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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by 은총가득 2021. 5. 2.

존왕 – 마그나카르타,대헌장,앙주제국,플랜태저넷제국,중세봉건제,부빈전투,루이8세

 

존왕에 대한 생각

존왕의 형인 리처드 1세(1157,1189~1199)는 왕위에 오르자말자 1990년 7월 십자군전쟁에 자신보다 8살 어린 프랑스의 필리프2세(1165,1180~1223)와 함께 참여합니다. 하지만 필리프2세는 1991년 7월 먼저 돌아와서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1166,1199~1216)이 정권을 잡도록 도와주어 존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1992년 10월 돌아오는 길에 신성로마제국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1994년에야 영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돌아온 리처드 1세는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인 존을 용서해줍니다. 그리고 리처드 1세는 프랑스왕 필리프 2세 뿐 아니라 다른 프랑스의 제후들과의 분쟁이 지속되어 프랑스와 전쟁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42살의 나이에 죽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양국 왕가와 귀족 가문 사이의 갈등이 잦았는데.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존 왕(1167,1199~1216)은 재위 시기에 영국 왕실 소유의 프랑스 영지를 대부분 잃었을 뿐 아니라 영국 왕권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도전까지 받게됩니다,

존왕은 프랑스와의 전쟁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권을 두고 교황과 대립하는 등 나라 안팎으로 신임을 크게 잃게되어, 결국 1215년 존은 귀족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대헌장(Magna Carta,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대헌장은 교회와 귀족, 자유민의 권리와 자유 등을 보장하고 왕의 준수 사항을 약속한 칙허장으로, 오늘날 영국 헌법 체계의 효시가 됩니다,

그러나 이 존왕은 아버지 헨리 2세가 이루어 놓은 프랑스 내 영국지배영토를 다 잃었기에 영국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 존왕의 형인 사자왕 리처드왕이 죽지 않았다면 프랑스라는 나라는 없어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하나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국의 존왕을 보면 우리 역사 중에서는 조선시대의 인조가 생각납니다, 자기 기분에 취해 청나라를 무시하다가 백성만 힘들게 만든 임금이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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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이 잃어버린

프랑스내 영국

앙주제국

플랜태저넷 제국

 

1154년부터 존 왕이 프랑스령을 완전히 상실하는 1214년까지 잉글랜드왕이 지배한 지역을 합쳐서 영국에선 앙주 제국(Angevin Empire), 프랑스에선 플랜태저넷 제국(L'Empire Plantagenet)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령의 생산력이 엄청나서 아키텐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으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절반을 계속 지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인들은 '리처드 1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하고 아쉬워하며, '앙주제국이 계속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the angevin empire survived?) 하고 영미권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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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2세의 아들

리처드 1세의 동생

존 왕

(1166.12~1216.10)

(즉위 1199.5)

 

존은 1199년 33살부터 1216년 50살에 사망할 때까지 17년간 잉글랜드의 군주로. 그는 플랜태저넷가의 세번째 왕이었습니다,

 

존왕의 아버지와 형제

 

존왕의 부인과 아들 헨리3세

존은 헨리 2세(1133,1154~1189.7)와 프랑스 아키텐의 영주 엘레오노르(1122,1137,1137~1152,1154~1202)사이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존은 그의 형제들인 청년왕 헨리(1155,1170~1183), 사자왕 리처드1세왕 (1157,1189~1199), 제프리 공작(1158,1181~1186)이 1173년부터 1174년까지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이후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1177년 존은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되었고, 유럽 대륙과 잉글랜드에 있는 영토도 하사받았고, 헨리 2세와 아들들 간의 전쟁은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의 사망으로 끝났고, 리처드가 왕으로 오른 후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형 리처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습니다

이후 리처드 1세가 1199년 사망했을 때 형인 제프리 2세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지만.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가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런 사유로 1200년 르굴레 조약을 통해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보유한 앙주 제국의 영토에 대해 존의 소유권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한편 존왕은 즉위 1년 후인 1200년 34살에 자신보다 20살이나 적은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1186/1188~1246)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3~15세의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을 합니다, 이 앙굴렘백작 이사벨이 존왕의 뒤를 잇는 아들 헨리 3세(1207,1216~1272.11)를 낳게 됩니다,

이 재혼을 할 때 사실 보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존 왕(1166,1199~1216.10)은 그렇지 못해서. 파혼을 당한 뤼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1165,1180~1223)에게 제소하게 되고 이에 필리프 2세는 영국의 존왕을 프랑스의 법정으로 소환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여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 2세가 주군이 되고 존왕은 봉건 가신의 입장이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존왕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 2세는 이를 기회로 존 왕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서에게 내리게 되지만 이런 몰수령을 내린다고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 2세가 존왕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03년, 아서가 존왕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존 왕이 신속히 역공을 가해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하게 됩니다, 이때 3차 십자군 때 활약했던 형으로 선왕이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왕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됩니다,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 왕이 아서를 죽였을 거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루타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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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주종관계

중세 봉건제를 살펴보면 동양식 절대군주제라면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이 왕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유럽의 봉건제도에서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봉건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주군과 봉신과의 관계는 상호계약관계로 원칙적으로 봉신의 봉신은 주군과 주종관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실제로는 평시에 공작의 봉신인 백작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문제는 여기처럼 공작이 왕에게 반기를 든 경우 백작은 중세법상 원칙적으로 자신의 주군인 공작편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많은 변수가 있어서, 반란 명분이 약하거나 할 경우 그냥 왕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이 반란을 진압하면 서약위반을 이유로 공작의 작위를 몰수할 수 있고, 왕이 백작의 직속상관이 되면서 반기를 든 백작을 좋게볼 리 없으니 공작에게 붙을지 왕에게 붙을 지 눈치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백작이 공작을 따라 왕과 싸웠다해도 봉건계약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므로 그게 중세법상 죄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왕이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도 승자의 권리로 몸값정도는 받을 수 있었지만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므로 이를 처형한다면 폭정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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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세법에 의해 영국 존 왕이 공개적으로 귀족들을 처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처형도 아니고 감옥에서 비참하게 귀족들을 굶겨죽인 것은 당시 시각에서 명백히 폭정이므로, 프랑스령 귀족들이 존 왕을 버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었다 해도 먼저 중세법을 위반한 것은 영국 존 왕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교회에서도 후세에도 별 문제 제기 없이 그대로 프랑스령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합니다, 이에 영국 존왕은 이런 필리프 2세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 성을 공성 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노르망디 지역

이 작전은 이론적으로는 좋아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하였고, 필리프 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게 됩니다, 그 결과 1204년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파란색은 필리프가 직접 지배한 직할지,

녹색은 필리프의 봉신의 영토,

노란색은 교회령,

빨간색이 잉글랜드왕의 프랑스령이다.

 

 

아키텐 지역

 

그 후 10년 동안 존왕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세금을 거두고 그의 군대를 개혁했으며 유럽 본토의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게 됩니다,

1205년 39살 존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45살 인노첸시오 3세(1160,1198~1216)와 대립하게 되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기독교 교회의 성스러운 의무) 정지, 1209년에는 43살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은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을 하자, 1213년에는 교황이 프랑스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즉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가 존 왕을 싫어하게 됩니다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너무나 억울했던지 1214년 48살 존왕은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39살 오토 4세(1175,1209~1215,1218)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여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하게 됩니다.

1204년에도 그렇듯이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여 필리프 2세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오토 4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자 27살 루이(루이8세,1187,1223~1226.11)가 48살인 영국 존 왕(1166,1199~1216)의 군대를 격퇴하였고, 신성로마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49살 필리프 2세(1165,1180~1223)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릴의 외곽 부빈(부빈전투)에서 회전이 벌어졌는데,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프랑스군 사망 1,000명, 연합군 사망 1,000명+포로 약 9,000명).

 

 

노란색이 플랑드르 지역 (부빈이 이지역에 있음)

 

이 비보를 전해들은 존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 건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비(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엄청나게 쓰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존왕이 잉글랜드로 귀환했을 때 존왕의 재정 정책과 잉글랜드의 권위있는 귀족들에 대한 대처에 불만이 많던 대부분의 남작들이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합의했지만 양쪽 모두 조약의 조항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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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입니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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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이 억지로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불만을 품고 후에 추인을 거부하자 귀족들이 아예 존 왕을 폐위시키고자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1187,1223~1226.11)를 초빙해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려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플랜태저넷 왕조는 프랑스와 매우 가까웠고 혈연으로 프랑스 왕실과 얽혀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필리프 2세(1165,1180~1223)의 아들 루이(루이 8세,1187,1223~1226.11)는 침공을 감행, 런던을 점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존 왕(1166,1199~1216.10)은 도주했으나 상당수의 제후들이 프랑스 황태자 루이를 지지하여 위기에 빠지게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려는 찰나에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자 귀족들은 새로운 왕 헨리 3세와 싸울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프랑스의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어린 헨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후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마샬이 반란 제후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샌드위치 해전에서도 헨리 3세의 해군이 승리하자 반란파의 기세는 크게 꺾이게 됩니다,

결국 헨리 3세와 섭정 윌리엄 마샬이 약간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추인하자 제후들은 다시 태도를 바꿔 루이 8세에게 철군을 요구하자 그 중간에서 어쩡쩡해진 프랑스 황태자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고 약간의 대가를 받은 뒤 프랑스로 철군하였습니다,

존왕이 죽고 헨리3세가

등극하는 과정

 

헨리 3세(1207,1216~1272.11)는 아버지인 존 왕이 무능한 정치로 내외의 악평만 쌓은 채 50살로 급서하자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초창기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가 왕위를 노린 침공을 감행하기도 하였으나 잘 물리치고 섭정인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샬 등의 보좌를 받다가 20세에 친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출처] |작성자 연우


MAGNA CARTA LIBERTATUM (대헌장, 大憲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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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VIV. MAGNA CARTA LIBERTATUM
(마그나 카르타 리베르타툼)
"대헌장(大憲章)"

우리 말로 "대헌장(大憲章)"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또는 Magna Charta)"는 1215년 영국의 존왕(John, King of England)이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도 법적 절차를 존중하여야 하고, 왕의 권리도 법률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음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법치주의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나중에 영국의 권리장전과 권리청원, 버지니아 권리장전, 미합중국 헌법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습니다.

Magna Carta는 라틴어 Magna Carta Libertatum의 줄임말로, 직역하면 "자유를 위한 큰 문서(文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그나 카르타"의 본문은 총 63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역시 모두 라틴어로 작성되었습니다.

magna는 "크다"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magnus의 주격 단수 여성형 형태로 여성형 명사인 carta(f.)를 수식하는 역할을 합니다.

carta(f.)는 "종이, 문서" 등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여성형 명사입니다.

libertatum은 "자유(freedom)"를 뜻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libertas(f.)의 속격 복수 형태로 carta(f.)를 수식하는 역할을 합니다.


1. magna : 큰(big) → magnitude, major, maximum

magna는 "크다"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magnus의 여성형으로 magnitude(규모, 크기), magnificent(훌륭한, 웅장한) 등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magnus의 비교급은 maior(또는 major)로 major(중요한), majority(다수), mayor(시장) 등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magnus의 최상급은 maximus로 maximum(최대값), maxim(격언) 등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magnus, maior, maximus에 대해서는 과거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으므로 이번 포스팅에서는 위와 같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2. carta : 종이, 문서 → card, chart, charter

"종이, 문서" 등을 뜻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carta(f.) 또는 charta(f.)는 같은 뜻의 고대 그리스어 남성형 명사 χᾰ́ρτης(m., khártē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한편 "종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남성형 명사 χᾰ́ρτης(m., khártēs)는 "새기다, 조각하다, 글씨를 쓰다" 등의 의미를 가진 고대 그리스어 동사 χᾰρᾰ́σσω(kharássō)의 명사형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 card(카드)는 "마그나 카르타"에 포함되어 있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carta(f.)에서 파생된 것이며, 영어 단어 chart(차트, 기록, 도표), charter(헌장, 특허, 승인)도 모두 라틴어 carta(f.)의 후손들입니다.


3. libertatum과 liberty

libertatum(자유를 위한)은 "자유(freedom)"를 뜻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libertas(f.)의 변화형(속격 복수)으로 "magna carta"를 수식하는 역할을 합니다.

libertas(f.)는 "자유롭다"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liber의 명사형으로, 영어 단어 liberty(자유)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commonlaw

                                      https://cafe.daum.net/latinaanglicaque/rfAC/160?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