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2:1-4, 42-47
오늘날 교회가 이 사회에 비춰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초대교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 -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
이런 성경을 읽다보면
언제 교회가 이런 평가를 받아보나,
언제 교회가 교회다운 평가를 받아보나,
언제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할 때가오나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초대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오늘 성경을 보면 그들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났고 결과 칭찬을 받는 결과를 낳게 됨.
초대교회의 부흥의 주체 - 성령님
초대교회의 예배의 주체 - 성령님
초대교회의 놀라운 역사 - 주체 - 성령님
그러니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런데 오늘 교회의 모습 - 사회에 천덕꾸러기로 전략해 버림
교회가 칭송이 아니라 욕을 얻어먹음
복음의 문이 닫힘
전도가 안 됨.
교회가 매력을 잃어버림
교회가 무기력 함.
교회가 왕따가 되어버렸음.
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 -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가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목회하기 때문에 목사가 욕을 먹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욕을 먹느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욕을 먹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절실히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역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역사가 교회 가운데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구해야 할 것은 -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강타 당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오늘 여러분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가슴 아파 합니까? 남편, 아내, 자녀, 직장, 환경…….
아니요, 우리가 진정 마음 아파해야 할 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음을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립니까? 경제, 형편이 풀릴 것을…….
그러나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것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심각한 문제 -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문둥병 - 자기도 모르게 3년, 자기가 알고 3년, 남이 알고 3년
간 - 침묵의 장기 - 암에 걸려도 잘 모름.
216장
기다리오니 주여 임하소서.
주님을 갈망해요.
주사랑 안에 날 감춰 주소서
더욱더 주를 알도록
내 모든 삶 취하소서.
생명-를 (내 안-에)
부으소서. (거하소서)
나올라 가-리 독수리 같이
성령 충만의 실제적 변화
1.언어의 변화가 일어남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성령세례 -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성령세례의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성령세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십니다.
성령 충만 -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온전한 통치 가운데 들어가는 성령 충만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니 그 즉시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하니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한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어의 변화입니다.
입술이 달라졌습니다.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입술이 성령님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드라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엉터리입니다.
언어가 공경적임 -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부사이,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저주에 가까움
언어폭력이 가정에 얼마나 가득한지....
언어가 비판적임
입술이 정직하지 못해요.
릭 조이너 - 빛과 어둠의 전쟁
사탄이 성도들의 공격 - 말을 타고 불화살로 공격 - 불화살 - 성도들의 말
오늘날 판단, 후욕, 비방 하는 말이 얼마나 난무한지 - 교회 공동체 안에 있음
당연시 여김, 다 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 강단이 바뀌게 됨.
오늘날 교회의 무기력은 강단의 무기력입니다.
강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지 않음.
성도들이 듣기에 좋아하는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너무 많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하며 설교하는 강단이 너무 많음.
행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함.
저는 오늘 우리 모두의 언어가 성령의 통제를 받는 언어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는 입술이 되길 원합니다.
성령 충만의 실제적 변화
2.하나님과 친밀함이 회복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당시 유대교 - 하루 3번 기도함 - 하나님과 친밀함이 아니라 종교적 습관을 따라 기도함.
그랬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니 기도에 전혀 힘쓰게 되는 겁니다.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나 성도의 부족한 점 -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열심도, 헌신, 봉사도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자로서의 하나님만 믿어요 - 이 사람은 구원받으면 하나님과 끝이에요.
어떤 사람은 치료자로서의 하나님만 찾아요 - 이 사람 치료받으면 하나님과 끝이에요.
여러분 사람과 친 하려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와 친 하려는 것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과 친하시기 바랍니다.
친밀함을 위하여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2) 출애굽의 사건에서
출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3) 12제자를 부르심 사건에서
막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4.십자가의 사건에서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때에 -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 상태가 이렇다.
19절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가족이 됨
13-17절 내용이 십자가가 나오는 데 집중적으로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헐었다. 십자가에서 화목한 관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그 이유를 말하는데)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진 것이죠. 에덴동산에서 깨어진 관계로 인간은 죄와 사단과 사망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의 문제가 회복되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달려 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가족이 된 친밀한 사랑을 누리는 자리로 이르게 됨.
십자가의 사건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죠. 하나님과 우리와의 막힌 담음을 허는 그 자리로 우리로 추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보혜사를 보내신 사건에서
보혜사를 보내신 사건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한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함의 결과 - 하나님과 친밀함이 회복
3.성령 충만하면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 -시선이 바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행2:44-46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기적이고
내 배만 부르면 되는 그들이었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되었어요.
나에게 문제가 없으면 되요. 그러면 되었어요.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경험했더니 시선이 바깥으로 돌려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시선이 돌려지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편의 영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울지마 톤즈” 라는 영화였습니다.
그는 9살 때 아버지의 여의고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열 자녀를 키운 어머니 밑에서 9번째 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이태석은 어린 시절을 세 발 자전거를 탈 수 없는 달동네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고 군의관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사제로는 최초로 아프리카를 지원했습니다.
긴급구호 전문가인 한비야씨도 자신이 가본 곳 중 최악의 척박한 땅이라고 했던 수단의 남부 톤즈라는 2001년 떠나게 됩니다.
섭씨 50도가 넘는 열사의 땅에서 이태석 신부는 오직 유일한 의사로서 하루 300명의 환자를 보며 잠도 제대로 못자는 가운데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브라스 벤드를 만들어 악기를 가르치고 지취까지 했습니다.
특별히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한샘병 환자들에게는 급할 때에는 장갑을 끼지도 않고 한샘병 환자들을 돌보는 애정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한샘병 환자들이 신발이 없어서 신발, 센달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한샘병 환자들의 발이 일그러져 형태가 다 다르니까 각각 발을 종이에 그려서 센달을 만들어 줍니다.
신학생 시설 톤즈에 가서 열흘 동안 한샘병 한자들을 보고 왔는데 고 이태석 신부는 신부가 되어 그곳 황폐한 땅 톤즈로 돌아갑니다.
왜 이렇게 한샘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난과 질병에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태석 신부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톤즈에 8년 동안 있으면서 톤즈 사람들은 절대 감사하다는 말을, 또 절대 울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3명이 감사하다고 찾아왔는데 그중 2명이 한샘병 환자였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하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나환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 식물인간, 뇌성마비, 뇌졸증, 자폐증 등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의 공통에 대해서도 가끔 묵상을 하게 된다.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십자가의 멍에가 이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을 하나 되게 하고,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게 하며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체험케 하는 그들의 힘은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의사로서도 이웃을 도울 수 있는데 왜 굳이 신부가 되었는가?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왜 굳이 아프리카 까지 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태석 신부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001년부터 8년간 톤즈에서 사역하던 이태석 신부가 국내와 와서 처음 건강검진을 했는데 대장암 말기라는 판명을 받게 되어졌고 1년 반의 암투병 끝에 2010년 1월 14일에 소천 했음.
KBS 스페셜이 톤즈를 방문해 한샘병 환자들을 만나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는 성경에 아노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다” 울며 증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살아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하여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다.
잠시 함께 2:30초짜리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탐욕적인 모습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회하고, 그렇게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그래서 성령 충만한 자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는 한국교회인데 이 3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는 것이 또한 한국교회가 아닙니까?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이것이 오늘의 현실
물이 세기 시작한 타이타닉 배와 같음 - 이제 침몰할 것만 남았음.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마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자기들의 경험을 다 동원해도 안 됨 - 절망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 심 - 밤 사경
우리는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가 되지 않아요,
통제 불능상태인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말로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을 찾는 것도 - 내 문제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 - 내 문제 해결
예배하는 것도 - 내가 원하는 축복을 위해서 이지
하나님과 친밀함은 그런 말조차도 들어보지도 못한지 오래입니다.
여전히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이기적이고
내 배만 부르며
나만 잘 살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었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어요.
고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폐차지경입니다.
우리가정
우리 교회
망연자실한 초대교회에 성령의 충만을 보내주셔서 회복시키셨듯이
하나님 우리에게도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캄캄한 절망이 우리가 새롭게 일어 설 수 있는 출발선이 되도록 철저하게 절망하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 성경해석학적 이해
조병수
도입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성경적인 근거 없이 현상을 파악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특히 성령과 관련하여 이런 경향은 매우 짙게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신자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에 관한 이해가 대표적인 예이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을 말할 때 성경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이런 실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상세하게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러 가지 사상들, 예를 들면 언약,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관한 사상들을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이어받는다. 기름부음에 관한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기름부음 사상도 구약의 기름부음 사상에 바탕을 둔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이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구약의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을 종합하는 개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중요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역시 기름부음 받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여러 차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행 11:26; 26;28; 벧전 4:16). 이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신자의 기름부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름부음에 관한 진술이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거는 매우 희소하다. 특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이 한 번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행 10:38).
이제 우리는 신약성경에 언급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과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예수의 기름부음과 신자의 기름부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의 기름부음
가장 먼저 예수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살펴보자. 예수의 기름부음은 네 구절에 언급된다 (눅 4:18 [사 61:1 인용]; 행 4:27; 행 10:38; 히 1:9 [시 45:8 인용]).
(눅 4:18) "주의 영이 내 위에 계시니, 왜냐하면 그가 내게 기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가 나를 보내어 사로잡힌 이들에게 자유를, 눈 먼 이들에게 다시 보는 것을 전파하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보내고, 주의 은혜로운 해를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私譯).
(행 4:27) "당신의 거룩한 종, 당신이 기름 부으신 예수를 반대하여 참으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역).
(행 10:36-38) "그가 만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전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보내신 도리(로고스)를, 곧 요한이 전파한 세례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다 전체에 이루어진 말씀(레마)을 너희가 아나니, 곧 나사렛 예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을 때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고 마귀에 의하여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사역).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 네 동료들보다 네게 기쁨의 기름을 부으셨다" (사역).
1) 기름부음 구절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네 구절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1) 공통점
이 네 구절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름을 붓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려있는 일이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일이다.
(2) 차이점
그런데 이 네 구절은 약간씩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행 4:27과 히 1:9를 살펴보자. 이 두 구절은 단순한 기름부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은 역시 조금 다른 면들을 보여준다. 행 4:27은 "당신이 기름부으셨다"는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에 비하여 히 1:9에는 "기쁨의 기름"이 기름부음의 재료로 언급된다. 물론 "기쁨의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제 눅 4:18과 행 10:38을 살펴보자. 이 두 구절에서는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눅 4:18은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기름부음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와 달리 행 10:38은 기름부음과 성령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이 구절은 성령을 기름부음의 재료 (또는 도구와 수단)로 진술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
2) 기름부음 구절의 해석과 의미
그러면 이 네 구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고찰해보자.
(1) 행 4:27
이 구절은 예수의 기름부음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이다 (행 3:26 참조).
둘째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가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대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는 이 대적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아무런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2) 히 1:9
이 구절은 시 45:8을 인용하고 있다. 시 45편은 왕의 즉위를 노래하는 시이다. 이 시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으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노래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기름을 붓는 것은 기쁨의 표시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기쁨의 대상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붓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는 이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의 전제는 진리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비교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다른 신분과 다른 위치에 놓인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새로운 신분과 위치를 얻는다. 기름부음과 함께 새로운 신분과 위치가 시작된다. 따라서 기름부음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이다.
(3) 눅 4:18
이 구절은 사 61:1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자기 의식이 보인다. 이사야는 이사야서를 거의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주의 양이 내 위에 계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글을 맺는 시간에 비로소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하심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던 때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사야는 성령의 임하심과 자신의 기름 받는 일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음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이사야는 예언을 마치는 지금 소명시에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을 기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사야는 자신의 사명을 소급적으로 확인한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신분이 변화되고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처음부터 성령이 임함으로 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는 벽두에서 바로 이사야의 이 글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구원사역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자기 의식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역의 처음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눅 3:22). 후에 사도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의 사역의 각 단계를 정리하여 주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사역의 처음을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 (행 10:38)고 증거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는 이 예언이 드디어 예수와 함께 실현되었음을 말씀하셨다. "오늘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 (눅 4:21).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은혜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려주신다. 인간의 악한 상황에 변화가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드디어 실현되고 있다. 무질서할 뿐 아니라 무질서한 줄도 모르며, 파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파괴되어 있는 줄로 모르고, 사로잡혀 있을 뿐 만 아니라 사로잡혀 있는 줄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예수께서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성령의 임함을 받은 자로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주실 수 있다. 이사야에게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의식이 예수에게서 더욱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사람들은 놀람으로 반응한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놀람으로 반응한다 (22). 예수께서는 은혜의 말씀을 전하시고 (22), 사람들은 의아함으로 반응하면서 예수를 거절하고 거역한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께서는 반대자들에게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성령의 기름부음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지, 예수의 사역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주의 영이 임하였을 때 이사야가 보내심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보내심을 받으셨다. 이제 성령의 임함을 받고,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가 행해야 할 일들이 열거된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상심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와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눅 4:18).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할 일들이 다방면으로 서술된다. 그의 활동은 인간의 근본적인 왜곡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는 영적인 일과 사회적인 일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능력이다.
(4) 행 10:38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행 10:36-38은 한 문장으로서 조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너희가 안다"(행 10:37)는 세 가지 목적격을 동격 (apposition)으로 취한다. 도리(로고스, 행 10:36), 말씀(레마, 행 10:37), 예수(행 10:38). 이 세 단어는 병용될 수 있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데 단지 관계점에 따라 다른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도리(로고스)는 대상과 관련된다. 도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되었다. 말씀(레마)는 지역과 관련된다. 말씀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땅은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는 주체와 관련된다. 예수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주께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예수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예수 사역의 첫째 국면을 알려준다. 이것은 아마도 세례를 의미할 수 있다.
행 10:38은 하나님께서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다"고 말한다. 성령과 능력이 나란히 언급된다. 이것은 두 가지 말로 기름부음의 두 양상을 말하는 것인지, 두 가지 말로 기름부음의 한 양상(Hendiadyoin)을 표현하는 것인지(성령의 능력이나 능력의 성령)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의 기름부음에 성령과 능력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무엇을 행하였는지 알려준다.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고 마귀에 의하여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여기에 좋은 일을 한 것과 마귀에 억눌린 사람을 고친 것이 분리되어 설명된다. 따라서 좋은 일을 행한 것은 마귀에 억눌린 사람을 고친 것과는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도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신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눅 4:14-15). 실제로 예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이적이 아니라 교훈이었다. 예수께 있어서 이적은 교훈을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교훈 없는 이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신자의 기름부음
이제 신자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살펴보자. 신자의 기름부음은 네 번 나온다 (고후 1:21, 요일 2:20,27[두 번]).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고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또한 그가 우리를 인치셨고 성령의 보증을 우리 마음에 주시느니라" (私譯).
(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이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으며 모든 것을 아느니라" (사역).
(요일 2:27) "너희가 그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머무느니라.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나 그의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치는 대로 그것은 참되며 거짓이 아니니라. 그리고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는 그 안에 머무느니라" (사역).
1) 기름부음 구절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공통점
이 네 번의 용례는 모두 기름부음의 주체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주체자가 분명하게 제시된다: 하나님(고후 1:21), 거룩하신 이(요일 2:20). 물론 요일 2:27도 기름부음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다. 신자에게 있어서도 기름부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2) 차이점
네 번의 용례는 과거형과 현재형에서 큰 차이를 이루고 있다. 신자의 기름부음이 과거적으로 이해되기도 하고(요일 2:20), 현재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고후 1:21; 요일 2:27). 이것은 신자의 기름부음이 과거적이기도 하며 현재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2) 기름부음 구절의 해석과 의미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의 기름부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구절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고후 1:21
이 구절에는 네 개의 동사가 나란히 사용된다: "견고하게 하다", "기름을 붓다", "인치다", "주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동사는 모두 하나님을 꾸미는 수식어이다(그리스어의 분사형). 그런데 이 동사들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한 가지 동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동작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과거형과 현재형을 섞어 사용한다.
여기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동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치다"라는 동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와 함께 사용된 "기름 붓다"라는 동사도 하나님의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에게 시초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체험이다. 모든 신자는 구원을 위한 첫째 체험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중생이나 칭의를 성령론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둘째로 중요한 것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동작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보증으로 준다"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따라서 이와 함께 사용된 "기름붓다"라는 동사는 성령을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은 성령의 보증이다. 성령의 보증은 부활에 관한 확신을 이룬다 (고후 5:1-7, 특히 5절!). 이런 의미에서 신자를 위한 성령의 기름부음은 능력시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부활확신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2) 요일 2:20,27
이 구절들에서는 기름부음이 오직 명사로만 사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되는 것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과 관련된다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인격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친다", 요일 2:27). 만일에 이 구절들이 기름부음을 성령과 관련시키고 있다면 그것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알며 (요일 2:20), 아무에게서도 배울 필요가 없다 (요일 2:27).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신자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치기 때문이다 (요일 2:27). 아마도 이것은 진리의 성령이 신자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요 14:26; 15:26; 16:13f.). 그러므로 이 구절들이 말하는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지식이라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론
이상과 같은 성경해석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수여되는 것이다.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것을 강요할 수 없다.
둘째로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특히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시초적인 성령체험이다. 신자들은 이것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신분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셋째로 이것은 반드시 능력을 결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결과로 영적이며(복음전파) 사회적이며(자유선포) 이적적인(치병)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능력이 뒤의 한 가지 능력보다 훨씬 강조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게다가 예수에게 나타났던 능력이 항상 신자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신자에게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결과로 부활확신과 진리지식이 주어지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사실상 부활확신과 진리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신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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