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 20장 묵상
이사야 1장 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이사야는
주전 740년경 웃시야 왕이 죽던해에 유다 나라에서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1. 반역한 이스라엘(2-4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구유를 알건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자식처럼 기르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거역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범죄국이요, 민족적으로는 허물어진 백성들 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행악과 부패를 양식삼아 성장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 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과 행복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반역의 삶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반역한 사람들에 대한 정죄 (5-15절)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십니다.
첫째, 몸과 마음이 병들게 하십니다.
가장 무서운 징벌 중 하나는 육신의 건강과 생명을 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시 바알브올을 섬겼을 때도, 다윗이 범죄했을 때도,
하나님의 징벌은 백성들의 생명을 쓸어가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 이심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국토가 유린됩니다.
전쟁과 천재지변을 통해 국토가 유린되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사시대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 범죄한 국가는 그 국토가 폐허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세번째,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절기, 제물, 성회, 기도가 상달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예배가 아닌겁니다. 형식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3. 스스로 씻으라 (16-17절)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스라엘의 살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들이 반역의 죄를 지었다 해도 스스로 씻으며,
깨끗케 하여 악업을 버리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하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 과부와 고아 등을 돌보아 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하는 삶이요,
이 감사함은 이웃들 가운데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제거해 줌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않고,
내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 2장 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마지막 날'에 승리합니다.
현재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1. '말일에' 승리. (1-2절)
요한 칼빈은 '말일에'라는 단어는
우리 성도들에게 무한한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일'은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며, 구원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위대한 승리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소원이 성취되고,
불확실했던 모든 비밀들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또 이 때는 하나님을 거역했던 모든 사단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때 입니다.
그 때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2. 여호와의 말씀이 통치하는 시대 입니다. (3절)
인간의 타락이후 세상은 교회와 사단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거나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살아있는 말씀은 사단을 정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3. 여호와 샬롬. (4절)
세상은 싸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적대 관계 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원수 지간 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불화 입니다.
그러나 '말일'에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모든 백성들은 평화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승리를 믿으며
그날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3장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예표인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을 굳게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우습게 생각했고,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 칭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세상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1-12절)
광야 40년 지나오면서 그들이 한 훈련이 그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도 살아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경제와 군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유력한 사람들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양식'과 '물'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니다 (1절).
양식과 물이 없어진 다는 것은 육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다 죽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을 지도자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4절, 12절).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겨야 합니다 (신 6:5, 눅 10:27).
2. 지도자는 백성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13-15절)
당시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짖밟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잘 가꾸라고 맞겨주었더니
포도원을 허는 여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의 공의를 세우라고 지도자들을 세워주셨는데
바로 그 지도자들에 의해서 공의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여인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16-26절)
여인들이 믿음 안에서 경건하게 살 때 그 사회가 건강합니다.
여인들이 게으르고 사치하며 향락에 취하기 시작하면 곧 그 사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들은 교만했으며, 부정했고, 욕정을 탐하는 눈으로 남자들을 유혹했으며,
아기죽거렸고, 겉모양을 꾸미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이런 외형적 사치는 바로 내면의 공허와 부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머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셔서 대머리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정숙한 체하던 위선의 옷이 벌거 벗겨지고
이방인들에게 능욕을 당하는 수치를 겪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영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정결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장 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살아 남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도의 멸망은 비참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도시는 이미 다 멸망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도성이 수도 입니다. 그 성이 멸망합니다.
이것은 유다에 있어 절대 절망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때에도 소망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1. 하나님께로 나와야 소망이 있습니다. (1-4절)
유다의 남자들은 죽거나 사로잡혀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습니다.
일곱 여자들이 한 남자에게 달려 들어 의식주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테니,
우리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가정과 사회의 보이지 않는 기본 질서가 다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황폐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날에 '여호와의 싹'으로 인하여
아름답고 영화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절).
'여호와의 싹'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 가지'(렘 23:5, 33:;15), '순'(슥 3:8, 6:12)등으로 비유되어 나타납니다.
살아남은 백성들이 실의와 낙담에 빠졌있을 때 이사야는 그들에게
장차 메시아로 말미암아 '거룩하다'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상적이고 인간적은 소망이 다 사라졌을 때
이사야는 메시아를 바라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때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때 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절망의 때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5,6절)
고난이 오고 환난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가운데 있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함께 하십니까?
5절을 보면
"낮이면 구름과 연기(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밤이면 화염의 빛(따뜻함과 어둠을 물리치는 빛)"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때 함께 하시던 모습 그대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핏값을 주고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 입니다.
우리 곁에 언제나 계시며 우리의 힘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이나 세상것들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5장 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을 잘 받고 또 잘 간수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감당할 그릇이 작거나 깨어져 있으면, 넘쳐 버리거나, 새어 버리게 됩니다.
1. 은혜 (1-2절)
어떤 농부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열심과 정성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그는 기름진 산을 골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좋은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심었습니다.
포도원 가운데는 망대를 세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와 들돼지를 경계하고,
또 한편으론 풍성함과 부의 상징인 아름다운 원두막을 짓고, 포도즙을 짜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이제 좋은 포고가 맺히기를 농부는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다 그분이 만드셨습니다. 모두가 은혜 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에덴 동산도, 온 우주도 그리고 교회도 하나님이 만드신 겁니다.
2. 반역 (3-4절)
드디어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들포도 열매가 맺혔습니다.
들포도는 참포도와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맛은 전혀 다름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난 삶을 살아 갑니다.
참포도가 아닌 들포도로 살아 갑니다.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잘못된 열매를,
어떤 사람은 기대 이하의 작은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요 15:2-8).
우리의 지체를 주님께 드려 의의 병기가 되게 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롬 6:22)를 맺어야 합니다.
또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엡 5:9)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3. 징계 (5-7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은 공평과 정의 였습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포학과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 이었습니다.
포도원은 순식간에 황폐해 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포도원이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황폐한 포도원에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이해와 관용 그리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징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6장 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 때문입니다.
말씀을 버리니 어둠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1. 성전을 찾는 사람입니다. (1절)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솔로몬 시대처럼 나라가 번성하였고,
활력이 넘치던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이 문둥병에 걸려 죽고나자 나라는 점점 어려워지고 소용돌이치며
혼돈속으로 빠져들어가던 국제 정세에 휘말리기 시작했습니다.
즉 유다 나라가 내외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던 이사야는 큰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성전에 올라갔고 거기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 환상을 보고 새 희망을 발견합니다.
웃시야 왕은 죽었어도 유다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내 주변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2-7절)
성전에서 이사야가 바라본 환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 앞에 이사야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처럼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제일 먼저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그 죄를 자복했을때 하나님은 그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6-7절).
아무리 무섭고 흉악한 죄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사함 받습니다.
또 아무리 작은 죄도 용서를 구하면 사함 받습니다. 커도 죄요, 작아도 죄 입니다.
한, 두가지의 큰죄에 무너지는 사람보다,
여러가지 작은 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8-13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히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어떤 사명을 위해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단 응답이 있을때 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면 내게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7장 입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와 수리아 왕 르신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떨고 있던 유다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1.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3-9절)
유다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이, 수 연합군의 침공으로 마치 산의 숲들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2절).
두려움에 쌓여있던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너는 삼가며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조용하라는 것은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때 경거망동 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또 함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위기가 왔어도 하나님을 의뢰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수 연합군이 아무리 기세를 올리는 것 같아도 연기나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그루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로도 쓸 수 없어지면 그냥 아낌없이 아궁이에 던져질 부지깽이를 왜 두려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롬 8:32-37).
2.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10-17절)
사람들은 때때로 눈앞에 증거를 보아야만 확신이 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기드온을 부르실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어떤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20:27-29절).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어떤 징조든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그럴듯한 이유로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의 보이는 힘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징조를 보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징조의 내용이 14절 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다를 위해 예루살렘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 예언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3. 말씀에 불순종 하므로 환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18-25절)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한 유다는 바로 그 앗수르와 애굽에 의해 큰 수치와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을 의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승리하세요.
이사야 8장 입니다.
이사야 선지가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어 주십니다.
그 뜻은 '빠르게 노략하다', '전리품을 향해 급히 달려 들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남 유다를 침략했던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앗수르에 의해 신속히 멸망당하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가 엄마,아빠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당시로부터 2-3년이 못되어서 이 예언이 이루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말씀이 주어진 후 3년이 못되어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개인의 역사의 한 민족이나 나라의 역사건 아니 온 우주의 역사의 주관자도 하나님 이십니다.
개인이나 나라가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의지할 때 평안과 소망의 복을 받습니다.
2. 우리의 유일한 보호자는 하나님 이십니다.(5 -8절)
실로아 물은 예루살렘 성전 남쪽 티로페온 골짜기 입구에 있는 연못으로,
이 물은 성전에 공급되어 제사를 드리는에 사용되었습니다.
'실로아 물을 버렸다'는 말씀은 성전 예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신앙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대신에 7절의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잔잔한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더 강력해 보이고 위엄있는 것 같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은
유다 사람들 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또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많은 사람들의 모임, 강력해 보이는 어떤 힘들,
매력적 입니다. 의지가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들에 의해서 유다가 쓰러지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호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승리하세요.
이사야 9장 입니다.
특별히 6절에 탄생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그분을 가리켜 '평강의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평강'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 즉 '샬롬' 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인들의 인삿말 이기도 합니다.
그 깊은 뜻은 '하나님과 그 대리자 사이의 평화의 언약'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의미는 '싸움이나 다툼, 분쟁이 없는 상태'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샬롬'은 단순히 외적인 분쟁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갈등이나 마찰, 분쟁이나 상처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저 싸움이 그쳐버린 그런 '평강' 보다
훨씬 높고, 깊은 의미의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온전한 평강의 왕이십니다.
1. 하나님과의 평화 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한쪽에는 정죄를 한쪽에는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 갈린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이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서 '평강의 왕'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8: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요 모든 평화의 근거가 됩니다.
2. 영적인 평화 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혼란을 조성합니다.
불화를 만들어 냅니다.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지게 합니다.
불의와 이기심, 헛된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게 하고,
지혜와 분별력, 거룩한 열심등를 사라지게 하고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심령에 새로운 질서가 생깁니다.
죽었던 심령이 살아나 영적인 능력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그때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심령에 평강이 있으십니까?
세상이 아무리 막가도,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인 평강을 누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령에 담고 계신 것입니다.
3. 사회적 평화 입니다.
이것은 강대국을 물리친 후에 오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님을 뼈져리게 체험했습니다.
일제가 물러가면 평화가 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은 일제가 물러간 후 한달동안 잔치를 동네마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 북이 갈리고, 좌, 우 대립의 극심한 혼란속을 헤메다가
결국 채 5년이 되지못해 같은 조상, 같은 글, 같은 말을 하는 단일민족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것입니다.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사랑(요 13:34, 35),
화해(마 5:25), 관용(마 5:43-48), 인내(살전 5:14)등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내는 조건이요 근원인 것입니다.
이 '평강'은 먼저 나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 갑니다.
온 세상이 평화로와도 내가 평안치 않으면 내가 사는 세상은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자,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심으로
진정한 평강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10장 입니다.
본문은 앗수르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앗수르는 B.C. 8세기 초부터 7세기 말까지 200년 가까이 고대 근동 전지역을 지배했던 대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해 당시 수많은 근동의 나라들과 왕들과 방백들이 짖밟혔습니다.
그 대제국 앗수르가 갑자기 그 힘을 잃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왜 그토록 강하고 광대한 나라가 멸망했을까요?
앗수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나라
유다의 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자기를 강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패망합니다. (5절)
세상의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구속사를 중심축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은 앗수르가 왜 근동의 패자로 군림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던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힘을 가지고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은 그러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합니다. (8-9절)
자기 힘이 강대해진 앗수르는 결국 유다라는 작은 나라가 섬기는 하나님을 얕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능히 하나님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8-9절).
이런 일은 지나간 역사속에,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든지 나타나는 일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십시요.
앗수르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교만하게 행하는 사람은 패망합니다.(12절)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12절) 고 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언사를 보십시요 (13-14절).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잠 16:18절).
우리는 조금만 잘되도, 남들보다 조금더 안다고, 배웠다고 스스로 교만해 집니다.
때로는 알면서 때로는 모르면서 말입니다.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간 앗수르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이사야 11장 입니다.
본 장에서는 메시아의 오심과 그로 인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1. 메시아는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했습니다.
이새는 위대한 다윗왕의 아버지 입니다.
다윗은 원래 왕의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베들레헴의 평범한 촌부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굳이 이새을 언급한 것은 평범한 가정에서 다윗이 나왔듯이
메시아도 평범한 가문에서 출생할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 메시아의 성품의 특징은 공의와 정직과 성실입니다.
2. 메시아가 오시면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세상은 죄로 인해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사자(6절), 암소와 곰(7절)은 서로가 상극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서로 상극인 존재들 사이에 평화가 임합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을 칩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3.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입니다.(9-10절)
메시아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열방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4. 형제가 화목하게 됩니다.(11-16절)
세상에는 피를 나눈 형제도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부부사이도 헤어져 남남처럼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면 유다와 에브라임이 하나가 되듯이
하나의 신앙으로 순수하게 화해하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곳엔 질투도, 시기도, 미움도 없고 오직 기쁨과 평화만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12장 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전해도 듣지 않는 소리를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속에서도 이사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1-3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 대한 노를 그치신 것 때문입니다.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은 언제나 잠시 뿐이십니다.
진노를 돌이키신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안위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니 내가 그를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고 합니다(2절).
구원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이사야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구원관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바라보면 언젠가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 하심을 믿는 백성들은 구원의 우물을 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3절).
우리는 사막이나 광야에 산 적이 없어서 이 말씀이 절절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와 사막이 많았습니다.
사막길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죽어야 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오아시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곧 생명이 구원받은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삶 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4-6절)
부른는 노래의 내용에는
하나님께 순수한 예배를 드리도록 서로 권면하며, 격려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행하신 지극히 아름다운 일 입니다.
그 아름다운 일이란 다름아닌 '구원' 입니다.
메시아 즉 그리스로를 보내 주신 일 입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의 이유가 분명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13장 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주어진 때가 대략 B.C.730년 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앗수르를 누르고
중동의 최강대국으로 등장한 B.C. 612년 보다 100년 전의 예언이었습니다.
더욱이 바벨론이 멸망한 것은 B.C. 539년 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200년을 앞두고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때 역사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와 계획대로 우주 만물의 흥망성쇠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흥망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민족, 개인의 역사도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세상의 영화가 헛됨을 보여줍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중심에 자리한 바벨론은
이전 까지 어떤 제국도 이루지 못한 군사적,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어느날 밤
홀연히 나타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입니다(요1:10, 요일 3:1).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멸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3. 악인의 궁극적인 운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바베론은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로,
신약에서는 종말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집단의 결집체로 묘사됩니다(계 18:1-19).
바벨론의 멸망은 이사야는 아주 비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자마다 창에 찔리고, 잡히는 자마다 칼에 엎드러지고(15절),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15,18절).
화려했던 가옥들은 노략을 당하고, 아내들은 욕을 보리라고(16절) 했습니다.
악인의 처절한 멸망의 예언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하는 일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의 헛된 영화를 쫓지 말고, 악인의 자리에 서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는 귀하고 복된 성도의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승리하세요.
이사야 14장 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경영'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어떤 모습일까요?
1. 하나님의 경영은 실패함이 없는 경영입니다.
24절에 '내가 생각한 것은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은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의 경영은 충분한 지식과, 경험과 노력을 다 기우려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 내노라 하는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계획들이
시행도 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경영'은 반드시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우리 사람의 일들은 늦추어 지기도 하고, 중간에 바뀌기도 하고, 아예 포기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계획하신 것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주가 되시며,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라고 말입니다.
우리 한 개인의 역사에서 열방 민족들과 나라들과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이뤄질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경영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경영입니다.
27절 말씀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날뛰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3.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경영입니다.
경영을 하는 모든 사람은 나름 목적을 가지고 경영을 합니다.
또 나름의 경영 방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에도 목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택한 백성을 구속하셔서
죄에서 떠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시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으로 선민이 되게 하셨으며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탄생케 하셔서 구속사를 성취해 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경영 목표는 우리 주님 재림하실때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을 믿고 감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이사야 15장 입니다.
모압 족속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들인 모압의 후손입니다(창 19:37).
그러니까 이스라엘과는 혈연 관계에 있는 족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통해 저들의 멸망을 예언하심으로
영적인 전쟁의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저들에게 멸망을 경고하고 있습니까?
1.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1-3절)
모압 자손은 우상 숭배가 저들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룻밤새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짧은 시간안에 멸망당할 것이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잠자는 때인 밤처럼 평안하다 하고 있을때에
갑작스레 멸망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멸망은 이와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때에 신속하게 이루어집니다.
또 주님의 재림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때에 갑작스레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4-9절)
모압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에 전쟁과 가뭄으로 진멸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때 선지자의 심정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5절).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 도다'
여기서 '내 마음'은 선지자의 마음이요, 또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압의 멸망을 생각할때 마음이 아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종의 심정 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생의 멸망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생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당연히 하나님이 종들이라면 사람들이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니므림 물이 마른다고 했습니다.
니므림은 '맑은 물의 흐름'이라는 뜻을 가진 모압의 강이었습니다.
그 니므림 물이 마른다는 것은 결국 저들의 생명줄이 마른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생명의 근원이 마르게 됩니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피할 수 없고, 면할 수 없습니다. (시 139:7-12)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영혼들을 안타까이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말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16장 입니다.
15장에 이어서 계속해서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가는 모압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종은 가슴 아파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을 선대해야 합니다(1-4절).
모압은 이스라엘의 형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강할때는 복종하는 듯 했지만 이스라엘이 약해지면
어김없이 잔인하고, 교활하고, 거만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출애급때부터, 포로에서 귀한한 후 성전 건축을 할때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시노릇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모압에게 간절히 충고하지만 그들은 이미 들을 귀를 가지도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 택하신 성도들에 대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진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어떤 정권도, 사람도,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선대 하십시요. 애써서 선대하십시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비결입니다.
2. 의의 나라(5절).
왜 하나님의 나라를 선대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은 왕위가 굳건하고, 왕은 존경받을 정치를 할 것이며,
백성들은 평등과 정의를 실천하는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훗날 유다의 히스기야 왕조의 번영을 내다본 것입니다.
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예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흥왕할 것이니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과 충성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3. 모압의 비가(6-14절).
선지자의 충고에도 모압의 교만은 꺽일 줄을 모릅니다.
이 모압에 대해 3년 기한에 머물것이라는 치명적인 저주의 선고가 내려집니다.
무성한 나무 같았던 모압은 그 가지가 국경을 넘고, 그 뿌리가 바다에 이르지만
그러나 그 가지는 꺽이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포도원은 황폐해져 농부들의 노랫소리는 멈추었고,
저들의 우상을 향한 기도에는 응답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3년이 지나면 저들의 영화는 떨어지고
백성은 능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 무관심 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영화도 얼마가지 못할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벧전 1:24).
모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십시요.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아 가십시요.
거룩한 공동체를 생각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17장 입니다.
이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1-6절).
하나님의 심판의 눈은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향한다.
아람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를 동원하셔서 아람을 정복하고
히스기야 왕 6년에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니
북 왕국 이스라엘 왕조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멸망한 이스라엘의 형국은 추수를 끝내고 이삭마저 줍고 난 들녘처럼 적막하고,
추운 겨울 과일 나무가지에 몇개 남은 과일처럼 처량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들려지면 아무리 사람들이 일을 도모하여도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라 (7-11절).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거역하고
외교를 위해 이방 나라의 여인들과 혼인을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들어온 우상을 섬기는 일이 온나라를 덮었지만
정작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우상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다 죽거나 흩어집니다.
흩어진 백성들은 회한의 눈물로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3. 주께서 꾸짖으시리니 (12-14절).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18만 5천의 군사를 잃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18장 입니다.
유다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구스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1. 유다를 찾아온 구스의 사신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1,2절)
그 사신들에게 이사야는 처음부터 '슬프다'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구스에 대한 동정심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구스는 노아의 아들 함의 맏아들의 이름 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이룬 족속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들의 영토는 이디오피아와 수단 그리고 소말리아를 포함할 만큼 광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당시 구스는 앗수르 때문에 외교적, 군사적인 면에서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의 동맹을 위해 사신을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신들에게 이사야는 두려워 말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스가 원하는 동맹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사야의 믿음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저들을 권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용기를 얻는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 합니다. (3-6절)
지상의 모든 거민이 앗수르의 멸말을 보게 될 것이라고(3절) 합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당연히 승패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앗수르의 멸망은 세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먼서 앗수르가 군사들을 모아 침공해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침묵하십니다.
마치 쬐이는 햇볕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다고 하십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까지 침묵하며 조용히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 당신의 계획을 한치의 차질도 없이
그리고 순간의 기다림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기억합시다.
내가 좋은 때, 내게 필요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 입니다.
3. 하나님께 돌아올 구스의 미래를 예언 합니다.(7절)
앗수르가 멸망하는 날 구스 사람들은 예물을 가지고 시온 산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구스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와 예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예배를 귀히 여기십니다.
나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으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믿음안에서 승리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19장 입니다.
애굽에 대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애굽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한 이유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큰 나라 애굽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의지하던 애굽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멸망을 경고하십니까?
1. 우상을 숭배했습니다(1-4절).
애굽은 하늘과 땅은 물론 애굽을 관통하여 흐르는 나일강,
수많은 짐승과 심지어 곤충까지도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파멸되면서
평안하다고 생각했던 애굽에 두려움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과 심지어 군인들 조차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형제가 형제를 치는 내란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또 저들이 아주 잔인한 왕에게 넘겨질 것인데,
당시 최고의 지혜자로 불리던 신접한 자와 술객들에게
그 어려움의 원인을 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애굽은 피라밋을 건축한 나라 입니다.
저들의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건축술은 당시 세계 최고였습니다.
지혜에 관한한 어느 민족에게도 지지 않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지혜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야 삽니다.
지혜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2. 그들의 산업을 의지했습니다(5-15절).
애굽은 수자원이 풍부한 나라 였습니다.
나일강 유역과 하류는 그야말로 천혜의 옥토였습니다.
농업, 수산업, 수공업이 눈부시게 발달했습니다.
하나님 보다 그 산업을 저들은 더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산업을 치시니
그 모든 산업이 파탄에 이르게 되는데 대책이 없었습니다.
마치 술 취한 자가 결정을 잘못하며 비틀거림과 같이
그렇게 애굽은 비틀거렸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혜나 재주, 재물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경고하셨습니다 (16-25절).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 민족과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하길 원하십니다.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징계 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익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섬기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20장 입니다.
20장 말씀은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 백성들의 세속적 경향에 관한 경고 입니다.
이사야서 전체를 놓고 볼 때 본문이 이곳에 배치된 것은 깊은 뜻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 언급된 네 나라, 즉 앗수르, 불레셋, 구스, 그리고 애굽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네 나라와 유다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애굽과 구스를 믿고 앗수르에 대항하다가 멸망당한
불레셋의 전철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애굽은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 입니다.
오늘날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나라는 이집트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애굽을 의지하려는 태도'는 다른 말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
참된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상의 눈에 보이는 힘이란 무엇일까요?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돈, 권력, 배경, 가문, 친구
거기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출신지와 졸업한 학교도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의 힘을 의지한다면 결국은 실패와 절망을 겪게 될 것입니다.
1. 이사야가 행한 특이한 행동의 의미 (3절).
1절의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이사야는 3년 동안이나
벗을 발과 벗은 몸으로 행할 것인데 (대략 B.C. 713-711년 경)
이것은 전쟁 포로들이 잡혀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의 첫째 의미는 애굽이 이렇게 포로로 잡혀 가리라는 것과
둘째 의미는 애굽을 의지하면 이런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 입니다.
세상의 힘이나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 마십시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요.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으며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by Pastor Joseph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