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과 신학 1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

by 은총가득 2020. 6. 5.

 

 

예수 수난과 죽음의 준비(요 12:1- )

 

1. 마리아의 기름부음(1-8절)

 

한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한다(막 14:3-9; 마 26:6-13; 눅 7:36-50; 요 12:1-8). 이 사화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용어까지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건이 일어난 도시를 베다니라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장소로 마가와 마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누가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요한은 나사로가 초청된 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마가와 마태는 유월절 이틀 전으로 설정하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한다. 또 마가와 마태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무명으로 남아있고, 누가는 창녀로 그리고 있는 반면, 요한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하여 이 여인의 이름과 가족상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옥합을 깨드리는 장면이 있다면 요한복음에는 이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향유가 예수의 머리에 부어지는데 반해 누가와 요한에게 있어서 향유가 예수의 발에 부어진다는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혹은 다리)에 향유를 붓고 난 후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사복음서 기사 모두에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여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마태는 이 사람들을 “제자들”로 누가는 “바리새인”으로, 요한은 예수를 판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람(들)은 이 여인이 한 일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의 몸에 붓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향유 부은 여인의 행동에 대한 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이 여인의 행위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관복음 모두는 이 사건을 이 여인이 예수께 선행을 행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이 요한에게 있어(마가와 마태도 마찬가지로)서 이 사건은 단순한 선행사건 이상이다. 이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예시한다는 면에서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왕으로서 등극하는 것을 예비하는 사건이다. 예수가 고난/죽음/부활을 통해서 영광 받으심은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주요 주제이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의 성전청결 사건에서 말하기 시작하여(2:22),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특징으로 예시하고(10: 11, 17-18), 나사로의 부활로 자신과 신자의 부활을 예고한다(11:25-27). 그런데 예수의 죽음 예고에 있어서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수난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여 죽음을 통한 예수의 왕으로서의 등극식을 예시해준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을 예고한다(12:33; 18:32). 요한이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유월절과 연관하여(유월절 엿새 전) 기술하고, 이 사건을 기준으로 다음의 날짜를 계산한 것(12:12)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의 향유 부음 사건은 그 이전까지의 예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요약이고, 구속사역을 완성할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시작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마리아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 부분(1-2절)은 이 사건에 대한 배경 설정에 대한 것이다. 사건의 시간과 장소(1절)에 대한 설정과 사건의 경위에 대한 설명(2절)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부분(3-8절)은 이 사건 자체와 사건 자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먼저 본문의 도유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는 의외로 간단하다(3절).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반응(4-6절)과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7-8절)이 더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1.1. 배경(1-2절)

 

마태와 마가가 도유 사화를 예수살렘 입성한 후의 사건으로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은 이 사화를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일어난 마지막 사건으로 설정한다. 또 마가와 마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이 사건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하여 이 사건과 시간을 분명히 언급하는데 이것은 요한이 이 사건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적 죽음과 연관시키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은 예수의 도유 사건을 예수의 왕적 죽음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베다니인데 그곳이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장소라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서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연관된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사화와는 달리 요한은 도유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예수의 다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가족들이 그 사건의 장소에 있었음을 말한다(2절). 예수는 식사 자리에 초대되고 마리아는 식사 시중을 들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는 예수와 자리를 함께하여 식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자리는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것에 대한 그 동네 사람들이 베푼 향연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사로와 관계된 그의 누이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 것이다.

 

1.2. 유다의 반응(3-6절)

 

예수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순수한 나드로 만들어진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에 있는 향유를 씻어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의 행위로 인해 그 집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했다고 묘사한다. 먼저, 향유를 다른 사람의 다리에 붓는다는 것은 당시의 풍습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것이다. 통상 손님에게는 스스로 발을 씻도록 물이 제공되었고(창 18:4 참조) 특별한 경우에 향유가 제공되었지만 손님 스스로가 발을 씻게 되어 있었다. 다만 노예가 이런 행동을 대신해 줄 수 있었다(삼상 25:41 참조). 삼백 일의 노동자 임금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행위로서 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주신데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였다. 그 다음 장에서(13:1-20) 예수가 이러한 행동을 제자들에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일을 하도록 격려했는데 이러한 행동을 마리아가 이미 보여준 것이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행동으로 인해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은 공관복음 병행 기사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이 사건의 의미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 사건은 단순히 마리아가 예수에게 대한 보은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선한 행동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될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마리아의 선행 사건에 대해서 가룟 유다는 공리주의적 평가를 한다. 삼백 일, 즉 일년 치의 노동자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지 않고 이 여인은 향유를 헛되이 낭비했다는 것이다(5절). 요한은 여기에서 일단 유다의 공리주의적 접근 방법 자체를-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유다의 인격의 순수성을 의심함으로써 이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6절).

 

1.3. 예수의 말씀(7-8절)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와 이에 대한 유다의 반응에 대한 평가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해 그녀가 이것을 간직하도록 그녀를 그냥 놓아 두어라(7절).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옆에 있지만, ‘나’는 항상 너희 옆에 있지 않다(8절).” 7절은 내용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 여인이 예수의 미래의 죽음의 날을 위해 향유를 남겨두었다가 그 때 쓰라는 것인가? 앞뒤 문맥에서 볼 때 그러한 해석은 본문에 부합되지 않는다. 먼저, 유다가 분개한 것은 일 년 치 노동자의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가 모두 다 허비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것이 차후에 사용되기 위해 남겨진 것이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는 선한 것이다.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지 말라. 그녀는 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동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동을 하기위해 이것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가 단순한 보은의 행위 이상의 의미, 즉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예수는 그 시점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과의 중요성을 대비시킨다. 요한은 특히 ‘가난한 자’와 ‘나를’ 문장의 앞에 위치시키고 ‘항상’이라는 단어를 양 문장에 다 포함시킴으로서 이러한 대비를 의도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를 섬기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예수가 대속적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준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된다는 것이다.<김동수 >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화폐단위  (0) 2020.06.14
게마트리아(Gematria)란?  (0) 2020.06.12
모세의 삶  (0) 2020.05.27
바벨론 포로기의 산물  (0) 2020.05.07
보나벤투라(Sanctus Bonaventura)  (0) 2020.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