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산책

하박국 3장

은총가득 2021. 1. 21. 17:39

예언자의 기도 (하박국 3:1,2)

 

 

 

본장은 "하박국의 기도" 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의 명상이요, 교회를 위한 중보의 기도이다. 예언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예언자도 그러하다("그는 선지자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창 20:7). 그리고 가끔 그들은 자기들이 적대하여 예언했던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미래의 사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익히 알던 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기도의 순서를 배열하며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를 남들보다 더 잘 알았으며, 환난 시기를 예상하면서도 자기들의 예언이 끝났을 때 은혜로운 응답을 받을 기도를 축적함으로써, 그 기도가 교회를 봉사하게 한다. 이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요구와 이전 불평에 응답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 그의 환원을 되풀이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에 따라 우리가 사는 날까지 그를 부르기로" 결심해야 한다.

 

1. 예언자는 그의 이전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것이 그에게 끼친 인상을 말한다(2절). "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나니," "주는 우리로 들게 하시나니, 곧 주의 백성을 해하려고 발표된 공포를 듣게 하십니다. 나는 주의 말씀를 받으오니, 그것이 내 앞에 있나이다."

정당하게 자기 말을 하나님께 부탁드린 자는, 그 말을 기억하면서 자기들에게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는 "나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 보리라" 고 말했다(2:1). 이제 그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나이다" 라고 시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돌리지 않으실 것을 각오해야 되리라(잠 28:9).

 

나는 그것을 듣고 "놀랐나이다." 직접 하늘로부터 온 메시지는 종종 가장 용감한 자들까지도 깜짝 놀라게 했다. 모세, 이사야, 다니엘 등은 "매우 놀라 떨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이 메시지의 내용이 예언자를 두렵게 했으니,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갈대아인의 압제력 아래서 얼마나 낮게 내려지며 얼마나 오랫동안 그 밑에 계속 있겠는가 하는 것을 들을 때 그러했다. 그는 그들의 심령이 크게 낙담하지 않을까, 교회가 완전히 뿌리뽑혀 파멸되고, 오랫동안 낮은 데 처하여 결국 망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했다.

 

2.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선택된 자를 위해 이 환난의 날들을 감하고, 또한 이 날들의 환난이 진정되고 완화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 아래서 지지되고 위로되게 하소서" 라고 한다. 그는 "수년의 끝" 까지 기다리는 것이 매우 길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는 포로 기간으로 작정된 70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여, 수년 내에, 곧 우리의 비통의 저 수 년 내에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소서. 비록 우리는 구원되지 않고 우리의 압제자는 멸망당하지 않더라도 우리로 버려서 추방되게 마옵소서" 라고 한다.

 

(1) "주의 뜻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하소서. 주의 일, 주의 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행하시는 일" 이니, 그에 의해 형성되고, 그를 위해 형성된다) "그것이 환난 중에 다닐 때라도 소생케 하소서(시 138:7, 8). 당신의 백성에게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케 허락하소서(스 9:8; 시 85:6). 주의 일을 생생하게 보존하소서(어떤 이들은 이렇게 읽는다). 비록 주의 교회가 징계받더라도 사라지게는 마소서. 비록 그 자유를 잃더라도 그 생명을 계속하게 하며 남은 자를 구속하사, 다음 세대의 씨앗이 되게 하소서. 우리 속에 있는 주의 은총에 관한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우리에게 환난을 성화하고 그 아래 있는 우리를 지지하심으로써 비록 그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시간, 정해진 시간조차 이르지 않더라도 주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우리가 마른 뼈처럼 죽은 것 같을지라도, 우리에게 무엇이 닥칠지라도, 여호와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시며, 가라앉고 돌이켜 무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소서."

 

(2) "주의 영예를 위하여 무엇인가 행하소서. 이 수 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하사, 이제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45:15), 주의 능력, 민망히 여기심, 약속, 섭리 등을 당신의 교회의 안전과 복락을 위해 세상의 정부에 알게 하소서. 비록 우리가 아무도 알지 못하게 장사되더라도, 여호와여, 주 스스로를 알게 하소서.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며, 암흑의 시대 중에서도, 주께서 현현하시기를 사람들이 기대하기도 전에, 스스로 나타나소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포로기의 "연한 전에," 불타는 용광로에서 세 아이들을 구하시고 느부갓네살을 낮추셨을 때,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곧 "이 수 년(연한) 내에 나타나시옵소서" 라는 기도이다.

 

(3) "주의 백성의 평안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리고 저를 나타내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의 긍휼을 보이소서. 오 여호와여!" (시 85:7) 그들은 환난 중에 자기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으니, 그것이 진실로 그들을 침통하게 한다. 그 쓴 잔에 분노가 담겨 있다. 따라서 그들은 화를 모면하기를 빌고, "진노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잊지 마시며," 그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그의 긍휼의 그릇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 아래 놓여있는 자들까지도 그의 긍휼에 대해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긍휼은, 단순한 긍휼은 우리가 도망하여 피난처로 삼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유일한 환원으로 의지해야 할 긍휼이다. 그는 우리의 공로를 기억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

 

 

하나님의 엄위 (하박국 3:3-15)

 

그들이 비탄에 빠져서 절망으로 떨어지려고 했을 때 그들의 체험을 회상시킴으로써 스스로 힘을 얻게 하고,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여" 그들을 소생시키며, 종종 자신에게 호소하기를 좋아했듯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 호소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재래(在來)의 강령이다(사 63:11). "그 때 나는 옛날을 추억했다."

 

여기서 예언자가 취하는 행동은 이렇다. 그는,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집"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이끌어내사 "한발의 땅" 광야를 지나, "강한 열국" 이 소유하였던 가나안으로 인도되었을 때, 그 때 처음 그들을 한 민족으로 형성하신 것을 회상해 본다. 이리하여 처음에 많은 곤란을 거쳐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했는데, 그는 이제 그 길에 아무리 큰 곤란이 있더라도 바벨론으로부터 다시 그들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 예전에 행하셨던 저 경이로운 사건들이 여기서 가장 웅장하게 묘술되니, 그것이 현 곤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에 큰 격려가 되기 때문이다.

 

Ⅰ. 하나님께서는 전무후무하게 놀라운 그의 영광을 띠고 나타나셨다(3,4절). "하나님이 드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 오시도다." 이는 신명기 33장 2절에서 나타나듯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을 때의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 현현을 지칭하며, 거기서 이 표현들이 차용된 것이다. 그 후 "시온산에 구름 가운데서 강림하셨으며" (출 19:20), 그의 영광은 "삼키는 불 같아서" 그 때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강화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을 비준하고, 그것을 모두 찬미하게 하셨다. 거기서 그가 말한 첫 말씀은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 곧 너를 애굽의 땅에서 이끌어낸 자이다. 이 영광 중에 나타나는 나는 그 일의 주관자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후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으니," 이는 그의 저 영광스런 모습의 반영과 함께 비쳤다.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였다."

 

어떤 이들이 읽는 바에 의하면, 그의 "찬란한 광휘" 가 가득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시내 산 꼭대기에 있는 구름과 불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혹은 세계는 찬양받기에 합당한 저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했다는 말이다. "그 광명이 햇빛 같았으니," 그가 그의 강하신 힘으로 발동하실 때는 태양의 빛과 같았다. "그는 뿔을 가졌으니, 그에게서 또는 그의 손에서 광선이 나왔다." 영광의 빛줄기가 그 주위로 방사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온 약간의 빛으로 인해서 모세가 그 영광의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난 것도 사실이었다.

 

뿔들, 곧 그 "두 뿔들이(이 말은 복수이다) 그 손에서 나왔다" 는 것을 어떤 이들은 아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해 주실 때 비록 돌판이었으나 그들 주위에 영광을 나타낸 "율법의 두 서판" 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 책들은 광선으로 빛났으며 그것은 신명기 33장 2절과 부합된다. 곧 "그 오른 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기에 부가되어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라고 되어 있다. 그의 손에서 나오는 광선 속에는 그의 숨은 권능이 있었다. 그의 권능의 작동은 그가 행하실 수 있던 것에 비하면 그의 발현이라기 보다는 그의 숨김이었다. 그의 지혜뿐만 아니라 그의 권능의 비의는 "있는 것의 곱절이" 된다(욥 11:6).

 

 

Ⅱ.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로를 낮추시고, 그로 하여금 백성을 가게 하는데 순종하도록, 애굽에 전염병을 보내셨다(5절).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니," 한날 밤에 애굽의 장자 모두를 살륙하였다. 그리고 "불덩이가 그 발 밑에서 나오도다." 이것은 우박 재앙이 내릴 때 "우박섞인 불-불타는 죽음" 이 있었던 것(난외를 읽으면 그러하다)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애굽을 황무케 했던 것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이스라엘이 그들 중에 와서 합세되기 전에 가나안인의 수가 감소되었던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그 밭 밑에서" 있으니, 그가 오실 때 그의 명령을 받게 될 것을 뜻한다. 그가 그들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행하라고 하면 행한다.

 

 

Ⅲ.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나눠 주고, 그들 앞에 있는 이방인을 축출했다(16절).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였도다." 땅이 진동한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유업을 지정하는 것이다(신 32:8, 9).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율했도다."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함께 동맹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흩으사 그들을 패주시키셨다. 혹은 그는 세계의 열국을 흔들어 깨뜨리기에 충분한 권능을 발동하셨다. 그러자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들이 엎드러졌다."

 

산과 언덕처럼 높고, 강하고, 또 견고히 선 것으로 보였던 가나안의 방백과 권세자들이 멸망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왕국은 완전히 굴복되었다. 혹은 하나님의 권능이 발동하여 산과 작은 산들을 전율케 했다. 아니, 오히려 시내가 떨었고, 부근의 작은 산들이 그리했다(시 68:7, 8 을 보라). 이에 그는 덧붙여서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고 했다. 즉 모든 그의 섭리의 운동이 그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동일하시니,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다. 그의 언약은 변치 않고, 그의 긍휼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가 "가나안의 열국을 전율시켰을 때, 사람들은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인근 각국의 주민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사명을 받지는 않았고, 이스라엘의 땅의 소유권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이웃집이 불에 타므로 인해서 큰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그들 자신의 집도 위험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7절). 모압의 왕 발락이 그러했다(민 22:3, 4). 어떤 이들은 옷니엘 사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붙이셨을 때에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했으며(사 3:8), 기드온 사사의 시대의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을 쳐 무너뜨렸을 때에, "미디안 땅의 장막이 흔들렸다" 고 풀이한다(사 7:13).

 

 

Ⅳ. 하나님은 홍해와 요단강이 이스라엘의 진로에 방해가 되었을 때 그것들을 가르셨고, 이스라엘이 원할 때, 바위로부터 하수를 끌어 내셨다(8절). 하나님께서 구원의 권능을 가지시고, 그의 군대의 선두에 대장으로 서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셨을" 때 그것들을 도주하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수를 분히 여기시고 바다에 대하여 성내셨다" 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병거는 그 자신을 위한 엄위의 병거라기보다는 그의 백성을 위한 구원의 병거이다.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 그의 영광이다.

 

이것이 한 번 더 언급되는 것 같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홍해를 밟으셨으니, 구름과 불기둥 속에서 그리하셨나이다(그것은 천사들이 모는 병거였다). 이처럼 당신은 안전히 걸으사 마치 야곱이 그의 자녀와 가축을 염려하여 천천히 몰았듯이, 자신을 이스라엘이 갈 수 있는 느린 보조로 맞추셨나이다. 주께서 깊은 바다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그처럼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하셨다" (사 63:13, 14).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설 때 "창수가 넘쳤으니," 곧 당시에 그 모든 둑을 넘쳤던 요단강이 갈라진 것이었다(수 3:15). 이스라엘의 구원을 완성시키려는 길을 방해하는 곤란은, 그것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 높이 솟아 넘치려고 할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치하시며 그것들 사이를 뚫으시고, 결국 그것을 극복하신다. 그리고 홍해와 요단강이 갈라졌을 때,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물이 으르렁거리며 소리를 내었는데, 마치 그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해진 제약을 알고 거기에 불평하는 듯이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손을(또는 측면을) 높이 들었으니" (물이 "일어나 쌓였기" 때문이다. 수 3:16), 마치 그들이 받은 명령을 반대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며 그들의 파도를 높이 들었으나" 헛된 일이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그들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시 36:3, 4).

 

바다와 요단을 가르는 일로 인해서, 산들의 떨림(전율)이 있었던 사실이 다시금 지적된다. 마치 물이 멈춤으로 인해서 부근의 작은 산들이 충격이라도 받았듯이 말한다. "바다가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이 물러갔을" 때,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양같이 뛰놀았도다" (시 104:3, 4). 온 피조물이 굴복했다. 땅과 바다도 "여호와의 면전에서,"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 존전에서는" 떨었다. 그러나 코울리 씨(Mr. Cowley)가 의역했듯이,

 

" 너 바다야, 너는 네 원대로 날아가라. 그리고 요단의 물결아, 너는 멈추라.

요단아, 너는 필요가 없도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가 원하시는 곳마다, 너를 대신하여 바위가 새 물을 낼 것이기 때문이로다."

그래서,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라고 했다. 광야에 수로가 났으니, 땅을 쪼개 물이 흘러가게 했고, 바위로부터 흘러나와 이스라엘 진을 공급했고, 그들이 이주하는 곳마다 따라갔다. 자연의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연의 힘을 바꾸고 통제할 수 있으며, 물로 수정 바위를, 바위로 수정 샘물을 만들 수 있다.

 

 

Ⅴ. 그는 태양과 달의 운동을 멈추사, 이스라엘의 승리를 편드시고 완성시키셨다(11절). "해와 달이" 여호수아의 기도에 따라 "멈추었으니," 가나안 사람이 밤을 이용하여 도망할 수 있는 혜택을 얻을 수 없었다. 해와 달은 하늘에 "자기들의 장막을 두고 조용히 있다" (시 19:4). 그러나 기브온과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아잘론 골짜기" 를 주목하고 있었다. 비록 먼 엄청난 거리지만, 해와 달은 그 움직임을 맞추었다.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를 보고 "그들(해와 달)은 움직였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군사들을 도우려고, 그들을 쫓았다. 하나님이 쏘는(요나단의 화살처럼, 삼상 20:20) 화살의 방향을 따랐고, 그의 창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하나님의 창이 번쩍이는 광채는 해와 달의 빛을 능가했다). 해와 달은 이스라엘에게는 유리하게, 원수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으니, 마치 "별들이 그 길을 따라 시스라를 대적하여 싸웠던" 때와 같다. 천체는 땅과 바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이 원하실 때는 이스라엘을 도울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Ⅵ. 하나님은 가나안의 열국과 그들의 왕에 대한 승리를 완성하셨다. 하나님은 "큰 왕들과 유명한 왕들을 죽이셨다" (시 136:17, 18). 이것이 여기서 크게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탄원을 들으시고, 그들이 있었던 땅을 다시 그들에게 돌려달라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고, 많은 기적이 필요했었다.

 

1. 여기에 보면 여러 가지 표현이 가나안의 정복을 묘사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1) 하나님이 "활을 꺼내신다." 곧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사, 이스라엘을 위해 쏘셨다. 그의 "칼이 뽑혔다." 원수를 단지 두렵게 하려고 조금 뽑혔다가 다시 꽂힌 것이 아니라, 완전히 뽑혔고, 그들을 모두 진멸하기 전에는 다시 꽂히지 않았다.

 

(2) 그는 끝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니," 가나안의 저 사악한 세대가 더 이상 그처럼 좋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cum fustidio-즉 멸시하는 마음을 품고, 그들의 연맹을 비웃으셨다.

 

(3) 그는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밟듯이 하사,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먹이로 던지셨다(미 4:13).

 

 

(4) 그는 "악인의 집 머리를 치셨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의 가계를 멸망시키셨고, 그들의 가족의 우두머리인 방백들을 상하게 했다. 아니 그는 머리를 자르사, "그 기초를 모조리 드러내셨다." 그들은 건축물인가? 그들은 기초까지 뿌리 뽑혔다. 그들은 몸인가? 그들은 깊은 수렁에 목까지 빠졌으므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그는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셨다" (시 74:14). 어떤 이들은 이를 사탄과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적용한다. 그래서 그 승리를 통해서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셨다" 고 한다(시 110:6).

 

(5) 그는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다" (14절). 이스라엘의 창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이건 가나안이건, 원수의 "전사의 머리를 찌르셨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사용하실 때, 창은 칼이 행하는 살륙과 같은 일을 행할 것이다. 원수는 "나를 흩으려는 회오리 바람처럼"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극도의 힘과 광포를 가지고 이르렀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시 119:1). 바로가 이스라엘을 좇아 홍해까지 왔을 때 "회오리 바람처럼 이르렀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대적한 가나안의 연맹국 왕들도 나왔다. "가만히 가난한 자를 삼키는 것이 그들의 즐거움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업에 어느 누구보다도 성공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큰 사람도 가난한 자를 집어삼키는 데 결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계획은 비밀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실망시키셨으니, 그들의 교만이 단지 그들의 타락을 더 수치스럽게 하였고 그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더 드러나게 되었다.

 

(6) 그는 "말을 타시고 바다를 밟으셨다" (어떤 이들이 이처럼 읽는다. 15절). 즉 그는 그들이 들어간 가나안 저편에 위치한 대해에까지 이스라엘로 승리케 하셨다. 그래서 그들로 그곳을 조용히 통과했으며, 그 땅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또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게 만드셨으니,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차지해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시 44:3).

 

 

2. 이스라엘에게 그처럼 수많은 피의 승리를 가나안에게서 취하도록 하신 것에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세 가지가 있었다.

(1) 그는 이로 말미암아 조상들에게 하셨던 그의 약속을 실천하신 것이다. 그것은 "지파에게 칼로 맹세하신 것에 따른" 것이었다(9절).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 지파" 에게 주기로 맹세했었다. 또 그것은 야곱에게 확증시켰던 이삭에 대한 맹세였으며, "이스라엘 지파" 에게 수 차 되풀이 되었으니, "너에게 내가 가나안 땅을 주리라" 는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성취하사, 그가 말하고 그들에게 맹세한 것을 지키셨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심이라."

 

(2) 하나님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자기의 관심에 따라서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보이신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셨다" (13절). 자연의 모든 권능이 흔들리고, 자연의 운행 과정이 변경되며, 만물이 무질서에 빠진 것 같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있다.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며, 그의 눈은 모든 섭리 속에서 그 백성의 구원을 유념하신다. 하늘과 땅이 맞붙는 것이 그들의 구원의 금사슬의 어떤 고리가 깨어지는 것보다 더 쉬우리라. 그리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것조차도 강하신 팔에 의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게 될 것이다(빌 1:19).

 

(3) 그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세상의 구원에 대한 예형과 상징을 제공하려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인도했으며,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던 자, 우리의 여호수아 곧 예수를 상징하는 여호수아, 곧 "기름부음 받은 자와 함께 있는 구원을 위해서" 이다(한글과 다소 다름).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셨던 것은 그의 기름 받은 자를 감안하사 그들과 맺은 언약의 설립자요 동시에 기초이신 중보자를 위해 행하신 것이다.

 

경건한 확신 (하박국 3:16-19)

 

이 몇줄 안 되는 짧은 대목에서 예언자가 가장 극심하게 공포와 승리감으로 사로잡히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이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처지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더 이상 떨림이 없을 것이니, 영원한 승리만이 있으리라.

 

Ⅰ. 이 예언자는 교회의 원수가 편만할 것과 교회의 환난이 길게 계속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그 예견이 그를 떨리게 했다(16절). 그는 2절에서 했던 말을 계속한다.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내가, 애통의 시대가 교회에 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나이다. 그 소식은 나로 하여금 발작하게까지 하는 인상을 주었나이다. 심장이 꺼지려했기에 피가 심장으로 되돌아 갔고, 사지는 정신을 잃게 되었나이다. 그래서 "그의 입술은 떨렸다." 아니, 그는 너무 약하고, 스스로를 부추길 힘이 없어서, 마치 "뼈에 썩는 것이 들어온" 것 같았다. 그의 안에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설 수도, 갈 수도 없었다. 그는 "그의 처소에서 떨렸으니," 그의 전체가 떨렸고, 그의 내심이 떨렸다. 그는 그의 떨림에 굴복되어 우리의 구세주가 그러셨듯이, "고민했다." 그의 "육체가 주를 두려워하여 떨었고, 그는 주의 판단을 두려워했다" (시 119:120).

 

 

그는 교회의 재난에 대한 애틋한 염려로 마음을 졸이며 교회가 마침내 파멸로 끝날까하고 두려워 떨며, "이스라엘의 이름이 멸절될까" 하여 걱정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 대한 멸시라고 생각지 않았고, 그의 용기에 대한 비방거리로도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 중에 하나임을 공개했고, 그들에게 호의를 보일 것임을 발표한 것이다. "내가 환난날에 안식하려고, 스스로 떨었도다" (한글 개역과 다름). 환난날이 다가옴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에 따라 준비하고 무엇인가를 비축하여, 그 도움으로 환난날에 안식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그리고 환난의 날에 가장 확실히 안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경고에 접하여 속으로 떠는 것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를 위해 기쁨으로 저장하는 분은 자기 앞에서 떠는 자들을 위해 안식을 저장했다. "은혜를 통한 선한 희망" 은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발견된다. "두려움으로 마음이 움직여서," 다가오는 대홍수에 대한 경고를 듣고 떨었던 노아는 그 환난의 날에 안식처를 위한 방주를 예비했다. 예언자는 그가 떨림 속에서 한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백성에게 올라오며," "갈대아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라오며," "갈대아인이 그들을 침노할 것이며," 그들을 포위하고, 엄습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니(난외에 있듯이), "갈대아인이 군대를 몰고 그들을 쳐서 파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가 모두 망했다" 고 외쳤다. 유대인의 전 국토가 빼앗겨졌고 사라졌다. 사태가 나쁘게 보이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것을 과대평가하며, 그것을 최악의 사태로 몰아가기가 쉽다는 점을 명심하자.

 

 

Ⅱ. 그는 전 시대에 교회가 겪은 체험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살펴보고는, 그의 공포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그의 평정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즐거움에 잠긴다. 그는 non obstante-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을 가진다. 즉 오리라고 예견했던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신실한 이스라엘인의 이름으로 기쁨을 말했다.

 

1. 그는 피조물에게서 오는 온갖 즐거움의 파멸을 생각한다. 이생의 환락뿐만 아니라 생명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 주는 모든 안락과 기쁨이 사라지리라고 생각한다(17절). 기근은 전쟁의 의례적 결과의 하나이며, 잠잠히 앉아 묵묵히 있는 자들은 대개 그것이 제일 큰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예언자와 그의 경건한 친구들도, 갈대아 군대가 임하면, 온갖 소유를 늑탈당하고 빼앗기리라.

혹은 그는 자기가 광풍과 불순한 기후, 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른 어떤 손길에 의해서 모든 것을 빼앗기리라고 생각한다.

 

 

(1) 그는 과일나무가 시들고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화과나무" (이는 그들의 양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는 "무성치" 못하며, 마실 것을 줌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포도나무에도 열매가 없을 것이다." 그는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음" 을 본다. 그 기름은 버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감람나무의 소출은 거짓을 말하리라" (난외를 읽으면 그렇다). 그들이 그것에서 기대했던 바가 좌절되어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 그는 밀이 소산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밭에 식물이 없으리라." 그리고 "왕 자신도 밭의 소산으로 살기" 때문에, 만일 그 소산이 감소하면 모든 사람들이 궁핍을 감지할 것이다.

 

(3) 밭은 산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서, 혹은 원수가 멸절시키고 가져갔기 때문에 산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양식이 핍절되고 가축이 멸절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도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위로감에 완전히 빠져 즐기고 있을 때, 언젠가 그것들 모두를 빼앗길 때가 올 것을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선용하되,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고전 7:29, 30).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는다(18절). "그러나 내가 여호와를 즐거워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여호와로 인하여 즐겁게 하리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파괴하라." 그리하여 육적인 마음의 온갖 열락이 정지되게 하라(호 2:11, 12). 그러나 배부른 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자들은, 빈손이 되고 망하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며," 모든 피조적 즐거움이 패망한 우울한 무더기 위에 앉아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하나님이 저들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본적 이유가 있으니, 그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 우리 영혼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리 큰 곤경 속에서라도 그분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같은 곤경들이 우리의 구원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에는 특별한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우리가 세상에서 큰 손실을 당했을 때가 가장 적시다. 그때에야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 잘 드러날 것이다.

이 예언자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가를 보라. "즉 여호와는 나의 힘이로다." (19절). 저 세상에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 이 되시는 그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이 되시며, 그리로 우리를 인도해가시며, 가는 길에서 만나는 온갖 역경을 타개하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식량이 떨어진 때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은총과 위안이 우리의 빵 결핍을 보충해 줄 것이다.

 

(1) 우리는 신령한 복지와 사업을 위해서 강건케 될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 내 마음의 힘이시다."

 

(2) 신령한 경기를 빨리 달리게 되리라. "그는 나의 발을 사슴발 같게 하신다. 나는 용기 충천하여 그의 명령을 열심히 수행하며, 모든 곤경을 이길 것이다."

 

(3) 신령한 사업에 성공을 거두리라. "그가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라." 즉 내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리니, "적을 쳐부수리라" (신 32:13, 29).

따라서 공포와 전율로 기도를 시작하던 그 예언자는 기도를 통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한나도 기도를 마쳤을 때,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먹었고, 그의 안색이 다시는 슬퍼지지 아니했다." 또한 이 같은 체험을 한 예언자는 그 경험을 글로 써서, 교회, 특히 포로기의 교회를 위해서 "악장" (성가대장)에게 넘겨 주었다. 포도기 중에는 수금이 버드나무 위에 걸려 있었으나, 그 모든 권리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모든 사람들이 있고 있었지만-예언자는 "시기오놋" (1절) 곧 경이로운 곡조에 맞추어, "여러 노래에 따라서," 그리고 "느기놋" (19절) 곧 "현악기" 에 맞추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환난을 당했을 때 정직히 기도한 자는 아주 평안해지고, 즐거워져서, 시편을 노래할 만큼 되리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하박국 3:19

The Sovereign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feet of a deer, he enables me to go on the heights. For the director of music. On my stringed instruments. - Habakkuk 3:19, NIV

 


하박국 3장 주석

성 경: [합3:1]

ꃨ 시기오놋에 맞춘 바 - '시기오놋'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그요노트'는 '열정적인 시가(詩歌)'를 의미하는 것으로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유도하는 음악의 한 형태이다(시 7편). 그만큼 하박국 선지자가 강한 감정과 긴박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ꃨ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부분이 문장 첫 머리에 나온다. 이로써 이와 유사하게 시작되는 앞 부분(1:1)과 대조적으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새로 시작되는 단락에서 사실상 기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2절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찬미와 감사의 노래이다.

성 경: [합3:2]

ꃨ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 '주께 대한 소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므아카'는 일반적으로 그 소문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이 지리상으로 떨어져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욥 42:5), 주께서 알게 하신 계시의 내용을 가리킨다. 비록 이 단어가 간접적인 정보를 말할 때 사용되긴 했지만(욥 28:22; 나 3:19), 하나님의 계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그 소문과 연관지어 하나님께 간구한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 '부흥케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후'는 '살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야'의 강한 피엘 명령형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를 강하게 표현한다.


ꃨ 이 수년 내에...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 현실적인 낙망과 심판에 처하여 하나님의긍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는 것으로(출 32:10-12; 시 77:9)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진노'나 '혼란'에 처할 정도로 영적인 죽음 상태임을 잘 나타내며, 현실적인 죄를 드러내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C.E.Armerding).


ꃨ 하나님이 데만...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 '데만'은 에돔의 주요 거주지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사해 동남쪽 지역이다. '바란 산'은 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 산이 많은 지역으로 비교적 크고 광활하여 북으로 가데스 바네아와 경계 지역으로 북동쪽에는 에돔이 인접하고 남서쪽으로는 애굽이 인접해 있다. 좀더 자세하게는 아카브만 서쪽에 위치한 거친 화강암 산들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카브 만 북서쪽에 있는 바란 고원의 외진 벼랑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E.M.Blaiklock).특별히 본절에서 이런 지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70인역 장로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현현하셨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민 11:16,17). '셀라'라는 표현은 9절과 13절에도 나오는 것으로 시편에서는 무려 71회나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전문적인 히브리 시 문학과 깊은 관련을 가진 것으로 성전 예배시 찬미나 기도등에서 사용된 것 같다.

성 경: [합3:3]

ꃨ 하나님이 데만...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 '데만'은 에돔의 주요 거주지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사해 동남쪽 지역이다. '바란 산'은 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 산이 많은 지역으로 비교적 크고 광활하여 북으로 가데스 바네아와 경계 지역으로 북동쪽에는 에돔이 인접하고 남서쪽으로는 애굽이 인접해 있다. 좀더 자세하게는 아카브만 서쪽에 위치한 거친 화강암 산들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카브 만 북서쪽에 있는 바란 고원의 외진 벼랑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E.M.Blaiklock).특별히 본절에서 이런 지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70인역 장로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현현하셨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민 11:16,17). '셀라'라는 표현은 9절과 13절에도 나오는 것으로 시편에서는 무려 71회나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전문적인 히브리 시 문학과 깊은 관련을 가진 것으로 성전 예배시 찬미나 기도등에서 사용된 것 같다.

성 경: [합3:4]

ꃨ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 '광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르나임'은 일반적으로 '뿔'(촉수)을 의미한다. 이와 동일한 단어는 아랍의 시에서 일출시에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의미하였다(Keil). '광선'은 '광명'과 함께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한 광채를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과 그 이후 하나님의 현현을 특징지어 주는 것으로(출 19:16; 20:18)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여호와는 온 세계를 비추시는 빛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화려함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경외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심판을 예상하게 한다.
ꃨ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 '감취었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브욘'은 장소적인 개념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은밀한 곳에 감취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권능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본질은 감추인 채 상징적으로 그 능력이 표출됨을 보여준다. 실상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나면 그 앞에 설 만한 피조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겔 1:1-28).

성 경: [합3:5]

앞 구절에 이어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심판의 권능을 보여준다. '온역'과 '불덩이'는 거의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를 말한다(출 5:3; 레 26:25; 민 14:12; 신 28:21; 렘 29:17-19; 34:12-20).

성 경: [합3:6]

ꃨ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 '진동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예모데드'는 '측량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마다드'에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의 행위와 죄를 심판하기 위해 측량하신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단어가 '소동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모트'에서 왔을 수도 있는데, 70인역이나 개역 성경이 이를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으로 심판의 모습을 개략적으로 묘사하고 나아가서 '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심판의 모습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ꃨ 영원한 사니 무너지며...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 '영원한 산'과 '무궁한 작은 산(언덕)'은 지상에서는 위엄과 영원성과 안전성의 상징들이지만(창 49:26; 신 33:15)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나타내기도 한다(욥 9:5). 여기서는 영원하고 무궁한 하나님을 크게 두각시키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성 경: [합3:7]

ꃨ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로다 - '구산'은 메소포타미아의 왕이었던 '구산 리사다임'을 가리키며,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한 족속을 가리킨다. 이 둘은 서로 관계있는 민족이거나 동일한 민족일지도 모른다. 구산과 미디안은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사사 옷니엘(삿 3:8-11)과 기드온(삿 6:2,12; 7:25; 8:28)에 의해 각각 패하고 말았다. 또한 3절부터 본절에 나오는 지명들(데만, 바란, 구산, 미디안)은 끝음절이 모두 '안'으로 끝나고 있어서 운율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본절이 한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그 지역들은 시내 산과 지리적으로 연관된다.

성 경: [합3:8]

앞 구절들(3-7절)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므로 자연스럽게 본절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ꃨ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 이는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주도하신 역사적인 사실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나오는 군사적인 이미지는 다음 절에도 계속 이어져 사상적인 통일성을 보여준다.

성 경: [합3:9]

ꃨ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 본절은 '주께서 땅에 있는 하수들을 갈라 놓으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하수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하로트'는 8절에 있는 '하수'(네하림)를 반영하므로 출애굽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쪼개셨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트바카'는 피엘 동사 미완료형으로 홍해를 가른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용된 동사이다(출 14:16,21; 느9:11; 시 78:13; 사 63:12).

성 경: [합3:10]

본절은 사용된 용어들이 시편 77:16-18과 어느 정도 일치하며, 그 내용은 자연계 전체가 흔들리는 우주적인 격변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창출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경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권능으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킨 사건에 빗대어 우주적인 구원 사역을 웅장하게 드러낸다.

성 경: [합3:11]

ꃨ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 본절은 하늘의 광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마저 멈추어 버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 만큼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하면서도 반드시 시행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모든 세상이 어두움에 차 있는 반면, 주의 살과 창에서 나오는 광채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전쟁을 위해 빛을 발하는 모습을 묘사한다(G.A.Smith).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날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심판은 일관되게 어두움으로 특징지워진다(출 10:21,22; 14:20; 전 12:2; 사 13:10; 24:23; 렘 4:23,28; 욜 2:2,10,31; 3:15; 암 5:18-20; 8:9; 습 1:15; 마 24:29; 27:45; 눅 23:44; 계 6:12; 8:12; 9:2).

성 경: [합3:12]

앞절(11절)에 이어 여호와가 심판하실 모습을 '진노'라는 주제를 두각시키면서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지금까지 언급된 군사적인 이미지(8,9,11절)를 축약하여 보여준다.

성 경: [합3:13]

ꃨ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 본 구절의 강조점은 주의 백성과 그 백성을 대표하는 '기름받은 자'를 구원하는 것에 있다. '주의 백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메카'와 '기름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쉬헤카'는 여호와의 언약적 공약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메쉬헤카'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사 28:8,9), 한 왕이나(삼상 2:10; 삼하 23:1; 시 18:50; 89:38,51), 대제사장(출 40:13,15; 레 4:3; 6:22), 혹은 선지자(대상 16:22; 시 105:15)등 지도자 계층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는 줄곧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문맥이므로 특별히 모세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용어가 심판과 구원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점으로 비추어 본다면(C.E.Armerding). 이러한 표현으로 당시의 통치자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고난과 영광의 메시야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ꃨ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 '악인의 집머리'의 '머리'란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의 지도자인 바벨론의 왕을 가리킨다. 나아가서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의미한다. 한편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로트에소드 아드-차와르'는 직역하면 '목까지 황무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완벽하게 진멸하게 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성 경: [합3:14]

ꃨ 그들이 회리바람처럼...삼키기를 즐거워하니 -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가진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 구절의 용어 '회리바람', '삼키다', '즐거워하다'라는 표현은 앞에서 묘사했던 바벨론의 약탈 장면을 연출한다(1:8,9,11,13-17; 2:5). 즉 앞에서 이미 언급된 원수들의 실상을 간략하게 시적으로 축약하여 읊는 것이다.
ꃨ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 '머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쉬'는 지도자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손에 있는 무기로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벨론은 아무리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고레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성 경: [합3:15]

본절에서는 8절에서 이미 사용된 언어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8-15절을 하나의 큰 삽입 구절로 묶어주고, 여기서 제시되는 역사적인 상황을 설정해 준다.

성 경: [합3:16]

ꃨ 내가 들었으므로...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 본절은 하박국이 몹시 두려워 떠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하박국이 갈대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닥치게 될 환난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더욱이 하박국은 '무리가 치러 올라오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1:5).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하박국 선지자가 극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며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18,19절; 1:12; 2:2-4). 이는 그러한 일들을 정하신 하나님을 위해 조용히 참고 관망하는 믿음의 위대성을 근거한다.

성 경: [합3:17]

본절은 앞에서 암시된 하박국의 위대한 신앙이 시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ꃨ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이런 표현은 이스라엘의 농경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하박국은 생존권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열거한다. 이스라엘에게 황폐한 경제 현실에 직면한 모습을 묘사하여 하박국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숭고함과 가치를 묘사하고자 하였다.

성 경: [합3:18]

ꃨ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앞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박국이 소유한 신앙의 진수를 풍성하게 나타낸다. '즐거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엘로자'와 '기뻐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길라'은 시편에서 자주 대구로 사용되어 신뢰와 소망하는 대상에 대해 확신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곤 하였다(시 13:5; 16:8-10; 21:1,6,7; 31:6,7; 32:10,11). 하박국이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져서라도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합3:19]

본절은 하나님의 힘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시편 18편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으며, 내용상으로도 평행을 이룬다. 여기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환경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기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ꃨ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본절은 시편적인 용어로 결론 부분에 나오는 표현으로 '영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나체아흐'는 성전 예배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레위인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대상 15:21; 23:5). 이러한 전통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것으로 성령에 감동된 왕도 성전에서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곤 했다(사 38:20). 특별히 '수금'이란 용어는 하박국의 시가 음악에 맞추어 공적으로 불려지던 것임을 잘 보여준다(G.A.Smith).

 

하박국 3장 주석/김정우

하박국의 기도와 찬양의 서원

1. 선지자 하박국의 간청(2절)
2. 거룩한 용사의 신현(3~15절)
1) 빛 가운데 시내 광야에 오시는 주님
(3~7절)
2) 번개로 혼돈의 바다와 강을 정복하시는
주님(8~11절)
3) 구원자와 심판자로 오시는 주님
(12~15절)
3. 선지자 하박국의 찬양의 서원
(16~19절)


모든 “신자들”이 “배신자들”로 변질된 주전 630년 경 유대 땅에서 사역을 시작한 선지자 하박국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불후의 명제를 던졌다(2:4하). 그의 명제는 바울 신학의 근간을 이루었으며(롬1:17),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인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명제는 그가 “신정론”(theodicy)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심한 불평을 털어놓으며(합 1:2~3), 자신이 “파수하는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만들어졌다(2:1). 그는 “비도덕적 사회에서 도덕적인 인간”이 고민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명제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2:4하). 그러나 그는 “철학적인 명제”나 “영적인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이제 후세의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할 찬송가 한 곡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3장).


어떻게 ‘군대에서 먹는 퍼진 라면’같이 ‘퉁퉁 불은 얼굴’로 불평만 쏟아내던 하박국 선지자가(1장), 이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폭발적인 찬양’을 부르는 데로 넘어갔을까(3장)? 그것은 “배신자가 된 신자들”을 심판하러 오는 “바벨론의 기병대” 배후에(1:8), 주님께서 친히 말 타고 오시는 신현을 보았기 때문이다(3:8~9). 하박국 선지자는 2장 끝 절에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라고 결론지었다(2:20). 따라서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3:1). 그러나 본문은 “하박국의 기도”라기보다(1절)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장은 하박국의 기도로 시작하지만(2절), 중심 본문은 “거룩한 용사로 악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의 거룩한 신현”을 노래하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3:2)와 ‘찬양의 서원’(3:16~19)이라는 뼈대 속에 (1) “빛 가운데 오시고”(3~4절), (2) “온 세상과 열국들을 진동시키시며”(6절), (3) “바다와 강을 정복하시고”(8~12절), (4)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13절) 역사 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신현’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주님은 (1)‘전차’를 몰면서(8절), (2) ‘활’을 그의 ‘활집’에서 꺼내시며(9절), (3) 번뜩이는 ‘창’을 던지시는 용사로 찬양 받고 있다(11절).

우리는 하박국의 시를 통하여,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악인을 징벌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는 거룩한 주님의 싸움을 더욱 깊이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거룩한 용사에 대한 찬양시”로 여겨지는 본 시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져 있다.

1. 선지자 하박국의 간청(2절)
오직 한 절로 이루어진 하박국의 첫 기도는 5행으로 구성되며, 첫 두 행은 ‘과거’에 나타난 ‘주님의 명성’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며, 마지막 세 행은 하박국의 기도를 담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라는 <개역> 성경의 첫 행은 다음과 같이 두 행으로 나누어져야 한다.

“야웨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야웨여, 나는 주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랍니다.”

첫 행의 “주께 대한 소문”은 어색하며, “주의 명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내가 주의 명성을 들었습니다”(?mv yt[mv)는 동일어근에서 나온 명사형을 목적어로 사용한 것으로서, 문법적으로는 ‘내적 목적어’(internal object)라고 하며, ‘문맥에서 동사의 힘’을 강조해 주기 때문에 ‘확실성 개념’이 강화된다. 즉 선지자는 “주님의 명성”에 대해 확실히 들었다. 그의 ‘들음’에는 잡음이 없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는다.

상반절의 “주님의 명성”은 하반절의 “주께서 하신 일”과 평행을 이룬다. 주님은 그의 “하신 일”을 통하여 “명성”을 얻으셨다. 주님이 하신 일은 바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구원사를 가리킨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하셨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했다. 선지자는 그 소식을 새롭게 들었고, 이제 놀란다. 둘째 행의 “놀랐습니다”<개역>는 ‘감정을 표현하는 완료형’이기 때문에 “놀랍니다”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표준, NIV, NRS). 하박국은 주님의 업적과 명성을 들으면서, 이제는 경건한 두려움을 갖는다. 물론 그는 그동안 수없이 들었을 것이며 쉴새 없이 전했겠지만, 이제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감정적인 개입과 전이를 경험한다.

다음 3~5행으로 넘어가면, 선지자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주님의 업적을 ‘실존적으로 듣고’,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시대에도 일하시도록 간청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실 것을 약속하셨지만(2:3) 이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도록 간청한다. 간청은 애가에서 중요한 요소다. 애가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애가에서 애통은 간청으로 넘어간다.

음성학적으로 보면 2절의 3~5행은 모두 ‘베( b) 소리’로 시작한다(krqk krqk zgrb). 또한 3, 4행에는 “이 수년 내에”(mynv krqk)라는 ‘수구반복’(anaphora)이 나타나며, 선지자는 이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키고, 듣는 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다. 주님은 “이 수년 내에” 개입하셔야 한다. 이 구는 “우리 시대에”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옛날에 이루신 주님의 “일”을 이제 “우리 시대에” 나타내어 주셔야 한다는 점이 부각된다. 주님께서 옛날 기적을 베풀어 명성을 떨친 것 같이 “지금 다시” 기적을 베푸시길 바란다(욥 42:5; 시 44:1).

하박국은 세 개의 동사, “부흥하게 하십시오,” “나타내십시오,” “잊지 마십시오”를 통하여, 자신의 기도를 이어가며 강화시킨다. 첫째로 “부흥시켜 주십시오”는 부흥사경회의 배경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표현이다. 사실 <개역>과 <개역개정>에서 “부흥”이란 단어는 오직 여기에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표준)라는 뜻이지만 “부흥”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없애 버리는 것은 아쉬우므로 <개역>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둘째로 4번째 행에서 “나타내시옵소서”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것은 3행의 목적어인 “주의 일”을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역>은 “그 일”을 삽입한다. 이 동사는 “알려주십시오”(표준)보다는 “나타내십시오” 혹은 “보여주십시오”(공동)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는 첫 행에서 “나는 들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제 “보여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들은 것”은 “보는 것”으로 강화된다. 지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어렵기 때문에, 옛날 옛적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 나타내어 주실 것을 구한다.

셋째로 5번째 행의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는 모호하다. 이것은 누구에게 진노하며, 누구를 불쌍히 여기느냐에 따라 해석이 세 가지로 뜻이 갈라질 수 있다. 즉 (1) “우리에게 화내실 때 화를 좀 참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2) “우리 원수에게 화내실 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혹은 (3) “비록 우리에게 화내시더라도 우리 원수를 심판하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해석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첫 두 해석은 모두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첫 번째가 좋아 보인다. 선지자는 부패한 언약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진노하시지 않기를 구하고 있다.


2. 거룩한 용사의 신현(3~15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시대에 나타나시길 구했고(2절), 이제 주님께서 선지자의 간청에 응답하여 친히 찾아오신다. 이제 주님은 모든 어둠과 혼돈을 깨치시고, 영광 가운데 나타나신다. 주님의 신현은 “빛”과 “폭풍”과 “지진”과 “천둥”의 영상으로 나타나며(사 28:2; 29:6; 30; 27~33; 겔 1; 10; 43; 암 1:2 등) 산이 진동하고 바다를 정복하는 모티프로 그려지고 있다. 이리하여 ‘출애굽-시내산 계시-정복’ 때의 신현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 옛날 억압적이고 세계를 지배하던 이집트에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난 것 같이 이제는 바벨론인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1) 빛 가운데 시내 광야에 오시는
주님(3~7절)
첫 소절은 “데만”과 “바란 산”으로부터 시작하여(3절) “구산”과 “미디안”으로 마친다(7절). 전자는 유다 남동쪽의 에돔 지역과 “바란 광야” 지역이며, 후자는 시내 광야의 동쪽에 있는 미디안 지역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 광야에 찾아오고 계신다. 이곳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정탐꾼을 보냈던 곳이다. 즉 여기에서는 시내산 계시와 광야 연단의 과정이 담겨 있다. 이 공간적인 뼈대 가운데, 하나님의 신현이 “빛”(4절), “불덩이”(5절) 특히 “땅”과 “산”의 진동(6절)이 그려진다.


3절: 4행으로 구성된 3절에서 “하나님“과 “거룩한 자” 그리고 “하늘”(mymv)과 “땅”(xra)이 평행을 이룬다. 후자는 “온 우주”를 뜻한다. 지역적으로 볼 때 “데만”은 에돔 지역이며, 바란 산과 함께 에돔과 시내광야 북부지역을 포함한다(창 36:11; 민 10:12, 33). “바란”은 산악지역이며, 황무지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데만”과 “바란 산”은 모세의 출애굽과 연관된 지역이며, “데만”과 “바란 산”은 하나님의 신현이 나타난 곳이다(신 33:2; 삿 5:4~5을 보라). 이곳은 주님께서 옛날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나신 곳이다. 선지자는 이 고대의 장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과거 역사를 부각시킨다. 선지서에서 대부분의 신현은 시온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시내 광야 북동부 지역이 중심을 이룬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역사’와 ‘신현’을 연결시킨다. 앞 절에서 대조를 이루었던 ‘옛날’과 ‘현재’가 여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두 가지 모습이 부각된다. (1) “주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나타나는 찬란한 빛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2) “주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 즉 우주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으로 가득 차 세상의 모든 백성이 주님을 찬송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빛’과 ‘찬송’의 짝이 어색하기 때문에 <공동역>은 “하늘엔 당신의 빛이 찬란하게 퍼지고 땅엔 당신의 광채가 차고 넘치니”로 번역한다. 사실 ‘찬송’(hlht)이란 단어는 두 번째 뜻에서 ‘광채’를 의미할 수 있다(HALOT, tehilla II, gleam, radiance). ‘광채’는 다음 절과 잘 이어진다.


4절: 앞 절에 있는 “주님의 영광”이 이제 “빛”으로 좀더 구체화된다. 첫 행의 “그의 광명”은 “그 광명”도 된다(공동역의 “그 밝음” 참조). 주님께서 밝은 빛으로 오시되 “햇빛”처럼 오신다. 이 단어는 번역본에서 “해돋이”(NIV) 혹은 “대낮”(공동)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신현의 맥락에서는 “해돋이 빛”이 원문의 맥락에 더욱 가깝다(시 50:1~3). 주님께서 온 세상을 널리 그리고 밝게 비취며 오신다. 둘째 행의 “광선”은 원어에서 “뿔“(mynrq)을 가리키며, 동일한 어근이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데 사용된다(출 34:29~30). 따라서 “뿔“이란 명사는 시적인 구절에서 연관된 의미인 “광선”으로 나올 수 있다. 우리말 새번역에서 “두 줄기 불빛”(표준)과 “두 줄기 빛”(공동)은 원어의 쌍수(dual)를 번역에 반영한 것이지만 적절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영어번역은 “광선들”(rays)처럼 복수로 처리하나 우리말에서는 단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온다”(중반절)에서 “그에게”(wl)는 “행동이 주체를 반영하는 모습”(dativus ethicus)이므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이것을 “번개”의 영상으로 이해한다면 주님의 손에서 번갯불이 튀기며 나오고 있다(중국의 무협지에는 자주 이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세 번째 행의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에서 “그 속”은 “주님의 손”을 가리킨다. 즉 “주님의 손안에 그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말해준다. 주님의 손에는 그의 권세가 있으며, 그 곳에서 능력이 나타난다(삼하 24:14). 따라서 주님께서 손을 펴기만 하시면, 무서운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5절: 히브리어 원문에서 5절은 “그 앞에서”(wynpl)로 시작하여, “그 발 아래”(wylgrl)로 마친다. 즉 ‘얼굴’과 ‘발’을 통하여 주님의 전신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무서운 천군 천사들이 ‘온역’과 ‘불덩이’로 함께 동행하고 있다.
상반절의 “온역”은 “역병”(개역개정), “질병”(표준), “역신”(공동)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이 단어(rbd)는 기본적으로 ‘전염병’을 뜻한다(출 5:3; 9:3, 15; 시 78:50). 주님께서는 가끔 전쟁에서 전염병으로 대적을 치신다. 주의 사자가 앗시리아 진영에서 185,000명을 염병으로 쳐죽였다(왕하 19:35). 주님은 자신의 원수를 염병으로 징벌하시며(레 26:25; 신 32:23; 삼하 24:15~16), 자신의 백성은 전염병에서 건지신다(시 91:3, 6).

하반절의 “불덩이”(퉣r)는 “불길”(flame, glow)로서 때로는 “화살”(시 76:4)을 뜻하며, 은유적으로는 “재앙”(plague)을 뜻한다(시 78:48; 신 32:24). 우리말 새 번역들에서는 “전염병”(표준)과 “열병”(공동)으로 제시된다. 이 두 단어가 함께 나타나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출애굽의 배경을 놓칠 수 없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실 때 주님은 10대 재앙을 내리셨다(출 7~12장).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무서운 재앙이 원수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일은 무서운 일이다.

6절: “빛”과 “불”과 “재앙”과 함께 오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온 세상이 진동하며 전율하며 무너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첫 행의 “그가 서셨다”는 말의 뜻은 모호하지만, 앞 절에서 주님의 움직임을 묘사했기 때문에 움직이다가 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그가 일어서실 때”~JB)이나 “발길을 멈추시니”(공동)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또한 첫 행의 “그가 서셨다”는 둘째 행의 “그가 보셨다”와 평행을 이루기 때문에 “주님의 발”과 “주님의 눈”이 동시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즉 선지자는 발에서부터 눈까지, 곧 아래에서부터 위로 묘사하면서 전인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이다. 앞에서는 “주님의 손”(4절), “주님의 발 밑”(5절)이 소개되었는데, 이제는 “발”과 “눈”이 나타난다.

“주님의 발”은 “땅을 진동시키며”에서 동사는 아랍어에서 “크게 움직이다”는 뜻을 가지며, 여기에서는 “흔들리게 하다, 부들부들 떨리게 하다”는 뜻이다(rwm의 폴렐형). 이것은 “주님의 눈이 열국을 전율시키는” 것과 좋은 평행을 이룬다. 주님께서 한번 흘낏 보기만 하여도,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이 오금을 펴지 못한다.

온 세상은 어느 정도 진동하는가에 대한 답이 3, 4행에서 제시된다. 즉 “영원한 산”과 “무궁한 언덕”이 뒤흔들린다. “산”과 “언덕”은 합성어로서 안정과 지속성을 상징해 준다(신 33:15; 12:2; 시 72:3; 114:4; 148:9 등). 여기에 지진 영상이 있다. 지진이 올 때 이 세상의 견고한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처럼 주님이 오실 때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하게 보이는 것들이 사라진다(사 54:10; 미 1:4). 즉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행적”은 “영원하다”(5번째 행).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주님의 행적은 영원할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출애굽의 배경이 반영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땅과 산들이 흔들렸으며(삿 5:4~5), 시내산도 흔들렸다(출 19:16~19; 시 114편을 보라).

7절: 6절에서 “진동하는 땅”과 “전율하는 열국”의 모습이 이제 7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앞에서 범세계적인 흔들림이 있었는데, 이제는 구체적인 장소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흔들린다. “내가 보니”는 완료형이며, 상황이 시작하여 진행되려고 하는 초기상황을 말해준다. 시인은 1인칭을 통해, 자신이 보는 시각을 전하고 있다.

“구산”과 “미디안”에서 “구산”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며, 70인역은 “이디오피아”로 읽는다. 그러나 “구스”는 이집트 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하반절에 나타나는 “미디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구산”은 시내 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디안”과 특별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부족이나 나라로 볼 수 있다(민 12:1참조). “미디안”은 아카바만 동쪽 지역에 있다. 그러나 “미디안족”은 시내 반도 서쪽에 살았다. 따라서 이곳도 출애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출 2:15; 3:1; 민 31:1~12; 시 83:10).

“장막”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염소 가죽이나 천으로 장막을 만들어 살았다. “장막”과 평행을 이루는 “휘장”은 “커텐”으로서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제유법”(synecdoche)이다. 장막의 휘장을 통해 전체 장막을 뜻해준다(사 54:2; 렘 4:20; 49:29; 시 89:41 히브리어 참조). 따라서 “구산”과 “미디안”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오심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2) 번개로 혼돈의 바다와 강을 정복하시는
주님(8~11절)
“빛”과 “지진”으로 오시는 주님의 첫 번째 신현을 묘사한 후(3~7절), 다시 한 번 더 신현을 묘사한다(9~12절). 이것은 고대 히브리 문학의 기법이었다. “한 번 말하고, 다시 한 번 더 초점을 더욱 선명하고 깊게 잡아서 말하는 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신현 묘사에서도 선지자는 “산들의 흔들림”(10절), “땅과 열국”(12절), “빛과 광채”(11절) 등의 핵심 용어들과 분위기를 통하여 첫 번째 신현 묘사와 중첩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신현의 효과는 더욱 심화되고 강화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님의 ‘주적’이 부각된다. 즉 주님은 “바다”와 “강”을 대적하며 심판하신다(8, 9, 10절).

또한 이 소절은 “단순 의문형”을 통하여(8절), 더욱 신현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3절에 가서야 비로소 제시된다. 즉 질문으로부터 답까지의 거리가 멀다. 히브리 시는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사상을 엮어가기 때문에 논리적 일관성이 약해 보인다. 그러나 시적 효과는 극대화된다.

8절: 이제 본격적으로 주님께서 거룩한 용사로 나타나신다. 주님은 “말을 타고”(1행), “구원의 병거를 모신다”(2행). “말”과 “전차”는 “말이 끄는 전차”를 뜻하므로 주님께서 전차를 몰고 나가며 싸우는 용사의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 “구원의 전차”는 “승리의 전차”를 가리킨다. 구약의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주님은 “구름 전차를 타시고 싸우신다”(신 33:26; 시 18:10~11; 68:33; 104:3~4).

주님은 전차를 타시고, “바다”와 “강”에 대해 분노하신다. 구약성경에서 “바다”와 “강”은 자주 평행을 이룬다(시 24:2; 66:6; 72:8; 80:12; 89:26 등). 여기에서는 “강”과 “바다”가 도치되어 나타나며, “강”이 두 번 나타나고 있다. <개역>에서 3행의 “하수”와 4행의 “강”은 동일한 단어이다. 학자들은 “강에 대한 분노”가 두 번 나타나는 것은 필사자의 오류로 보지만, 반복을 통한 점층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강을 치시고, 또 한 번 더 치심으로 완전히 정복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바다”와 “강”은 자연적인 세력이 아니라 창조와 역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한다(시 74:13~15; 77:16~20; 89:8~11; 114:3~5 등). 즉 이들은 역사 속에 구현된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이제 “악의 제국”을 대적하며 심판하신다. 특히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쳐부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다와 싸우시는 모습은 구원사에 있어서 출애굽과 연관되며, 출애굽의 절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홍해를 갈랐으며(출 13:17~14:31; 시 77:16, 17; 78:13; 사 53:12), 다시 요단강을 갈라, 가나안 땅의 정복 역사가 시작되었다(수 3:13~17; 4:21~24). 이제 다시 주님께서 악한 제국들을 벌하시며 구원사를 새롭게 시작하실 것이다.

9절: “거룩한 용사”로서의 주님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활”은 주님의 무기 가운데 제일 핵심적인 것이다(시 7:13~14). 신명기에서는 “활”이 기근과 질병과 재앙의 은유로 나타난다(신 32:23). 예로서, “기근의 활”(겔 5:16)은 마치 활에 맞아 사람이 죽어가듯 기근으로 사람이 죽어갈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활을) 꺼내다”는 동사( rw[)는 “활집”( hwr[)이라는 명사의 동족 목적어를 이루어 주며, 이런 형태에서는 명사보다 동사가 강조된다. 즉 주님께서 활집을 벗기시고 활을 시위에 먹이는 그 단계를 말해준다.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는 히브리어 원어에서 3단어( rma twfm tw[kv)로 구성되며, 번역하기 아주 까다롭다. 첫 두 단어는 각각 다중적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연결해도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화살을 바로 쏘신다”(개역개정), “살을 메우시고, 힘껏 잡아당기십니다”(표준), “당신은 많은 화살을 부르셨습니다”(NIV), “화살을 메우십니다”(RSV), “당신의 명령으로 화살이 포식하였습니다”(NRSV) 등으로 제시된다. 70인역은 “당신은 당신의 전통을 화살로 채웠습니다”로 읽는다. 우리는 “주께서 활을 활집에서 꺼내시고, 화살을 쏘았습니다”로 이해하고자 한다.

세 번째 행의 “강으로 땅을 쪼갠다”(개역)는 영상은 앞에 있는 두 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 있는 “활”과 “화살”이 천둥 번개를 가리킨다면, “강”이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원래의 독자에게 있어서 이 구절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사막에 갑자기 내려 갑자기 땅이 갈라지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폭우로 사막의 말라붙었던 땅이 여러 강줄기로 말미암아 조각나는 모습이다(표준역의 “강줄기로 땅을 조각조각 쪼개신다” 참조).

10절: 4행(quatrain)으로 이루어진 이 절에서, 한 행이 각각 3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절마다 접속사가 생략되어(asyndeton), 주제와 분위기를 숨도 쉬지 않고 “강화시키는”(intensitying) 효과를 가져온다.
첫 행에서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에서 “흔들리다”(lwj)는 동사는 산모가 아이를 나을 때, 고통 가운데 온몸을 뒤트는 모습이다. 따라서 술 취한 영상인 “비틀거립니다”<표준>보다는 “부르르 떱니다”<공동>가 더 좋다. 다시 한 번 출애굽의 영상이 반복된다. 옛날에 주님께서 시내산에 나타나실 때 온 산이 흔들렸다(출 19:18; 삿 5:5). 이제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산들이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뒤흔들린다.

둘째 행과 셋째 행에는 다시 한 번 더 “창수”(혹은 “거센물”~<표준>)와 “바다”(탗ht )가 등장한다. 마지막 네 번째 행에서 <개역>의 “(바다가) 손을 높이 들다”는 뜻이 모호하며, “그 파도가 높이 튄다”고 번역하여야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둘째 행부터 넷째 행에는 “물”과 “바다”와 “파도”가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첫 행의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즉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는” 모습은 무서운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만약, 첫 행과 둘째 행이 개념적인 짝을 이룬다면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거센 물이 일어난다”는 대홍수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즉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산들이 두려움에 떨었다(창 7:19~20; 사 28:2). 따라서 “창수가 넘치는 모습”은 주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따라서 셋째 행과 넷째 행에서 “바다가 소리를 지르고 파도가 높이 일어나는 모습”은 한 쌍을 이룬다.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에서 “손”은 권세의 상징이며(신 2:15; 수 8:20), “손을 들다”는 반역을 상징하므로(왕상 11:26), 혼돈의 물결이 주님께 크게 반역하는 모습이다.

11절: 원문에서는 갑자기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로 시작하며, 그 이유로서 “주님의 화살”과 “창”이 날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주님의 “화살”과 “창”이 어디를 향하여 날아갔는지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문맥을 보면, 주님이 쏘시는 무기는 분명히 앞 절에 있는 “바다”와 “강”을 향하고 있다(8, 9, 10절). 이미 9절에서도 주님께서 “활을 활집에서 꺼내셔서 강을 향하여 쏘시는 모습”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혼돈의 세력을 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은유적으로 보면, 여기의 “화살”과 “창”은 천둥과 번개를 상징해 준다. 따라서 “번쩍이는 화살”과 “시퍼런 창”은 폭우 속의 번개를 가리키고 있다. 바로 이때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춘다.” 여기에서 “해와 달”은 하늘에 빛나는 모든 것을 뜻하는 합성어이다. 따라서 하늘이 캄캄하여 빛이 없어져 버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반역하는 악의 세력을 징벌하고 계실 때, “해와 달”이 자리에 멈추어버렸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는 여호수아 10장12~13절을 가리키고 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인들의 연합군을 쳐부술 때,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셔서 적군들을 이스라엘인들의 손에 넘겼다. 그때 “해와 달이 기브온과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여호수아 때에는 해와 달이 그 달리던 길에 서버렸기 때문에 계속하여 낮을 유지해 주었다. 여기에서는 해와 달이 하늘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처소에 머물러 있다. 이리하여 완전한 어둠이 세상을 덮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이 쏘시는 번개 활과 창만이 빛을 뿜으면서 혼돈의 세력들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다.

다시 한 번 더 하박국 선지자는 ‘출애굽-시내산-정복’ 전통 기사를 통하여 그의 청중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주려고 한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혼란 가운데 빠졌다. 그러나 옛적에 주님께서는 친히 이집트인들과 아모리인을 물리치셨다. 그들의 군사력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바벨론 군대도 무너질 것이다.

3) 구원자와 심판자로 오시는
주님(12~15절)
12절: “바다”와 “강”을 정복하는 고대 근동아시아의 신화적 색채로 가득 찬 우주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는 역사적인 현장성을 가진다. 주님은 “노를 발하시고”, “분을 내시며” 심판하신다. “노”(m[z)와 “분”(da)은 자주 쌍을 이루며(사 10:5, 25), 때로는 연계형으로도 나타난다( 퉍A?z; 애 2:6). 즉 “불타는 분노”이다. 열국을 심판하는 날에 하나님의 분(ira dei)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노”는 단지 감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진노의 수단(be of instrument)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심판하실 때, 온갖 종류의 재앙들을 사용하신 것 같이 (시 78:49), 그와 유사한 종류의 재앙들이 쏟아질 것이다.
주님의 진노가 쏟아질 대상인 상반절의 “땅”과 하반절의 “열국”은 각각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합성어로서 “땅의 열국들”( 흏a 탙wg)을 가리키며, 두 단어를 나누어 2행으로 만들은 경우이다(창 18:18; 22:18; 26:4; 신 28:1; 슥 12:3).



상반절의 “땅에 돌리다”(개역)는 “땅으로 진군하다”(you march through the earth)는 뜻이며, 따라서 하반절의 “열국을 밟다”와 좋은 평행을 이루어준다. “밟다”는 보리와 밀과 같은 곡식을 타작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동사이다. 소가 곡식을 밟아 떠는 모습(신 25:4)은 은유적으로 심판을 가리킨다(사 41:15; 암 1:3; 미 4:13). 하나님께서 친히 열국을 짓밟으신다.


13절: 드디어 8절에서 던져진 질문의 답변이 13절에서 제시된다. 왜 주님께서 “강”과 “바다”를 향하여 분노하셨는가? 그것은 “주님의 백성을 구원할” 뿐 아니라 “악인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즉 이제 비로소 악인과 의인의 운명이 갈라진다.
첫 행의 “주의 백성”은 둘째 행의 “기름 받은 자”와 평행을 이룬다. 후자는 시편에서 “왕”이나 “다윗의 후손”을 주로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주의 백성”과 그들의 대표가 되는 “왕”이 모두 구원을 받는다. 두 행에서 “구원”이 반복되는 것은 불필요한 반복이 아니라 “구원”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법으로 볼 수 있다(conduplicatio).
주님은 어떻게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지도자를 구원하시는가? 주님은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시므로” 구원하신다. 즉 주님은 그들의 원수를 철저히 파괴해 버리실 것이다.
여기에서 “악인의 집머리”와 “그 기초”는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까다롭다. <표준역>은 “악한 족속의 우두머리”와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해석하며, <공동>은 “악인의 소굴”과 “그 기초”로 제시한다. 영어번역에서는 “악한 땅의 지도자”를 “넓적다리에서부터 목까지”(NIV), “악한 집의 우두머리”와 “기초에서 지붕까지”(NRSV) 멸하시는 것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악인”에 대한 심판인지 “악인의 집”에 대한 심판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자라면, 악인의 집이 “기초에서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전자에 대한 심판이라면, 악인은 그의 “넓적다리”(rwsy)로부터 “목”(rawx)까지 벌거벗기고 찢길 것이다. 이것은 고대근동아시아의 배경에서 보면 처절한 심판의 장면을 보여준다. 젠질리에서 발견된 한 유물에는 적병의 머리에 화살이 꽂혀 있으며, 그의 성기는 드러내고 완전히 나체가 되어 있다(ISBE 4:1014). 그렇다면, 여기의 “기초”는 성기를 가리킬 수 있으며(욥 4:19; 22:16), “목”과 “성기”는 전체를 가리키는 합성어이다.


14절: 히브리어 원문은 <개역>의 세 번째 행인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로 시작한다. 이리하여 앞 절에 제시된 “악인의 머리를 치는” 모티프가 반복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이제는 그들의 머리가 창으로 뚫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창으로 머리가 뚫릴 것”이므로 악이 악인에게 돌아가는 부메랑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원수들은 이와 같은 철저한 파멸과 모멸적인 수치를 당해야 하는 이유가 둘째 행과 셋째 행에 제시된다. 그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와 나를 흩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집합적 단수로서 “우리”를 가리킬 수 있다.
“흩다”는 영상은 바람과 폭풍으로 쭉정이를 흩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전쟁의 맥락에서는 패배자를 온 세상 사방으로 다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악함은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으로 더욱 심화된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빈약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나 경건한 이스라엘인을 가리킨다(습 3:12). 가난하고 무력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으로 가장자리에 떨어지게 되었고 온 세상에 흩어지고 있다.


15절: 신현의 마지막 절을 이루는 15절은 다시 논리적 흐름을 깨뜨리고 있다. 그러나 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절은 주님의 신현에 대한 두 번째 묘사를 시작하는 8절과 수미일치를 이루어준다. 즉 주님은 “바다”와 “무서운 물”을 확실히 정복하셨다. 이제는 “상황 끝”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어떤 이들은 첫 행을 “주께서 바다를 말처럼 타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번역은 옳지 않다. 여기에서 “말을 타다”는 “전차를 타다”는 뜻이므로, “말”은 “전차”를 가리키는 대유법(synecdoche)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주님은 전차를 타시고 바다를 짓밟았습니다”는 뜻이다. “바다”와 동치를 이루고 있는 하반절의 “큰 물의 파도”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그려주지만, 상반절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주님께서 전차를 타시고 바다를 짓밟으시므로, 무서운 물결이 일어나는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주님의 전차가 바다로 들어가자 마자 바다가 무서운 거품을 일으키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다. 주님께서 드디어 혼돈의 바다를 정복하셨다. 이와 같이, 악의 왕국과 세력을 역사 속에서 끊으실 것이다.


3. 선지자 하박국의 찬양의 서원(16~19절)
끝으로 주님의 신현에 대한 선지자의 개인적 반응이 나타난다. 앞의 2절에서 그는 일인칭으로 기도하였고, 이어서 신현을 열어주었다(3절). 이제 16절은 선지자의 반응을 묘사함으로써 신현을 닫아준다.


16절: 앞에서 선지자는 “내가 들었고 놀랐다”고 말하였으며(2절), 여기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더 “내가 듣고 놀란다”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3장 2절은 3장 16절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이 사이에 “열국을 정복하는 신현”이 나타나고 있다(3~15절).
또한 2절에서는 선지자가 놀란다는 말만 제시되었다. 이제 그의 놀람에 대한 신체적인 묘사가 나타난다. 그가 들었고, 결과적으로 놀랐다. 그의 떨림은 들음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위임을 경험하자, 그는 온 몸이 떨리는 경험을 한다. 여기에서 신체는 “내 창자,” “내 입술,” “내 뼈”로 나타난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는 “내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표준>, 혹은 “뼛속이 녹아내린다”<공동>로 번역할 수 있다. 뼈는 온 몸을 지탱해주는 데, 뼈가 썩거나 녹으면 몸을 지탱할 수 없다.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개역>는 어색하며, 직역하자면 “내가 선 자리에서 떨린다”가 된다. 이것은 “내 걸음이 내 아래에서 떨린다”로 수정할 수 있으며,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표준>, 혹은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공동>로 의역할 수 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는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표준>, “우리를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공동>로 새롭게 제시된다.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우리를 침략하는 백성들에게 닥칠 환란의 날에 나는 편히 쉬리라”는 뜻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인 바벨론은 환란을 당할 것이며, 그 날을 바라보며 편히 쉬겠다는 선지자의 고백으로 여겨진다.


17절: 바벨론이 쳐들어오는 환란의 날에 이스라엘에 올 완전한 경제적 파탄이 그려지고 있다. 선지자는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배경 속에서 최악의 파국을 열거하며 심화시킨다. 바벨론이 얼마나 무서운 나라이며,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은 이미 그려졌다(1:5~11). 그들이 하는 짓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장 5절에서는 아직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갈대아인들이 쳐들어온 이후의 상황이 제시된다. 이 절에서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눅13:6; 왕상 4:25 [히 5:5]; 렘 8:13; 호 2:12; 욜 2:24), “올리브나무”와 “밭의 식물,” “우리의 양”과 “외양간의 소”가 접속사를 통하여 세 쌍의 짝을 이루고 있다. 또한 3, 4행은 “소출”(hc[m)과 “식물”(lba)로, 5, 6행은 “양”과 “소”와 “우리”와 “외양간”으로 완벽한 짝을 이루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점층법으로 위기가 심화된다. “무화과”는 설탕의 재료로서 사치품에 속하며, 필수품은 아니다(나 3:12). 따라서 가장 절실하지 않는 무화과로부터 포도, 감람(기름), 밭의 식물, 양과 소의 순서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또한 첫 세 가지는 열매를, 마지막 둘은 가축을 다룬다. 이 중앙에 “밭의 소산”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모든 농사가 망하였으며, 절대적인 궁핍에 떨어진 모습이 그려지며, 결국 사람의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는 정황에 떨어져 가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재앙(암 4:9)이나 적군의 침략으로 이루어진다(욜 1:6~7). 신명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심판하는 수단이었다(신 11:17).

18절: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놀라운 반응을 보인다. 처참한 파멸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을 즐거워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애통이 찬양으로 변하였다. 무서운 심판의 예언이 드디어 실현되었지만 그는 “심판을 넘어선 구원”을 바라보며 찬양한다. 그는 믿음의 바른 관점을 갖는다. 그는 가장 절망적이고, 처절한 상황 속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고백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결론으로 제시된다(18:46; 24:5; 25:5; 27:9; 사 17:10; 미 7:7). “구원”이라는 단어는 하박국서에서 여러 번 나타났으며(1:2, 2:4, 3:13), 다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19절: 이 마지막 절은 시편 3편 34절과 거의 유사하다(삼하 22:2~51 참조). 시편 18편에서도 시인은 고난 가운데 있었으며(4~6절), 하나님은 신현 가운데 그에게 응답하셨고(7~15절), 신현 후에 그는 구원을 받는다(16~19절). 동일한 형태가 여기에 나타난다는 것은 정경적 형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힘”은 “내 힘의 원천”이란 뜻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지속적으로 주셔서” 강건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힘으로 그는 현재의 위기를 충분히 극복한다. 어려운 날들이 끊임이 없지만, 그는 힘차게 헤쳐나가고 있다.
“사슴과 같이”는 “사슴의 발과 같이”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죄는 소돔 같다”는 “소돔의 죄와 같다”는 뜻이다(사 3:9). 여기의 “사슴”은 문법적으로 “암사슴”(hind)이다. 암사슴은 아주 부드럽게 산악지역에서 잘 뛰어 다닌다.


시인은 이제 “높은 곳”을 다닌다. “높은 곳”은 “높고 험준한 산”이다. 모세도 동일한 고백을 했다(신 32:13; 33:29). 주님께서는 친히 높은 곳을 밟으시며 승리하시는 것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도 높은 곳을 밟으며 뛰고 놀 것이다(암 4:13; 미 1:3).
이리하여 하박국 선지자의 고투는 끝났다. 그는 “어찌하여?”와 “언제까지?”라며 하나님께 물었다. 그러나 이제 평화를 누린다. 그는 더 이상 그는 “어찌하여?”와 “언제까지?”라며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편히 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0절: 하박국의 노래는 의식적인 기호로 마친다. 시편에도 이와 같은 표제들이 등장한다 (시 4; 6; 54; 55; 61; 67; 76). 이것은 하박국의 시편을 성전 예배 의식에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그의 신앙고백은 믿음의 공동체의 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