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뮬러- 5만번 기도 응답으로 고아원을 운영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기로 소문 난 인물은 5만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고아의 아버지'인 영국의 죠지뮬러이다.
죠지 뮬러(1805_1898년)는 프러시아인으로 크로펜스타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주머니를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던 그는 18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저녁기도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심하게 된다.
1835년 할레대학을 졸업한 그는 선교사로 영국으로 건너 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했다.
1898년 3월10일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그는 15만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했던 프랑케의 생애를 읽고 크게 감동받아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된다.
고아원 사역을 통해 그 자신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갈수 있기를 바랐으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며,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기꺼이 그리고 넉넉히 도우시는 분임을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다.
그는 성경연구와 고아원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물질적 필요와 개인적 삶의 필요를 단지 하나님 한 분께 아뢰고 응답 받음으로써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뮬러는 이러한 믿음과 기도로 63년 동안 750 만달러(한화로 약 30억원)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 준비된 것이라곤 선물받은 접시 3개, 쟁반 스물여덟게, 물병하나 , 컵 한 개, 소금병 받침 세 개, 칼 네 개와 포크 네 개, 채소를 깍는 강판 한 개뿐이었다.
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부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고, 특정한 부자에게 손을 내민 일도 없었다. 단지 순수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기도해 기도의 응답으로 매일 양식을 공급받았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뮬러는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했다.
또 기도할 때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 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 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뮬러가 얻은 신앙의 승리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우리는 “뮬러가 언제 시련을 겪을 때가 있었나” 하고 반문하기 쉽다. 또한 그가 받은 응답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5만번 이상이라고 함)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으로 오지 않아서 “언제 실망할 때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 지난 세월동안 조금씩 신장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여러 번 내가 근심걱정으로 내 정신이 아니게 되었을 뻔한 경우에도 나의 영혼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평온할 수 있었다."
1. 비행청소년에서 선교사로 결단하다
죠지뮐러는 1805년 독일 프로이센에서 한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는 출석했지만 술주정군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말썽꾸러기요, 종종 경찰에게 붙잡혀 교도소에 끌려 다니는 비행청소년이었습니다.
경찰들도 감당할수 없어 때론 몇번이고 그를 풀어주거나 심지어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죠지는 이성과 양심조차 없는 지존파나 막가파는 아니였습니다.
"도대체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왜 이런 못된일만 저질러대고 있을까?" 하며 남몰래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젖은 악습인 거짓말, 도둑질, 도박, 욕설등은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늘 빠져 들었습니다.
이때 한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쁜 버릇이란 하루 아침에 고칠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 번 당신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어요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죄와 싸워요.하는 소망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심령에 영접한 어린 죠지는 나쁜 행동을 하나씩 고치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새벽4시에 일어나 열심히 공부하고 틈만나면 조용한 시간에 자기의 신앙생활과 앞날의 일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비행청소년 죠지 뮐러는 거듭나 1824년 19살 되던해 할례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할례대학교는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된 곳이요, 많은 젊은이들이 학생복음운동을 통해 은혜받고 세계로 나가는 뜨거운 곳이었습니다.
이런 할례대학교에 그것도 신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죠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늘 썰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진실하게 말씀을 읽고 메시지를 듣고 기도하는 경건주의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비로서 자신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눈물로 기도할 때 그에게도 구원의 기쁨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 "나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넘실넘실 거리며 날아다는 것 같아"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구원의 감격으로 그는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써 하나님 역사에 드리고자 하는 영적소원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길을 가로막는 두 개의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름다운 여자 친구 엘머가르데였습니다.
엘머가르데는 "오 죠지 오늘 나 어때?" "무척 아름다워" "그런말 말고 있잖아?" "무슨말?"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응- 죠지?" 엘머가르데는 끊임없이 그에게 선교사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과 독일에서 비둘기처럼 아기자기하게 살자고 갖은 유혹을 다했습니다.
둘째는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비싼 돈여서 대학공부시켜놨더니 고작 하는 말이 선교사냐 네가 장남으로써 그게 할말이냐?" 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너 하나 믿고 살아온 애비의 심정도 이해해다고'하며 정에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마다 죠지 뮬러는 갈등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배 선교사의 도움으로 "두마음을 품고서는 하나님을 섬길수 없음"을 영접케 하고 하나님편에 서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장에 아버지로부터 올라오던 학비와 생활비가 끊기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졸라매던 엘머가르데도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이때부터 죠지뮐러의 위대한 기도의 삶이 시작케 되었습니다.
실제적인생활비와 학비문제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선교사로써 주님역사에 헌신하고자 합니다.그런데 저의 아버지는선교사가되는 것을 반대하여 모든 물질지원을 끊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써헌신하기 원하시는 주님 제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선교사로 헌신코자 하는 그의 절박한 물질문제를 즉시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음날로 아르바이트자리를 얻어 어려움없이 대학을 졸업케 도와주셨습니다.
2. 기도로 고아원의 아버지가 되다.
졸업후 죠지뮐러는 영국으로 건너가 선교협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데번항구에서 잠시 목회를 하다 .
1834년 봄 하님의 뜻을 따라 브리스톨로 이주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콜레라가 도시 전역을 휩쓸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콜레라가 지나간 브리스톨은 가난과 무지로 허덕였습니다.
무엇보다 먹지못하는 육체의 고통과 배우지 못하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신음하는 브리스톨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케 되었습니다.
처음 그는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음 그의 관심이 학교에서 고아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아들을 수용하고있는 구빈원의 실상은 아이들이 먹지못하여 해골처럼 말라있거나 병이 들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울다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기잔하여 쓰러져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습니다.
죠지뮐러는 구빈원의 아이들을 인해 제대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죠지뮐러는 이번에는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반대는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브리스톨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에게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볼 많은 물질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세우면 공부만 가르치면 되지만 고아원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부도가르쳐야 하므로 많은 물질이 필요한데 어디서 물질을 얻습니까?"
하며 그를 메몰차게 몰아세워 붙혔습니다.
특별히 헨리 크리익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주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리하게 기도한다면 분명 하나님을 놀리는 일이에요"
"현실을 보고 언제나 가능한 것만 선택해 기도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어요" 죠지뮐러는 고아원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오직 믿음으로 고아원을 개척했던 프랑케 전기를 읽고 용기를 다시금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고아원 설립을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의 아들이 가슴과 목에 유행성 염증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욱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 대신 고아들을 살려 그들을 내 자식처럼 키우고자 하는 결심이 더욱 간절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가운데 우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빈민가 브리스톨에 고아원이 세워지기를,주님이 원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고아원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아무래도 1천파운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빈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받아주신다면 반드시 필요한것들을 다 채워주시리가 믿습니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죠지뮐러는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81편 10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을 묵상하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엇습니다. 그는 말씀의 힘을 덧입어 혼자 조용히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해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고아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 마음가운데 불러 일으켜 주신 소원임을 믿습니다. 이소원을 이루어야 할 장본인은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직 당신의 종으로만 일할뿐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들을 주선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의 단을 쌓아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고아원 설립을 위해 바자화나 모금운동을 하자고 제안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이 맞는 일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원하는 사람들의 성금과 성물로만 이일을 하고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이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기도의 응답을 받기시작했습니다.
10파운드를 가져온 부인을 필두로 일생을 벌어 모은 100파운드의 돈을가져온 부인도 있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부엌용품, 큰대야, 주전자 음료수컵, 반찬 담는 그릇 등 많은 그릇과 용구들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가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기도로 고아원을 세운 후에는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의 딸을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네 아이 내 아이 구별해서는 안되며,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고아원이 세워진 후 5,6년동안은 그야말로 숱한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시련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죠지뮐러의 인내력은 더욱 견고케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줄 먹을것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으면 그 자리에서 때론 부엌바닥에서라도 죠지뮐러는 직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마치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자상하고 단순하고 간절하기만 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모든 굶주릴 형편입니다. 차리리 제가 굶는 일은 참을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굶주리는 일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여 우리 아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처럼 기도하는 사이에 누군가 10파운드를 들어찾아와 주고 갔습니다.
이처럼 죠지뮐러는 단순하게 고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도로 간구하여 받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 앉아 뮬러는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을 위한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기도로 고아원을 계속해서 성장시켜 애쉴리 다운가에 2000명의 고아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그를 가리켜 미친자라고 부르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죠지뮐러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 확신이 들었을 때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꿋꿋이 혼자라도 기도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기도만으로 누구도 상상치 못할 일들을 해 내었습니다.
뮐러는 이처럼 고아원을 운영한 65년동안 순간순간 기적적인 주님의 공급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었고 그 믿음은 늘 사실로 증명됐습니다.
애슐리 다운 고아원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뮬러가 헨리 크레이크와 함께 개척한 베데스다교회는 초대교회의 정신을 실천하는 ‘형제단 운동’으로 발전해 영국을 비롯,유럽 전역과 미국,호주 등에 퍼져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형제단 운동은 갖가지 종파로 분열된 현대교회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무려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기도의 큰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오직 기도로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한번도 굶기지 않고 먹인 죠지뮬러는 말년에
모든 것을 사위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세계각지를 돌며 자신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도 선교사로 살다가 88세에 그렇게 부르짖어 찾던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뮬러의 신앙에 큰 감명을 받은 사람 중에 허드슨 테일러가 있습니다.
말년에 유럽 전역과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등지로 복음을 전하러 다닌 뮐러의 모습을 보면서 허드슨 테일러도 오직 기도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중국 선교의 위대한 발걸음을 뗐습니다.
마태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 같이 되지 않으면 결간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세상에 때가 묻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처럼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린아이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부모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내 돈이나 내 능력을 의지하면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인 진리는 이 세상 진리와 정 반대입니다.
영적인 진리는 이 세상에서 버릴수록 채워지고, 약할수록 강해지며, 낮아질수록 높아지고, 죽을수록 살아납니다.
* 정말 위대한, 죠지 뮬러의 삶을 참으로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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