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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거듭 태어나는 신앙 (요3-4장)

by 은총가득 2020. 3. 24.

 

    거듭 태어나는 신앙 (3-4)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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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9-2:22에 기록된 내용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언과 처음으로 만난 제자들의 증언들을 살펴보았고 아울러 예수님이 베푸신 가나의 첫 기적과 예루살렘의 성전청결 작업을 통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권위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메시아 이심을 고백하였고 특별히 세례요한은 새 시대의 새 구원의 역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죽음과 희생으로 완성된다는 놀라운 예언을 함으로써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임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증언들은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일치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태초로부터 계신 말씀이 성육신하여 행하시는 말씀과 사역은 듣고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충분한 실증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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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3-4장도 같은 테두리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더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이 전개되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그 내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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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니고데모에게 주시는 거듭 태어남(The New Birth)의 말씀(2:23-25; 3:1-21)

II.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는 생수에 관한 말씀(4:1-42)

III. 왕의 신하에게 주시는 믿음에 관한 말씀(4: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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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니고데모에게 주시는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의 말씀(2:23-25; 3:1-21)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기 직전에 기록된 내용(2:23-25)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사람과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23-25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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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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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the Passover) 다음에는 계속하여 7일간의 무교절 의식이 따르므로 8일간의 유월절 기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23)고 하였다. 이 말은 요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기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 .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기록과는 달리 사도요한은 많은 사람이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한 점이 다르다. 사람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의 몸을 그들(많은 사람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24)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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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연상케 한다. “시몬은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8:13)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8:18-19)라도 말할 정도로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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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랐고 감동을 받았으나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4),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25). “안다”(Gk. ginosko)는 원어는 체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체험적 신앙이 아닌 것을 알고 계셨다. 저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믿음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난 후 직석에서 거듭나야 한다는 직언을 하신 것도 바로 예수님의 아심(=전능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5). 우리는 나를 아시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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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니고데모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첫째, 유대인 중에서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인의 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라고 불려 질 정도로 옳고 그름을 가려 바른 생활을 하는 엄격한 종교지도자였다.

둘째, 그는 또 산헤드린 의회에 속한 유대인의 지도자”(ruler of the Jews)로써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산헤드린 회원은 70명이었고 유대인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셋째,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랍비)”(10)이었다. 성경과 신학에 통달한 랍비로써 해박한 성경지식을 겸비하고 있었다. 정치, 종교, 사회의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그가 시골 나사렛의 청년이며 젊은 랍비라고 볼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밤에 찾아 온 것이다.

넷째, 그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청결의 담대한 행동과 권위 있는 말씀과 행하는 기적을 보았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그 무엇을 예수님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그만큼 그의 내면세계에는 공허한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있고 자기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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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에 관한 대화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 대화를 통하여 세 가지 주요한 사항을 열거하고 정리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 어떻게 하면 새로 태어남(거듭남)을 받을 수 있는가?

. 왜 사람들은 새로 태어남(거듭남)을 배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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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1. 니고데모와 같은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연코 그러한 견해를 물리치셨고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한다”(You must be born again.)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거듭”(Gk. anothen)이란 말은 새로”(anew),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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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니고데모는 거듭이라는 말을 새로”(anew)라는 뜻으로 받아드리면서 육적 거듭남을 언급하였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이미 성장과 노화를 이룬 육체가 후퇴하여 작아진 후에 모친의 몸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는 일은 자연법칙과 논리에 위배된다는 항변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anew)가 아니라 위로부터”(from above) 태어난다는 영적 거듭남에 대하여 차원이 다른 가르침을 베풀어주셨다. “직접 하나님의 영(God's Spirit)으로 잉태(conceive)되는 과정을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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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Unless one i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he can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5). 육적 탄생과 영적 탄생은 엄연히 구별된다는 말씀이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6). “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1:18). 예수님도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15:3)고 말씀하셨다.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영적 신생이 불가능하다. 본래 ”(the Spirit)이란 바람, 숨결을 의미하므로 예수님은 바람의 비유로 성령님의 사역을 설명하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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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니고데모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거듭남이란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이(an invisible birth) 태어나는 현상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바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바람의 출처와 향방은 추적할 수 없으나 그 결과는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물과 성령님으로 태어남도 그러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곧 예수님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위로부터 태어남)말씀성령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예수님)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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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나 니고데모는 오리무중이다. 그 후에 주고받은 대화를 본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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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니고데모와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다. 니고데모(랍비)는 예수님(랍비)의 가르침에 매우 놀랐다. 그런데 예수님도 니고데모에 대하여 놀라움이 있었다. 구약의 예언을 잘 알만한 니고데모가 구약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고 몰지각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생(랍비)가 구약의 예언을 모르고 있고 무감각하다니, 그러면 우리(예수님과 구약의 선지자)가 아는 것을 보고 증언해 보자고 하셨다. 구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유명한 예언은 다음과 같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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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레미야 31:31-34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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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에스겔 36:25-27, 37영적 거듭 남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다.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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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새 언약의 예언들은 메시아가 와서 성취하여 주실 것을 가리키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며 에스겔의 내용만으로도 영적 거듭남의 비밀을 충분히 알 수 있다.

. 25절에서: 모든 죄악을 정결하게 씻어주심.

. 26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죽고 무감각한 심령을 새롭게 하고 부드럽게 함.

. 27, 37절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영을 불어넣어 간절한 소원과 기도를 갖게 함.

 

* 둘째, 어떻게 하면 새로 태어남(거듭남)을 받을 수 있는가?

1. 우리들이 직감할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서는 새로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추구하는 올바른 삶을 위한 행위나 도덕적 완결함으로는 되지 않는다.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는 지식”(2)으로도 되지 않는다. 귀신에 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새로 태어남과 직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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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은 대자연의 법칙(바람, )으로 설명하셨고 또 구약의 예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하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의 주인이신 메시아를 믿지 않는다면 더 직접적인 구약의 이야기를 생각하여 보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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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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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구원 받은 민수기의 기록을 언급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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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은 민수기의 기록(21:4-9)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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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뱀(독사뱀)은 반역하여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도 있고 죽어가는 자도 있고 죽음으로 모두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의 죄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신비하였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본 자마다 살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셨다. 모세는 놋뱀을 단 장대를 들고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우뚝 섰던 것이다. 단순히 놋뱀을 본 자는 누구든지 치료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죽음의 뱀을 들고 섰든 것과 같이 예수님(=인자)도 세상 죄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기만 하면 살게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음을 설명하여 주셨다.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하나님에게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될 수 없다. 먼저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뿐이다. 죄와 죽음은 예수님이 맡으시고 우리는 치료, 구원, 영생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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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경말씀 중에서 중요한 요절인 요한복음 316절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우리 각자는 이 구절의 세상이라는 단어를 라는 대명사로 대치하여 읽으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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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람들은 새로 태어남(거듭남)을 배척하는가?

1. 요한복음 3:19-21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배척과 영접을 언급하고 있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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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호의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 이유는 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께 접근하기를 싫어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오심을 싫어하고 외면한다. 20절에서 ”(Gk. phaula)이란 나쁘고(bad) 무가치한(worthless) “도덕적 타락”(moral corruption)을 의미한다. 19절의 악하다”(Gk. ponera)와 같은 뜻으로 어두움과 상반된다는 개념이다. “은 창조적인 광명이기에 어두움이 접근할 수 없으며 반대로 빛이 어두움에 접근하는 것이 원칙이다. “어두움”(darkness; Gk. skotia)이란 사람들이나 백성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환경 또는 근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세상또는 귀신같은 데서 오는 영향력임을 가리키고 있다. 실상은 사람 자신보다 환경과 악의 세력이 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의 강한 권세능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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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 사도요한은 언제나 분명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예수님의 은총과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음은 매우 중요하다. /어두움, /, /아래, 하늘/, 내려옴/올라감, 영생/저주 등, 이러한 이중구조에서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변화에 대하여 속수무책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서는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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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는 생수에 관한 말씀(4:1-42)

1. 우리는 먼저 3장의 니고데모와 여기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를 대조하면서 비교해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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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유대인이고 여기의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족속이다. 722 BC에 앗수리아가 북방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그 곳 주민을 잡아가기도 하고 또 함께 그 곳에 살기도 하면서 혼혈족속이 형성되었고 우상도 따라 들어와 신앙생활도 혼잡하게 되었다. 한편 남쪽의 유다 왕국은 586BC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539BC에 귀향하여 순수한 유대민족을 유지하였다. 이때 느헤미야가 성전재건을 할 때에 사마리아인들을 방해를 하면서 수세기에 걸친 적대감이 그대로 내려왔다. 서로의 지역들을 통과하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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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남자이며 수가에 나타난 사람은 여인이다. 여기에는 문화와 풍습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방인과 노예와 여인은 개와 같이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무가치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딸들에게 율법과 토라를 집에서 가르치는 것은 매우 난잡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토라의 말씀을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율법과 토라를 여자에게는 전하여주지 말라고도 하였다. 공공장소에서 랍비는 비록 자기 어머니나 누님에게라도 무슨 말이라도 건네는 것은 삼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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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바리새인이고 그 여인은 비도덕적 경력의 소유자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현재 남자와 살기는 해도 남편은 아니었고 과거에 다섯 남편과 살았던 경력이 있었다(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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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유명한 인물이며 그 여인은 버려진 폐물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대낮에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에 물을 기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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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성경을 잘 배우고 아는 자요 그 여인은 성경을 거의 모르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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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진지하게 신앙토론을 하였고 그 여인은 신앙세계에 대하여서는 아예 냉담하고 무관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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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는 위엄을 갖춘 신사였고 그 여인은 경박하고 무례한 천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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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렇게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구별 없이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를 볼 때에는 거듭남이 필요한 사람이며, 사람의 눈으로 아무리 낮고 천한 취급을 받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으로서는 그녀에게 생수”(the living water)를 반드시 공급하여 살려 내여야 하는 귀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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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4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고 하시면서 반드시(must)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계신다. 남부의 유대 지방에서 북부에 위치한 갈릴리 지역을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유대와 갈릴리의 중간 지역)를 직접 통과하지 않고 동편에 위치한 요단강을 건넌 후에 오르내렸다. 순수 유대인은 잡종이 되어버린 사마리아인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으므로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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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의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는 예수님의 신앙적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매일 새벽에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면서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지 않도록 세우시고 진행하셨다. 예수님이 드리신 새벽기도의 기록은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에서 볼 수 있다. 구원을 위한 사역은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수행되어야만 하였다.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백성에게는 더욱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날 계획을 세우시고 진행을 강행하셨다.

 

. 예수님은 느닷없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강조하여 주셨다. 니고데모의 영적 공허함을 보시고 그 빈자리를 채워주시려는 영적 치료와 구원의 일환이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러한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계속하시다가 느닷없이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고 말씀하셨다. 왜 그리하셨을까? 그 여인을 보고 그 여인의 요구가 무엇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다섯 남자를 전전하면서 그 여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공허함과 외로움”(deep-seated loneliness)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신 것이다. “텅 비어있는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 그 여인의 가진 미모와 아름다움은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채워져야만 하였다. 그것은 육적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만족감이었다. 예수님이 주실 선물은 영원한 생수였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13-14). “영원한 생수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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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다운 예배의 방법을 가르쳐주셨다(4:23-24).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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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禮拜)는 한문에서 예를 갖추고 엎드리고 섬긴다는 뜻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외형적이고 의식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실제로 예배”(Gk. proskuneo)의 원어는 입 맞추다,” “포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과 포옹하고 입 맞추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와의 틈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에서 주고받음이 넘치는 관계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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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는 반드시 ”(in spirit)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신다. 여기서 가르치는 이란 성령님”(the Holy Spirit)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어떤 경우에는 몸의 예배를 드릴 때가 있다. 예배의 장소, 여건, 시간 등을 따지는 것 등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의 장소에 관심을 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떤 외부적 조건이나 환경은 참다운 예배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또 어떤 때는 혼(정신)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있다. 분위기, 기분 좋음,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 예배의 경우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한다”(4:22)고 지적하셨다. 새로 거듭난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고 접촉할 때 하나님의 사랑, 지혜, 은혜, 거룩함, 능력이 나타나는 참다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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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는 반드시 진리”(in truth)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거짓과 꾸밈이 없는 참됨”(진리)으로 드려야 한다. “진리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에 참다운 예배에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시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 당시 사마리아에서는 모세오경으로만 예배드렸고 예언서나 시가서로 드리는 예배는 없었다.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므로 모든 예배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 때에는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을 추리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I who speak to you am He)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다(26). 사마리아 여인은 갈급하고 외로운 심령에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여 주신 예수님(=메시아)을 믿고 영접하였고 이 사실을 곧 동네로 뛰어 들어가 증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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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왕의 신하에게 주시는 믿음에 관한 말씀(4:45-54)

1. 4:45의 말씀,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는 기록과 2:23의 말씀,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는 기록에서 사도요한은 사람들의 믿음이 기적을 보고 믿은 바르지 않은 믿음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는 기록의 대상이 되셨다. 또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48)고 하시며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를 의지하는 믿음에 대하여 꾸중을 하셨다. 12:37을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였고, 20:29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표적 중심의 신앙은 분명히 결함이 있다(defective)는 사실을 가르쳐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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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표적(signs)과 기사(wonders)”는 구약시대에 일어난 기적”(miracles)을 말할 때 사용한 언어들이었다. 사람들이 이러한 기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고발의 뜻이 심겨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믿고 표적을 체험하였으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대중을 향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 (signs and wonders)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고 말씀하신 뜻을 깨닫고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a sign and a wonder )가 되리라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

9:10. 이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for signs and for wonders)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20: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a sign and wonder)가 되었느니라

32:20. 주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를 행하셨고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나이다

32:21. 주께서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와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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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20miles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자기의 권력과 재력으로는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낼 수 없는 인간의 제한성을 통감하였기 때문이다. 하늘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자라는 사실을 또한 믿었다. 예수님을 초청하면서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7, 50). 놀랍게도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초청을 거절하셨다. 왜 거절 하셨을까? 왜 가지 않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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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주심으로써 왕의 신하의 초청을 대신하셨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 주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있었다. 첫째, 명령이다. “가라.” 둘째, 약속이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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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경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양식(pattern)은 언제나 이와 같이 동일하다. 첫째,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신다.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너의 원하는 것만을 강요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라는 명령이 선행한다. 둘째, “약속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네가 믿고 행하는 그 일속에 이미 내가 축복을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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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순종하고 따르는 삶을 통하여 믿음의 성장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훈련하셨고 지금도 그 방법에는 변함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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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라는 기록은 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말씀을 믿었으니 믿은 대로 행동에 옮겼다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말씀으로 원격치료(遠隔治療) 하여주신 표적(sign)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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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왕의 신하는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고 기록한대로 온 가족과 함께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병을 고친 기적보다도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인격체를 믿었다는 결론적 사실이다. 참다운 믿음은 관계정립에 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 언제나 우리는 기적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나타난 기적의 현상보다 더 크신 기적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큰 기적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성도는 매일 기적 가운데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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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리하여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sign)이니라”(53)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결론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과 일치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