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에 나타난 가나안 땅의 성서적 의미
서 론
A.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서 현대인들에게 있어 '땅'이란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터 이외에도 근대 산업 사회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물적 생산과 분배의 원천이었으며 사회 지배 계층 구조도 토지 소유와 그 생산물의 분배 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변천되어 왔다. 근대 산업 사회가 시작된 이후에도 공업 용지와 상업 용지의 수요가 계속 증가 되었고, 이에 따른 도시화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생활공간 확보라는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땅의 소유 여부는 과거에는 사회적 신분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어,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며 가난한 사람을 더욱 궁핍하게 만드는 모순의 발생 요인이었고 오늘날에 와서도 땅은 자본주의적 사고의 영향으로 재산 증식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땅'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조명하여 알려주는 신학적인 노력이 거의 전무한 현실 상황에서 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땅에 대한 이해는 "땅의 것은 세속적이고 하늘의 것은 신령하며 우리는 훗날 영적인 가나안 땅 즉 천국에 간다" 라는 정도이고 '부의 가치'로서 세속적이지만 땅을 소유하기 위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회 경제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땅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질문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성서가 말하고 있는 올바른 토지관을 갖으므로 현재 발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성서가 말하는 '땅'의 의미와 그 가치를 밝히고자 한다.
B.연구 방법
사실상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갖고 있는 구약성서에 있어 단 하나의 중심 주제를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우기 종래에 논의되어 왔던 다양한 주제들 속에서 특별히 '땅'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땅'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사용된 명사중 네 번째로 많이 나오는 -2504 회- 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주해는 거의 드문 편이다).
'땅'이라는 모티브가 구약 성서 및 신약 성서 전체를 꿰뚤 수 있는 신학적 주제가 될 수 있는지에 많은 의심의 소리가 있기는 하나 '땅'에 대한 주제는 분명히 성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다.
본고는 구약 성서중 오경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인 행로를 따라 나타나는 땅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성서에 나타나는 땅의 의미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더욱 다양해지며 광범위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오경에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서 부터, 허락하신 가나안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이 직접 '땅'을 약속하시고 그 의미를 알려 주시는 것이 잘 드러나 있으며, 가나안 땅이야말로 약속의 땅으로서 가장 '땅의 본질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고 연구 절차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언약과 축복이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성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순서를 따랐다.
어원 및 문화적 배경
A. '땅'의 어원적 의미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구약에서 사용되는 "땅"에 대한 히브리 용어는 '아다마'(land,ground)와 '에레츠'(land) 두 가지가 있다. 경작 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는 붉다는 뜻의 '아돔'에서 온 말로 '아다마'의 땅은 인간 생계의 자원을 생산해 내는 땅이다. 땅은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는 '아담'이 있는데 처음 사람의 이름이자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은 '아다마'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흙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땅에 대한 또 하나의 용어인 '에레츠'는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우주론적인 견지에서 '에레츠'는 하늘의 상대어인 땅을 의미한다. 또 부분적으로 지형, 토양, 혹은 영토를 의미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땅과 바다를 모두 포함하는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좀 더 세분하자면 'earth'로서 에레츠는 역사적인 위치나 사회적 구별이 없는, 삶에서의 갈등이 없는 장소를 말한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정치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 대한 순수 공간을 의미하는데 바로 에덴 동산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개념을 갖는 'land'로서의 에레츠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상들 즉 정치적 모호성과 경제적 권력등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 개인의 소유자가 없는 'earth'와 비교하여 'land'는 언제나 소유되고 점령되며 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 두 단어는 사회적 실체와 그 가능성에 있어 큰 차이를 갖는다.
성서 신학적으로 본다면 땅에 대한 중심 개념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의 개념이 더 강하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안에서 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른 하나님의 계시의 현장이 되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신앙적 삶의 터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B.고대 근동 문화에서의 땅 이해
고대 근동지방의 신과 땅 소유에 관한 인식을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민족들은 자신들과 땅 그리고 신의 관계를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신관을 종교적 물질주의 (religious materialism)라고 할때 이스라엘의 신관은 종교적 인격주의 (religious personalism)로 정의된다.
바벨론은 그 도시의 기원을 신화에 의존하여 설명한다. 바밸론 창조 신화에 의하면 말둑신이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감사하여 낮은 계층의 신들이 성전과 성전 탑을 건설하였고 이로 인하여 거룩한 도시로서 숭배를 받게 된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뿌리박기보다는 시적이고 환상적으로 태초에 관한 이야기를 발달시켜 나간다.
또한 고대 근동 지방의 신관은 다신론 숭배로 천체 숭배사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관 역시 자연에 근간을 둔,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는 자연 신을 숭배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전부터 그 땅에는 이미 풍요의 권세와 하늘에 축복에 관한 많은 설화들이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이 그 숭배자들이 거하는 지역의 모든 땅과 포도원과 과수원 등 토지의 주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이 풍요의 권세를 신들의 권세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가릿 문서가 증명하듯이 바알신은 그 신들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혼(成婚) 의식 즉 신극(神劇)에서 연출되는 죽고 부활하는 번영의 의식이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 이 의식을 행함으로 농토의 축복을 확약받으며 아울러 인간의 풍요와 자녀 축복, 건강의 보장도 여기에 의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과는 달리 땅에 대한 신화같은 이야기는 없었다. 땅과 시공을 초월한 신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신화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땅을 정복하게 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실로 밝혀지는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이스라엘 민족과 땅과 의 연관은 신화가 아닌 역사의 영역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땅 자체와 연관을 맺기보다는 그들의 조상때 부터 계속 인도해 주시고, 그들 족장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히 임재해 주셨던 하나님으로 받아 들여 졌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인격적으로 맺어진 관계인 것이다.
C. 현대적 관점에서 본 땅 이해
부르거만은 그의 저서 "Land"에서 현대 문화적 배경에서의 "땅"은 단순한 물질적인 흙이 아니라 항상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사회적인 의미의 흙임을 확언한다.
그는 종래의 성서 신학의 범주들이 실존주의적 양식(신앙이라는 context에서 선택되는 개인의 결단 가능성에 대한 연구) 아니면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들'을 추구하는 양식(이스라엘 신앙을 한데 묶고 있는 규범적인 사건들을 연구)이었다고 보고 이 두가지 연구 전통이 시-공(time-space)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장소 점유(displacemant)에 대한 성서의 특별한 관심사를 제대로 취급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 문화에서 발견되는 상황들이 이 두 가지로는 올바로 해석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장소 상실 (loss of Place) 혹은 장소 열망(yearing of Place)의 차원에서 성서를 새롭게 조명해 볼 것을 주장한다.
그는 "땅"을 '공간'(space)과 '장소'(place)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강제나 책임이 없는 억압이나 권위로 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간의 특성은 무의미한 일상 생활과 종속적인 삶의 정황으로부터 벗어 나려는 욕망에 호소한다. 그러나 '장소'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장소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가진 공간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기억되는 연속성과 정체성(identy)을 가져다 주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장소는 맹세가 교환되며 약속들이 이루어지고 요구 조건이 제시되는 공간이다. 공간이 역사로부터의 도피를 추구 한다면 장소에 대한 열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순례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 안으로 들어 가고자 하는 결단을 뜻한다.
에덴 동산과 땅
A. 창조와 땅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때 시간(창1:3-5)과 공간 (창1:6-10)을 근간으로 식물(창1:2-13)과 별(창1:14-19), 동물들(1:20-25)의 창조와 이 전체를 다스리는(창2:1-4) 인간(창1;26-31)을 창조하셨다. 이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더 세분하여 보면 땅이 동물과 식물이 창조되는 근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의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 창1:24).
땅과 관련된 동 식물과는 달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다 직접적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엄숙한 결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다. 이는 인간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땅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 역시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흙에서 취해졌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땅을 돌보고 다스리어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계속 하도록 축복의 말씀과 함께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 창1:28).
'그가 창조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는 오직 신적인 창조에서만 사용하는 말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즉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각 창조 행위마다 반복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이 여러번 나오는데 (창 1:4,11,13,18,20,25,31), 이좋았더라"는 '좋다', '훌륭하다', '아름답다', '유쾌하다'
는 뜻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곧 모든 창조의 결과가 하나님의 의도와 기대에 부응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응되어 그 결과로 만들어진 '땅'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만드신 하나님께 속해져 있으며 하나님께 지배를 받는다. 이 땅은 그 만드신 자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장(場)이 되고 있는 것이다.
B.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 에덴 동산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어느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제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며 피조물들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 동산을 허락하시고 땅과 땅위에 있는 다른 동 식물들을 지키고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명령을 내리신다 ( 창 1:28). 인간에게 허락하신 에덴 동산은 인간의 영 육간의 행복을 위해서 마련해 주신 곳이였다. "에덴" ( )은 '기쁨','즐거움','희락'이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 동산은 기쁨의 동산이며, 양식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동산(창2:9) 이였다.
그 동산에는 특별한 두 종류의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생명 나무는 아담이 무죄한 가운데 계속 순종만 하면 장수와 행복,더 나가서는 불멸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는 징표와 확증이었다. 또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받음으로 서 인간은 자연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았듯이 율법을 받게 된다.이것은 아담에게 주신 현재의 축복을 확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이 축복은 유지되나 불순종할 때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실상 인간은 낙원 밖에서 지음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낙원밖에서 지으신 다음에 동산 안에 두셨다( 창 2:8). 그는 낙원의 흙이 아니라 보통 흙으로 지음받았다. 그는 낙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동산에서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었다. 인간 존재의 조물주이신 바로 그 하나님이 또한 그 축복의 장본인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은 내적인 평화와 외적인 평화가 공존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단순히 거주지로서만 창조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거주지로서,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인간이 특별히 받아 들여진 곳이며 후세에 이르러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제시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상태를 나타내며 역사의 마지막에 다가 올 종말적 형태의 재현이 된다.
C.죄의 결과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의 기간도 얼마되지 않아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므로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만다. 그것은 바로 '땅으로 부터의 추방'(창 3:23)이었다. 에덴이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안에 있는 땅이라면 추방은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창조주 안에서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것은 땅과의 관계였다. 인간은 흙에서 취해졌고 그 흙은 생산하는 열매들과 함께 인간의 모든 생의 모체적 기초였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주셨던 땅을 상실케 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쫓겨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은 죄로 인한 고통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로인해 여자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에게 순종할 의무가 주어지게 되었고( 창 3:16 ),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창 3:17,19).
또한 땅 역시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어(창 3:17)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다( 창 3:18 ). 이것은 바로 타락하고 죄악된 영혼이 '선'에는 불모지가 되고 '악'에는 결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땅은 창조시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상실된 채로 인간에게 주어진다.
에덴 동산의 타락에서 뿐만 아니라 그후에도 땅은 인간의 범죄에 따른 심판의 도구가 된다. 창 3:23-24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처럼 그의 형제인 아벧의 살인자 가인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저주를 받고(창 4:12-16) , 땅은 가인에게 효력을 주지 않는다( 창 4:11). 또한 노아의 시대에서도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자 땅 역시 패괴해 진다( 창 7:12).
이 세계를 지으시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므로 형성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처럼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단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으며 야웨의 세계를 향한 창조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구원사의 시작으로서 아브라함의 부름과 그리고 그 부름에서 제시된 아브라함의 소명에 연결되고 땅 점유로 끝나는 역사 과정에 편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족장들과 땅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땅은 하나님과의 특별관계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적인 역활을 한다. 이것은 아브라함때 부터 계속 이어지는 족장사( 族 長 史)를 통해 땅에 대한 약속이 매 순간마다 재확인 되며 구체화되는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시작된다.
족장사는 갈대아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설명되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에서 시작된다. 이 명령에는 땅에 대한 약속이 암시되어 있다. 이 땅이 어느 곳에 있는 땅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여 지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약속인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이루어 주실 축복의 약속을 말씀하신다. 창12:2에 나오는 약속은 또한 땅과 밀접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자식이 없었던 그에게 후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지는 나라를 건설하시고자 원하셨다. 또한 그는 땅을 얻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뿐만 아니라 복을 받고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도 함께 받는다. 이 말씀은 3절의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3)라는 명령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것이라는 하나님의 의도에 강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 창13:14-16; 15:18-21; 17:8),그 자손 이삭과(창 26:3-4,24) 야곱에게( 창 28:3 이하,13-15; 35:9-12)서 계속 확인되고 출 6장 8절에서는 모세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속에서도 나타나며 광야 시절(예,출 33;1)에서도 반복되어진다.
A. 땅으로의 부름
창 12: 1-3절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소명과 땅의 약속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하여 기존의 옛 땅을 버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난 행위를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알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8-19)
아브라함의 소명은 처음부터 땅(에레츠)을 주기위한 구원의 계시의 출발임을 알 수있다. 아브라함을 향한 부르심에서 부터 땅은 역사의 주제가 되어 히브리 민족의 역사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땅은 오로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로서만 존재하는 땅이며 새로운 땅이고 가시 덤불과 엉겅퀴로 가득찬 척박한 옛 땅(창3:18)과는 다른 땅이다. 옛 땅의 역사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이라면 이 새로운 땅은 회개와 용서가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 지며 땅과 후손이 없는 자에게 약속의 자손과 땅을 허락해 주는 희망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땅에 대한 약속은 매 순간마다 반복되어 재 확인되며 그 약속은 점점 구체화 되어간다. 아브라함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창15:7-21)에도 이 땅과 자손을 줄것을 말하며 17장에 들어서는 '영원한 언약'으로 부각된다. 그 경계 또한 "이 땅"으로 부터(창12:7) 시작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땅-동,서,남,북(창13:4) 그리고 창 15장에서는 이집트 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큰 강까지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땅에 대한 약속은 독립적으로 여겨지지만 성서의 곳곳에서 다른 약속들-주로 후손에 관한 약속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창 13:14-16; 26:4; 27:3;35:9-12). 후손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약속은 서로 보완적이다. 수많은 후손은 살 공간이 필요하며 땅은 그 정복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민족을 형성하는 것과 땅은 하나님께 함께 속한것으로 시작된다.
땅에 대한 약속을 엄숙하게 하는 제의 행위가 제물을 쪼갠, 조각에서의 계약 ( covenant of piece, 창 15:7-21 ) 으로 행해짐으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음이 확증된다. 야웨가 지시하신 교훈을 좇아서 아브라함은 여러 희생 동물을 취하여 그것들을 둘로 쪼갰다.
해질 무렵에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 갔으며"(17절). 야웨는 그 모든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실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은 영원한 계약이었다. 창세기 13:15에서 이미 땅에 대한 제의가 "영원히"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이 언약은 "영원한 계약"(17:7,13,29)이 되었으며 땅은 "영원한 소유"가 되었
다.
그 이후 이삭(26:3-4)과 야곱(28:13-15; 35:12; 35:9-15)에게 이르러서도 땅에 대한 약속은 이어지며 이집트에서 성공한 요셉도 그 임종시에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집트의 풍요로움에 머물기보다는 약속의 땅을 바라 볼 것을 유언한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창 48:21; 참조 50:24)
사실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로 부터 약속을 받고 세겜에 이르렀을때 (창 12:6), 그 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이미 세겜은 가나안의 상업 및 종교 도시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이 땅을 차지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그 가나안 땅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가 대두된다.약속하신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이 땅이 약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이 문제의 대답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에덴을 허락하셨으나 인간들의 죄악으로 추방당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와 연관지을 수 있다. 또한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5) 물로서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셨던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게약을 맺으시며 에언의 말씀을 하시는중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 땅에서 쫓겨 나야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약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15:16)
가나안 거주지의 이방 민족들은 짐승과 교합하는 등의 죄악(레 18:23)으로 그들 자신을 더럽혔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 땅도 더럽혀 지게 되었다. 즉 그들의 죄약이 관영케 됨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시고 그 땅 스스로가 그들을 토하여 낸것이다 ( 레 18:24-25). 그들은 우상과 음행등의 가증한 풍속의 죄악으로 땅을 더럽혔다. 15절의 사대라는 말씀은 13절에서 언급된 400년 동안을 가리킨다.
그 기간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종살이 하는 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동안 그 땅을 얻지 못한것은 그 땅(가나안)에 살고 있는 족속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민족이라도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기 전까지는 벌하시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자 헷 족속의 땅 일부를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므로 막벧라 동굴을 매장지로 삼고 "약속의 땅" 일부를 소유하게 된다(창23:15-20). 이렇게 함으로 훗날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땅에 나그네로서 묻힌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땅에 묻히게 된다. 폰 라드는 이 묘비가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일에 차지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조그만 보증이라고 여긴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죽은 후에 이 막벧라 굴에 장사되었으며(창 25:9), 이삭에 이어 야곱이 죽을 때도 그 아들 요셉에게 환도뼈 아래 넣어서 맹세케 하여 자신의 뼈를 애굽에 묻지 않고 선영에 장사 할 것을 부탁하여(창 47:29-30) 그 뼈가 막벧라 굴에 묻힌다( 창 50:12-13). 이같은 유언은 요셉 때에도 반복이 된다 ( 창 50:25).
이렇게 조상들의 뼈가 약속의 땅에 묻히는 행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의 땅과 묶어 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 이 행위는 훗날 그들이 나그네로든, 비참한 포로의 모습으로든, 어떠한 상황에 처하고 있든지 이 '약속의 땅'을 차지 하리라는 보증의 증표로서 작용하며, 조상 때 부터 내려오는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B.가나안 땅의 지형적 위치와 상황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가나안 땅은 북쪽의 메소포타미아나 애굽처럼 강력한 단일 왕국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긴 사다리 모양의 땅으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동쪽은 아라비아 광야,서쪽은 지중해 ,남쪽으로는 시나이 광야와 홍해 그리고 북쪽은 울창한 레바논 산맥이 있다.
지형적으로 교통의 요충지대 였으므로 아프리카에 위치한 애굽과 고대 오리엔트의 강국인 메소포타미아가 군대를 동원시킬때는 언제나 통로 구실을 하였고 항상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조공을 바치면서 살아갔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들은 도시 국가를 형성하여 농경 생활과 유목민 생활 그리고 페니키아(진홍색 염색공들과 진홍색 제조 업자들)를 중심으로 상거래를 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가나안 땅은 그 지형과 위치때문에 강력한 군주도 없었고 일정한 주인도 없었으며 지형적으로나 기후 조건으로 볼 때 그리 좋은 땅은 아니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떠나야 했던 우르는 광활한 옥수수와 보리밭인 야채 재배원과 대추,야자 및 무화과 나무의 과수원이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은 경제적인 풍요함과 번영이 있었으나 그러나 일월 성신을 숭배하는 성행하였던 곳이었다. 이방신이 지배하는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다.
이러한 지형학적인 면을 고려해 볼때 가나안 땅으로의 부름이 곧 단순한 비옥함이나 풍요만을 상징하는 땅으로의 부름만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는 의미로서 새로운 땅이 된다. 가나안 땅을 향한 부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의 부름이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관계를 갖고 만나는 역사의 장(場)으로의 부름인 것이다.
C.회복의 의미에서 본 가나안 땅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요셉의 죽음까지의 거대한 역사는 그 전체를 유지하고 연결시키는 교각으로서 조상들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조상들의 약속은 가나안 땅 소유의 허락과 무수한 자손의 허락을 의미한다. 이 두 약속은 거의 도식적으로 자주 병행되지만 한 문맥에서 단지 이것 또는 저것만 이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수 도 있다.
모든 기사들을 직관하면 땅의 악속이 곧 민족 형성의 약속과 무수한 자손의 허락을 의미하는것을 알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땅의 약속이 민족형성의 약속보다 한층 더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하는데 상당히 빈번하게 조상들의 약속에 의존하는 신명기는 그 약속을 오로지 땅의 약속으로서만 이해한다.
이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은 또한 태초의 약속으로 소급되어 생각될 수가 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땅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은혜'밖으로' 벗어났다면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소명은 그 '안으로'들어가기 위한 소명이다.
가나안 땅의 입주는 에덴 안의 입주를 의미한다. 성서가 말하는 가나안 땅은 사람들이 씨를 뿌려 삶의 터전을 세우라는 통속적인 개념으로서의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 포도원으로 그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된 공간적인 장소이다. 에덴의 회복이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부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된 곳이다. 그 땅에서는 악을 추방하고 선을 심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단순한 흙(아다마)이 아니다. 역사의 무대가 되어 신을 찬양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출애굽과 땅
하나의 '약속으로서만의 땅'이 아니라 이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출애굽의 역사는 풍요함과 비옥함은 있었으나 야웨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며 약속의 희망이 없었던 노예의 땅 애굽으로 부터 이스라엘의 조상때부터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 주시는 땅 가나안으로 가는 출발과 그 성취과정중에 만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땅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사를 나타낸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족장의 하나님만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세우시는 공동체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며, 또한 광야의 그 척박한 환경을 인한 고난과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구원사와 고난사 그리고 땅의 역사가 바로 이 출애굽의 과정에서 정의 될 수 있으며 출애굽의 역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땅을 차지하게 하신 그분의 섭리를 알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창세기에서 여호수아서에 이르는 주제의 구조가 약속에서 성취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존 브라이트는 이 6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땅, 번영, 그리고 축복을 약속하셨는지, 어떻게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 갔다가 심한 압제를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출애굽 기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시내산에서 계약과 율법을 주셨으며 사막을 통과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는지를 읽게 되는데 여기서 출애굽,광야 경험,땅을 주시는 이 전체가 곧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라고 본다.
A. 출애굽과 언약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시작된다 ( 출 2:24; 3:13,15-16; 4:5; 6:3,5,8).
애굽으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여러 기적들과 유월절의 경험,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그동안 조상의 하나님, 족장들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이제 그들에게 족장을 넘어 민족 공동체의 하나님이 되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직접 체험하게 된다. 광야의 40년은 바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만드는 기간이었다.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은 관계가 있는가? 육경의 문화 양식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였던 폰 라드는 신 26:5-9의 신앙 고백을 - 수 24:16-18과 같은 신앙고백과 동일하게 - 성경의 처음 6권의 심장부로 그 신앙 고백이 족장 시대의 시작, 애굽에서의 압제, 광야의 방랑 생활 그리고 가나안 입주에 제한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 신앙 고백에는 시내산 사건이 고백되어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카이저는 출애굽과 출 19:3-8과 20:2-17의 결합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시내산 계약이 역사,출애굽 신학 또는 언약에서 분리되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은 언약과 율법과의 관게를 규정함으로 답변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햐여 율법의 언약을 세우신다.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여 맺어진 이 시내산 계약은 계약을 수여하시는 하나님의 계약 조건, 즉 십계명을 위시한 모든 규례에(출 21:1; 신4:40; 5:1; 6:17) 복종하고 충성할 것을 서약하는 조건적인 계약이었다.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로 시작되는 십계명은 시내산의 율법 언약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진술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 하나님의 은총 행위에 그 근거를 두며 이스라엘을 그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언약( 출19:5-6)의 원리에서 그 율법이 부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약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된 것
이며 이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기초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
계 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구약에서 이 언약(계약)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언제나 "관계"의 개념에서 이해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 말이 사용되는 경우에 언약은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진 두 사람 사이의 합의나 화해 또는 통속적 의미의 조약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강자가 약자에게 부과하는 의무 즉 법률이나 계명과 동의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시며 시내산에서의 게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언약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들을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B. 광야
출애굽을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은 세 가지의 성질이 다른 땅을 경험하게 된다. 민14;1-4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과 이 광야와 그 땅을 말하고 있다. 바로 먹을것이 있고 눈으로 보기에는 좋으나 노예의 땅인 애굽과 척박한 환경으로 먹을것이 없고 굶주림이 가득차 보이는 사막의 광야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희망이 없고 새로움이 없는 땅에서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땅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고기와 떡이 있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출 16:3). 애굽은 그들에게 노예의 생활을 강요하는 곳이었으나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충분한 자원들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어떠한 성질의 땅이든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줄 수 없었던 땅없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족장들처럼 단순히 거주하고 있는 외인으로서 처한것이 아닌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인것을 뜻했다.
광야의 어려움속에서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보다는 그들이 버린 옛땅 애굽을 잊지 못했다. 그들의 이러한 미온적인 신앙 형태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정욕과 생각을 주장하게 했고 그들은 광야에서 악을 즐기고 우상(금 송아지 사건)을 숭배하며 간음을 행하였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여야 하는 언약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은 그들의 광야에서 보이는 철저한 불신앙 상태를 나타내고 만다.
유월절의 은혜와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의 높은 사기는 광야에 들어서자 모두 사라지고 그들에게 익숙한 노예 근성이 발로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불평과 반항과 분쟁의 장소가 된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들의 광야 유랑 첫발부터 불평을 털어 놓는다.
'바로가 가까이 올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애굽 사람을 섬기는것이 광야에서 죽는것보다 낫겠노라' (출14:10-13)
이러한 불평과 원망은 광야길에 들어서도 계속 된다. 출 16장에서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불평하고 원망한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3)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늘로 부터 떡과 고기를 내리신다( 출 16:4,8,12).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이집트가 아닌 다른곳 즉 하늘로 부터 떡을 내리시므로 그러한 자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리신다. 생명의 근원은 땅자체로 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땅에 매여 있거나 땅에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땅에 종속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자원들은 하나님께서 땅을 갖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이 없는 상태에서도 오직 땅만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안식일'이 오는 여섯째 날에는 안식을 예비하여 더 거둬 들이는것이 허락됐다( 출 16:23). 날마다 거둬들이는 것도 각 사람의 식량대로 한 오멜씩 취하도록 되어 있었다( 16;16). 이러한 공평한 분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발생하게 될 경제 질서에 있어 한 예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이 은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신앙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민수기 14장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민 13장의 12명의 가나안 정탐꾼들의 보고는 그들에게 버리고 나온 옛 땅 애굽을 더욱 그리워 하며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게 만들었다.
1 - 3절에서 그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애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리고 4 - 5 절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 갈것을 말한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와 아론,여호수아와 갈렙등은 백성들의 불평과는 달리 회개와 이스라엘이 겪을지 모르는 곤경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약속의 땅의 부요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신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7-8)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땅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갖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오직 여호와만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강한 확신을 말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두 가지의 신앙 형태 즉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하신 이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않고 하나님과 땅을 무시하는 자들과 (민14:22) , 이들과 는 마음이 달라 온전히 하나님을 쫓고 하나님이 주신 땅의 의미를 아는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신앙을 보인 자들은 약속의 땅을 들어 가지 못하고 그들의 볼평과 원망이 가득찬 장소인 광야에서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으며 , 이제 믿음의 사람들과 새로운 젊은 세대의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C.약속의 성취
족장 시대에서 부터 이어 내려온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언약의 공동체로 만들고 이제 이스라엘민족은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된다.
조상들의 언약은 후기의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그 땅을 점유하고 분배함으로 즉 그 땅에 정착함으로 성취되었다. 폰 라드는 그의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야웨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허락해 준 것은 야웨의 커다란 구원행위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수아서를 포함한 육경 전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토지 점유와 분배는 그 주제만으로도 상당히 큰 연구의 가치를 지닌다. 이 장에서는 간단히 언급함으로 약속의 부름에서 부터 땅 점유와 분배에 따른 성취로서의 초기 이스라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1.땅의 점유
이전에 족장들은 장차 있을 언약의 보증으로서 그 땅의 적은 부분인 매장지만을 소유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족장들은 주로 언약을 소유하였지만 전체로 실제적인 땅 자체는 소유하지 못했다. 그 땅은 선물이였으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소유하여야만 했다. 땅은 야웨의 선물이라는 증언에 뒤이어 빈번히 나오는 '가서 그 땅을 얻으라' (신 3:12)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행위에만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선물을 받는 행위는 군사적인 행위를 수반하게 된것이다 ( 신3:19; 5:31; 12:1; 15:4). 하나님은 언제나 이 싸움에서 진(陣) 선두에서 행하시고 진에 계시며 (신 23:14),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셨다(신1: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싸웠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약속의 성취를 이루어 나갔다.
2.땅의 분배
가나안의 토지 점령은 이스라엘 12지파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된 군사 행동을 전개함으로 이루어 진다(수: 1-12).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땅을 차지 하게 된 이스라엘이 그 땅을 분배하는 것은 성경의 두 곳에서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가. 여호수아의 토지분배
가나안 사람들과 투쟁하여 이스라엘이 얻은 토지는 그 백성들에게 공평히 분배된다. 동부 요르단 지파들의 도움을 힘입어 서부 요르단 지방의 점령이 종식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실로의 성소에서 사전에 측량된 토지를 분배한다(수 18:1-10).
이 분배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규정된다.
첫째로 명령의 계통에 따라 분배 된다. 지파 동맹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각 지파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면 그 다음 이 토지는 지파 내에 있는 각 씨족들에게 세분된다.
또한 분배가 있기전 여호수아로 부터 보냄을 받은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 토지를 측량한다. 이것은 토지 분배에 따른 평등의 원리를 의미한다.
셋째로 토지 분배의 모든 과정은 당시의 성소이었던 길갈에서 실행되었다. 따라서
토지 분배는 일종의 제의 행위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나.민수기의 토지 분배 방법
민 26장은 또 하나의 토지 분배에 대해 설명한 장인데 이 민수기에서는 토지 분배에 앞서 인구 조사가 먼저 실시 되고 있다( 민 26:1 이하) . 씨족들의 수에 따라 개별 지파는 보다 많게 혹은 보다 적게 토지를 분배받는다.
이러한 과정은 개별 씨족들이 동일한 소유지를 분배받지만 지파들이 분배받은 토지는 지파들의 수에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욱 토지 분배의 평등 의식이 여호수아보다도 더 선명히 드러나는 장이다.
민수기와 여호수아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토지 분배의 원리는 평등 의식이다. 수가 많은 지파는 많이, 적은 지파는 적게 가짐으로 작은 개별 단위의 가족으로 세분되었을 때 평등히 분배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모세 오경에 나타난 가나안 땅의 신학적 의미
어려웠으나 그 어느때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광야를 지나 이스라엘은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요단강 경계에 서게된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던 약속에 근거하여 ,또한 광야 세대가 산 체험으로 경험하여 전해진 약속의 소망으로 요단강앞에 선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었다.젊은 이들은 옛 사람이 체험한 것을 알지 못했다( 신 11:2; 6:20 이하).
이스라엘 자손에게 땅은 약속된 것이었다. 그들이 민족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수 세월동안 여러 역경들속에서도 그들에게는 그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현현하시여 약속해 주신 땅(가나안)에 대한 소망으로 그들의 민족의 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이것은 신명기 전체에 걸쳐 '야웨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였노라'고 하는 약속과 선물의 주제가 여러번 언급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도록 불러낸 ( 창 12:1 ) 그 순간부터 이삭과 야곱에 이어져 내려온 땅은 요셉의 임종시 유언을 통해 비옥한 환경의 애굽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따로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 창 50:24). 요셉의 이러한 유언은 자손들에게 약속된 땅이 분명히 있으며 그들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한 출애굽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있다.
이스라엘 조상때부터 약속되어진 그 땅은 하나님이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이었다. 이 맹세의 개념이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신명기인데 여기서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대한 언급들은 족장 시대가 지난 오랜 후에야 일어난 사건을 계속하여 약속의 땅으로 확신시켜 주는 기능을 가진다. 맹세라고 하는것은 이미 말하여진 내용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필요한 시기에 요구되는 것이다.
베스터만은 이러한 불확실성은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 이스라엘 민족이 당면하였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 상황이 시사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의 실존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상황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이 과연 그들의 땅은 점유하게 될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인가라고 하는 끊임없는 불확실성을 정복하는 동안에 경험하였던 상황이었다.
약속으로만 막연하게 전해졌던 가나안은 그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에 의지하여 출애굽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체험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요단강앞에서 성급히 가나안으로 들어가려하지않고 머무른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이 말씀속에는 새 이스라엘, 곧 땅안에서 땅을 위하여 살면서도 궁극적으로 땅을 초월하여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품성과 특징이 규정된다. 단순한 땅으로서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되는 것이다.
A.하나님의 땅
1.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을 신명기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부른다. 이것은 삶에 풍요한 모든것들로 가득차 있는 이상적인 땅, 곧 일종의 낙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젖과 꿀이라는 표현은 이것을 신들의 특별한 선물, 혹은 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비추어 볼 수 도 있으나 성경에서 사용된 이런 표현은 본질적으로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찬송시에서는 이 땅을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 ( 신 8:7-9 )으로 찬양하는데 이 곳은 모든 것이 풍성하며 애굽 땅보다도 훨씬 좋은 곳이라 하였다(신 11:10-12 ).
그러나 지리학적인 여건에서 바라본 가나안 땅은 풍요로움의 상징으로서 만 여기기에는 부적절하다. 팔레스틴 땅 자체의 지형적인 악조건, 그리고 기근이 심한 나라인것을 고려해 볼 때 젖과 꿀은 보다 확장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단순한 의미의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들은 이미 애굽에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꿈꾸어온 정의가 살아 있고 자유가 있는 삶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의 토지적 성격의 특징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 ( 신11:12 ),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땅,그들의 조상적부터 약속해주신 땅으로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풍요와 부족함이 없는 땅으로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평화와 안전의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 자신의 안전함과 평화가 보장되는 땅이다. 당시의 가나안 땅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가나안 원주민과 아모리 족속등 이방 민족들이 있었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위험이 기다리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이 안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족장들의 언약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러한 "안식"은 족장들이나 이스라엘에
게 주실 하나님의 미래적인 축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신
명기 12:9 에 처음 등장하였을때, 이미 백성들의 전승에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때에 '(신12:9-10)
이 안식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당시에 모세가 약속받은 것으로( 출 33:14 ), 후에 모세는 다시 그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할 때 의 모든 백성들에게 불원간 찾아 올 안식을 약속하였다.
폰 라드는 신명기를 생활-제의-율법 으로서 각각 개체의 구조가 통합된 것으로 보는데 그는 그 중 생활률이 끊임없이 말해주는 야웨의 선물은 그 땅과 또 그를 둘러 싸고 있는 적들앞에서의 안식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이 안식의 개념이야말로 야웨 하나님이 본래 부족이나 혈족에게 제공한 토지관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이스라엘의 방황과 다른 민족의 공격하는 광야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안전과 평화가 이 땅에는 있는 것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의 해방과 방황이 없는 이러한 평화와 안전은 오직 약속의 땅, 하나님의 땅에서만 가능하다.
3.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땅
족장들에게 땅을 허락하시는 약속은 그 성취 여하를 막론하고 땅이 족장이나 그 후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유된것임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된 땅을 이스라엘에게 축복 혹은 선물로서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땅의 소유권이 주어진것이 아니며 그 최종적인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시중 가장 오래된 작품들중 하나인 출애굽 15장의 모세의 노래에 암시되어 있다. 거기에서는 출애굽의 기적을 경축하고, '주의 성결한 처소'( 13절), '주의 기업의 산'( 17), '주의 처소로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17)이라고 묘사된 그 땅에 들어갈 것을 기대한다. 또 다른 초기의 시에서는 '자기 땅과 백성'을 언급한다( 신32;43). 그러나 가장 분명한 진술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출 19;5과 레 25:23에서 나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출 19;5에서 하나님은 모든 가시적인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통치권과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라는 단어는 토지의 의미보다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한 레 25:23에서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신다. 이스라엘이 나그네라는 개념은 바로 땅이 야웨의 것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즉 사람과 땅이 모두 여호와의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전제에 따른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어 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이 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우연히 흘러 들어와서 살게 된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차지 하기전에 이미 야웨가 그 소유주로서 가지고 있던 땅을 그 족장들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확정해 준 것임을 나타낸다.
야웨 자신이 소유한 거룩한 땅이라는 개념은 제의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제의적 공동체,즉 야웨에 속하는 성스러운 백성으로 호칭되었고 이 특수성에서 그의 삼과 직책(사제, 왕,예언자, 재판관)이 정비되었다. 모든 것은 구원의 선물, 즉 약속된 땅에 거주한다는 것에 관련된 형식으로 그 질서가 이루어 진다. 이러한 면에서 신12:2-12은 이스라엘의 제사가 가나안 인들의 제사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을 나타낸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신12:5)
이같은 계명의 실현으로 이방신들의 사당을 다 폐쇄하고 예루살렘 중앙 성소(신 12:30)에서만, 야웨에 의해 선택된 장소에서만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리라는 요구인 것이다. 희생 제사는 '보이는 아무곳에서나 드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 12;13). 가나안 인들의 제사는 자연 종교로서 철두 철미많은 장소와 상징들을 필요로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다양한 자연신의 자기 계시를 고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예배는 수많은 성소로 분할되고 여러 면에 침투된 가나안 적표상들 때문에 공허한 예배로 황폐화되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예배는 야웨의 계시에 의해 중앙 집권적인 요구가 행해졌고 이스라엘은 그 역사위에 근거를 둔 예배의 특수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이 땅을 허락하신 분이 오직 여호와 야웨 하나님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B.이스라엘 공동체의 땅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고 선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 땅은 조건이 있는 땅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땅에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순종하여야만 했다. 땅에서 요청되는 특별한 삶의 양식은 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서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양식에 대한 여러 항목에 걸친 많은 계명들은 일관적인 한 관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나안 땅이 야웨의 약속이라는 것은 야웨가 역사의 주라는 개념에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땅의 축복이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은 야웨 하나님이 역사적 섭리로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민족의 삶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 되며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의 시금석이 된다.
1.기업으로서 땅
땅에 대한 게명을 살피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 인식 되어져야 할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땅이 기업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똑같이 '여호와의 기업'(삼상26:19; 삼하21;3) 또는 그의 소유(수22:19)로 불리웠다. 출 19:5에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소유로 부른 이래로 그들은 땅의 열국중에서 "성민"(신 7:6;14:2; 26:18)이 되었으며 "기업의 백성"(신9:26,29; 32:8-9)이 되었다.
신명기에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실 기업으로 표현된다. 폰 라드는이 기업(유업)이라는 말이 신학적으로 약속의 땅을 더 잘 설명한다고 여긴다. 어떤 의미에서 기업이란 할당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 각 지파는 그들의 땅을 제비를 뽑아 할당 받았다(수 13-22). 전체 땅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당하신 것이다.
기업으로 주시는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을 받고 있었던 애굽의 땅과 같지 않다( 신 11:10). 이스라엘 민족이 기억하는 옛 땅 곧 노예의 땅은 그들이 힘들여 가꾸어야 하는 땅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볼확실 하였고 수고를 요구하던 땅이었다. 그러나 새 땅, 곧 요단강 건너에 있는 땅은 은총에 의한 땅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녕과 생명을 부여하여 주게 될 땅이다. 거기서 생산되는 올리브 나무와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의 모든 소출들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노동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공급되는 것이다.
기업이란 양도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또한 강제로 추방될 수 도 없다. 저당잡힌 재산이 원래 주인에게로 되돌려지는 희년 제도는 기업이 양도 불가능한 재산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나봇이 땅을 팔라고 하는 왕의 요청마저 죽음을 무릅쓰고 그가 거절한 것은 재산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와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다. 아합이 강제로 빼앗을 수 없었던 땅을 그의 부인 이세벧이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방 민족 출신은 이세벧에게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의 유업의 의미가 전혀 없었던것 때문이었다.
또한 물려 받은 조상의 재산이 타인의 손으로 들어 가지 못하도록 막기위 해 토지의 기업이 그 집안에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산처럼 개인에게 양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죽으면 토지는 딸들에게 양도되었다. 이때 딸들이 타인과 결혼하므로 토지가 유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친척 결혼 제도가 있었으며 (민 29:72), 자식이 없는 과부가 시동생의 아내가 되도록 결혼법이 규정되어 그 가정의 토지가 다른 가문으로 넘어 가는 것을 방지하는 법이 있었다(신25;5-6).
2.안식년과 희년
가. 안식년
안식일은 성취의 땅을 향해 나아갔던 출애굽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거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의 힘과 권위를 확증하는 방식이 된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어느 역사에 속해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땅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되는가를 기억하게 해주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사실상 6일동안 일하고 제 7일에는 일을 하지않고 안식하는 것은 창 2장 1-4에서 볼때 이미 창조의 상황가운데 있는 태초부터 드러난 땅의 역사적인 특성이며 하나님 자신의 역사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선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의 좀더 연장된 개념으로 칠일(日)이 해(年)로 변한 안식년은 일년을 안식하는 해로 '제 7년'을 말한다. 안식년에 관한 가장 초기의 가르침은 종들을 자유하게 하는 날이었으나 ( 출 21:1-11; 신15:12-18 ) 나중에는 땅을 쉬게하고 ( 레 25 ) 빚을 청산하는 날로 발전하였다.( 신 15:1-11 )
6년 동안 파종하고 7년째 되는 해는 땅을 묵히는 풍습은 땅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당시의 주변 민족에게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는 다르다. 이스라엘에게 땅의 안식은 땅이 그들 자신으로부터(from)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주어졌으며 (to), 땅이 완전히 자신의 배부름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비록 땅을 쉬게 하여도 제 6년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어 소출이 풍성하게 되어 삼년동안 쓰기에 족하게 되므로( 레25:21 ) 사람이 자신의 힘이나 땅에서 생존의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그 땅과 모든 대자연이 휴식하므로서 사람은 자연의 관리자일 뿐 이 세상의 진정한 소유주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7년 째는 땅의 휴식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잃었던 권리가 회복되며 자유가 보장된다. 안식년이 오면 히브리인의 종은 땅이 없기에 팔려 왔어도 자유를 찾는 해가 된다( 출 21:1-2 ). 또한 채무도 자동적으로 (신의 은혜)변제되며 갇힌 자가 석방되고 용서를 받는다( 신15:1-18 ). 종의 방면이나 빚의 탕감은 인간 사회가 궁극적으로 사고 파는 일이나 빚지고 빚갚는 일에 의존하고 있음이 아님을 확증해 준다. 이스라엘에게서 안식년은 땅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궁극적으로 물질적인 힘으로 속박하거나 소유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즉 안식의 제도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기억하게 되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해져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나.희년
일곱 번의 안식년을 지내고 다음 해인 50년째를 희년이라고 한다. 안식일에서 안식년으로, 다시 희년으로 발전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존망이 그들 자신의 정치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정 정치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희년에는 땅을 묵혀야 한다( 레25:8이하).그러나 안식년과는 달리 희년에는 땅이 원 소유주에게 돌아간다. 레위기 법에 근거한 토지 제도는 이스라엘이 그들 후손에게 영속적으로 물려 주도록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분배 받았을 때(민 26:52 -56; 수 18:1 -10)부터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기에 이스라엘은 이 분배받은 땅을 마음대로 팔지 못했으며(레25:23), 땅의 경계표를 마음대로 옮기지 못했다(신19:14; 27:17). 이러한 균등 분배의 원칙은 각 지파의 경우만이 아니라 보다 적은 규모의 친족 집단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땅을 팔아야 할 경우에 그들은 마음대로 매도할 수 없었으며 다만 희년까지 임대해 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희년법은 즉 땅의 소유권의 이전이 아니라 그 땅에 대한 사용권(또는 소출물)의 이전인 것이다. 50년마다 땅은 원주인과 가구수대로 재 분배를 받았다. 이렇게 하므로써 땅의 독과점을 막고 부의 균등 분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의 규정도 있었다. 가난이 극심하여 몸을 판 경우에 그들은 희년이 되면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 그들의 조상의 기업을 이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방인에게 팔렸다 하더라도 토지의 경우 원주인이 너무 가난하면 그 가까운 친족이 무를 수 있는 것(레25)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를 속량할 수 있었다. 속량이 불가능하더라도 그가 나중에 부유하게 되면 자신을 스스로 속량하여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희년에는 또한 가옥의 환원도 있었다. 땅과 밀접한 가옥 역시 생계와 연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사고 팔 수 없었다. 그러나 가옥은 땅과는 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어 모든 가옥에 대해 똑같은 희년 규정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희년법에 의하면 성 내의 가옥은 1년안에만 무를 수 있었고 그안에 무르지 못하면 희년이 되어도 원주인에게로 돌아 가지 못했다(레25:29-30). 그러나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가옥,곧 성 밖의 가옥은 땅의 경우와 똑같은 희년 규정이 적용되었다. 이는 성 밖의 가옥이 농산물을 수확하는 전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레 25:31).
말텐스는 이러한 희년 제도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땅을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하게 하였다고 보며 동시에 땅과 이스라엘과 여호와가 서로 속해 있는 삼각 관계 속에서 가족의 권리가 보장되었다고 여긴다.
다. 이웃을 돌봄
위에서 살펴본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는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주제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받으므로 모두에게 땅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땅이 없어 땅이 있는 이스라엘이 보살펴야 하는 형제와 자매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가난한 자( 출 23:6; 신 15;7-11), 이방 나그네( 출22:21-24; 23:9), 나그네( 신 10:19), 고아와 과부(신24:19-20), 레위인(신 14:27)이었다.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경제적 기반이나 권세, 존엄도 가지지 못한 "분깃이나 기업"( 신 14:27 )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제와 자매로서 계약의 약속에 완전히 참여하는 자들로 규정되고 있는 자들이었다 ( 레 25;25-55; 신 15;1-11,12-18; 22:1-4).
'너희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신 15:4) 라는 야웨의 말씀에 따라 토라에는 부의 편중과 착취를 방지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이 지침이 제시된다. 곡식을 거둔후에 이삭을 다시 거두지 않는 것 ( 신 24:19-21),
안식일의 휴일( 출 23;12, 신 5;14), 삼년마다 성전에 내지 않고 과부와 고아, 뜨내기를 위해서 할당한 일( 신 14:28-29; 26:14), 변리를 금한 것( 출22:25) 그외에 안식년, 희년등의 제도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도와 주라고 명령하실 때는 어떤 경우에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 하나님 야훼이다'. 즉, 가난한 자를 도와 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명령으로서 이것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헤와 가난한 자의 권리를 규정하여 그들을 땅과 이웃에게서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3.윤리적 생활 양식이 요구되는 땅
하나님은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시고 그 땅에 대한 계명을 주셨지만 아울러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양식에 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하신다. 이는 그 땅이 하나님과 관계되어지고 그 관계속에서 인간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러한 율법과 땅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매춘 행위가 금지된것은 "음풍이 전국에 퍼져 (그 땅에) 죄악이 가득할까" (레 19:29)함이다. 또 이혼은 허용되었으나, 이미 다른 사람에게 재혼했던 자기의 이전 아내에게 재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한 행위는 여호와 앞에 가증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땅에 죄를 지우는 것이 된다( 신 24:4). 어떤 면에서 결혼과 가족 윤리 그 자체로서는 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계명들의 위반은 땅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그 땅 가운데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민 35:34).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땅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중간 지점'이기에 이스라엘은 율법을 준수 해야 한다. 땅은 여호와의 유형적인 상징이다.
여호와께서 더럽혀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불가능하므로,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땅이 더럽혀질 것이라는 말로서 표현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사는 것 즉 여호와의 율법을 준수하므로 성결하게 사는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 이러한 면에서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형성에 있어 매개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 행동과 땅과의 상호 의존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비단 땅만을 더럽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땅을 계속해서 차지하는것도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축복이 순종으로 말미암는다면 ,그 땅에서 저주와 축출은 불순종으로 말미암는다(신28:15-68). 비가 내리지 않고, 적에게 패배하며, 내란과 질병은 단지 약간의 재앙일뿐이며 궁극적인 재난은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중에 흩으시리니'(신 28:63-64)
바로 그 땅에서의 추방이다. 그 땅에서 제거되는것은 토라를 지닌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것이 아니라 가나안과 같은 이방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3장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가나안 민족이 그 땅에서 축출된것도 바로 가나안의 죄 때문이었다 ( 레 18;24). 이스라엘 역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땅이 이스라엘을 토해낼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 레 20:22-26).
창조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주시고 그 땅을 잘 다스릴 것을 명령하셨으나 인간의 범죄로 땅을 상실 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를 소급해 볼 때 다시금 하나님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시며 율법을 주신다. 이스라엘이 이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단순한 준행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4.경계의 땅
야웨와 함께 거하는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켜야 할 것과 또한 경계해야 할 율법을 받는다. 값없이 주어진 선물로서의 땅은 매우 분명한 과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스라엘에게 땅에서의 축복을 허락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타락은 땅 자체가 왜곡되고 야웨 신앙을 변질시키며 인간 스스로를 파괴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가.역사 의식의 상실
이스라엘이 땅에서 직면하게 될 가장 중심적인 경꼐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중단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자신의 미래 역시 배부르리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보증된 안전과 보증된 배부름으로 기억을 둔하게 만들고 언약을 통해서 얻은 역사적인 선물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인 열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만들어 주며 그들의 생명 유지함이 그들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알려 준다. 이러한 유혹에 빠짐으로 이스라엘은 현재의 안전과 풍요가 자신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자기 도취와 또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행위에 빠지게될 것을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말고'(신 6:12)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하노라.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만나로 네게 먹이셨나니 또 두렵건대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할까 하노라'(신8:11-17)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신8:9)
즉 땅이 이스라엘을 생존케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풍요의 근원이 땅 자체에 있는 것으로 믿어 이방 풍요의 신의 도움, 비와 날씨등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이 살아 나가는 것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말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폰 라드의 지적한 바에 따르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 그들은 점차 완전히 이질적인 가나안 제의 세계와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결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성소와 접촉을 가짐으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접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제의 자체로 전향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제의 풍속들, 특히 희생 제사및 그 의식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자신들의 제의 의식에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상의 재물의 유혹에 빠져 땅과 그밖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조상들의 약속에 대한 성취라는 것을 망각할 유혹에 빠지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 였던것이다.
나.탐 욕
이스라엘이 역사 의식의 상실로 그들에게 땅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 그들 자신의 역사를 잊으며 이방신을 섬기는 죄에 빠지는 것을 제외하고도 이스라엘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탐욕이다.
이스라엘은 선물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cf. 신 8:1 ). 그러나 탐욕은 하나님이 주신것이라는 생각을 넘어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욕심을 불어 넣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탐욕을 경계하며 형제와 자매를 보살펴야 하는 여러가지 계명들을 통해 그들이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 한다.
성서에서 탐욕과 이것이 초래하는 사망의 힘에 관한 예를 부르거만은 다윗과 밧세바 (삼하 11:3; 12:24)이야기 및 아담과 하와( 창3;1-14)이야기를 든다. 이들의 이야기는 분명히 자기 안전을 추구하는 탐욕의 파괴적인 힘에 관한 중대한 상징적 역활을 한다.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야웨의 심판이 다윗과 그의 왕조에게( 삼하 12:5;13-14) 그리고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내린다( 창 3:17-19). 에덴 동산의 상실과 이후의 왕국 상실은 동일한 것, 곧 땅을 잃은 포로 생활을 의미한다.
결 론
성서가 말하고 있는 땅은 현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사회적 통념과는 매우 다르다.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와 더불어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약속의 땅에 관하여 ,이제 소유하게 된 땅을 지킴에 관하여 그리고 계약 파기로 말미암은 땅의 상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땅은 모든 인간들이 그들의 생명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을 향한 시각 역시 달라져야 할 것이다.
특별히 오경을 통해 나타난 가나안 땅은 이제까지 이해해오던 관점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평가되어야만 한다. 일반적인 인식처럼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기독교 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유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부터 땅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유지시키고 그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땅이가. 그러므로 땅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범죄한 인간을 토해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지배아래에서 인간을 도와 열매를 생산해 내기도 한다.
하나님의 땅.에덴 동산-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땅)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의 의미만을 함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의 상징으로 그 땅에서 서로 간의 교제와 연합이 이루어 지는것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은 범죄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의 교제가 끊어진 후 다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속사적 상징의 역활을 한다.
인간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땅 즉 하나님과의 교제권에서 벗어 나게된 타락한 인간의 역사속으로 하나님은 구속의 손길을 뻗치신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계의 회복의 상징으로 가나안 땅은 약속되다.
약속된 땅으로 이끄시고자 아브라함을 축복하시어 그를 우상과 죄악이 가득찬 그의 인간적 죄악의 터에서 인도하시고 게속 그 후손들을 이끄시며,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고 광야에서 보호해 주신 그 민족의 역사 자체는 바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족장사에서 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고 분배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의 과정속에서 어떵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보다도 더 먼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 땅에서 토함을 받게 되었다.그것은 그들의 죄악의 관영함 때문이였다. 하나님의 인도아래 행해진 이스라엘 자손들과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전쟁은 단순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죄악들과의 전쟁이였다.
가나안 원주민들 자신의 죄악으로 그들은 쫓겨 나야만 했고 이스라엘은 싸워서 그 땅을 성취하여야만 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땅에 죄악이 함께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땅에서 죄악을 범할 경우 그들 역시 이방 민족과 마친가지로 쫓겨 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과 아스라엘을 연결시키는 구속사적인 교각의 역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가 된다. 야웨 하나님은 제의 의식을 통하여 바로 본질적인 자신의 성품과 뜻을 드러내신다.땅에 대한 제의 의식을 토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아울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여러 계명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자세히 드러내며 그 땅에서의 계명들로 땅이 갖는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땅은 제의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양식이 필요한 땅이다. 즉 땅이 갖는 이중적인 측면- 하나님의 땅과 아울러 인간에게 허락되어 진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하나님의 구속적이고 주도적인 지배하에 놓여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가나안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땅이다.
그 땅은 단순한 부와 비옥함의 상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며 그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진 땅이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태초의 관계로 다시금 새로이 형성하는 땅이다.
이 땅은 인간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한낱 부(副)의 수단이 아니다. 이 땅은 바로 하나님의 땅이며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의도가 계시되는 역사의 현장이며 구속의 현장인 것이다.
강봉균, "우리 나라와 외국의 토지제도 비교", [땅] (서울: 두란노서원, 1991), p.31.
엘머 에이 말텐스, [하나님의 계획], 김의원 역 (서울: 아가폐문화사, 1990), p.141.
http://ipccc.or.kr/board/files/19-5920040930192659.hwp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상칠언 (0) | 2020.03.06 |
---|---|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주제별) (0) | 2020.03.02 |
이집트 재앙 -신 (0) | 2020.03.02 |
10가지 재앙 (0) | 2020.03.02 |
사사기 7실패 7 구원 (0) | 2020.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