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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성서 시대 생활 풍습 - 옷에 대한 이야기

by 은총가득 2021. 3. 6.

성서시대 - 생활 풍습 이야기

 

1. 성서시대에는 무엇으로 옷을 만들었을까?

 

1. 옷감을 만드는 재료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레19:1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2:9-11)

 

율법은 양털과 베실이 혼합된 옷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합성섬유로 된 옷이나 이종교배의 유전자 조작 등이 모두 금지사항이 된다.

 

율법은 왜 ‘혼합’을 금지했을까?

 

레위기와 신명기의 본문 말씀들은 ‘혼합’에 대한 금지 명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종류의 동물을 상호 교잡하는 것, 두 종류의 식물을 상호 교배하는 것, 두 종류의 재료로 직조한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 등 모두 ‘혼합’(heterogeneousness)에 대한 철저한 금기를 다루고 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설득력 있는 학자들의 제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기 다른 부류의 피조물을 존중하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각기 종류대로’만드셨는데, 이것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함부로 섞는 것은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1-12)

 

둘째, 특정한 혼합은 신성한 용도만을 위해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양털과 베실을 섞은 것은 성막과 대제사장의 겉옷에만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백성은 두 가지 천을 혼용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금지했다는 것이다.

 

셋째, 혼합은 고대 근동의 이교적인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는데, 이러한 혼합을 철저하게 금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고 순수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구별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옷감을 만드는 재료들

 

양털과 양털 깎는 축제일

 

양털은 이스라엘 경제에서 매우 중요했는데, 양을 키우는 주된 목적역시 고기보다는 양털과 우유를 얻는데 있었다. 이스라엘의 동쪽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양털, 서쪽에 위치한 이집트 지방은 세마포가 옷감의 주된 원료였다.

 

양털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국가 간 중요한 조공물 중 하나였는데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속국으로 전락한 모압 왕 메사는 매년 아합 왕에게 양털을 조공으로 바쳤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왕하3:4)

 

세마포와 꺼져 가는 심지

 

세마포(linen)는 아마(flax)의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였다. 이집트 산이 최고의 상품으로 간주되었다. 이집트 왕인 바로의 시체는 부패를 방지하는 미이라 처리를 한 후 엄청난 양의 세마포 천으로 싸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세마포 천으로 시체를 싸는 풍습은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는데, 예수님의 시체도 세마포로 쌌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40)

 

나일강 강변에서 자라는 아마 줄기로 만든 세마포는 이집트가 자랑하는 최고의 특산품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그 하나하나가 이집트가 섬기던 신들과 이집트를 대표하는 것들과 관련되었다.

 

우박재앙으로 인해 나일 강변에서 자라던 아마(삼)의 꽃, 즉 이집트의 자랑이요 프라이드가 치명상을 입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출9:31-32)

 

이사야 선지자는 나일강이 줄어들면서 그 주변에서 자라는 아마를 이용해 세마포 천을 만드는 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을 경고하면서 이집트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사19:6)

 

세마포를 만드는 자와 베 짜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며 그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사19:9-10)

 

비록 이집트산과 같은 최상품은 아니어도 이스라엘에서도 아마 재배가 이루어졌다. 사시사철 따뜻한 여리고를 중심으로 아마를 재배했는데, 처음에는 아마시를 짜서 얻는 기름이 아마를 재배하는 주된 목적이었다. 이후 아마 줄기에서 섬유(fiber)를 얻어 세마포 천을 만드는 것이 보편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지붕에서 아마의 줄기를 말렸다.

 

여호수아의 명령으로 여리고에 침투한 두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 성벽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했다가 급습한 수비대를 피해 라합의 지붕 위에서 말리고 있던 ‘삼대(아마의 줄기)속에 숨었다.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수2:6)

 

아마의 줄기는 말려서 세마포 천으로 사용하는데, 긴 섬유(fiber)는 실로 만들고 부러지거나 짧은 아마의 섬유는 올리브 램프의 심지로 사용했다.

 

이사야가 언급한 ‘꺼져가는 등불’에서 ‘등불’은 히브리어로 ‘피슈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 섬유를 가리킨다. 또한 마태가 언급한 ‘꺼져가는 심지’에서 ‘심지’는 헬라어로 ‘리논’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아마 섬유를 걸쳐 아마 섬유는 올리브 램프의 심지로 사용된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실뽑기와 옷감 짜는 베틀

 

실뽑기

 

실뽑기(spinning)는 집 안에서 여자들이 하던 일이었다. 사용되는 재료에는 양털, 염소털, 아마 등이 있었는데 가장 수월한 재료는 아마였다.

 

성막 안의 수많은 휘장(curtain)에 쓰일 다양한 색깔의 실을 만드는 데도 여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출35:25-26)

 

 

실을 뽑기 위해서는 실톳대(distaff)와 가락(spindle)이 필요했다.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잠31:19)

삼손과 들릴라의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베틀

 

이스라엘에서 소렉 골짜기에 있는 ‘딤나’는 옷감 짜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천하장사 삼손을 유혹한 소렉 골짜기 출신의 들릴라 이야기에도 옷감 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삿16:4)

 

들릴라는 블레셋 쪽에 매수되어 삼손의 힘을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을 캐내기 시작한다. 삼손의 자신의 머리카락 7개를 날실에 섞어서 짜면 자신에게 있는 초능력의 힘이 바질 것이라고 둘러댔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삿16:13)

 

잠자고 있는 삼손의 긴 머리카락을 베틀의 촘촘한 날줄 사이로 씨줄과 함께 섞어서 짜는 일은 들릴라에게는 쉬운 것이었다.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삿16:14)

히스기야와 베틀 실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덤으로 15년을 선물로 받았다. 병이 낫고 난 후 인생의 마침을 베틀에서 옷감을 짜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죽음을 베틀에서 옷감을 다 짜고 난 후에 옷감과 베틀을 연결했던 실을 잘라 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사38:12)


​2. 성서시대에는 어떻게 빨래를 했을까?

 

옷감 세탁과 세제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이 입으신 흰옷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3)

 

 

세탁업자, 발로 밟는 자

 

성서시대의 세택업자는 베틀에서 막 짠 옷감을 특별하게 가공했다. 세마포 천은 수축시켜 유연하게 하고 양모 천은 충분히 두텁게 해서 옷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세탁업자가 한 일이었다.

 

세탁업자는 히브리어로 ‘코베쓰’라고 하는데, ‘발로 밟는 자’를 뜻한다. 베틀에서 막 나온 원시적인 옷감을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 넣고 발로 밟아 묵은 때를 빼는 작업에서부터 세탁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와 아하스 그리고 세탁자의 밭

 

세탁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탁일은 샘과 같은 물 근원이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세탁에서 사용하는 세제들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거나 세탁한 천을 햇빛에 말리기 위해서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성 밖에서 이루어졌다.

 

흔히 ‘세탁자의 밭’으로 알려진 이곳은 이사야 선지자와 남유다의 아하스 왕이 만난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이사야)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사7:3)

아하스와 이사야가 만난 세탁자의 밭은 한 세대가 지나 아하스의 아들인 흐스기야 왕 때 다시 등장한다. 이미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키고 이제 남은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산헤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산헤립은 전쟁 사령관인 랍사게를 보내 동일한 장소인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에서 순순히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세탁에 사용하던 세제는?

 

성서시대에는 ‘잿물’과 ‘비누’가 예레미야서에 등장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순수함을 잃어버린 신부’로 묘사하면서 제아무리 잿물과 비누로 깨끗이 씻어도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2:22)

 

잿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네테르’인데 이것은 나트륨 화합물로 이루어진 광물질로서 물에 넣으면 거품이 난다. 비누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보리트’로서, 이것은 염분이 있는 광야의 식물에서 추출된 식물성 알칼리 성분이다.

 

보리트는 아직도 광야에 거하는 베두인들이 비누 대용으로 사용하는 식물이다. 메시아의 날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 선지자 말라기는 그날을 ‘표백하는 자의 잿물’에 비유하고 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2)

 

탈색과 표백을 위해 세마포 천과 면화 천은 햇빛에 말리고, 양모 천은 황산 연기를 가해주었다.

 

 


3.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는 어떤 신분이었을까?

 

옷감 염색과 자주색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는 ‘루디아’란 여인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녀는 소아시아에 있는 두아디라 성 출신으로 직업은 ‘자색옷감 장수’였다.

 

자주 염색은 페니키아의 독점 사업

 

성서시대에는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실 상태에서 염색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천’(cloth)이 아닌 ‘실(thread)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두로가 위치한 페니키아 사람들은 당대에 알려진 최고의 염색 ‘달인’이었다. 이들의 국명 ‘페니키아’(Phoenicia)역시 ‘자주색 염료’를 뜻하는 헬라어로서, 페니키아는 자주색 염색업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자주색 염료는 ‘뿔 고둥’(murex snail)으로 불리는 달팽이의 하부 기관지선(hypo bronchial gland)에서 극소량 얻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두로가 위치한 지중해 해변에서만 잡을 수 있었다.

 

자주색은 최상위 3퍼센트의 상류층을 위한 색깔

 

비싼 가격과 복잡한 공정 때문에 ‘자주색’은 왕족(royal family)이나 귀족(noble man)을 의미하는 색깔이었다.

 

성서시대에 전체를 자주색으로 염색한 겉옷은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1억원 가량의 가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셨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속에 나오는 부자도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바로 부자가 ‘자색으로 물들인 겉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빵 한 조각 건네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눅16:19)

 

잠언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 역시 당시에 귀부인들이나 입을 수 있는 ‘자색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잠31:22)

 

 

청색계열 자주색과 제사장 나라

 

자주색 염료는 청색 계열의 자주색(bluish purple)과 홍색 계열의 자주색(reddish purple)으로 나뉘었다. 청색 계열의 자주색은 이스라엘 백성이 옷단 술에 염색하는 색깔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15:38)

 

흰색의 옷단 술 가운데 일부를 청색으로 염색하도록 한 것은 청색이 제사장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이 입는 ‘겉옷’은 청색이었다.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출28:31)

 

이스라엘 백성 모두 옷단 술의 일부를 청색으로 염색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에 부합한다.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재력가였을 것이다.

 

그녀가 상대하던 고객들 역시 상류층 3퍼센트에 속하는 VIP였을 것이다. 루디아는 바울을 통해 펼쳐질 유럽에서의 선교 사역을 위한 든든한 ‘스폰서’요 ‘물주’였던 것이다.


4. 로마 군인들은 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을까?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

 

공생애 사역의 마지막 유월절에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복음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서시대 남녀의 옷은 다섯 가지로 나뉘었는데, 본문은 예수님의 옷 중 네 가지는 이미 군인들이 하나씩 나눠 가졌고 마지막 남은 ‘속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 뽑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24)

 

 

이 말씀에는 시편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를 드러내려는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22:18)

 

로마 군인들은 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기를 한 것일까? 그리고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옷감 짜기와 하나님의 계시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옷감 짜는 기술은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꿈과 계시를 통해 태초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옷감 짜는 의식은 이교도들의 종교 예식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이것은 ‘옷감 짜기’가 단순히 옷을 만드는 오늘날과 달리 신성한 종교 예식의 일부분으로 행해진 것임을 보여 준다.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

 

씨줄(수직의 실)과 날줄(수평의 실)로 불리는 두 줄의 실이 만나 옷감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대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날줄’은 남성을 상징하고 ‘씨줄’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남녀가 연합해 새 생명을 잉태하듯이 날줄과 씨줄의 실이 서로 만나 옷감을 탄생시킨다는 것이 고대인들이 생각이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창조주와 연결되는 족보, 연속성, 더 나아가 개인의 족보가 그러한 연속성 가운데 영원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옷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요19:24)

 

 

 

십자가형은 완전한 나체로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하면 죄수의 옷을 취할 수 있었다. 한 명은 터번을, 한 명은 겉옷을, 한 명은 허리띠를 각각 차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특별한 옷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을 감히 찢지 못하고 제비뽑기를 해서 한 명이 갖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유대 남자들이 걸치던 5개의 옷이 모두 로마 군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로마의 죄수들은 십자가에 완전한 나체로 매달렸다.

5. 심판처럼 급박한 때 농부는 왜 겉옷을 가지러 집에 들어갈까?

 

겉옷과 크레디트 카드

 

마태복음 24장은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마지막 심판의 대에 일어날 상황들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

 

하나님의 심판, 즉 종말의 때에 일어날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셨다. 심판의 날에 밭에서 일하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겉옷은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

 

성서시대의 겉옷은 덮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덮는다.’는 표현은 옷이 아니라 ‘이불’에 사용해야 더 어울리는데, 이는 성서시대의 겉옷이 옷과 이불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겉옷은 장기간의 여행에서 낮에는 더위와 비를 막아 주고, 밤에는 노숙을 위한 슬리핑 백(sleeping bag)역할을 했다. 겉옷을 이불처럼 덮고 잠을 잤던 것이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룻은 보아스가 덮고 있는 겉옷 속으로 들어갔다. 자다가 함께 누워 있는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화들짝 놀랐다. 이때 룻은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라고 간청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룻3:9)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것은 ‘겉옷으로 덮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겉옷과 관련된 독특한 표현이다. 남자의 펼쳐진 겉옷 속으로 여인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남자의 보호 아래 들어감을 의미한다. 즉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간구하는 룻의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집안의 가장은 겉옷을 펼치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온 가족을 모두 책임져야 했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모두 단벌 신사?

 

겉옷은 세마포로 만드는 속옷과 달리 주로 양털로 만들었다. 소매가 긴 속옷과 달리 겉옷은 소매가 없거나 있어도 무척 짧았다. 성서시대 농부들은 대부분 겉옷이 한 벌밖에 없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자면 성서시대 사람들은 모두 ‘단벌신사’였던 것이다.

 

성서시대 농부들에게 한 벌뿐인 겉옷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최후의 수단으로 겉옷을 전당 잡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은 겉옷 자체가 특별히 비싼 옷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술’ 때문에 생긴 풍습이다.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불리는 ‘술’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15:38-40)

 

겉옷의 네 귀에 달린 술의 매듭은 사람마다 모두 달랐는데, 이 술의 매듭을 진흙 토판에 찍어서 자국을 남긴 후 돈과 양식을 빌릴 수 있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크레디트 카드나 인감도장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서시대에는 단 한 벌의 겉옷으로 1회에 한정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했다.

 

성서시대는 모든 재화와 상품이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함 가운데 살아야 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겉옷을 전당 잡혀서 목숨을 연명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율법은 겉옷을 전당 잡혔을 때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겉옷이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 역할을 했기에 자칫 추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출22:26-27)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신24:12-13)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전당 잡히는 물건이 겉옷이라고 볼 때, 이 땅에서 최후의 밤을 보내신 겟세마네 기도 현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을 따른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율법은 겉옷을 전당 잡지 못하도록 명령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송사하며 속옷을 가져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명령하셨다. 당시 겉옷의 의미를 생각할 때, 겉옷까지 아낌없이 주라는 산상수훈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 높은 삶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위기의 때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겉옷의 의미를 생각할 때, 심판의 급박한 상황에서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겉옷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들에게 겉옷은 현대인들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더 소중한 마지막 보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


​6.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겉옷과 하나님의 계명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리 ‘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15:38-4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도 옷과 관련된 배경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새롭게 와 닿을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는 강도에 의해 옷이 완전히 벗겨졌고, 너무 맞아 반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사회적 신분과 출신을 알아보았던 당시에 강도 만난 사람은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초주검 상태였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적 정결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길 없는 그 삶을 도울 수 없었다. 자칫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자신이 부정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10:30)

 

 

온전한 자의 옷단 술 만지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아무렇게나 만진 것이 아니다. 바로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예수님 당시 1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1세기 유대인들의 믿음은 혈루증 여인뿐 아니라 다른 무리의 행동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고 손을 대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6:56)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영적인 상징물이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겉옷의 옷단 술이 그런 영적인 에너지와 파워가 있다고 믿었다.

랍비 문헌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는 하나님과 특별하고도 친밀한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1세기 이스라엘 땅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랍비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살리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여인은 허락도 없이 함부로 옷단 술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1세기 당시의 랍비 문헌은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옷단 술을 만지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옷단 술 소유자의 자녀들이었다.

 

군중의 관심이 예수님께 쏠려 있을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놀라운 선포를 하셨다. 예수님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예수님이 군중 앞에서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한 순간, 여인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옷단 술의 주인인 예수님이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함으로써 처벌의 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열린다 성경(생활풍습이야기 상)]  싸이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