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타난 거룩의 개념
김 영 진(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 구약학)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거룩" 혹은 "성결"의 개념을 잊고 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의 삶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속에 많은 세속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聖)과 속(俗)의 구별 기준이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거룩의 개념과 대상에 대하여 살펴보고 우리의 삶과 신앙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한다.
"거룩"의 의미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약성서에 약 850여회 등장하는 단어로 고대 근동의 셈어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원과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히브리어 <카도쉬>는 "정결하다"(to purify) 혹은 "깨끗하다"(to be clean)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qadu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대하여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불 가운데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출 3:2-3; 신 4:12; 시 18:8-14), 불과 관련된 빛, 연기, 열, 불꽃, 숯, 용광로 등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설명을 지지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카도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구별"이다(레 10:10). 레위기 10장 10절의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는 말씀은 거룩함이란 속된 것과 구별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속의 구별이 모호해져 거룩함이 위협받게 되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 된다(겔 7:24; 20:9).
'카도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는 "받쳐진"의 의미를 가진 <헤렘>이다. 왜냐하면, 레위기 27장 28절에 의하면 하나님에게 받쳐진 것은 모두 거룩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렘>도 거룩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외에도 거룩을 나타내는 것은 '구별하다'는 뜻을 가진 <바달>과 '받치다'(to dedicate)의 뜻을 가진 <하나크>등이 주로 사용되며, 이 외에도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구약성서에 "거룩"이란 세속이나 부정한 것에서 "구별됨"을 의미한다.
성서적 의미의 "거룩"
구약성서에 사용된 "거룩"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거룩의 근원, 개념 그리고 거룩의 대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거룩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레위기 11장 44절의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이러한 성경의 생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레 11:45; 19:2; 사 43:14).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성이 창조와 더불어 인간에게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피조물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창 2:3; 출 20:11), 제사장과 이스라엘(출 29:44; 레 21:8; 겔 20:12) 그리고 성소(출 29:44; 왕상 9:3) 등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거룩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의 거룩성을 지켜야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거룩함이란 곧 하나님의 영광과 동의어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거룩이다. 즉 구약성서의 거룩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거룩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거룩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특성이나 속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 거룩함은 곧 정결함이다.
거룩함이란 정결함과 부정함을 분별하여 정결함을 지키는 것이다. 에스겔 22장 26절의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더렵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는 제사장들이 정결함과 부정함을 구별하지 못하며 정결함을 유지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선포하고 있다. 본문을 통해서 볼 때, 거룩함이란 하나님이 명령한 규례를 지킴으로써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다(레 10:10; 겔 44:23). 특히, 레위기 10장 10절의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는 말씀을 히브리 성경의 독특한 문학적 기법인 동의적평행법(同意的平行法)에 의하여 이해하면 거룩함은 곧 정한 것, 즉 정결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2) 거룩함이란 온전함이다.
하나님은 온전하고(욥 37:16) 깨끗한 분이시기에 거룩함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는 것, 즉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기 위하여 온전한 것을 드려야 한다. 부정한 제물, 흠 있는 제물, 눈먼 제물, 병든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온전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신 33:10). 이처럼 온전한 제물이 드려져야하는 것은 이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내면적인 완전함은 물론이거니와 외적인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말 1:6-14).
3) 거룩함은 곧 위대함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이니까"(출 15:11). 본문은 공동번역의 "여호와여, 신들 중에 당신 같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거룩하며 영광스럽겠습니까? 당신께서 해내신 놀라운 일에 모두들 두려워 떨며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번역에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거룩한 하나님만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룩성이 위대한 일을 하시는 원동력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놀랍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 일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거룩해져야 함을 요구하신다(수 3:5). 그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체험하고 이에 동참하는 자에게 거룩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거룩의 대상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되어진 모든 것은 거룩의 속성을 따라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거룩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시 29:2)라는 구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거룩해야 하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거룩한 인간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거룩하게 하셨다. 특히, 인간가운데서 제사장은 더욱 더 거룩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인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기 때문에 이들이 거룩한 성소에 접근하여 향을 피우고 지성소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레 16:3). 구약성경의 제사장은 대제사장과 일반제사장으로 나누는데 높은 직급의 제사장은 낮은 제사장에 비하여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대제사장이 죄를 짓게 될 경우 그 성결 예식은 다른 제사장에 비하여 더욱 더 엄숙하게 치루어졌다(레 4:3).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은 다른 일반 제사장에 비하여 더 엄격한 결혼과 순결 그리고 통곡의 억제 등을 요구받았다(레 21:1; 겔 44:22). 이처럼 제사장들이 거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이들이 제의 때 입는 의복 역시 거룩하다(출 28:2,4; 29:9; 31: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과 같은 거룩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어느 정도 거룩함을 지녀야 했다(신 14:21; 레 11:44).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레위인들이나 장자가 거룩하다고 묘사하고 있다(대하 23:6; 35: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 역시 거룩하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예언자였던 엘리사의 경우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불리워졌다(왕하 4:9).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태중에서부터 예언자로 구별하였다(렘 1:5). 따라서 예언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곧 거룩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왕상 19:16).
이처럼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백성의 거룩성을 요구한다. 특히, 하나님에게 드려져 성직을 담당하는 자들의 특별한 거룩성을 강조하고 있다.
2) 거룩한 물건
(1) 거룩한 장소: 구약성서에 기록된 거룩한 장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거룩한 곳이다(신 26:15). 땅에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장소(출 3:5)와 성소 그리고 에스겔 48장 8절에 기록된 예물로 드릴 땅('트루마'), 그리고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이 거룩하다(레 18:25; 민 35:33-34).
땅에 있는 곳으로 가장 거룩한 곳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다(시 74:3; 대상 24:5; 대하 29:5). 따라서 거룩한 이곳에서 일을 행하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 성전에 있는 제의와 관계된 것 그리고 제물은 모두 거룩해야 한다. 성전은 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성전의 지성소는 휘장으로 일반 성소와 구별되는 땅의 장소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곳(Most Holy place)이다.
이처럼 성전이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사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물건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성전 제사와 관련된 법궤, 분향단, 진설병을 두는 상, 등잔대, 번제단 그리고 물두멍 등은 거룩하다(출 40:9). 또한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향(출 30:34-38)과 기름(민 35:25)이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 역시 거룩하다(민 5:17).
(2) 제물의 거룩함: 사물가운데 가장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의 식사로서 가장 거룩함이 요구되어진다. 왜냐하면 제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제물가운데서 '지극히 거룩한 것'<카도쉬 크도쉼>은 속죄제와 속건제, 소제의 제물이며(레 2:3; 6:10; 7:1; 14:13; 민 18:9), 이것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화목제물은 단순히 지성물<크도쉼>이라고만 부르며(레 21:22; 민 18:9), 제사장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먹을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함의 관점에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하고, 온전한 것을 드려야 한다(참고, 말 1-2장).
(3) 시간의 거룩함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거룩해야 한다. 시간 가운데 안식일이 거룩한 날이다. 이사야 58장 13절의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욤하 코드쉬> 聖日)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라는 구절을 통하여 안식일이 거룩한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리는 축제의 시간들 역시 거룩한 날이다(스 3:5).
너희에게는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출 12:16).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민 28:26, 민 23:21).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민 29:1).
일곱째 달 열흘 날(=대속죄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민 29:7).
첫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레 23:36).
위의 성경 구절들을 통하여 무교절의 첫째 날과 일곱째 날이 거룩한 날이며(출 12:16; 레 23:7), 칠칠절, 일곱째 달 초하루(민 29:1; 레 23:24), 대속죄일(레 23:27; 민 29:7), 초막절 첫째 날과 여덟 째날(레 23:36; 민 29:12) 등을 거룩한 날<미크라 코데쉬>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날들이 거룩하다는 것은 곧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희년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레위기 25장 10절에 의하면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들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이 시간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단 11:28,30) 이 언약을 배반해서는 않된다고 말하고 있다(말 2:10; 시 55:21; 89:35).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싸우는 전쟁, 즉 성전(聖戰)은 거룩하다.
결론
구약성서에 나타난 거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거룩해져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나 사물은 더 높은 정도의 거룩성이 요구되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킬 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기독교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거룩함이란 우리 삶의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레 10:10).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 20:8).
구약성서에 나타난 회개
차준희
I. 들어가는 말
구약성서에는 '회개/참회'를 뜻하는 명사로 된 전문용어가 없다. 다만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슈브)가 이러한 개념을 대신하고 있다. 이 동사는 본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용되는 세속적인 용어이다. 이 동사는 구약성서에서 약 1056번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의미로 쓰인 예는 대략 118번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중요한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스서에서 5번, 호세아서에서 7번, 이사야서에서 7번, 예레미야서에서 28번, 에스겔서에서 20번, 역대기 역사서(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서)에서 16번, 신명기서에서 3번, 제2이사야에서 3번, 스가랴서에서 3번, 말라기서에서 3번, 그리고 시편에서 5번 사용된다.
이 동사는 '∼로부터 돌아오다(turn back from)'와 '∼로 돌아가다(turn to)'는 의미를 갖고 있다. '떠남'의 대상은 주로 '약한 행실', '지금까지의 행실', '악', '악한 행동', '폭력', '우상', '가증한 것', '죄' 등으로 언급된다. '향함'의 대상은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야웨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또한 향함의 대상으로 토라가 한 번 언급되기도 한다(느 9:29). '떠남'과 '행함'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면 회개란 한마디로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미 생활방식을 바꾸고 생활전체를 새로운 쪽으로 돌린다는 회개나 회심의 본질이 표명되어 있다.
위의 용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회개)이라는 주제는 주전 8세기이후 예언자에 와서야 중심주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례가 주로 예언서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아 회개 주제는 예언선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나타난 회개의 제의적 형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정리하고, 이어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와 그 이후, 즉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이해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II. 제의를 통한 회개의식
하나님의 벌로 말미암아 재앙이 닥쳤을 경우, 혹은 그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의 뜻을 표시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예를 들면 금식을 하거나(삿 20:26; 왕상 21:8-10), 옷을 찢거나 굵은 베옷을 걸치거나(왕상 20:31-32; 왕하 6:30; 사 22:12; 욘 3:5-8), 재 위에 눕거나(사 58:5)하였다. 때로는 목놓아 울기도 하고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삿 2:4; 욜 1:13; 2:17).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에 의하면 포로기 이전 이미 회개의식/회개의 날이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상 8:33-34). 예레미야 시대에도 금식의 날(회개의 날)이 언급된다(렘 36:6, 9). 구약성서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회개의식이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스가랴 8장 19절이 이점을 증거하고 있다:"만군의 야웨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 9장의 참회(회개)의 날에 거행된 기도도 또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된다.
III. 제의적 회개의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회개를 하곤 하였다:
"오라 우리가 야웨께로 돌아가자(슈브)
야웨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야웨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야웨를 알자
힘써 야웨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은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1-3).
그러나 호세아는 백성들의 이러한 회개가 신실하지 못한 거짓 회개임을 간파하고 이를 질타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헤세드)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들의 회개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아침구름이나 이슬 같아서 지속적이지 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불성실한 회개요 거짓회개이다. 그들은 회개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이 야웨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야웨께서 그들 쪽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란 것이다. 그들의 회개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이 결여되어 있다. 호세아는 이점을 비판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금식)란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스가랴도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포로기 때부터 습관처럼 지켜왔던 회개의 날을 비판하고 있다: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 때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5-6)
스가랴는 이러한 습관적인 회개의식 대신 이미 과거의 예언자들이 선포하였던 사회정의의 실천을 요구한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너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슥 7:9-10)
마지막으로 요엘은 '마음을 찢는' 철저한 회개가 결여된 '옷을 찢는' 외형적인 회개를 비판한다:
"야웨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슈브)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웨께로 돌아올지어다(슈브)"(욜 2:12-13)
우리는 요엘 2장 12절에서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식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식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회개의식 비판은 백성들의 회개가 단순히 지나간 죄를 고백하고 후회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회개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여 되어 있다. 회개는 죄를 참회하여 용서를 구하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간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죄의 본질자체에서 뛰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본질로부터의 떠남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감과 다르지 않다:"너희는 나(야웨)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뜻이 담겨진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나타난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차원까지 포함한다.
IV.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
예언자들이 보는 회개란 한마디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예언자들의 회개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본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감'이다. 이러한 이상적 관계를 호세아는 부부관계로 표현하고(호 2:7), 이사야는 부자관계로 묘사한다(사 1:2). 이러한 이상적이고 본래적 관계의 파괴가 곧 '야웨로부터의 떠남'이며 이는 죄이다: "무리가 나(야웨)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렘 1:16). 야웨께 대한 왜곡된 태도가 죄라면 원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전존재가 야웨께로 향한 상태로서 그분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전 7세기에 이스라엘의 종들을 풀어주었던 사건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 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지 칠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년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슈브),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렘 34:13-15, 표준새번역).
2)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주관을 믿지 못하는 것 또한 죄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아, 이제 너희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네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틀림없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들으시는 대로 너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다시는 너의 스승들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니,
네가 너의 스승들을 직접 뵐 것이다."
또한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 예를 들면 외교적 동맹이나 원조 같은 모든 인간적인 도움과 이방신들과 우상들의 도움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슈브).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께로 돌아와서(슈브)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의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를 찬양 하겠습니다.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외교적 원조).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는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우상).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호 14:1-3, 표준새번역).
3)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남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것과 일체의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이다. 회개의 이러한 측면은 앞선 예언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와서 '∼로부터 떠나다'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로 행함'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보다 '∼로부터 떠나다'는 표현이 더 구체적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수도(슈브)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렘 26:3, 표준새번역).
4) 인간 스스로의 회개의 불가능성
예언자들은 이러한 회개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포로기 이전, 적어도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예언자들이 회개를 언급할 때 이것은 등한히 여겨 이미 놓쳐버린 기회로 말한다:
"그러나 이 백성이 자기를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슈브) 아니하며
체바오트 야웨를 찾지 아니하도다"(사 9:13)
호세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그의 하나님에게 돌아가지(슈브)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야웨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 5:4)
주전 8세기 예언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개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왜 회개에 대하여 말하는가? 그들의 선포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돌이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언급한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회개의 의지도 회개의 능력도 없었다(사 30:15). 따라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심판뿐이었다(암 9:1-4). 그들에게는 죄로 인한 심판을 경험한 이후 혹은 심판 중에서 회개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회개의 주도권도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심판 이후의 회개도 하나님의 치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회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내가 저희의 패역(메슈바탐)을 고치고(라파)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슈브)이니라"(호 14:4)
V.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 이해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에 대한 이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1) 회개의 개인화와 회개의 가능성 강조
포로기에 와서 예언자의 회개 촉구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기 보다는 각각의 개인을 향해 선포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스겔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음으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리다"(겔 18:2) 는 이스라엘의 속담에 제동을 건다. 그는 미래가 과거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즉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겔이 말하는 회개는 우선 개인의 회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악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슈브)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다"(겔 18:21; 참조. 겔 18:27; 33:9, 11, 12, 14 등)
그는 더 나아가 회개의 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슈브)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슈브)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죽을자가 죽는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슈브) 살지니라"(겔 18:30-32).
에스겔이 여기에서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마음과 영"은 다른 곳에서 야웨의 선물로 간주되고 있다:"또 새 영을 너희 손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참조. 11:19). 따라서 에스겔은 회개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하는 점에서 포로기 이전의 선배 예언자들과 차이가 있지만 회개와 새로운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점은 선배들과 다르지 않다.
2) 회개는 율법준수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율법적 특성의 부각이 회개에 대한 이해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야웨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슈브)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신 30:9-10)
신명기 사가(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의 저자)는 요시아왕을 "야웨께로 돌이킨 자"로, 곧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수한 자로 높이 평가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야웨께로 돌이킨(슈브)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의 장문의 참회 기도문에서도 회개는 율법으로의 돌이킴으로 이해되고 있다:
"돌이켜(슈브) 주의 율법(토라)대로 바로 살라고, 주께서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거만하여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주께 등을 돌리고, 목이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느 9:29, 표준새번역)
3)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회개는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말라기서의 경우 회개는 곧 원래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헌물을 원 주인에게 되돌리는 구체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너희 조상 때로부터 너희는 내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다.
이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슈브)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겠다(슈브)
나 만물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가려면(슈브)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는구나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말 3:7-8, 표준새번역)
여기에서 회개, 곧 야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정확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성전유지와 성전 봉사자들의 생활 그리고 공동체의 약자들을 위한 몫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또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봉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VI. 나가는 말
구약성서에서 회개라는 개념은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슈브'를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동사가 '야웨께로 돌아가다'라는 주제로 쓰인 예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통한 형식적인 회개에 머무는 것을 질타한다.
그들에 따르면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뜻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회개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의 개인성이 강조되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체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성서가 말하는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다
구약성서의 사형법 연구
이은애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anything goes”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복합적이고 다양한 가치체계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여기엔 궁극적이면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의 가치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구약성서가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의 기준과 척도를 제공할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
바울이 구약성서를 ‘율법’(고전 14:21)으로 명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치시킨 이후로 구약성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 가치를 의심받고 복음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구약성서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기독교 안에서 구약성서는 여전히 그 권위와 가치를 가진다. 또한 구약성서안의 다양한 율법규정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윤리적 가치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해 여전히 질문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비평적 성서연구이래로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해서는 아주 활발하게 논의되어 왔다. 구약성서는 크게 세 개의 법모음집을 가지고 있다. 언약법전(출 20:22-23:19[33]), 성결법전(레 17-26장), 신명기 법전(신 12-26장)이 그것이다. 이 안에 들어있는 법 규정들은 얼핏 보면 어떤 원칙 없이 배열된 것처럼 보이며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기원과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개별적 법규들은 각각 다른 전승전통으로 소급될 수 있으며 오랜 시간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 문서화되었다. 여러 종류의 법규들이 하나 의 법전 안에 모여지기 까지는 틀림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제 그 다양한 법규들은 하나의 법전 안에 놓여있고 그것들은 오늘날 놓여있는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각 법전들이 일정한 배열원칙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법전 안에 놓인 개별적인 법규들은 일정한 체계에 따라 법전 안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세 법전들은 그 문체나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공통의 편집기술 즉 편집원칙을 가지고 있다. 편집자는 보다 옛 법 전통들을 기초 자료로 사용하고 있지만 자신의 편집적 의도에 따라 그것들을 확대시키거나 삭제하고 배열시킨다. 그 배열 원칙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그것은 바로 구약성서의 ‘율법’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배열원칙은 무엇보다도 법 형태와 관련된다. Albrecht Alt의 양식 비평적 작업1)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나눈 양식사적 구분 즉 결의론적 법(das kasuistische Recht)과 정언적 법(das apodiktische Recht)이라는 구분이 구약성서 법 연구의 초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Alt가 정언법으로 구분한 네 그룹 중 가장 첫 번째 것이 mot-jumat 문장들, 즉 사형법이다. Alt는 정언적 법 유형들이 본래 ‘이스라엘적이고 야웨적인’ 2) 기원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하며 결의론법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본 연구는 그가 나눈 정언법이 성서의 법전들 안에서 그 법전의 구조와 관계된 일정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법전들 안에서 정언적 형태의 법규들의 위치는 편집자가 그의 법전을 통해 전하고 전달하려 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법전 안에서 정언법의 위치는 구약성서 법의 본래적 의미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2. Albrecht Alt의 법 구분과 정언법
Alt는 양식사적-형태사적 방법(die sog. gattungs- oder formgeschichtliche Methode)3)을 사용하여 구약성서의 법규들을 결의론적 형태의 법과 정언적 형태의 법으로 나눈다. 출 21:18 이하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 결의론법은 법이 다루는 모든 상태를 3인칭으로 서술한 객관적인 형태의 ‘만일 누군가 ... 하게 된다면(if...)’의 형태를 띠며 사건의 경우를 묘사하는 조건절로 된 상반절과 사건의 결과를 다루는 하반절의 구조로 되어있다. 미쉬파팀(םיטפשׁמ, 출 21:1)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결의론법의 형식과 내용은 그 삶의 자리를 지역재판소로 추측하게 한다. 즉 그 법규들은 성문 앞에 모인 법 공동체 앞에서 낭독되어 해당된 사건들에 대해 심문을 하고 판결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Alt는 이 결의법이 고대 근동의 공통적인 법 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4)
반면 정언법은 이스라엘이 사막에서부터 소유하고 있던 이스라엘 고유의 것인데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 형태는 운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같은 형태의 문장들이 시리즈 혹은 그룹을 이루어 나타난다. 내용적인 특징으로는 신성한 영역을 다루고 있으며 야웨와 이스라엘과의 계약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태상, 내용상으로 결의론법과 현저히 구별되는 법규들을 Alt는 정언적 형태로 된 법으로 규정했다.5) 그는 구약성서 안에서 정언법을 4가지 범주로 분류했는데 모트-유마트(mot-jumat) 문장 즉 사형법, 아루르(רורא, arur) 문장, 즉 저주법, 금지문, 십계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오늘은 사형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문장 후반부가 동일한 판결 즉 תמוי תומ (mot-jumat,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로 되어 있는 문장들은 Alt에 의해 전형적인 정언법으로 제시되었다. 출애굽기의 언약법전 중 21:12,15-17 6)은 그 단순한 형태로 인해 mot-jumat 문장의 옛 형태로 간주되며 이 법 형태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mot-jumat 문장은 무엇보다도 사건의 경우와 판결의 내용을 아주 간단한 형태로 말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21장 12절에서는, 범인과 사건을 동시에 나타내는 분사형(הכמ, 마케, ‘때리는 자는’)과 목적어(שׁיא, 이쉬, ‘사람을’), 그리고 앞의 행위로 일어난 결과(תמו, 봐메트, ‘그래서 죽었다’)가 문장의 주어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며 부정사 절대형(infinitivus absolutus)으로 강화된 동사 서술형(תמוי תומ, 모트 유마트)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나타낸다. 주어와 술어 사이를 띄어 천천히 분명하게 발음하는 ‘표현의 무게’(Wucht des Nachdrucks)를 Alt는 정언법의 특징으로 규정했다. 히브리어 다섯 단어로 된 한 문장은 모든 살인행위를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한다는 데서 결의법과의 차이점을 보인다. 형식적이고 내용적인 무조건성은 그 법규가 야웨의 요구로부터 기원했음을 보여준다. 야웨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과 형태상의 무조건성을 Alt는 정언법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또한 언약법전에서처럼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같은 구조를 가진 문장들이 일련의 목록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것도 정언법의 특징이다.
3. mot-jumat 문장의 특징
Alt의 법 문장 구분 중 결의론법 부분은 큰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정언법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그의 정언법은 형태나 내용적으로 다양한 범주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늘 우리는 Alt의 정언법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게 된 mot-jumat 문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기된 문제들 중 첫 번째는 mot-jumat 문장이 분사형으로 시작되고 하나의 사건과 판결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히려 결의법에 속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잔혹한 법규가 어디에서 유래되었고 어디에서 선포되었는지에 관한, 즉 그 기원과 삶의 자리에 대한 것이다. 세 번째는 mot-jumat 문장이 일련의 목록형태로 나타나는 의미와 그것이 본래적인 것인지 혹은 부차적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고 마지막으로는 전체 언약법전 안에서 mot-jumat 문장의 구조적 기능에 대한 것이다. 오경 안에 산재해 있는 여러 mot-jumat 문장들 중 출 21장의 목록들이 가장 짧은 순수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연구에서는 주로 출 21장의 mot-jumat 문장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3.1. 형태상의 구조: 결의론법적 요소
앞에서 살펴본 대로 mot-jumat 문장의 형태상의 특징은 가장 단순한 문장형태 안에 범죄사건과 판결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범죄사건과 그에 해당하는 판결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법적 행동 즉 재판을 전제로 하는 결의론법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H. Gese는 분사로 된 이 mot-jumat 문장을 결의론법의 ‘축약된 모방’형태로 보고 결의론법이 시적이고 제의적 형태로 변화된 ‘혼합형태’(Mischform)으로 규정하였다.7)
mot-jumat 문장에서 분사형으로 표현된 범죄사건이 조건절 형태나 관계절 형태로 쉽게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은 mot-jumat 문장이 결의론법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출 21:12은 레 24:17에서 יכ שׁיא (이쉬 키, ‘만일 한 남자가’)로 시작하는 조건절 문장으로 나온다.
출 21:12 사람을 쳐서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תמוי תומ תמו שׁיא הכמ)
레 24:17 만일 한 남자가 사람의 생명을 쳤다면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תמוי תומ םדא שׁפנ־לכ הכי יכ שׁיא)
레위기 24:17에서는 동사의 직설법 미래형(indikativ impf.)이 사용되고 목적어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같은 동사 הכנ(나카, 때리다/치다)로 같은 사건을 묘사하고 있고 그에 대해 같은 판결(mot-jumat)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 21:17의 내용도 레 20:9에서 רשׁא(아쉐르)를 사용한 관계절로 나타난다.
출 21:17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תמוי תומ ... ללקמ)
레 20:9 만일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한다면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תמוי תומ ... ללקי רשׁא שׁיא שׁיא יכ)
그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피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레 20:9b을 부차적인 삽입으로서 앞 문장의 반복이라고 보아 제외한다면 두 문장은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그 경우에 사형을 선고한다는 점에서 내용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토대로 R. Kilian은 분사적 형태의 법규 안에 결의론법 문장이 전제되어 있다고 결론지었고8) G. Fohrer 또한 분사적 형태의 법규를 ‘정언법 형태로 된 결의론법’으로 정의했다.9)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법 역사 중 하나의 양식사적 발달단계를 추측해볼 수 있는데 분사적 형태의 법문장들은 결의론법 형태가 정언법의 영향을 받아 이차적으로 변화한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3.2. 내용상 특징: 금지문(Prohibitive)과의 연관성
한편,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출 21:12,15-17의 법규들은 주로 사람(שׁיא, 이쉬)과 부모에 대한 행동을 문제 삼는다.
12절 사람을 죽이는 것
15절 부모를 치는 것
16절 사람을 훔치는 것
17절 부모를 저주하는 것
‘죽음’이라는 형벌로 다스리는 이 중범죄 형벌목록은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과 일치한다. 즉 부모계명, 살인금지, 도적질 금지. 즉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들은 십계명의 금지문들과 내용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비록 십계명의 도적질 금령(출 20:15)이 목적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출 21:16과 같은 동사 בנג(가나브, 훔치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사람을 훔치는 일, 즉 유괴를 의미하는 것이다.10) 분사적 형태의 mot-jumat 문장과 금지문의 내용적 유사성은 두 형태 사이에 법 역사적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금지문 형태와 비교했을 때 분사형태의 mot-jumat 문장은 ‘판결’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법 역사에 있어서 결의론적-조건적 법규로부터 분사적 형태의 mot-jumat 문장으로의 발달과정과는 다른 과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정언적-금지문으로부터 분사적 형태의 mot-jumat 문장으로의 발달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즉 분사 형태의 mot-jumat 문장은 이미 주어진 기본 규정으로서의 금지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이 기본규정을 어겼을 경우 그는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분사형태와 사형판결로 이루어진 새로운 법 형태로 표현되었다.
살인하지 말라 -> 살인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E. Gerstenberger는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을 가족윤리 혹은 씨족윤리로서의 금지문에서 금지한 일을 어긴 자에 대해 형벌을 내리는 진정한 의미의 법문장이 되는 첫 번째 발달단계로 이해했다.12) R. Hentschke 도 이것을 실제적인 선포를 전제로 하는 진짜 법이라고 말했으며12) 이러한 의미에서 H. Schulz는 mot-jumat문장을 ‘사형법’이라고 정의했다.13) 이 사형법은 씨족규범으로 존재했던 금지명령에서 발달한 것으로 금지문이나 결의법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구조를 지닌 새로운 법형태라는 것이다. 사형법에서 나타나는 사건-판결의 관계는 결의론법에서처럼 인과관계(Kausalverhältnis)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금지명령을 어겼을 경우에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법적관계’(Rechts- verhältnis)이다.
mot-jumat의 분사형 문장이 결의론법에 속하는 것인지 정언법에 속하는 것인지는 그것의 형식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그 내용에 비중을 둘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mot-jumat문장이 어느 쪽에서부터 출발하든지 간에 한 단계 더 나아간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즉 mot-jumat문장의 현재의 형태는 결의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정언법적 금지문으로부터도 구분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금지문 형태가 주로 히브리어 두 단어로 이루어져서 mot-jumat 문장보다 짧다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하지만 금지문은 그 압축된 형태 안에 더 확대되고 확장된 내용을 포함한다. 일반적 법 역사에 따르면 금지명령은 판결을 가지고 있는 분사형태의 전제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분사문장은 이미 주어진 금지명령을 어겼을 경우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짧은 금지문 형태가 사건의 모든 가능한 경우들을 포함할 가능성도 있다. 오늘날의 성경 특히 십계명에 들어있는 짧은 형태의 금지문들은(신 5:17-19; 출 20:13-15) 이러한 경우로 해석되며 그래서 법 역사적 발달단계 중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과 그와 관계된 금지문에서 다루는 범죄들은 하나의 인간사회에서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가능케하는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원칙들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출 21:12,16)과 ‘부모’(출 21:15,17)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성원이다. 사람을 살인하거나 훔치는 일 혹은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근간을 파괴하는 가장 나쁜 범죄이며 따라서 사형으로 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mot-jumat 문장의 내용은 그것이 씨족윤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4. mot-jumat 문장의 삶의 자리
mot-jumat 문장의 삶의 자리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고대 근동의 종신조약과 관련된 계약제의이고 다른 하나는 법공동체이다. 전자는 mot-jumat 문장의 형식적 특징과 고대 근동의 평행문을 근거로 하고 후자는 תמוי תומ(mot jumat,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는 법적 판결에 근거하고 있다.
4.1. 계약 제의
Alt가 정언법의 전형적 특징으로 언급한 운율적 구조와 일련의 시리즈 즉 목록을 형성하는 것은 mot-jumat 문장의 제의적 삶의 자리를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다. 짧고 운율적인 분사형 문장이 같은 형태로 열을 지어 나타난다는 것은 정언법을 정기적으로 낭독한 의식적-제의적 상황에 알맞다는 것이다. 이것은 mot-jumat 문장을 결의론법으로부터 분명히 분리시키는 특징이라고 보았다.
S. Mowinckel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법들과 계약제의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주장한 이후로14)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갱신하는 제의축제는 이스라엘 법들의 삶의 자리로 이해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제의축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이 낭독되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Alt와 G. von Rad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특별히 Alt는 매 7년마다 열리는 장막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갱신할 때 정언법이 모든 백성 앞에서 낭독되었다고 보았다. 정언법의 삶의 자리로서의 제의축제는 헷족의 조약문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는데 V. Korosec과 G. Mendenhall에 이어 K. Balzer는 구약성서의 계약형식과 헷족의 조약형식을 비교하여 둘 사이의 형식적, 내용적인 밀접한 상관관계를 증명해내었다.15)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헷족의 조약형식의 틀을 받아들여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나타내는데 직접적으로 사용했는데 두 나라 간의 주군-봉신 계약문에서 주군국가는 봉신국가에게 해야 할 의무를 주로 금지문의 형태로 요구하는데 이것은 야웨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계명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봉신국가가 그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 봉신국가에게 저주와 보복이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엔 저주를 받고 혹은 사형이라는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계약은 이스라엘에서는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종교적인 계약의 의미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G. Heinemann은 정언법 형태 중 긍정계명형태는 계약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분사형으로 시작되는 형태들 mot-jumat 문장이나 arur 문장의 저주형태는 계약을 깨뜨렸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6) 즉 mot-jumat 문장의 사형판결은 세속적인 법적 결과가 아니라 계약관계를 전제로 하는 종교적 형벌이라는 것이다. mot-jumat 문장의 형태적 특징뿐만 아니라 죽음의 위협자체가 그 삶의 자리를 제의적인 것임을 알려주는 근거라고 보았다. 나아가 H. G. Reventlow는 mot-jumat 문장의 판결규정의 무조건성을 근거로 이 제의적 법을 이스라엘과 야웨 사이의 계약협정에서 야웨의 의지를 표명하는 계약법(Bundesrecht)으로 규정한다.17) R. Kilian도 mot-jumat 문장이 내용적으로 제의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결의론법으로부터 구별된다고 보았다. mot-jumat 문장의 운율, 목록형성은 축제제의에서 낭독하기 위한 것이고 문장의 후반부인 사형판결도 미래의 행위를 위한 저주와 협박의 말이라고 주장하였다.18)
이와 같이 mot-jumat 문장이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계약관계를 갱신하는 제의에서 계약조건으로 낭독되었다는 주장은 mot-jumat 문장의 사형이라는 형벌이 세속적인 법정에서 내려져서 실행되는 것이라는데 반대한다. mot-jumat 의 의미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요구되는 명령을 잘 지켜 행하게 하기 위한 위협이고 따라서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mot-jumat 문장의 제의적 삶의 자리에 대한 견해들은 정언법이 이스라엘적, 야웨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Alt의 주장과 직접적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4.2. 법적 공동체
mot-jumat 문장의 삶의 자리에 대한 두 번째 주장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데 즉 사형판결을 가진 분사형의 법적 구조는 제의적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해서 법이 집행되는 법적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법적 공동체가 결의론법의 삶의 자리로서의 법적 공동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mot-jumat 문장이 하나의 범죄사건에 형벌이 선포되는 재판과정과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출 21:12,15-17의 분사형태를 법 문장 발달의 첫 단계로 본 Gerstenberger도 그 삶의 자리로서 재판이 행해지는 법적공동체를 제시했다. 고대의 가족공동체 혹은 씨족공동체에서는 판결부분을 가지지 않은 금지문이 삶의 규범으로의 역할을 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새로운 도시적 공동체 삶이 시작되고 이전 규범이 가나안의 법문화와 만나 새로운 형태, 즉 판결부분을 가진 법규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법적 발달 단계의 첫 단계를 Gestenberger는 분사형태에서 찾은 것이다.19) 그는 이 분사형태의 법이 본래 계약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20)) 구약성서 어디에도 계약체결과 금지문 형태 혹은 명령형태와의 구조적 관련성을 이야기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에 관한 가장 오래된 보도인 출 24장에는 신 현현과 계약식사에 대해서만 보도하고 율법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일상사 속에서 그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반적 형태의 이스라엘 금지문은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 하에서 일정한 사람들과 시대에만 유효한 헷족의 봉신계약의 규정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21)
Hentschke는 법적 결과 즉 판결부분을 가진 분사형과 관계절로 된 형태만이 진짜 정안법으로 규정했는데 고대 바빌론 왕의 칙서22)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분사형태와 관계절 형태가 구두적 법선포 즉 대중들 앞에서 공공연히 법적인 의지를 천명하는 상황을 그 삶의 자리로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Hentschke는 이 대중적-정언적 법결정이 구두로 전달되는 곳은 세속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제의적인 삶의 영역일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23)
분사형태로 된 mot-jumat 문장을 금지문에서 유래했지만 고유한 삶의 자리를 지닌 새로운 법형태로 보고 사형법으로 명명한 Schulz는 그 본래적인 삶의 자리를 부족공동체에서 찾았는데 그 공동체의 최고 우두머리의 권위가 사형판결을 보증한다고 보았다.24) 이스라엘 종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사형판결은 지역공동체 안에서 선포되었고 집행되었다(신 21:18f.; 22:13ff.; 수 7:25; 왕상 21:13) 지역공동체는 포로기 때까지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Schulz는 이 공동체가 세속적 법공동체가 아니라 제의적 재판공동체라고 규정하였다(왕상 21:1ff.; 렘 7:1ff.; 26:7ff.).25)
이 분사형태로 된 mot-jumat 문장들은 상위의 권위를 전제로 하며 결의론법과는 달리 통치행위를 전제로 하는 듯이 보인다.26) G. Liedke는 구약성서의 이야기 본문들에서 사형이라는 판결이 왕(창 26:11; 왕하 10:19,24; 삼하 12:5)이나 제사장(왕하 11:8,15) 혹은 군대장관(삼상 11:7; 삼상 30:24)이나 아버지(창 31:32; 30:33b; 44:9,17), 종족 동맹(삿 7:4-5)이나 야웨 자신(창 4:15; 출 19:12b; 민 14:23b; 수 7:15; 삿 7:4-5)에 의해 선포되는데 언약법전 안의 mot-jumat 문장(출 21:12,15-17)은 가족의 어른인 아버지(בא, 아브)의 권위에 의해 선포, 실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출 21:12.15-17에서 다루는 범죄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행동적(15절), 언어적(17절) 폭력이고 또한 아버지의 재산으로서의 한 사람(שׁיא, 이쉬)에게 행해진 범죄(12.16절)로서 가장인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 21:12-17의 mot-jumat 문장의 사형판결은 가족재판에 그 삶의 자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E. Otto는 출 21:12,15-17의 네 문장이 사형이라는 형벌로 대가족의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규범을 깨뜨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기본 규범은 혈족으로 구성된 법공동체의 한계법인데 주로 금지문 형태로 존재하며 살인, 부모저주, 유괴, 간음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 내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는 가족의 가장의 권위에 의해 처리되었지만 가족 간에 일어난 범죄인 경우에는 지역의 재판공동체로 옮겨져 다루어졌다. 문학적으로 이차적 첨가인 13-14절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신체상해의 경우와 살인을 구분하는 재판과정을 전제로 한다고 해석하였다.27)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들이 내용적으로 세속적 삶의 영역을 다룬다는 것뿐만 아니라 문장의 뒷부분을 이루는 사형의 위협은 제의적 상황보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재판 혹은 혈통적 법공동체에서 그 법적 판결이 선포되었음을 지지해준다. 각각의 mot-jumat 문장들은 후대에야 비로소 그룹을 지어 하나의 시리즈로 모아졌을 것이며 mot-jumat 문장의 이러한 목록형성은 다른 고대근동 문서들에서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정확한 병행구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결과는 헷족의 조약문서와 mot-jumat 문장의 목록을 비교하는 것이 그 문장의 제의적 기원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중명해준다. 그러면 mot-jumat 문장들이 형성하는 목록형태는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5. mot-jumat 문장의 목록형성(Reihenbildung)과 그 구조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은 네 개의 동일한 형태를 지닌 문장이 그룹을 지어 나타난다. 네 개의 문장은 모두 동사의 분사형으로 시작되며 동일하게 절대적 부정사로 강화된 서술형(תמָוּי תוֹמ)으로 끝난다. 이 네 문장들의 기본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תמָוּי תוֹמ + 동사의 분사형
12절이 접속사 없이 곧바로 분사형태로 시작하고 나머지 절들은 이 네 문장들이 하나로 묶여진 단일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을 쳐서(הכנ)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12절)
그리고(ָוּ)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치는(הכנ)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15절)
그리고(וּ) 사람을 훔치는 자는 ... 반드시 죽일 것이다(16절)
그리고(וּ)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17절)
이 네 문장은 구조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2절과 15절은 같은 동사 הכנ (hiph.)를 사용하고 있으며 두 절씩은 각각 같은 목적어를 사용, 같은 대상을 다루고 있다. 즉 12절과 16절은 שׁיא(사람), 15절과 17절은 ומאו ויבא(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범죄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mot-jumat 문장이 목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문장의 운율적 구조28)와 함께 제의적 삶의 자리를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개별적인 법규들이 하나의 목록을 이루어 모아진 것이 본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보다 후대의 작품인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 문장들이 처음부터 10개 혹은 12개의 목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래는 각각 개별적인 문장이었거나 혹은 보다 작은 그룹으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오늘날의 목록의 형태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G. Fohrer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데 그는 현재 언약법전과 성결법전에 흩어져 있는 mot-jumat 법규들이 한 때 완결된 10개의 목록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열 개의 목록을 재구성하는데 그 목록은 출 20장에서 영향을 받은 다섯 문장과 레위기 18장의 금지문의 영향아래 있는 다섯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29)
1. 야웨 외에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출 22:19[한글 20절])
2. 야웨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레 24:16a)
3. 사람을 쳐서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출 21:12)
4. 사람을 훔쳐서 그를 팔았든지 그의 손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출 21:16)
5.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출 21:17)
6.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즉 간음한 남자와 간음한 여자(레 20:10)
7.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었으니
둘 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올 것이다(레 20:11)
8. 자기의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는 그 둘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레 20:12)
9. 한 사람이 여자와 동침하는 것같이 남자와 동침한다면 그들은 끔찍한 일을 행한 것이다.
그 둘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레 20:13)
10. 짐승과 동침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너희들은 그 짐승도 죽일 것이다(레 20:15)
하지만 이러한 목록의 재구성은 인공적인 것이고 설득력이 없게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에서 mot-jumat 문장들이 다른 정언법 목록들처럼 십계명의 형태로 단 한번도 나온 적이 없고 오히려 더 짧은 목록들에서 그 본래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30)
한편 Gerstenberger는 법 문장의 초안으로서의 금지문들은 본래 2-5개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짧은 목록으로 존재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그 주제와 목적에 따라 10개나 12개의 보다 긴 목록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10개나 12개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목록들의 기원을 제의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법적 발달단계에서 첫 번째 단계에 속하는 분사형태의 법규와 관련해서는 출 21:15-17이 원래 세 개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존재했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31) 반면, Liedke는 mot-jumat 문장들이 본래는 각각 구체적인 상황에서 최고의 권위에 의해 선포된 개별적인 문장으로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32) 그 개별적인 문장들은 점차 그 구체적인 상황들로부터 벗어나서 그 형태에 따라 혹은 다룬 영역에 따라 하나의 목록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 21:12,15-17의 mot-jumat 문장들은 구성된 원칙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 목록형성의 의도와 일치한다. 즉 여기서 이 목록을 형성하게 한 것은 동일한 주제 즉 사형판결을 받을만한 중범죄라는 것이다. 하나의 mot-jumat 문장이 동일한 내용의 금지문을 전제로 한다면 이 mot-jumat 문장들로 이루어진 목록은 금지문으로 된 목록들에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구약성서에서 mot-jumat 형태는 한번도 단지 하나의 개별문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목록의 형태로 나온다는 것이다(출 21:12-17; 22:17-19; 레위기 20:2-27; 24:16-17 등). 하지만 10개 혹은 12개의 mot-jumat로 이루어진 목록은 형태상으로도 내용상으로도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 21:12-17절에서와 같이 짧은 목록으로 이루어진 mot-jumat 문장은 보다 고대 사회에서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을 어겼을 경우를 사형으로 위협한 기초규범들을 나타낸다. 금지문 목록이 흔히 작은 목록으로 존재했던 것과 같이 mot-jumat 문장들도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처음부터 작은 목록의 형태로 묶여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6. 언약법전에서 mot-jumat 문장들의 기능
mot-jumat 문장의 분사형태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Liedke에 의해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 분사형 문장들에 대한 논의는 90년대 초부터 그 문장들이 현재의 위치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기능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mot-jumat 문장들은 언약법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로 편집적 혹은 구조적 방법론(Redaktions- oder Kompositionsmethode)에 의해 시도되어 왔다.
언약법전(출 20:22-23:19)에서 mot-jumat 목록(출 21:12-17)은 노예법(출 21:2-11)과 신체상해에 관한 법(21:18-32) 사이에 놓여져 있다. mot-jumat 목록은 내용상으로 뿐만 아니라 형태상으로도 분명히 그 문맥에서 구별되는데 mot-jumat 문장을 둘러싸고 있는 법규들은 ‘만일 ... ’(יכ 혹은 םא)으로 시작되는 결의론법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출 21:12-17 안에서도 13-14절33)은 형태상, 내용상, 구조상으로 그 문맥에서 제외되는데 여기서는 רשׁא (아쉐르)로 시작되는 관계사절(13절)과 יכ (키)로 시작되는 조건절 문장(14절)으로 법적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그 두 절은 12절의 살인 행위가 비의도적인 것임을 전제로 하고 이 행위와 구별되는 살인의 경우를 다루고 있다. 13절에서는 과실치사를, 그리고 14절에서는 고의적 살인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13-14절은 12절에 덧붙여진 이차적 문학적 첨가문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각 절의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1인칭 ‘나’로서 2인칭 ‘너’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으며 범인으로 하여금 피의 복수를 피해 도망할 수 있는 도피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13절 b에서 말하는 정해지지 않은 한 장소(םוקמ)는 14절 b에서는 ‘나의 제단’(יחבזמ, 미즈베히)으로 한정되어 규정된다. 이것은 13-14절이 지역성소를 도피성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mot-jumat 문장과 13-14절과의 결합은 mot-jumat 목록을 하나님의 법으로 이해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L. Schwienhorst-Schönberger는 mot-jumat 문장들의 형태가 그것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기에 특히 적당하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 문장들은 최고의 권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34) 그는 원래 세속적인 법이었던 mot-jumat 문장들이 13-14절의 첨가문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해석되었다고 보았다.35)
다른 한편, Otto는 출 21:12-17의 편집사적 구조가 가족의 사형법이 지역 재판공동체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원래 가족 안에 그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을 mot-jumat 문장이 13-14절의 살인행위에 대한 확대를 통해 그리고 16절의 첨가문36)을 통해 지역 재판공동체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mot-jumat 문장과 도피성으로서의 지역성소와의 결합은 지역재판과 제의와의 연결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을 넘어서서 출 21:12-17과 22:17-19에서 세속적 법문장과 종교적 법문장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출 21:12-17 - 13-14절을 포함해서 - 는 언약법전에서 자신의 위치를 통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전체 언약법전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J. Halbe는 첫 번째 부분(21:1-22:19)을 미쉬파팀(םיטפשׁמ)으로, 두 번째 부분(22:20-23:9)은 ‘게르(רג, 나그네)’ 모음집으로 명명한다.37) mot-jumat 문장들은 첫 번째 부분에 위치하는데 Halbe는 또한 미쉬파팀 부분을 둘로 나누어 미쉬파팀 I(21:1-11)과 미쉬파팀 II(21:12-22:19)로 구분한다. 그는 21:12-17 단락이 특별히 21:12를 통해서 그 뒤의 단락(21:18 이하)과 주제상으로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즉 21:12-17의 mot-jumat 문장목록은 뒤 따르는 두 번째 미쉬파팀 부분(21:18-22:16)을 열어 시작하며 22:17-19의 mot-jumat 문장목록은 그 부분을 끝맺는다. 여기서 우리는 mot-jumat 목록의 틀기능(Rahmenfunktion)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 구성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21:12-17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목록
21:18-22:16 미쉬파팀
22:17-19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목록
이러한 구조는 언약법전이 계획적인 편집에 의해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mot-jumat 문장이 이렇게 틀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생각은 Halbe 이래로 E. Otto와 Y. Osumi에 의해 채택되어 발전되었다.
Otto는 언약법전의 구조를 교차댓구형으로 규정하고 미쉬파팀 부분을 보다 상세하게 나눈다.38)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목록(21:12-17; 22:17-19)은 신체상해에 관한 법규들(21:18-32; 22:15f)을 감싸는데(포괄하는데) 그 신체상해에 관한 법규들은 또한 배상에 관계된 법규들(21:33-22:14)39)을 감싸고 있다. 또 이 모든 법규들은 노예보호법(21:2-11)과 외국인과 가난한 자 보호법(22:20-26)에 의해 둘러 싸여 있다. 이것으로 언약법전의 첫 번째 부분이 끝나고 두 번째 부분과 구분된다. 두 번째 부분은 Otto에 의하면 22:28로 시작되는데 언약서의 이 두 부분은 22:26bγ(와 27절)40)에 의해 서로 분명히 구분된다. 언약법전의 첫 번째 부분의 구조는 다시 다음과 같이 교차 댓구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노예보호(21:2-11)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목록(21:12-17)
신체상해(21:18-32)
배상법(21:33-22:14)
신체상해(22:15f.)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목록(22:17-19)
나그네/가난한 자 보호(22:20-26)
Y. Osumi 또한 Otto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형법 목록의 틀로서의 기능을 주장한다.41) 즉 사형법 목록은 미쉬파팀 안에서 사회적 법규정들을 감싸는 틀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21:12-17 사형법 목록
21:18-22:16 사회적 법규정들
22:17f.(19) 사형법 목록
Osumi는 언약법전의 두 번째 부분(명령부분)이 두 번째 사회적 법규정 부분을 둘러싸는 나그네(게르) 보호규정들로 시작하고 끝난다고 보고 있다.
22:20a 나그네 보호 규정
22:22-23:8 사회적 법규정들
23:9a 나그네 보호 규정
이와는 다르게 Schwienhorst-Schönberger는 mot-jumat 문장의 서론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42) 즉 21:12-17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결의론법 부분(21:18-22:16)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21:12-17과 21:18 이하는 둘 다 사건법(Fallrecht)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21:18 이하가 접속사 와우(ו,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두 부분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21:12이 접속사 없이 시작된다는 것은 21:12-17 부분이 그 앞의 노예법(21:2-11)과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사형법 목록(22:17-19)도 21:12-17과 구조상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즉 그 뒤에 나오는 금지문 부분(22:20-23:9)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Schwienhorst-Schönberger의 견해에 따른 언약법전의 핵심은 구조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21:12-17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목록(첫 번째 서언)
21:18-22:16 결의론법 부분
22:17-19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목록(두 번째 서언)
22:20-23:9 금지문 부분
편집적-구조적 연구들은 언약법전의 법규들이 얼마나 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언뜻 보면 서로 관련 없는 법규들이 느슨하게 함께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다양한 법규들이 하나의 일치된 전체구조 속에 놓여 있는, 아주 잘 정리된 구성작품이라는 것이다. mot-jumat 문장목록은 이 치밀한 구조 안에 위치해 있다.
사형법 목록은 언약법전에서 미쉬파팀(21:1)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부분 안에 놓여 있고 이 첫 번째 부분은 대부분 결의론적 법형태로 표현되었다. 전체로서의 언약법전은 법규들의 내용과 문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20:22-26 제단법 - 금지문
21:2-11 노예법 - 결의론법
21:12-17 사형법 - mot-jumat 형태
21:18-22:16[한글 17절] 신체상해와 배상에 관한 법 모음 - 결의론법
22:17-19[한글 18-20절] 사형법 - mot-jumat의 변형
22:20[한글 21절]-23:9 사회법 - 금지문
23:10-19 제의법 - 긍정명령, 금지문
결의론적 법 형태로 형성되고 미쉬파팀 부분을 시작하는 노예법은 그 구조와 내용에 따라 미쉬파팀의 다른 부분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즉 6/7도식을 가진 노예보호법은 사회적인 보호법(22:20-26)과 언약법전의 두 번째 부분에서 야웨를 위한 구별에 관한 법(23:10-12, 6/7 도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21:12-17의 mot-jumat 문장들은 22:17-19의 또 다른 사형범죄목록과 함께 결의법적으로 형성된 신체상해와 배상에 관한 법 모음집을 감싸고 있는 구조가 분명해진다.
22:17-19(한글18-20절)의 목록은 더 이상 mot-jumat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종교적 범죄를 다루는 사형법으로 21:12-17에 상응하는 부분이다. 사건에 대한 판결은 21:12-17과는 다르게 표현하였지만 같은 내용인 사형형벌을 선고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문장 중에서 18절은 분명히 mot-jumat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앞 부분의 법적 사건이 서술에서는 분사 앞에 לכ(콜, 모든)이 놓여짐으로써 원래의 형태를 변형시켰다(‘짐승과 함께 눕는 모든 사람은’). 17절은 목적어가 첫 번째 자리에 오는 전형적인 금지문이다. 금지문 형태의 요구(היחת אל, 너는 살려두지 말라)는 내용상으로 mot-jumat 형태의 요구와 일치한다. 동사 היח(하야, 살다)의 piel 형(살게 하다)은 실제로 동사 תומ의 hiphil 형(죽이다)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었다(출 1:16ff. 신 32:39 등).
여기서 우리는 ‘남성은 죽이고 여성은 살려 두는’ 어떤 문학적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출 1:17 이하에서 ‘아들은 죽이고 딸은 살려두라’는 명령 혹은 민 31:15 이하와 신 20:16에서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살려두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칙이다. 17절에서도 그 목적어가 마술하는 ‘여자 혹은 마녀’로서 여성이기 때문에 תומ 대신에 היח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살려두다’의 부정어 즉 ‘살려두지 말라’는 ‘죽이라’와 같은 뜻이다. 19절은 출 21:12-17의 mot-jumat 법규들에서처럼 분사로 시작하지만 mot-jumat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판결로 끝난다(םרחי). 여기서 םרח(하람) 의 hiphil 형은 ‘죽이다, 없애다’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민 21:2f.; 신 2:34; 3:6; 7:2 등) 19절도 본래 mot-jumat 문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2:17-19는 21:12-17의 목록과는 달리 접속사 없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것은 본래 함께 속해있지 않은 다양한 법 문장들을 단순히 함께 놓은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한다. 그러나 주제상(내용상)으로 그것들은 종교적 순결을 다루는 분명한 단일체이다. 21:12-17이 사회적 영역에서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원칙을 다룬다면 22:17-19의 목록은 종교적 영역에서의 기본규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서 안에서 22:17-19은 분명히 21:12-17의 사형법에 상응하는 부분이다. 절대적이고 강한 사형법 형태로 되어 있는 이 기본법 목록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피해와 관련된 여러 구체적인 분쟁의 경우를 다룬 결의론적 형태의 법규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 모든 법규들을 하나로 묶어 모든 법적 영역을 포함해 하나님의 절대적 원위 아래 두는 기능을 한다.
언약법전의 문체상의 구조를 보면 형태상 주로 금지문으로 되어 있는 제의적 규정들로 시작하고 끝맺는다(20:23f.; 23:10-19). 이것에서 금지문과 mot-jumat 문장 형태는 결의론법과는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결의론적 형태로 된 법규 부분을 포함한 모든 법모음을 포괄하는 틀(울타리)로서의 기능이다. 원래 고대 근동의 법전통에 속해있고 가나안에서의 정착생활과 더 확실히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결의론법 부분은 가나안 정복 이전 즉 이스라엘 민족형성 이전 공동체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mot-jumat 문장들과 금지문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결의론적 법 모음들이 고대 근동의 법 전통에서 유래되었고 그것과 일치한다면 언약법전의 편집자는 이 소위 ‘밖으로부터’ 수용된 율법을 그들 자신의 전통에서 비롯된 법 문장들로 둘러싸 그 안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을 이스라엘 자신들의 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 목록의 형태로 되어 있는 금지문 형태와 mot-jumat 형태가 언약법전의 모든 법 모음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로부터 직접 받은 자신들의 법으로 확증하는 기능을 했다. 이제 다양한 법규들은 하나의 ‘법’으로 단일화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법적 영역들을 포괄하는 자신들의 법으로 이해되었다. 정언법 형태로 된 법규들의 목록들은 이 법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그래서 이 모든 법들을 야웨 아래 두는 일에 아주 적절한 형태였던 것이다.
7. 결론 - 정언법의 틀 기능(Rahmenfunktion)
정언법 형태를 가진 목록의 이러한 ‘틀로서의 기능’은 신명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신 5장의 십계명과 신 27장의 저주문 목록(27:15-26)이 신명기 법전(신 12-26장)을 둘러싸는 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금지문과 긍정명령 형태로 되어 있는 십계명의 열개의 목록 자체는 비록 후대에 결합된 작품이지만 개별적으로는 더 오래된, 작은 금지문 목록들로 소급될 수 있다. 중한 범죄에 대한 그 옛 목록들은 한 공동체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근본 규범들이었다. 십계명의 근본 규범들은 출 21:12-17 뿐만 아니라 레위기 18장의 금지문 목록 그리고 언약법전의 결의론법 부분에도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의 제의적 부분 또한 언약법전과 출 34장의 옛 제의적 법 규정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요약한 것이다.
십계명의 일반적 의도 즉 모든 법적 영역을 가장 축소된 형태 안에 집약하려는 의도는 그 절대적 요구형태(금지문과 긍정명령)로 된 목록형성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윤리적, 제의적 근본규범의 요약으로서의 십계명은 현재적 문맥(출 20장; 신 5장)에서 곧 뒤따라 나오게 될 법 모음집들(언약법전, 신명기 법전) 앞에 놓이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서언으로서 그리고 요약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 27장의 저주문 목록도 같은 기능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삶의 영역의 법 규정의 핵심을 저주문 형태로 요약한 것이다. 신 27장의 현재적 형태는 분명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는데43) 이 저주문 목록이 전체 신명기 법전 뒤에 놓임으로써 신명기 법전 전체를 요약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확증하려는 편집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언법 목록의 기능은 레 18장의 금지문 목록(6-23절)과 20장의 사형법 목록(7-27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레위기 18장의 금지문 목록은 혈족적 관계로 되어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 평화로운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규범들을 전제로 한다. 이 금지문 목록은 십계명에서 ‘간음금지’의 구체적인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간음하다’라는 동사는 여러 다양한 성적 범죄에 대한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목록은 성결법전 안에서 제사장인 아닌 세속인들을 위한 윤리적 법 부분(레 18-20장)을 시작한다. 레위기 20장의 mot-jumat 목록은 레위기 18장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그 윤리적 법 부분을 마감한다.
정언법 형태로 된 성범죄에 대한 두 목록들은 여러 다양한 법 규정들의 모음집인 레위기 19장을 둘러싸는 틀로서의 역할을 한다. 20장의 개별적 문장들은 18장뿐만 아니라 19장의 법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또한 언약법전의 mot-jumat 목록도 전제로 한다. 레위기 20장의 마지막 부분(22-26절)이 레위기 18장의 틀 부분(2b-5, 24-30절)과 주제가 일치한다는 것은 20장의 편집자가18-19장을 하나의 통합체로 전제하고 있으며 18-20장이 하나의 완결된 단일체임을 보여준다. 성결법전의 윤리적 법부분에서는 성범죄를 두 개의 정언법 형태 즉 금지문으로 금지시키고 mot-jumat 형태로 금지시키고 사형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세속인들에게 성적 순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언법 형태가 열을 지어 목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위치해 있는 법전 안에서 혹은 법전과의 관계에서 모든 법규정들 특히 고대 근동에서 받아들인 결의론법을 모두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요구로 만드는 특별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절차와 방법은 단지 구약성서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편집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한 명의 동일한 편집자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경의 세 법전들은 각각 다른 시대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은 이스라엘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져 온 것이고 법전들의 여러 편집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정언법 목록들은 궁극적으로 전체 법전(=법 모음집)에 아주 강한 효력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은 후에 종교적, 제의적 의미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화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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