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과 신학 1

하나님의 이름 시리즈(15-16)/ 사도신경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by 은총가득 2021. 3. 2.
하나님의 이름과 사도신경


하나님의 이름(15) : 예수 그리스도 / 마 1:18-25

 

존 오트버그는 그의 저서 "이성을 넘어선 사랑"(Love beyond Reason)에서, 기독교 철학자 키엘케골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영광의 하나님이 유한하고 평범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진리를, 어느 농촌 소녀와의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소녀를 사랑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왕가의 혈통도 없었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그녀는 누더기같은 옷을 걸치고, 농촌의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왕은, 이 사랑의 마음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왕의 자문관들은 정 그렇다면 명령을 내려 그녀를 왕비로 삼으시라고 건의하였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왕으로서 그렇게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강요된 순종으로 얻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왕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참모는 그러면 그 소녀의 지위를 먼저 격상시켜,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하사하시어, 공주들이 입는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 오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녀가 정말 마음으로 왕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녀가 얻은 지위와 보석 때문에 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수 있는지가 왕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왕은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왕은 잠시 왕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농부가 되어, 그가 사랑하는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농부로 살며, 그녀가 입고 있는 동일한 누더기를 입고, 동일한 음식을 먹고, 동일한 오두막집에서 살아가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로 한 것입니다.’키엘케골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의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어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혼자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믿음 없인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무슨 신화나 꾸며낸 전설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믿어진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이적들이 있습니다. 그게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게 기적입니다. 아무리 믿으라고 총칼을 들이대도, 안 믿어지면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게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걸 보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간혹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고, 자기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갈라진 홍해를 마른 땅처럼 지나갔다고 성경대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홍해가 아닌 갈대숲을 지나갔다고 봅니다. 홍해의 히브리어는 ‘얌수프’로 ‘갈대바다’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애굽 군대가 갈대숲에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하’이런 일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처녀의 몸에서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람의 보기에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일상사에 불과합니다.



돌고래의 수영 솜씨는, 사람의 보기에는 신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돌고래에게 있어서는, 수영이 일상사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돌고래가 사람 정도밖에 수영을 못한다면 그게 기적입니다. 지렁이가 한 마리 죽어 있습니다. 죽은 지렁이를 발견한 개미들은, 그 맛있는 고기를 자기들의 아지트로 옮기고 싶어했습니다. 수십 마리가 달라붙었는데, 이 고기가 얼마나 무겁든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때 길을 지나가던 한 아이가, 개미들의 끙끙대는 광경이 하도 재미있어서, 막대기로 젓가락을 만들어 지렁이를 개미집으로 옮겨주었습니다. 개미에게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기적은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그게 별 일 아닙니다. 우리 머리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 자체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측량하겠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배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으로 완벽하게 파악되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야트막한 지식으로 깨달아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해의 영역에 속하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속한 분입니다. 먼저 믿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이해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고 믿습니다. 내 지식으로 이해될 때만 옳은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옳다고 믿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참 불행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면, 그것처럼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아멘” 하고 수긍할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이 사생아인가?’라고 맹랑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적상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주님은 사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런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계산하지 못하실 정도로, 머리가 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꼭 여자의 후손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자의 씨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셨다면, 주님 역시도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창세기 3:15 말씀은 거짓으로 판명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창 3: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이 대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친히 대속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에 있어서 제물이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위해 죽을 수 있겠습니까?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선, 죄 없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롬 3: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하나님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는데, 깨끗한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여야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완벽한 신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혼자 모든 일을 진행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동역하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대단한 여성입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될 만한 정말 훌륭한 여인입니다. 카톨릭에서와 같이 신처럼 추앙을 받아선 곤란하겠지만, 보통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여성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당시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구도 간음한 여인을 동정해 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아무리 설명한들, 누가 그걸 믿어주겠습니까? 마리아는 꼼짝없이 죽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아님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아니 자신의 생명마저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부끄럽고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를 받아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입게 될 상처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치료하기 힘든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것까지도 각오한 순종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여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지도 않게 하시고, 버림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나 몰라라’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풍랑을 맞기는 하나, 배가 침몰되지는 않게 하십니다. 비틀거리기는 하나, 아주 넘어지지는 않도록 도우십니다. 실수하기는 하나, 망하지는 않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는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그걸 믿음으로 순종한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주십니다.



19-20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코로나19가 빚은 가슴 아픈 소식들 가운데 하나는, ‘중학생 딸이 자가 격리를 위반한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라는 것입니다. 작년 9월 9일 부산에서, 코로나19로 함께 자가 격리 중이던 엄마와 딸이 말다툼했습니다. 화가 난 엄마는 밖으로 나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자가용에 머물렀습니다. 이에 딸은 아파트 문을 잠그고, 112에 전화를 걸어 주민이 자가 격리를 위반했다며 신고했습니다. 경찰과 자치단체 담당자가 아파트에 도착해 딸을 설득해 문을 열어, 엄마는 50분만에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에 대하여는 고의성이 없고, 주차장에 세워진 자가용에 머물렀다는 점을 고려하여 방역수칙을 잘 지키라고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엄마와 딸 사이에 어떤 다른 이야기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이런 딸이 법을 잘 지켰다고 칭찬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라면 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서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포장하는 대한민국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고, 그럼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어떤가요?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인은 아닙니다. 요셉은 법보다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인간적으로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에, 온 몸이 떨렸을 것입니다. 당장에 요절을 내도 시원하지 않을 일이, 자기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여인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니, 제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분통이 터졌습니다. 사랑한 만큼 믿었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만큼,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일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워낙 인생이 달린 문제라 요셉이 즉각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던 거 같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입니다. 자르기란 쉽습니다. 정리해 버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본래대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여간 어렵습니다.

 

 

어떨 땐 하나님이 좀 짓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이 오해하지 않도록,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미리 귀띔이라도 좀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네 아내를 통해 온 인류의 구세주가 태어나게 될 것이니, 네 아내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마음의 준비를 잘하고 있으렴!”이 정도의 말씀만 해주셨어도, 요셉이 그렇게 마음고생 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숨어 계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뒤돌아봐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발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곁을 떠난 줄 압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이때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절망하고, 믿음을 포기해 버립니다.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승리하게 됩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니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이름까지 갖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흔하디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예수와 구별하기 위해, 예수님이 자라난 동네 이름을 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인데,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이예수스’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의 여호수아의 이름이 ‘이예수스’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습니다. 호세아는 ‘구원, 구조’라는 뜻인데, 모세는 호세아를 보면서 여호수아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호세아라는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 모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분은 태어나실 때도 평범하다 못해 비참한 곳에 보금자리를 잡았었는데, 그 이름에서도 평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평범하지 않은 분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건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른 질그릇처럼 평범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다른 질그릇과는 질적으로 다른 점은 우리 안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후 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 안에 있는 보배는 예수입니다. 그리고 예수란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부를 때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 이름을 늘 불러야 하며,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이 뭉클해져야 합니다.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는 원수 마귀가 벌벌 떠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예수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막 13: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예수는 구원의 이름입니다. 막 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예수는 치유의 이름입니다. 요 16: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예수는 기도응답의 이름입니다.


찬송가 91장 3절입니다.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 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 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임을 압니까?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 10: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5: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 17:11절하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때 요엘서를 인용했습니다. 행 2: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요엘서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주”를 예수님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곧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22절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나실 것은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말씀입니다. 성경은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책인데, 한편으로는 참 신기한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에 몇백 년 전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저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이 예언을 들은 당시 사람들이, 이사야를 얼마나 우습게 여겼겠습니까? 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라”며, 빈정거렸을 것입니다. “나 참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구만”하고, 그를 실없는 사람 취급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했을까요? 선지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입에 담아준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선지자인 것입니다.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또한 예수님께는 별명이 있습니다. 오래전 선지자가 지은 별명, 임마누엘입니다. ‘임(im)은 함께, 마누(manu)는 우리와,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큼, 복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족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가정은, 결코 불행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운전대를 붙잡아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초행길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내 직장에, 내 일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지금은 어려워도 넉넉히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임마누엘의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4-25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분부대로 행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만히 끊고자 했지만, 이내 생각을 돌이켰고, 가서 자기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아내에게 해명을 듣고 나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완전히 이해가 돼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바보처럼 우직하게 순종했습니다. 자기 신세를 망칠 수도 있는 위기였지만 순종했습니다. 동네에서 바보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순종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와 평생을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데도 순종했습니다. 한 번 순종하는 것이, 순종하지 않고 열 번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순종하기 전까지는, 그리 갈등이 오고, 고민이 되고, 밤에 잠이 안 오고, 골이 지근지근 쑤시고 아프다가도, 눈 찔끔 감고 순종하고 나면, 진즉 순종할 걸 하고 후회합니다. 순종을 하면 크게 손해를 볼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도, 막상 순종하고 나면 왜 그리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위한 순종이 아니라, 나를 위한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 레신(Roy Lessin)이라는 분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글을 남긴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로이 레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가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사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업가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즐거움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것이다.’바로 그분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는 구원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치유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기도 응답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16) : 아도나이 / 시 16:1-11

 

예전에는 TV드라마가 길게 방영되었고, 시청률이 높으면 몇 회씩 더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일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드라마가 거의 16회로 끝납니다. 그것은 오래 방영할 때 오는 지루함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설교에서도 보통 주제설교를 할 때 8-12회가 적당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이름 설교도 16번째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마지막을 장식할까 하다가 중요한 이름 하나를 더 해서 16회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 현존(영원, 신실)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 창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나의 깃발이신 하나님.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카데쉬 : 거룩하신 하나님. 엘칸나 :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샬롬 : 평강,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로이 : 목자되신 하나님. 여호와 체바오트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치드케누 : 공의로운, 정의로운 하나님. 여호와 삼마 : 여기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구원자 하나님.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마지막 시간으로 ‘아도나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그날부터우리에게 주인이 생긴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또는 “주여”라고 부름으로써 그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중요한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게 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아도나이’입니다. ‘아도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6편을 통해서, 시편 기자가 어떤 의미에서 여호와를 자기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몬을 보면 ‘다윗의 믹담’이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믹담은 정확한 뜻을 몰라서 비슷한 단어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러 단어를 추측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의 기호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의 원 뜻은 ‘황금의 시’라고 합니다. 이 시가 매우 가치 있고, 금보다도, 순금보다도 더 귀중한 시로 평가하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입니다. 구약에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나아가 성도의 부활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귀중한 시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외우고 다 믿는다고 하여도 이 역사 속에서는 부분적으로 아는 겁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이천년 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을 이천년 동안 설교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지켜주시는 분이시기에 주께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습니까? 골리앗을 물리쳤지만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이방의 땅에서 미친 척 하여 살아남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럴 때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말씀하고 있지만, 겉으로 보면 전혀 도움을 받거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왕이 되어서도 환난이 많았던 삶인데도 이런 찬송을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불행이나 온갖 위협에서부터, 우리가 피할 곳은 주님 밖에 없다고 하며, 불행 가운데서 피난처로 주님을 갈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기에서 번역된 ‘주님’이라는 단어가 본래 히브리어 원문에는 ‘아도나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도나이’(Adonay)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 번역할 때는 주로 대문자 L, 그 다음에는 소문자 ord로 표기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읽다가 이런 단어가 나오면, 이것이 “아도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던 ‘여호와, 야훼’라는 말은 여호와로 그대로 쓸 수가 있지만, 때로는 ‘여호와’대신에 발음을 안 하기도 하고, 글자를 대신 바꿔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사용한 것이 대문자로만 된 ‘LORD’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호와’를 때때로 ‘아도나이’로 다르게 부르기도 하는데, 왜 ‘아도나이’라고 할 때는 L만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쓰는가요? 이것은 ‘아도나이’라는 단어가 주로 하나님께 쓰여지지만, 때로는 사람을 의미할 때도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아도나이’란 단어의 헬라어 번역인 ‘퀴리오스’를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이 ‘주’를 뜻하는 ‘퀴리오스’란 단어는 ‘아도나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일반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했고, 주인, 아버지, 임자, 선생 등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가령, 노예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향해서 “주인님”이라고 부를 때 ‘아돈’또는 ‘아도나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모두 340번 정도 등장하는데, 본래 ‘아도나이’(Adonay)라는 단어의 뿌리는 ‘아돈’(Adon)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돈’은 단수형이고, ‘아도나이’는 복수형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성경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 ‘엘’과 ‘엘로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은 단수형이고, ‘엘로힘’은 복수형입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 복수로 표현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존경하는 훌륭한 분을 지칭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복수일 때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 또는 그의 영광스럽고 존귀하심을 나타낼 때, 복수형인 엘로힘으로 부르는 것처럼, 동일한 의미에서 ‘아도나이’라는 복수형을 쓴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위대한 주인이심과 함께, 그분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의 인생을 지배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중요한 문제를 놓고 결정할 때 누가 결정을 합니까? 그 결정에 누가 지대한 영향력을 미칩니까? 그가 바로 여러분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 없이 그냥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아도나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해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 나를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도나이’라는 이 단어는 우리 인생을 향해서, 절대적인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의 절대적 주재권을 의미하는데 쓰여지는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로서 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정부의 경제고문을 지냈던 분으로써, 우리 시대를 향해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화두를 던진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가운데 “A Life In Our Times, 우리 시대의 한 삶(김영사)”이라는 책에는 자신의 집에 고용했던 ‘에밀리 윌슨’이라는 가정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아주 급한 일로 갤브레이스 교수의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에밀리라는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기는 백악관이요. 급한 일로 교수와 통화할 일이 있으니 교수를 바꿔 주세요.” 이때 여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바꿔드릴 수가 없습니다.”대통령은 격앙된 말투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이요. 급한 일이요. 당장 깨우시오.” 에밀리는 다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의 주인은 겔브레이스 교수님이시고, 저는 그를 위해 일하도록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끝내 그녀는 대통령의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존슨 대통령은 갤브레이스 교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네, 가정부 참 잘 두었더구먼. 그를 만나거든 내 이야기를 꼭 전해 주게. 내가 그 여인을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다고.”그 여인은 정확하게 자기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도나이 하나님은 행복의 주인이십니다.본문에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행복을 열망하겠지만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열망은 아주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단어 앞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이것은 특별히 한국 사람들이 불행한 역사의 질곡을 살아왔기 때문에 더욱 더 ‘행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엊그제가 설날이었는데, 우리는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로 새해를 엽니다. 옛날에 우리가 대문을 열고 닫고 하던 시절에는 새해가 되면 대문에다가 “개문만복래”라는 큰 글자를 썼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는 소망을 가지고 대문을 열고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언어 속에는 아직도 ‘복’이라는 단어들이 많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이 들어온다, 복이 나간다. 복이 통째로 굴러온다,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다. 복을 타고 난다, 복 터진다, 저 사람은 복스럽게 생겼다.” 우리가 이런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합니까? 아직도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복이라는 단어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복덕방”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권, 복주머니, 복덩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에 ‘복’자를 써서 행복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나타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갓 태어나는 순간부터 강보에다가 복, 벽에도 복, 그릇에도 복, 수저에도 복, 소반에도 복, 상에도 복을 새겨놓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복에 대한 한 맺힌 열망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기에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 밖에 나의 복이 없고, 주 밖에 하늘과 땅에서 사모할 이가 없다는 말은 쉽게 쓰인 시가 아닙니다. 죽음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세상이 해석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후에 나오는 고백이,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이 복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 왕을 향하여 자신은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자인데 쫓아오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왕이 되어 평안하여 졌을 때에는, 이방나라의 왕처럼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처럼 생각하여 간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자신이 모태로부터 죄인임을 알고 회개합니다. 그 죄가 용서 받았을 때에 다윗은 주 밖에 나의 선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시켜주었기에 주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고백입니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 안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느끼는 정겨운 행복감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 깊은 정감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존귀한 자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대에게 있소. 그대는 나의 존귀한 자요 나의 모든 즐거움은 그대에게 있습니다.”이 내용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행복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이 말은 다윗의 말이지만, 다윗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말을 하였기에, 그리스도의 말이기도 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자기의 죄가 용서 받았기에, ‘주 외에 나의 복이 없고 주 외에 사모할 이가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린 양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그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며 즐거워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이 존귀한 이유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아도나이 하나님은 예배의 주인이십니다.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지음 받은 이들로 하여금 지어주신 그분을 경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예배의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경배할 대상을 만들어서라도 그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를 보던지 그 문화의 흔적 속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예배한 흔적이 없는 문화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가짜 우상을 만들어서라도 섬깁니다. 아니 연예인 한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서라도 그를 경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청소년들의 본능 속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우상숭배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가시적인 이런 짐승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우상은 더욱 간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처럼, 또는 하나님 이상으로 집착하는 모든 것, 또 하나님 이상으로 사랑하고 싶은 모든 것, 실상 그 모든 것이 바로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스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 고집이나 주장이나 심지어는 내가 집착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의 각주를 보면 ‘다른 신을 좇아(따르며) 사는’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고, 다른 신을 따르며 사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않고, 내 입술로는 그 이름도 부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죄인이라서 간음하고 살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온갖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형벌을 주셔서라도 돌이켜 주십니다.

 

5~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아도나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바로 여러분의 평생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무엇이 자신의 복인지 알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방패와 상급임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듯이, 다윗에게도 알려주십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실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자기들의 공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앞장서서 싸우셨기에 차지한 땅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 땅의 이야기로 그치면 문자적인 해석이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며 분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7~11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본문은 베드로 사도의 해석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행 2:22~24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기 제자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시편 16편의 본문으로 증거 합니다. 행 2:25~28절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본문 7~11절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행 2:29~32절을 보면 다윗이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고 이 시편을 기록하였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어서 행 2:33~36절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 복음선포 앞에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하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때로는 자기의 생명까지 드렸던 피 흘림의 발자취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왔던 시대가 있다면 아마도 A.D 90년대에서 300년대까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지로 삼고 통치하던 그 시절에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가이사로, 그리고 신으로 승격시키고 소위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그런 시절입니다. 로마의 시민이 된 정복지의 사람들은 이제 그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를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 되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로마의 시민 두 사람이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이런 인사를 의례적으로 주고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그러면 상대방이 이렇게 인사를 받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가이사이십니다.”그런데 이따금씩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인사를 받습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바로 이 고백 때문에 그는 체포되어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끌려가서 야수들의 밥으로 사라졌습니다. 더러는 형장으로 끌려가 칼날에 이슬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고, 예배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도나이 하나님, 그분은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아도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에서 최초로 불려진 것이 창 15:2절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여기에서 ‘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에서 ‘아도나이’입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종관계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종의 운명이 비참한 것은 아닙니다. 노예나 종은 고용된 하인보다 훨씬 살기가 편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그를 전적으로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종의 필요를 공급해 주고, 보호해 주며, 심지어는 매일의 일과를 지시해 주는 것도 주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히브리의 종들은 가족의 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방패와 상급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바로 이 세상의 ‘아도나이’주인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쉽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인 되시며,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살아가십니까? 솔직히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삶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로 하여금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이름이 ‘아도나이’입니다. 4:10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아도나이!”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을 향해 “주여”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도나이로서 믿었지만 복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아도나이는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로서의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지음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은 아도나이이십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아도나이가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듣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며,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더구나 ‘주여’라는 호칭이 두 번이나 거듭 사용되는 것은 그가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입술로 ‘주여’라고 고백하고 열정적으로 종교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도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를 주인 되신 그분께 내어드리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초청하면 그분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데, 그는 내 마음속에 손님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주인으로 들어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제부터 내 마음의 모든 방들과 모든 영역들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또는 모든 것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알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주인이신 아도나이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행복의 주인, 예배의 주인, 그리고 평생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되신 하나님만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넘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신경(1)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히 11:6, 엡 2:8-9

 

히 11: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엡 2: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물론 바른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합니다만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 따라와야 할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명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믿음이 가져오는 해악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명한 대상, 그리고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를 압축해 놓은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성경의 내용을 압축하여 줄인 ‘엑기스’와 같은 것입니다. 비유하면 우리 신체의 골격과 같습니다. 우리 신체에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만 그 근본은 골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다양한 모습을 한 교파들이 존재합니다. 크게는 카톨릭과 개신교, 개신교 안에서는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의 다양한 교파가 존재합니다. 특정한 교리를 강조하고, 서로 다른 예배 형식과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한 뼈대(골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사도신경을 핵심적인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양하지만 일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의 공동의 믿음을 함께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동시에 우리 성도들 서로 간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신앙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주체는 ‘나’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입술로 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안경점 광고가 히트를 쳤답니다. “나는 안경 밖에 몰라요.”이 광고가 그 해 전 미국에서 광고대상을 받았답니다. 안경 밖에 모르는 안경점 주인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작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교회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16번 강해를 했고, 이제 오늘부터 연속으로 ‘사도신경’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코로나19 상황이 계속 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더 가면, 상당수의 교회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 대사회적인 이미지 높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그런데 몇몇 치우친 교회들로 인해, 교회 이미지가 밑도 끝도 없이 추락했습니다. 그들은 목사인 내가 봐도 화가 나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교회 비판적인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집단,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집단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요즘 들어 어디 가서 목사라고 말 하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목사님”하면,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 먼저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내적으로도 모여 드리는 예배가 정상인데, 모이는 예배가 강행으로 비춰지고, 마치 모이지 않고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상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영상 예배에 답답하고, 뭐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이 됩니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합니다. 시간도 아끼고, 헌금도 적게 해도 됩니다.

 

우리 몸은 편리함에 금방 적응합니다. 코로나19가 종식돼도, 예전처럼 교회 생활하는 게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코로나19가 통제 가능한 상황이 와도, 한 번 식어버린 교회를 향한 싸늘한 시선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뀔 거 같지도 않습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걸 기회로 삼아, 기독교 정체성을 강화하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사도신경에서 듣고자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곧 내면의 강화는, 사역보다 외연의 확장보다 중요합니다. 내면의 강화는 뼈대를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면의 강화는 기본기를 다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 골프의 전설 박세리는, 슬럼프가 왔을 때 골프채 잡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합니다.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회복하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화려한 기술을 버리고, 겉멋부리는 것을 버리고,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아무리 대단한 건물도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마 7:26-27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지금은 교회의 기초를 튼튼하게 할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든든하게 세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특히 현대 설교에서는 재미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도 사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데 교리나 신조를 다루는 설교는, 재미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 강해를 준비하는 몇 주간이, 걱정과 씨름합니다. 공부하는 자세로 집중하여 들으면, 신앙에 큰 유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21세기 사도신경 해설’이라는 책에 몽고제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세기 초 빈민출신이었던 징기스칸이 집권하면서, 중국대륙에는 몽고제국, 곧 원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징기스칸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통해, 역사상 그 어떤 제국보다도 크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제국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전 지구의 1/4에 달하는 지역이, 이 제국의 관할권에 들어간 일도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이, 그 광대한 크기에 있어서 비교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이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징기스칸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고, 군목제도까지 도입하여, 어떤 병영에는 약 800개에 달하는 이동 예배 처소까지 두었습니다. 징기스칸 휘하의 장군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징기스칸의 아들들 가운데도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가 몽고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전파되어서, 원나라가 기독교국가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징기스칸의 손자대인 3대째 왕인 구육왕에 이르러서는, 왕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왕 자신도 신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총리와 두 명의 고위관리도 기독교인이었고, 서방에서 열렸던 공의회와 비슷한 신학토론회의도 개최되었습니다. 구육왕이 집권하면서, 잔인한 살육정복전쟁이 중지되었는데, 이것은 구육왕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구육왕은 기독교 원리를 제국정부에 도입하려고 시도했으며, 수많은 신학교와 교회가 제국 전역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육왕은 6년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고 난 후 죽고 맙니다. 구육왕의 아들인 망구왕은 구육왕 만큼 신실한 기독교인이며, 그의 어머니가 또한 기독교인입니다. 이런 사정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전무후무할 정도로 융성했던 몽고제국의 기독교가, 몽고제국이 채 망하기도 전에, 제국전역에서 전멸해 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쇠퇴해 버렸고, 그 이후에는 몽고제국에 과연 기독교가 전래된 일이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몽고제국 후기에 이르러서 회교제국인 사라센 제국이 세력을 얻으면서, 잔인하게 기독교를 궤멸하기 시작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몽고제국 번방에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회교의 잔인한 살육을 견뎌내지 못하고, 회교로 개종했습니다. 게다가 타메르레인이라는 아주 잔인하고 천재적인 군사전략가가, 몽고제국의 왕으로 집권하게 되었는데, 타메르레인은 회교로 개종한 뒤, 기독교 세력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조직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타메르레인은 제국 내의 수천 개의 도시들을 습격하여, 도시마다 수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내서 죽였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 전 세계적으로 흑사병이 돌아서, 유럽에서는 약 2,500만 명이 죽고, 아시아에서 3,700만 명이 죽는 사건도 겹쳤습니다. 그런데 몽고의 기독교가 궤멸당하고 만 이면에는, 이같은 외적인 정치적이고 자연적인 재난보다, 더 중요한 내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몽고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교리에 대하여 너무나 미온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입니다.

 

몽고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동방기독교인 경교였는데, 경교는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에 의하여 시작된 기독교의 한 분파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은, 서로 상관이 없는 두 개의 자질이라고 했습니다. 경교는 교리에 대하여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경교가 몽고제국에 들어왔을 때, 이들은 불교와 교리적으로 타협했습니다. 이들은 불교 교리와 별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강조한 반면, 불교 교리와는 양립할 수 없는 속죄 교리라든가, 예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다든가, 우리의 죄 때문에 내어준 바 되셨다는 것과 같은, 구원 교리의 핵심을 삭제시켜 버렸습니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 교리와, 죽음을 핵심으로 하는 구원 교리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몽고제국의 기독교는, 불교 교리와 비슷한 종교가 되고 말았고, 교회에 고난이 밀어닥쳤을 때, 고난을 이겨낼 교리적 근거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난이 찾아 들었을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슷한 교리를 가르치는 불교사원으로 피신하여, 불교도로 쉽게 개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몽고제국의 기독교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쉽게 무너져버린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몽고제국의 기독교가 몰락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교리에 무식하고 무관심하게 되면, 교회가 정말로 고난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쉽게 타협하고 흔들리게 될 것이며, 도대체 기독교인지 무당종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기독교가 선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교리의 기본적인 핵심을 요약해주고, 동방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대다수의 교파들이 수용하는 사도신경을 살펴보는 것은,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에 대한 서론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도신경에 대해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사도신경이라고 하니까 사도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15세기까지는 열두 사도가 한 구절씩 제출하여 작성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그 전설을 믿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깔뱅(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도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초창기, 곧 사도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곧 우리 믿음의 역사 전체가 사도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2. 사도신경이 처음부터 신앙고백서로 작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2-3세기 초대 교회의 세례문답 본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의 히폴리투스 감독이 주후 215년에 라틴어로 발간한 책에, 로마의 초대교회의 세례문답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집례자 :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입교자 : 예, 믿습니다.

집례자 :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 빌라도 통치 하에 못 박혀 돌아가 묻히시고, 셋째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입교자 : 예, 믿습니다.

집례자 : 그대는 거룩한 교회의 성령과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입교자 : 예,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세례신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현재의 본문은 9세기 초에 완성되었습니다.

 

3. 사도신경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갈 때까지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고백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교수님한테서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니고 신앙고백이니까, 눈을 뜨고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주로 눈을 뜨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경배, 감사, 죄의 고백, 간구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세례받는 사람이, 세례 주는 목사와,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나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나는 성령님과 교회와 성도의 교제, 사죄와 부활, 영생을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한테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3인칭대명사인 “그”로 표현한 것이 그렇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을 지칭할 때도 3인칭 대명사 “그”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신앙의 대상과 신앙고백의 대상을 헷갈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신앙고백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4. 사도신경이 예배순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배의 필수요소는 아닙니다. 교회소식이 꼭 예배 순서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는, 성찬이나 세례가 있을 때, 사도신경을 넣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건 예배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식 행위로 넣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내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성찬이 없는 예배에서는, 설교 다음에 넣는 것이 가장 좋다고 예배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니면 예배 시작 전에, 공동체의 고백으로서, 또는 입교선서의 재연으로서 할 수 있습니다.

 

5. 모든 교파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침례교단은 신조의 내용이 성경에 들어 있으니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이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만든 기독교 기본 교리라고 하지만, 아무리 잘 요약해도 모든 교파가 만장일치로 채택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어 이상하네, 이단 아니야?’ 하고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됩니다.

 

6. 신앙고백서가 사도신경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신경 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가 있습니다. 교단 헌법책에 실린 것을 인용하겠습니다.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같은 분으로, 낳음과 지음 받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 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고 묻히셨으나, 성경의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세계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는 한 세례를 믿습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오고 있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이건 주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채택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니케아신조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 신학자는 “길어서 처음부터 보급이 안 되었다”며, “평신도들이 예배 시간에 암송하게 하려면 짧아야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조는 고대신조와 종교개혁 신앙고백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대신조는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등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신앙고백서는 제네바 교리문답서(1542), 프랑스 신앙고백서(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1566), 도르트 신조(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등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역시 신앙고백서를 갖고 있습니다.이름하여 ‘장로교 12개 신조’입니다.

<장로교 12개 신조>

1.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입니다.

2.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 오직 그분만 경배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시니 자연히 계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다른 신 또는 모든 물질과 구별되시며, 그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심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무궁하시어 변치 아니하십니다.

3. 하나님은 본체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신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하나이시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이십니다.

4. 하나님께서 모든 유형물과 무형물을 그 권능의 말씀으로 창조하셔서 보존하시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내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뜻의 계획대로 행하시며, 만유가 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롭고 거룩하신 목적을 성취하도록 역사하십니다.

5.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셔서, 생물을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근원에서 태어난즉 다 동포 형제입니다.

6. 우리의 시조가 선악 간에 택할 자유능이 있었는데,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간들이, 그의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되어 타락하였으니, 사람이 그 원죄 및 부패한 성품 외에 범죄할 능이 있는 자가 되어 일부러 짓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7. 하나님께서 인생을 무한히 사랑하심으로, 그 죄와 부패함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하여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분으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셨고, 또 그분을 통하여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영원하신 아들이 참 사람이 되시어, 그 후부터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으니,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십니다. 성신의 권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셨으니,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시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그리로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재림하십니다.

8.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오신 성신께서 인간을 구원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권하시며 권능을 주셔서, 복음에 값없이 주마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하시며, 또 그 안에서 역사하셔서 모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9.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셔서 사랑하심으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저희를 미리 작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저희에게 후하게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는, 온전한 구원을 값없이 주려고 하여 명하시기를, 너희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여 본받으며,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복종하여 겸손하고 거룩하게 행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받은 바 특별한 유익은 의가 있게하심과, 양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수에 참여하게 하심과, 성신의 감화로 거룩하게 하심과 영원한 영광이니,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구원 얻는 줄을 확실히 알 수 있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신께서 은혜의 직분을 행하실 때에 은혜 베푸시는 방도는, 특별히 성경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씻는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병합하는 표적과 인침이신데, 성신으로 거듭남과 새롭게 하심과 주께 속한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자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떡과 잔에 참예하는 것이니, 이는 믿는 자가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유익을 받는 것을 인쳐 증거하는 표인데, 이 예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백성이 행할지니, 주를 믿고 그 속죄제를 의지함과, 거기서 좇아나는 유익 받음과 더욱 주를 섬기기로 언약함과, 주와 여러 교우로 더불어 교통하는 표입니다. 성례의 유익은 성례 자체의 덕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성례를 베푸는 자의 덕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믿음으로써, 성례를 받는 자 가운데 계신 성령의 행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11. 모든 신자의 본분은 입교하여 서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성례와 기타 법례를 지키며, 주의 법에 복종하고 항상 기도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주를 경배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주의 말씀으로 설교함을 자세히 들으며, 하나님께서 저희로 하여금 풍성하게 하심을 좇아 헌금하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서로 표현하며, 또한 일반 인류에게도 그와 같이 할 것이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되기 위하여 힘쓰며, 주께서 영광 가운데서 나타나심을 바라고 기다릴 것입니다.

12. 죽은 자가 마지막 날에 부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판하시는 보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선악간 행한 바를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한 자는 현저히 사함을 얻고, 영광중에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정죄함을 입어, 그 죄에 적당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승인고백사’

나는 이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것으로 믿으며, 이를 또한 나 개인의 신조로 공포합니다.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99년도에 진안에서 수요예배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교리나 신조를 강해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 점에 이해를 구합니다. 평소에는 전혀 안 쓰는 용어로 설교하는 목사도 힘들고,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 성도도 힘들 거 같긴 합니다. 몇 주간 딱딱한 음식 먹을 걸 각오하기를 바랍니다. 빵으로 치면 바게뜨 빵 먹는다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고기를 먹을 때 힘줄 있는 것을 같이 먹는다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7. 끝으로 사도신경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2.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크게 보면 뼈대가 세 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도신경의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부 : 하나님의 천지 창조, 성자 :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과 재림, 성령 : 성령의 역사

이단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기에, 삼위일체를 근간으로 하는 사도신경도 고백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를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갖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은 구별되지만, 능력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걸 이성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성경 자체가 삼위일체를 증거하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종교개혁자 깔뱅은 대표작인 ‘기독교강요’를 저술할 때, 1권 성부, 2권 성자, 3권 성령, 4권 교회로,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조직신학에서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으로 좀 더 구체화를 시킨다. 교회론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에서, 구원론은 ‘죄를 용서받는 것과’에서, 종말론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에서 나왔습니다. 사도신경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 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온, 기독교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의 사도신경은 번역에 차이가 있지 우리와 같은 내용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동시에 사도신경은 나(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백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형식적인 고백이 아닌, 마음을 담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이 아닌, 교회 밖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2.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고백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입니다. 물질의 유혹 앞에서 꿈적하지 않고, 인생의 풍랑에 요동하지 않으며, 마침내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게 하옵소서. 그 믿음으로써 이 땅을 천국처럼 살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작성자: 주만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