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4-23 예수님의 자기증명
누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점층적 대조로 소개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소개한 후 더 나은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전개를 따라 세례자 요한의 출생, 성장, 그리고 사역과 죽음을 소개하며 교차적으로 예수님의 출생, 성장,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소개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자 요한의 사역과 교차되는 예수님의 사역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앞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 말하였습니다. 첫번째는 돌이 떡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말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마귀가 주는 모든 권위와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행사하는 권위와 누리는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말을 한 것입니다. 셋째는 시편 91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의 도움으로 죽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지 않겠다 말을 한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세상에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 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님은 이번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안에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도망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지배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이 퍼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칭송했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사렛의 활동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란 나사렛에서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랍비와 같이 교육을 받은 자가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성경을 읽어주었고, 성경을 읽은 후에는 그 말씀에 대한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마르틴 헹겔은 고대의 역사 기술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 당시 회당에는 오늘과 달리 구약의 일부만 가지고 있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나 종이에 기록된 모든 문서는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방문한 회당 역시 구약 성경 중 일부의 책만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 이사야의 글이 예수님에게 전해졌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예수님에게 이사야의 글을 주었다는 것은 이사야가 담고 있는 구원과 회복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이사야의 글을 읽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읽은 글은 이사야 61장입니다. 이사야 61장은 구약 가운데 대표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말하는 구원과 회복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또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도 다릅니다.
이사야는 구원과 회복을 말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말하였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자신이 가진 문제 의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픈 사람은 병이 낫는 것이 좋은 소식이고 수험생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좋은 소식이며 취업을 준비중인 사람에겐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소식은 언제나 한 가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복음입니다. 이는 역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잘 나타납니다. 가난한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자신에게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을 그에게 주겠다고 말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은이나 금이나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준 것입니다. 가나한 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먹고 다시 주리는 세상의 양식이 아니라 한번 먹으면 영원히 주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가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 우리의 이웃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때에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통해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된다 말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기다렸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직분에 기름을 붓게 하였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고 둘째는 왕이며 셋째는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사야의 말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오면 포로된 삶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더 잘 태워지도록 기름을 발랐는데 이 모습이 마리아를 통해 재현되었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오라비 나사로를 위해 준비한 향유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말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 말을 하며 이 행동이 옳은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이 죄로 인해 포로된 자를 위한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 받아 제사장이며, 왕이며, 선지자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에게 주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포로 된 자들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총과 칼과 힘과 돈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대속하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밖에 없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입니다.
또한 이사야는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때에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한다 말합니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를 눈 먼 자라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40-41절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을 눈 먼 자라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눈 먼 자였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것이라 생각하며 죄 없는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본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눈 먼 자임을 깨닫게 하였고 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보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된 바울은 이전에 보지 못한 예수님을 말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을 때 그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전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며,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담고 있고, 율법이 그림자며 그 안의 먹고 마시는 것,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 등이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눈 먼 자에서 다시 보게 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희미한 것이 선명해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을 열심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구원과 회복이 일어날 때 이사야는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된다 말하였습니다. 뱀의 말대로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이란 존재는 이후에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의 판단 아래 언제나 악으로 드러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악으로 드러난 자는 결코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선이 되기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율법 앞에 땀 흘리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행위는 결코 선으로 결론 지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동굴처럼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주어진 율법에 짓눌려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졌습니다. 이로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쉼의 자리로 불러주었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쉽고 가벼운 예수님의 짐을 메라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짐은 결코 쉽고 가볍지 않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쉽고 가볍다 말씀하신 것은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들고 가던 우리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함께 들어주심으로 쉽고 가벼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던 율법의 요구에서 자유를 얻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곁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깊은 수렁에서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때에 위와 같은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흔히 야훼의 날로 이해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1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읽지 않은 뒷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선포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복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행한 것과 관계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보복은 행한 것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두 개념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두 개념이 여호와의 날에 모두 이루어집니다. 죄를 행하여 보복 받을 자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은혜와 보복이 이루어지는 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허락하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주는 그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책을 덮었습니다. 책을 담당하는 자에게 책을 주자 사람들의 눈은 모두 예수님의 입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목하는 자들을 향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말씀과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 말씀하였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일지라도 예수님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가족들에게 나타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 곧 구약의 말씀을 통해 권함을 받지 못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말합니다. 놀라운 기적이나 이적을 보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지 못하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배워야 했습니다. 그림자로 몸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한 예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 구약과 신약을 모두 쥐고 있습니다. 회당에 몇 권의 책만 보관하던 때와 달리 창세기로 시작해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책을 핸드폰에 넣고 쉽게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옆에 두지만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약의 수 많은 사건과 약속을 모두 완성하는 예수님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육체적 아픔은 물론이고 영혼의 찢김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완성하심으로 구약의 말씀을 깨달아 신약 안에 머무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펼쳐 놓은 그 길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말씀을 통해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로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며 살아가라 유혹합니다. 이 시험에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구약과 신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 아래 살아가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눅 4:20-30 결과를 알고 있는 예수님
오늘은 누가복음 4장 20-30절의 말씀을 '결과를 알고 계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몇 해 전에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체 518명 중 493명이 부정청탁으로 강원랜드에 채용되었습니다.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던 많은 지원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미리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강원랜드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미래를 알면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날 피해와 불행을 피하고 남들이 행운이라 부르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래를 알고 있지만 사람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더 나은 삶이 아닌 고난과 박해의 삶으로 걸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을 내다 보았음에도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으로 걸어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는 예수님에게 어려운 길을 걷지 말고 자신의 뜻을 따라 쉬운 길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세상에 나타내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겨냈습니다. 아담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실패하는 시험을 예수님이 승리하였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 입니다. 예수님은 평소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날은 이사야의 글이 예수님의 손에 쥐어 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 말하였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다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존에 가르치던 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말하였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인 공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인 은혜를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열심과 노력 그리고 행위와 상관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는 못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태복음 7:28-29에서 말하는 것처럼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옳게 해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한 곳이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의 회당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말씀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였음에도 두 눈으로 보고 또한 경험한 것을 더 의지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쉽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석대로 말씀을 택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세상에 나타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꽃길이 열릴 줄 알았으나 고생길이 펼쳐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세상에 알리는 고생길은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로 인도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공회로 끌고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경의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믿지 않고 또한 박해하고 또한 미워하는 그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쉽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마귀의 유혹을 거절한 후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하나님의 아들 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 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반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버나움에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 것처럼 나사렛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였습니다. 비록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전하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결과를 알고도 계속해서 십자가로 걸어가신 이유는 '한 사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에 큰 흉년으로 많은 사람이 괴로워 할 때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 중 엘리야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냄을 받았다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 중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보냄을 받았다 말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곧 자기 백성을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우리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인은 알곡을 밭에 뿌렸는데 원수가 그 안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한 밭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종들은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겠다 말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를 가만히 두라 명령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말을 한 후 추수꾼을 통해 마지막 때에 그들을 구별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알곡은 모아 자신의 곳간에 둔다 말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안에 곧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주인의 밭에는 가라지가 알곡보다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을 한 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말씀하였습니다. 구원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개의 문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입니다. 이 문은 넓은 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문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이 문은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문으로 그 문을 찾는 자가 적습니다. 곳간에 들어가고 좁은 문에 이르는 자들은 적고 불 태워질 가라지와 넓은 문에 이르는 자는 많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말씀하신 후 넓은 길을 지나 넓은 문에 이르는 자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넓은 문으로 향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입니다. 좋은 나무가 아니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거짓선지자를 따라간 자들은 추수의 날에 '주여 주여'를 외치며 자신을 구원해 달라 말합니다. 자신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으니 구원해 달고 애원합니다. 자신의 삶과 행위를 근거로 구원에 이르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하나님은 밝히 말한다 말씀하시며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은 그 행위를 근거로 판단을 받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바른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단 하나의 죄라도 발견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짓선지자를 따라간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합니다. 자신의 삶이 구원 받기에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7:22은 '그날에 많은 사람이' 라는 표현으로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선지자를 따라 넓은 길을 지나 넓은 문을 통과한 자들이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청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절도 가고 교회도 나오는 정치인처럼 교회에 나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팔린 만큼 가장 읽히지 못한 성경도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고전의 하나로 혹은 서양의 세계관과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엄격하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직분도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는 주민등록증처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매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만 넉넉하게 내면 역할로의 직분이 아닌 계급으로의 직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비유로 들며 혼인잔치에 누구나 청함을 받아 참석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혼인잔치에 머무는 자는 택함을 받은 자라 말씀하였습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나, 능력이나, 물질이나, 외모나, 혈통을 따라 자기 백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값 없이 거저주는 은혜로 믿음을 허락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택함을 입은 자는 은혜를 받은 것이고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이며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로 부름 받은 자들을 서로 살펴보라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지혜와 강함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와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따라서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직하지 못 했고, 순결하지 못 했고, 용서하지 못 했으며, 사랑하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 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땐 그 뜻을 외면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성도됨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왔다는 말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고 산 낭떨어지까지 끌고가 밀쳐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이미 나사렛에 도착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과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여 그들의 미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은 험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갔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하지 않고 그들 사이로 걸어 갔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수 있고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미래를 알아 더 쉬운 길로 가려 할 때 예수님은 미래를 알고도 고난과 박해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 모든 선택과 결심의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유이며 우리가 십자가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만 보고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우리의 문이 되어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고 '한 사람'으로 불러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참고 견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걷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넓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를 따라 넓은 문으로 걸어가선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택한 '한 사람' 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좁은 길을 지나 좁은 문 앞에서 은혜를 의지하는 성도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누구도 찾지 않아 외로워 보이는 길이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정표가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길에 끝에서 하나님이 두 손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눅 4:31-44 마귀가 외치는 예수님의 정체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누가복음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누가복음 4:31-44를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사람들에게 배척 받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문맥의 흐름을 살펴봐야 합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점층적 교차로(뒤의 것을 더 크게 교차적으로 소개하는 것) 소개한 누가는 이제는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방법으로 쉽게 그리스도가 되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됨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귀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며 이사야의 글로 자신의 그리스도 됨을 증명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로 향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묵묵히 견디며 계속해서 자신의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4:23과 9:35을 통해 샌드위치 구조로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7장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8-9장은 다양하게 고치는 일을 소개합니다. 샌드위치 빵에 해당하는 4:23과 9:35절 안에 가르치고, 고치는 일을 넣어 둔 것입니다.
누가복음 안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고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하신 것처럼 가버나움에서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고, 병들고 약한 것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세상에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가르침과 많이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7:28-29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의를 강조했습니다. 공의는 잘못을 정의롭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만 아니라 사랑의 성품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을 은혜로 덮어 구원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공의로 죄인 됨이 드러난 자을 사랑으로 덮어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이 은혜를 가르칠 때 귀신들린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귀가 갑자기 예수님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마귀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러 왔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옳은 말을 하였음에도 예수님은 마귀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말하며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자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다 말하였고 이 사실에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회당을 나온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시몬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병이 장모의 몸에서 떠나갔습니다. 약하고 아프고 죽는 것은 모두 죄의 결과로 예수님을 통해 죄의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고치는 사역이 계속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해질 무렵 온갖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때 쫓겨나는 귀신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마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수님은 마귀들을 꾸짖으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이 밝은 후 한적한 곳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자 나사렛에서의 반응과 다른 모습이 갈릴리 지역에서 나타났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같은 사역을 했으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다른 동네에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말씀하였습니다. 이때 매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더 오랜 시간 갈릴리에 머물며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자들만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마귀의 증언을 더해 예수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사람에게서 쫓겨나며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멸하러 오신 분이라 말하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였습니다. 이때마다 예수님은 마귀의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를 향해 잠잠하라 말하였습니다. 마귀의 말이 예수님의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고난과 박해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외면함으로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았음을 증거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이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쉬운 길을 제시합니다. 고난 받지 않고 박해 받지 않는 길을 걸어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누리라 유혹하였습니다. 채찍과 몽둥이로 때리고 겁박하여 십자가로 걷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달콤한 꿀과 향기나는 꽃으로 유혹하여 십자가로 걷지 못하였습니다.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길로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유혹처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임금이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요한복음은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복음 22장 39절은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예수님이 산으로 간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로 가지 못하도록 쉬운 길이 열릴 때마다 예수님은 기도함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는 우리 역시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몽둥이를 들었으나 이제는 향기나는 장미를 내밉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래의 만화를 잘 읽어봅시다.
마귀는 예전과 달리 우리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이야기합니다. 매주 빠지지 말고 교회에 참석하라 말하고, 매일 성경을 읽어 하나님을 배우라 말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찬양을 하며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사랑하라고도 합니다. 다만 오늘 하지 말고 내일하자 말합니다. 이번주 말고 다음 주라 말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미루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집니다. 가끔은 마귀가 제안한 것인지 우리가 바란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이 있을 때마다 기도함으로 자신의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려운 길과 쉬운 길, 좁은 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넓은 문 중 세상의 선택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따라 언제나 쉬운 길과 넓은 길 그리고 넓은 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어려운 길과 좁은 길 그리고 좁은 문을 향해 걷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마귀의 유혹 앞에 기도로 우리의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 생명에 이되어야 합니다. 작성자 :J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