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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구약과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by 은총가득 2020. 3. 2.

 

 

구약과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구약 성경을 다루면서 그것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속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 이해에는 성경기사의 역사 문화적 배경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150년 전만 해도 성경 연구학자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정보들을 거의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흑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전설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많은 성경 고고학적 발굴로 인하여 일찍이 알려지지 않은 성경 배경사가 진전된 현실에 이르러 더 이상 아무도 그러한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시대의 배경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공통된 인식과 함께 고대 근동 지역의 사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져만 갔다. 여기서 다루는 바도 그러한 관심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고는 지면의 제한상 근동 지방의 고대 문화에 대한 모든 측면이 아니라 성경의 배경사라는 측면에서만 개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모든 문화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려 내에 거주했던 종족들을 중심으로 근동의 문화를 다루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성경 역사 전개에 따라 각 시대별로 영향을 끼쳤던 주요 종족들, 즉 수메르인, 에블라인, 아카드인, 바벨로니아인, 애굽인, 가나안인, 힛타이트인, 앗수르인, 베니게인, 시리아인,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과 구약의 중심 민족인 히브리인들과의 관계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분석 비교해 볼 것이다.

 

 

I. 초기 청동기 시대(B.C. 3200-2200)

 

1 . 수메르인(the Sumerians)

성경 사건의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처음 지적되는 중심 지역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계곡이다. 11 : 2'시날 평지'라고 기록된 이 땅에는 처음에는 수메르족이 살게 되었다. 이때는 족장 시대보다 무려 1000여년 앞선 때로서 이들은 아마 C. 4000년대 말경 북쪽 카스피해 지역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메르족의 주요 도시는 우르(Ur), 에렉(Ereck), 라르사(Larsa), 라가스(Lagash) 등인데, 특히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수메르의 제 3왕조 때의 도성이었다. 한편 가족 제도를 사회의 기초 단위로 하고 도시 국가제를 통치의 한 전형으로 삼았던 이들은 매우 지적이고 창의력이 풍부하여 이들이 건설한 문명은 중동 문명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멀리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애 굽에까지 미쳤다. 수메르 문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문자술(文字術)의 발전인데, 이들은 단순한 상형문자로부터 복잡한 설형 문자를 개발해 내었다.

 

지난 백여 년간 고고학자들이 수메르 점토판을 다량으로 발굴해 냄으로써 성경이 오랜 구전 기간을 거쳐 문자가 개발된 후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가정은 무너지고 말았다. 오히려 수메르 점토판의 연구 결과 수메르의 문학적 양식이나 언어 체계가 셈계 문학과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 따라서 성경의 기록도 이러한 문자술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해졌다. 문자술의 발전 이외에도 수메르인들은136 건축술이나 관개 시설에서도 뛰어났으며 특히 중서, 계약서나 언약서, 송장(送狀), 법전 따위의 기록체계가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미술과 공예, 또는 야금술 등에도 뛰어나 히브리인들의 성소에 장식된 것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또한 도기술, 수레, 아아치형 문, 등근 천장, 지하 납골당 등은 히브리인의 문화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수메르인의 종교에 대해 살펴보면. 토판에 나타난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성경의 창조 기사나 흥수 기사와 유사한 설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통치자인 '엔시'(Ensi, King)가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신론 사상이나 신들의 부도덕성은 성경의 유일신 관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아카드인(the Akkadians)

수메르 국가는 많은 도시 국가들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도시 국가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그 힘이 나날이 약해져 갔다. 이 때 아라비아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아카드인들이 수메르를 정복하고(B.C. 2350) 강력한 통치자 사르곤 1(jargon I)의 통치하에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 아카드 제국의 수도는 우르(Ur)의 북방에 위치한 아카드(Akkad, 또는 Agade)이며 (10: 10), 이 제국은 후에 바벨론이 되었다. 아카드 문화는 수메르 문화의 계승에 불과하리만큼 수메르 문화를 대부분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자는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문학 전반에 있어서도 수메르의 것과 유사했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 '는 수메르인들의 흥수 설화를 약간 발전시킨 것이며 . 또 이 전의 창조 설화를 수집 '창조시'도 편집하였다. 특히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아카드인들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수메르 문화는 더욱 멀리 전파되었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그들은 수메르 종교를 그대로 수용하였는데 단지 그들의 신들이 약간 더 첨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언어에 있어서 수메르어는 점차 사라지고 아카드어로 대치되었다. 그렇지만 식자층에서는 여전히 수메르어가 사용되었고, 특히 사원(寺院) 같은 곳에서는 대부분 수메르어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러한 양대 문화(兩大文化)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셈이다. 또한 아브라함은 같은 셈계로서 아카드어나 그 방언을 사용하며 문자 기록도 했을 것이다.

 

3. 에블라인(the Eblaites)

'에블라'(Ebla)는 현재 북부 시리아의 텔 마르디카(Tell-Mardika)로서 서부 셈 제국의 수도이다. 14년에서 76년 사이에 16,000개의 점토판이 이곳에서 발굴되면서 최초로 알려지기 시작한 에블라인은 메소포타미아 계곡 동부의 산맥으로부터 현재 터어키 지역의 중심부까지와, 남으로는 시나이 반도까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에블라에서 발굴된 점토판은B.C. 2400-2250년경의 것으로서 약%정도가 수메르어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는 서부 셈계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나안어나 히브리어와 매우 흡사한 설형 문자였다.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이 점토판들에서 '원시 가나안 방언'으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었고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 예를 들면 에벨(10 : 21), 아브람, 이스마엘, 이스라엘, 미가, 다윗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살렘, 소돔, 고모라, 하솔, 라기스, 므깃도, 가사, 욥바 따위의 도시 이름도 등장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에블라 근처에서 약 1여 년간 살았던 사실에 견주어 불 때 매우 홍미 있다.

 

4. 애굽인(the Egyptians)

B.C. S000년경 나일 계곡(the Nile Valley)을 따라 정착하면서 농경 사회로 발전한 애굽은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수메르. 아카드와 교역하기 시작했다. 애굽은 상()애굽과 하()애굽으로 나뉘어 졌으며 42개 구역(도시 국가에 상당하는 구역)으로 형성되었다. 애굽은 B.C. 3200년경 상애굽 티니스의 메네스(Menes of Thinis)에 의해 최초로 통일 왕국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인 멤페(Memfe, 또는 Memphis)를 도읍으로 하여 소위 '피라밋 시대'(B.C. 2650-22)를 열게 되었다. 애굽인들은 일찍 이 달력을 만들고 기 하 체계를 세우고 상형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 상아 나무 장식 토기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들은 또한 파피루스를 개발하여 많은 문헌들을 남기기도 했다. 애굽의 종교는 왕을 제사장으로 하며 태양신을 숭배했고 내세에 대한 신앙도 갖고 있었다. 피라밋은 바로 그럴 내세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태양신 이외에도 많은 신들이 숭배되었다.

 

ll. 중기 청동기 시대(B.C. 2200-1550)

이때는 바로 고대 근동의 재건기(再建期)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강력한 통치 체제가 무너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인구가 대거 이동하는 혼란의 시대가 도래 했다. 수메르 문화의 빛은 점차 사라지고 셈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보면 이때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저지대 계곡으로부터 하란 지역을 거쳐 계속 가나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 바벨로니아인(the Babylonians)

창세기에는 니므롯이 에렉(Ereck, 현대의 War)과 아카드를 건설하기 이전에 바벨론(개역 성경에는 '바벨')을 건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10 : 10; 11'2, 9). 그리고 바벨론의 위치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시날(10 : 10; 11 : 2), 흑은 갈대아(11 : 28,31 ; 15 : 7)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된 유적 에 따르면 B. C. 2350년경 아카드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것이 바벨루니 아의 모체가 된 것이다. 그 후 셈족의 아모리 족속이 침입해 와 명실 공히 왕정 국가로서 바벨로니아의 제 1왕조를 열었다. 이를 고대 바벨로니아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유적들은 흥수의 범람으로 거의 유실되었으나 함무라비 왕의 법전 사문에는 그의 통치시대 이전까지 말둑 신전 에사길라SRg) 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식의 통치를 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최초로 바벨론 제국이 형성된 것은 고대 바벨로니아의 6대왕이었던 함무라비(B.C. 1728년경)때이며 이때에 만들어진 점토판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점토판들은 주로 행정과 상업에 관한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이주하기 직전 갈대아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가장 중요한 함무라비 법전은 시민문제 가정문제 농업문제 등에 관한 282개 조문의 판례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시민법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도 많다.

 

2. 아모리인(the Amorites)

'아모리'라는 말은 아카드어의 '아무루'에서 나왔는데, 이는 '서부인'이라는 뜻이다. 1933년에서 1960년까지에 걸쳐 폐허 도시 마리에서 약 B.C. 1800년경의 토판이 2만여개 발굴되면서 그들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토판들에 따르면 그들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서쪽인 시리아의 스텝 지대에서 살다가 팔레스틴으로 들어온 셈족이었다. 그들은 '마리'(Mari)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성경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아모리 사람의 땅'(48 : 22 :24 . 15, 18)이라고 할 만큼 그들의 세력은 컸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가나안인 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모리는 B.C. 20세기경 함무라비 왕에 의해 바벨론에 통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 토판은 대개 B.C. 19-18세기경의 것들로서 마리 북쪽 지방에 거주했던 히브리 선조들의 문화적 환경을 설명하는데 좋은 자료로 쓰이고 있다.

 

특히 그 토판에는 아브라함, 야곱, 하란, 나흘, 데라, 스룩과 같은 히브리 선조들의 명단 뿐만 아니라 하비루(히브리 ?)라고 불리우는 반()유목민 집단과 벤-야미니(베냐민) 지파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도 이미 이들에게 알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히브리 조상들의 풍속 가운데, 죽은 부인의 자매와 결흔하는 제도, 남자 상속인의 권리를 확보하는 대리처제(代理妻制), 생득권의 양도, 자식 없는 부부들의 양자 입양 제도 등이 이미 마리 점토판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또 히브리인들의 언약서 들은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마리 문자로 된 몇 몇 약정들과 매우 흡사하며, 누지 서판에도 유사한 풍숱이 설명되어 있다.

 

3. 가나안인(the Canaanites)

아모리인들이 레반트 지역(동부 지중해의 여러 섬과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하기 이전 B.C. 3000년대부터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10. 15-19에 소개되어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B. C. 2000년 경에 아모리인들의 유입으로 가나안 지역은 거의 대부분 아모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가나안이란 명칭은 '자주색 천'이란 어원적인 뜻이 있으나, 제한된 뜻으로는 '상인', '장사꾼'이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가나안인 들이 주로 무역에 종사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 족장들도 이러한 가나안 지역을 통해 장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때에 가나안인 들은 대부분 애굽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애굽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가나안인 들의 종교는 다신론이었으며 바알 종교는 애굽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가나안 종교를 많이 접하긴 했으나 그들의 다신론적인 것을 거부한 사실이 성경에도 나온다(35:4; 24:2;14-20). 가나안인 들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알파벳 표기의 발명이다. 이스라엘 족장들도 이 알파벳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손들은 그것을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다.

 

4. 애굽인(the Egyarts)

중기 청동기 시대에 애굽은 강력한 제 12왕조(B.C. 1991-1786)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때에 남 '북으로 갈려져 있던 애굽이 통일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애굽은 크게 번영하여 주변의 약소국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군사적 상업적 영향력이 가나안 내부와 지중해 남쪽 해안선까지 이르렀다.

한편 이스라엘 족장들도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간 적이 있으나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당했던 불쾌한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요셉의 힘을 입어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인과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 나일강의 삼각주인 고센 땅에 격리되어 살았다. 어쨌든 애굽인과 히브리인은 긴장 관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양치기적 풍습을 경멸했고 히브리인들은 한결같이 애굽의 다신론적 우상 숭배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III. 후기 청동기 시대(B.C. 1550-1200)

1. 애굽인(the Egyptians)

후기 청동기 시대가 막 시작될 무렬 애 굽에서는 셈 계통의 왕조인 힉소스(Hyksos)왕조(B.C. 1700- 1567)가 무너지고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제 18왕조가 들어섰다. 이전까지 셈족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애굽은 이때부터 셈족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고 마침내 그들을 노예화시켜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일찍이 애굽의 다신론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이때부터 애굽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런 민족적 정치적 갈등의 발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거의 400여년동안 애굽에 거주하면서 히브리인들이 받은 영향도 크다. 특히 모세는 애굽의 왕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언어, 문학, 정치, 전쟁술, 사제직에 대한 것 등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 외에도 농업 기술, 직조술, 야금술, 건축술 등 다방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악기나 음악의 영향도 컸다. 그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히브리인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는 유일신 사상 때문에 애굽 종교와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달랐다. 예를 들면 애굽인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도덕적으로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애굽 종교와 이스라엘 종교는 본질적으로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 힛타이트인(the Hittites)

힛타이트인(개 역 성 경에는 헷 족속)은 본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 다(10 : 15). 그들은 족장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가나안에 거주한 종족 중 가장 큰 민족 중의 하나였다. 성경에서는 그들의 영토가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1 : 4),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힛타이트인은 남부 러시아로부터 이주하여 온 듯하며 그들의 중심부는 현재의 터어키이다. 히브리인들은 힛타이트인들과 많은 교류를 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땅을 사서 그의 아내 사라를 묻었고(23 : 3,4), 에서는 렷 족속 중에퍼 두 아내를 취했다 (26 :).

 

그리고 겔 16 : 3,45에 보면 예루살렘을 가리켜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헛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거민이 헷 족속과 통혼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윗 때의 장수 우리야도 햇 사람이었다(삼하23 : 39). 그러나 히브리인과 어느 정도로 문화 교류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힛타이트의 유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조약 형식이 성경의 언약 형식과 때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조약 형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약정의 주체에 대한 선언 약정자 상호간에 있었던 역사적 개요 규떼와 약정 낭독시 규정 저주와 축복에 대한 조항. 그러나 성경의 언약들의 근본정신은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며, 그것의 규례와 도덕적 성격은 월등히 우수한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약 기자들을 인도하여 기본적으로는 세속적인 조약 형식을 취하게 하셨지만 세속적인 다신론을 일소하고 대신 당신의 말씀으로 채우셨던 것이다.

 

3. 가나안인(the Canaanites)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요단강을 건너 고 가나안 본토로 들어 갈 때 가나안에는 많은 종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그 종족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군사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 유적으로는 '라스 샤마라 토판'이 있는데, 이는 우가릿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 점토판에는 특히 가나안 우상들의 신명(神名)이 많이 나오는데 바알, 아세라, 아낫, 다곤, 레쉬프, 엘 등이 있다. 특히 엘(El)은 히브리의 신 엘로힘(Elohim) 과 같은 이름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높은 고지의 숲속에 산당을 짓고 우상을 숭배했는데, 이는 후에 이스라엘의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가나안인 들이 쓰는 우가릿어의 문법, 구문, 운문의 병렬체는 히브리 문학과 깊은 관계가 있어 난해한 구약을 이해하는데 아주 용이하다. 이로 인해 모세 오경 속의 시()나 시편의 몇몇 시들이 실제로 고대의 작품들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IV. 철기 시대 I (B.C. 1200-900)

1 . 가나안인(the Canaanites)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였고 사사 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가나안인 들과의 초기의 관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다윗 때에 대부분의 가나안인 들이 이스라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인 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지만 본래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경문화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가나안인 들의 풍습에 많이 동화되었던 사실은 분명하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는 가나안의 왕정 제도를 모체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삼상8, 12).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이 두로의 가나안인 들과 동맹을 맺고 해양 민족인 베니게인 들과 B.C. 1000년 이후부터 많은 거래를 했던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도 애굽적 성격보다는 베니게적 성격이 더 많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리고 알파벳 문자도 가나안인 들로부터 배운 것임이 들림없다. 한편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유일신 사상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우상에 젖어있을 때마다 심판으로 응징하신 후 다시 여호와만을 섬기도록 했다.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가나안의 영향을 받았지만 히브리적인 독특성은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2. 블레셋인(the Philistines)

볼레셋인 들은 B.C. 12세기경 에게해 지역으로부터 지중해의 남동쪽 연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이전 족장 시대에도 가나안 땅 서남쪽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21 : 32. ; 26 : 1-33). 그들은 다섯 도시, 즉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글른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블레셋인 들은 힛타이트인 들로부터 철을 담금질하는 법을 배워 일찍부터 철제 무기와 도구를 제작하였다. 따라서 여호수아 사후(死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재정복 때에도 이들이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1 : 19). 그리고 그 후 계속해서 그들은 금속에 대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과 사울의 통치 때까지도 이스라엘에 대해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다욋 때에 가서야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는데(삼하8 : 18), 후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 다시 블레셋은 유다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블레셋은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가나안 땅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 땅을 팔레스틴이라고 부른다.

 

3. 애굽인(the Egyptians)

애굽은 이스라엘의 초기 군주 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하였을 때 자신의 왕국을 다소간 애굽의 방식에 따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성전의 성가대나 악대를 조직할 때 베니게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지만, 또한 애굽의 관습도 따른 것 같다. 특히 솔로몬은 바로 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왕으로부터 결혼 지참금으로 게셀 땅을 받았기 때문에 애굽의 풍습에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혹자는 솔로몬이 명철한 지혜와 많은 잠언을 남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애굽의 고대 격언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같이 애굽의 풍습에 깊이 휩싸임으로 말미암아 결국 말년에 크게 타락하였다.

 

4. 시리아인(the Syrians)

족장 시대에도 시리아. 즉 아람(Aram)족은 가나안 땅에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아람인 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며(26 : 5),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데려온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었다(25 : 20).

그러므로 야곱의 외가인 라반 삼촌의 집도 밧단 아람인 셈이다(28 : 5). 그런데 이들은 서서히 세력을 이스라엘 북동쪽으로 확장하여 다윗 때에는 다메섹을 확보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에 의해 그들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는데(삼하10'8-14). 솔로몬 통치 말기까지 이스라엘에 대해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

 

5. 아라비아인(the Arabians)

솔로몬 통치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남방에 있던 아라비아와 거의 관계가 얼었다. 그러나 솔로몬 때 아라비아의 스바 여왕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서서히 접촉하기 시작했다. 아라비아는 당시 널은 지역에 걸쳐 대상로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솔로몬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발하기 위해서 스바 여왕과 모종의 협상을 벌였을 것이 다. 이로 인해 솔로몬은 더욱 더 큰 부를 획 득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왕상 10 : 14. 15).

 

V. 철기 시대 ll(B.C. 900-600)

1 . 애굽인(Egyptians)

솔로은 통치 말년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퍼해 도망갔던 곳이 바로 애굽이었다(왕상12 : 2). 그리고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와 세겜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실제로 이때 애굽이 매우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야망에 불탔던 시삭(Shishak)은 팔레스틴에 대한 애굽의 옛 종주권을 다시 들먹이면서 정복 활동을 하였는데(B.C. 920년경), 이때 이스라엘은 많은 피해를 당했다 (왕하14 : 25-28). 그리고 또 수년 후 세라(Zerah)가 유다를 침략했는데 그는 마레사에서 참패하고 돌아갔다(대하14:9 이하). 이때부터 두 나라는 계속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 히스기야 때에 애굽의 원정을 요청하긴 했었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애굽의 도움을 받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19). B.C. 7세기 말엽 애굽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요시야 왕은 므깃도에서 바로 느고(Pharaoh Neceh. B. C 610-5)와 접전을 벌이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여호야김은 애굽의 섭정왕이 되었다. 한편 예레미야 선지자와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피난하여 애굽 풍속의 영향을 받았는데,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i,B.C. S세기)에 피난한 유대인들의 생활상이 잘 그려져 있다.

 

2. 시리아인(the Syrians)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다메섹의 시리아는 두 왕국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어부지리

(魚夫之利)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립코자 했다. 그러나 시리아(아람)는 이스라엘과 군사적 상업적 관계 이외에 다른 관계는 거의 맺지 않았다. 성경에는 엘리사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왕하8 : 13),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도 엘리사에게 병 고침을 받았다는 기록(왕하 5)이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요단강을 가로지르는 무역로의 장악을 놓고 오랫동안 격렬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주로 인색한 아람인 들이 그 무역로를 장악했으며, B.C. 8세기경에는 앗수르가 그곳을 장 악했다. B.C. 732년 시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문화적으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3. 모압인(the Moabites)

사해 동편 고지(高地)에 거주했던 모압 족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19:-38)으로서 이 스라엘과는 친척 관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에 모압은 이스라엘을 적대시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이스라엘이 통과하려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히브리 남성들은 모압 여인들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22:1;3: 1). 한편 보아스와 결혼한 룻은 모압 여자였으며 다윗 왕은 바로 이 계보의 후손이었다. B.C. 9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메사 기념비'에는 이스라엘과 모압이 오랫동안 전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비문에 새겨진 언어는 히브리어에 가까운 방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야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비문으로서는 성경 이외에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4. 베니게인(the Phoenicians)

유명한 베니게의 항구 도시 두로와 시돈은 상업적으로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북이 스라엘의 아합 왕과 베니게의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바로 그런 밀접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세벨이 베니게의 문화와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 보급하기 위해 애를 썼던 사실과 갈멜 산상에서 의 엘리야와의 대결은 성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유다에 바알 종교를 보급하기 위해 야웨 종교를 박해한 사실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달랴의 살해 이후 베니게인들이 팔레스틴 지역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5. 앗수르인(the Assyrians)

B.C. 8세기 중엽 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약소국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앗수르 군대였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시리아와 연합했으며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뇌물을 주어 아합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하스는 앗수르의 속국으로서 아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각각 B.C. 722년과 732년에 멸망하였으며 이스라엘에는 앗수르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많은 이방인들이 이 주되어와 복잡한 혼합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문화의 특징이 되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의 봉신(封臣)으로 앗수르식의 제단을 만들고 인신 제사까지 행하게 되었다(왕하16 : 3). 아하스의 후계자 히스기야는 강력히 앗수르의 문화적 영향력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친 앗수르적이었으며 앗수르의 다신론적 사상을 대거 수입하여 유다의 종교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한편 B.C. 672년부터 앗수르를 통치한 앗술바니팔은 역사적인 도서관을 남겼는데 이 도서관에는 6,000권 이상의 바벨론 문헌이 소장되어 있었고, 그 문헌 가운데는 '창조시', '길가메쉬 서사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6. 선지자들의 활동과 이방 문화의 영향

선지서들을 살펴보면 고대 근동 지역의 문화적 영향이 선지자들에게 얼마나 미 쳤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선지자.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이 삼자 사이의 역학적 관계를 표현함에 있어 선 지자들은 가나안의 언약, 소송, 사신 제도라는 삼중(三重)의 수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이다. 첫째, 언약 혹은 계약 형식은 힛타이트 족의 계약 형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적 개념은 모세 오경이나 사무엘서에 이미 그 상세한 내용이 설명되어 있지만 선지서에도 그 개념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인자', '자비', '공의' 등의 개념은 언약 형식에서 쓰는 중요한 용어들이다. 그리고 둘째로, 본래 가나안적 성격을 띠고 있는 소송 제도는 선지서에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 심판관 되신 하나님, 고발자인 선지자들, 그리고 피고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고 선고의 내용도 분명하다. 이는 셈계 문학 전반에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리고 셋째, 사신제(使臣制)의 영향도 선지서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사신(messenger)은 자신이 섬기는 왕과 외국 지도자, 속국의 왕, 고급 관리 사이에 통신을 전달 감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 고대의 통신 물들에 관한 연구 결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가 바로 이 같이 사신과 같은 역 할을 담당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선포하고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하여 이러한 형식들을 사용한 것에서 선지자들이 근동 문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VI. 철기 시대 III(B.C. 600-300)

1. 바벨로니아인(the Babylonians)

B.C. 612년 앗수르가 멸망하고 신흥 바벨론이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유다는 여호야긴의 배반으로 B.C. S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됨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지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으며 바벨론에서 제공하는 직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은 정부의 고위직에도 등용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 인들은 촌락을 이루어 공동체 생활도 할 수 있었다.

 

예배 형태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성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독특한 방식을 고안해 냈는데 옥외 집회 및 가정 집회 방식이 개발되었다(8:1;14:1;20 : 1). 그리고 안식일이 예배일로서 새롭게 인식되었고, 이렇게 해서 회당 제도가 생겼다. 또한 예배 방식에 있어서는 바벨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언어는 점차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스라4 : 8-6. 18;7. 12-26, 예 레미야10: 11, 다니엘2 : 4-7 : 28이 바로 아람어로 쐬어진 것들이다.

 

2. 바사(페르시아)(the Persians)

B.C. S38년 바벨론은 바사 왁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했다. 바사는 바벨론과는 달리 식민지 백성들에 대해 유화 정책을 폈으며 이로 인해 유대 인들이 본토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대 하 36 : 23 ; 1'2이하). 그러나 팔레스틴으로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바벨론에 뿌리박은 그들의 삶을 하루아침에 뽑아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에 있어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의 역할 등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으며, 바사 제국은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리고 에스더도 바사의 왕비가 되어 유대 민족의 대학살을 막았다. 한편 바사인들은 교환수단으로서 화폐 제도의 장점을 인식하고 즉각 채택하여 시행하였는데, B.C. 6세기 이후 유대인들도 이러한 화폐 제도를 실시하였다.

 

3. 헬라인(the Greeks)

헬라의 영향이 고대 근동 지역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의 정복기 훨씬 이 전부터이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B.C. 30세기경부터 헬라 문화의 영향이 셈계, 애굽계 여러 나라에 나타나는데, 주로 교역에 의한 접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히브리인들이 헬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통로는 애굽이나 블레셋, 베니게를 통하는 것이었는데, 왕국 시대의 건물 장식이나 기둥머리 기술 등은 역으로 베니게를 통해 헬라에 전파되기도 했고 알파벳도 마찬가지이다. B.C. 7, 8세기에 1헬라인들은 지중해 동부 연안 쪽에 무역소를 설치, 그들의 제품을 앗수르 전역에 들여왔다. 그리고 많은 헬라인들이 용병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로니아 군대에 참여했다.

 

한편 히브리 사회에 주화가 들어오게 된 것은 바사를 통해서이지만, 최초의 화폐 주조자는 헬라인인 루디아의 기제스(Gyges, B.C. 687-52)였다. 특히 B.C. 450년 이후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아티카의 주화를 모방하며 '야후드'(Yud)라는 이름을 새긴 유대의 주화들을 생산해 냈다.

결론적으로 고대 근동 지방의 고고학적 자료들은 구약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왜냐하면 히브리 문화는 그 이운 나라의 의 교역 농업 수공업 도구 무기 '언어 '문자 및 기타 여러 기술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는 수단으로서 고대 문화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나라의 많은 문화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종교적 독특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즉 문화 속에 들어 있는 다신교적 세계관과 관습이 제거되고 우상 숭배적인 마법이나 제물 등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언약을 신실하게 수행 하셨으며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주권자요, 심판자요, 구세주요, 창조주라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셨다. 따라서 우리가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때 단순히 문화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이웃 국가의 영향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인식하고, 창조주요 주권자 되시는 여호와의 시각에서 그 문화적 배경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바로 정립시킬 때 오늘날의 이방 문화적 영향권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도 자신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의 모습으로 안착(安著)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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