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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가롯유다와 베드로

by 은총가득 2020. 8. 24.

우리는 성경에서 한 배신자를 만난다.

그는 예수를 따라다닌 제자들 중 하나였다. 바로 가룟 유다이다. 그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제자와 비교해 그래도 예수와 연관된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다. 이번 내용에서는 가룟 유다를 먼저 쓰고 다음에 베드로를 쓰고자 한다. 베드로도 배신을 한 인물로서 생각해 볼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첫 번은 가룟 유다다.

 

그와 관련한 많은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 중에서 한 역할이 있는데 '돈 궤를 맡았던 것(요 13:29)'이다. 문제는 그가 돈 궤를 맡았기 때문인지 모르나 성경에 나오는 그의 행동을 통해 보면 그가 계산에 상당히 빠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쓸 물건을 사는 역할도 했다(요 13:29 -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장면에서 그가 말한 대목이 나온다. 12장 4절이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But one of His disciples, Judas Iscariot, Simon's son, who would betray Him, said "Why was this fragrant oil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given to the poor?"

 

 

마가복음 14장에는 가룟유다가 이 여자를 책망했다는 표현도 나온다. 나는 인간의 심리상 과연 그가 그 여자만 책망하는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선생을 인정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여자를 향해 노골적인 비난을 가하지만 그걸 들리도록 말한다는 것은 자기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자기 선생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시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저런 거만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가룟 유다의 태도는 이 장면 하나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이 향유 때문에 가룟유다가 여자를 향해 책망할 때 예수께서 한 마디 하신다. 마가복음 14장 6절부터 9절을 보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She has done what she could. She has come beforehand to anoint My body for burial.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 가룟유다의 행동이 바로 나온다. 마가복음 14장 10절이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태복음 26장 15절을 보면 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한 말이 돈을 요구한 것이다. 여자의 향유를 붓는 일이 끝나고 예수의 말씀 '저를 기념하리라'라는 말씀이 끝난 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것을 '협상'한 것이다. 돈 궤를 맡았고, 여자를 예수가 듣는 앞에서 돈을 허비했다는 것을 들먹이며 책망했고, 그리고 자기 선생을 팔아치울 '돈 협상'을 한 것이다. 모두가 돈과 연관이 있었다.

 

문제는 그는 이 계획을 세우고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 모든 걸 품은 상태에서 말이다. 성경에도 그의 마음 상태에 대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마음을 굳혀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만 마신 게 아니었다. 저녁 먹는 중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거기에는 가룟 유다도 분명 있었다. 다만 성경에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다'라고 쓰여있다. 이 모든 계략을 다 알고도 예수는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또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1~27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30절을 보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Having received the piece of bread, he then went out immediately. And it was night.

 

 

빵 조각을 받고 '곧바로 나갔다'라는 내용이 영어 성경에 나온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며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셨고 유다는 그걸 받은 후 바로 나간 것이다. 그가 밖에 나갔을 때는 밤이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에 가셨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잡히게 된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께 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춘다. 이는 하속들에게 준 신호로 이미 다 맞춰놓은 작전이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리고 예수는 잡혀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고 거기에서 심문을 당하셨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한 자로 판명받는다. 사람들은 그 후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으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마26:68)"고 말한다. 그 모습을 베드로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다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장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 27:3~10

 

사도행전 1장18절에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라고 보충 설명이 나온다. 가룟 유다가 자기의 선생이 정죄되는 것을 보고 어떤 점에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없으나, 그의 배신 행위가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그가 뒤늦게 깨닫게 된 것만큼은 확실하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해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21

 

The son of Man indeed goes just as it is written of Him, but woe to that man by whom the son of Man is betrayed! It would have been good for that man if he had never been born. Mark 14:21

 

 

성경을 통해 봤을 때 가룟 유다의 행동은 예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다. 실리를 따질 줄 알았으나 그의 선생과 관련돼 나타나는 기적과 사람들의 행동들을 제대로 살필 줄 몰랐다. 그래서 여자를 책망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자기의 기준만을 확고부동하게 가졌을 뿐 예수가 전파하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자기 안에 담아두지 못했으리라. 그저 화제의 인물을 옆에 두고 사는 자기 자신으로서만 만족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는 선생의 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 후 결국 자기 선생을 팔 계략을 세우는 데 있다. 성경에는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마귀가 넣은 것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엄청난 무리가 예수로부터 감화를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의 역사를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그 자신만 거기에서 동떨어진 채 있다가 결국 귀신의 생각이 들어와버리는 결과라니.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짜의 것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지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예정된 대로 흘러갔지만 거기에서 예수를 팔 자로서 쓰여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가룟 유다가 운명의 수레바퀴에 재수없게 걸렸다기 보다 가룟 유다 본인의 책임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he thought about it, he wept.

 

 

베드로가 배신하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한기를 느낀다. 예수와 함께한 3년. 그 과정 속에서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의 '호산나' 올리는 소리를 들으며 베드로는 누구보다 더 가슴 벅차지 않았겠는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최초의 증언도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는 맹세하기를 다른 제자들이 다 버려도 자신은 그럴 리 없다는 장담을 했던 사람이다.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결과와 무관하게 말이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26:33

 

Peter answered and said to Him, "Even if all are made to stumble because of You, I will never be made stumble." Matthew 26:33

 

 

'다 주를 버릴찌라도'

이 표현이 참 재밌는 표현이다. 한국어로는 '버리다'라는 표현이나 영어는 'stumble', 즉 흔들리다, 발에 걸리다 라는 뜻으로 나온다. 위 영어 버전은 뉴킹제임스인데 NIV 버전으로 봐도 'fall away'로서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말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는 뜻과 함께 '나는 결코 주님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윗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같은 표현으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All of you will be made to stumble because of Me this night)'이라는 말씀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온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믿음이 흔들릴 것을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당당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그렇게 돼도 나는 예외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부정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 이런 자부심 넘치는 고백이 있기 직전,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눅 22:31~34

 

And the Lord said, "Simon, Simon! Indeed, Satan has asked for you, that he may sift you as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that your faith should not fail; and when you have returned to Me, strengthen your brethren.

Luke 22:31~34

 

 

이미 시몬 베드로의 배반적 행동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미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게 돌이킨 후(when you have returned to Me)에 형제들을 강하게 해주어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걸 모르고 베드로는 자기의 신앙고백에만 바빴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입에서 '베드로의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쌔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막 14:66~72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the Lord turned and looked at Peter)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눅 22:61~63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장사 지냄까지 베드로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추운 예루살렘을 걸어다니며 베드로가 닭울음소리를 듣고 슬피 울었을 곳이 이곳이었을까하는 상상을 줄곳 하며 여행을 이어갔다.

 

이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가서 예수의 무덤 앞에서 돌이 굴러진 것을 발견한다. 또 흰 옷 입은 한 청년으로부터 예수께서 살으셨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 뒤 돌아가 이를 베드로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달려 무덤으로 갔고 먼저 도착한 요한은 무덤에 못 들어가고 그저 무덤 안을 보고 있는데, 베드로는 뒤에 도착한 뒤 먼저 무덤에 들어간다. 그 후에 요한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에 들어간다.

 

요한복음에는 그 후에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라고 하신 바 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흰 옷 입은 청년도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막 16:7)"라고 전달했다. 그래서 그들도 그 말씀을 따라 갈릴리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한 제자들은 바로 예수를 만나지 못했고 시몬 베드로는 본업이었던 물고기를 다시 잡게 된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요 21:3~7

 

내가 갈릴리 바다 갔을 때도 그곳에서는 여전히 고기잡이에 열중하는 어부들이 있었다. 2천 년 전 예수께서는 이렇게 물고기 잡이에 열중인 베드로 등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모든 걸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갈릴리 바다의 평온함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Therefore that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Now when Simon Peter heard that it was the Lord, he put on his outer garment (for he had removed it), and plunged into the sea.

 

 

이 한 구절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다 설명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시몬 베드로는 이전 폭풍우가 치는 갈릴리 바다에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뛰어내려 잠시 걷다 물결을 보고 무서워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께 구해달라고 소리 질렀고 예수께서 손을 잡으신 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시고 같이 배에 오르신 일이 있다.

 

그런 그가 훗날 예수님의 죽음이 코 앞에 닥친 상황에서 "다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라고 호언장담 했고 결국 그것마저 다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그는 심히 통곡했다. 남은 것 없이 다 끝나버린 그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잠잠한 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다시 기적이 일어났을 때 그는 겉옷을 두르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그가 걸었다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바닷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시커먼 바닷물이 그 자신을 두를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겠는가. 배반하기까지 한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했겠는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먹고 결국 목 메달아 자살을 했다. 자기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대놓고 부정했다.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거기서 거기지. 가장 믿음에 넘치던 자신이었으니 죄스러움은 한 수 위였을 것이 분명하다. 믿음, 자신감 다 의미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나약한 자신인가.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어떤 질책도 없으셨다. 그저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과거의 기억이, 믿음이 없어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던 자기 자신이 기억났을 것이다. 자기의 배반하는 모습이 기억 속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미리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였다"라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다시 바다에 빠지는 것으로 자기의 나약함과 비참함, 고통스러운 마음을 예수께 보여드리는 일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그는 그렇게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실수와 실패도, 부끄러움과 죄스러움도, 믿음도 신뢰도 다 주 앞에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말이다. "믿음이 적은 자"로써 말이다.

 

그 베드로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다. 수천 명을 변화 시키는 위대한 설교를 한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리기도 한다. 고넬료를 통한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다. 완전히 변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형제들을 굳게 하는데 힘을 쏟았다.

 

베드로는 베드로전 후서를 남긴다. 믿음이 적은 자,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의 나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써 베드로는 글을 남긴다. 나약한 우리도 베드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듯,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향한 마음도 본받을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3~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