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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제자도

은총가득 2021. 11. 20. 10:59

제자도: 섬김 (막 10:35-45)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패배하여 고난을 당하고 사형 당하는 메시야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는 두 제자(10:35-36)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36)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제자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권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가까워짐에 따라 예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면 좀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눈치 작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가장 먼저 선수친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예수님께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들을 가장 높은 자리(우편-첫째 자리, 좌편-둘째 자리)에 앉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35-37). 마태는 이 청탁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개입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20:20-21). 살로메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언니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 사촌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척 관계를 이용해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현재도 그들은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더 신임하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베드로보다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로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교훈과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0:38-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38)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39),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40)."

  예수님은 로비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서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고난을 알지 못하고 영광만을 추구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이 당해야 할 고난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38)" 여기에 나오는 "잔"은 죄와 반역자에 대해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시 75:8, 사 51:17-23, 렘 25:15-28, 겔 23:31-34, 합 2:16, 슥 12:2 참조). 예수님은 인간에게 내려질 "진노의 잔"을 우리를 대신해서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도 당연히 이 잔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이 순교해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이러한 잔과 세례의 의미를 알지못했기 때문에 은밀하게 그것을 구했습니다.

 

  야보고와 요한은 자신들도 "예수님의 잔과 세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을 자처한 것은 더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새 정부를 만들다 실패하면 십자가 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기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를 뒤집고 새 정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로마인에게 잡혀서 사형당할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후에 야고보는 순교했고, 요한도 오랫동안 박해받고 귀양 생활을 하다 돌아와서 죽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40).
 

3. 제자들의 반응과 주님의 교훈(41-44)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41),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4)."

 

  야고보와 요한이 좀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은밀하게 로비한 소식이 다른 제자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41). 그들이 이렇게 노한 것은 그들도 같은 야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분노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42).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디아코노스)이 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종(둘로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43-44). 예수님은 높고 낮음의 관계를 섬기는 "봉사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대함과 존경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지 않고 봉사와 섬김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섬김의 모범(예수 그리스도)(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섬김과 봉사에 있어서 최선의 모델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섬김 받기보다 우리를 섬기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섬김과 봉사 이론은 위대함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경배 받기를 포기하시고 오히려 종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45). "대속물"(리트론)은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지불한 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값으로 사망의 노예가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릴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사 53:10). 또한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권명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성도들은 남보다 더 높아지고 영광받기 원하는 이기적 생각을 버려야한다.
2. 섬기는 종이 될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3.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으려는 사람은 고난에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최영찬 목사


제자도- 1. 부르심과 응답 (막 1:16-20절)

▣ 부르심과 응답
말씀 : 막 1:16-20절


1. 마가복음은 복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첫째,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그 복음서 시작에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누가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것을 볼 때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1장 1절에서부터 마가가 「복음」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절)

(2) 둘째,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신 첫 번째 설교인 마가복음 1장 15절 에서, 마가는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4장 17절에는 생략된 "「복음」을 믿으라"는 말을 기록합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절)

(3) 셋째, 마가는 마가복음 8장 35절에도 마태복음 16장 25절, 누가복음 9장 24절과는 다르게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절)

(4) 넷째, 마가는 마가복음 10장 29절에도 마태복음 19장 29절, 누가복음 18장 29절과 다르게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 10:29절)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여 가는 동안 곳곳에 "복음"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2. 「그 복음을 믿으라」의 의미

문맥상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짤막한 소개 이후, 즉시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가에게 있어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 형태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가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복음」은 복음서 서두에서부터 「제자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에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특별히 두 번 더 나타나고 있는데. 이 두번의 경우에서는 복음을 위한 구체적인 희생이 제자도의 특징과 결부되면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8장 35절에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것이 요구되고 있고, 10장 29절에서는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자식,전토등의 희생 및 포기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를 1장의 내용과 연결지어 고려해 볼때, 우리는 왜 마가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설명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부은 마가복음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주지하는 바대로, 주후 64년 7월 네로 황제의 통치하에서 발생하였던 로마의 대화재 사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범으로 지목되어 십자가 형을 포함하여 각종 고문과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인 것이 드러나게 되면 로마 관헌에 끌려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던 상황에 로마의 교인들은 처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3. 마가복음의 제자도

마가복음의 '제자도'는 이런 상황 하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핍박을 목전에 둔 상황 속에서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핍박이나 박해를 무릎쓰고 바로 그들에 앞서서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 뒤따라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Ernest Best 는 그의 책 「Disciples and Discipieship」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The rule of discipieship is Jesus. As Jesus was, so the disciple must be."

오늘날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복음을 믿는다는 것,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적이고 지적인 차원에서만 막연한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실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때로 그것은 1세기 당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처럼, 목숨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경우일 수 있을 것이고, 또는 가족과 재산을 모두 포기하는 엄청난, 감당하기 힘든 희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알지라"(마 7:16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삶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취와 흔적이 외적으로 드러날때 비로소 우리가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은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듯이, 복음의 믿음 역시 '실천의 증거'가 없을 때까지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상황

(1) 첫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1:16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1:19절)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할 일이 없어 놀고 있거나 또는 해야 할 자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고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2장 14절에 나타나는 레위의 부르심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처럼 레위 역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한가롭게 놀며 쉬고 있는 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엇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그 일을 하고 있었는가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즉 일의 종류보다는 그 일에 임하는 태도, 즉 성실성 내지는 충성도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의 형태 및 종류가 어떠하든지, 또는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이들을 주님께서 택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깨닫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이런 이들을 택하여 제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빌 3:6절)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바른 방향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열심'은 그대로 고용했습니다.

'달란트 비유'(마 25:14-30절)를 '두 달란트 받은 종'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세번째 종만큼 적게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첫번째 종처럼 많이 받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세번째 종과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두번째 종의 불평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두번째 종이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남과 비교하여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두 달란트에 충성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든지 작든지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였을 때 두번째 종은 첫번째 종과 똑같은 칭찬을 주인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절)

이 구절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절)

요컨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자는 큰 일을 맡을 자격을 얻게 되고, 또한 보다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제 2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그 일이 크든지 작든지 주님께서 우리에 맡겨주신 일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특심했던 엘리야(왕상 19:10절)를 기억합니다.


(2) 둘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업이 한창 성공적일 때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20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삯군들"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 그 사업이 번성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만일 고기가 제대로 잡히지 아니하였다면, 즉 사업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았다면, 구태여 비싼 삯을 주어가며 "삯군들"을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잘 안되거나 또는 사업이 망했을 때 주께서 그 어부들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이미 그 일에 실망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의 동경에서 쉽게 따랐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하는 일이 한창 번성하고 부흥일로에 있을 때, 그 풍요와 안일과 기쁨을 버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뒤따른다는 것, 또는 그 장래가 지극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일에 착수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결정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창 12장) 이로 인해 그의 신앙이 돋보이며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선택의 기로에 처했던 첫번째 제자들, 즉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기꺼이 그 부흥일로에 있던 자기의 사업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장래의 일에 자신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힘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한 가지 결정적인 동기는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였습니다.

철저한 신뢰는 철저한 보장을 낳았습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맡기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생명을 그 분의 모든 능력과 권세로써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한번은 Charles Spergeon(찰스 스펄전)목사님께서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가지셨는데, 예배 후 어떤 농부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그 농부는 스펄젼 목사님께 다름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하는 일마다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스펄젼 목사님은 "하는 일마이 안되면 목사의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은 환경, 즉 질병이나 실패 등을 통해서 역사하시지만, 혹 우리는 자신의 무능과 실수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오인(誤認)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첫번째 제자들처럼, 하는 일이 잘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행복과 안일을 포기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선교사 가운데는 잘나가는 치과 의사, 소아과 의사이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들과 교제하게되면 저는 늘 큰 도전을 받습니다.

첫번째 제자들은 부흥일로에 있던 사업을 포기한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한창 절정(peak)에 있고, 형통하며, 부와 영예를 한껏 누리고 있을 때,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과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주님 때문에, 포기할 수 있습니까?


(3) 셋째, 주님의 일과 세속적 일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야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단지 주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일과 세속적일의 불양립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또는 주님의 제자로 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세속적 일에 얽매여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는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는 세명의 박사들, 즉 점성술사들이 먼곳까지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고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이 점성사들이 점을 치는데 사용하는 도구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자기 생업의 도구들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데에는 예물 이상의 더 큰 의미가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여전히 별을 연구하며 점을 치는 지난날의 인생을 계속 연장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 모든 도구들을 주님께 바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남은 생은 주님을 위한 새로운 생으로 살아 가겠습니다. 이 도구들은 저희들의 헌신의 증표입니다.'

모세가 영광의 주님 앞에서 신을 벗은 것처럼, 이들은 그들이 다루던 우상의 도구를 주님 앞에 바친 것입니다. 새로운 생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고 할 때, 그 고백 안에는 엄청난 결단과 포기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만을 택하여 섬겨야 합니다.

"집 하인이 두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당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함께 섬기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의 사사기, 역대기, 열왕기 들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신을 함께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방신과 동등하게 간주하는 것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많은 신 중의 하나의 신으로 상대화 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분명코 하나님은 많은 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한 분뿐인 유일하신 절대적 신이시기에 다른 신과 동시에 섬겨질 수가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다른 신, 혹은 세상과 함께 양립하여 섬길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성도는 절대자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방신을 포함하여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업을 하면서 또 동시에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기에 기꺼이 자기 쪽의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 버려야 할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면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과 가족을 버렸습니다. 1장 18절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로서의 생계의 수단이 되는 그물을 버렸고, 20절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그 아비 세베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물과 배를 버렸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천직이었던 어업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하는데, 어부였던 이들에게 이는 결코 쉽지 않앗던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직업과 재산의 포기 대신 그 어느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 10장 29-30 절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 포기한 이들에게 대한 상급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지상에서의 핍박이 수반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또한 그들은 가족을 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으 뒤좇았던 역사적 제자들에 있어서는 문자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아무리 고상한 동기가 있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가족과 부모를 버릴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구약의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분명히 부모 공경의 계명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막 10:19절) 그렇다면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결국 마태복음 10장 37절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을 참작할 때 우리는 우선순위의 문제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절)

결국 재산과 가족의 포기는 과거와의 단절을 말합니다. 부름받기 전에 우리가 관계하였던, 부름받기 전에 우리를 얽어매였던, 모든 것들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는 옛 관계와의 단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직 옛 관계와 단절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나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4) 넷째, 제자들은 세속적 일들, 재산, 가족 관계를 버리고 정리하는 데 있어 신속하고 민첩하였습니다.

18절과 20절을 보면 그들은 "곧"(유두스)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곧'이란 단어는 마가가 그 복음서에서 40여회 이상이나 사용하는 애용어(愛用語)였습니다. 즉 주저하지거나 망설이지 아니하고 부름을 받는 즉시 주님의 말씀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 분부, 명령을 이행함에 있어서 지체함이나 주저가 없어야 바른 제자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저한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결정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며, 여전히 두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즉 롯의 아내처럼 여전히 과거에 대하여 세상 일에 대하여 미련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약 1:5-8절)

설교를 통하여, 또는 성경을 읽다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이 교훈을 즉시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면 아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깨들음의 실행을 연기하고 있는 그 미래'가 나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가올 5분 후의 일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래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런 까닭에 앞으로는 오지않을지도 모르느 그 어떤 미래에 깨달음의 실행을 미루는 것은 결국 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편리하게도 우리는 '깨달음의 실행의 연기'는 불순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단지 실행을 연기한 것뿐이지 실행을 안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만일 실행을 연기한 그 미래가 오지 않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실행치 않았다면, 결국 우리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바 교훈의 실행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결국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불순종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분부받은대로, 또 깨달은 바를, 즉시 지체치 말고 실행에 옮기는 결단과 민첩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말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2절) 즉 민첩성은 달리 말하면 '우선권'(priroity)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도, 또 의지적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우선 과제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아니면 나의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입니까?


5. 묵상 질문들

(1)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한창 절정(peak)에 있고, 형통하며, 부와 영예를 한껏 누리고 있을 때, 주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과연 나는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주님 때문에, 포기할 수 있는가?

(2) 내가 주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 버려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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