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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제 2권 42-72편

스펄젼의 시편 45편 강해

by 은총가득 2021. 2. 2.

 

스펄젼의 시편 45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이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남성적인 성향을 시사하는 머리말들은 왕의 기품과 이 시편의 깊고도 엄숙한 취지 그리고 이 시편을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기쁨 등을 나타낸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이토록 신성한 찬양을 위해서는 특별한 가수들이 지정될 필요가 있었다. 왕이신 예수께는 아무렇게나 허튼 소리로 찬양을 드려서는 안 되며, 가장 뛰어난 합창단을 통해 가장 감미롭고 숙련된 음악으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영적 성전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이라야 하나님의 귀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음으로 들릴 수 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노래는 음악성이 뛰어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헌신된 사랑의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마스길”이란 교훈적인 송시를 지칭한다. 이것은 방만한 노래나 로맨틱한 민요가 아니라 거룩한 교훈의 시편이요 교훈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임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가 이 노래를 영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입증해 준다. 이 노래의 흥겨운 가락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

“사랑의 노래.” 육욕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천사들의 혀와 귀에 적합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천상의 성가이다.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 “소산님”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백합’이다. 이는 가장 고상한 노래에 해당하는 이 시편을 동양식으로 지칭한 시적인 머리말이거나, 이 시편의 운율과 관련된 머리말이거나, 혹은 이 시편을 연주하는 데 쓰이는 악기와 관련된 머리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첫번째 견해에 가장 마음이 끌리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토록 아름답고 순수하며 탁월하고 또한 비길 데 없을 정도인 시편의 명칭을 백합에서 따왔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발상으로 이해된다. 백합화의 아름다운 자태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혹자는 이 시편을 솔로몬과 바로의 딸간의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만 이해한다. 그것은 근시안적인 견해이다. 또 다른 이들은 여기서 솔로몬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들의 눈은 사시라 할 수 있다. 제대로 초점이 맞추어진 영적인 눈을 뜬 자들은 여기서 오직 예수에 관한 내용만을 발견한다. 설령 솔로몬을 연관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카메라의 렌즈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렴풋한 그림자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그림자는 사진에 희미하게 잡힐 뿐이다. 그 보좌가 영원한 하나님이신 ‘왕’은 단지 죽을 운명의 인생과는 다르시며,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레바논과 애굽의 강으로써 한계를 지을 수는 없다. 이것은 세상의 혼례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천상의 신랑과 그분의 택함받은 신부를 위한 결혼 축가이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이 노래의 서두로서 시편 기자의 작시 의도를 선언

한다.

2절메시아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경모하는 내용이다.

3-9절메시아께 경모어린 찬양을 드리며,

10-12절신부에게로 말머리를 돌린다.

13-15절교회에 대해 부가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며,

16, 17절왕의 영원하신 명성을 예고하는 언급으로써 이 시편을 마무리한다.

 

 

[강 해]

 

1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1절. "내 마음." 마음으로 쓰는 글처럼 좋은 글은 없다. 냉담한 찬송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짓이다.

"좋은 말이 넘쳐." 좋은 마음은 좋은 생각만을 만족해 할 것이다. 좋은 원천에서 좋은 시냇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좋은 말이 넘친다는 것은 시편 기자의 따뜻한 사랑과 충만한 심적 상태를 시사하는 표현으로서,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마치 물이 부글부글 끓듯이 풍요롭고도 열정적인 말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즉, 사랑으로 가득한 내밀한 영혼으로부터 좋은 말이 분출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냉담한 표현이 단 하나도 없다. 이 시편의 기자는 시의 기품과 작시법 따위를 엄격하게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싯구들은 자기 영혼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출된 것으로서, 헤클라(Hecla)의 뜨거운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제물로 드려진 곡식을 냄비에 넣고 볶듯이, 이 사랑의 조공은 신실한 헌신을 통해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좋은 말을 하면서 그 마음이 냉담한 것은 서글픈 일이며, 나쁜 말을 하면서 그 마음이 따뜻한 것은 더 고약한 일이다. 하지만 좋은 말과 따뜻한 마음이 함께 결합될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감사와 찬미로 뜨거워진 마음의 냄비에다 볶은 감미로운 봉헌물을 하나님께 자주 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이 노래의 유일한 주제는 "왕"이며, 이 노래는 오직 왕의 영광만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부주의한 태도로 작시에 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시를 자신의 작품이라고 혹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지칭한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을 여호와께 드려서는 안 된다. 좋은 재료는 좋은 기량을 발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강론이나 시에서 우리 왕이신 주님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러우신 분을 언급할 때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내용을, 그리고 그 왕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맛보고 다룬 것을 경험에 입각하여 적었다.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말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이 정확하고, 정성스러우며, 심사숙고한 것이고, 또한 재치 있게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흥분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실제적인 무게와 정확성에 있어 사려깊은 문필가의 표현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자는, 비록 그 마음이 열정으로 가득한 상태이지만 숙련된 저자처럼 정확하게 말한다. 따라서 그의 언급들은 부질없는 내용이 아니라, 조용히 앉아 영원과 관련된 사항을 적어가는 자들의 글과 같은 내용이다. 특출한 사람들이 항상 그러한 표현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표현이 떠오를 때 그들은 성결한 감정의 분출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타고난 재능을 갖춘 자의 그러한 마음 상태는 여호와의 전에서 노래하는 직무를 위해 소중하게 사용되고 아름다운 시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2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2절. "왕은." 마치 왕께서 친히 갑작스럽게 앞에 나타나시기라도 한듯이, 시편 기자는 탄복한 상태로 어쩔 줄 모르는 채 자신의 서두를 곧바로 중단하고 주께로 말머리를 돌린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사랑의 대상을 깨닫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마음의 눈은 두뇌로써 보는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더욱이, 우리가 예수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그리스도는 대개 그렇게 하신다. 만일 우리 마음이 온화하다면, 그것은 마음속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열기를 누릴 때 우리는 이내 그분의 빛도 보게 될 것이다.

 

"인생보다 아름다워." 성도들의 왕은 인격 면에서, 특히 그 마음과 성격 면에서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우신 분이다. 원문상으로는 히브리어 단어가 중복되어 있다:"인생보다 아름답고 아름다워." 예수님은 너무도 아름다우시므로, 그분을 묘사하는 데에 같은 단어를 중복해도 부족한 감을 준다. 사람들 중에도 은총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성격을 소유케 된 자들이 많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어떤 결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우리는 완전한 성품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게 된다. 그분은 어느 모로 보나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아름다우시지만, 교회와 부부 관계로 연합하신 그분의 모습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아름다우시다. 교회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은 그 아름다우신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아름다움과 감명적인 웅변이 함께 결합될 때 그 사람을 위엄 있게 만든다. 이 두 가지는 주 예수님 안에 완벽하게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은총으로 충만한 인격과 연설의 절정을 엿볼 수 있다. 은총이 그리스도께 가장 풍부하게 부어졌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는 것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극히 풍성한 은총이 그분의 입술을 통해 나와서 그 백성을 기쁘게 하고 부요하게 한다. 그분의 입에서는 우리 왕의 증거와 약속과 초청 그리고 위안 등이 너무도 엄청난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까닭에, 우리는 그렇듯 폭포같이 쏟아지는 은혜를 빗방울이나 이슬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세의 연설과 대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그 음성에 귀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신부가 그분에 대해,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아 5:13)고 묘사한 것도 당연하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가 다소의 사울의 마음을 녹이고 그를 사도로 변화시켰다. 또 다른 한마디 말씀이 밧모섬에서 낙심에 처해 있던 요한을 일으켜 주었다. 종종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씀이 밤중 같은 우리 심령을 아침같이 밝게 변화시키며, 겨울 같은 우리 마음을 봄처럼 변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칼빈은 이를,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를 영영히 복주셨기 때문이다"로 옮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시되 영원히 복을 받으신다. 그분이 아름다우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또한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은혜로우신 말씀도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한다.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진귀한 은사들은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았고, 그 놀라운 은사들로 말미암아 그분과 연합된 백성은 모든 영적 축복들을 받을 수가 있다. 어떤 번역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중보자를 축복하신 것은 중보자의 은혜로우신 노고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그는 그러한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지니고 계시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분을 우리도 경외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모든 축복에 더욱더 동참하게 된다.

 

 

3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5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7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8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9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3절. "능한 자여." 참으로 적절한 칭호이다. 이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동료 인생들의 탁월함이나 고결함을 추켜세우려는 것처럼 막연한 예의에서 붙여진 명칭이 아니다. 그러한 명칭은 헛된 영광을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영웅이시다. 오직 그분의 경우에 한해서만, 영웅 숭배를 추천할 만하다. 그분의 구원과 사랑에는 권능이 있다.

"칼을 허리에 차고." 구속주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은 그분이 자신의 거룩하신 취지를 옹호하기 위해 권능을 드러내시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성령의 검이 마치 병기소에 걸려 있는 무기처럼 아직도 가만히 꽂혀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리하고 단단하여 자르거나 찌르기에 적합하다. 예수님은 신적 권능을 통해 그것을 실수 없이 사용하실 수 있다. 본문 말씀은, 자신의 칼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곳에다 둠으로써 전투를 위해 무장하시는 우리의 위대하신 왕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진정한 승리자이시며, 다른 이들은 단지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어야만 하는 부하들일 뿐이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무기가 신자의 유일한 소망이다. 우리 역시 본절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주님의 권능이 행사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때, 우리는 끈질긴 기도로써 그분이 전장에 나서시게끔 간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으면, 아킬레스가 빠진 그리스 군대처럼 우리는 대적들에 의해 곧장 정복당하고 말 것이며, 또한 우리는 마치 죽은 자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주께서 주님의 칼로써 명성을 날리고 만방을 다스리소서. 주의 칼을 참으로써 왕의 위엄을 드러내소서. 주를 사모하는 자는 그 탁월하심에 걸맞는 복장을 갖추신 주의 모습을 보는 것을 기뻐한다. 그는 누추하고 겸비한 차림을 하신 주님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며, 존귀한 복장을 갖추신 주님을 보고는 기뻐한다. 우리의 고귀하신 그리스도께는 아무리 존귀와 영광을 많이 돌려도 지나치지 않다. 하늘 그 자체도 그분께는 충분하지가 않다. 천사들, 보좌들, 권세들, 정사들, 그리고 권능들이 그분의 발 앞에서 드러내는 그 화려한 장관도 그분께는 지극히 미미한 것일 뿐이다. 오직 그분 자신의 본질적인 영광만이 그 백성의 갈망에 온전히 답할 수 있다. 그들로서는 그분을 아무리 드높여도 충분하지 않다.

 

 

4절.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이는,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타고"로 번역될 수도 있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는 복음의 전차를 끄는 세 마리의 귀한 전마인 셈이다. 진실하고 겸손하며 선한 자들의 주장을 변호해 달라고 우리 주께 촉구하는 것은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다. 만일 진리와 온유와 공의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옹호하지 않으신다면, 진리가 조롱당하고, 온유가 억압당하며, 또한 의가 모살당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주장이 시들거나 사악함이 기승을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강하신 팔을 뻗으사 은총의 사역을 행하시도록 예수께 진지하게 간구드려야 한다.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위용을 갖추고서 무장하신 영웅-군주께서 이제 승리의 전차에 오르시라는 간청이다. 우리의 임마누엘께서 사랑의 전차를 타고 나아오사 영적 대적들을 물리치시며 피로 사신 영혼들을 그 권능으로 붙드시도록 간구하는 내용이다.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를 내다보면서, 시편 기자는 높이 들린 메시아의 팔을 통해 왕의 대적들이 철저히 진멸당하는 모습을 왕께 보여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른팔 이외에는 달리 인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자신의 권능 이외에는 달리 가르치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는 기뻐하는 우리의 목전에서 그 일을 신속히 이루실 수 있다.

 

 

5절. "왕의 살." 우리 왕은 온갖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신다. 그는 가까이 있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을 동일한 권능으로써 격파하실 수 있다.

 

"날카로워."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그릇되는 법이 없다. 그는 무딘 창이나 촉 없는 화살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우리의 대장께서는 사람들의 머리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겨냥하신다. 그는 정면에서 쏘시며, 시위를 떠난 화살들은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 곳에 깊이 박힌다. 사랑을 위해서건 보복을 위해서건간에, 그리스도는 목표물을 결코 놓치지 않으시며, 그분의 화살에 맞은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그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분뿐이다. 예수님의 판결이라고 하는 화살은 그분의 말씀이라는 전통에서 예리하게 번뜩이며, 그분의 사역자들이라고 하는 활에 올려질 때에도 예리하다. 그 화살들이 무례한 심령들을 향해 겨냥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 사역자들은 그분의 화살이다. 그분이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쏘신다. 그분이 그들을 예리하게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심장을 꿰뚫게 하신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분의 심판의 화살에 맞아 엎드러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화살에 맞으면 도저히 죽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예수께서 전투를 이끄실 때에는 도처에 살해당한 자들이 허다하게 나뒹군다. 그분이 자신의 진리의 활을 쏘실 때 만민이 떨며 그분께로 돌이킨다. 그분의 권능과 임재 아래에서, 사람들은 마치 심장이 찔린 자들처럼 엎드러진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손에 강한 활을 쥐고 계실 때 그분을 대적할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분이 활을 겨냥하시며 삼킬 듯한 불벼락이 대적들에게 퍼부어질 때에는, 참으로 끔찍한 공포가 엄습할 것이다. 그때에는 왕들이 넘어지고 만민이 멸망당할 것이다.

 

6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러한 언급에 적합하신 분이 우리 주님 이외에 누구일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그분을 향한 경모의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 그의 각성된 눈은 교회의 신랑이신 왕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 하나님은 경모의 대상이시요, 통치하는 하나님이시요, 또한 영원히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이 얼마나 복된 시야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자는 영적 소경이다. 우리가 그분의 본질적인 영광과 신성을 온전히 기뻐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분의 교회와 함께하시기 위해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교회를 그분의 우편에 두시는 우리 왕의 자애로우심과 겸비하심을 결코 깨달을 수가 없다. 우리 구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인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가 구원 사역을 완수하실 수 있겠는가? 그분이 결코 쇠하지 않을 보좌에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주권적인 은혜와 영원하신 사랑이 동시에 요구된다. 만일 예수께서 통치를 중단하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도 단절되어야 한다. 또한 만일 그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축복도 영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좌정하신 보좌 이외에는 그 어떤 보좌도 영원히 존속될 수 없다.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그는 만유를 합법적으로 다스리시는 군주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공의를 바탕으로 하며, 그 율법은 의롭고, 그 통치의 결과도 의롭다. 우리의 왕은 강탈자도 압제자도 아니시다. 심지어 그분이 쇠막대기로 대적들을 치실 때에도, 그는 그 누구에게도 그릇 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보복과 그분의 은총은 모두 공의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서 그분을 신뢰한다. 그분께는 실수가 없다. 그 어떤 곤경도 과중하지 않다. 이는 그분이 그것을 보내시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심판도 과중하지 않다. 이는 그분이 그것을 명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손길은 너무도 복되다. 모든 의인들은 공의로 다스리시는 왕의 통치를 즐거워한다.

 

 

7절.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불의간에 벌어진 큰 싸움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시지 않는다. 그는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혐오하신다. 그는 주권자의 자격 요건을 갖추고 계신다. 그분의 백성은 확신의 근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우리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본문의 진실성을 입증해 준다. 죄를 없애고 의의 통치를 도래케 하기 위한 그분의 죽음은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이 사실을 보증해 준다. 중재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그는 온 세상 앞에서 그 점을 선포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증오를 본받아야 한다. 의로운 성품을 온전히 갖추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셨고, 한 사람으로서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셨다. 우리 주님은 그 온전한 삶으로 말미암아 이제 지극한 기쁨을 누리신다. 그분과의 신령한 친교를 누리는 자들도 있지만, 그는 그들 가운데서 단연 뛰어나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가 동감하는 바이며, 이것은 그분 자신만 가지고 계시는 독특한 면모 때문이다. 그분의 기쁨은 그들 모두의 기쁨의 원천이다. 동양식 잔치에서는 특별한 환대를 받는 귀한 손님의 머리에다 기름을 부었다.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잔치석상에 앉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께 기름을 부으사 가장 크고 온전한 기쁨으로써 그분의 사역에 보답하신다. 그렇게 하여, 인자께서는 자신의 모든 고통에 대해 보상받으며 영예를 얻으신다. 6절에서는 메시아의 신성을 증거하고 본절에서는 그분의 인성을 증거한다. 나사렛 예수 이외에 그 누구가 이러한 묘사에 걸맞겠는가?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엘로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시다.

 

 

8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해, 강하신 영웅의 의복에서는 향기가 난다. 그분은 모든 감각을 즐겁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 눈에 가장 아름답고, 귀에는 가장 자애로우며, 또한 우리의 영적 코에는 가장 감미로우시다. 예수님의 탁월하심과 고귀하심은 가장 진귀한 향료들에나 비교될 수 있을 정도이다. 향료의 종류는 갖가지이다. 그것은 몰약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온갖 종류들을 포함한다. 아버지께서는 그분 안에서 항상 기쁨을 발견하시며, 그분을 매우 기뻐하신다. 또한 중생한 모든 영혼들도 그분을 즐거워한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예수께서는 너무도 감미로우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복 역시 그러하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분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의 인격의 영향으로 인해 향기를 발한다. 그런즉 그분의 "모든" 옷에서 향기가 난다. 그 옷들 중 일부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상징하는 자주색 의복을 기뻐하는 만큼 그분의 제사장직을 나타내는 흰 아마포 의복도 기뻐한다. 우리의 선지자로서 입으시는 그분의 외투가 우리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듯이, 우리의 친구로서 입으시는 그분의 솔기 없는 코트 역시 그러하다. 그분의 모든 의복에서는 온갖 감미로운 향기가 난다. 여기 언급된 각각의 향료들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의미인즉, 예수님 안에는 갖가지 감미로운 향기들이 가득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향기가 진동한다.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이제 예수님은 위엄 있는 왕의 처소에 거하시며, 그분의 왕좌는 상아와 황금으로 만든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성도들과 함께하며 기뻐하신다. 향기나는 의복을 입고 계신 그분을 보라! 그분의 향기는 멀리서도 우리 영혼을 환희에 넘치게 한다. 진주 문 건너편, 곧 상아궁 안에 있는 시온의 홀에 이르면 그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그 왕이 거하시는 궁전은 어떤 곳이겠는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기쁨으로 가득한 그분의 마음을 알면 우리 영혼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왕께서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우리 가련한 포로민들은 유배지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

 

 

9절.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우리 주님의 궁전에는 신하들이 모자라지 않으며, 가장 아름답고 고상한 신하들이 모여 있다. 순결한 영혼들은 그 궁전에서 영예로운 처녀들이자 하늘의 참된 백합화로 여김을 받는다. 주 예수께서는 심령이 겸허하고 순수한 자들을 자신과 가장 친숙한 친구들로 여기시며, 그분의 궁전에서 그들은 하인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 가까이에 위치한다. "열왕의 딸"이 교회를 섬기는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알며 또한 모든 믿음의 자매들이 영적으로 왕의 딸이요 천상 왕가의 일원으로 간주될 날이 도래할 것이다.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교회는 주님의 영예와 행복을 공유한다. 주님은 교회를 존귀한 자리에 두시며, 가장 좋은 옷으로 입히신다. 금은 가장 값진 금속이며, 그중에서도 오빌의 금은 가장 순도가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에게 하찮은 것이나 부차적인 것을 주시지 않는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전가되고 할당된 의로써 신성하게 차려 입고 있다. 그토록 영예와 사랑을 많이 받는 교회의 구성원이 된 자들은 행복하다. 반면에 주의 사랑을 받는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불행이 임한다. 왜냐하면 남편이 자기 아내가 모욕이나 학대를 당하는 것을 참지 않듯이, 천상의 남편께서도 그러한 일을 참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 신속하게 보복하실 것이다. 앞에서 읽은 내용이 얼마나 엄숙한 장관을 묘사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왕은 환희에 찬 모습이시며, 전사로서 무장하시고, 군주의 예복을 입으시며, 전차에 오르시고, 화살을 쏘시며, 또한 적들을 물리치신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손에 홀을 쥐고서 보좌에 오르시며, 내밀한 방에서 가져온 향수로써 궁전을 향기로 가득 차게 하시고, 수행원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서 있으며, 그중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신부가 그분의 우편에 자리하고 있다. 속국 왕들의 딸들은 그 신부를 시중들고 있다. 믿음을 지닌 자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며, 이 광경을 보는 자는 경모와 사랑과 환희와 기대의 심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왕의 우편." 이는 사랑과 영예와 권능의 자리이다.

 

 

10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10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이는 항상 교회의 위대한 의무로서 제시된다.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으며, 확신은 숙고함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께 시집가는 영예를 누리는 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는 교훈들 중 가장 탁월한 것이 다음에 이어진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바짝 귀를 기울이라. 거룩한 교훈을 받기 위해 마음의 모든 역량들을 온전히 집중시켜야 한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위대하신 왕과 약혼한 모든 자들은 그 일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적으로 분열된 마음을 참지 못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은 주님을 욕되시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부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사악한 친분 관계는 청산되어야 하며, 심지어 중립적인 태도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들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으며, 해악만을 끼친다. 우리는 원래 죄악의 집에서 출생했고, 죄악 가운데서 단련되었다. 육욕적인 마음은 하나님을 적대시한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이라고 하는 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파멸의 도시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결속을 은혜로 말미암아 깨트린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본성의 결속과 타락한 친분 관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뿐만 아니라 망각해야 할 것도 많다. 악습을 잊어버리는 일은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 부지런히 듣고, 생각하며, 온 영혼을 거기에 몰입시켜야만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 자체도 너무나 연약하다. 어찌하여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애굽을 기억해야 하겠는가? 철멍에와 노예의 고역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옥의 바로 왕을 기억할 때, 부추와 생강과 양파에 무슨 미련이 남겠는가? 우리는 지혜를 위해 어리석음과 결별하며,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물거품 같은 야심과 결별하고, 진리를 위해 속임수와 결별하며, 지복을 위하여 참담함과 결별하고,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해 우상들과 결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에 수록된 신령한 교훈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세상적인 요소들이 도처에 너무도 많이 깔려 있다. 교회가 더럽힘을 당하며, 위대하신 왕의 영광이 가리워진다. 온 교회가 성별된 삶을 추구할 때에만, 기독교의 온전한 위엄과 능력이 세상에 빛을 발할 것이다.

 

 

11절.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온 마음을 바치는 사랑은 모든 결혼 관계에 있어 수반되는 의무이자 축복이지만, 이 고상하고 신비로운 결혼 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교회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께만 집착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교회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간구하고 도모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시며,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을 때 그분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성도들이 흔쾌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갈 때, 그는 그들과 가장 가까이 계시사 항상 은총을 베푸신다. 반면에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그들의 악한 길을 배울 때, 그분의 영은 탄식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기 전까지는, 지속적이고도 위대한 신앙의 부흥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그는 지금도 왕권을 지니고 계신다. 그분의 낮아지시는 은혜는 그분의 권위를 경감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킨다. 우리 구주는 또한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시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 아내를 위한 남편의 사랑은 아내의 순종의 의무를 경감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킨다. 교회는 예수님을 경외해야 하며,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 그는 교회와 하나로 연합되심으로써 교회에게 자유를 주시지만 방종을 주시는 것은 아니며, 교회를 다른 모든 짐에서 벗어나게 하시지만 그분 자신의 쉬운 멍에를 교회의 목에다 메신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이 땅에 천국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끊임없는 노래로써 예수님을 찬양해야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섬김이 마땅하다. 주여, 온전히 주의 것이 되도록 우리를 가르치소서. 우리를 용납하사,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2절.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교회의 거룩성이 풍성해지면, 교회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경의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의 영광은 주변의 이교도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함께 연합할 것이다. 해외 선교의 능력은 고국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가 강력한 교회일 것이다. 교회의 중심에 은혜가 가득할 때, 그 금고에는 보화가 차고 넘칠 것이다.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는 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꾼들이 망설임 없이 그 신성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역하는 자들은 자신의 수익 중 일부를, 강제 징수 방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위대하신 왕의 교회를 위해 예물로 바칠 것이다.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부요한 자도 세인들의 어리석음에 영합하지 않고 그들의 죄악 됨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설복당할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나아올 것이다. 교회는 고용인이 아니라, 왕후로서 백성 중 부유한 탄원자에게 그 은총을 나누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걸하는 자처럼 빈한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어떤 이들은 세상의 대인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타협하는 자세로 진리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깊은 성화의 단계에 접어든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라면 그처럼 스스로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활수해져서, 멀리서부터 풍성하고 지속적인 예물들을 가지고 평강의 왕께 드리러 나아올 것이다.

 

 

13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14수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3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녀는 내밀한 궁실 안에서 큰 영화를 누린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지만, 그녀의 여호와께서는 그녀를 보시며 그녀를 칭찬하신다. 이 구절은 그녀의 내면 상태에 관한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외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탁월한 매력은 그녀의 마음에서, 즉 그녀의 내밀한 성격과 내적인 바람에서 발견된다. 주께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감추인 진리와 지혜이다. 몇 mm 두께에 불과한 피부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란 그분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는 왕의 혈통에 속한 존재이며, 왕의 위엄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그 성격에 있어 정결해졌고 새로워졌다. 이는 교회가 내적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신랑의 모든 옷에서 향기가 날리는 것으로 언급되었거니와(8절), 이제 신부의 내적인 자태가 모두 영광스럽다. 여기서 초점은 전체성과 완전성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 안에는 나쁜 냄새가 전혀 섞여 있지 않고, 그분의 백성 안에는 죄악 된 요소가 혼합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교회는 흠도 점도 없는 존재로 서게 될 것이다.

 

"그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최상의 재료와 최상의 기량이 만난 셈이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의라고 하는 고귀한 재료를 이용하여 그분의 백성을 위한 옷을 지으셨다. 금으로 수놓은 그 어떤 자수품도 그분의 거룩하신 솜씨에 비할 수는 없다. 주님은 그분의 신부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아무런 결함이 없도록 철저히 배려하신다.

 

 

14절. "수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천상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될 날이 이를 것이다. 본문은 혼례 과정을 묘사한다. 그 결혼식 때에 왕후가 시녀들의 수종을 받으며 왕이신 남편께로 인도된다. 영광스러운 마지막 날에, 만물을 완성할 날에, 우주 만물이 경탄하는 가운데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집안에 고이 감추인 신부와 같았던 교회도 영광스러웠다. 그렇다면 교회가 주님과 같은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낼 때 그 영광은 어떠하겠는가? 가장 멋진 자수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된 교회의 완전함에 비긴다면 단지 흐릿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절은 교회의 궁극적 안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왕의 품속이다. 교회는 주권적인 은혜의 권능에 의해 그 품속으로 인도된다. 이러한 일은 장래에 속한 것이다. 교회가 도달할 상태로 말하자면, 교회는 가장 아름다운 예복을 입을 것이며 가장 밝은 영들이 교회를 수종들 것이다.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교회의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도 '그날에는' 교회의 축복을 함께 누릴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교회의 일부이지만, 시적 이미지상 그들은 영예로운 시녀들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시적 상징이 조화롭지 못한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신부와 마찬가지로 친숙한 존재로서 왕께 인도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교회의 참된 일꾼들이란 교회에 속한 자들이며, 교회의 모든 행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교제를 나누도록 허락을 받은 자들이란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며-"동무 처녀들"-그 걸음 또한 순수한 자들이라는-"시종하는"-사실에 주목하라. 지금 현재 정결케 되지 않은 자가 장래에 마침내 하늘로 인도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15절.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혼인 잔치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구속함받은 모든 성도들이 본향의 집으로 인도될 때 낙원에서 열릴 잔치는 그 얼마나 즐겁겠는가! 성도들 자신의 기쁨과 천사들의 즐거운 탄성으로 말미암아 새 예루살렘은 환희의 외침으로 메아리칠 것이다.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이신 예수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곳이 그들의 평화로운 거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잠긴 문 안에 거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그곳으로 들어갈 특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은혜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 그들은 영광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만일 인도함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곳에 들어갈 경우에는 어떠하겠으며 거기서 거할 경우에는 또 어떠하겠는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천국의 들판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아니라, 집안에 거하는 아들들이요,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왕자들이요, 또한 왕궁에 거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영원한 승리를 통해 이 모든 낙을 누리고 슬픔의 때를 잊어버릴 행복한 때가 필시 이를 것이다.

 

 

16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16절.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위대하신 왕을 섬기는 일에 있어 선조였던 고대의 성도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영적 후손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채운다. 노병은 떠나지만, 지원병들이 그 빈 자리를 채운다. 은혜의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속되는 한, 진실한 사도적 계승자들이 존속될 것이다.

 

"왕이 저희로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왕들이다. 어떤 사람이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한 종족이나 민족을 복음화시키면, 그곳에서 그는 왕의 영예보다 더한 영예를 얻으며, 그의 이름은 세상의 위인들의 그것처럼 존중된다. 예수님은 왕을 만드시는 분이다. 가장 숭고한 야망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불멸의 면류관이 그분의 신실한 군사들에게 하사된다. 온 땅이 그리스도를 위해 정복될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그 정복에 참예하는 자들에게 영예가 돌아갈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

 

 

17절.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여호와는 시편 기자의 입을 빌어 평강의 왕에게 끊임없이 자손이 이어질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명성을 약속하신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성과 성품 그리고 그분의 인격을 담고 있다. 그분의 백성은 이것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인생들이 존재하는 한 이 사실도 항상 진실로 통할 것이다. 한 세대에 유명했던 이름들도 다음 세대에 가서는 잊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예는 항상 신선할 것이며 그분의 명성은 항상 새로울 것이다. 하나님이 이 점을 보장하실 것이다. 그분의 섭리와 은혜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메시아의 명성은 인간에 의해 보장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원하신 분이 그것을 보장하며, 그분의 약속은 필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겟세마네와 갈보리에 대한 기억들은 만세토록 불멸의 광채로 빛날 것이다. 오랜 시간의 경과나 오류의 연기 혹은 지옥의 악의마저도 구속주의 영광스러운 명성을 흐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만민이 주의 주 되심을 고백할 것이며, 주께 합당한 경의를 영원토록 주께 돌릴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분께 우리 모두가 찬양을 드림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찬양은 아무리 많이 드려도 지나치지 않으며, 우리에게 항상 빚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매일 제공되는 유익들은 우리의 찬양 의무를 더 증가시킨다. 계속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은 더욱 풍성히 계시되고, 매년이 경과함과 더불어 천지의 찬송 머리말도 더 늘어난다. 죽음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사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고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 그분의 보좌에 찬양의 뇌성이 항시 울려퍼짐이 마땅하다.

죽음을 당하기까지 겸비하신 분께

위엄의 면류관을 돌려드리며,

호흡이 있는 자마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자.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소산님에 맞춘 것." 또는 '백합화에 맞춘 것.' 백합화는 순수와 사랑스러움을 상징하는 꽃이며, 솔로몬 성전 건축에도 그런 식으로 응용되었다(왕상 7:19, 22, 26; 대하 4:5 참조). 또한 아가서에서 교회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 비교된다(아 2:2). 이러한 머리말을 지닌 시편들로는, 이 시편과 69편, 그리고 80편 등을 들 수 있다(비교. 시 60편). 이 시편들 모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관한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 시 60편은 시 45편과 내용상 평행을 이루며,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하여 호소하는 내용이다. 시 69편은 수난을 통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시 80편 또한 시 45편 및 60편과 평행을 이루며, 낙심에 빠진 교회의 애가와 구원을 간구하는 탄원을 담고 있다. 이 세 편의 시편들은 모두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내는 음성(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소산님"(!ynvv)이라는 단어 속에 영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머리말. "소산님"은 여섯 개의 줄로 이루어진 현악기 또는 기쁨의 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거스틴 칼멧(Augustin Calmet, 1672-1757).

 

그 반면에, 키토(Kitto)는 이르기를, 이 단어가 '백합화'를 가리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므로 이것을 구태여 6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숫자와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고 한다.

 

머리말.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 혹자는, 백합화의 꽃잎 수가 여섯 개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이를 백합화들의 문양을 새긴 악기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소산님에"를 '소산님에 관하여'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이를 수많은 백합화들로 만들어진 결혼식용 화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서 잭슨.

 

머리말. "노래." "쉬르"(ryv)는 '노래'라는 뜻으로서, 여러 시편들의 머리말에 붙어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세 차례는 단독으로 그리고 열세 차례는 "미스모르"('시'라는 뜻-역자 주)라는 단어와 결합한 형태로 언급된다. 대체로 '쉬르'는 노래로 불려질 시라는 정도의 의미를 나타낸다. -존 젭(John Jebb).

 

 

시 45편 전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관련된 진리-이 진리는 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더 단 것이다-를 풍부하게 제시하는 이 시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간의 연대성(즉,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신비한 연합')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어떤 왕이 낮은 신분의 여인을 열애하여 그녀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일 때, 이 두 남녀는 하나로 연합되기 때문에, 그 여자의 빚이 그 왕의 빚이 되며 그의 부와 영예가 그녀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간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영혼들간에 맺어진 관계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모든 자연적인 관계들 중 가장 친밀한 관계마저도 단지 모형에 불과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시편들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스스로에게 담당시키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는다. 그분께 한량없이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총에 따라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 이러한 연합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허다하게 암시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결혼 축가라 할 만한 이 영광스러운 시편에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이 시편의 특별한 주제는, 그리스도께 택함받은 자들을 천상의 집으로 인도하여 영원토록 그분과 연합하여 낙을 누리게 하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윌리엄 빈니(William Binnie, D.D.)

 

1절.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내 마음에 좋은 말이 준비될 때, 나는 즐겁게 그분을 섬길 것이다.' 선원이 새로운 별자리를 따라 더 먼 곳으로 항해할 때 과거에 찾았던 곳을 잊고서 새로운 곳을 발견하듯이, 성숙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결핍을 느껴 더 먼 곳으로 신앙의 항해를 진행할 때, 성경의 새로운 말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새로운 시련을 당하며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일을 찾아내며 그리고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놓인 것들을 추구한다. 또한 분주하게 일에 몰두하는 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며, 일이 많을수록 마음의 흐트러짐도 덜하다.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

 

1절.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넘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쉬"(vjr)는 '끓다' 혹은 '거품이 넘치다'는 뜻으로서, 마음속에 할 말이 가득하다는 의미이다. -빅토리누스 바이스너(Victorinus Bythner).

 

1절.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여기서 우리는 예언의 영의 사역을 엿볼 수 있다. 그분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 선한 "말"이 싹트며, 이제 그의 마음은 그 짐으로 인해 무겁게 내리눌린다. 그리하여 마치 샘에서 물이 솟듯이 그 말이 혀를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엿볼 수 있다. 사실상 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지만,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일이다. 만일 성령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다면, 시편 기자는 자신의 관심사와 자기 마음에 기쁜 일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그는 자기 마음에 의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인도하심을 받는대로 행한다. -조지 하퍼(George Harpur, Christ in the Psalms, 1862).

 

1절. "좋은 말." 또는 복음.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절. 이는 율법상의 '민카'('소제')에서 취한 비유적 표현이다. 소제물은 기름 섞은(레 2:5) 고운 가루를 누룩을 넣지 않은 상태로 화덕에 굽거나(레 7:9) 기름에 튀긴 후에 제사장을 통해 여호와께 드렸다(레 2:8). 여기서 시편 기자의 말은, 마치 '민카'나 봉헌물처럼, 성령의 은혜라고 하는 기름에 섞인 채로 끓여져서 그의 마음속에 준비되었다가 이제 여호와 앞에 토로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에인즈워스(Henry Ainsworth).

 

1절. 에라스무스는 오리겐에 관해 말하기를, 그는 항상 진지했지만 그리스도에 관해 강론할 때 가장 진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하네스 몰리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의 뜨거운 감동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존 트랩.

 

1절. "왕에 대하여." 이 시편 전체가 왕 개인만을 다룬 내용인 것은 아니다. 상당 부분은 왕후에 관한 내용이며, 절반 가량이 왕후와 직결되는 언급이다. 하지만 왕의 가족에 관한 내용은 곧 왕 자신에 관한 내용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는 항상 자기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따라서,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곧 그분께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의 관심사는 곧 그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조지 하퍼.

 

1절. "내 혀." 혀는 마치 메모하거나 속기를 쓰는 펜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게끔 용장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매우 간략하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Holy David and his old English Translators cleared, 1706.

 

1절. "붓." 우리는 시편 기자를 성경 기록자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단지 붓과 같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2절.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시편 기자는 갑작스럽게 왕에 대한 언급을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묘사하고자 했던 영광스러우신 분이 눈 앞에 나타나시기라도 한 듯이,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서 곧장 그분 자신을 언급한다. 그의 어조에는 그 얼마나 벅찬 감동이 담겨 있는가! 먼저 그는 그분의 인격의 영광,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스러우심 등을 묘사한다. 육욕적인 눈에는 그분의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용모는 다른 여느 사람보다도 더 일그러졌고, 그분의 외관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진정 각성된 눈으로 볼 때, 그는 아름다운 왕이시며, 영광스러운 중보자요, 교회의 머리이자 신랑이시다. 또한 아버지께서 보실 때, 그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진정으로 영광스러우시다. 그래서 그분의 입술은 은혜를 머금고 있다. 본문의 표현에 주목해 보자. 그분의 거룩하고 순결한 인격을 위해 그분의 마음속에 은혜가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은혜가 그분의 입술에도 부어짐으로써, 그것은 마치 꿀처럼 그 백성 위에 떨어지며 구속함받은 모든 이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교류하게 한다. -로버트 호커(Robert Hawker, D.D.).

 

2절.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그대는 아름다운 것을 찾는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해 보라.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사람들과 천사들을 훨씬 능가하신다. 모세는 탁월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한다. 다윗은 불그스레한 혈색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또한 요세푸스는 이들 중 한 사람에 관해 전하기를, 그를 본 자는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놀라며 매혹되고 만다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비한다면 그들의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과 천사들을 함께 내세운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마치 양초의 불빛이 정오의 태양 빛에는 비할 바가 못됨과 같다. -에드워드 피어스(Edward Pearse, The Best Match, 1673).

 

2절. "왕은······아름다워." 그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아름다우시다. ① 잉태되심에 있어서. 그는 순결함 가운데서 잉태되셨고, 두 천사가 그 소식을 알렸다. ② 탄생에 있어서. 그는 때가 이르매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모든 것은 제때에 이루어질 때 아름답다(전 3:11). 때가 차매 그분이 태어나셨고, 한쌍의 별들이 그분을 가리켰다. ③ 어린 시절에 있어서. 그는 은혜와 은총 속에서 성장하셨다(눅 2:52). 박사들이 그분의 지혜에 탄복했다. ④ 인품에 있어서. 제롬은 이르기를, 만일 그분의 인품이나 용모가 특출하게 아름답지 않았다면, 만일 그분께 천상의 아름다움이 없었다면, 사도들과 온 세상이(바리새인들이 고백했듯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⑤ 성변용에 있어서. 그분의 옷이 빛이 나 눈처럼 희어지고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마 17:2). 그 광경이 베드로의 영혼을 너무도 황홀하게 만들었던 까닭에, 그는 그 아름다우신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산을 다시는 내려가지 말자고 부탁드렸다. ⑥ 수난에 있어서. 그분의 몸이 채찍과 회초리에 맞아 핏자국으로 선연해도 추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외쳤다. 매질과 침뱉음을 당하신 가운데서도 그분의 용모에는 위엄과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도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속되었다. 그래서 그분이 숨을 거두실 때,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 주위로 짙은 흑암이 에워쌌지만 그분으로부터는 그토록 아름다운 위엄과 천상의 광채가 비쳐 나왔던 것이다. ⑦ 부활에 있어서. 부활의 아름다움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인생의 눈으로는,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의 눈으로도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⑧ 승천에 있어서. 그 아름다움은 제자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서서 그분을 쳐다보게 했다. 하늘로부터 파2절. 오, 아름다운 태양이여, 아름다운 달이여, 아름다운 별들이여, 아름다운 꽃들이여, 아름다운 장미여, 그리고 아름다운 백합화여! 하지만 주 예수님은 그것들보다 억만 배나 더 아름다우시다. 그분을 그것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외람된 일이다. 해와 달에는 시커멓게 때가 묻었지만, 주 예수님은 지극히 아름다우시다. 꽃들과 백합화와 장미에는 시커멓게 때가 묻었지만, 주 예수님은 영원히 아름다우시다. 하늘에는 시커멓게 때가 묻었지만, 주 예수님은 티없이 아름다우시다. 천사들은 시커멓게 때묻은 존재이지만, 주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은 너무도 특출하시다.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2절.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서 아름다우신 존재는 하나님이시며, 땅에서 아름다운 존재는 인간이다.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함께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이 신인(神人)이신 예수님이다. -에드워드 하이드(Edward Hyde, D.D., 1658).

 

2절. "왕은." 친첸도르프(Zinzendorf)는 헤른후트(Herrnhut)의 어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내가 간절히 사모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2절. "왕은······아름다워."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주는 갑절이나 더 아름다워"이다. 킴치(Kimchi)는 히브리어 단어가 중복적인 의미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존 트랩.

 

2절.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이는 마치 이 은혜가 우리 주님 자신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일종의 은사였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사실은 우리가 복음서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개시하시기 전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께 임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모든 은혜를 나누어주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자신께도 그 은혜를 베푸셨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모든 면에서 자기 형제들과 같아지기 위해 그러한 일을 감수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이셔야 했다. 그들은 그분 안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열매들을 본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머리와 대표자로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성령은 아직도 그분의 교회 안에 거하고 계시다. -조지 하퍼.

 

2절.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주의 입술에 은혜가 가득하니. 주의 말씀 자체도 은혜로 가득하며, 말씀하시는 방식도 은혜로 가득하다.

(1) 주의 말씀 자체가 은혜로 가득하다. 그분은 받아들여도 좋을 만한 교훈을 베푸신다:"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모세의 율법 속에는 호되고 엄한 말씀이 담겨 있다:"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반면에 그리스도는 그보다 더 복된 말씀을 하신다. 그분의 첫 설교의 첫 마디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는 내용이다. 어거스틴은 이르기를, 그분의 입술은 은혜로 가득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분의 입에서 은혜로운 말씀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마 11:28; 눅 4:18; 요 3:16 등 참조).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아 5:13).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눅 4:22).

(2) 주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 은혜로 가득하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은 너무도 감미로웠던 까닭에, 그를 체포하러 갔던 관리들마저 이렇게 증거할 정도였다:"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그분의 말씀이 너무도 은혜로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았다. 그분의 부르심에 안드레는 곧장 그물을 버렸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지체 없이 자기 아버지와 이별했다. 또한 마태는 세금 징수하는 일을 버렸으며, 삭개오 역시 그 세리장 직무를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그분을 영접했다(마 4:20, 21; 9:9; 막 10:28; 눅 19:6 참조). 또한 그분의 말씀의 능력은 너무도 강하였던 까닭에, 바람과 물결도 그 말씀에 복종했다(막 4:39).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모든 왕들과 백성들이 솔로몬의 감동적인 말을 듣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고 놀란 나머지,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라고 외쳤다(왕상 10:8). 솔로몬은 모형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리스도는 폭군이 아니라 온유한 왕이시며, 자기 백성을 폭력으로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설복시켜 순종케 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홀이요 그분의 검이다. 예리한 화살과 같은 그분의 권고들을 통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께 복종케 된다.

견된 천사가 그들을 나무라자 비로소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행 1:11). -마크 프랭크(Mark Frank).

 

 

요컨대, 그분의 선한 말씀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잠 16:24). 꿀송이보다 더 맛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 것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이 무엇인가? 의인의 영혼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부에게 여러 가지 은혜로운 말씀을 베푸사,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신다. 사랑의 논리보다 더 강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다(히 12:6). 때로는 그 말씀으로 지침을 내리신다. 그분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딤후 3:17). 또한 그 말씀이 여느 사랑의 노래처럼 연애투로 사랑을 호소하는 내용일 때도 있다. "내 사랑하는 자", "내 자매", "내 아내", "여인들 중에 아름다운 자", "내 사랑", "나의 비둘기" 등과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때로는 약속의 말씀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 약속은 이생의 축복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장차 도래할 내생의 축복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전자로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 41:10)는 말씀을 들 수 있고, 후자로서는, 요한복음 17:21, 24을 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매일 하늘 법정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중재 역할을 감당하시는 것은 더욱 큰 은혜이다. 왜냐하면 만일 갈렙이 자기 딸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여 그녀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면(삿 1:15),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시는 아들의 간청을 거부하실 리가 있겠는가? 존 보이스(John Boys).

 

2절.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바로 앞 구절은 그분의 내적 완전성을 언급한 내용인 반면에, 이 구절은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흔쾌히 베푸시는 그분의 능력을 시사한다. -매튜 풀.

 

2절 중반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감미로운 사랑으로 가득한 것은 없으며, 그분의 마음처럼 자애로운 것도 없다:"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분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바로 전에 베푸신 마지막 말씀들(요한복음 13, 14, 15, 16, 17장에 수록되어 있음)처럼 사랑과 감미로움과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말씀도 없을 것이다. 인생들에 의해 쓰여진 사랑과 우정에 관한 모든 책들을 총동원해도, 이 요한복음 본문들 속에 표현된 감미로운 사랑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감미롭고 온화했던 까닭에, 교회사에서 사도 베드로에 관해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의 얼굴에는 항상 눈물 자국이 보였다고 한다. 왜 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미로우신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그 벅찬 감격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존 로(John Row).

 

 

3절. "칼을 허리에 차고." 고대의 관습에 의하면, 칼을 어깨에 둘러 고정된 벨트에다 매달았으며, 그 칼이 허벅지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것은 허벅지 뒷부분에 매달려 거의 땅에까지 닿았지만, 땅에 끌리지는 않았다. 기마병의 칼은 말의 뱃대끈에 의해 안장에 고정되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교회의 구속주께 칼을 허리에 차시도록 요청하고 또한 아가서에 나오는 연인이 이스라엘의 용사들에 관해 이르기를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아 3:8)고 말했을 때, 그들의 말 뜻인즉 무기를 말 그대로 허벅지에 맨다는(KJV 직역-역자 주) 것이 아니라 허벅지 뒷부분에 달린 허리띠에 매단다는 의미였다. 왜냐하면 고대 작가들의 보편적인 증언에 의하면, 칼을 허벅지에 매다는 것은 아이들이 칼을 가지고 놀 때 취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지금도 칼을 이런 식으로 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차딘(Chardin)은, "동양인들이 칼을 길게 늘어뜨리는 식으로 차고, 터키인들은 칼을 말등이나 그들의 허벅지에 찬다"고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을 허리에 차라고 구속주께 시적으로 부탁을 드림에 있어, 다윗은 엄숙하고도 공무적인 어떤 특별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습에 비추어 보면, 그의 말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모리어(Morier) 씨는 이렇게 말한다:"페르시아나 터키의 왕이 권좌에 오를 때, 그는 자신의 사브르를 찬다. 일례로, 모하메드 재퍼(Mohammed Jaffer)는 자기 형이 도착하기까지 총독직을 맡도록 칸(Khan)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칼을 자기 허벅지에 참으로써 그 권위를 부여받았다. 그가 그 영예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전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데이비(Davey) 박사는 동양의 대관식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전한다:"왕위에 정식으로 오르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의식이 실행되어야 했다. 그 의식인즉, 새 이름을 고르고 왕의 칼을 차는 것이었다. 왕은 위풍당당하게 성전으로 향했으며, 허벅지에 칼을 찬 상태로 그곳에서 예물을 드렸다. 그러고 나서 제사장이 구두약 가루가 든 단지를 내밀면, 왕은 자기 손가락을 거기다 넣었다."

 

이러한 일화들로 미루어보건대, 칼을 허벅지에 차는 것은 왕의 대관식 과정의 일부였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메시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만유의 주로서의 영예와 권능을 받으심에 대한 언급이다. -G. Paxton's Illustrations of Scripture.

 

3절. "칼."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무기에 비유된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빠르고 강력하며,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밝히 드러낸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가 제대로 적용되는 때란,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의 칼을 차고서 사용하시는 때뿐이다. 설령 골리앗의 칼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칼집에만 꽂혀 있다면, 혹은 만일 그것이 어린아이의 힘없는 손에 쥐어져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그것이 물리치거나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되지 못한다. 칼집 속에만 꽂혀 있거나 어린아이 같은 사역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무력하고 쓸모없는 무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무기에 대해서는 가장 연약한 죄인도 비웃을 수 있으며, 그것을 물리치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강하신 분이 그것을 차고 계실 때는 그렇지 않다. 그때는 그것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하늘의 벼락처럼 저항할 수 없는 무기가 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진실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의 팔에 쥐어진 무기보다 더 큰 효력을 발휘하는 무기란 없으며, 그것보다 더 날선 무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 칼에 대항할 수 없다. 번개 같은 눈빛을 지니신 분의 칼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우리 구원의 대장께서는 이 칼로 무장하고서 바위들과 산들로 둘러싸인 곳도 쉽게 헤치고 나아가 죄인을 찾아내시며, 그의 요새와 피난처를 파하시고, 강한 타격으로 금강석 같은 그의 마음을 쪼개시며, 또한 그로 하여금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떨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 있는 칼의 효력이 그러하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그 칼을 칼집에 꽂아두고만 계시지 말고 허리에다 차실 것을, 그리고 그것을 사역자들의 연약하고 무기력한 손에 방치해 두시지 말 것을 깍듯한 예의로써 요청하고 있다.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

 

3절. "능한 자여." 그리스도는 전능하시며, 자신의 모든 말씀을 유효하게 만드실 수 있고, 교훈이나 약속 혹은 위협 등과 관련된 자신의 말씀으로 하여금 그 의도에 맞게 효력을 발휘하게 하실 수 있다. -데이비드 딕슨.

 

3, 4절. 우리는 그리스도가 제시하시는 영광스러운 주장과 그분이 개입하사 승리를 거두시는 거룩한 전쟁을 기쁜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분의 주장은 진리와 온유함과 의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복음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분의 칼은 진리를 통해 우리를 바로잡으며, 그 진리의 뒷받침을 통한 온유함으로써 우리의 격정을 조절하며, 의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삶을 규모 있게 만든다. 이 신성한 주장이 이제껏 지지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하자. -잡 오턴(Job Orton, 1717-1783).

 

 

4절.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개종자들을 정복시켜 자신의 왕국으로 편입시킬 때 타시는 전차는, 위엄과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그 바퀴로 삼는다. 이는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분의 장엄하신 인격과 직무를 선포할 때 위엄이 나타난다. 성경에 수록된 그분의 모든 확실한 교훈들이 알려질 때 진리가 나타난다. 패역한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와 자비가 제공될 때 온유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안에서 이신칭의가 분명히 이루어질 때 공의가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헛되이 항해하시는 분이 아니며,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도외시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오신 목적인 복음 증거라고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데이비드 딕슨.

 

4절.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진리의 말씀과 공의의 온유를 타고······"이다. 시리아역도 이렇게 번역한다. 만일 이 번역을 채택한다면, 그 의미인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대한 목적이 세상에서 진리와 공의의 주장을 옹호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진리의 말씀을 타시는 것으로 언급된 것은, 진리의 말씀이 말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알려지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분이 공의의 온유 혹은 겸손을 타시는 것으로 언급된 것은, 온유나 겸손이 공의의 두드러진 특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고, 후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조지 하퍼.

4절.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이 표현이 암시하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먼저, 이는 그분이 자신의 권능을 통해 무서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받은 자는 그 가르침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는 그분이 그 전능하신 권능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체험하셔야 한다는 뜻이다. -아서 잭슨.

 

 

5절.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그리스도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복음 전파자들을, 특히 사도들과 복음 증거자들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제롬은 이르기를 "그분의 화살들이 도처로 날아가 수많은 사람들을 찔렀다"고 한다. 주님의 화살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분의 활시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으로, 일루리곤에서 스페인으로, 그리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갔으며, 그리스도의 대적들을 그분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5절.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시기를 구속주께 간청하는 동안, 갑자기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고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 듯하다. 그는 정복자이신 왕께서 아무도 대항하지 못할 칼을 차고서 영광과 위엄으로 무장하고는 복음의 전차에 오르사 십자가 군기를 드날리시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 날개를 타시는 듯했다. 그분 앞에서는 쩌렁쩌렁한 전령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주의 길을 예비하라." 골짜기를 돋우고, 언덕을 깎아내리라.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거친 곳을 평탄하게 만들라.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손으로 임하시며, 그 행한 바에 따른 보상을 받으신다. 전차를 둘러쌈으로써 그것을 인생들의 눈으로부터 가리웠던 환한 구름과 화염을 통해, 그는 유죄 판결이라고 하는 예리한 화살들이 사방으로 날아가서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며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사방에서 죄인의 무리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오른손을 펼쳐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 화살들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신 음성이 절망에 빠진 그 영혼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고, 그들을 권하사 그분을 따르게 하시며 또한 그분의 승리를 증거하고 그 승리에 참예하게 하셨다. 바로 그 환한 구름을 통해, 그는 무시무시하게 번쩍이는 보복의 번갯불이 그분의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사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죄와 사망과 지옥이 그 모든 군대와 더불어 그분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면서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패배함으로써 그분의 승리의 전차 바퀴에 묶여 끌려갔다. 반면에 하늘로부터는 황홀한 탄성이 들렸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계 12:10). 시편 기자의 황홀해진 시야에 그러한 광경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 광경에 도취하여 그는 이렇게 외친다:"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에드워드 페이슨.

 

5절. "왕의 원수"란 혹자의 생각처럼 단순히 "주의 원수"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그들이 적의를 품는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 때문임을 암시한다. 이 사실은 시 2편에 나오는 그들의 외침에서 잘 드러난다:"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절). -조지 하퍼.

 

 

6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원문상으로는 호격으로 표현된 듯하다. 현대의 유니테리언 교도들(삼위일체설을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치 않음-역자 주)도 이를 호격으로 이해한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 D.D., 히브리서 1:8에 관하여).

 

 

7절.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사람들 중에는 정의를 사랑하지만 정의대로 살지는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불법을 미워하지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미움은 그리스도의 미움이 아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분처럼 의를 사랑해야 하며, 그분처럼 악을 미워해야 한다. 그분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분처럼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미움은 도덕적 완전성과 연결된다. -조지 하퍼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은 그분 자신의 공적 때문이다. 2절에서 암시되듯이, 하나님이 그분을 영원히 축복하신 것은, 그분이 인생보다 아름답고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그분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은 그분이 스스로 겸비케 되사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9).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분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사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신 것은, 그분이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셨기 때문이다. -조지 하퍼.

 

7절.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그분이 주를 하나님, 왕, 아들, 혹은 말씀으로 삼으시기 위해 주께 기름을 부으셨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자는 "주께서 왕이요 하나님이시므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나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성령께 연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곧 아버지의 형상이시며, 우리 인생도 처음에 그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었나이다. 또한 성령조차도 주께 속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

 

7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언약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와 지체를 포함한 그분의 몸 전체를 함께 고려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2:12; 갈 3:16). 그 언약은 먼저 머리(이분은 언약을 위해 우리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셨다-사 42:6)와 더불어 체결되었고, 그러고 나서 지체들과 더불어 체결되었다. 하나님이 큰 곤경에 직면하신 그분을 붙드셨듯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부르짖는 우리의 호소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히 4:16; 13:5, 6 참조). -윌리엄 트라우턴(William Troughton).

 

7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각별하고도 특이한 방식으로 주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그리하여 주께서는 맡은 직무를 위해 성별되었나이다. 이 때문에 주는 주의 모든 "동류"나 협력자들보다 탁월하게 뛰어나시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성도들의 존엄성'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다. 첫째, 성도들의 존엄성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동류'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히브리어 "메하베라크"(^yrbjm)는 배우자, 동료, 동류, 협력자, 관계자 등과 같이 다양한 의미로 번역된다. '동류'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그분과 함께 참예하여 각자의 분량에 따라 동일한 성령을 받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은혜로 기름 부음을 받으며 동일하게 존엄한 호칭을 얻는다(요일 2:27; 계 1:6).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하나이다. 거룩하신 영께서 그분 안에 거하시는가? 그렇다면 그분은 그들 안에도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요 제사장이신가?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분과 연합하는 은혜를 통해 왕이요 제사장인 셈이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왕이자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 성도들의 존엄성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동류, 신부, 혹은 협력자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나 탁월성은 그분의 전유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분과 함께 소유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사실상 그분이 성령 충만하신 것도 그들을 위함이다. 태양이 빛으로 가득한 것은 자체만을 비추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비추기 위함이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혹자는,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를 "왕의 동류들을 위하여"로 번역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은혜를 처음 받은 분이요 그것들을 신성의 원천으로부터 직접 그리고 처음으로 받은 분이지만, 그분의 백성을 위함임을 시사한다. 그 백성은 자신의 분량에 따라 각자 그분으로부터 각종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다. 성도들의 존엄성은 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들의 협력 관계로 말미암는 것이다. 둘째로, 비록 성도들이 이러한 모든 존엄성에 함께 참예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인정되어야 함은 엄연한 사실이다. 만일 성도들이 은혜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더욱더 풍성하게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존 플라벨.

 

7절. "즐거움의 기름." 축제나 기타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얼굴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기름을 바르곤 했다(시 23:5; 104:15; 사 61:3).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얻으신 것은 성별케 하시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는 기름으로 부음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빌 2:9; 히 12:2). -조반니 디오다티(John Diodati)

7절. 보라, 너희 아리우스파 사람들이여, 그런즉 진리를 인정하라. 시편 기자는 우리 모두를 가리켜 주의 '동류' 혹은 '참예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무로부터 지음받아 생겨난 것들 중 하나라면, 그분 자신도 참예하는 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찬송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이 그분의 은혜에 참예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리는 결론인즉, 그분은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구별된 존재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요 광채요 또한 지혜이시고, 만물이 그분의 은혜에 참예하며, 또한 만물이 성령 안에서 그분에 의해 성결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이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왕이 되시기 위함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토록 나라를 소유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다.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등과 같은 이스라엘 왕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서 왕이 되었다. 반면에 구주께서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다스리시며, 또한 성령을 나누어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사람으로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 언급되는데, 이는 그분이 승귀와 부활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 및 친교를 통해 우리를 위한 더 많은 은총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다······또한 그분이 성령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통해 성령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론이나 다윗 등과 같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즉, 자신의 모든 동류들보다 탁월하신 분으로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음받으신 것이다. 이 기름에 대해서는 그분 자신이 선지자의 입을 빌어 성령이라 해석하신다:"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사 61:1). 또한 사도 누가도,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하셨으매"(행 10:38)라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

 

 

8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이 표현에는 애매모호한 점이 많지만, 탁월하고 충만한 기름 부음이라고 하는 전반적인 개념은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은 최상 품질의 기름이나 연고를 바른다고 하는 또 다른 개념과도 결부되어 있다. 몰약과 침향과 육계는 특이한 향을 내는 재료들로서, 최상품 연고를 제조하는 데 쓰였다. 몰약과 육계는, 출애굽기 30:23, 24에서 거룩한 기름을 제조하는 두 가지 향료들로서 언급된다. 그 모든 재료들은 신성시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것을 사람의 몸에 붓거나 사적으로 쓸 향수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삼는 것을 금하였다. 상아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고, 귀한 가옥 장식용 재료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이러한 장식을 위해서는 가장 정교한 기술과 가장 비싼 경비가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상아궁의 웅장하고 화려한 구조와 값비싼 그 가구들을 고려하건대, 그곳에서 사용된 기름은 최상품이고 그 양 또한 매우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상아궁에서 사용될 정도의 최상품 기름으로 풍부하게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는 몇몇 의식에서처럼 머리에다 소량의 기름을 떨어뜨리는 식으로 기름 부음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 부어진 기름은 너무도 풍족해서 그 모든 옷에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가득 밸 정도였다.

호슬리(Horsley) 주교는 다소 다른 번역을 제안하였다. 그 제안에 의하면, 본문에 시사되는 풍족함이라는 개념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향기와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항인 기름 부음 그 자체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가 제안하는 번역인즉 이러하다:"주의 옷은 온통 몰약과 침향과 육계투성이여서 상아궁보다 귀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귀하다." 시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문자적이기도 한 이 번역은, 비교적 덜 애매모호한 표현이며, 모든 동류보다 뛰어나신 우리 주님께 부어진 기름의 탁월성을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로써 잘 보여 준다. 그분의 옷은 매우 강렬한 향내를 내며 즐거움의 기름으로 흠뻑 젖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하고 향기로운 연고 재료로 사용되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이는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성령께서 예수께 임하사 천상적인 모든 풍성한 은사들을 지니고서 그분과 함께 거하심"을 더할 나위 없이 잘 강조해 주고 있다. 그러한 천상적인 기름으로 부은 바 된 그분의 옷은, 말하자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아궁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상아궁의 가구들은 아무리 강한 향내를 풍긴다고 해도, 방향성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향수는 날아가버리며 향기는 이내 감소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몰약과 침향과 육계"투성이인 옷을 입으신 그분께는 영원하고 풍성한 향기가 보장된다.

한편, 평행법을 통해 "왕을 즐겁게 하는 자들"(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혹은 '왕을 즐거워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첨가된다. 여기서 암시되는 사람들을 상아궁의 소유주들이라고 보는 것은 막연한 추측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궁전이란 왕들의 거주지이다. 또한 기름 부음받은 왕들은, 문자적으로나 예표적으로나 혹은 영적으로나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의 동류이다. 명백한 사실은, 그분의 기름 부음받으심이 그 일과 관련되는 모든 자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듯이, 그분의 동류라고 하는 영예를 얻은 자들이 기름 부음받음으로써 그분께 기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 언급된 사람들이란, 다름아니라 바로 그분의 "동류"이다(7절). 만일 그렇다면, 기름 부음받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동류가 서로 비교되며, 그리스도의 경우가 훨씬 더 탁월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데이비드 피트캐른(David Pitcairn, The Anointed Saviour, 1846).

 

8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향기가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옷이 그분의 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실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의와 열심으로 옷입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로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진정으로 깨끗게 하고 정결케 하며 또한 흠없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의는 믿음의 의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을 흠이 없게 해준다. 반면에 사람의 의란 행위를 통한 의로서, 추잡한 위선자로 만든다. 그리고 "상아궁"이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경외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상아란 견고하고 흰 물질이며, 궁전은 왕이 거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왕이 되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를 처소로 삼는다. 수많은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 주 예수님의 기쁨이요 낙이다. -리처드 쿠어(1683).

 

 

8. "상아궁을 통해 왕을 즐겁게 하도다."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로 번역하였다-역자 주.) 주해가들은 시편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을 느껴왔다. 이제까지 제시되어온 여러가지 주해들로 인한 혼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 구절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을 통해"로 번역된 단어는 아라비아 펠릭스에 위치한 곳의 지명('민네아')이기도 하다.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그곳에는 "몰약과 향료가 풍부했다"고 한다. 한편 역사학자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에 의하면, "아라비아 펠릭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상아와 보석들로 장식된 호화로운 집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는 몰약과 향료가 풍부했고 그곳의 거주자들은 자기 집을 상아로 장식했다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건대, 우리는 시편 기자가 나타내고자 한 의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을 통해"에 해당하는 단어를 '민네아'로 대치시키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것이다.

 

몰약과 침향과 육계는 모두 주의 옷이며,

민네아의 상아궁으로부터

그들이 주를 즐겁게 하였나이다.

 

바로 앞 절을 통해, 당신은 그리스도께 부어진 기름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지칭되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그 기름의 재료가 된 향료를 통해 '즐겁게 되신'(히브리어상으로 두 군데 모두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셈이다. 또한 본문은 그러한 향료들이 향료가 가장 풍성하게 나는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고 또한 최상품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상아궁에서"라고 말한다. 이는, 집들뿐만 아니라 궁전들-대인들의 저택을 가리키며, 그곳에는 자연히 최상품 향료들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로부터도 즐거움의 기름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 몰약과 침향과 육계가 나왔고 그것이 주를 기쁘시게 했음을 의미한다. 그 기름은 너무도 풍성하게 부어져 그분의 옷을 온통 뒤덮었던 까닭에, 그분의 옷 자체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인 듯이 보였다. 더욱이 도유용 기름의 재료로 쓰인 향료들은 최상품이었고, 말하자면 민네아의 상아궁들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시편 기자가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바로 이 점인 듯하다.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신 바로 그 성령의 은사와 은혜들이 얼마나 탁월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조지 하퍼.

 

8절. "상아궁." "상아 궁정."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건물을 장식하거나 아로새기기 위해 많은 양의 상아가 사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금으로 치장된 네로 황제의 왕궁을 가리켜 "빛나는" 혹은 "황금빛의" 따위와 같은 수식어로 묘사한 사실을 연상시킨다. 헬라인들은 매우 오래전부터 실내를 이런 식으로 치장하는 방법에 익숙했다. 호머는, 오디세이 제4권에서, 라케다이몬에 위치한 메넬라오스의 궁전을 묘사하면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호레이스(Horace)와 오비디우스(Ovid)에 의하면, 로마인들도 종종 자신의 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치장한 듯하다. 목격자들의 묘사에 의하면, 현대에도,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아름다운 파티마의 겨울 별장이 "자개와 형형색색의 상아들과 올리브나무 등으로 만든 장식물로 굽도리널을 대었다"고 한다. 또한, 러셀 박사의 말에 따르면, 알레포에서도 보다 값비싼 저택을 장식하는 데 상아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리처드 맨트(Richard Mant).

8절. "상아궁." 상아 건축물(왕상 22:39; 아 7:14)이나 상아 금고 또는 귀한 옷들을 보관하는 옷장 등이 현재까지 소장되어 있다. -Westminster Assembly's Annotations.

 

8절. "왕을 즐겁게 하도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본문의 주어를 다음 구절에 나오는 "열왕의 딸"로 보는 것이다. -윌리엄 플러머.

 

8절. 게제니우스와 델리취는 "미니"(ynm)를 '현들' 혹은 '현악기들'이라는 뜻인 복수형 "미임"(!yym)(시 105:4)의 약어 형태로 간주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기들이 왕을 즐겁게 하도다." -댈먼 햅스톤(Dalman Hapstone, 에발트와 랑게도 이러한 번역에 동의한다).

 

 

9절. "열왕의 딸." 참된 개종자들과 실제적인 성도들로 구성된 보편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참된 아내이긴 하지만, 소명과 순종과 신앙 고백을 통한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판단에 따른 성도들로 구성된 가시적인 교회들도 많다. 참된 개종자들(이들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확실하게 아시는 하나님의 칭찬만을 구한다)로 구성된 참된 교회는 단일하며, '왕후'에 비유된다. 그런가 하면, 그 단체들 및 연합체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특정 교회들은 그 수효가 많으며, 왕후의 시중을 드는 '귀비들'에 비교된다. -데이비드 딕슨.

 

9절. "왕후." 여황 마틸다(Matilda)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왕의 딸이자 왕의 모친이자 또한 왕의 아내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이 시편에서, 교회가 왕이신 주님의 딸이자("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13절), 왕의 모친이자("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16절) 또한 왕의 아내임을("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본절) 암시하는 듯하다. 특히, 왕의 아내라는 것을 가나안식으로 이해하자면, 영적인 의미에서 영광의 왕과 결혼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신부라는 뜻이다. -존 보이스.

 

 

10절.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 가지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 우리의 모든 탐욕, 옛 아담의 모든 길, 우리 아버지의 집. 아담의 배교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곳과는 다른 처소를 택해 왔다. 그 이래로, 우리 아버지의 집은 악한 습성의 집이요 죄와 악의 집이다. (2) 세상적인 모든 유익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러한 제반 인간 관계들마저 기꺼이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3) 모든 자아, 자기 의지, 자기 의, 자기 만족, 자기 확신, 그리고 자아 추구 등. -루이스 스터클리(Lewis Stuckley).

 

10절.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벌이 어느 꽃을 떠나 다른 꽃으로 이동할 때, 그 벌은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꿀을 담고 있는 꽃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만일 자신이 훨씬 더 감미로운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갖가지 감미로운 유익들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하는 정원과 결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원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곳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이끄신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떤 꽃들과는 다른 차원의 감미로운 꽃들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별하신 자비와 선하심과 축복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품을 떠난다면, 이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위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버로즈(Jeremiah Burroughs, Moses, his self-denyall, 1649).

10절. "잊어버릴지어다." 만일 그대가 산 위에 있다면, 소돔을 향해 뒤돌아보고자 하는 애착을 갖지 말라. 만일 그대가 방주 안에 있다면, 까마귀처럼 세상으로 도로 날아가지 말라. 만일 그대가 가나안에 정착해 있다면, 애굽의 좋은 음식을 잊어버리라. 만일 그대가 미디안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면, 하롯 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려들지 말라(삿 7장). 만일 그대가 지붕 위에 있다면,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라(막 13:15). 만일 그대 손에 쟁기가 쥐어져 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라(눅 9:62).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는 기억의 기술보다는 오히려 망각의 기술을 배우기를 원했다. 철학은 기억하는 기술이며, 신학 속에는 망각하는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 학생들에게 제시한 첫번째 교훈은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이란 마음속에 든 지식을 기억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첫번째 교훈은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네 백성을 잊어버릴지어다." "회개하라"(마 4:17). "악에서 떠나······"(벧전 3:11). -토머스 애덤즈(Thomas Adams).

 

 

11절.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이것은 너무도 감미로운 약속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순수해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마치 수도승과 같은 방법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알고 계신다. 가톨릭 체제하에서 내게 직면했던 유혹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내게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성례식에 참여하겠건만"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히 자신 안에서 정결함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삶을 점검하고서 자신 속에서 정결함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은혜를 입을 필요가 없이 자기 자신의 공적에 근거하여 의롭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당신은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신다:"내가 네게 유익한 조언을 들려주겠노라. 만일 네가 내 말을 들으면, 너는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네 모든 행위들을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또한 그분으로부터 '네 기도가 나를 기쁘게 한다. 네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이 나를 기쁘게 한다!'는 칭찬을 듣고자 한다면, 내 말을 듣고 깨닫고 또한 네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네가 정결해질 것이다. 네가 내 말을 듣고 깨달으며 너 자신의 의와 율법과 전통과 수도원 따위를 모두 잊어버리면, 그리고 네가 믿음을 가지면, 너는 아름다워진다. 그 아름다움은 너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으로 너를 꾸미신 그 왕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신의 의와 거룩성과 진리와 인내와 그리고 성령의 온갖 은사들을 네게 베푸셨기 때문이다······성령은 가장 고양된 표현을 사용하신다:'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말하자면, 너는 이러한 믿음을 통해 무엇이든 바라는 바를 그분께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힘에 강권당하는 자처럼, 그는 자발적으로 네 의사를 따르사 너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바대로 네 속에서 일단 시작하신 사역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먼저 세상과 마귀와 육신 등으로 말미암는 시험들을 네게 닥치게 하시며, 이러한 시험들을 통해 너로 하여금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다. 그는 조급한 심정으로 아내를 사모하는 사랑으로써 자신의 신부인 너희를 포옹하신다······." 따라서, 이 모두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우리의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의 장점이나 미덕에 달린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에 달린 것도 아니다. 이 은사들을 통해 우리는 미덕을 드러내며 율법에 따르는 모든 삶을 실천으로 옮긴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데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바람직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아름다움이 바로 이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1절. 이 시편에서는 왕권과 위엄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소개된다. 그런가 하면, 자기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시는 분으로도 언급된다. 이는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분이 성도의 아름다움을 기뻐하시는 정도는 보통 수준이 아니라 "간절한 열망"(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사모하실지라"고 번역했다-역자 주)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성도의 아름다움이 더할수록 그분의 사모하는 마음도 증가한다. 또한 그분의 그러한 마음을 알 때, 성도는 더욱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더욱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 수 있게 된다.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우리의 아름다움과 비교해보건대 그리스도께는 보다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는 자기 신부의 얼굴의 모든 주름살과 흠을 깨끗이 제거하기까지 줄곧 돌보신다. 이는 사도 바울이 언급한 바와 같이(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세우시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자기 눈에 기쁘고 즐겁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2절.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두로의 딸이란 이방인의 딸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이스라엘과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도시인 두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될 민족들을 예표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와서 예수께 나아왔던 어느 가나안 여인은 처음에 '개'라고 불리우는 수모를 감수했다(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처음에 그 여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왕"께로 나아와 간절한 호소를 드리는 가운데 그분을 믿음으로써 아름답게 변화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어떤 말씀을 들었는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 왕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크게 사모하신 것이다. -어거스틴.

 

12절. "예물을 드리고." 자신의 재산을 판 자들이 이 "왕후"의 호의를 사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왔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행 4:34, 35). 초대 교회에는 따뜻한 사랑이 넘쳤다. -어거스틴.

 

12절. "부한 자." 사실 그들은 은혜 안에서 부하며, 그들에게 임하는 은혜는 부유함으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는다.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의 육체가 강건할 때 그들의 영혼도 형통하다. 그런가 하면 본절의 예언처럼, 세상적인 축복으로 가득한 자들도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간절히 사모하기도 한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자신의 은총 혹은 교회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은총이란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아 교회에 주어진 영적 탁월성과 내적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부유한 자들이 예물을 가져와서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며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 일이다. -조셉 캐릴.

 

 

13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천상의 혈통을 상기할 때, 그들은 영혼의 아름다운 기질 면에서나 삶의 양식 면에서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딸을 가리키는 "왕의 딸"이란 그 왕의 아들의 신부이기도 하다. 믿음을 지닌 영혼들은 "모든 영화를 누리며," 자기 자신에게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신랑에게도 영광이 되는 거룩성으로 치장한다. 이는 곧 천상적인 영광의 시작이다. 또한 "궁중에서"라는 표현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영화로운 모습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은밀한 신앙이라고 하는 내적 침실 안에 앉아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신랑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도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버지와 신랑은 사람의 내면을 보시며,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순결과 정조를 지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의 옷은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자연인들이 입은 옷이 제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성도들의 옷에 비교하면 빛나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들의 옷은 금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것으로서, 갖가지 아름다운 무늬들이 아로새겨져 있고, 하나님 그분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그 옷의 색상은 각양각색인데, 이는 다양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성령의 은혜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그 옷에는 프리기아의 자수업자들이 수를 놓거나, 혹은 아가 7:1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공교한 장인의 작업이 들어가 있다. 신부인 성도는 속으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겉으로도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들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며"(빌 2:16), 자선을 행하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권고하고, 또한 이러한 일들을 통해 왕께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나누기 위한, 그리고 하늘에서나 땅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헤르만 비치우스(Hermann Witsius, 1636-1708).

 

13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1) 그녀의 주된 영화는, 그녀가 왕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그토록 친숙한 교제를 나누도록 허락받았다는 데 있다. (2) 그녀가 왕궁의 내실에 앉은 것 자체가 매우 영화로웠다. 왜냐하면 그 방들은 온갖 종류의 화려하고 영예로운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녀는 공적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뿐만 아니라 내실에 머물 때에도 영화로운 성장을 갖추곤 했는데, 이는 왕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지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함이 아니었다. (4) 그녀의 덕스러운 마음과 내적 자질이 바로 그녀의 가장 근사한 장식이자 영광이었다. 나는 이 중에서 네번째 견해를 선호한다. -아서 잭슨.

13절.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성도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용모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해야 한다. 자애로운 남편은 애정어린 권고와 모범적인 삶을 통해 자기 아내를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그리하여 그 남편은 아내의 변화된 인격을 보고서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솔로몬께서도 애굽 출신인 자기 왕후의 성향을 변화시켜 그녀의 남편이자 주이신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따르게 하시며, 그녀로 하여금 그분의 뜻과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즐거이 행하게 하시고, 순종을 최고의 위안으로 삼게 하시며, 또한 즐겁고도 애정어린 경외의 심정과 어우러진 천상의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그는 가변적인 애정과 세상적인 생각과 세겜의 어리석은 풍조에 대한 갈망과 가나안 혈통의 여자들을 향한 육욕적인 이끌림과 또한 흥청거리는 세상의 천박한 기질 따위를 그녀의 마음에서 모조리 뿌리뽑으사, 이 쇠락하는 인생의 가련한 허식들을 비웃으며 지나치게 하시며, 육욕적인 마음을 유혹하는 보잘것없고 야한 것들의 실체를 제대로 평가하게 하신다. 마침내 그녀는 고귀하고 대범한 판단에 이르게 되며,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배설물과 찌꺼기로 여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그녀의 생명의 주께서 그녀의 구속을 위해 세상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듯이, 그녀는 그분께 순응한다는 표시로서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히기 시작하며, 마침내 "모든 영화를 누리게" 된다. -사무엘 리(Samuel Lee, The Triumph of Mercy, 1676).

 

13절. "안에서."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궁중에서"라고 번역하였다-역자 주.) 방주의 바깥 면뿐만 아니라 안쪽 면도 역청으로 발랐다. 신실한 사람 역시 그 겉과 속이 한결같다. 아니, 그는 겉으로 보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열왕의 딸"은 때로는 외관상으로 누추한 삼베옷을 입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안으로는 모든 영화를 누리며 그 내면의 옷은 금으로 수놓은 것이다." 성전 역시 그러했다. 외관상으로는 나무와 돌로 지어진 건물에 불과했지만, 그 내부는 우아하고 아름답고 특히 성소 안에는 모든 것이 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소는 지붕뿐만 아니라 마루도 금으로 입혔다(왕상 6:30). -존 셰필드(John Sheffield).

 

13절. "그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금으로 수놓았다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가장자리 장식을 다는 것이나 금으로 입히는 것 혹은 에나멜과 금을 섞어 칠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렇게 치장된 옷은 매우 우아하고 영화로운 느낌을 주기 마련이었다. 성막 직무를 맡은 자들의 예복과 대제사장 예복이 그러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예표하는 역할을 했다(출 28:11-14; 출 39:1-6). -윌리엄 트라우턴.

 

13절. 최근에 라 콤베(La Combe) 신부는 어느 공식 석상에서의 설교를 부탁받았다.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독특하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들의 호기심이 잔뜩 자극되었다. 그는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라는 시편 45:13을 본문으로 채택했다. 그는 이 본문에 나오는 왕을 '그리스도'로, 왕의 딸은 '교회'로 각각 이해했다. 그가 가르친 내용인즉 이러했다:사람들의 원래적 타락 상태가 아무리 자명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그리스도께 의탁하여 그분과 온전히 연합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그 원래적 타락 상태로부터 구출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속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는"(KJV 직역-역자 주)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그들은 이기심과는 무관한 순수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내면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믿음의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게 된다. 이제 그들은 사도 바울의 표현을 자기 자신에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른다:"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성숙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며, 다만 그러한 가능성에 관해 밝히고자 하였다. 인간의 타락상이 아무리 심각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과 풍부하고 온전한 약속들 그리고 주의 계명들이 궁극적 승리를 확신케 하며 그 승리를 위해 매진하도록 격려한다. -Life, Religious Opinions and Experiences of Madame de la Mothe Guyon.

 

 

14절.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아무리 뛰어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나는 주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왕후에게는 진실한 동료들이 있을 것이다. 신비한 몸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엡 4:16; 골 2:19). -윌리엄 트라우턴

 

14절.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 이들은 교회 구성원들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비유적인 내용의 전개를 돕기 위해 신부 들러리라고 하는 상징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왕의 신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 대단한 행렬이 그녀를 수종들며 따르기 마련이다. 열왕의 딸들도 거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왕관을 썼던 모든 자들도 언젠가는 십자가 발치에서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에 국제 상업 중심지로 통했던 두로의 딸도 거기 있어서, 세상의 모든 상거래 활동을 통해 주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것이다. 스바의 왕들도 예물을 바칠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거기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종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 만민들이 함께 모일 것이다. 그들은 "처녀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킨다. 그들은 세상의 우상들과 결별한다. 그들은 세상의 오염을 두려워한다. 그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자기 영혼을 어린양의 피로 매일 씻음으로써 정결하게 보존하는 일이다······그들은 왕의 신부를 "시종"한다. 그들은 폭풍우가 닥치든지 햇빛이 비치든지간에 그녀 곁에서 동행한다. 그들도 그녀를 따라 중생에 이르며, "사랑하는 자"를 함께 찾아 나선다(아 3:2, 3). 그들은 그녀를 따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간다. 그들은 그녀를 따르기 위해 룻처럼 자기 부모 곁을 떠난다(룻 1:16). 그들은 갈렙처럼 주를 온전히 좇는다. 위기가 닥치고 "주의 편에 선 자가 누구냐?"라는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며 또한 헌신을 고백했던 자들이 마치 폭풍 앞에서 제비들이 날아가버리듯 자취를 감출 때에도, 그들은 그녀를 따른다. 핍박이 닥치고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들이 베옷을 입고 예언해야 하며 또한 피의 세례를 거쳐 면류관에 이르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에도, 그들은 그녀를 따른다. 이는 피던의 심경과 같을 것이다. 잔혹한 피의 박해가 닥치고 자신의 집이 쓸쓸한 폐허로 변했을 때, 그는 앞서 영광스러운 순교의 길을 걸어간 리처드 카메론(Richard Cameron)을 생각하면서, "오, 나도 리처드와 함께 있다면 좋으련만!"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지었다고 한다. -덩컨 맥그레거(Duncan MacGregor, M.A., The Shepherd of Israel; or, Illustrations of the Inner Life, 1869).

 

 

15절.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그 어떤 결혼식도 천국에서 거행될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의 결혼식만큼 의기양양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간에는 결혼식이 거행되는 집을 '베딜루아'(찬양의 집)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온통 기쁨이 넘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신자들이 누리게 될 기쁨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영광스러운 계획이 성취되고 완수되는 복된 광경을 지켜보면서 기뻐하실 것이다.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쓰라린 고통과 고뇌의 복된 결실을 보고서 기뻐하실 것이다(사 53:11). 성령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바 성결케 하는 일이 완수되는 것을 보고서(고후 5:5), 예전에는 거치른 돌과 같던 영혼들이 이제 영적 성전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돌들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실 것이다. 천사들도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러한 계획의 기초가 마련된 때에 큰 기쁨이 있었다(눅 2:13). 그러므로 이 계획이 완수되는 때에도 "은혜로다, 은혜로다"라는 탄성과 더불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다. 또한 성도들 자신은 그 왕의 궁전에 들어가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할 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살전 4:17). 사실 그때에는 처처에 기쁨이 넘칠 것이며, 마귀들과 정죄받은 자들은 신자들의 영원한 복락과 영광을 보고서 시기심에 사로잡혀 이를 갈 것이다. -존 플라벨.

 

15절. "인도함을 받고." 우리는 본문의 표현 방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함을 받는다. 교회는 확신과 회심에로 인도되며 자발적인 마음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없다(요 6:44). -로버트 호커.

 

15절.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이 시편에서는 두 개의 호화로운 왕궁이 언급된다. 그 중 하나는 상아궁이며(8절), 이는 성도들의 집회를,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드러내시는 신령한 예배 의식을 상징한다. 여기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은 감미롭고도 자상하다(아 1:8; 시 84:2). 또 다른 "왕궁"은 15절에 언급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궁이며, 정금으로 지은 영화로운 저택들보다 더 밝고 웅장하다(요 14:2). -윌리엄 트라우턴.

 

 

16절.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오 하나님의 교회여, 그대 눈에 베드로나 바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대를 영적으로 낳은 영적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 자신의 후손을 통해 그대가 "열조"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

16절.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왕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이새에 이르기까지 왕통을 이어온 그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많지만, 이제 영원한 왕이신 그분께 새벽 이슬 같은 후손들이 생겨난다(시 110:3). 그들은 왕으로서 세상의 왕좌를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마 19:28). 또한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다(고전 6:2). -톨룩.

 

16절. "온 세계의 군왕." 다른 왕들의 통치 영역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분은 성도를 온 땅의 군왕으로 삼으실 것이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왕국을 소유할 것이며, 왕의 자유를 누릴 것이고, 왕의 풍요로움과 능력과 승리를 얻을 것이며, 또한 왕의 영광을 얻을 것이다. -존 프레스턴(John Preston).

 

 

17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시고, 세세토록 더욱더 많은 이들을 그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교회로 이끌어들이사 그분의 가족으로 삼아 친교를 나누시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왕으로서의 심령을 갖게 하시는 일은, 그분의 위엄을 더해 주며 그 영원하신 영광을 드러낸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리고 이 시편의 앞 내용과 관련하여, 그는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데이비드 딕슨.

 

17절.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영영히'에 해당하는 단어에 불변화사가 덧붙여져 있어서 끝이나 종국이 없는 영원 무궁함을 강조한다.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D.D., 히브리서 1:8에 관하여).

 

17절 하반절.

 

아침이 창공을 비출 때,

내 마음은 깨어나 이렇게 외친다,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잠을 통한 안식을 얻지 못할 때,

내 영혼은 잠잠히 탄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하늘의 영원한 지복 가운데서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높이 계시는 말씀이신 하나님께,

천군 천사들이 외치기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죽을 운명인 인생들도

소리 높여 찬송을 드리기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온 땅에 두루 메아리칠,

즐거운 노래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바다와 하늘도,

깊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까지 화답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내 생명이 지속되는 한,

내가 줄곧 부를 신령한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세세토록 이어질

영원한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를 받으소서.

-에드워드 캐스월(Edward Caswall 역, Poems, 1861).

 

 

[설교힌트]

 

1절. 서언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설명한다. (1) 그것은 ‘좋은’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2)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신다.

 

1절. 본문을 통해서 본 기자의 성격. (1)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신실하다-“내 마음에서.” (2) 그는 감정이 풍부하다. (3) 그는 거룩한 묵상을 하는 사람이다. (4) 그는 체험하는 자이다-“지은 것을.” (5) 그는 주를 증거하는 자이다.

 

1절. 기독교 가르침을 위해 요구되는 세 가지 사항. (1) 가르치는 내용이 좋아야 한다. 가장 좋은 주제란, 바로 “왕에 대한” 것이다. (2) 펜으로 쓰듯이 조리 있고 유창하게 말하는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표현력은 천부적인 것도 있고 훈련을 통한 것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것도 있다. (3) 그 가르침에다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G. R.

 

 

2절. 예수께서 다른 탁월한 사람들보다 더 아름다우신 것은 어떤 측면에서일까?

 

2절. 예수님의 인격, 그분의 복음, 그리고 그분의 충만한 축복.

 

2절.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고 또 찬양해야 한다. 천사들, 하나님, 성경,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도 다 찬양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러한 찬양은 천상의 일을 이 땅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2) 우리가 그분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① 그분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그분 안에서 풍성하게 발견되는 지혜와 의와 사랑과 온유하심 등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우심과

하나님으로서의 아름다우심이,

우리 구주 안에서 결합되어 광채를 발하도다.

 

② 그분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 안에 쌓여 있다. ③ 그분의 축복 때문에. -G. R.

 

2-5절. 이 구절들은 주 예수를 소개하고 있다. (1) 매우 친절하고 자애로우시다. (2)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가득하시다. (2) 대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신다. -매튜 헨리.

 

3절. 군사들은 대장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왕 되신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예요, 기쁨이요, 안전이요, 힘이요, 승리요, 또한 우리의 상급이다.

 

3-5절. 메시아의 승리를 예언하며 또 그것을 바라는 내용이다. -에드워드 페이슨의 설교.

 

 

5절. (1) 사법적인 보응이라고 하는 화살은 예리하다. (2) 선하신 섭리라고 하는 화살은 더욱 예리하다. (3) 설복시키시는 은혜라고 하는 화살은 가장 예리하다. 전능자의 전통에는 이러한 화살들이 가득 담겨 있다. -G. R.

 

5절. “살”이란 무엇이며, 누구의 것이며, 또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겨냥하는 것인가?

 

 

6절. 하나님, 왕, 그분의 보좌, 그 왕권의 지속성, 그분의 홀. 경배하고, 순종하며, 의뢰하고, 묵묵히 따르며, 또한 즐거워하자.

 

6, 7절. 그 제국의 영원성, 공정함, 확고함, 의기양양함.

 

7절. “악을 미워하시니.” 그는 자신을 유혹하며 공격했던 악을 미워하셨고,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악도 미워하사 그것을 없애기 위해 죽음을 당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정죄하고자 다시 오실 것이다.

 

7절. 그리스도의 사랑과 미움.

 

 

8절. 그리스도의 옷-그분의 직무, 그분의 성품, 그분의 규례, 그리고 그분의 영예 등, 이 모든 것들은 향기로 가득하다.

 

8절.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우리는 자신의 사랑과 찬미와 봉사와 은사들과 거룩성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과의 친교를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8절. (1) 그분의 옷에서는 전투의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향내가 난다. (2) 그분의 웅장한 왕궁. 상아는 희귀함과 정결함 및 지속성을 상징한다. (3) 그분이 기뻐하시는 근거. ① 그분 자신. 곧, 그분 자신의 은혜라고 하는 감미로운 향기. ② 그분의 백성. 곧, 그분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 ③ 그분의 대적들이 멸망당함. ④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협력하는 모든 거룩한 피조물들. -G. R.

 

 

10절. “최상의 남편이신 그리스도. 혹은, 와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는 진지한 초대.”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Sermon, Preached to a Society of Young Women, in Fetter Lane).

 

9, 10절. 신랑과 연관되는 관계는 기억되어야 하고, 신부와 연관되는 관계는 잊혀져야 한다

 

11절.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리스도는 의의 아름다움을 기뻐하신다. -마르틴 루터.

 

 

13-15절. (1) 신부의 새 이름-“열왕의 딸.” 그녀가 왕의 딸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① 그녀는 하나님께로서 났다. ②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께 시집을 간다. (2) 신부의 특성-“궁중에서(혹은 “내면적으로”) 모든 영화를 누리니.” ①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 신부의 심령이라고 하는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② 그녀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 (3) 신부의 의복-“금으로 수놓았도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그분의 온전한 순종과 대속의 죽음을 가리킨다. (4) 신부의 친구들-신부를 시종하며 따르는 처녀들. (5) 신부 일행의 행렬-“수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① 신부는 아름다우신 왕을 뵐 것이다. ② 그녀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만 천하에 선포될 것이다. -덩컨 맥그레거.

 

 

14절. (1) 교회가 그리스도를 배알함. ① 영혼들이 먼저 그분께로 인도될 때. ② 그들이 죽어 그분 앞에 나아갈 때. ③ 온전해진 교회가 그분을 뵈올 때. (2) 그분을 배알하는 방식. ① 수놓은 옷을 입고서. ② 모든 친구들과 함께. (가) 그들의 순결성-“처녀들.” (나) 그들의 우정-“동무.” (다) 그들의 승계-“이끌려 갈 것이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온전해질 때까지. -G. R.

 

17절. (1)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기쁨이시다. “내가······기억케 하리니.” (2) 그는 교회의 복된 주제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3) 그는 하늘의 영광이시다.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G.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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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아, 들어라. 잘 보고 귀를 기울여라. 네 겨레와 아비의 집은 잊어버려라. 너의 신랑,  너의 임금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리라. 그는 너의 주님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여라.(시 45편 10-11절)

 

 

1.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불러왔던 ‘백합화들’이라는 노래 곡조에 가사를 붙여 지은 시가 45편입니다. 주로 결혼식에서 불렸던 노래입니다.

 

2. 결혼식장에 선 신부에게 하는 첫 당부가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려라!’ 과거의 모든 것을 모두 다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3.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내 삶이 없어지는 것, 내 정체성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왜 과거를 잊으라고 부탁하고 있을까요? 결혼을 했다면 내 의지, 내 정욕대로 살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신랑의 의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5. 결혼 전에는 원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살 수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상호 간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불편할 수 있지만, 부부생활에서 오는 행복이 이 불편함보다 더 큽니다.

 

6.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살기로 결단했다면 과거의 습관, 과거의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줘서도 안되고, 줄 수 없어야 합니다.

 

7. 때로는 세상의 편리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예수님과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기에 세상의 것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8. 애굽에서의 삶을 잊지 못한 채 먹고 입고 마시던 것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라 말하지만,

 

9. 육체적 즐거움을 따르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 채 세상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늘 갈등하며 괴로워합니다.

 

10. 바울도 고백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11.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는 말이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 육신의 습관입니다.

 

12.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도 아니요(말씀이 율법이 되어 나를 넘어지게 하기에), 거룩해지는 삶을 사는 것(방법을 만들어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도 아닙니다. 오직 신랑 되신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어제보다 오늘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거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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