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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요한복음 주석 1-2장

by 은총가득 2020. 4. 19.


성 경: [요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

 

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성 경: [요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성 경: [요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만물이 - 원문상 '만물'(*,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

 

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성 경: [요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 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성 경: [요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 5:10-47;6:25-65;7:14-36;8:12-59;9:39-10:18,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

 

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성 경: [요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성 경: [요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성 경: [요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성 경: [요1: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에그노)는 '알다'(*,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성 경: [요1: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성 경: [요1: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성 경: [요1: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

 

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성 경: [요1: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플레로마'(*)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성 경: [요1: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요1: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 경: [요1: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성 경: [요1: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요1: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네가 엘리야냐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 (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요1: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성 경: [요1: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주의 길을...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있는 용어 '카도스'(*,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성 경: [요1: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성 경: [요1: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성 경: [요1: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 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성 경: [요1:2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

 

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성 경: [요1:2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성 경: [요1:2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보라 - 헬라어 '이데'(*)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 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 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성 경: [요1:3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 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 가리키는 '안드로포스'(*)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 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됨을 암시한다.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요1:3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 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성 경: [요1:3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성 경: [요1:3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 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 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성 경: [요1:3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성 경: [요1:3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사들]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성 경: [요1:3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성 경: [요1:3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성 경: [요1:3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는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랍비여 - '랍비'(*)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성 경: [요1:3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 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 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성 경: [요1:4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요1:4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 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 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성 경: [요1:4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4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성 경: [요1:4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벳새다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 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성 경: [요1:4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성 경: [요1:4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성 경: [요1:4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성 경: [요1:4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요1:4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성 경: [요1:5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성 경: [요1:5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 5:24, 25;6:47).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요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 "사흘 되던 날" 이것은, 1:43에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지 기록한 것은, 그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레스틴에는 이 밖에 또 다른 "가나" 란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란 말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은 기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그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일 것을 표상(表象)한다.

 

성 경: [요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를 가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인 동시에 그의 긍휼이다. 성결은 격리(隔離)가 아니다(Sanctity is not singularity).

 

성 경: [요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당시에 "포도주"는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과즙으로 된 음료가 필요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마리아로서 그에게서 이적을 기대할 만 하였다.

 

성 경: [요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니다(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야의 공적 역사(公的役事)에 있어서는, 하나님

 

의 뜻만이 주장하고 혈통적 모친 된 권세가 간섭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난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涯)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의 하실 바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것이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표현은 구약에도 많은데(삿 11:12; 삼하 16:10; 왕상 17:18; 왕하 3:13), 반드시 냉정한 어투는 아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도울 중보자(中保者)가 없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내 때"란 말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7:30, 8:20, 13:1, 17:1).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그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에 대하여 고데이 (Godet)는 해석하기를, 그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는 예루살렘에서야 될 일이고 가나에서 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가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메시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가? 11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 이른바, "내 때"는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중보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절대 완전하신 순종이다.

 

성 경: [요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이것을 보면, 그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그 모친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다.

 

성 경: [요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유대인의 가정에는, 연회할 때에 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돌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것은, 주로 식사 전후에 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 풍속은 성경이 제정한 것이므로, 진정한 종교적 의의와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 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기독교를 상징함)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두 세 통 드는 항아리"의 용량(用量)은, 약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 큰 항아리가 여섯이나 놓여 있었다.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그의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지적하려는 까닭이다.

 

성 경: [요2:7,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이제는 떠서"라는 말을, 샘물에서 "물을 길어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Westcott),확실치 않다. "연회장"은, 그 때 풍속에 연회의 손님들 중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바 없고, 다만 고요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성 경: [요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4절), 침묵하며 순종한 후 하인들더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5절).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다. 무조건 순종은 하나님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의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Wahrer Glaube schreibt Christus nicht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2) 변화의 원리(6-9).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다. 1733년부터 선교사들이 5년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 인상도 받지 못하던 에스키모족 중에서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겼다. 루터(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Evangelien Auslegung, 4,P.98).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성 경: [요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이 세상보다 선미(善美)한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좋은 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는 취할 수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술 인 것인 만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수 있다.(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않은,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설혹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취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그것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의 덕을 가르친다(갈 5:23). 금주(禁酒)를 규칙으로 가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이적이 문제될 것 없다. 한국인의 특수한 사정(술 취하기 잘 하는 한국인)으로 보아, 금주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 "절제"를 위한 것이다.

 

성 경: [요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리는 신령한 증표라는 뜻이다.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권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요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공중 성역(公衆聖役)에 헌신하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지체하시지 않게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여준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이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Das Evangelium fur die Priester)이라고 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74). 여기 "유월절"이란 말에 "유대인의"란 설명을 붙인 것은, 사도 요한의 상대한 독자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구원을 기념하면서 지킨 것이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다가 해방될 임시에,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여호와의 형벌이 내렸다. 그 때에 이스라엘 집만을 그 재앙에 들지 않게 하려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다(출 12:12-20, 13:2, 12).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이다(신 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성 경: [요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 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다(사 56:7; 렘 7:11).

 

성 경: [요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이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 경: [요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공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 경: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기억하더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인데,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이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요2:18,19]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이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다(마 26:61).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다(20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이다.

 

성 경: [요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요세보 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영적(靈的)으로 어두운 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해한다.

 

성 경: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다. 신약에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시 16:10 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이다.

 

성 경: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진다.

 

성 경: [요2:24,25]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

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

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된다(요일 4:1).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이다. 그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렘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