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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영광(죽음)의 시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예수(요 11-12)

by 은총가득 2020. 4. 24.


    영광(죽음)의 시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예수(요 11-12)

김동수


요한복음 5-10장은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대 충돌을 기록한 것이다. 그 충돌의 배경에는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며 신적 존재라는 기독론적 자기 천명이 있다. 이러한 충돌은 11장에서도 계속되지만 여기에서는 이 충돌이 구체적인 하나의 목적을 가진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이 죽음을 슬픔이라기보다는 영광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죽음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 인류를 구할 대속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1.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11:1-44)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표적 가운데 최후의 표적이면서 또한 최고의 표적은 병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이다. 이러한 표적은 자연 법칙상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이 표적은 그의 신적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1.1. 나사로의 죽음(1-16절)

예수의 표적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기사로 시작한다. 병자 나사로는 초기 교회에서 그 전승이 널리 알려진 마리아와 마르다의 남자 형제로 소개된다(1절). 특히 그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자로서 그 전승이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였다(2절). 그런데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가 한 가족으로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였다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이다(3, 5절).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제자들 중 내부 핵심 인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막 9:3 참조), 요한복음에 예수의 십이 제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한 가족을 언급되어 있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을 예수께 알릴 때에도 그 이름을 언급하기보다 “선생님[예수]께서 사랑하는 자”(3절)로 말한 것으로 보아도 예수와 이 가족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마 14;14; 20:34) 혹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서(마 4:23; 9:35; 21:14) 병자를 고친다면, 본 사건에서 예수는 비록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지만 그 병을 곧바로 치료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고(2:24-25 참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움직이기 때문에(6:38-39 참조) 여기에서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4절).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를 치료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나사로가 사망한지 이틀-이것은 그가 사망했다는 것을 증명할 충분한 시간인 것 같다-이 지나서야 예수는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유대로 가기로 결심한다(7절).


   유대에서 이미 바리새인들로부터 신성모독 행위라는 죄목으로 돌로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10:31),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예수를 만류한다(8절). 하지만 예수는 낮과 밤을 선과 악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하여 말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낮에 속한, 즉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9-10절). 예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사로를 살릴 중요한 임무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잠에서 깨운다고 말하여 일종의 비유를 사용하는데(cf. 고전 15:6; 살전 4:14) 늘 그렇듯이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를 죽은 자를 살리는 분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자도 살리는 표적을 행하는 자임을 이들에게 계시하여 결국 믿게 하려한다(15절). 물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고 말한 도마처럼 제자들은 이 때도 계속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보혜사가 와서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당성을 깨닫게 해주기 이전의 제자들에게 전형적인 것이다(cf. 2:17, 22; 12:16).

1.2.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17-37절)

예수는 베다니에 가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각각 만난다. 물론 이 둘이 함께 예수를 맞으러 나올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은 집에서 문상객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가 각각과 개별적으로 만나 대화하는 기록을 이러한 물리적인 상황에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주로 개인 하나 하나와 상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것이다. 예수를 만난 마르다와 마르다는 각각 예수가 늦게 도착한 것을 몹시 아쉬워한다. 그의 병 고치는 능력을 알고 있던 이들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가 도착했다면 분명 그가 치료받았을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21, 32절). 


   예수를 먼저 맞이한 이는 마르다이다. 마르다는 예수가 자신의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고 말한다. 이 말만 보면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대화로 보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23절)는 예수의 말을 나사로가 바로 살아날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르다는 이것을 종말론적으로 내세에서 부활할 것으로만 이해했던 것이다(24절). 이러한 신앙은 당시의 유대교 일부와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말론적 믿음이다(cf. 단 12:2; 막 12:18-27; 살전 4:13-18). 


   물론 예수가 마르다에게 요구한 믿음은 종말론적 부활에 대한 믿음 그 이상이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25절). 예수는 자신의 본질을 “나는…이다”라는 신적 자기 본질을 나타내는 문구를 통해서 천명한다. 자신이 바로 부활과 영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이 큰일이지만 예수께는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의 육체적 생명이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의 주인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와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몸은 살았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며, 육체가 죽었을지라도 예수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믿느냐는 예수의 도전에 마르다는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베드로가 고백한 것과 같은 표준적인 신앙고백을 한다(27절). 마르다는 예수를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사도적 신앙고백을 여성이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마르다에 이어 예수는 마리아를 불러 그녀를 만난다. 이 만남에서는 예수와 마르다와의 만남에서처럼 부활에 대해서 신학적인 중요한 가르침도 없고, 마르다의 고백과 같은 사도적 신앙고백도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만남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나사로를 살리는 전에 예수는 마리아의 슬퍼하는 모습과 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것이다. 예수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것이 곧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가 이렇게 “통분히 여긴” 것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에서가 아니라 불신앙의 유대인 집단들에게 대한 분노라는 해석이 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엠브리마오마이’(evmbrima,omai)라는 동사가 분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cf. 마 9:30; 막 1:43). 하지만 요한복음 문맥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을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를 발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6절)로 보아도 이 동사는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한 것보다도 인간 예수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슬픔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어어진다. 이렇게 예수의 슬퍼하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감동한다(36절). 예수의 사랑의 행동에 대해서는 감동했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었는가 하고 중얼거린다(37절). 이들에게는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믿지 않으면서도 내 뱉은 말대로 예수는 곧 이어서 나사로를 살려낸다.

1.3.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38-44절)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면서 예수는 나사로의 무덤에 다다른다. 무덤은 돌로 막혀져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시체에서는 이미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무덤에 같이 따라온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한다. 이것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4절),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질 때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부활할 소망이 있다는 것(25-26절)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이 표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도 가운데 말한다(42절). 그리고 나서 예수는 나사로를 부르고 이어 죽었던 나사로는 시체를 감쌌던 천을 그대로 하고 무덤에서 나온다.

1.4. 예수의 표적에 대한 반응(45-52절)

요한복음에서 늘 그렇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한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난다(cf. 7:40-44).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표적을 통해 예수를 믿었으나, 또 다른 무리의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고자질하게 바빴다(46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만약 예수가 이대로 계속해서 표적을 행하게 허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거룩한 장소-개역 성경에서는 ‘땅’으로 번역됨-인 성전(cf. 요 4:20; cf. 행 6:14; 21:28)과 민족을 파멸시킬 것을 염려하게 된다(48절). 이 때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일어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는 요지의 말을 한다(50절). 즉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는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예수의 표적에 관한 일을 무고한 한 사람을 희생시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위와 같은 결정에 대해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u`pe.r tou/ e;qnouj) 죽으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u`pe.r tou/ e;qnouj)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u`pe.r tou/ e;qnouj)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방인만인가? 아니면 신자 모두를 가리키는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문구는 본래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밖에 살면서 메시아 시대에 모여들 백성들을 말한다 (cf. 사 11:12; 43:5, 6; 미 2:12; 렘 23:3; 겔 34:16; 37:21).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신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52절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와 이방인들을 위해서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 신자가 본래의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에 첨가된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장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신자들은 예수의 죽음의 사역을 통해 모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미래에 교회에 모이게 될 신자들을 가리킨다.

1.5.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준비(53-57절)

유대인들의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자 이제 예수는 광야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으로 피신한다(53-54절). 이 때가 유월절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에 대해서 여러 말이 오갔는데 그 이유는 이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그를 보면 곧 신고하라고 명령해 놓았기 때문이다(55-57절).

1.6. 이 표적의 교훈

1.6.1.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요한복음 ‘표적의 책’에 나오는 최후의 표적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표적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이나, 환자를 기적적으로 치료하는 표적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은 표적 중의 표적이다. 이것을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가 단순한 이적 행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특별한 존재임을 계시하려고 한 것이다. 부활절 이전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단순한 물리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의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11-16절). 마르다는 종말론적인 부활은 알고 믿었지만 산자의 부활을 믿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21-27절). 반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불신앙의 대표자들로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자신들에게 유 불리한가를 가려 정치적으로 타결하려 했다(47-53절). 여기서 예수만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으로 보았다(4절).

1.6.2. 부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을 예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지만 예수는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여 부활을 예수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천명한다. 이 땅에서 육체가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예수를 믿고 영생을 누리는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미래의 영생의 능력이 현재에 미쳐 현재로부터 영생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며, 죽어서도 이것은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목숨은 살았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삶인 것이다.

1.6.3.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이 기사에서 나사로와 그 누이들은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를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이 이렇게 어떤 특정 인물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과 내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본 기사에 나오는 나사로는 처음에 “예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이 개별적으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 ‘영광의 책’에서 나오는 애제자도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요한복음 저자는 모든 제자가 예수의 사랑받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사실 특별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없는 보편적 사랑은 허구이며, 편애적인 사랑은 보편적 사랑을 결여한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관계 속에서의 사랑인 ‘필리아’(친구로서의 사랑)와 보편적 사랑인 ‘아가페’가 동사로 쓰일 때 이것이 여기에서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특수한 사랑이 되고, 예수의 특별한 사랑은 인류애적인 보편적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다.
  
2. 예수 수난과 죽음의 준비(12:1-36)

2.1. 마리아의 기름부음(1-8절)

한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한다(막 14:3-9; 마 26:6-13; 눅 7:36-50; 요 12:1-8). 이 사화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용어까지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건이 일어난 도시를 베다니라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장소로 마가와 마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누가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요한은 나사로가 초청된 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마가와 마태는 유월절 이틀 전으로 설정하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한다. 또 마가와 마태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무명으로 남아있고, 누가는 창녀로 그리고 있는 반면, 요한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하여 이 여인의 이름과 가족상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옥합을 깨드리는 장면이 있다면 요한복음에는 이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향유가 예수의 머리에 부어지는데 반해 누가와 요한에게 있어서 향유가 예수의 발에 부어진다는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혹은 다리)에 향유를 붓고 난 후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사복음서 기사 모두에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여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마태는 이 사람들을 ‘제자들’로 누가는 ‘바리새인’으로, 요한은 예수를 판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람(들)은 이 여인이 한 일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의 몸에 붓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향유 부은 여인의 행동에 대한 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이 여인의 행위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관복음 모두는 이 사건을 이 여인이 예수께 선행을 행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이 요한에게 있어(마가와 마태도 마찬가지로)서 이 사건은 단순한 선행사건 이상이다. 이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예시한다는 면에서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왕으로서 등극하는 것을 예비하는 사건이다. 예수가 고난/죽음/부활을 통해서 영광 받으심은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주요 주제이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의 성전청결 사건에서 말하기 시작하여(2:22),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특징으로 예시하고(10: 11, 17-18), 나사로의 부활로 자신과 신자의 부활을 예고한다(11:25-27). 그런데 예수의 죽음 예고에 있어서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수난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여 죽음을 통한 예수의 왕으로서의 등극식을 예시해준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을 예고한다(12:33; 18:32). 요한이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유월절과 연관하여(유월절 엿새 전) 기술하고, 이 사건을 기준으로 다음의 날짜를 계산한 것(12:12)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의 향유 부음 사건은 그 이전까지의 예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요약이고, 구속사역을 완성할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시작으로서 자리 메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마리아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 부분(1-2절)은 이 사건에 대한 배경 설정에 대한 것이다. 사건의 시간과 장소(1절)에 대한 설정과 사건의 경위에 대한 설명(2절)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부분(3-8절)은 이 사건 자체와 사건 자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먼저 본문의 도유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는 의외로 간단하다(3절).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반응(4-6절)과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7-8절)이 더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2.1.1. 배경(1-2절)

마태와 마가가 도유 사화를 예수살렘 입성한 후의 사건으로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은 이 사화를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일어난 마지막 사건으로 설정한다. 또 마가와 마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이 사건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하여 이 사건과 시간을 분명히 언급하는데 이것은 요한이 이 사건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적 죽음과 연관시키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은 예수의 도유 사건을 예수의 왕적 죽음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베다니인데 그곳이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장소라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서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연관된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사화와는 달리 요한은 도유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예수의 다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가족들이 그 사건의 장소에 있었음을 말한다(2절). 예수는 식사 자리에 초대되고 마리아는 식사 시중을 들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는 예수와 자리를 함께하여 식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자리는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것에 대한 그 동네 사람들이 베푼 향연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사로와 관계된 그의 누이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 것이다.

2.1.2. 유다의 반응(3-6절)

예수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순수한 나드로 만들어진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에 있는 향유를 씻어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의 행위로 인해 그 집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했다고 묘사한다. 먼저, 향유를 다른 사람의 다리에 붓는다는 것은 당시의 풍습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것이다. 통상 손님에게는 스스로 발을 씻도록 물이 제공되었고(창 18:4 참조) 특별한 경우에 향유가 제공되었지만 손님 스스로가 발을 씻게 되어 있었다. 다만 노예가 이런 행동을 대신해 줄 수 있었다(삼상 25:41 참조). 삼백 일의 노동자 임금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행위로서 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주신데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였다. 그 다음 장에서(13:1-20) 예수가 이러한 행동을 제자들에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일을 하도록 격려했는데 이러한 행동을 마리아가 이미 보여준 것이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행동으로 인해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은 공관복음 병행 기사에는 없고 요한에게만 있는 것으로, 이 사건의 의미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 사건은 단순히 마리아가 예수에게 대한 보은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선한 행동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될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마리아의 선행 사건에 대해서 가룟 유다는 공리주의적 평가를 한다. 삼백 일, 즉 일년 치의 노동자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지 않고 이 여인은 향유를 헛되이 낭비했다는 것이다(5절). 요한은 여기에서 일단 유다의 공리주의적 접근 방법 자체를-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유다의 인격의 순수성을 의심함으로써 이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6절).

2.1.3. 예수의 말씀(7-8절)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와 이에 대한 유다의 반응에 대한 평가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해 그녀가 이것을 간직하도록 그녀를 그냥 놓아 두어라(7절).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옆에 있지만, ‘나’는 항상 너희 옆에 있지 않다(8절).” 7절은 내용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 여인이 예수의 미래의 죽음의 날을 위해 향유를 남겨두었다가 그 때 쓰라는 것인가? 앞뒤 문맥에서 볼 때 그러한 해석은 본문에 부합되지 않는다. 먼저, 유다가 분개한 것은 일 년 치 노동자의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가 모두 다 허비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것이 차후에 사용되기 위해 남겨진 것이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는 선한 것이다.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지 말라. 그녀는 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동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동을 하기위해 이것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가 단순한 보은의 행위 이상의 의미, 즉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예수는 그 시점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과의 중요성을 대비시킨다. 요한은 특히 ‘가난한 자’와 ‘나를’ 문장의 앞에 위치시키고 ‘항상’이라는 단어를 양 문장에 다 포함시킴으로서 이러한 대비를 의도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를 섬기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예수가 대속적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준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는 우선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다리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이를 씻어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보은의 표시였다. 본문에서 특히 마리아의 선행과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의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비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마리아의 선행을 칭찬하기 위해 이 본문이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요한에게 있어 이 사건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구약에서 왕의 등극식에서 도유하는 전통이 있지만 다리가 아니라 머리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삼상 10:1) 이 사건 자체가 왕으로서의 등극식은 아니었지만, 요한은 고난과 죽음을 통한 예수의 왕의 등극식(18-19장)에 앞서 이를 배치함으로써 이 사건을 등극식을 예비하는 사건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예수의 왕의 등극식을 예비하는 사건이 제사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과 또한 머리가 아니라 다리에 향유가 부어진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2.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9-19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인 군중들이 예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9절). 이것은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먼저 도착해 있던 군중들이 예수를 찾는 이전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진다(11:56-57절). 사실 예수의 예수살렘 입성 장면은 사복음서에 다 나온다(cf. 마 21:1-9; 막 11:1-10; 눅 19:28-38).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타고 입성할 나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이 장면이 빠져있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군중과 예수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두 군중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찾아가고, 또 다른 군중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맞이한다.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과 연결시킨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마리아 가족이 사는 베다니로서 나사로도 그곳에 있었다. 군중들은 예수만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해 이곳에 몰려온 것이다(19-20절). 이러한 상황, 즉 사람들이 유대교 회당을 떠나 예수를 믿는 상황에서 대제사장들은 이제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게 된다(11절). 여기에서 초점은 예수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사로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요한복음에서도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를 외친다(13절). 그리고 요한은 마태복음에서처럼 이것이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로 본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독특성은 이것을 제자들이 깨달은 시점이 예수가 영광 받은 후, 즉 성령이 오신 이후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16절). 성전에 관련된 예수의 언명에 대해서도 요한은 같은 기록을 한다(요 2:17, 22). 


   예루살렘에 있는 무리가 예수를 영접한 것을 요한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목도한 무리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8-19절). 즉 요한에 의하면 예수를 좇는 군중에는 두 무리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의 표적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언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는 의도를 이미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무리들이 예수를 환호하고 영접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온 세상이 저[예수]를 좇는도다”(19절)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비웃는다. 아니러니하게도 이들이 비웃은 그것은 비웃음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가 구원의 왕으로 등극하는 사건이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2.3. 헬라인들의 영접(20-36절)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헬라인들’({Ellhne,j)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헬라인들이 아니라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어왔다. 왜냐하면 이방인인 이들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인들’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7:35에 쓰인 것처럼 단순히 헬라인들을 의미하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은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행 10:2)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청을 넣은 것은 자연스럽다. 이어서 빌립은 자신의 단짝인 안드레에게 이것을 말하고 이 둘은 이 소식을 예수께 전한다(20-21절). 


   헬라인들이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예수는 그들을 만나서 무른 말을 하기 보다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죽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시간이 도래했다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예수를 따라와 모든 사람(32절)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제자도의 의미를 예수는 몇 가지 언명을 통해서 가르치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바울이나 공관복음에서도 그 전승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썩어지는 밀알의 비유는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사용했다(24절; 고전 15:36). 둘째, 자기 생명에 대한 미움과 사랑에 대한 비유는 공관복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25절; 막 8:35; 마 10:39; 눅 17:33). 셋째, 제자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26절)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과 상응하는 것이다(마 16:24; 막 8:34; 눅 9:23).  


   헬라인들의 면담 요청으로 자신의 죽음의 때를 감지한 예수는 이어서 고민하게 되는데(27절) 이 장면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네장면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마 26:36-46; 막 14:34-42; 눅 22:39-46). 하지만 요한복음의 예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바로 죽기 위해서이며 자신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임을 곧바로 고백한다(27-28절). 이러한 기도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외적으로 하늘에서 예수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28절).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자 예수는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가르친다(30절). 결국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심판이 가해지고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이 쫓겨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들림(중의적 용법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다 포함함)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 때 예수는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말을 하게 된 계기가 헬라인들이 예수께 온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사람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진리를 설파하는 것에 대해서 무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과 예수의 가르침이 충돌함을 발견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믿음이 외경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약 성경이나 당시에 일반적으로 믿던 메시아 관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무리의 도전에 대해서 예수는 즉답을 피하고 대신 다시 한 번 빛과 어두움을 메타포로 해서 어떻게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친다(35-36절). 예수는 자신을 빛으로 비유하며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한다.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예수는 사람들에게 떠나가서 숨는다(36절).

3. ‘표적의 책’의 결론(12:37-50)

3.1. 사람들의 불신(37-43절)

이 부분은 12장의 결론 부분이라기보다 소위 1장에서 12장까지의 ‘표적의 책’의 결론 부분이다. 예수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표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표적을 행했지만 유대인 당국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유대인들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37절). 이러한 사람들의 불신을 요한복음 저자는 이사야서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38-40절). 또 저자는 이사야가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이사야가 예수의 영광을 보고 그를 언급한 것이라 한다(41절). 여기서 이사야가 어떻게 예수의 영광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요한복음에서 아브라함도 미래의 예수에 대한 일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언급한 것을 볼 때(8:16) 여기서도 이사야가 미래의 예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저자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 예수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42절). 유대인들 당국자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그가 예수를 믿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를 변호하고, 또 예수의 장례를 위해서 거금을 낸 것으로 보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신앙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7:50-51; 19:39). 하지만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놓고 고백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요한복음 저자는 이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출회를 당할 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을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평가한다(43절).

3.2. 예수의 요약적 메시지(44-50절)

예수는 이제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먼저, 예수는 요한복음의 기본 전제요 핵심 기독론인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말한다(44-45절; cf. 5:19, 30; 10:30; 14:8-11; 17:4, 7-8).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는 빛의 메타포로 자신을 계시한다(46절). 이러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다(cf. 1:5; 3:19-21; 8:12; (;5; 11:9-10). 그 다음으로, 예수는 심판의 주제에 대해서 말한다(47-48절). 자신이 온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예수의 말, 즉 하나님 말씀의 원리에 의해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한다(49-50절).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사상과 예수가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하는 존재라는 주제가 공존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요소를 희생시킨다거나, 역으로 예수의 순종적 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는 것도 요한복음 저자가 제시하는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