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로마전쟁(第1次 - 戰爭, 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獨立戰爭, 66년 ~ 73년)은 때때로 위대한 반란(偉大-反亂, 히브리어: The Great Revolt)으로 불리는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의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 중에 첫 번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66년에 발발했는데.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이 전쟁은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대인과 로마인의 1차 전쟁은 (First Jewish Revolt)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오래 끈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시리아를 다스리던 세스티우스 갤루스 (Cestius Gallus) 총독이 시리아에서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케자리아와 자파(Jaffa, 지금의 텔 아비브)까지 진출하여 8천명 이상의 반군을 죽였으나, 시몬 바 교라(Simon bar Giora)와 교전하여 로마 군병 500명을 잃었다. 베스 호론(Beth Horon) 전투에서 매복을 당하여, 다시 6천 명이나 잃고 도망친 뒤에, 그도 목숨을 잃었다.
베스파시안의 동전 세스테시우스, “유대를 정복했다” (Judea Capta)라고 써 있다.
Ancient Jewish Coins:Coins from the First Revolt (66 - 70 CE)고대 유대 동전 : 첫 번째 반란 동전 (66-70 CE)
First Revolt Shekel prototype, Year 1 첫 번째 반란 세켈 , 1 년
First Revolt Shekel, Year 2년
First Revolt Half Shekel, Year 3년
전쟁 제 4년 동전: 서기 69-70 뒷면: 초막절에 필요한 대추야자 가지(룰라브)와 양쪽 두 개의 레몬(에트로그) 주위로 "제 4년:"
First Revolt Half Shekel, Year 4
First Revolt Shekel, Year 5
서기 66년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 전쟁 동안 찍어낸 동전들에는 전쟁의 연대가 제 1-5년까지 새겨져 있었다. 바르 코크바 은전은 기존의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은전을 불에 달군 다음 성전 전면과 히브리어 글귀들을 그 위에 다시 찍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유대전쟁 제 4년 동전: 서기 69-70 앞면: 진주로 장식된 성배 주위로 "시온의 해방을 위하여"라는 글귀.
이 패전은 로마에 큰 충격이었다. 네로 황제는 4개 군단(legion)이나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주어 유대인의 반란을 정벌하라고 임명하였다. 알렌산드리아에서 아들 티투스가 합세하여 그의 군대는 6만 명으로 늘어났다. 67년 말이 되자 베스파시안은 갈릴리 지방을 장악하였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Josephus)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갈릴리의 지휘관이었으나 요드팟(Yodfat, Jotapata)이 포위되었을 때 모두 자살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 그는 나중에 티투스의 고문이 되었으나 유대인들에게는 대체로 배반자의 취급을 받았다.
서기 68년에는 상원이 네로를 국민의 적으로 몰았고, 네로는 도망하다가 할 수 없이 자살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중도에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로마로 향하였고, 대신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할 책임을 맡겼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당시에 성의 인구를 110만 정도로 보았고, 로마의 상원이자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당시에 성 안의 인구가 60만이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티투스의 고문이 된 요세푸스가 유대인에게 항복하라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유대의 반군은 배반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쉽게 항복할 기색이 없었고, 그렇다고 직접 성을 공격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티투스는 작전을 바꾸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70년 4월 14일, 유월절) 5월 말이 되어 성 바깥의 둘째 벽을 돌파한 뒤에, 티투스는 포위를 풀고 성 바깥에서 로마 군대가 얼마나 많은가 보여 주려고 이들에게 봉급을 주는 시위를 나흘 동안 벌였으나, 여전히 반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6월 1일에 로마의 군대는 참호를 파고 성벽만큼 높이 흙으로 둑을 쌓기 시작했다. 사흘 안에 예루살렘 성 전체가 8킬로미터나 되는 나무로 방책(防柵)으로 둘러 싸였고, 성에서 16킬로미터 안에 있는 나무는 다 베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반군을 설득하느라고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자기 어머니와 아내가 성안에 있다, 우수한 로마 군대에 저항하는 것은 쓸모 없다고 설득했으나 반군은 끄덕하지 않았다.
안토니아 요새가 성전을 내려다 보므로 티투스는 여기에 치중하여 그 앞에만 둑을 쌓기 시작했다. 성 안에는 방어하는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이나 먹고 살 수 있는 마른 식량을 쌓아 놓았는데, 열심당(Zealots)의 시카리(sicarii) 일파가 휴전을 협상하려는 일파의 주장을 묵살하려고 이렇게 쌓아놓은 식량을 많이 태웠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거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금전을 삼키고 성을 달아나는 사람들이 늘어 나서 어떤 날에는 2천 명이나 잡아서 배를 갈랐다고 한다. 라자루스라는 도망병 하나가 5월 1일부터 7월 20일 사이에 성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11만 5천이나 된다고 티투스에게 보고하였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이 110 만명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대부분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성안에 있던 요세푸스의 부모와 아내도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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