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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by 은총가득 2021. 2. 4.

 

1817년 어거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아시리아 왕국의 도읍지였던 니네베가 실제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아시리아 왕국은 인류 역사상 어느 왕국보다도 오래 지속하였다고 한다.

 

앗수르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로마의 지성 키케로가 역사의 아버지라고 명명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그 언급이 있다.

 

“아시리아는 520년에 걸쳐 상 아시아를 지배했는데, 그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항쟁을 처음 시작한 것은 메디아인이었다.”(헤로도토스, 역사)

 

헤로도토스의 증언에 의하면, 고대에 ‘앗수르’ 라는 나라는 520년간이나 상아시아를 지배했다고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앗수르 중심으로 고대 근동의 질서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앗수르는 BC 2000년경 바벨론 지역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변에 ‘앗수르(아슈르)’라는 도시에 정착하면서 갈라(칼라)와 니느웨(니네베)와 같은 도시국가들을 세우며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BC 1800년경에 앗수르는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대왕’(BC 1792-1750)과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티글랏 빌레셋 1세’(BC 1115-1077) 때에는 서쪽으로 지중해 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앗수르는 앗수르나스르팔 2세(BC 883-859) 왕 때부터 무자비한 정복전쟁을 시작하여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받으며 정복한 나라들을 억압했다. 그리고 앗수르나스르팔 2세의 아들 ‘살만에셀 3세’(BC 858-824)는 매년 동서남북으로 정복전쟁을 떠났으며, 정복한 나라에는 경제적 수탈을, 굴복을 거부한 나라에는 잔인한 군사적 보복을 감행했다.

 

 

 

이후 앗수르는 BC 609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전쟁을 벌여 고대 근동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앗수르는 철기시대 최초의 거대한 군사강국이었다. BC 10세기에는 이미 궁수와 창병을 갖춘 기병을 이용했으며, 그들의 주력부대는 놀랍게도 전차부대였다.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 부조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전쟁에는 전차부대가 선봉에 투입되었고, 전차부대가 남긴 것은 다른 부대가 깨끗하게 청소하는 형태의 전쟁을 감행했다고 한다.

 

살만에셀 3세의 오벨리스크

 

앗수르에 대한 가장 많은 기록은 성경에 나타난다. 기원전 9세기에 오자 앗수르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살만에셀’의 비문인 ‘블랙 오벨리스크’에 따르면 ‘예후’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앗수르(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이를 통해 아시리아의 공격을 무마시키려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아시리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주변의 몇몇 나라들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BC 745년 잔혹한 티글랏 빌레셋 3세(BC 744-727)가 왕좌에 오르면서 아시리아는 제국주의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성경에 ‘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티글랏 빌레셋 3세는 돌 팔매병을 이용한 최초의 앗수르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왕하 15:19)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돌팔매병에 대한 기록은 티글랏 빌레셋 3세보다 훨씬 앞선다. 사사기 20장 15-16절에 베냐민 지파의 군사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칼을 쓸 줄 아는 군인이 2만6천 명이고, 물매로 돌을 던지는 왼손잡이 군인들이 700명이 있었다. 그 700명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없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삿 20:15-16)

 

앗수르의 티글랏 빌레셋 3세는 앗수르 역사에서 진정한 ‘앗수르 제국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다.

그가 앗수르가 정복한 나라들 가운데 앗수르와 가까운 나라들은 속주로 통합시켰고, 앗수르에서 지형적으로 먼 나라들은 앗수르의 감독 아래 자치를 허용했다.

 

그런데 그 자치라는 것이 각 나라의 민족주의를 말살하기 위해 대량 이주정책을 펼치며 혼혈족을 탄생시켜 그곳에서 앗수르의 감독아래 시행되는 자치였다. 이 정책으로 인해 이후 북이스라엘이 혼혈 사마리아인으로 혈통이 변질된다. 이것이 앗수르가 원했던 세계질서였기 때문이다. 제국은 자신의 나라, 즉 본국의 이익을 위해 속주국 국민들의 불행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실행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혼혈족을 만드는 일까지 말이다.

 

 

▶ 북이스라엘과 앗수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5년간의 정복전쟁을 거쳐 가나안을 차지했다.

그리고 사사시대라고 일컫는 사사들이 치리하는 시기를 약 300년가량 보내게 된다. 사사시대는 사무엘을 통해 마감하게 되고, 드디어 이스라엘 왕정 500년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500년의 왕정 중 처음 120년은 통일된 한 나라로 40년간의 사울시대, 40년간의 다윗시대, 40년간의 솔로몬 시대를 보낸다. 그리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약 200여 년을 한 민족 두 국가로 보내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200년 만에 결국 앗수르에 의해 문을 닫고, 이후 남유다는 150년을 더 지내게 되고, 그마저도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문을 잠시 닫고, 70년간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200년간의 이 시기,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뉜 시기를 성경은 ‘열왕기상’과 ‘열왕기하’ 두 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두 권의 책은 북이스라엘의 역사와 남유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기 상’과 ‘역대기 하’ 두 권의 역사책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유다만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200년간 나라를 유지하면서 7번의 쿠데타를 통해 19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남유다는 350년간 다윗의 혈통으로 20명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도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으나 가끔씩 ‘다윗의 길’로 간 왕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200년간 북이스라엘의 왕들 19명은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로 달려간 안타까운 왕들의 연속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왕들의 통치와 반복되는 쿠데타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제국주의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의 16번째 왕인 ‘므나헴’이 왕 위에 오르자 북이스라엘을 침략해 온다.

 

 

▣ 멸망을 향해 치닫는 북이스라엘의 왕들 [살룸 왕 ~ 호세아 왕]

 

북이스라엘의 역대 왕

 

여로보암 2세(BC 793-753, 북이스라엘 13대 왕)가 죽고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31년의 짧은 시기 동안 북이스라엘에는 5 가문에서 6명의 왕들이 왕좌를 차지했지만, 불행히도 대부분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시리아가 전 역사에서 가장 위력을 떨치고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거의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 살룸(BC 752, 북이스라엘 15대, 1개월간 재위), (왕하 15:13-15)

‘스가랴’(BC 753-752, 14대)를 암살하고 왕이 된 ‘살룸’(BC 752년, 1개월간 재위, 15대)은 북이스라엘의 6대 왕조를 세웠지만, 고작 한 달간 통치하고 ‘므나헴’(BC 752-742, 16대)에게 암살당한다.

 

● 므나헴(’(BC 752-742, 16대), (왕하 15:16-22)

살룸을 죽이고 북이스라엘 7대 왕조를 세운 므나헴은 10년간 왕국을 통치했다.

 

므나헴은 앗수르가 쳐들어오자 국내의 혼란을 오히려 앗수르 왕에게 은 1,000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침으로 자신의 왕위를 튼튼하게 하는 데 이용한다. 므나헴은 앗수르 왕에게 바치기 위한 은 1,000달란트를 만들기 위해 자기나라 백성 중, 큰 부자들에게 각각 은 50달란트씩 강제로 빼앗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왕하 15:19-20) 당시는 공물 수납으로 겨우 왕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이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봉신국으로 떨어지고 만다.

 

● 브가히야((BC 742-740, 17대)(왕하 15:23-26)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BC 742-740, 17번째 왕)가 즉위 하지만, 고작 2년을 통치한 후 군대장관 ‘베가’의 손에 암살당한다.

 

● 베가(BC 752-732, 18대), (왕하 15:27-31)

브가히야를 죽이고 북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운 ‘베가’(BC 752-732, 18대)는 20년간 왕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베가의 통치 기간 20년은 이전의 므나헴과 브가히야의 통치기간을 포함한 것으로 사료된다. 베가의 마지막 해는 주전 732년인데, 그러면 20년 통치의 시작은 주전 752년, 곧 므나헴이 즉위한 해가 되는 것이다. 결국 베가의 단독 통치는 8년이 되는데, 베가는 요단 강 건너편 길르앗 땅에서 므나헴과 브가히야를 대적하며 이미 그 땅을 다스려 오다가 충분한 세력을 얻은 후에 50명의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디글랏 빌레셋 3세 치하의 앗수르 제국

 

특히 므나헴이 인두세를 징수해 아시리아(앗수르) 왕에게 자진해서 은 1,000달란트의 공물을 바친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반아시리아파가 대두 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반아시리아 전선을 표방한 베가의 혁명을 수월하게 했을 것이란 것이다. 이는 정권을 잡자마자 베가가 아람 다메섹과 연합하여 반아시리아 전선을 구축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아람-북이스라엘 동맹은 남유다의 아하스(남유다, 16대) 왕에게 동참하라고 요구했지만, 남유다의 아하스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아시리아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다시 말해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동맹보다는 오히려 친 아수르 정책이 국가에 더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베가 왕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러자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아시리아와의 대적에 앞서 오히려 남유다를 먼저 치기로 하고 쳐들어올 태세를 취하자, 남유다 왕 아하스가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는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아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셋 3세는 이 반역적인 동맹을 진압하고자 출정했고, 이 출정(BC 734-732)으로 아람은 멸망하고, 베가는 호세아에게 암살당한다.

 

● 호세아((BC 732-722, 19대, 9년간 재위), (왕하 17:1-41)

쿠데타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 북이스라엘은 18번 째 왕인 베가가 또 다시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호세아’(BC 732-722, 9년간 재위, 19대, 북이스라엘 멸망)가 베가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19번째 왕이 된다.

 

호세아가 즉위할 당시 북이스라엘은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사마리아 산지만을 남겨 놓은 소국에 불과했다. 주전 734년 디글랏 빌레셋 3세의 출정으로 나머지 영토는 아시리아의 영토로 통합되어 아시리아의 속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시리아에게 고개를 숙이던 호세아는 디글랏 빌레셋 3세가 죽고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가 즉위하자 곧 반역의 깃발을 올렸다. 호세아는 어리석게도 이집트와 손을 잡았는데, 당시 이집트는 미약하고 분단된 상태로서 호세아에게 일체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전 724년 살만에셀 5세가 출정하자 호세아는 수년간 밀린 공물을 들고 마중 나갔지만 포로로 잡혔고, 곧 이어 수도 사마리아에 대한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살만에셀 5세는 왕이 포로로 잡힌 상황이므로 사마리아 성이 곧 함락되리라 예상했지만, 그 성은 이후 3년간 강력히 저항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압도적인 공세 앞에 결국 주전 722년 수도가 함락되면서 북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왕하 17:3-6)

 

앗수르 비문에는 살만에셀 5세의 뒤를 이은 사르곤 2세(BC 722-705) 때에 다른 점령지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거주지를 옮겨 사마리아인들과 혈통을 섞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 제국의 침략 경로

 

앗수르제국의 민족 혼합과 강제 이주 정책

 

 

BC 721년 앗수르왕 사르곤 2세의 침공으로 사미리아는 초토화되고 주민 중 2만7,290명이 아시리아로 포로로 잡혀갔다.

 

 

이스라엘에서 아시리아에 이르는 포로 경로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이주온 길

<가져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