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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9장 묵상

은총가득 2021. 11. 24. 10:41

 

 

 

잠언 9장

 

지혜의 초대(잠언 9:1-12)

 

여기에서 지혜는 훌륭하고 도량이 넓은 여왕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 여왕은 매우 위대하며 관대한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바로 이 지혜이며 하나님은 이 지혜의 말씀 가운데에서 인간을 향하신 자기의 호의를 알리신다. 말씀되신 하나님은 바로 이 지혜이며 아버지께서는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셨다. 전장인 8장에서는 세계의 창조자로서 자기의 장엄하심과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던 그가 여기에서는 세상의 구속주로서 자기 은혜와 선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지혜"라는 말은 여기서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혜의 보화들이 그리스도께 감춰져 있으며 그의 구속 사업에서 신비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사실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지혜가 자기 제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한 풍성한 준비.

이것은 호화판 연회의 비유로 묘사되고 있는데 우리의 구세주께서 "천국"을 큰 잔치에 비하신 비유도 아마 여기서 따온 것인지도 모른다(마 22:2; 눅 14:16).이것은 이사야서에도 그렇게 예언되었다(사 25:6). 이것은 아하수에로왕이 "자기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을 나타내기"위해 마련한 것과 같은 그런 잔치이다. 복음의 은혜도 이와 같이 주의 만찬이란 성례 속에서 우리 앞에 베풀어진다. 그가 자기 손님들을 환대하기 위해 마련한 것은 무엇인가?

 

1. 여기에는 으리으리한 궁전이 마련되어 있다(1절). 지혜는 자기의 모든 내빈을 수용하기에 족한 집을 구하지 못하자 일부러 하나를 지었다. 그 집을 튼튼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는 "일곱 기둥을 다듬었는데" 이들은 그 집을 매우 견고하게 하며 매우 웅장하게 보이도록 한다. 천국은 지혜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기의 모든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은 자기 아버지의 집이며 그곳에는 거할 저택이 많다. 지혜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그리고 가셨다. 그는 땅을 어떤 것에 굳게 매달지 않으셨으므로 이 지구 안에서는 어떤 도성도 영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천국은 기초가 있고 기둥이 있는 도성이다.

 

교회는 "일곱 기둥"이 떠받치듯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에 의해 지지되는 지혜의 집이며, 그는 자기의 손님들을 그 곳으로 초대한다. 아마 솔로몬은 자기의 경건한 종교의 예배를 위해 근간에 건축했던 성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성전으로 나아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지혜의 교훈을 받기도 하라고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학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2. 여기에는 근사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2절). "그는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였다." 풍부한 음식이 예비되었고 게다가 그것을 모두가 극상품이었다. "그는 자기 희생 제물을 잡았다"(말 뜻은 그러하다). 잔치는 호사스런 잔치지만 그것을 성스러운 잔치요, 희생의 잔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참으로 먹을 떡"이 되는 것은 "그의 살"이요 "참으로 마실 것"은 "그의 피"이다. 주의 만찬은 속죄의 희생 제사로 즐기는 화해와 기쁨의 잔치이다. 포도주는 맛과 향기를 보통 때보다 더 내도록 하기 위해 더 짙은 것으로 "혼합"되었다. "그의 영혼"이 바라고 만족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완전하게 상을 갖추었다." 즉 그는 의와 은혜, 화평과 희락,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성령의 위로, 그리고 영생에 대한 온갖 보증과 증거 등으로 자기 상을 갖추셨다.

 

이 모든 것은 지혜가 손수 하시는 일이다. "그는" 짐승을 잡았고 포도주를 혼합하였다. 이것은 음식을 장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그는 이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하시므로)그 준비의 훌륭함을 의미한다. 지혜자가 손수 마련하시는 것이니까 그것은 목적에 정확하게 꼭 들어 맞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Ⅱ. 그가 보내신 은혜로운 초대. 이 은혜로운 초청은 몇몇 특별한 친구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와서 이렇게 준비한 것에 참예하라는 것이었다.

 

1.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초청장을 돌리도록 자기 종들을 부린다. "지혜가 그의 여종을 보냈다"(3절).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언약속에서 그 계약 조건에 기꺼이 응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준비를 하셨고, 복음의 사역자들은 이 준비를 통지하도록 위임받고 명령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처녀의 순결함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지 않으며, 자기들이 받은 명령을 정확하게 준수하면서 "길과 산울가"에서라도 만나는 자마다 와서 지혜와 즐기라고 불러야 한다(눅 14:23). 왜냐하면 "온갖 것이 지금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인간 자손들의 안녕을 간절히 희구하며 거짓된 헛 것을 위해 자기들 자신의 은혜를 배격하는 정경에 슬퍼하는 자로서 친히 "성 중 높은 곳에서 부른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그 자신의 복음을 직접 선포하셨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보내시고도 그들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한 말을 굳게 하셨다. 사실 이 말씀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이었다(히 2:3). 그는 서서 "이리로 돌이키라"고 부르셨다. 우리는 누가 초청하시는지는 안다. 그러나 그가 초청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그의 초청은 어떠한 것인가 살펴 보기로 하자.

 

(1) 초청의 대상은 누구인가? "어리석은 자와 지혜없는 자"(4절). 우리가 만약 대접을 해야 할 경우라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고 게고 더욱이 그런 자들에게 와 주십사고 알랑대지도 않을 것이다. 차라리 철학자나 학식있는 분들을 모시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들의 탁상 담화가 향상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미치광이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혜는 그런 자를 초대하고 있다. 지혜가 주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런 자들이 극히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 지혜가 준비하고 초대하는 일에서 염두에 두고 도모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들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가 초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지혜로운 자로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마음이 없는 자(말 뜻은 그러하다)가 그리고 들어가면 그는 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가 준비했던 것은 음식이라기 보다 오히려 내복약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가장 귀중하고 바람직한 치료, 곧 마음의 치료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초대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베풀어지며 자신을 물리치지 않는 자라면 그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다.

 

[1] 즉 그들이 아무리 바보라도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다.

[2] 또한 그들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멸시받거나 희망 없는 자로 포기되지도 않는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자기들이 본다고 말하며(요 9:41)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어리석은 자를 부르러 오신 것이다. 즉 자신의 우매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기꺼이 "미련한 자가 되려는 자"자를 원하시는 것이다(고전 3:18).

 

(2) 그 초대는 어떠한 것인가?

[1] 우리는 지혜의 집에 초대받고 있다. "이리로 돌이키라." 나는 바로 "우리가 어리석고 지혜없는 자"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 이러한 초청개의 특성을 갖지 않는 자가 있는가? 지혜의 문은 이런 어리석고 지혜없는 자에게 열려있다. 그는 그들과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들의 유익을 위해 딱 한마디만 하고 싶어하며, 그 외에 다른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

 

 

[2] 우리는 그의 상에 초대된다(5절).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경외 속에서 찾아지는 참된 즐거움을 맛보라는 것을 뜻한다.

복음의 약속에 입각한 믿음을 따라 행동하며,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그 위로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마련하신 식물로 먹고 그것으로 잔치하게 된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형성하여 그로써 영양을 공급받고 또 원기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형성되고 양육되며 힘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지혜있는 자의 "식물"이 될 것을 소유하고 있다.

 

(3) 이 초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6절).

[1] 그들은 모든 나쁜 교우를 끊어야 한다. "어리석음을 버리라.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말고 저희 길을 따르지도 말며, 흑암의 일이나 그런 어두운 일에 관계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 미덕을 향하는 첫 발자국은 악을 피하는 것이며, 악을 피하는 제일보는 악한 자를 피하는 것이다. "너희 행악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2] 그들은 죽음에서 깨어나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에서가 아니라(쾌락 중에 생활하는 잘들은 살고 있으면서도 죽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 대한 봉사 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사는 자들만이 참으로 사는 것이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사는 것이다. "단순히 짐승처럼 동물적인 삶을 살지 말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사람답게 살아 봐라. 생명을 얻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신령하게 살아라.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엡 5:14).

 

[3] 그들은 지혜의 길을 택해야 하며 그 길을 고수해야 한다. "명철의 길을 행하라. 이 후로는 경건한 신앙의 규칙과 올바른 이성의 법칙을 따라 네 스스로를 다스리라."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우리는 지혜롭게 행하는 자들과 연합하고 동일한 정신과 보조로 걸어가는 자들과 합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Ⅲ. 초청해 오라고 부르러 보내는 여종들에게 지혜가 내리는 지시. 이 시녀들은 목사나, 자기 위치에서 그의 세력과 의도에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가 여종들에게 말해 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영혼을 위해 어떤 양식이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전반적으로 말해 주며 그것에 대한 전체적인 제의를 해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개의 사람들에게도 "직접 증언해야 하며, 그들의 과오를 말해 주고 "징계"와 "책망"도 해야한다.(7.8절). 또한 그들이 어떻게 하면 교정할 수 있는지 그 방법도 훈계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가르치라"(9절). 하나님의 말씀은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훈하기"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말씀의 명분도 그와 같은 것이다.

 

2. 그들은 얼마나 상이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는 어떤 방도를 취해야 하고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있는가?

 

(1) 그들은 얼마간의 "거만한 자"와 "악인"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이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학대하며, 역대하 30장 10절에 나오는 자들처럼 여호와의 잔치에 초대하는 자들은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며, "그들을 능욕할"것이다(마 22:6). 그들이 비록 그 어리석은 자들을 지혜의 집에 초대하지 말라는 금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견책하고 책망을 하면서까지 초대를 하려고 하진 말라는 충고를 받고 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지 말라. 이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그리스도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대해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저들을 그냥 두어라(마 15:14) 그들을 징계하지 말라."

 

[1] "저희에게 대한 공의로, 징계하지 말라. 이미 받은 은혜의 방편을 경멸하는 자들은 더 이상 받을 은총의 수단을 상실하는 자이다. 이처럼 더러운 자들은 여전히 저희 더러움 중에 있게하라. 우상에게 현합된 자들은 그냥 둬두어라. 보라!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돌이키노라."

 

[2] "너희 자신에게는 분별로, 징계하지 말라. 너희가 만일 그들을 책망한다면, 첫째, 너희는 자신의 수고만 낭비하게 되며 실망 때문에 능욕을 받게 된다. 둘째, 너희는 그 견책으로 인해 그들을 격분하게 만든다. 만일 네가 그 일을 충실히 행한다면 아무리 지혜롭고 친절하게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미워하고 욕설을 퍼부을 것이며 네게 대해 할 수 있는 온갖 나쁜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흠을 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에게 참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너희의 견책은 어떤 유익을 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칠 것이다."

 

(2) 그들은 또한 지혜롭고 선하며 공평한 자들을 만나게 될 터였다. 모두가 다 거만한 자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 하고 그것을 즐거워 할 정도로 지혜롭고, 또 스스로에게 공정한 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자를 만나면 다음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할 계제만 된다면 그들을 견책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라 하더라도 완전하게 지혜롭지는 않으며 그들에게도 징계를 필요로 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자의 지혜를 존경한다고 하여 그의 잘못을 묵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또 "지혜있는 자"는 자기가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의 지혜로 인해 책망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지혜를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자기 약점이 자기에게 나타나 주기를 더욱 더 바란다. 왜냐하면 "작은 우매도" "지혜와 존귀로 유명한 자"에게는 큰 흠이 되는 까닭이다.

 

[2] 우리는 책망으로 그들에게 "교훈을 더 해야"하며 그들을 "가르쳐야"한다(9절).

 

[3] 우리는 그렇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이 친절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시 141:5). 지혜있는 자는 자기에게 신실하게 대하는 자들을 친구로 여길 것이다. "그런 자는 책망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분명한 처신 때문에 너를 사랑할 것이며, 네게 감사하고 기회가 있다면 다른 때에도 네가 꼭같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책망을 잘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책망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로운 일의 하나이다.

 

[4] 지혜가 잘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유익을 줄 것이요, 목적에 부응하게 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책망과 교훈으로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다. 즉 그는 "학식이 더할 것이요," 지식이 성장하고 은혜가 자라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는 너무 현명에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기가 너무 선하기 때문에 더욱 선하게 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하며 완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따라가며 배워야 한다. "지혜 있는 사람에게 주라." 그에게 충고와 책망과 위로를 주어라. 그리하면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다." "그에게 기회를 주어라"(70인역은 그렇게 되어있다). 그에게 자기 지혜를 나타내 보일 기회를 주어라. 그리하면 그는 그것을 보여 줄 것이고 지혜로운 행동은 습관을 강하게 해 줄 것이다.

 

Ⅳ. 초대받은 이들에게 그가 주는 교훈. 그의 여종들은 이것을 그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1. 그들은 참 지혜가 어디에 존재하며 지혜의 상에서 누릴 그들의 향응은 무엇이 될 것인지 알아야 한다(10절).

(1)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곧 "지혜의 근본"이다.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대한 외경과 그의 진노하심에 대한 두려움이 곧 그에게 대한 경외이며 이는 참 종교를 향해 제 1보를 떼는 것이요, 그 시작이 된다. 여기에서 다른 모든 사례가 생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경외가 고통을 주지만 사랑이 점차로 그 고통을 몰아내 줄 것이다.

 

(2) 머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거룩한 것들(이 말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우리 성경:"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 일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속한 것이며(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거룩한 일"이라고 부른다)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일에 속한 것이다. 즉 책망은 "거룩한 것"이라고 불린다(마 7:6). 혹은 거룩한 사람들이 갖고 있거나 거룩한 예언자들이 가르친 지식이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한 것을 아는 것이 "명철"이리 것이다. 이것은 최선의, 그리고 가장 유용한 명철로서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며 가장 훌륭하게 활용될 것이다.

 

2. 그들은 이 지혜의 편익이 무엇이 될지 알아야 한다(11절).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 질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절제가 그들의 날을 단축시키는 반면 지혜는 네 신체의 건강에 기여하여 땅 위에서 네 생명의 해가 더 하리라. 그것은 너를 천국에 이르도록 해 줄 것이며 거기에서 네 날은 in infinitum-즉 무한히 많아질 것이며, 네 생명의 해는 끝없이 더할 것이다.

경건한 신앙의 길 외에는 참 지혜가 없고, 그 길의 목적지로 가는 것 외에는 참 생명이 있을 수 없다.

 

3. 그들은 이 타당한 제의를 택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아야 한다(12절).

 

(1)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행복.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다. 지혜로 말미암아 이득을 얻게 되는 자는 그 지혜가 아니라 바로 너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유익을 주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간청을 받는 것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너는 그 이득을 남에게 주어 버리고 떠나는게 아니라(우리의 세상재물은 죽을 때에 남겨주고 떠나기에 남의 것이라 하고 있다, 눅 16:12) 너와 함께 딴 세상으로 가지고 갈 것이다."

자기 영혼을 위해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위해 지혜로운 자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건한 자들 이외에 자신의 참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지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권면하며, 미련하고 타락한 우리를 개심시켜 준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일을 하도록 하며 장차 올 세상에서는 더욱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해 준다.

 

(2) 지혜를 경시하는 자들의 수치와 파멸

"네가 만일 지혜자의 제의에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1] 즉 "너는 그것에 대해 꾸중을 당하리라." 선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악한 자들은 자신에게 감사할 수 있을 뿐이다(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그는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닌 것이다). 사탄은 시험할 수 있을 뿐이며 강요할 수는 없다. 악한 벗들도 사탄의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잘못은 죄인 자신의 탓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2] 또한 "너는 네가 코웃음치던 것으로 손실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네 스스로를 멸망하게 하는 것일 뿐이고, 네 피는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며 이것을 생각하며 네 저주는 한층 악화될 것이다. 아들아! 이렇게 아름다운 제의가 네게 베풀어졌으되 너는 그것을 받아드리고자 아니하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이렇듯 아름다운 생명의 탄탄대로에 서 있었는데도 오히려 사망의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

 

 

 

우매함의 초대(잠언 9:13-18)

 

우리의 애정을 하나님과 경건으로 쏠리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고, 누구라도 온 세계가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유혹자는 방심하고 있는 영혼을 죄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이며, 대개의 경우 그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나 지혜자의 구애 작은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유혹하는이는 누구인가? "미련한 계집," 곧 어리석음 자체가 지혜와 맞서고 있다. 나는 "이 미련한 계집"이 특히 세속적인 육욕의 쾌락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13절). 그것이야말로 미덕의 큰 원수이며 악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딴 어느 것 보다도 더 심성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며, 양심을 마비시키고, 확신의 불꽃을 꺼 버린다. 이 유혹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1. 아주 무지하다. "그 계집은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즉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은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거나 확고하지 못하다. 영혼 안에서 득세하게 되면 거룩한 것에 대한 모든 지식을 죄다 소모하게 된다. 그 거룩한 자에 대한 지식도 죄다 소실되고 잊혀진다.

"음행과 술과 새술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이러한 것들은 인간을 고주망태가 되게 하며 어리석게 만들고 만다.

 

2. 매우 치근치근하다. 합리적으로 내 놓을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이 여인은 한층 더 격렬해지고 더욱 더 졸라댄다. 그래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강요하여 목적을 이루는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이 여인은 "떠들고" 요란하며(13절), 끊임없이 젊은이들에게 나타나서 유혹으로 괴롭힌다. "이 여인은 자기집 문에 앉아"(14절) 먹이를 노린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문에 앉아 선을 행할 기회를 찾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 여인은 마치 법을 내릴 권세가 자기에게 있기라도 하는 양, 또한 우리 모두가 다 "육에게 빚진 자요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인양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이 단어는 "보좌"를 의미하는 말이다)에 앉아 있다." 마치 성명을 누리며 존귀한 데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가 "성읍 높은 곳에" 앉을 가치가 있는 자로 생각되기라도 하는 듯이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여인은 아마 상냥한 듯이 가장해 보이기 보다는 상류사회에 속하는 척해 보임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 여인은 "신분의 귀천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미덕의 엄격한 법이 허용되는 이상으로 큰 자유를 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너는 어째서 미덕의 법에 속박될 정도로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할 법하다. 유혹자는 이와 같이 친절하고 도량이 넓은 것같이 보이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Ⅱ. 시험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을 곧 교육을 잘 받는 젊은이들이다. 이런 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이 여인은 가장 의기양양해 할 것이다.

1. 그렇다면 그들의 실제적 특성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들"이다(15절). 그들은 신앙과 미덕의 길에서 훈련을 쌓았으며 그들의 출발은 매우 희망적이고 좋았다. 그들은 선에 대해 굳은 결심과 목적 의식을 가진 듯이 보이며, 7장 8절의 청년처럼 "음녀의 집에 이르는 길로 가고"있지 않다. 이 여인이 목적하고 덫을 놓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자들이며, 그들을 빗나가게 하기 위해 자기의 온갖 기술과 매력을 총동원한다. 만약 그들이 "자기 길을 바로 가며"이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한다면 그는 그들을 따라가며 소리쳐 부를 것이다. 이 유혹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녀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와 지혜없는 자"라고 하고, 따라서 종교의 속박과 형식의 얽매임에서 구제받으려면 자기에게로 와서 배워야 한다면서 그들을 자기 학교로 초대하고 있다. 이것은 연극에서나 하는 수법이다(또 그것은 이 부분의 말씀에 대해 박진감 있는 해설이 된다). 이 연극에서는 덕스러운 교육을 받은 건실한 청년이 극중의 바보가 된다. 이 어리석은 자를 연마시키고 세련시켜 재주 있는 멋쟁이로 둔갑시켜 놓겠다는 미명하에 그를 그의 저속한 친구들보다 "칠 배나 더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는 것이 이 극의 줄거리인 것이다. 죄와 불경건에게 대해 어리석은 것이라고 빈정대야 마땅한 말이(4절) 매우 부당하게도 여기서는 왜곡되어 미덕의 길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어리석은 자인지 밝혀 줄 날이 올 것이다.

 

Ⅲ. 유혹의 내용은 무엇인가?(17절) "도적질한 물이 달다."

지혜가 초대한 것은 자기가 잡은 짐승과 자기가 혼합한 술이었음에 반하여, 유혹하는 자는 물과 떡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러나 물과 떡은 목마르고 굶주린 자로서는 감지덕지하며 받을 만한 것이다. 더우기 그것은 보통의 물과 떡보다 더욱 "다른 맛이 있는 것"으로 가장되고 있다. 즉 그것은 "도적질한 물과" 들킬까봐 "몰래 먹는 떡"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금지된 욕망의 쾌락은 규정된 사랑의 즐거움보다 더욱 맛있다고들 떠들어댄다. 정당하게 얻은 소득보다 부정직한 이익을 더 좋아들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상에게 대한 대담한 경멸 뿐만 아니라 무례한 도전을 뜻하는 말이다.

 

1.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신적 명령의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훔친 물이기 때문에 더욱 달다고 하는 점에서 이 궤변은 하나님의 법을 대답하게 모독하고 뻔뻔스레 거역하고 있다. Nitimur in Vetitum-즉 우리는 금지된 것을 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순된 심령을 우리의 첫조상에게서 물려 받아 가진 것이다. 그들은 딴 모든 나무들보다 금지된 나무를 "탐스러운 나무"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저주에 대하여.

이 떡은 발각되어 형벌을 받을까봐 "몰래 먹는 떡"이다. 죄인은 자기의 확신을 그토록 무산시켜버리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고 의기양양해 한다. 불안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감히 죄를 저지르며, 몰래 먹었으니까 절대로 발가되지도 않을 것이고 그 값을 물게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 미끼의 주성분은 달콤함과 별난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유혹자 자신이 나타내 보이듯이 그것은 너무나 엉터리 없는 것이며 불순물이 혼합된 것이어서, 그와 같은 미끼가 어떻게 이성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Ⅳ. 유혹에 대한 치료제(18절). 그것은 몇 마디의 말씀으로 조제된 것이다. 이런 꾐에 빠져 곁길로 나갈 만큼 지혜가 없는 자는 질질 끌려 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중에 피치 못할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믿으려 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또 시험자가 그로 하여금 알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 어리석은 자는 쾌락 중에 사는 자들이 "살고는 있으나 죽은 자이며, 허물과 죄악 중에 죽어 있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며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쾌락에는 죽음의공포처럼 공포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거기에는 거인들, 곧 "르바임"(네피림)이 있는 것이다.

 

옛 세계의 죄인들 곧 "당시에 땅에 있던 용사들"을 멸망시킨 것도 바로 이 죄였다. 이 "도적질한 물"로 대접을 받는 "그의 객들"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대로 상에 있으며, 그 벼랑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서 이미 "음부 깊은 곳"에 있으며, 사탄의 포로가 되어 그의 뜻대로 끌려 다니고 이따끔식 자기 양심의 공포의 채찍에 신음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땅 위의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탄의 깊은 곳은 "음부의 깊은 곳"이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죄는 구제할 길이 없는 파멸이다. 그것은 이미 무저갱이다. 솔로몬은 이와 같이 낚시 바늘을 보여 주고 있으나, 그의 말을 믿는 자면 그 미끼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참된 지혜(잠 9장)

 

[1-6절]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집을 짓는 것은 교회 건립을 상징한다고 본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고전 3:9). 일곱 기둥을 다듬는 것은 견고하게 집을 짓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는 견고한 집이다(마 16:18). 지혜는 잔치를 베푼다. 바른 교회는 풍성한 잔칫상을 마련한다. 짐승을 잡아 고기를 굽고 맛있는 포도주를 음료로 준비하듯이, 바른 교회는 하나님의 풍성한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지혜는 여종들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사람들, 특히 어리석은 사람들을 부른다.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 곧 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우선 “이리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요청이다. 또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한다. 지혜의 말씀을 먹고 마신다는 것(요 6:54-56)은 그 말씀을 믿는 것을 말한다. 또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고 말한다. 지혜의 말씀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의 길이다. 또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한다. 신앙은 결국 삶이다.

 

[7-12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테킬라)[시작]이요 거룩하신 자(케도쉼--강조의 복수형)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하리라.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우리는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미워함과 모욕을 받고 흠을 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거만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그는 마음이 높기 때문에 남의 교훈이나 충고와 조언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면, 그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책망을 들으면 잘 받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고치기 때문에 자기를 책망한 자를 사랑하게 된다. 또 우리가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면, 그가 더욱 지혜로워져서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고 그의 학식이 더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나 의로운 자는 교훈을 받아 더 지혜로워지고 더 지식이 있는 자가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자라간다.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곳에는 참 지혜가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불경건, 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와 부도덕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또 지혜는 유익하다. 지혜는 장수(長壽)의 복을 주며 지혜자에게 유익을 줄 것이나, 거만한 자는 홀로 해를 당할 것이다.

 

[13-18절]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지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지혜가 사거리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부르듯이(잠 8:1-5), 그 여종들을 보내어 그들을 생명의 길로 초청하듯이(잠 9:1-6), 미련한 여자도 사람들을 부른다. 미련한 여자는 떠들며 말이 많다고 묘사된다. 빈수레가 요란하듯이 어리석은 자가 말이 많으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이다(벧전 3:3-4).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묘사된다. 그는 진리의 지식이 없고 의롭고 선한 것을 알지 못한다.

 

미련한 여자는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부른다.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은 자기 길을 바로 가는 자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3). 그 여자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를 부르며 유혹한다. 누구든지 지혜로 무장하며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그는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은밀한 음행을 선전하는 말인 것 같다. 은밀한 음행은 순간적으로는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나, 심히 죄악되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다. 성도는 은밀한 악을 버리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한다.

미혹받은 자의 결말은 불행이다. 음행의 죄의 결과는 죽음이요 지옥 형벌이다. 행음자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교회를 통해 전해지는 지혜의 말씀을 믿고 생명을 얻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특히 거만함을 버려야 한다. 거만한 자는 참 지혜를 저버린다.

셋째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의 시작이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참 지혜이다.

넷째로, 지혜자도 음행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음행에 빠진 자들이 지옥의 불못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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