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과 신학 1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외

by 은총가득 2021. 2. 13.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창 1.1-3

들어가는 말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신학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증거로 사실을 논증하는 과학도 아닙니다.

신학은 전제와 추론과 귀결로 증명하는 논리도 아닙니다.

신학은 계시를 풀어내어, 죽은 문화와 사회에 생명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이 세상 학문의 결핍과 한계로 인해 죽어가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신학의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 1장 1-3절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지를 상고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경의 대전제입니다.

세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책도 이렇게 장엄하고 위엄있고 강렬하며 간략하게 전제를 선포하는 책은 없습니다.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 성경 읽기는 무지입니다.

무지한 성경 읽기는 무능하고 죽은 성경 읽기가 됩니다.

성경은 천지창조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지,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해야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선포할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대하 드라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타내러티브 (거대서사) 또는 거대담론이라고 합니다.

신화도 아니고 철학적 논고도 아니고, 과학적 서술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과학으로 풀려고 무진 노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헌신과 노력은 높이 살만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창조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근대성의 오만입니다.

 

단지 성경은 선포합니다. 계시입니다.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합리성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말씀하시는 분의 인격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성격과 메시지가 이 대전제에 다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따지거나 증명하려거나 규명하려는 전제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하실 구원자이시며 주권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따라서 진전한 개혁주의자들은 천지창조의 대전제를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을 탐구하였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느니라.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조건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땅이 혼돈하였습니다.

 

혼돈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는 형식이 없음, 혼동, 실체가 없음, 비어있음을 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가 없음 (사 40.17)으로도 표현됩니다.

형식은 틀입니다.

그릇입니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혼돈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혼동은 질서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땅이 공허 (합니다.

비어있습니다.

아무 것도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셋째로, 흑암 이 수면 위에 깊이 깔렸습니다.

흑암은 어둠 자체입니다.

 

 

이렇게 창조의 조건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의 땅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아무런 생명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혼동과 공허와 흑암은 사탄의 영역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언어들입니다.

사탄이 통치하는 곳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습니다.

사탄이 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창세 이전에 하늘에서 벌어진 영적 전투에서 사탄은 패배했습니다.

하늘에서 쫒겨난 사탄은 땅으로 와서 자신의 통치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계 12.7-9).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이러한 조건에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은 바로 이렇게 혼동이 있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창조의 활동을 하십니다.

 

3.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온 땅이 물로 뒤덮여 있습니다. 물이 땅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다와 같은 대양의 물은 그리 좋은 상징은 아닙니다.

사탄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다 (계 21.1)고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바다는 악의 원천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십니다.

운행한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새로 하늘 위에서 맴도는 행위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날개를 펴고 그냥 정찰하듯이 맴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날개짓을 하여 땅을 뒤덮고 있는 물을 다 걷어내고, 땅을 말리는 행동을 뜻합니다.

 

 

이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사건이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동풍이 불게하여 홍해의 물을 갈라지게 하고, 홍해 바닥을 유리바다처럼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도록 만듭니다.

유대 문학은 ‘동풍’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이 날개를 펴고 밤새도록 저으면서 물이 물러가도록 하였습니다.

땅이 다 말라서 이스라엘이 다 지나가록 만드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깔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독수리 날개친다는 표현은 홍해 사건에 활동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반향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31).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5).

또한 창조 때에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 때에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앙이 있는 곳에 역사를 하십니다.

이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4.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빛이 있었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재현할 수 있는 장면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표현 방식이요, 히브리식 표현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4).

예수님은 로고스이십니다.

로고스는 만물의 원리입니다.

창조의 원리이십니다.

로고스는 또한 구약의 토라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토라이십니다.

이 말씀이 창조에 활동하셔서, 빛을 비롯하여 천지 창조를 하셨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빛은 생명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오 생명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창조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땅을 뒤덮고 있는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혼돈한 땅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였습니다.

창조의 첫째 날부터 셋째 날은 이 작업을 하십니다.

공허한 땅을 채워 넣으셨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 사역은 먼저 만든 틀과 형식에 내용을 채워넣는 일이있습니다.

그리고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하시고, 어둠을 통제하셨습니다.

낮과 밤을 구별하셨습니다.

어둠도 창조의 원리에 따라 질서있게 작동하도록 하셨습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게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혼동과 공허와 어둠을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에 함께 역사하셨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마무리하면, 그냥 말씀을 확언하고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적 증명을 하거나 논리적인 추론을 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습니다.

꼭 필요할 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조 때 역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이 살아 활동하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성령을 고백하고 의하는 우리의 삶과 사역에 창의적인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혼돈이 있는 곳에, 창조의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천명하고 세워야 합니다.

공허함이 있는 곳을 채워나가야 합니다.

공허라는 말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피부에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이때에 그리스도인은 채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또한 흑암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 빛을 온 땅에 비추는 언덕 위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이방인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독수리 날개침과 같이,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악의 세력이 뒤덮고 있는 곳에 날개짓을 하며 악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땅에 생명을 주는 근원이자, 창의적인 사역의 원천입니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1)

 

 

본문: 요한복음 8장 31-32절 말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들어가는 말

저는 부산에서 자랄 때, 브니엘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브니엘 중학교의 교시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였습니다.

이에 따른 교훈도 있었습니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학급 종례 시간과 생활 지도 속에 뜻도 모르고 암기했지만, 이후 저의 생각과 생활에 드러나지 않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칫 이 말씀을 문맥과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식으로 읽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를 “~~~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억압과 폭력과 고통 등으로부터의 자유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은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하라고 하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는 “~~~을 향한 자유”라는 개념도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자유, 선교 할 수 있는 자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자유 등도 자유라는 말에는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 어떻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지를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자유가 무엇인지를 상고하겠습니다.

셋째, 어떻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지를 톺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마무리한 적용으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된 진리이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며, 그 근원에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확인하며, 생명을 알고, 생명을 낳고, 생명을 전하는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진리는 무엇입니까?

서구의 영향을 받은 상당수의 대학교는 학교의 상징으로 진리 (veritas)를 구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두거나 근대 철학적 개념으로 진리를 이해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궤변적입니다.

즉 논리에 근거한 진리입니다.

기껏해야 근대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주의적 진리관과 그 변종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러한 진리관과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내린 진리입니다.

 

 

진리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는 알레떼이아 (?λ?θεια)입니다.

여기서 어근을 이루는 λ?θη (레떼)는 망각 또는 은닉, 의식하지 못함, 무관심, 혼수상태 등을 나타냅니다.

레떼의 반대말이 알레떼이아, 즉 진리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또는 깨어남으로 이해합니다.

어쩌면 서구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입니다. 특

히 근대철학은 ‘존재 체험’을 완전히 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망각(lethe)’에서 벗어나(a) 그리스인들이 열었던 근원적 존재의 사유를 상기하는 것(aletheia)으로 진리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상고하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근원적 존재입니까?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민 16.22)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은 애초부터 진리에 대하여 말합니다.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선포하십니다 (요 14.6).

예수님은 하나님이 진리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자신을 통해 육을 가진 인간에게 드러내셨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철학책이나 다른 종교서적, 심지어 기독교 신앙서적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이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날 때에,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 14.17).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깨어나서, 진정한 깨달음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자유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 8.34-36.

그리스인들은 죄를 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배우지 않으면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고 하십니다.

 

 

죄는 짓는 자는 죄의 종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롬 6.23).

죄와 사망의 권세는 사탄에게 있습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탄의 수중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지닌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의 가치와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또한 자유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근원인 사탄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생명을 맛본 사람만이 생명을 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만이 자유가 있습니다.

공동묘지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죽은 문화, 죽은 사회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헛된 자유이고 몸부림일 뿐입니다.

 

셋째, 어떻게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에만 초점을 맞추면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를 빼먹으면 실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 함이라” (요 10.10)고 확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이십니다 (요 1.1).

말씀이신 예수님은 토라와 지혜와 예언이 몸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7).

 

 

이 말씀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듯이, 문자로된 책에 생기를 불어넣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리인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히 4.13).

이로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 하나님을 향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흠뻑 젖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조각조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까지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큰 강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소명과 삶의 방향을 찾고, 그 이야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에 참여하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죽은 문화와 역사를 써내려가는 사탄의 이야기가 아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영적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나가는 말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생명이시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는 자만이 생명을 전할 수 있고, 진리를 알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의 소명과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고,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진정한 제자입니다.

 


 

시편 147편: 찬양으로의 소환과 근거

 

 

본문

[첫 번째 찬송시: 1-6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두번째 찬송시: 7-11절]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세번째 찬송시: 12-20절]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주해

시편 147 편은 시편 (시편 146~150)을 마무리하는 일군의 영광송의 일부로서, YHWH를 찬양하는 찬송시입니다.

사실, 시편 147 편은 세 개의 찬송시의 조합입니다.

각 찬송시는 전통의 어느 시점에서 따로 전수되고 있었는 듯합니다.

 

첫 번째 찬양시 단락 (1-6절)은 찬양하라는 소환 (1a, b 절)과

"이는" 에 의해 소개 된 일련의 찬양 이유 (1c-6절)로 구성됩니다.

핵심 주장은 YHWH가 은혜롭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단락은 그 주장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시다로 번역된 용어는 아름다움에 취할 정도의 차원을 암시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이유 목록의 수사적 패턴은 다소 불규칙적이며, YHWH가 세 번 명명되었습니다 (2, 5, 6 절).

YHWH는 특징적으로 능동 동사의 주제이며, 시편은 YHWH의 반복되는 행동을 기념합니다.

 

 

3 절의 진술은 기원전 587 년 이후의 예루살렘의 간척과 예루살렘으로 추방된 사람들의 귀환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과 "낙담한" 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용어는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절에 비추어 볼 때, 이 용어는 기원전 6 세기에 추방 된 유대인을 더 많이 지칭합니다.

이들 용어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참조하여서 뒷받침되는 사회적 무대에서의 행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웨의 능력을 기념하는 5절의 찬사에서 절정에 이르는 크나 큰 주장입니다.

 

 

7-11 절의 두 번째 찬송시는 다시 찬양과 감사하라는 소환 명령 (7절)으로 시작하고, 찬양에 대한 일련의 이유들 (8-11절)이 이어집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전치사 "for"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8~9 절은 4절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0-11절의 수사적 변화는 군사력 (전쟁의 힘)과 YHWH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YHWH의 신적 능력을 두고 비판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변경되었습니다.

군사력과 YHWH의 충실성 사이의 대조는 시편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군사력은 예루살렘의 확립을 위해 계속되는 유혹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은 특히 이사야의 전통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 7:9; 30:15~17 참조).

이러한 시편 주제는 승리가 항상 강하고 민첩하게 행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시편은 역사적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막대한 무언가를 보증합니다.

결국에는 YHWH에게 그 공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슥 4 : 6; 잠 21 : 30 ~ 31 참조).

 

 

세 번째 찬송시 단락은 다시 '찬양하라'는 이중 소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처음으로 이중 호격을 사용합니다 (12 절).

그 다음에는“for”(13-20 절)에 의해 소개된 일련의 찬양 이유가 이어집니다.

이유 목록은 이스라엘에 대한 YHWH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특정한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관심을 표명합니다:

“당신의 문, 당신의 자녀, 당신의 국경”(13-14절).

그러나 15~17 절에서 이유의 목록은 더 넓은 지평으로 이동합니다.

창조자로서 YHWH의 강력한 능력을 기념하는 차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목록은 욥기 (욥 38~41장 참조)에 나오는 위대한 자기 칭송과 다르지 않습니다.

18절에서 초점은 YHWH의 말씀과 YHWH의 바람 (동풍)으로

이동합니다.

 

 

이 두 가지는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YHWH의 명령을 숙고하도록 만듭니다 (19-20 절).

따라서 시편은 창조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로 쉽게 이동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두 분야에서 모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0절의 매듭을 짓는 환호성은 단순히 12-20절이 아니라 전체 시편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입니다.

늘 그렇듯이, 이 시편은 우주적 주장과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쉽게 결합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에서 긴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편 자체에는 그러한 긴장감이 전혀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 모든 영역은 하나의 단일한 영역으로 다함께 묶어집니다.

이 영역을 YHWH는 신실한 절대 주권으로 주재하고 계십니다.

 

시편 147의 메시

시편 147-150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신앙의 구체성에서 점점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편 149 편은 이러한 경향에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다소 이상하고 뜻밖입니다.)

소환 (summons)과 근거 (basis)라는 두 가지 요소가 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근거는 점점 더 작아지는 경향을 띄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환이 거의 전체 찬양시를 주도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소환 명령이 전체 시편을 주도할 때까지, 근거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방향설정을 하는 (오래된) 시편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의 질서를 기념하지만, 그 질서가 긍휼과 정의라는 특정 행위 속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근거의 실종되고 있다는 것은 수사학적 발전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은 또한 "역사에서 벗어나서" 현재의 질서를 취하기 때문에 사회학적, 신학적으로 긴급하게 문제시되는 사안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상황을 창출한 구체적인 행위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질서를 절대화하고 항상 그렇게 그랬다고 상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근거는 확신과 감사의 근거를 제공 할뿐만 아니라 비판의 근거도 제공합니다.

 

 

소환하는 찬양이 근거로 인해 비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일들이 비판을 초월하여 절대화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판은 어떤 경우에라도 성전 찬송가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구체성의 상실의 과정은 시편 147편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하지만, 148편, 150편에서 훨씬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49편은 그러한 경향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1. 1-6 절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본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시편이 될 수 있습니다.

 

a) 찬양하라는 소환 명령이 있습니다.

이 소환명령에 이어서 1b절에서는 근거를 제시하는 "이는"으로 이어집니다.

 

b) 첫 번째 근거는 이스라엘의 해방 전통을 노래하는 2-3, 6 절에 있습니다.

3절은 사회적 동정심을 표현하는 행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6절은 희생을 당한 무기력한 사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2절은 포로 생활이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무언가를 넌지시 비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특정한 포로 생활을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포호 생활이 종결된 것을 야훼의 특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c) 4-5절은 이스라엘에서 알려진 야훼의 위대한 능력을 나열합니다.

창조의 전통과 해방의 기억은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모티프의 병렬 배치는 이 시편이 결코 홀로 있거나 맥락이 전혀 없이 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다른 주제를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예배 가운데서 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2. 7-11절의 두 번째 찬양시 단락은 비슷한 요소를 반복합니다.

찬양을 부르고 난 후, 늘상 등장하는 전치사는 없지만, 8절에서 근거가 시작됩니다.

근거는 주로 창조의 능력에 관한 것이지만, 최종적인 단어는 어쩌면 모세의 해방 전통을 넌지시 비추는 헤세드 입니다.

 

 

3. 12-20절의 세 번째 수사적 단락은 동일한 요소를 다룹니다.

소환 후 13절에서 전치사로 근거가 시작됩니다.

분사 형식으로 우리는 풍성한 창조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창조 행위를 낭송하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19-20절입니다.

이상하 방식으로 병치구조를 만들어 놓지만, 이스라엘을 독특한 택함을 받은 신분으로 지속적으로 참조하여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단락은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광범위한 우주적 주장을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적 연결성"이 계속 약화되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창조 요소들을 대체로 읊느라고 하루를 다 보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도 문맥에서 다른 요소가 이러한 점을 바로 잡을 것이지만, 그러한 약화는 여기에서 눈에 띄게 볼 수 있습니다.

 

   

삶에 정말 중요한  것

 

“John Green에게 할리우드 스타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John Green은 그럴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닙니다.

그는 An American in Paris와 West Side Story와 같은 영화로 아카데미 상을 5번 수상한 작곡가였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는 거의 잊혀졌지만,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상기시켜줍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란 파도가 당신의 모래성을 씻어내어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함게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할 작업이 정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불멸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개념에 어느 정도라도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John Green]

 

 

1.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 이다.

 

2.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느냐 이다.

 

3.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 이다.

 

4.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 이다.?

 

5.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여기느냐 이다.

 

6.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이다.

 

7.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이다.

 

 

 blog.naver.com/poong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