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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성경번역의 역사

by 은총가득 2021. 2. 23.

성경 의 사 (1)

1부 : 마조레트

 

- 구약의역사 -

1부 : 마조레트

2부 : 원문의 보존과 사해사본

3부 : 70인역과 오리겐

 

- 신약의역사 -

4부 : 신약의 사본 코덱스

5부 : 중세 암흑시대와 번역의 시작

6부 : 번역의 역사와 번역판들

 

성경은 1500년 동안 40명이 넘는 저자가 세 가지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의 6,909개의 언어 가운데 2,400여개의 언어로 옮겨 졌고, 지금도 수많은 종족이 자신의 언어로 번역되기를 갈망하는 책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약 3,400년 동안 어떻게 기록되고 보존되었을까 하는 성경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기록된 성경으로 하나님과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말한다. 주로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으로 선택된 백성이 지켜야 할 규율에 관한 것이다.

구약을 구성하는 39권의 책은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 이미 유대인이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신약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 그리스도의 12제자나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율법이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죄를 깨닫는 것이라면 신약은 은혜를 통한 죄의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성경은 세 가지 언어로 쓰였다.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고 아주 일부분만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은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면서 오늘날 영어처럼 당시의 공용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역사

 

구약은 천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많은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39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성경 기록은 모세에 의해 BC 1400년 이전에 기록된 모세오경이다.

모세오경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5권을 말한다.

모세는 본인이 태어나기 전의 역사인 창세기를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시내산에 강림하여 모세에게 십계명와 율법을 주셨다 (출애굽기 19:20, 24:12)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머무르며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십계명과 율법 뿐 아니라 창세기 기록도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의 특징은 지명과 이름과 구체적인 숫자, 날짜들이 나온다는 것으로 역사성과 진성성을 보여준다.

 

역사서는 여호수아에서 에스더까지 모두 12권이고, 시와 지혜서는 욥기에서 아가서까지 5권, 예언서는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모두 17권이다.

구약은 BC1400년경에서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기록된 BC 420년경 사이에 기록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400년의 공백기간이 있다.

이 공백기간에 기록된 것이 외경(Apocrypha)으로 ‘숨겨진’ 혹은 ‘은밀한 것’이란 뜻을 가졌고 가톨릭에서는 제2의 정경으로 인정되나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조레트(Masorete)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본문은 마조레트라 불리는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정확성이 보존되었다.

마조레트란 전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한 호칭으로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텍스트를 지키고 보존했던 유대인 학자들과 서기관들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구약시대에는 모든 원고의 사본을 사람의 손으로 써서 만들었다. 한 페이지씩 한 줄씩, 한 단어씩 공들여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본을 매우 신중하게 만들지 않으면 오류가 생길 수 있으므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사용할 두루마리를 만들 때 오류를 예방하기 위한 규율을 만들었다.

 

1. 날마다 서기관은 갈대 펜이 잘 쓰여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잉크에 적시고 ‘아말렉’이란 이름을 쓴 뒤에 지워버리곤 했다.

 

2. 모든 재료는 엄격한 명세서에 따라 제조해야 했다.

가죽 종이는 정결한 동물의 가죽으로 제작해야 했고, 펜은 정결한 새의 깃털로 만들어야 했다. 잉크는 검정색으로 하고 필사에 관한 명세서에 따라 준비해야 했다.

 

3. 단어는 물론이고 철자조차 암기한 것은 쓸 수 없었다.

서기관은 자기 앞에 또 다른 두루마리를 펼쳐좋고 각 단어를 소리 내어 읽은 후에 그것을 필사해야 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쓰기 전에는 경외하는 자세로 펜을 닦아야 하고

“ 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려고 그분의 이름을 쓰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5. 각 철자의 둘레에는 약간의 지면이 있어야 했다. 한 철자가 다른 철자를 건드린다든지, 부정확한 필사나 구멍이나 눈물이나 얼룩으로 인해 철자를 쉽게 읽을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두루마리를 폐기시켰다.

 

6. 각 컬럼은 48행보다 적거나 60행보다 많으면 안 되고 원본과 똑같아야 했다.

 

7. 완성 후 30일 이내에 편집자가 원고를 검토하되 각 철자와 각 단어를 세면서 점검해야 했다. 편집자는 사본의 각 페이지 중앙에 있는 단어가 원본의 중앙에 있는 단어와 동일한지를 확인해야 했다.

 

8. 어느 페이지든지 세 개 이하의 실수는 30일 이내에 수정할 수 있다. 만일 그보다 더 많은 실수가 발견되든지. 실수가 30일 이내에 교정되지 않으면 사본 전체를 매장시켜야 한다. 한 철자를 더하거나 한 철자를 생략한 경우에는 수정을 하거나 매장해야 한다.

 

9. 토라(모세오경)에는 히브리어로 304,805개의 철자와 79,976개의 단어가 있다.

성경 번역의 역사 (2)

2부 : 원문의 보존과 사해사본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구약시대의 필사본들의 텍스트들과 내용이 동일할까?

그것은 고대 사본들과 텍스트를 비교하면 알게 될 것이다.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문서는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성경 사본으로 기원전 100년경에 쿰란 공동체에 의해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해 사본과 70인역을 비교해 본 결과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이 히브리어 텍스트를 충실히 번역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이 기원전 2세기에 읽힌 성경과 사실상 똑같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이다.

필사에 필사를 거듭한 성서의 코덱스가 그 오랜 세월 정확성을 지켜낸 것이 놀랍기만 하다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은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900여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아우른다.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 서쪽 둑에 있는 와디 쿰란 (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고대 키르벳 쿰란 근처) 주변과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사해란 소금바다란 의미이며 호수이다.

 

탄소 측정법과 문서에 대한 분석, 글씨체에 의해 사해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대선지자 이사야 문서는 기원전 335년에서 기원후 107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성경사본은 현재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많이 존재하면서 세대를 이어가지만 오랜 시간 후 과거의 사본이 남아 있을 확률은 줄어든다.

현재의 우리 손에 있는 성경도 지금부터 2000년 후에 발견된다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2,500년 이상 바빌론 포로생활과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텍스트가 남아 있기 어려운 실정이다.

 

사해사본은 1947년에 한 베두인이 쿰란 지역 동굴에서 처음 발견을 하였다. 그 사실을 안 E.L. 수케닉(E. L. Sukenik)고고학자는 사해사본을 베두인에게서 샀다.

사해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쿰란 주거지에서 적게는 125m (제4동굴)에서부터 1km (제1동굴)까지 떨어져 있다.

 

염소와 양을 치는 베두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 (별칭 에드-디브, "늑대")가 1947년초에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존 트레버 박사는 무함메드 에드-디브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여러 변형된 이야기들이었다고 한다.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사본 수

모세오경 : 창세기(19), 출애굽기(17), 레위기(13), 민수기(8), 신명기(33)

역사서 : 여호수아(2), 사사기(3), 사무엘기(4), 열왕기(3), 역대기(1), 이사야(21), 예레미야(6), 에스겔(6), 다니엘(8), 소선지문서(8)

성문서집 : 에스라-느헤미야(1), 시편(34), 욥기(4), 잠언(3), 룻기(4), 아가(4), 전도서(2), 애가(4), 집회서(1)

에스더를 제외한 오늘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책들의 사본이 발견됐는데, 특히 시편, 신명기, 이사야서 사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견됐다

 

 

제1동굴

1949년 1월 28년에 국제 연합의 조사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 사해 사본을 팔겠다는 광고가 1954년 7월 1일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리게 된다.

몇 번의 섬세한 협상을 통해 메트로폴리탄과 다른 두 명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은 미국 뉴욕의 월도르프-아스토리아 호텔로 옮겨지고, 25만 달러에 팔린다.

이곳에서는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었다.

7가지 두루마리 사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 ③ 공동체 규칙서 ④ 전쟁사 ⑤ 감사 찬양시편 ⑥ 하박국 주석서 ⑦ 창세기이다

 

제2동굴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제3동굴

1952년에 발견된 가장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리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이다.

신성한 물건과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감춰져 있는 목록이다. 이스라엘 전역의 지하의 비밀 장소 64곳에 묻힌 보물들은 로마인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보물을 묻어놓은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중의 일부는 “장례용 신전 속, 세 번째 층 : 금괴 100”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 위치는 오늘날 알려지지 않아 적어도 10억 달러의 가치로 추정되는 보물은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다.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시편 ,애가)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이다

 

제4동굴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 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제5, 제6동굴

5번 동굴에서는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열왕기상,이사야,아모스,시편,애가)

이 밖에 공동체 규칙서,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 등이 있다.

6번 동굴에서는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창세기,레위기,열왕기상,열왕기하,시편,아가,다니엘)

 

제7에서 제10동굴까지

제7동굴은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출애굽기,예레미야이다

제8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제9동굴에서는 6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11동굴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와 시편 두루마리, 욥기, 거의 완전한 형태의 성전 두루마리,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성경 번역의역사 (3)

3부 : 70인역과 오리겐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대 민족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폐르시아,그리스,로마 등의 영향을 받았고 BC 3세기 초에 이르면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실종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이해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번역할 필요가 생겨났을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구약 번역판은 70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3세기에 시작된 작업이었다.

이 번역을 둘러싼 이야기는 헬라제국 출신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미 필라델푸스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이집트의 왕으로 집권한 이후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 작업을 명했을 때 그 궁전에서 일하던 한 관료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 편지가 들려주고 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은 현재 그 시대보다 100년 뒤에 쓴 것으로 간주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하여간 편지에 따르면 프톨레미는 세상에 알려진 모든 책을 자기 도서실에 비치하기를 원했으며, 그 가운데는 히브리 성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와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모세오경의 번역은 기적같이 72일 만에 완료되었다고 한다.

번역가들은 따로따로 작업을 해 동일한 72편의 번역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구약 전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데는 실제로 두 세기가 걸렸다.

 

70인역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널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과거 2천년 동안 구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경우에 권위 있는 그리스어 출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만 해도 가장 초기의 구약 사본은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의 사본들이었다.

70인역은 초기 기독교회의 성경이었고,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는 보통 70인역을 인용하곤 했다.

에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39권 중 34권을 인용하였는데 제자들이 살아있던 시대의 랍비 요하난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얌니아 공의회를 열어 그리스어로 된 성경 사용을 배격한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그리스어 필사본이 존재하였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300년이나 된 70인역을 아직도 구약의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고대 성경 사본은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을 펴고 문질러서 종이처럼 얇은 판으로 된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페르가뭄에서 코덱스(codex)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마침내 두루마리를 대치하게 된다.

코덱스는 종이 양면에 글을 쓰고 접어서 다함께 묶어놓은 것으로 오늘날 책의 형태와 비슷하다.

현대의 책도 코덱스의 형태이긴 하지만 이 용어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손으로 쓴 원고에 한해서 사용되고 있다.

 

70인역의 사본 파피루스와 코덱스

 

1. 오리겐의 헥사플라

70인역의 사본은 AD 200년경에 기독교 학자인 오리겐이 작성했던 구약성경 판에도 포함되어 있다.

헥사플라(Hexapla)라고 불리는 이 대조판은 히브리어와 다섯 가지 번약판 등 모두 여섯 가지를 병행하여 수록하고 있다.

 

2.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구리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미국의 수집가 체스터 비티는 1930년과 1931년에 이집트의 공동품 상인에게서 몇 가지 파피루스를 구입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 파피루스들은 이집트의 콥트 크리스천의 공동묘지에 있는 납골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총 11개의 사본 가운데 일곱은 그리스어로 구약의 일부를 세 권은 신약의 일부분을 담고 있다. 창세기,에스더,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다니엘은 AD 200년 경으로 추정되며 민수기와 신명기는 AD 120~15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세권의 신약 가운데는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히브리서,에베소서,갈리디아서,요한계시록을 담고 있다.

신약의 사본은 AD 175~22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물은 현재 아일랜드의 체스터 비티 도서관과 미시간 주립대에 소장되어 있다.

 

3. 코덱스 바티카누스

1475년 이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사본은 AD 3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거의 완전한 그리스어 성경 사본이다.

그러나 신약의 일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4.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AD 350년경에 만들어진 시나이 사본은 1844년 이집트의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폰 티센도르프 백작이 발견하였다.

수도사들이 구약의 일부를 불을 지피는데 사용하는 바람에 70인역 가운데는 일부분만 남아 있다.

그러나 신약은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 캐서린 수도원은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시내산 기슭의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수도원이다.

기독교가 박해 받던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어느 귀족의 딸 이름을 따서 지웠다고 한다.

티센도르프는 23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5세 때 강사로 임명되었으며 27세의 나이에 걸작으로 꼽히는 새로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당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세 권의 성경 사본 중 하나는 성경 위에 설교를 써넣은 5세기 성경, 코덱스 에프레미였다.

본래 써놓은 글자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긴 했지만 세계적인 학자들도 그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마침내 티센도르프가 그 성경 텍스트를 읽어내는데 성공했고, 자기가 읽은 것을 필사하는 데만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844년 봄에 카이로에 잇는 여러 수도원과 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중요한 사본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 후에 다시 캐서린 수도원을 방문하였는데 한쪽 구석에 불을 지피는 데 사용되었던 사본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티센도르프는 AD 350년경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70인역 사본 중에서 129장의 가죽 종이를 발견했다.

그는 재빠르게 수도원측과 협상한 끝에 43장을 가져가도록 허락을 받아 그것을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1859년에 티센도르프는 다시 성 캐서린 수도원에 방문하여 한 젊은 수도사의 초대를 받아 음료수를 마시다가 자기가 출판했던 70인역 성경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나에게도 그리스어 70인역이 한 권 있소”라고 말하면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한 사본을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시나이티쿠스였다.

 

5.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

AD 42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본은 본문을 구분하기 위해 장식을 최초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총대주교였던 키릴 루카가 1621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길 때 그 책을 가 온 것이다. 1627년 그것은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의 손에 넘겨졌고 현재는 영국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6. 존 라일랜즈 파피루스

현재까지 발견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약의 단편이다.

요한복음 몇절을 담고 있는데 연대는 AD 125년에서 150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단편의 중요성은 복음서가 쓰인 지 50년도 채 안된 시기에 이집트에서 요한복음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 있다.

1920년에 발견되었고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 있는 라일랜즈 도서관에 진열되어 있다.

 

7. 코덱스 에프레미

이 코덱스는 이미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것이다.

가죽 종이가 희귀해지면 서기관은 우유와 귀리를 이용하여글자를 씻어 내고 그 위에 다시 쓰곤 했다.

이 사본은 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400년경의 그리스어 사본이었는데 12세기에 누군가 성경 텍스트를 씻어 내고 그 위에 시리아인이었던 에프렘의 설교를 적어 놓았다. 이 성경 텍스트는 여러 차례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폰 티센도르프 백작의 번역도 포함되어 있다. 이 코덱스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8. 코덱스 베자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2개 언어 병용 신약 사본으로서 페이지의 왼쪽에는 그리스어, 오른쪽에는 라틴어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 시기는 AD 45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프랑스의 리옹에 있는 성 이레네우스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위에 소개한 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5,500개가 넘는 사본 중 일부분이다.

 

 

70인역에 대한 문제

 

70인역이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1. 70인역의 증명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LXX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72인은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12지파의 위치를 파악하여 6명씩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리스어 필사본은 교회시대 초기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도 없다. 72명이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는지, 72명을 유대인에서 그냥 뽑았는지 알 수 없으며 12지파의 위치도 현재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 번역에는 72명이 참여하였지만 최종까지 72명이 계속 진행하였는지 알 수 없다. 2명은 유고했는지 돌아갔는지 알수 없으며 70명이 진행하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70인역으로 명칭을 부여했을 수도 있다.

 

2. AD 200년경에 제작된 헥사플라에 70인역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450년이 지난 기록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리겐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일부 의역한 것에 대해 해악의 이유로 삼기도 한다.

-> 오리겐이 해악을 끼친 것은 70인역의 존재여부에 관계없는 사안이다.

오리겐이 450년이 지난 후라도 70인역을 사용했다면 70인역의 존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3.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 이러한 반론은 사실(Fact)과 다른 추정에 따른 것으로 역사를 이렇게 단정지을 수 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통해서 유대민족을 가뭄에서 보존하셨으며 바빌론 왕의 꿈을 통해서도 계시를 나타내셨다.

 

결론적으로 70인역의 존재여부는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그러나 70인역이라는 텍스트가 고대 사본에 존재하므로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성경 번역의 역사(래리스톤)

 

 

3부-2 : 오리겐과 70인역

 

 

*오리겐은?

 

성경 변개의 장본인으로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믿음과 유사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소수 본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A Local Text)이었고, 그 곳에서 유세비우스는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하여 50개의 복사본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세비우스는 참된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기 위해 안티옥으로 가지 않았고, 대신에 이집트에 있는 교육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거기에서 "학자들의 수정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세비우스는 안티옥 대신에 알렉산드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집트 학자인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주후 185~254년)는 성경 본문 부패의 주장본인입니다.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 자체가 로마 카톨릭 교회사이므로,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들은 오리겐을 가리켜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그리스의 아테네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 이단자로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서 '창조된 하나님'이었다는 이단교리를 퍼뜨렸습니다. 이같은 오리겐의 믿음에 대해 「뉴스탠다드 백과사전」(New Standard Encyclopedia), 제9권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그의 '로고스(Logos) 교리'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기타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으나,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름이었는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로고스'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사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의 교리 정립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오리겐은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의 피조된 신으로 믿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땅에 거하셨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오리겐의 저술에는 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바로 이같은 사실은 부패한 사본들 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설명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간혹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가도, 이내 돌아서서는 그것을 부인하곤 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변개하고는 "말씀(the word)은 한 신(a god)이었습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과 '신'을 소문자로 쓴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같은 믿음은 참으로 우리 세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고수하는 그릇된 교리에서 나온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같은 자신들의 교리를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요한복음 1장 1-5절과 3장 13절에서 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자기 자신의 이단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보편적 본문"을 변개시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성경 사본의 변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철학 및 성경 변개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A. 오리겐의 삶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하게 살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주후 202년경에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의 가정은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들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으며 또한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거세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용감했고 인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후 213년에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뒤 알렉산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 주후 215-219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의 캐사레아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그는 주후 231년까지 거기에 거하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지도부와의 마찰로 인한 출회로 영구히 그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32년에 그는 캐사레아에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모진 박해로 인해 캐사레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B. 오리겐의 믿음

 

비록 오리겐이 초기의 위대한 교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마저도 그가 교리적으로는 정통이 아니었음을 인정합니다.

 

1. 그는 영지주의적 신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3. 그는 종종 구약성경을 신비적으로 해석했고, 신약성경과 더불어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명한 학자 피커링은 마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 그러므로 자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면, 오리겐은 곧바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비유 해석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느끼는 바가 바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라고 오리겐이 생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피커링, 「신약성경본문의 본질」(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 1977, pp. 140, 192)

 

4.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기록을 부인했고, 오히려 영혼이란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 그는 또한 죽음 이후에 사람의 혼이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좀더 고차원의 혹은 저차원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윤회사상을 믿었습니다.

 

6. 그는 또한 보편적 구원을 믿었으며, 악한 자들도 형벌을 받은 후에는 즉 연옥에서 고통을 받은 후에는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7. 그는 또한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별이나 달도 혼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8. 그는 결국에는 마귀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9. 그는 목사를 제사장(혹은 신부)으로 부른 사람들 중 하나이며 주교들이 큰 죄를 용서하는데 한 몫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10. 대부분의 교부들이 성경대로 '전천년주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교회가 세력을 확장해서 평화를 가져온다는 '후천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C. 오리겐의 작품

 

오리겐은 그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서 온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평생에 6,000 여권의 책을 저술했고 초기 교부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의 50% 정도가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의 7명의 중요한 교부들이 신약성경을 인용한 것 중에서 오리겐의 것이 약 18,000개나 될 정도로 그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1. 오리겐의 대규모 작품


a. 그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b. 그가 저술한 「De Principiis」라는 책은 조직신학 책이다.
c. 그가 지은 「셀수스에 반대하여」(Against Celsus)는 변증학 책이다.
d.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헥사플라」(Hexapla)이다.

 

2.「헥사플라」 : 구약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헥사플라」(혹은 '6주 성경')는 여섯 개의 난에 여러 가지 언어로 기록된 성경 즉 '폴리글롯'으로 오직 구약성경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난 마다 각각 다른 구약 역본이 들어 있습니다. 시가서 같은 경우에 그는 서너 개의 다른 번역을 더 추가하여 '8주 성경' 혹은 '9주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a.「헥사플라」는 50개로 구성된 매우 큰 폴리오 책으로서 그 분량이 자그마치 6,500쪽이나 된다.
b. 이 책은 주후 250년경에 완성되었다.
c. 그는 7명의 속기사들과 7명의 필사하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
d. 첫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소라 본문과 거의 같다.
e. 둘째 난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다. '음역'이라 함은 다른 말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어 단어의 소리대로 적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 단어인 "샬롬"(Shalom)과 그리스 단어인 "뱁타이즈"(baptize)는 음역한 것이며, 만일 이 말들을 번역하면 "평화"(peace)와 "푹 담근다"(dip)가 된다.
f. 셋째 난은 아퀼라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g. 넷째 난은 시마쿠스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h. 다섯째 난은 오리겐의 작품으로 현재 「70인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i. 여섯째 난에는 테오도티온의 그리스어 역본이 있다.
j. 「헥사플라」는 주후 638년까지 캐사레아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들의 침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k. 「헥사플라」는 단지 그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특히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은 「바티칸 사본」(B 사본), 「시내 사본」(알레프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A 사본), 「에프레미 사본」(C 사본) 등에 남아 있다.

 

D. 신약성경 본문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성경본문 비평가들이 소위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라 부르는 기법을 사용하여 종종 신약성경 사본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이 기법은 한 마디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본문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오리겐이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일했으므로, 그의 작품은 참으로 신약성경 본문을 망가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실한 성경학자였던 딘 버건은 다음과 같이 오리겐의 신약성경 본문 비평의 멋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복음 19장 17-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매우 포괄적인 요구조건으로 하나님의 명령 전부를 다 포함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오리겐은 추측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 '이 모든 명령은 제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셨다. 그런데 만일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 전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이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부자 청년이 아직 완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사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씀이 원래의 마태복음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시 말해 그는 후대의 어떤 서기관이 이 구절을 집어 넣었다고 믿은 것이다."

 

위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저 유명한 오리겐이라는 본문 비평가가 자기가 받은 본문에 만족해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상상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본문에 가감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리겐보다 더 자유롭게 본문을 수정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바로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부패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70인역(LXX)이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히브리어 성경(구약, the Old Testament)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입니다.

 

그작업이 행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B.C.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B.C. 397년 구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B.C. 4년 경(달력상으로 4년의 오차가 있기 때문)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 간의 침묵기간 중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70인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됩니다. 그런데 72 명이 번역했다는 그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문서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B.C.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히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A.D.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70인역(LXX)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입니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유디스서'(Judith), '토비트서(Tobit)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70 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입니다. 이 주장이 정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그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역주: 유다교는 지금도 외경을 거부하고 있으며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인정함).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 제멋대로 첨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계 22:18).

 

이렇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 제5단이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본(私譯本)이며, 정체가 탄로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Eucebius)와 필로(Philo), 이 두 사람이 그리스어 모세오경(Greek Pentateuch)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구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번역본으로 언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부서진 채 발견된 이 파편들의 존재로 인해 유세비우스와 필로는 "모세오경 전체가 어떤 성경 기록관(서기관)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역사를 알리기 위함 이었다."라는 망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이 파편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으로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더 더구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B.C. 250년 경 그 번역 작업을 위해 선발된 72인의 유다 학자들은 B.C. 150년에는 실력 없는 미숙한 학자들로 판명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역된지 100년 후에는 그 번역본이 쓸모 없게 되어 다시 새로운 번역본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라일랜드의 458번'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더욱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충돌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아예 어떤 이들은 그 편지의 저자가 사실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5단을 70인역(LXX)의 복사본으로 믿도록 속이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 용의주도한 계획은 외견상으로 볼 때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의 패배와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일 그가 12 지파를 식별할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 72인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 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역주: 흑인들, Falasha Jews)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다인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그리스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모순된 이야기를 믿을 만큼 순진하십니까? 그런 가정은 지극히 불합리하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수많은 구약 인용들이 70인역(LXX)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이 알고 있는 70인역(LXX)이란 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5단을 가리킬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70인역(LXX) 혹은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구약의 인용들은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통해 구약으로부터 자신의 작품 안에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분께서 누군가 꾸며낸 70인역(셉튜아진트)에서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왜 학자들은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이러한 진실에 대항하면서 이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는 그처럼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대답은 슬프지만 단순합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세 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셉튜아진트(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입니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비평가들은 70인역 같은 위조 문서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총애하는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번역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어떤 번역본도 원어와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라는 이유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이러한 학자들의 일구이언을 통해 우리는 "원어들을 학습한 적이 없는" 즉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 위에서 자신의 학자적 위치를 고수하고, 스스로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러분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 사무엘 깁

 

further study : http://www.chick.com/reading/books/158/158cont.as

 

 

70인역(LXX) 성경은 어떤 책인가

 

칠십인역 성경(七十人譯-) [영] Septuagint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역.

 

본국 팔레스티나를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많아 졌다. 그런데서, 그들을 위해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져, 전 250-200년경, 에집트의 알레산드리아에서 완성되었다.이 최고(最古)의 번역 성서인 그리스어역이 70인의 학자의 손에 의해 된 것이라는 전통적인 기록에 의해서 보통 [칠십인역](Septuaginta-70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라 부르고, 그 약기호 LXX를 쓰고 있다.

 

이 번역 사업에 관한 기록 문서로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The letter of Aristeas](->)로 불리우는 위경이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 교회의 성서로 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 18;28 참조). 또한 바울의 편지를 비롯하여 신약성서에 인용되어 있는 구약의 말은, 거의 이 칠십인역에서의 것이다. 곳에 따라서는, 히브리어 원전과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의 사본은 최고의 것이 보존되어 있어서,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칠십인역 성서 - 七十人譯聖書 〔라〕Septuaginta,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역성서).본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그들을 위해 당시의 일반적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 기원전 250∼20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완성됐다.

헤브라이어(語)《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서. 원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의 부분 번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여기에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까지도 포함시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 72명의 학자가 번역에 참가했다는 전설에 따라 이 이름이 붙었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로 먼저 이 BC3세기 중엽에 번역되고 그 뒤 100년 사이에 현행 정전(正典)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신약성서》의 문체·사상연구에도 가치가 크다. 이 최고의 번역 성서가 70인 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기록에 의해 보통 「70인역」이라고 부른다(약호는 LXX).70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회의 성서로 되어,「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18:28 참조).이 성서의 사본은 가장 오래된 것이 보존되어 있어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칠십인역성서(七十人譯聖書) 는 셈어계에 속하는 중앙 셈어의 하나인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성전.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구약성서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인 종교적·도덕적·사회적·생활에 관하여 신이 인간에게 지키도록 내린 규범인 의 부분적인 번역을 일컫는 것이었지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 구약성서에 실려 있는 전예언서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 등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사대예언자와 호세아,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12소 예언자의 서를 일컫는 후예언서의 총칭으로 일반적으로는 후예언서를 말하는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서까지도 넣어서 약기호로 LXX라고도 불리었다.

72명의 학자들에 의하여 번역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바빌론유수를 계기로 하여 팔레스티나를 떠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을 일컫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해서 먼저 이 BC 3세기 중엽에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후 100년에 걸쳐서 지금의 정전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으며 에 대한 문체나 사상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가 있다. 70인역의 완성으로 구약성서가 한권으로- 칠십인역' 성경은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에 사는 디아스포라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구약성경)을 당시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코이네)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2세(재위 주전 285-246년)의 명에 의해 예루살렘의 학자 72명(또는 70명)이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이다.

 

바울도 '칠십인역'에서 인용하곤 하였다. 네스틀레 - Eberhard Nestle 1851∼1913,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신약성서 문헌학자. 울름대학과 마울브론신학교 교수를 거쳐 1912년 마울브론신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동방 여러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을 연구하고, 다음으로 《신약성서》의 원전연구를 시작하여 1888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간행하였으며 라틴어 성서 및 루터의 독일어역 성서도 편집하였다.

 

경 번역의 역사

4부 : 초대교회와 중세시대의 성경

 

신약성경을 27권으로 확정하는데 필요한 기준은 저자가 열두 사도에 속하거나 바울이거나 사도의 승인을 받은 사람(마가,누가)이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저자는 스스로 신빙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가 쓴 내용을 어느 사도가 집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도의 저술이라고 내세우는 위조 저작물에는 야고보의 비서,도마복음,바울의 묵시록,마리아복음,진리의 복음, 베드로 행전 등이었는데 복음서만 무려 50권이나 유포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의 27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는데 히포의 교회회의(393년)와 카르타고의 교회회의(397년)에서 27권을 성경의 정경으로 공인했다.

이는 그동안 교회가 이 책들의 가르침과 예배에 사용해왔던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였을 뿐이다.

즉 신약성경이 교회에서 공식으로 채택 된 이유가 아니라 내재적인 가치가 있고 직간접적으로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킨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약 250년동안 로마 당국에게 끔찍한 박해를 받았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당했다.

로마가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로마의 만신에 합병시키곤 하였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고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비쳤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친 최초의 대규모 핍박은 AD 64년에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일어 났다. 네로는 스스로 9일간의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면서도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탓으로 돌였다.

네로 치하에서 열차례에 걸친 대규모 핍박이 일어 났다.

150년경 군중은 폴리캅의 죽음을 요구했다.

폴리캅은 당시 86세의 노인으로 젊은 시절에 사도 요한을 알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하면 고문을 면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86년동안 나는 그 분의 종이었고 그분은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떻게 나를 구원해준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라고 대답했다.

학자였던 터툴리안은 그런 순교자들의 용기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박해는 312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컸던 성경 번역판은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5세기 초에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Vulgate,

백성의 언어, 대중적인 판)라고 불리는 번역판으로 로마 교회가 1,500년 넘게 사용했다..

그러나 대중적인 판이라고 했던 라틴어 성경은 일반인은 읽거나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옛 라틴어번역판들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수스가 죽은 뒤에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모두 완수했다.

그는 서문에서 외경은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정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성경 번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번역판은 1,500년 이상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이라는 특권을 누렸다.

 

중세 시대의 성경

 

로마 제국의 몰락과 종교 개혁 사이에는 약 천년의 세월인 중세 시대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새로 등장한 이슬람의 도전을 받았고, 교회는 십자군 전쟁으로 맞섰다.

로마 교회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교황은 왕들에게조차 영향을 미치던 시대이다

 

중세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초기에서 1000년이 이른 암흑시대, 1000년에서 1300년에 이르는 고중세시대, 그리고 1300년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이르는 중세 후기이다.

 

암흑시대에는 가톨릭교회가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자기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라틴어 성경만 존재하였고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다.

119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의 순결파와 왈도파가 번역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비공인된 성경 번역판의 사용을 모두 금지시켰다.

 

가톨릭 교회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교회의 부와 보여주는 것이 중세시대에 건축한 장엄한 성당들이다.

이 건물들은 규모가 아주 거대하고 건축하는데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이 빌미를 제공해 결국은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낳았던 것이다.

 

중세시대는 걸작품에 속하는 장식 성경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성경은 삽화, 화려하게 꾸민 첫 철자, 가죽종이 위에 금이나 은으로 도색한 디지인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귀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중세 성경인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는 높이 90cm, 폭 50cm, 무게는 약 75kg이나 되었고, 동물 160마리를 이용해서 만든 가죽종이 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1200년경 프라하의 동쪽에 있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헤르마누스 수도사가 수도 서원을 위반한 것 때문에 생매장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역사상 최고로 장엄한 책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귀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귀의 화려한 형상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소위 마귀의 성경이라 불리는 코덱스 기가스는 스웨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에는 프랑스 루이 9세를 위해 만들어진 크루세이더 성경, 대머리 왕 찰스가 의뢰해서 만들어진 코덱스 아우레우스, 잉글랜드에서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품 중 하나인 윈체스터 성경, AD 800년 경에 스코틀랜드 수도원에서 만든 라틴어 켈즈 사본 등이다.

 

로마 카톨릭의 정치권력화와 권력남용, 그리고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정치적 권위를 더 높여 군림하는 것으로 결국은 타락을 불러왔고 반대자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정죄하여 통제하고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에 반발하여 개혁을 시도하는 집단과 개인이 생기게 되었다.

 

1320년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탄생한 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위클리프는 교회에 타락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 교회는 부요가 아니라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했는데 이는 훗날 종교개혁의 원칙이 되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는 순회 설교자들을 파송했는데 이들은 둘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과 경건한 삶을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롤라드를 이단으로 천명했다. 그 중의 일부는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틀리프는 라틴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으나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포고를 내렸다.

위클리프 번역판은 출교를 당한다는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지금도 수백권이나 남아 있다.

 

1408년에는 컨터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의 이름으로 이런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이는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0년 뒤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이 뒤를 이어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번역

의 역사

5부 : 종교개혁 번역의 시작

 

AD 1450년에서 1550년 사이에 세계는 큰 변화를 경험하는데 인쇄술의 발명으로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세계적 변화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마틴 루터 였다. 둘 다 독일인이었다.

 

구텐베르크는 1448년에 인쇄소를 개업하고 면죄부의 증서를 인쇄하는 거대한 시장에 뛰어 들었다.

면죄부는 죄의 형벌에 대한 용서를 증명하는 증서였는데 이 증서를 돈으로 살 수 있었기에 교회는 교회 건축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걸작은 바로 성경이었다

그 작업은 모두 10만개의 활자 조각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고 엄청난 재정 투자가 필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죽종이도 구입해야 했는데 성경 한권을 인쇄하려면 160마리가 넘는 동물의 가죽이 필요했다.

1450년에 그는 부요한 금 세공인이었던 요한 파우스트에게서 800길드를 빌렸다.

그리고 마침내 180부의 성경을 출판한 것이 결국 세상을 바꾸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번역본이 아니라 라틴어 성경이었고 모두 1,282페이지였다.

현재 48권이 남아 있는데 이 책들은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인쇄물로 꼽힌다.

 

 

마틴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다

그는 에어푸르트 대학을 졸업한 뒤에 번개에 맞을 뻔했던 경험을 계기로 어거스틴파 수도사가 되었다.

 

로마교회는 누구든지 죄를 용서 받으려면 선행으로 자기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선행의 본보기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가르침은 결국 타락하여 남의 죄와 자신의 죄를 위해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요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돈이 돈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즉시 그 영혼은 연옥의 불에서 튀어 오른다”고 했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있을 때,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랬다

“오늘날 부자 중의 부자인 교황은 어째서 자기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를 짓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을 끌어오는가?”

교황은 루터를 ‘술 취한 독일인’일고 부르면서 ‘술이 깨면 제정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고

루터는 교황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적그리스도“라고 되받아쳤다.

루터는 1521년에 출교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종교개혁가들인 루터, 존 칼빈, 울리히 츠빙글리 들은 면죄부의 남용문제를 넘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다섯가지 ‘오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오직 믿음으로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온다)

2. 오직 성경으로 (권위는 교회나 교황이 아니라 성경에서 온다)

3. 오직 은혜로 (구원은 공로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4. 오직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교황이나 성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출교를 당한 루터는 독일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하여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손치노에서 인쇄된 1494년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각각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1522년에 출판되었고, 신구약 완역판은 1534년에 출판되었다.

루터의 번역본은 불과 50년만에 비텐베르크에 있던 한 인쇄소에서 거의 10만부나 인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황이 루터의 저술을 금서로 규정했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14개 이상의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은 마태복음 32장 2절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지 왔느니라” 라고 번역한 반면에 가톨릭의 공인 라틴어 번역판은 “고해성사를 하라”고 번역함으로써 교회가 요구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부각시켰다.

 

종교개혁에 대응책으로 교황은 1545년에서 1563년 사이에 트렌트 공의회를 세 차례에 걸쳐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

라틴어 벌게이트가 결절적인 성경 번역판이라는 것

외경도 구약성경의 일부라는 것

에라스무스는 불경건한 이단이고 그의 저술은 금서라는 것을 확증했다.

 

16세기와 17세기 초에 만든 성경 번역판 가운데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 루터의 독일어 성경(1522/1534)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1611)

- 두웨이-림즈 영어 성경 (1582/1609-10)

- 클레멘틴 라틴어 성경 (1592)

- 리이나-발레라 스페인어 상경 (1569)

- 지오반니 디오타니 이탈리아 성경 (1603)

 

 

신약성경 사본 번역의 두 가지 경로

 

현존하는 5,500개가 넘는 신약 사본들을 그 특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약 80%는 지중해의 동부에서 온 것이므로 비잔틴 가문이라 불린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그보다 더 오랜 된 것으로 주로 이집트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성경 번역본은 두 개의 경로가 존재한다

하나는 비잔틴 사본의 그리스어 텍스트를 기초로 한 번역본으로 KJV(킹 제임스 성경)와 NKJV가 있다

또 하나는 시나이티쿠스와 바티카누스 같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기초하여 번역한 NIV, RSV와 같은 대다수의 개역성경이라 불리는 현대 번역판들이다.

 

그렇다면 어느 경로가 더 정확한 것일까?

그리고 차이가 난다면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일까?

경 번역의 역사

6부 : 번역의 역사와 번역판들

 

신약성경 사본 번역의 두 가지 경로

 

현존하는 5,500개가 넘는 신약 사본들을 그 특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약 80%는 지중해의 동부에서 온 것이므로 비잔틴 가문이라 불린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그보다 더 오랜 된 것으로 주로 이집트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성경 번역본은 두 개의 경로가 존재한다

하나는 비잔틴 사본의 그리스어 텍스트를 기초로 한 번역본으로 KJV(킹 제임스 성경)와 NKJV가 있다

또 하나는 시나이티쿠스와 바티카누스 같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기초하여 번역한 NIV, RSV와 같은 대다수의 현대 번역판들이다.

 

그렇다면 어느 경로가 더 정확한 것일까?

그리고 차이가 난다면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일까?

 

 

19세기에 들어서 학자들은 어느 텍스트가 ‘최상’인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즉 어느 텍스트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문이란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 성경을 말한다

현재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번역해도 되지만 가장 오래된 번역본을 원문과 비교하는 것이다

문제는 신약성경이다, 구약은 더 오래되었지만 원문이 잘 보존되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각시대에 필사본은 수없이 존재한다.

현재도 성경 복사본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현재의 성경도 2000년이 지난 후에는 희귀해 지는 것이다.

현재의 복사본이 2000후에 남아 있다면 2000년 후의 성경과 비교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1831년에 독일 학자인 칼 라흐만은 일부 사본은 수용하고 일부 사본은 부정하는 가운데 최초로 신약성경의 ‘비평 텍스트’를 출판했다.

몇 년 뒤에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발견한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가장 유명한 본문 비평가는 케임브리지 학자인 B.F. 웨스트코트와 F.F.A 호트였다.

이들은 바티카누스와 시나이티쿠스와 같은 4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가장 정확한 성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가장 오래되었고, 둘째 이유로 당시는 편집 과정 중의 개정작업이 있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81년에 웨스트코트와 호트는 비잔틴 사본들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기초하여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웨스트코트와 호트만큼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매달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티카누스와 시나이티쿠스의 우월성을 신뢰하고 절충하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절충하는 방법이란

첫째, 다양한 차이점의 기원을 잘 설명해주는 사본과

둘째, 저자가 직접 집필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본을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신약성경 텍스트가 최상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1901년에 프레데릭 케니언이 한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서로 경쟁을 벌이는 텍스트 유형 간의 차이점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리의 문제는 어느 텍스트가 정확한지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스테파누스의 텍스트에 표현된 만큼이나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텍스트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에 알리스터 맥그라드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현재 과거에 킹 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KJV가 대체로 믿을 만하다는 점을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이런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복음서 기사나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잔틴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나 번역본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분석한 책을 찾아서 몇가지 사례들을 살펴 보았다.

 

개역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딤전 2:5)

KJV : 한 하나님이 계시느니라

 

개역 :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요17:11)

KJV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개역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KJV :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개역 :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KJV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개역 :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KJV :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위에 사례를 살펴보면 의미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기 보다는 번역상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번역가는 원문에의 충실성과 가독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게 축어적으로 번역하는 것을 형식적 등가(formal equivalence)라 하고, 모든 단어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거나 본래의 단어 순서를 따르지 않더라도 본래의 생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번역하는 것을 역동적 등가(dynamic equivalence)라 부른다.

 

위의 사례를 비교해 보면 KJV는 개역번역보다 더 문장이 길다는 특징이 있는데 가독성보다는 형식적 등가 번역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개역이나 KJV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차이점이 없다는 데 동의한다.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개역번역을 사탄의 성경이다. 변개되었다. 오리겐의 영향을 받았다며 악평을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박소리의 ‘주님 오시리, 구름타고 주님 오시리’에서 성경에 대한 질문이 있다.

개인의 체험을 인용하기는 좀 그렇지만 참고한다면 이런 내용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번역과정에서 무리한 번역을 한 책들이 몇 권 있다.”

“어떤 번역이 잘 된 것인가요?”

“English Standard Bible(잉글리쉬 스탠다드 바이블)이다.

King James Bible(킹 제임스 바이블)은 무리한 번역을 한 부분이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들 King James Version(KJV)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Version(버전)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Bible(바이블)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지금도 의아스럽게 여기는 것은 내가 한국인인데 이번에도 한글성경을 말씀하시기 전에 영어성경을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예전에 초반에 천국에 데려오실 때에도 영어로 데려가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내가 미국 살아서인지…. 아무튼 이 부분도 때가 되면 알려주시리라 믿는다.

 

“한국어 번역은요?”

“표준새번역이 현대인들에게 읽기 좋도록 번역이 잘 되었다.

그리고 개역개정도 무리 없이 번역이 잘 되었느니라.”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 지역에서는 개역개정을 사용하는 교회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KJV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나도 그 책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 갔을 때에도 잠시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 읽어왔던 개역한글이 눈에 익었는지라 개역개정을 불편하여 안 보았는데 주님께서는 잘된 번역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성경인용을 개역개정을 기반으로 옮겼다.

 

잉글랜드를 변화시킨 영어 번역 성경

 

교황 다마수스는 기존의 옛 라틴어 텍스트들이 사로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롬에게 정확한 리틴어 성경 번역판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최초로 출판된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1516년에 네델란드 학자였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어 성경을 참고하여 편찬한 그리스어-라틴어 신약성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성경의 중요성은 그것이 최초였다는 사실보다 다른 번역판에 미친 영향에 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텍스트를 이용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틴데일도 그것을 이용해 신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킹제임스 성경도 여러 면에서 틴데일의 번역판을 개정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번역의 텍스트가 된 제롬의 라틴어 성경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예 라틴어 번역판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수스가 죽은 뒤에도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완수 했다.

 

역사적으로 윌리엄 틴데일만큼 영어 성경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없었고 그만큼 큰 희생을 치른 사람도 없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 성경으로 말미암아 나무에 묶인 채 교살되었고 그 몸은 화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틴데일은 새로운 성경 번역에 착수하기 위해 런던에 있던 주교에게 승인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변호하고 있었던 만큼 퇴짜를 맞고 말았다.

그는 1524년 영국에서 독일로 이주하였고 거기에서 루터를 만났고 신약성경 번역을 완수하게 되었다.

틴데일 성경은 영국으로 밀반입되어 5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헨리8세와 주교의 반대와 박해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헨리8세는 38년에 걸친 통치 기간에 72,000여 명이나 처형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성경(Great Bible, 1539)은 대주교 대리였던 토머스 크롬헬은 커버데일에게 매튜 성경을 개정하여 또 다른 번역판을 만들도록 요청하여 만들어진 성경이다.

주교 성경(1568)은 제네바 성경이 대성경을 제치고 평민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자 교회 당국은 거기에 실린 칼빈주의적 주석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대주교 파커가 주교 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성경의 개정판을 만들도록 해서 출판된 성경이다.

 

메리여왕은 1553년에 즉위하여 다시 영국을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신교 지도자들을 화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단행했다.

메리 여왕을 피해 독일과 스위스와 제네바 독립시로 도망갔고 제네바에서 새로운 성경 번역판을 출판하였는데 제네바 성경으로 알려졌다.

제네바 성경은 50년이 넘도록 영국의 평민들이 사용했던 성경이며 인쇄도 160판을 넘을 정도였다.

 

킹 제임스 성경

 

1600년초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는 왕권 신수설을 강력하게 신봉했고 장로교도와 청교도를 ‘해충’이라 부르며 그들의 독립적인 입장과 제네바 성경을 혐오했다.

그는 새로운 성경을 출판하면 백성의 정치 지도자요, 영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임을 알았다.

 

제임스 왕은 54명의 학자를 임명하고 그들을 6개의 위원회로 나누었다.

셋은 구약성경을 맡고, 둘은 신약성경을 맡고, 나머지 하나는 외경을 맡았다.

 

이 성경의 제목 페이는 ‘새로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위원회들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최대한 주교 성경을 따르되, 다른 성경의 텍스트가 주교 성경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그 번역판들(틴데일, 매튜, 커버데일, 대성경, 제네바)을 따르라’는 지침을 주었다.

번역가들은 그리스어 텍스트(에라스무스의 다수파 텍스트)와 히브리어 텍스트도 참고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번역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좋은 번역판들로부터 으뜸가는 번역판 하나를 만들고자 했다’는 점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은 1611년에 출판되었다.

지금은 킹 제임스 성경이 흠정(欽定)역이라 불리고 있지만 제임스 왕이든 누구든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흠정이란 황제가 손수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하는 일을 말한다

결국 킹 제임스 성경이 제네바 성경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번역의 질이나 가격에 있어서 왕의 연줄이 청교도의 연줄보다 우수한 것도 관련이 깊다.

1616년에는 이르러 잉글랜드에서는 제네바 성경의 인쇄가 금지되었다.

이후 킹 제임스 성경은 1762년과 1769년에 수정작업을 거쳐 1769년판이 표준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에서 번역된 성경들

 

개역성경(RV)의 신약은 1881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첫해에만 무려 3백만부가 팔릴 정도였다.

 

미국표준성경(ASV)는 미국의 한 위원회가 영국판 개정자들과 협의한 다음 1901년에 출판했다.

 

개역표준성경(RSV)는 1952년에 출판하였는데 킹 제임스 성경의 아성에 도전한 번역본으로 성경 번역의 봇물을 터뜨린 계기가 되었다.

 

살아 있는 성경(LB)는 무디성경학교에서 일하던 켄 테일러가 열명의 자녀들이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해석이 담긴 다른 말로 바꾸어 주자 잘 이해하여 만들어진 성경이다.

 

영어표준성경(ESV)은 복음주의적으로 개정한 성경이다.

새 국제 성경보다 더 문자적이고, 개역표준 성경보다 더 보수적이며, 새 미국 표준 성경보다 더 읽기 쉽다.

번역가들은 본질적으로 축어적 정확성을 강조한 문자적인 번역이되 동시에 최대한 킹 제임스 성경의 문학적 위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성경이 전세계의 2,4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보급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현재에도 93개의 나라에서 2,000개의 소수민족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소수민족이 많은데 번역상의 차이로 네성경,내성경으로 분열되어 다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

7부 : 한글성경 번역의 역사

<바른 시각에서 본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

 

바른 시각에 대한 이해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는 책이기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연장선상에 있다. 성경을 잘못 번역하게 되면, 원래의 말씀의 부분을 삭제하거나 첨가하거나 다른 의미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번역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살아있는 말씀을 담은 성경을 죽은 종교지식을 담은 경전으로 전락시키게 되고, 그 결과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자체에서도 그같은 행위를 철저히 금하여, 말씀에서 첨가하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이 그 사람에게 더해질 것이며, 삭제하게 되면 아예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계시록 22:18,19).

 

번역한다는 것은 옮기는 것(translating)이다. 한 언어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가감 없이 순수하게 다른 언어로 옮기려면, 최소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말씀을 옮기는 사람이 거듭난 성도일 뿐 아니라, 말씀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실하고 정직한 인격의 소유자라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은 아무리 박식한 학자일지라도 결코 성경을 번역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영과 생명으로서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으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둘째,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한 성경 자체가 바른 것이어야 한다. 이미 첨삭되고 변질된 성경을 가지고 아무리 잘 번역한다 해도 순수한 성경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른 성경이라 함은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신실한 크리스천들과 참 교회들이 지키고 보존해 온 순수한 성경을 말한다.

 

셋째, 번역하는 방법도 중요하다. 철저히 정확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번역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방법도 정확하고 철저한 것이라야 한다. 흔히들 정확하고 철저히 번역하는 것을 "직역"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그 의미가 기계적으로 "형식일치"를 시킨다는 것은 아니다. 형식일치의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사실상 오역이다. 그렇다고 "의역"을 한다는 것은 성경의 경우엔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의역"이나 "자의적 번역"은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창작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진 나이다의 번역이론은 부패한 이론이다. 성경번역에서 "직역"(直譯)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손상 없이 충실하게 그대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형식일치도 의역도 아닌 "정역"(正譯)이다. 곧 말씀을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말씀을 한 자도 첨가하지 않으면서, 의미도 통하고 흐름도 일치하게 번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mind)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와 같은 직역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거듭난 영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바른 성경 번역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1Corinthians 2:9-12).

 

이제 성경번역의 최소한의 요건인 이러한 기준들을 가지고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비록 지면의 제한으로 요점중심의 정리가 되겠지만, 독자 제위께서 "바른 눈"을 가지고 읽으신다면, 과연 우리말 성경 번역이 지금껏 바르게 되어왔는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되어져야 할지도 알게 되시리라 믿는다.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가 몇 번에 걸쳐 연재되기 때문에, 항상 이 세 가지 기준을 기억하고 있으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시리라 믿는다. 세 가지 기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린다.

 

"누가 번역하였나?"

"무슨 대본(臺本)을 사용하였나?"

"어떻게 번역하였나?"

 

물론,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정리하려면 객관적이고도 진실한 자료들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충분한 자료들이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편향되어 있음을 본다. 인간의 역사란 항상 기득권 세력에 의하여 기록되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에 유리하게 편향될 소지가 상존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한 역사란 기록 안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알려진 역사가 있는가 하면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고, 드러난 역사가 있는가 하면 감춰진 역사가 있으며, 보이는 역사가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역사도 있는 법이다.

 

우리말 성경번역의 효시

 

처음으로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존 로스(John Ross)로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에서 북중국과 만주로 파송한 선교사였다. 그는 함께 파송되어 온 매킨타이어(J. MacIntyre)와 함께 만주에 온 한국인들에게 선교하다가, 최초의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존 로스는 동 만주·두만강 유역까지 와서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선교하다가 1876년부터 한국인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다. 몰락 양반 출신으로 한약장사차 만주에 왔다가 배가 난파되어 만주 우장 지방에 있던 선교사 로스의 보호를 받게 된 이응찬은 그 때부터 로스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로스는 이응찬에게 한국어를 배운지 일년만인 1877년에 영문으로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을 내기도 했으며,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가며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응찬으로서는 내키지 않은 일이었으나 '밥벌이'였기에 마지못해 성경번역에 가담하였다(「빛과 소금」'93. 1월호 66쪽 우측상단 3째줄). 그 후에도 로스는 이익세를 비롯해서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 같은 젊은이들을 만주에서 만나게 되었고, 1878년경에는 인삼장사차 온 서상륜(徐相崙)을 만나게 되었다. 한문에 능숙한 서상륜은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의주 청년들 및 김청송과 함께 성서번역과 출판에 힘쓴 나머지 1882년에 만주 심양(봉천)에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 「예수셩교요안내(요한)복음젼서」등 두 권을 출판하였고, 1883년에는 「사도행전」을 번역 발간하였으며,


마침내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예수셩교전서」란 표제로 출판하였다.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말 성경번역의 효시로 알려진 소위 "로스역"이다.


존 로스가 1882년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로스역"에 사용된 대본은 주로 영국의 개역본(RV, Revised Version)이었고, 알포드(Alford)의 그리스어 성경은 참조만 하였다. 번역방법은, 한국인 번역자가 중국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다음, 그 원고를 그리스어 성경 및 영어역본과 대조하여 수정하였는데, 문자적 번역보다는 의미 중심으로 번역하였고 한국어의 관용구를 그대로 살렸다고 했다. 즉 직역 대신에 의역을 택한 것이다. 또 주석을 참조하였는데 주로 마이어(Meyer)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 July 1. 1882).

 

 

이수정역과 고유명사의 음역표기

 

우리말 성경역사에 있어 고유명사를 비교적 정확히 표기한 매우 독특한 성경이 있었는데, 바로 "이수정역"이 그것이다. 당시 이수정은 1882년 우리나라 수신사로 일본에 간 박영효의 일행이었는데, 로스역에 동참했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과는 달리 일본 수신사로 파송될 만큼 사회적 지위도 있었고, 지적 수준도 높았다. 이수정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앞서 1884년에 한국 사람이 우선 한문성경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출간했고, 그 이듬해인 1885년에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출간했다. 「언○」란 당시 '언문'이라 불려진 한글로 한문을 풀이했다는 것이며, 이는 최초의 국한문성경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글을 언문(諺文) 즉 저속한 글이라고 부른 반면 한문자는 진서(眞書) 즉 참글이라고 하였고, 한문은 사대부(士大夫)의 글인 데 반해 언문은 하층민의 글이요, 쉬워서 여자들도 할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하여 천대하였었다. 이수정이 "언○"를 출간했던 것은 성경이 지식인이나 양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역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고유명사 표기법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말 성경들의 대부분이 중국의 한자표기에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이수정역은 "고유명사의 음역표기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 되었다. "음역"(transliteration)이란 "원천어의 발음 그대로를 수용어에서 최대한 가깝게 옮기는 것" 즉 소리나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말하며,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원래 음역을 원칙으로 하게 되어 있다.

 

고유명사란 지구상에 단 하나 있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고유명사는 나라와 언어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음역을 원칙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수정역이 이 같은 음역의 원칙에 따라서 고유명사를 표기해 주었다. 이수정역은 「언○」의 성격이므로 문장에서는 우리말을 혼용하였고 한자에는 우리글로 음을 달았는데, 특히 고유명사나 우리말에 해당된 어휘가 없는 경우에는 한자 표기에다 그리스어 원어 발음을 우리말로 적었다. 가령 「耶蘇基督」에는 「예슈쓰 크리슈도스」를, 「耶路散冷」에는 「예루샬넴」을, 「洗禮」에는 「밥테슈마」를 달았다. 어쩌면 이 같은 음역의 표기방식이 일본어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일본어 성경이 바른 음역의 원칙을 살렸다면 바른 표기인 이상 본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수정역은 고유명사를 음역의 원칙에 충실하게 바르게 표기한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까지 바르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고유명사 표기를 음역의 원칙에 따른 것이 잘한 일이란 말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상륙할 때, 그들은 일본에서 번역한 이수정역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두 선교사는 후에 이수정역이 언어상, 신학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대폭적으로 수정한 「마가의 젼○복음서언○」를 내 놓았다. 그러나 미국성서공회 본부에서는 그들이 이수정역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경번역을 위한 공식기구로서 번역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선교사가 입국한지 8년만인 1893년에 우리말 성경번역을 위한 상설성경실행위원회(常設聖經實行委員會, The Permanent Executive Committee)와 그 산하기구인 성경번역자회(聖經飜譯者會, 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가 조직되었다.

 

펜위익과 만민됴흔긔별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 중에서 로마 카톨릭의 혼합주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선교사로서 화란의 침례교 선교사인 말콤 펜위익(Malcom C. Fenwick)을 들 수 있다. 그는 세례 대신 침례(浸禮)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직계 제도에서 볼 때 일개 평신도로서 교회개척의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교단의 입장보다는 성경대로 선교하려고 시도한 매우 이례적인 선교사였다. 펜위익은 1889년 12월에 내한하여 1898년에는 주한 외국 선교사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펜위익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세례"(洗禮) 표기를 강행하고자 하고 토착화 신학에 따른 혼합주의적 성경번역을 밀어부치게 되자, 펜위익은 동 번역위원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에 요한복음젼과 비립비인서(빌립보서)를 번역 출판하여 배포하였고, 1917년에는 신약성경 "만민됴흔긔별"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의 활동지역이 원산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 시베리아, 몽고에 이르렀으므로 그가 번역한 신약전서를 "원산역"이라고도 부른다.

 

펜위익의 원산역은 대부분 기존 성경번역위원회에서 결정한 번역원칙에 따랐지만 몇 가지는 독특하고 참신하게 번역한 특징을 갖고 있다: "세례"(洗禮) 대신 "침례"(浸禮)로 표기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킹 제임스 성경의 "Holy Ghost""성신"(聖神)이나 성령(聖靈)으로 하지 않고 "셩숨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대문자로 시작되는 "Spirit"은 "숨님"으로 소문자로 시작되는 "spirit"은 "숨"으로 한 것 등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존대법에 있어서도 주님께 대한 존대어를 비교적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다른 한글성경과의 차별성을 갖는다. 가령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에서 다른 한글성경들이 죄다 마귀가 주님께 반말을 한 것으로 번역해 놓았으나 펜위익역만은 "태○님○셔 하나님의 아○ 되시거던(태자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거든)…"으로 번역하여 마귀조차도 주님을 알아보았기에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었음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주님의 존함을 "예수씨"로, 크리스트님을 "긔독"(기독)으로 표기한 것도 독특하다.

 

 

한글 성경 번역사

 

한글 성경 구역과 개역

 

가. 최초의 한글 성경과 구역(舊譯) 성경

179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천주교 신자인 최창현이 4복음서의 성경 구절을 발췌하고 해석을 붙인 한문본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재편집하여 한글로 옮겼 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필사본 '성경직광익'으로 최초의 우리말 번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최초로 낱권 성경 전체가 번역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Ross), 맥킨타이어(McIntyre)와 한국인 서상륜 등이 공동으로 번역한 '예수셩교 누가복음'이었다.

1883년 11월에는 일본에서 이수정이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한문 성경에 토를 달아 '懸吐韓漢新約全書'를 출판하고, 다시 한글 성경번역 작업에 착수 1885년 한 문 옆에 한글을 병기하는 형태의 '신약마가젼 복음셔언'를 출간했다.

미국인 선교사 언 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져온 성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번역한 '예슈셩교젼셔'가 출간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글 신약전 서인 셈이다.
이후 신약 전서는 개정을 거듭한 끝에 1906년 최초의 공인 역본이 발간된다.

이어 1906년 '창세긔'와 '시편'의 발행을 시작으로 1911년 3월 '구약젼셔'의 번역을 마 쳐 한글 최초의 '셩경젼셔'를 발행한다. 이 성경을 개역(改譯)과 구별하기 위해 구역(舊 譯)이라고 부른다.

 

나. 개역(改譯) 성경

구역의 출판 이후 곧바로 영국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개역 위원회를 구성하여 1911년 개 정작업이 없었던 구약부터 개역 작업을 시작했다.

1912년∼1937년에 번역을 중심으로 한 중요 작업이 이루어진 끝에 1937년 '개역성경'이 간행되고, 이후에는 번역보다는 편집 체 제와 철자상의 변화가 주를 이루어 195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1952년 개정 출판하 고 다시 1956년 최종적으로 개역과 편집 체제의 수정을 마쳐 오늘날의 '개역성경'이 완성 되었다.

60년대에 들어와 원문에 충실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현대어역이 요청되어 60년 9 월 대한성서공회는 신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67년 12월 '신약전서 새번역'을 발행한다.

새번역을 끝낸 성서공회가 구약의 번역을 준비하는 중에 신구교가 함께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특히 30세 이하 청년들을 위해 전도용으로 사용할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의한다.

이 에 68년 구약공동번역위원회를, 다음해 신약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번역에 착수하고 71년 신약, 77년 외경을 포함한 '공동번역 성서'를 발행한다.

이 성경은 우리 나라 성경학자 들만으로 원전에서 직접 번역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1983년 대한성서공회는 개역의 뒤를 이어 사용하기 위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현대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의하고 1993년 '표준 새번역 성경'을 출판한다.

 

 

한글 성경 해방 이전 이후

 

가.해방 이전

한국에 성경을 소개한 사람은 1832년에 화란 선교사 구츨라프 목사였다.

그는 홍주 고대도에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한국 사람 이응찬, 백홍준은 1883년에 누가복음 3천부를 발행했다.

1887년에 로스목사는 같은 계통에서 파송된 매킨타이어(John Mclntire)와 함께 신약성경 전부를 번역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에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1885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 왔다.

1887년에 아펜젤러 역 마가복음, 1890년에 언더우드역 누가복음과 스크랜톤 역 로마서, 1892년에 3인 공역인 마태복음, 1894년에 펜윅(Fenwick) 역 요한복음, 1895년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897년에 골로새서와 베드로전.후서, 1900년 5월에 신약성경 전부가 완역되었다.

1904년에 신약전서가 개역되었고, 1906년에 이것을 재수정하여 결정본으로 공인역으로 출판되었고, 1937년에 다시 개역하여 일제 말기를 지나 8.15해방을 거쳐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해방 이후

1961년 1월 25일에 한국 학자들만의 노력으로 마태복음이 번역되었다.

1967년 12월 15일에 새 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한글 고문으로 한갑수, 문장 위원으로 전영택.안신영.임한영.박영준.석용원.김재준 제씨, 원문 대조위원으로 지원용.윤성범.곽안전 제씨, 서기는 정용섭 목사가 수고하였다.

1968년 2월 15일에 신.구교 성경번역 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김정준 박사, 서기 정용섭 목사, 위원에 배제민.문익환.선종완(신부).최의원(사정상 사퇴) 제씨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성경 공동번역이 출판되었다.

위원에는 구교측에 백민관 신부, 최창덕 신부, 김창렬 신부(사정상 사퇴), 평신도측에 김진만 교수(성공회), 이근섭 교수(감리교), 신교측에 정용섭 목사(성서공회 직원), 박창환 목사다.

1977년 4월 부활주일에 공동번역 성서(신.구약합본)가 출판되었다.

한편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영어판 리빙 바이블을 기초로 하여 1977년에 《현대인의 신약성경》을, 1985년에는《현대인의 성경》을 발행했다.

또한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967년에 나온 새번역 신약성경을 수정하고 구약성경을 다시 번역하여 1993년《표준 새번역 성경》을 발행하였으나, 이 성경이 진보적 신학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지나친 의역이라는 이유로 보수 신학계와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있다.

 

 

바른 성경 없이는 바른 신앙이 없다.

 

바른 성경 없이는 바른 신앙이 없다. 성경은 교리를 재는 잣대(Cannon)인데 틀린 잣대로는 교리를 올바로 잴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어떤 조명도 주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개혁을 이루는 것은 변개되지 않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출처: Return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