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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을까?

by 은총가득 2021. 1. 16.

. 제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을까

 

성경에는 목축과 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묘사와 기록이 등장하나 의외로 어업과 관련된 표현을 그리 많지 않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가 아닌 광야의 백성으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는 문화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갈릴리 지역은 신약시대 때 이스라엘의 역사로 재편입되면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주된 활동 무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신약성경에 어업과 관련된 기록이 종종 눈에 띄나 많은 경우 어업과 관련된 기록은 역사적이고 기술적 묘사라기 보다 신학적 비유로 묘사되어 당시의 어업 지식이 없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 고기 잡는 기술은 예수님 당시부터 1950년대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50년 이후 합성섬유로 만든 두명 그물이 개발되어 낮에도 어업이 가능해지면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65개 보트와 150여명의 어부들이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고있다. 대부분이 갈릴리 지역 어부 출신인 예수님 제자들은 어떻게 어부 생활을 했을까? 성경에 일괄적으로 그물이라 표현되어 있으나 신약시대 사용되던 서로 다른 세 종류의 그물과 그와 관련된 말씀을 살펴봄으로 1세기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그물과 관련된 비유의 말씀을 새롭게 읽어볼 수 있겠다.

 

후릿그물은 16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일사불란한 팀웍을 통해 물고기를 잡는 것이 특징이다. 8명의 선원은 해안에서 힘 있게 로프를 잡고 나머지 8명의 선원은 배에 그물을 싣고 깊은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가서 그물 선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배의 방향을 90도로 돌려 300미터 이르는 그물이 해안과 평행이 되는 방향으로 노를 저어 간다. 그물이 모두 펼쳐지면 배를 다시 90도로 꺾어 해안쪽으로 노를 저어 돌아온다. 해안에 돌아오면 배에 타고 있던 8명의 선원이 내리고 반대쪽 로프를 잡는다. 이렇게 양쪽에서 8명씩 로프를 잡은 선원들은 힘 있게 로프를 끌어당긴다. 해안을 따라 평행으로 펼쳐진 그물은 가운데 부위가 8미터, 양쪽 끝은 4미터 높이로 벽을 형성하며 물고기를 해안 쪽으로 몰아오게 된다. 그물의 밑쪽은 돌 무게추들이 달아 가라앉게 하고 위쪽은 코르크로 만든 부레를 달아 뜨게 해 자연스럽게 병이 형성된다. 후릿그물은 물고기가 위험에 처하면 깊은 바다 쪽으로 향하는 성질을 이용해 300미터의 그물 벽으로 물고기를 해안 쪽으로 쓸어오는 방법이다. 주전 3000년 전 이집트 묘비의 벽화에도 후릿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후릿그물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그물로 한 때 갈릴리 어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비교적 큰 배를 이용하며 한 번 작업할 때 한 시간 정도 걸리므로 하루에 8번 정도를 반복해 하룻동안 상당한 양의 어획고를 올렸다. 잡은 고기의 40퍼센트는 배와 그물 주인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를 16명의 선원이 나눠가졌다.

 

하나님 나라를 마 13:47-48에 보면 그물로 고기 잡는 것에 비유한다. 이 말씀에 나오는 그물은 헬라어로 사게네인데 후릿그물을 가리킨다. 바다에 던지고, 해변으로 끌어오고, 그 물 속에 각종 물고기가 잡히고, 어부들이 해변에 앉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모습 등은 전형적인 후릿그물 고기잡이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물고기는 메기를 가리킬 것이다. 갈릴리에서 많이 잡히는 메기는 1.25미터 길이에 10키로그람까지 자란다. 메기는 지느러미가 있지만 비늘이 없어서 레위기 정결법에 따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생선이다. 후릿그물의 사용법에 기초해볼 때 적절하지 않은 묘사는 그물에 가득하매 라는 표현이다.

 

 

후릿그물은 바다에 치고서 벽을 만들어 곧바로 해변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후릿그물을 쳐놓고 물고기가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면 물고기는 도망간다. 이는 비유의 목적이 그물의 사용법과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가르치려는 신학적 교훈에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물고기나 새를 그물로 잡는 것은 강력한 통치자를 나타내는 고대 근동의 문학적 표현이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하나님이 세운 갈대아를 묘사하며 고대 문학적 기법을 사용한다. 바다의 물고기들을 그물과 초망으로 모으고 기뻐하는 모습은 그 그물에 속절없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유다를 가리킨다. 잡힌 물고기의 40퍼센트를 그물 주인이 차지하는 기쁨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느 당시 지중해 바다를 주름잡던 바다 왕국 두로의 심판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다를 앞마당처럼 주름 잡던 두로를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여 하나님이 쳐놓은 후릿그물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려들게 하실 것이다.

 

직경 6~8미터인 원형의 투망그물은 어부가 혼자 해안가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된다. 주전 2000여년경 이집트 묘비의 벽화에 투망그물이 그려진 것을 볼 때 투망그물도 후릿그물과 함게 고대부터 즐겨 사용되던 도구인 것 같다. 해안의 얕은 물가나 배 위에서 힘 있게 그물을 던지면 낙하산처럼 퍼지면서 물에 가라앉는데 그물 끝에 무게추로 납을 달아 잘 가라앉도록 했다. 투망그물을 사용할 때는 물고기 근처로 조용히 접근해서 던져야 한다. 그런 다음 힘껏 로프를 잡아 당기면 가운데 열린 부분이 닫히면서 불고기가 그물 안에 갇히게 된다. 예수님은 고향마을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공생애 사역의 베이스캠프를 치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 중 초기 제자들을 부렸다. 어부들의 도시인 가버나움 서쪽으로 2키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현지 지명으로 타브하라 알려진 지역이 있다.

 

타브하는 7개의 샘을 뜻하는 아랍어인데 이 샘들에서 주변의 갈릴리 호수보다 따뜻한 물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많은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가버나움의 어부들은 주로 타브하라 불리는 곳에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말리기도 했다. 예수님 초기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분명 이곳일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물고기 잡는 거솨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현재 이곳은 요한복음 21장의 배경이 되는 베드로 수위권 기념교회가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 첫사랑을 회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과 첫사랑이 있는 타브하에 나타나셔서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외에 이사야, 에스겔에도 투망그물과 관련된 말씀이 나온다.

 

삼중자망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그물이다. 한 개의 그물벽만 있는 다른 그물들과 달리 삼중자망은 이름처럼 3개의 그물벽으로 이루어져있다. 양쪽 바깥에 있는 그물은 그물 간격이 12.5센티미터로 구명이 큰 망사를 가지며, 중간에 있는 그물은 그 간격이 3.5센티미터로 촘촘한 망사를 가진다. 중간에 있는 그물은 바깥층 그물보다 느슨하게 걸려 있어 자유롭게 미끄러져 나가고 들어올 수 있다. 삼중자망을 사용하는 어부들은 저녁을 일찍 먹고 그물을 정리해 천천히 노를 저어 깊은 바다로 간다.

 

 

이때 배는 그물과 해안 사이에 위치하도록 잡는다. 어부들은 그물을 내린 뒤 노로 물을 튀기는가 하면 갑판에서 마구 뛰어 물고기들을 최대한 놀라게 만든다. 놀란 물고기들은 본능적으로 깊은 바다를 향해 질주하기에 어부가 쳐놓은 삼중자망에 걸린다. 망사 간격이 큰 바깥쪽 그물을 유유히 통과한 물고기는 촘촘한 간격의 중간층 그물에 걸리고 느슨한 중간층 그물로 인해 반대쪽 바깥층 그물까지 쉽게 전진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삼중자망속에 완전히 얽히고설켜 꼼짝 못하게 된다. 보통 5개 묶음으로 이루어진 삼중자망은 밤새 그물을 내리고 50~100키로그람의 어획고를 올렸다.

 

어부들은 밤새 깊은 바다에 물고기를 잡아 갑판에 실어 새벽녘에야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해안에서 그물에 엉킨 물고기를 떼어 내고 그물을 깨끗이 씻어 말렸다. 세마포로 만들어진 당시 그물은 곧바로 씻어 말리지 않으면 금방 부패했다. 성서시대에는 세마포로 엮은 삼중자망이었기에 물고기가 어두워서 그물을 볼 수 없는 밤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사역하시면서 부른 초기 제자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그 때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아마도 밤새 삼중자망으로 물고기를 잡고 이른 아침 타브하 해안에서 엉킨 그물을 풀고 씻어 말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부름 받은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의 본문도 삼중자망과 관련된 말씀이다. 베드로는 밤새 삼중자망을 쳐 놓고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새벽부터 말씀을 들으러 나온 무리와 달리 베드로는 자신의 배를 예수님께 빌려 주었을 뿐 말씀 듣는 데는 관심이 없이 열심히 그물을 씻고 있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제자들은 밤새 삼중자망을 쳐 놓았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바다에 쳐 놓은 삼중자망에 걸린 물고기가 제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혼자 힘으로 탈출이 불가능한 것처럼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없이 사는 인간의 우명을 삼중자망에 걸린 물고기에 묘사하고 있다. 욥은 고난에 처한 자신을 찾아와 꾸짖고 힘들게하는 친구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 의인도 고난 받을 수 있음을 항변하면서 하나님이 작정하셨따면 그 고난을 피할 방법이 전혀없음을 삼중자망에 에워싸인 물고기의 처지를 빌려 묘사했다.

[출처 : 열린다성경 (저자: 류모세) :  작성자 Rejoice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제자를 삼으셨을까.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다.(막 1:16∼20)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똑같이 부르셨다. 그들은 모두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 4:18~22)

 

도마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로 같이 갔다는 점에서(요 21:2) 어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빌립도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요 1:43∼44)이라는 점과 벳새다가 ‘어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의 어촌이라는 점에서 어부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에 도마와 빌립이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절반이 어부였다.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의 ‘고기를 잡는 제자들’(1308~11년),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소장.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낚던’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꿔 놓으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 낚는 어부는 제자를, 고기를 낚기 위해 던지는 그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의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는 사람을 상징한다.

 

 

복음의 그물 던지는 ‘어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과반수가 어부였고 나머지는 세리와 혁명가 그리고 직업조차 밝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왜 주님은 세상의 엘리트들을 놔두시고 이들을 택하셨을까. 목회자들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성경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고 말한다.

 

세상엔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들이 제자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미국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인 카일 아이들먼은 직설적으로 “그들은 그냥 팬(fan)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저서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에서 그는 자신이 팬인가 제자인가를 진단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지 실제로 따르고 있는지’ ‘예수님에 관해서 진정으로 아는지’ ‘자신의 내면보다 밖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자기 힘을 믿는지,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등을 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팬은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이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최근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 패하면 그토록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간다. 심지어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예수님 주변에도 팬이 많다. 팬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에게 들러붙는다. 팬은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카일 아이들먼의 ‘팬인가, 제자인가’ 중)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 역시 팬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이튿날에도 그 장소로 나왔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호수 건너편으로 떠난 뒤다. 그들이 예수의 일행을 겨우 따라잡았을 땐 배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더 이상 떡은 없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을 때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고 말한다. 팬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이들이다. 온갖 혜택을 바라며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들지만, 자신을 희생할 만큼 그분과 가깝지는 않다. 나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닐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진정한 제자란 어떤 사람일까.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츠가 1896년에 쓴 소설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이 이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준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자 신자들의 간청으로 로마를 탈출하려던 사도 베드로가 새벽 여명 속에 십자가를 메고 걸어가는 그리스도를 환상 속에서 보고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는 “네가 나의 어린양들을 버리니, 나는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진다.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던졌던 이 절박하고 심오한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 중요한 길이다. 예수님이 가신 그 방향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제자이다. 카일 아이들먼은 우리 자신이 제자로서 정체성을 가질 때만이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의 연수(年數)가 아닌 헌신의 깊이가 중요하다.

 

작자 미상의 기도문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누구인가. 제자인가 팬인가.

 

어부에 하나 더
물고기와 그리스도인


물고기는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됐다. 물고기란 뜻의 그리스어 익투스(ΙΧθΥΣ)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의 의미가 있다.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 하나님(θεοs), 아들(Υιοs), 구세주(Σωτηρ)의 첫머리 글자만 모아보면 익투스가 된다.

초대 교회 시대에(주후 64년부터 250년간) 로마는 교회를 박해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 등에 숨어 지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 땅에 물고기를 그렸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의 신앙이 하나임을 확인했다. 카타콤은 공동묘지인 동시에 일종의 지하 도시로서 외부의 침략을 피해 은신할 수 있는 미로였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표식이 바로 물고기 모양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예배 장소를 찾아 왔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