 상황, 기후, 자연 자원에 대한 접근성, 무역 통로, 재료(raw, material) 경제적 결정론을 대하는 동시에 1970년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은 유적을, 문화/역사적, 자연적 상황이라고 하는 더 큰 틀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조사와 반론을 진화시키고 필요로 하는 주된 연구 전략은 지역적 스케일에서 수행되어졌다. 경제학적 지리학자에 의해 개발된 유용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정착지 유형 변화와 분배 형태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는 고대 기후와 기술적 적응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과 아직까지 우리 분야에서 수행되는 가장 진지한 인구 통계학 계획들을 재구성하려 한다.
진행되고 발표되어 이제 축적되어 있는 환경적 자료(data)는 한 세대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전망을 열어 주고 여러 기간과 문제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줄 것이다. 다양하게 언급된 지표 조사(surface surveys)처럼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의 모든 발굴 계획은 현장 작업에서 더욱 새로운 생태학적 지향의 예가 될 것이다.
1-3.체계 이론(System Theory) 최근의 사례 분석은 체계 이론이 미국 고고학에서 이제 주도적인 이론적 접근 방법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체계적 모형(paradigm)이 고고학에 응용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에 대해 작용해야 할 것이다.
⑴문화란 자연 환경에 대한 인간의 놀랄 만한 적응 반응이다.
⑵문화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정한 조건으로 특징지어지고, 집단적인 것이며, 유형화되고, 축적되고, 전이되는 것이다.
⑶그래서 문화는 “체계적(systemic)”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문화의 진화(문화-과정 설명이 아니라)가 고고학의 주된 목표이고 ‘정치적 역사’같은 편협한 종류의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면,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접근 방법이 체계적이어야만 한다.현재의 연구 단계에서 우리는 인구 통계학의 역량 성장과 함께 고대 팔레스틴의 정착 유형과 생활 양식 체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복구해 왔다. 몇가지 유용한 증거가 이제 얻어졌지만 아직 사회 조직의 재구성은 시작 단계이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소홀히 취급되어 왔고, 명백히 그것들은 특히 선사 시대의 추측에 대한 가장 만만치 않은 하위 체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발전은 있었고 특히 대중적 제의(cult)를 조명하는데 진전이 있었다.
1960,70년대 미국 신고고학을 특성 짓는 나머지 경향은
⑷민족 고고학(ethnoarchaeology)의 사용 혹은 먼 과거의 고고학적 흔적을 설명하기 위해 아직도 잔존해 있는 원시 문화를 묘사해서 유추하는 것
⑸진화되는 모델에 의존해서 문화적 변화를 설명하려고 다선 궤도, 인간 행위의 독특한 성질, 인간 진화에 대한 강조와 함께 생물학적 진화를 묘사하는 것.
⑹비교 문화 분석과 교차 문화 분석을 통해 식별된 문화적 과정의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과 함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의 모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⑺문화적 과정에서의 보편적 법칙을 테스트하고 정식화하려고 가정된 주된 목표와 함께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아주 과학적이거나 독단적인(nomothetic?) 접근 방법의 선호 등이다.
이들 중 후자의 네 경향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얼마간 영향을 끼쳤지만 처음 세 경향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신세계 고고학’의 신조(원칙)들은 우리 분야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그들의 오랜 역사와 대단히 복잡한 사회계층론과 함께 ANE(Ancient Near East)의 고분에 그들을 적용시키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우직스럽게 차용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발전해 온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같은 경우에다 이론적 틀을 제공해 온 1960년대 미국 신고고학의 주된 경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독립된 전공을 향하여?
우리가 1970년대 초 미국,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의해 무언가 논의하고 제안했던 상당수 경향들은 독립된 학문으로의 위상을 향하던 Albright-Wright시기를 특징 짓는 성서 연구의 지배 아래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성서 고고학 운동의 지배는 신고고학의 도전이라는 형태의 외적 발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신학적 형태 모두의 내적 약화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특히 족장 시대, 정복 시대 같은 성서적 전승의 에피소드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되는 고고학의 목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Albright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하나이며 성서 고고학의 훌륭한 변호사인 D. N. Freedman은 최근 존경받을 만한 공평성으로 인정받았다:
성서를 고고학의 토대에 확고히 정초시키려는 Albright의 원대한 계획과 기대는 실패한 듯이 보이고, 적어도 허덕이는 듯이 보였던 실증할 수 있는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결국 모든 발굴은 행해졌었고, 행해진 것 그리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얼마나 많이 수행되어져 왔나? 성서에 대한 고고학의 관련성에 관한 격심한 토론과 논쟁 그리고 그 역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많은 이슈들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이 족장과 족장 시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회의적인 목소리가 이제 그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올부라이트주의자의 종합(synthesis)이 벗겨졌고 지금까지보다 해결로 좀 더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고고학은 가장 자주 질문되어 왔던 물음을 대답하는 데 아주 유용하거나 결정적인 증명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특별히 초기 시대의 성서적 인물과 성서적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2-1.성서 고고학 운동의 붕괴 회상해보면, 고고학적 ‘혁명’이 Albright와 그의 추종자들이 단지 구체화하지 못함으로써 이리저리 상상되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성서 고고학’의 사망(demise)은 성서 신학의 죽음에 대한 많은 토론과 일치한다는 것은 논의해 볼 만하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 고고학이 좀 더 특징적이고 전문적인 세속 학문 용어인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으로 대치되어 불려져 왔다. 의미론적 혼돈의 결과 혹은 위협적인 아마추어와 성서학자의 감정적인 과민 반응의 많은 부분에 대해 처음으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두 고고학의 투쟁’(Glock의 용어)에서 시리아-팔레스틴이 승리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양상은 어느 곳에서나 명백하다. 성서 고고학의 오래된 옛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꽤 남아 있지만 사실상 미국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러한 고고학을 할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조차도 말이다. 그 분야를 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특징 지워진다. ⑴특수화(specialized) ⑵전문화(professional) ⑶세속화(secular)
2-2.추정되고 있는 전공(과목)으로서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연구 분야는 이것을 포함할 때 전공과목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⑴연구되어진 독특한 현상의 분류와 과업에 적절한 자료. ⑵특정 방법과 표준이 파생되어진 타당한 이론에 부합하는 체계(body). ⑶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가적 학문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 그룹. ⑷직원을 교체할 만큼 충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 ⑸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인수해야 할 필수적인 재정 지원. ⑹단결된 정체성의 장려, 합작 계획의 촉진, 표준의 보증, 전공의 관심을 촉진시키는 전문적인 기구. ⑺결과의 유포와 발표를 위한 적절한 기구. ⑻자의식적으로 연결된 다른 전공들에 잘 훈련되어진 관계, 그리고 ⑼사상의 시장과 연구 기관에 겨룰 수 있는 전공이 되도록 해주는 적절한 대중 지원.
자세한 기록 없이도 현재 발전 단계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겸손함으로 이들 모든 표준을 만날 것이라고 강조된다. 사실상 이들 테스트 중 몇몇은 오래 전 ‘성서 고고학’때부터 있었고 나머지는 전공을 창조하려는 현재 세대의 성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 만나 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신출내기이지만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전공 분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측은하게도 조그맣게 남게 되고, 미래는 결코 세속적이지 않다고 하는 반면에 성서 고고학은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성서학 분과 혹은 특별히 성서 고고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크로스,1973). 다른 학자들은 두 유형의 고고학이 전적으로 전공 학과의 지위를 획득해 왔거나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3.전공 학문 사이의 대화 가능성
최근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근본적인 물음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분리된 전공과목이 되거나 되어야 하는지 혹은 아직도 그것의 부모 전공인 ANE와 성서학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오늘날 고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드러내고 빈곤한 논쟁을 영속화시킬 뿐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몇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가장 단순한 것으로 성서 고고학의 이론과 목적이 성서나 성서의 땅을 단순히 설명하려는 것이다(고고학은 단순히 역사의 보완이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에 숙달됨으로써 인문과학과는 떨어져 있는 단순한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혹은 전문가주의는 전공 학과에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등).
다른 학문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ANE나 성서학에 대한 배타적 의존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것의 내적 역동성에 따라 일반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늘날 모든 고고학의 학문 상호간의 관련이라는 특성을 강조해 왔다. 물론 이 대화의 파트너로 아직 ANE와 성서학이라는 부모 학문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과학의 많은 분야도 역시 포함한다(특히 인류학과 점증적으로 자연과학 분야도).
그 의도는 학문을 편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넓히려는 것이다; 성서학과의 대화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려하려는 것이다. 새롭고 건실한 기초에서 고고학과 함께 이것은 이제 동등한 파트너가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격차가 허용되는 특수화의 정도와 신선한 관점과 함께 독립선언이 과거 10여년간 고고학에서 일어난 반면 새로운 대화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다른 학문이 발전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적절하다. 즉 어떻게 그들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재형성하고 연결된 다른 학문과 새로운 제휴 형태를 재형성했는지 관찰하는 것. 여기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고전적 작품은 가장 교훈적이다. 쿤은 시대별로 혁명이 내적, 외적 변화에 기인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지향이 뒤집어진 결과로서 전공 학문에서 유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실용적인 관심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다. 규범 과학의 시기 이후 소장 전문가들의 주류가 과학을 수행하는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는 동안 성립되어 있는 관점이 도전 받는 과정으로 경쟁하는 범주, 패러다임 사이에서 투쟁이 연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코 전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주류의 공감대가 추구될 때 규범 과학의 새로운 단계는 머지않아 성취되어져 왔다고 이야기되어지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반복되어질 것이다.
쿤의 유추(analogy)에 대하여 우리는 1970-1985년 시기에 증언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서의 참된 혁명을 논할 수 있다. 더군다나 포괄적인 지적 기반 작업(즉 이론)의 정초는 아니다. 아직 뛰어난 결과를 가져 올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들이 아직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세대의 투쟁에 의해서 뒤따르는 쿤의 ‘패러다임의 이동’이란 것이 일어났다. 이 발전은 1950년대-1960년대의 층위학(stratigraphic)의 혁명에 뒤이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4번째 혁명’을 구성한다고 다른 곳에서 논쟁되었다(데버 1988).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연구 과정으로 산출된 새로운 자료로 논쟁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길 원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규범 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혁명 이후’고고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위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이슈들은 종종 이런 양식으로 제기되어졌다. 아직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ANE, 성서 역사나 인류학의 한 분과로 남아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오늘날 고고학의 어떠한 학문의 분과도 아니다. 고고학은 어떤 학문의 보조 과목이 아니라 전공 학문 그 자체이다. 제시된 2개의 학문 중 선택하라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최근, 인류학 쪽에 좀 더 밀접해져 왔다. 이것은 많은 이로움 때문에 관련되어진 것이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성취한 가장 인상적이고 유익한 것은 오늘날의 그 학문이 근동 혹은 중동에서 종교학, 역사, 고전, 인류학 분야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북미 고고학의 몇몇 학과에서도 후자의 발전(nonareal(비지역)의 확립 모두를 포함하는 고고학, 독립적인 인류학, 근동학 혹은 고전적인 학과)은 고고학이 오늘날 생존에 적합한 학문적인 전공 과목이 되었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아직도 많은 지엽적 문제(context) 때문에 즉 부차적 문제 때문에 ANE와 성서학을 끌어들이지만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점점 더 분석 과정을 위해 자연과학을 추구하고 그것의 이론적 지향을 위해 인류학과 다른 사회과학을 추구한다. 역사, 인류학 혹은 과학이라는 꼬리표로 고고학을 한정시키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고고학의 여러 국면의 다양성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은(인류학처럼) 많은 다른 학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공헌도 한다.
3. 미래의 모습(shape)
우리는 이미 비유를 사용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그의 시대가 도래한 위엄 있는 부모의 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젊은 성인의(adult) 미래는 어떨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전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먼저 외적 환경, 즉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자.
3-1.외국 현장 작업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서, 원래 연구와 혁신된 가르침에 공헌하는)중동에서 가능한 틀(framework)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과거 중동의 모든 고고학 발전을 선도해 왔다면 오늘날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많은 나라로부터 배척까지 받고 있다. 단지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에서만 미국인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할 뿐이다. 그러나 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의 역할은 그 분야를 주도하려는 그 국가들의 학자들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학자들은 강력한 우선권(발굴현장의 지속적인 접근과 선택, 국가적 규모의 작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자유, 정부 부처, 대학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의 장기적인 지원, 다양한 연구 장려책, 거의 발표되지 않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종교 고고학을 통해 국가 의식과 정체성을 초래하는 점점 계몽되는 대중들, 수백의 안전하고 전문적인 지위 등)을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의 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가장 훌륭한 외국의 방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것을 더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며 부족한 기금과 인력은 외국(특히 미국)과의 합작 사업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이 발전 지역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조건(급격한 현대화와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 폭력적인 반미 감정과 함께 종교적 열광주의와 함께 결합된 이 지역의 국가주의와 극단주의의 태동)이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 더 불길한 것은 고고학의 몇 가지 극단적인 요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이다. 일부 아랍에서의 이슬람 형제애와 이스라엘의 초정통주의는 현장에서 고고학자를 애먹이고 기념물을 파괴하고 발굴을 금지하도록 공작한다.
미래에 미국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권이 우리로부터 토착의 국가주의 학자들에게로 넘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미국 고고학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비이익적 학자’로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다. 둘째,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우리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 국가의 학자들의 노력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보완적인 연구를 발전시켜야 한다(특별히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히 대하는 유적, 시기, 문제에). 셋째, 비문자적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보여지는 협력과 연합 계획에 좀 더 참여하는 것이다.
3-2.고국에서의 학문(The Discipline at Home)
a.몇 가지 실제적인 고려들
우리가 과거 20년 혹은 풋내기 학문으로서 그것을 확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성서적 고고학이 미국에서 누려 왔던 상당한 대중적 지원을 유지하고 획득하려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위상으로 마지막 변형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 현장 작업의 전업(full-time)전문가들의 연구와 가르침을 위한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타임 직업을 고용(유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둘째, 우리 연구의 기본 형태인 현장 작업과 출판을 위한 기금을 필요로 한다. 셋째, 더 긴급한 것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참된 학문적인 과목이 되기를 열망하느냐의 여부이다. 넷째,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필요, 학습된 단체들의 강화와 전문적인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1900년 이래로 성서학의 많은 측면과 함께 고대 근동 언어학,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봉사해 온 동양연구미국연구소(ASOR)가 이제 아주 중대한 다른 영역에서, 즉 더 넓은 차원에서 고고학의 장려와 미국 대중교육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미국만이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과 지원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새롭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연구 기관으로 사상의 혼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주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모토는 ‘수도원 밖으로, 학문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시장에서조차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b.이론적 고려들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항상 이론과 방법의 중요성을 각성하는데 불충분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엔 미국 고고학자들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헌과 비교되어, 놀랍게도 우리 분야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도서 목록이 실제로 없으며 지금도 비평적 토론도 거의 없다.
연구를 위해 선택되어진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조사 양식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방법이 이론이다’라는 사실이 분명히 간과되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고발은 이론적 틀이 부족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정들(⑴고고학이 아니라 성서 역사와 신학에서 이슈를 끌어낸다. ⑵거의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비평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닌 가정)이다.
우리는 해석적인 이슈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거의 모든 발견에 대한 해석이 많은 지성들 사이에서 이들 과목을 특징지어 온 생생하고 격렬한 논쟁으로 끝없이 논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가장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대체로 학문이 참된 고고학적 인식론을 개발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즉 기본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역사적 고고학’조차도 이 접근 방법엔 불충분했다.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어졌고 결론은 끄집어내어지고 논쟁되었다. 또 해석은 발전했다(역사를 언급하는 모든 기초에 대해). 그러나 역사라는 것과 현대 사료 편찬 방법은 거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인 고고학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가 의미하는 것을 거의 명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고학은 최소한의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적절한 고고학적 인식론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들 같이 명백한 질문들에 직면할 것이다(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유적 형성 과정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상황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가? 고고학적 자료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유비(analogy)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특한 고고학적 논리는 있는가? 우리는 문화 유물로부터의 반응(behavior)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나? 무엇이 문화와 문화 변화를 결정하는가? 등). 인식론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자료의 질을 결정한다. 유물들은, 그것들이 상황(context)속에서 적절히 발굴되어지고 적절한 질문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질 때, 그리고 출판되어질 때에야 자료(data)가 될 수 있다. 고고학은 엄격하게 조직적이고 축적된 이론을 세우고,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인간적이거나 과학적인 학습의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우수한 이스라엘 역사가와 고고학자 베냐민 마자르에 의해 쓰려진 팔레스틴의 중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초기 논문은 이제 아주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역사로 구분되었던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지향점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본질적인 것으로 연구하는 것, 즉 정주 형태, 기술, 사회, 경제적 역사와 인구 통계학에 관련된 언급은 없다. 미학적이고 종교적인 것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문화라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Kenyon에 의해 쓰여진 유명한 CAH에서도 중기 청동기 시대 연구는 강조점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 Kenyon과 Mazar는, 이들 이슈가 196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잘못된 질문을 물어 왔기 때문에 혹은 아주 유용한 자료의 전체 범위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부적절한 질문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에 그 자료는 쓸모가 없다.
wheeler-kenyon의 층위학 방법은 정확한 위치를 분리할 만큼 경험적으로 지표층(soil layers)의 관찰, 기록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팔레스틴의 평범한 도자기는 도자기 연대를 꽤 정확하게 집어내도록 하는 도자기의 유형화 된 발전 단계를 챠트화 할만큼 거의 분석되고(장식과 모양이) 분류되어졌다. 그러나 극히 작은 예를 제외하고서는 도자기는 우리의 역사, 기술, 미학, 국제 관계, 무역, 즉 문화와 문화 변화에 대한 지식에 공헌한다는 관점으로 연구되진 않았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문화 변화 자체의 모델들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도자기 집합’이란 말과 항상 마찬가지 의미이다. 주요 민족운동과 외국 침입은(즉 역사적 사건) 고대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용되어졌다. 토착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들, 기술적 혁신, 혹은 다른 의미로 일반적인 지역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층위학과 도자기 연대측정학의 숙달에 의해서 혹은 완벽한 현장 기술에 의해서는 그리 많이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식론이 좀 더 정교해짐으로써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 ‘정치적 역사’의 대체 모델은 거대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밑으로 거대한 우연적인 대중적 사건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휘두름을 넘어, 셀 수 없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역사를 쓰는 아날(annales)학파로부터 유래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고고학은 아날학파의 역사가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광범위 한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잘 가공된 개인적인 역사로 써서도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생태학적이고 환경(setting)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 변화에 대한 민감함 때문에 모든 학문 사이에서 독특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초점의 범위를 우리가 넓히는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고고학 일반 분야와 인류학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통합시키는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중추적인 지정학적 상황, 위대한 문명 발상지, 급격히 성장하는 데이터 베이스와 함께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그 지역에 훨씬 강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연구의 오랜 역사, 성서의 땅으로서 엄청난 대중적 호소력(appeal) 등의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류학자와 사회역사학자들은 사례 연구로서,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리아와 비교하는 사례 연구로서만 전형적으로 팔레스틴을 무시하는 교차-문화적 비교를 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소홀한 부분은 단순히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서적 경향을 지닌 세속주의자가 원인이다. 그 부분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 자료의 질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최근의 더 나은 작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과거의 불충분한 발굴에 기인한다. 그들은 주요 잡지를 읽거나 출판하지 않았고 전문가 모임이나, 다른 고고학적 인류학적 조직의 연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근동 선사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신세계와 유럽 고고학이 수행해 왔던 대학 인류학과의 프로그램을 가르치거나 나누지도 않았다.
세계 고고학의 최근-현재의 이슈는 다음과 같다. ⑴복합적인 사회의 흥망성쇠 ⑵문화적 변화의 재구성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균형 ⑶고고학/인류학의 사회학적 역사 ⑷공간-시간 체계론, 인공물의 다양성, 문화적 유형, 행위의 구체적인 상호 관련 ⑸유적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기록의 성질 ⑹민족성에 있어서 고고학적 정체성. 덧붙이자면 신고고학의 몇 가지 이론적 공격은, 정착 유형, 생활 양식, 사회 구조, 인구 성장 같은 특정 질문들을 반성하게 한다. 시리아-팔레스틴의 냉정한(공평한) 조사 방법이나 일반적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문학에서의 비교 인용 분석은 우리가 이를 핵심 이슈의 토론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소장 고고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만드는 과업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지향점을 발생시킬 것이다.
3-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해야 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4. 2장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나오는 말
1장에서는 일반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의 태동 과정을, 2장에서는 Dever의 논문 요약을 통해 고고학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를 하였다.
고고학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장의 바른 보전과 각종 기술이 발달해야 하고, 또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서 고고학에 대한 일반학자들의 오해와 편견에 따라 기독교의 지원이나 참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고고학의 가치와 제한성이다.
고고학이 우리에게 과거 성서 시대의 사안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성서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고대이스라엘의 문자
모세시대에도 문자가 있었을까?’
철기 이스라엘 문서증거 넓게 분포
북부 셈어 알파펫… 서구문자 선조
오늘날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경은 주전 2세기의 사해사본으로 최초로 성경을 기록한 모세로부터 천 수백년이나 지난 것이다. 그래서 모세 시대에는 기록할 문자나 있었겠냐는 의심스러운 반응도 나타났지만, 그 당시에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는 오랜 문학적 발전을 겪어왔고 가나안 땅에서도 북서 셈어로 기록된 여러 가지 문서 증거가 나타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문서기록 능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0세기에 문자가 상당히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9세기경에는 더 분명하게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어떠했는지 고찰해보도록 한다.
1. 레반트의 문자
페트리(F. Petrie)는 1927년부터 시나이 반도의 고대 터키옥 광산 근처에서 여러개의 비문을 발견하였다. 그 비문들로부터 알파벳의 고대형태들이 찾아졌으며, 그 연대는 주전 2000년기 초반에 속한다. 그러한 문자를 사용한 주체는 레반트의 셈족이며 구체적으로 힉소스족으로 주장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이제까지 레반트 남쪽에서 발견된 가나안 문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가장 오래된 부류는 주전 18∼17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게셀 토기편과 세겜 돌판, 라기스 단검 등이며, 다음으로 주전 15∼14세기에 속하는 라기스 인장, 라기스 사발, 텔 엘 헤시의 토기편 등이며, 세 번째 부류는 주전 13세기에 속하는 라기스 토기편과 므깃도 금팔찌 등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모세시대에 가나안에는 서로 다른 문자체계와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한 증거를 비교적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한편 레반트의 다른 지역에서는 북부 셈어 문자와 우가리트 문자, 페니키아 문자, 아람문자 등 유사한 언어들이 발전되고 있었다. 북부 셈어 문자는 주전 14세기에 속하는 압도(Abdo)의 토기편으로부터 나타나며, 모두 22개의 알파벳 자음이 있었다. 그 변화된 형태가 페니키아 문자로 기원전 1100∼1000년경 그리스로 전해져 모든 서구 문자들의 선조가 되었다. 우가리트 문자는 북부 셈어의 22개 알파벳을 포함하여 약 30개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우가리트를 비롯하여 벧세메스와 다볼 산에서 그러한 문자형태가 발견되었다.
2. 고대 히브리 문자
예레미야에 보면 서기 바룩이 두루마리에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기록하는 내용이 나온다(렘 36장). 그 두루마리는 아마도 파피루스였을 것이지만, 파피루스는 팔레스타인의 습기를 견디지 못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이스라엘의 기록물들은 거의 돌이나 토기편에 쓰인 것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사사시대에 속하는 유물로 기원전 12세기의 텔 에스 싸렘의 토기편과 아바 명문 등이 있다. 기원전 11세기에는 성경에서 에벤에셀로 나타나는 이즈벳 사르타의 토기편으로 초기 히브리어 형태를 보여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하여 사사기 8장 14절에 나오는 한 소년이 숙곳 방백과 장로 77인을 기록하였다는 내용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자 보급률에 대한 추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속하는 왕실 문서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고대세계에서 예외적인 것은 아니므로 그 당시의 문자보급률에 대해 평가절하 할만한 절대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특히 주전 10세기에 속하는 게셀력은 한해의 농사 계획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 알파벳을 연습한 석회석판이어서 문자의 학습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밖에 인장을 비롯한 네 개의 명문들이 넓은 분포를 보이며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문자사용의 보편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전 9세기로 가면 아라드와 쿤틸렛 아주르드에서 출토한 15개의 명문을 비롯하여 18개의 명문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적은 유다 남쪽의 사막지대여서 유물 보존상태가 양호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 다른 인구 밀집지역에서는 더 많은 문자사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그에 대한 간접적 증거가 모압왕 메사의 비문이다). 또한 1993년 텔 단에서 발견된 석비는 기원전 9세기 중반에 속하는데, “다윗의 집”이란 구절이 새겨 있어서 성경 이외 최초로 다윗을 언급한 비문으로 의의가 크다.
주전 8세기가 되면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 217점의 히브리어 명문이 발견된다. 사마리아에서 가장 많은 93점이, 아라드에서 47점이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베카 계곡으로부터 네게브까지 모두 24개의 유적에서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이스라엘 전역에 상당한 문자 보급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전 7세기에는 167점의 히브리어 명문이 24개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 광범위한 유적의 분포를 보여주며, 작은 도시들에서도 몇 개씩 명문이 출토되고 있다. 주전 6세기 초반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십여 년 동안에는 아라드와 라기스에서 각각 수십점의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다. 특히 아론의 삼중 축도(민 6:24∼27)를 기록한 두개의 은제 호신부가 케테프 힌놈에서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시대 동안 47개 유적에서 485점의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 숫자에는 인장과 인장을 찍은 불라, 추 등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국시대인 철기시대 동안 첫째, 문자 사용능력은 이스라엘에서 철기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존속했음을 나타낸다. 둘째로, 읽고 쓰는 사람들을 특정한 계층과 장소에 한정되지 않았다. 문서가 발견된 곳은 도시의 규모에 좌우되지 않으며, 100여 개의 비문의 저자들도 특정 집단을 반영하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널리 분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답변할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유물과 비문의 넓은 분포로 볼 때 철기시대 이스라엘에서 문자사용능력에 대하여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충분한 수준을 갖추고 있던 시기가 없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사회구조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다양한 계층과 직업 분포
이스라엘 사회는 기원전 1천년을 전후하여 정치적으로는 지파공동체에서 왕정으로, 물질문화적으로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본격적 철기사용시대(철기Ⅱ기)로,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 단일 민족에서 가나안 민족 등 다양한 민족을 흡수하는 다민족 국가 체제로 전환된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철기Ⅱ기인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대하고 정형적인 건축시설이 나타나고, 다양한 유물들의 출현을 통해 국가적 번영과 쇠퇴, 그리고 외국과의 교역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고고학 자료는 단순히 물질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적 측면을 반영하며, 특히 사회구조적 변화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 도시화와 중앙통제사회 ◆ 매장 관습에 나타나는 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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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가정생활
이스라엘의 차별화 된 사회제도, 선민의식에서 유래
가장과 장자의 높은 지위 타민족과 공동요소
동족선호·근친혼 금지 등 독특한 결혼풍습
고대 근동 세계 속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는 다른 나라들과 많은 유사성과 독특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독특성은 민족의식에서 비롯되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성의 자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다른 고대근동 민족들의 가정생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가정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아내와 그 자녀에 대해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가장이 죽으면 그 권한은 장남에게로 승계되지만 그가 너무 어릴 때는 어머니가 권리를 가졌다. 후대로 가면 모든 형제들이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지만 장남은 일부를 좀 더 받았는데, 앗시리아와 누지에서 장남은 2배의 상속을 받았다. 수메르와 누지에서는 아들이 없을 경우 딸들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는 씨족 같은 확대된 친족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었다. 핵가족적 사회제도의 중요성은 범죄자의 가족을 노동수용소로 보낸다든지 도망간 범죄자를 잡기 위해 인질로 가족을 구금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히타이트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에게 행사되었지만, 과부는 아들들이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상속권을 박탈하거나 회복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페르시아 가정에서도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원칙적으로 아버지는 그의 자녀와 그 집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전적인 힘을 가졌다. 페르시아 가족들 간의 결속력은 대단해서 고위 관직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되었다. 반면에 왕에 대한 반역은 전 가족이 형벌을 받았다.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 그 자신과 전 가족이 처형당했다(에 7:10 ; 9:14).
한편 이스라엘에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어나갔으며, 아내는 남편 다음의 높은 위치를 가졌다. 여종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비천한 노동을 하거나 대리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녀들을 보면 장자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결혼하지 않은 어린 동생들은 형들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였다(삼상 17:17∼18). 딸들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양육되었으며 들판에서와 가정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2. 결혼과 이혼
메소포타미아에서 대부분의 결혼은 일부일처제이지만, 남자상속의 중요성 때문에 다른 아내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첫째 부인의 우월한 위치는 지속되며 때때로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권한을 가졌다. 앗시리아에서는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지만 그 부인은 첩으로서 두 번째 지위를 가지며, 만일 자녀가 태어나도 첫 번째 부인에게 아들이 있으면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비록 여자들이 상속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결혼할 때 가족으로부터 상당한 선물이나 지참금을 받았다. 그 지참금은 보통 동산으로 가구나 그릇, 옷, 노예(부유한 경우) 등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집이나 밭을 받기도 했다. 여자의 재산은 흔히 결혼할 때 받게 되며 남편이 관리하고 증식할 수 있지만, 이혼할 경우에는 돌려주어야 했다. 이혼은 남편측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임의로 할 수 있었으나 아내의 모든 재산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 이외의 돈을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
여자측에서의 이혼 주장은 드물기는 하지만 최선의 상황에서는 지참금을 받고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고바벨론의 결혼 계약에서는 죽음의 조건으로 아내의 이혼을 금지하였다. 남편에 의해 버림받거나 전쟁 등으로 남편이 생사불명인 경우는 재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로 남편이 돌아오면 본 남편에게 돌아가야 했으며, 새 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녀는 새 남편에게 속하였다.
이집트의 결혼예식에 관한 고대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혼식은 제사장이나 관리가 연관되어 있지 않는 세속적이고 개인적 제도이지만 경제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는 중요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모두 결혼지참금을 가져왔으며, 후기시대 이후부터는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의무와 이혼시의 재산분배 등에 관한 계약문서가 나타난다. 결혼대상에 있어서 오직 왕만이 때때로 그의 동복자매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으며, 이복자매와 결혼하는 것은 평민들도 가능하였다. 일부다처제는 대부분 왕에게 시행되었으며, 평민에게는 극히 드물었지만 첩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남성중심이었지만, 여자들도 상당한 법적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땅과 집 같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그것을 물려줄 수도 있었으며,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히타이트 가정에서 특별히 후사를 위해 아내가 여자 노예를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첩을 얻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혼은 한편의 요구가 있으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도록 구체화되어 있다. 비록 히타이트에서 여성들의 일반적인 활동영역은 가정이었으며 그 개인적 권한은 남편의 권세에 의존하였을지라도, 왕의 누이들과 딸들은 이웃 왕국에 시집가서 왕후의 권세를 누렸으며 부자의 아내는 많은 종들을 관할하고 의식주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여가를 즐겼다. 그러나 가난한 여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손일을 했으며, 어떤 여자들은 마술사나 정신적 치료사, 가정 상담인, 조산원, 신전의 여자 성직자와 가수 등으로 활약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결혼은 가족간의 중요한 거래의 하나로써 보통 가장들에 의해 성사되었다. 흠없는 신부를 보내는 가정은 신부값으로 보상을 받았으며, 그 값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출 22:16∼17 ; 신 22:18∼19).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적으로 동족간의 결혼을 선호했지만, 일정한 범위 내의 근친결혼은 금지하였다(레 18, 20장).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혼할 권리나 재산 상속권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 다양한 종교영역 나타내
크노소스 주거유적 인신제사 흔적 발견
크레타에서 유래한 블레셋, 팔레스타인 명칭 유래
그리스의 고대문명은 기원전 3000∼2000년에 속하는 초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시작되며, 중기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1550년의 미노아 문명으로 대표된다. 미노아 문명은 영국 고고학자 에반스가 1900년 크노소스를 발굴함으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미노아 사회에는 종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지만 그 상세한 모습은 알기 어렵다. 상당히 넓은 종교적 영역에서 다양한 여신들과 뱀, 황소 등이 숭배되었다. 근년에 발굴된 크노소스의 주거유적에서 아이들의 뼈들이 출토되어 인신제사가 드려졌음을 알 수 있으며, 한 사원에서는 제단에 묶여있던 한 젊은이를 발굴하였다.
1. 미케네 문명
미케네 문명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100년)에 속하며, 1876년 쉴리이만에 의해 발굴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이전 문명에서 직접 발전된 형태로 인정되고 있으며, 외면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미노아 문명보다 훨씬 덜 공교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5세기 이래로 동지중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크레타 지역을 흡수하였다. 미케네식 토기는 서쪽으로 이탈리아까지, 동쪽으로 이스라엘, 남쪽으로 이집트까지 확산되고 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미케네의 통치자들은 거대한 돌로스(Tholos)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이 무덤들은 언덕에 축조된 벌집 형태의 둥근 천장과 긴 연도를 가지고 있다. 14세기에 미케네인들은 청동과 상아, 그리고 금과 은을 공교히 다루는 기술을 획득하였다. 보다 후기에 들어서면 미케네인들은 다듬지 않은 석회석으로 거대한 성벽을 축조하였다. 기원전 13세기에는 그러한 도시들이 더욱 요새화 되었으며, 북쪽 지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린도 지협을 건너 방어벽이 건설되었다. 그때가 바다민족들
(Sea Peoples)이 활동하던 시기로 기원전 1200년경에는 강력한 요새가 없던 필로스 궁전이 공격을 받았다. 파괴된 궁전에서 발견된 토판문서에 의하면 서둘러 방어 준비를 하면서 심지어 인신제사까지 드렸지만 궁전은 함락되었다. 바다민족은 에게해 지역에 살던 여러 종족들이며, 그 가운데 하나인 블레셋 족속이 가나안의 해안 지역에 정착하였다. 성경에서는 블레셋이 갑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암 9:7), 갑돌은 오늘날의 크레타 섬을 말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 그림이 있는 블레셋 도기를 사용했으며, 기둥머리로 번역되거나(암 9:1) 꽃받침으로 번역되는(출 25:31) 갑돌로 볼 때 블레셋이 크레타에서 유래되었음을 말해준다. 블레셋은 철기 문명을 소유하고 있어서 사사시대와 사울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심각할 정도로 위협하였다. 다윗시대에 블레셋이 정복되어 그 후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 블레셋에서 팔레스타인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다.
2. 암흑시대
미케네 문명의 소멸은 인구증가와 자원고갈에 따른 내전 및 해외무역의 바다민족으로 인한 차단과 그들의 침략에 기인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북쪽에서 온 도리안족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입증되지는 않는다. 기원전 1100∼700년 동안의 시대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생활이 극도로 침체되었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미케네 지역의 통일성은 와해되었고 인구는 격감되고 생활은 옛날로 돌아갔다. 금속 자원의 부족으로 철기의 질적 저하와 사용량의 부족이 초래되었고 심지어 무기에 있어서도 철기가 청동기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10세기말에 동쪽으로부터 교역이 재개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850년 이후로는 페니키아와 확실한 교역의 증거가 나타난다. 페니키아는 오론테스강 입구에 있던 알-미나 항구를 통하여 사치품과 직물, 상아장식, 새긴 금속 장식, 철광석, 금속 등을 수출했고, 그리스에서는 노예나 농산물을 주었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의 특징은 선형문자로 문장이 기록된 것인데, 시인 호머(Homer)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그 무렵 기록되었을 것이다. 폴리스의 출현은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인데 폴리스가 발전해가는 동안 도시에 대한 지역적 충성심과 정체감이 증대해 갔고 종교 중심지의 사용도 매우 증가하였다. 올림픽경기는 올림피아가 범그리스적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부각된 것으로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
3. 동방화 시대
암흑시대에 이어지는 동방화시대는 동방의 세계와 빈번한 접촉을 하는 시대였다(700∼600 BC). 전통적인 사회와 국가의 구조가 변화되고 군사적인 개혁이 일어났으며, 특히 지중해 동부 지역과의 접촉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올림피아에서 다수 발견되는 큰솥은 동물머리가 부착된 것으로 앗시리아에서 유래된 것이며, 올림픽 우승자는 관습적으로 이 큰솥을 신전에 헌정하였다. 보석류, 시리아와 이집트식 인장들, 홍해산 패각, 페니키아 은사발, 그리스 보병의 방패와 헬멧의 말갈기 장식, 대부분 소멸되어버린 직물류 등도 동쪽에서 온 것이다. 그밖에 사자와 암염소와 뱀의 모습이 기괴하게 결합된 짐승인 키메라는 히타이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되었다. 페니키아는 금속기술을 비롯하여 문자를 전해주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보완 개발하여 완전한 알파벳 체계를 만들었다.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 제의도 페니키아의 비블로스에서 성행하던 곡물신의 생성소멸을 다룬 제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 동방의 영향이 그리스 문화 전반에 중대하게 미치고 있다. 그 후 그리스는 고대기(600∼480 BC)로 접어든다.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아나톨리아
앗수르 견제하며 이스라엘 번영에 기여하기도
우라르트, 주전 9세기 왕정전환 후 최고로 번성
브루기아 지역,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약까지 생활
리디아, 사데를 도읍으로 활발하게 상업활동 전개
오늘날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Anatolia)란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아나톨리아는 라틴어의 오리엔트나 이탈리아어의 레반트처럼 모두 동방을 뜻한다. 아나톨리아에는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 우라르투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번영하고 쇠퇴하였다.
◆ 우라르투
아나톨리아 동쪽 산지를 우라르투(Urartu)라고 부른다. 우라르투는 터키의 반호, 이란의 우르미아호와 세반호를 포함하는 영역을 가졌으며 투슈파를 수도로 하였다. 우라르투의 역사는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 단계는 앗수르의 침공에 산발적으로 대항하던 연약한 시대(B.C. 1275-840)이며, 두 번째 단계는 강성한 힘을 가졌던 전성기(B.C. 840-612)이다. 우라르투는 주전 7세기 말 아르메니아의 침략으로 멸망당했다. 아르메니아의 전설에 의하면 우라르투의 건축물은 대다수 기독교의 성모자상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앗수르투 섭정여왕 세미라미스의 업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다스리던 시기에 우라르투는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여 주전 9세기 무렵 지파체제에서 왕정체제로 전환했으며 8세기 중반에 최고로 번성하였다.
번영기의 우라르트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강대국 앗수르를 견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번영에 기여하였다. 주전 9세기 말 이스라엘 왕국은 아람의 빈번한 공격을 받고 몹시 괴로워했는데,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의 서방원정으로 인해 아람은 파괴를 당하고 게다가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앗수르는 우라르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곧 철수함으로써 앗수르의 공격을 피한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강해져서 아람을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엘리사의 예언대로 쇠약해진 아람을 쳐서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왕하 13:14-19). 앗수르의 쐐기문자로 기록된 문헌으로 볼 때 우라르투의 언어는 후리족 언어와 유사하며 문화적으로도 후리족과 가깝지만 그 보다는 앗수르의 영향을 더 받았다. 그들은 금속공업과 상아공예, 보석산업, 무기산업으로 유명하였으며, 그들의 국가신은 할디(Haldi)였다.
◆ 브루기아
브루기아(Phrygia) 사람들은 할리스 강 주변에 살았으며, 주전 11세기 경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본래 트라키아 계통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주전 2000년기 말에 아나톨리아의 북서부에 정착했다. 이들은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르디움에 수도를 세우고 주전 7세기에 리디아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소아시아를 지배하였다.
브루기아는 주전 12-9세기에 앗수르 기록에 무슈키라고 부르는 서부 연합세력을 구축했으나 주전 730년에 앗수르에 동부 지역을 상실하고 권력의 중심을 전설적인 왕 미다스가 다스리는 서부 본토로 옮겼다. 미다스왕은 그리스 신화에서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했다는 전설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미다스 왕국은 주전 700년경에 키메리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지배권이 리디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부르기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신약시대까지 살고 있었다(행 2:10).
브루기아 사람들은 금속 목각 세공이 뛰어났고 자수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들의 종교는 키벨레 숭배가 지배적이었는데, 키벨레는 자연생성력의 신이며 신들의 어머니인데, 가끔 제우스가 낳은 남녀혼성의 아그디스티스와 동일시된다. 키벨레 종교는 주전 3세기 말에 로마에 들어왔으나 기원 후 몇 세기가 되면 제사장들의 거세의식과 황소의 피로 종교 입문자를 적시는 아티스 종교축제로 진행되었다. 원추형의 머리 장식인 브루기아 모자는 그리스와 로마의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된 상징으로 착용하였다.
◆ 리디아
주전 7세기 아나톨리아에는 브루기아에 이어 리디아(Lydia) 왕국이 세워졌다. 메름나드 왕조를 연 기게스는 리디아왕국의 수도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사데로 정했으며, 맨 처음 화폐주조를 시작했다. 리디아는 알리야테스왕 때 전성기를 누렸으며, 메디아와 키메리아의 위협을 물리치고 주전 6세기 초 서머나를 정복했다. 가장 유명한 리디아의 왕인 크뢰수스는 팍톨루스 강에서 채취한 막대한 양의 사금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사야서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사 44:28; 45:1)를 공격하기도 했다. 주전 54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리디아를 멸망시키고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켰으며 사데는 그 수도가 되었다.
사데의 수호여신은 아데미와 키벨레였다. 키벨레는 앞에서 말한 브루기아의 여신이며, 아데미는 제우스의 딸이고 아폴로의 쌍둥이 남매로 로마에서는 디아나로 불린다. 아데미는 본래 자연생성력을 관할하는 신으로 키벨레와 유사하게 여겨지며, 그리스에서는 올림푸스 12신의 하나로 달과 사냥의 신이며 가정생활의 관리의 신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아데미를 숭상하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행 19:23-41), 그 신전은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있어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한편 리디아인들은 최초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으며 소매상점을 처음 만들 만큼 상업수단이 뛰어났다.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멸망한 이후 아나톨리아는 페르시아제국 영토가 되었으며,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로 헬라국인 셀류쿠스 왕조가 다스리다가 이어 로마제국이 통치하였다.
왕국시대 여신
농경시대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국시대 동안 계속 갈등하고 유혹받던 가나안 종교는 다산과 풍부한 수확을 기대하게 해주는 다산종교(fertility religion)였다. 가나안 종교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바알과 그의 배우자들이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난다. 바알은 가나안 종교의 중요한 신으로 구름을 타는 자이며 폭풍과 번개를 일으키는 자로 농경에 필수적인 비를 공급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에게는 여러 명칭의 여신들이 파트너로 등장하고 있는데, 바알과 같이 언급되는 풍요의 여신들은 다음과 같다. 1. 아세라 2. 아낫 3. 아스다롯
듀라-유로포스 교회, 현존 유일의 가정교회
기독교인들의 삶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성도의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란 모이기를 힘쓰는데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분명하다(골 4:15). 물론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행 16:13) 공회당이나 시장, 임대한 장소(행 20:8)에서 모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인 집에서 소규모로 모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임장소로서 콘스탄틴 이전 시대에 고의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에 대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기독교인들의 모임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가정집을 개조한 경우는 있다. 그러한 건물들은 가정교회(domus ecclesiae)라고 하며 교회가 성장하면서 급속도로 그 수가 증가하였겠지만, 그러한 가정교회가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콘스탄틴 이전의 가정 교회로 확실하게 간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저택이 듀라-유로포스(Dura-Europos) 교회이다. 그 이외에 미심쩍기는 하지만 가버나움의 베드로교회, 아킬레이아의 교회, 로마의 티툴루스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주후 256년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시리아의 듀라-유로포스 도시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의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도시를 지키던 로마의 수비대는 성벽을 강화함으로써 도시가 점령되는 것을 막았다. 그 때 로마 군인들은 성벽에 인접한 도로와 가옥들을 진흙으로 채워 넣어서 성벽을 두껍게 했으며, 방어 물자를 옮길 수 있도록 매몰시킨 건물들을 깎아서 편평하게 만들었다. 1928년 프랑스와 미국의 연합발굴단에 의해 듀라-유로포스의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1930∼1931년의 발굴시즌에 기독교 건물이 발견되었다는 첫 보고가 있었다. 그 건물에서 침례 시설이 발견됨으로써 듀라-유로포스의 가정교회는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으로 콘스탄틴 이전의 유일한 교회건물이 되었다. 그 건물은 3단계를 거쳐 변화되었는데, 처음의 평범한 주거시설에서, 다음에 비교적 큰 가정집으로, 끝으로 가정교회의 건물로 사용되다가 매몰되었다. 가정집으로 사용될 때 18x18m의 정사각형 크기에 5.2m의 높이를 가진 건물로 8개의 방과 건물의 중앙에 1개의 정원이 있었다. 예배실로 여겨지는 큰방은 남쪽 편에 있었고, 북서쪽에 침례당이 있었다. 침례당의 벽을 비롯하여 각 방의 여러 벽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18개의 문구를 보여준다. 그 문구에서는 ‘한 분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도로데오스가 기억되기를’ 등의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침례당 안에는 서쪽벽에 닫집을 만들고 그 아래 대야를 놓은 시설이 발견되었다. 닫집은 잡석과 석고를 섞어 기둥을 만들었고, 침례 대야로 나갈 때 계단을 올라가게 설계되었다. 닫집의 천장은 광선과 점으로 꾸며진 별들이 그려졌고, 그 벽에는 선한 목자와 아담과 이브가 그려졌다. 닫집의 남쪽 벽에는 우물가의 여인과 다윗과 골리앗이, 북쪽 벽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의 치료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묘사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무덤으로 나아가는 여러 여인들이 그려졌다. 끝으로 북쪽벽 바깥에 벤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한 벤치는 가정교회를 다른 집과 구별하는 표시가 되었을 것인데, 일반 집에서는 무척 드문 시설이다. 아마도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수용시설이 부족하여 밖에도 의자를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 시설은 마치 돌 밑에 놓인 새싹이 자라나면서 돌을 밀어버리듯이 주후 3세기의 기독교회가 박해를 뚫고 집밖으로 뻗어나가는 증거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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