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Habakkuk) 서론 및 1장
하박국(Habakkuk)
1. 명칭
본서의 예언자 하박국에 관한 자료는 본서 외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활동 연대도 정확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갈대아 인들은 주전 625-539년 사이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합1:6을 보면 하박국을 므낫세왕(698-643년)때에 활동한 예언자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합1:6을 유다왕국에 대한 갈대아의 위협으로 해석할때 이것은 갈그마스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하박국의 연대를 여호와김왕 (609-598년)시대로 보고 있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어떠하든 하박국이 활동한 시기는 유다왕국의 암흑 시대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유다왕 여호와김은 폭군으로 백성들을 탄압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 만족에 도취해있던 왕이다.
그리하여 나라 안은 부정과 착취와 죄가 횡행하였으며 악인이 흥청 거리고 의인이 멸시를 받는 어두운 시기였다.
그림설명 / 하박국 사본 : 1947년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중에 하박국서 주해가 발견되었는데 이 사본은 그 중의 일 부분다. 이스라엘미술관 소장.
2. 주제표
초점 | 착잡한 문제들 | 하나님의 해결 | 신실한 삶 | 신실한 주님 |
본문 | 합 1장 | 합 2장 | 합 3장 | |
주제 | 여호와의 답변 | 여호와를 찬양 |
3. 내용과 주요사상
하박국은 대담하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그의 예언은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셨다. 이러한 점에서 하박국은 이스라엘의 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 리우기도 한다. 그의 질문의 핵심은 왜 하나님의 정의는 이렇게 악하고 부패한 시대와 사회와 인간들 에게 시행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의로운 하나님은 의인과 또 의로운 백성에게는 번영의 상을 주시고 악인과 악한 민족에게는 형벌을 주신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었다 이러한 상선 벌악의 사상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하므로 하박국의 의문은 당연 한 것이다.
하박국은 유다 왕국의 무죄한 백성들이 왜 앗수르인들에게 특히 자기 나 라의 악한 왕에게 까지 심한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가 라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불의한 백성과 왕들은 반드시 벌을 주고 징계할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범죄한 유대 민족과 왕들을 벌할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의 의혹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벌하시는데 있어서 바벨론을 사용하시는가? 이스라엘의 불의를 벌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더큰 불의를 용서하시는것은 과연 하나님의 도리인가? 실로 하박국은 모든 철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의 중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궁극적 대답이(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합2:4)는 것이다.
4. 내용 분해(대분류)
1. 왜 하나님은 악이 승리하도록 방임하시는가? 합1:1-17 1) 첫째 질문 합1:1-4 2) 사납고 성급한 백성 합1:5-11 3) 둘째 질문 합1:12-17 2.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합2:1-20 1) 성루에서 들려오는 대답 합2:1-3 2) 다섯 가지의 화있을진저 합2:4-20 3. 하박국의 기도 합3:1-19
5. 내용 분해(소분류)
○합1:1 하박국의 불평 항의 합1:1 하박국의 불평 합1:5 하나님의 응답 합1:12 의문을 제기하는 하박국 ○합2:1 갈대아의 심판 합2:1 하나님의 말씀 합2:4 바벨론의 악행 합2:9 바벨론이 심판을 당한 이유들 ○합3:1 하박국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합3:1 하박국의 기도 합3:3 하박국의 찬양 합3:16 하박국의 확고한 믿음
◀ 포로기 이전 여호야김 왕 시대에 유다에서 활동한 하박국 선지자의 활동 무대. |
명칭 |
히브리 성경은 본서 저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을 '하박국(포용하다, 껴안다)'이라 하였다. |
저자 및 기록연대 |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서는 본서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서에서조차도 그는 자기 족보와 예언 연대를 언급해 놓고 있지 않다. 제롬은 하박국이란 말의 어원이 '움켜쥐다'란 의미를 가진 단어에 있다고 말하면서, 하박국은 '그는 포옹하다'라는 뜻의 이름이라고 했다. 본서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불의와 악인의 존재를 묵과하시는지에 대해서, 즉 선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느냐는 신정론(神正論) 문제에 대해서 생명을 내걸고 씨름하는 어느 선지자를 보게 되는데, 이런 관점으로 보아도 그의 이름의 뜻이 '포옹하다'인 것을 부적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본서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와 자신과의 독백이 담겨 있다. 본선지자가 당황해 했던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와 자기의 경험 사이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 부조화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설명을 듣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주어지지 않고, 다만 굳센 믿음만이 그날의 승리를 보장한다는 확신만 주어진다(2:4). 그는 이런 믿음을 3:17-19에서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 기록연대와 역사적 배경 1:6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인들을 유다에 대한 응징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갈대아 인들은 B.C. 7세기 말 쇠약해진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린 바벨론 인들을 가리킨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애굽의 바로느고를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배시킨 바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612년에 함락되었다. 갈그미스 전쟁이 발발하기 3년 전, 바로느고는 유다 왕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전사시키고(왕하 23:29, 30; 대하 35:20) 바벨론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그 자리에 꼭두각시 왕들을 앉혔다. 그렇지만 바로느고와 이들은 강성해지는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유다는 갈대아 인들의 수중에 있다가 마침내 B.C. 586년에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유다 인들은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아마 하박국의 예언은 갈그미스 전쟁 전후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5에 보면 갈대아 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미래의 사건으로 예언되고 있고 또한 그것이 경이로운 소식으로 들렸던 점으로 보아, 어떤 이들은 하박국의 연대가 이보다 좀더 이른 시기로도 추측한다. 그러나 갈대아 인들의 모습이나 세력이 자세히 묘사된 점들을 보아서(1:7-11) 그 연대는 적어도 B.C. 605년 이후였을 것이다. |
주제 |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비난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1:2-4은 약간의 불경건한 자들을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처럼 자기 민족애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세력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위대한 주제는 사도 바울(롬 1:17; 갈 3:11)과 히브리서 기자(히 10:38)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루터의 개혁 이념이기도 하였다. |
내용분해 |
1. 머리말(1:1) 2. 왜 하나님께서 불의를 그냥 두시는가(1:2-4) 3. 하나님의 답(1:5-11) 4. 왜 하나님께서 악한자를 사용하시는가(1:12-2:1) 5. 하나님의 답(2:2-4) 6. 불의에 대한 5가지 저주(2:5-20) 7.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3:1-19) |
서론 일람 |
1. 기록자 : 하박국 2. 기록연대 : B.C. 609-589년 사이 3. 기록장소 : 유다 4. 기록대상 : 유다 백성 5. 핵심어 및 내용 : 하박국서의 핵심어는 "믿음"과 "정의"이다. 이 하박국서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분이 작정하신 모든 계획 속에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
1장 본문 연구
공의의 추락 (하박국 1:1-4)
이 책의 제명에서 볼 때(1절에서 보는 것처럼) 글쓴 이는 하나님의 영감과 위임을 받은 "예언자" 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지파와 족보, 또는 출생지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다). 이 예언서 자체가 "묵시로 받은 경고" 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마치 육안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보는 듯이 그것의 사실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예언자는 신앙과 의의 비통한 부패로 인하여 매우 큰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서, 당대의 죄악을 통탄한다. 그가 여기서 하나님께 돌린 것은 매우 우울한 불평이다.
1. 사람이란 아무도 무엇을 자신의 것이라고 외칠 수 없다. 그러나 소유권과 평등에 관한 가장 신성한 법에 도전하여, 권세를 잡은 자는 비록 권리가 없는 것도 하고자 하면 그것을 가졌다.그 땅이 옛 세상처럼 "강포로 가득했다" (창 6:11). 예언자는 "강포를 인하여 외쳤고" (2절), "간악과 패역, 그리고 겁탈과 강포" 를 인하여 그리했다. 가족과 친척들 중에서, 이웃과 친구들 중에서, 상업과 법정에서, 모든 것이 횡포로 이루어졌고, 모두가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데 망설이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할 뿐이었다. 선지자 자신에게 큰 침해가 행하여진 것 같지는 않았으나(상실의 시대에는 잃을 것이 없는 자가 가장 좋다),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를 침통케 했으며, 그는 그의 눈물을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과 섞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해한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이듯, 그것은 이런 유의 "죄악를 인하여 한숨짓고 부르짖는"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걱정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큰 패역이다. 그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다" 고 불평한다(4절). 정직한 자나 정직한 이유는 사방에서 그를 에워싸는 원수들을 가질 것이다. 많은 악인들이 그를 대적하여 연합하므로 그를 넘어뜨린다. 아니, 한 악인이(그것은 단수이다) 수많은 다양한 악한 기술을 가지고 한 의인을 공략하여 완전히 에워싼다.
2. 나라는 끊임없이 서로 물어뜯고 먹어치우는 당파와 도당으로 깨어졌다. 이는 모든 평화의 아들들에게 비탄이 되었다.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3절). 그것은 분열을 선동하고, 분파를 확대시키고, 서로 격분하게 하며 형제들 중에 대화의 씨를 뿌리니, 형제에 대한 고소자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 잠들어 잊혀지기 시작한 변론과 분쟁를 깨우되, 열심히 다시 일으켜 타다 남은 불 아래 숨겨있던 불꽃을 불어서 살린다. 그리고 만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평화를 깨뜨리고 파당을 만들고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널리 퍼지고 오래 지속되는 재앙을 초래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다. 악한 자들이 한 나라의 선한 자 모두를 삼키는 불에 저들의 손을 따뜻하게 덮히며 또 그 불을 돋구는 것을 보는 일은 비통한 일이다.
3. 억수 같은 강포와 분쟁이 강하게 밀어 닥쳐 율법의 제재력과 시행력, 그리고 공의의 집행을 도전한다(4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억제치 못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잠잠하며, 숨을 쉬지 않으며, "맥박이 뛰지 않는다" (그 말이 본래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율법이 그쳤으며,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며," 아무도 그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며, 죄인들에게 심판이 시행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의가 굽게 시행된다. 만일 공의의 법정에 호소하면 의인은 정죄받고 악인이 의롭다함을 얻으리니, 치료가 오히려 최악의 병임이 밝혀진다. 법의 힘은 저발호하는 위협스러운 재앙을 예방하기에 미흡한 법률을 개정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행정력은 제정된 법률의 선한 목적에 부응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정의의 강물은 강포에 의해 말랐고, 순조로운 진로를 갖지 못한다.
4. 이 모든 것은 공개적이며 공공연하며, 파렴치하게 공언된다. 예언자는 자기가 이런 간악을 목도하였다고 불평한다. 그의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것을 보았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도다." 한 나라의 넘치는 사악은 선한 사람에게는 매우 눈에 거슬리는 것이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처럼 악하다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가끔 자기가 "해 아래서 보았던" 이런 종류의 고민을 불평한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에 따라 은자가 되어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렘 9:2). 그러나 "그러하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과 사랑이 영원히 통치하며 겁탈과 강포가 우리 앞에 없는 세상으로 옮겨가기를 고대하게 된다.
5. 그는 하나님께 이 일을 불평했으나 그 패역의 치료책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왜 주는 간악을 볼 수밖에 없는 시대와 장소에 나를 처하게 하셨나이까? 그리고 나는 왜 끊임없이 메섹과 게달에 거하게 되나이까? 나는 주께 이 강포에 대해 부르짖나이다. 내가 크게 외치고, 오래 외쳤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며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주는 학대자들에게 보복하지 않으며, 마치 당신의 손이 짧고 귀가 무딘 것처럼 학대받는 자에게 정의를 행하시지 않나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사악을 묵과하시는 듯하여 그것을 은근히 장려하시는 듯하며, 그들로 사악 중에 번성하게 버려두실 때, 그것은 선인의 믿음에 충격을 주며 그들에게 쓰라린 시험이 된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3)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땅을 버리셨도다" 고 말하는 자들은 그들의 불경 속에서 계속 완악하게 된다. 우리는 사악이 이처럼 횡행하고 오래도록 번성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유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악인에 대한 보응과 선인에 대한 비난에 합당한 충분한 이유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하나님과 쟁론하고 그의 심판을 겸손히 간청할 때에도 "그는 지혜로우시며 공의와 선하심이 충만하다" 고 말해야 한다. 또한 죄악의 부르짖음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고발하게 되고, 기도의 부르짖음이 악을 감수하는 자들을 위해 들려질 날이, 비록 오래 지체되었으나, 반드시 오리라고 믿어야 한다.
악인의 득죄 (하박국 1:5-11)
여기서는 예언자의 불평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비록 하나님께 오래 참으셨으나 이 괘씸한 백성을 늘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케 해 준다. 왜냐하면 보복의 날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으니, 예언자는 그들에게 이것을 말하여, 회개와 개혁으로 그들에게 경고된 심판을 돌이킬 수 있게 해야 한다.
Ⅰ. 선고의 서두는 매우 경외롭다(5절).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라." 그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 의해서도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제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실 것이다. 인내를 악용한 것만큼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은 없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임하게 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이방 중에 목도될 것이며, 이웃 나라들이 주목하여 그 광경에 놀라게 될 공공연한 징벌이다(신 29:24, 25 를 보라). 이는 이스라엘의 황폐를 심화하여, 그들로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게 할 것이다.
2. 놀라운 심판이다. 너무나 기이하고 놀라우며, 하나님의 섭리의 공로(公路)로부터 이탈한 것이므로, 이방 중에는 비교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모르는 나라들에게 보통 가하시는 심판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무거운 심판이 되리라. 또한 그것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에 대해 예언을 받았거나 그 심판이 도래할 때 그것을 목도하는 자들까지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리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처럼 많은 심판들이 하나로 모아지며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도 그것과 함께 벌어지고 그것을 강화하고 악화하여, 그처럼 크고 힘센 나라가 멸절하여 파괴되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행하셨던 백성을 그처럼 엄하게 대하시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백성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그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경이로움일 수밖에 없다.
3. 신속한 징벌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할 일을 행할 것이니, 신속히 이제 행하리라.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경고된 심판이 시행될 것이다. 이전 날들의 죄가 네 날들에 돌려질 것이니, 이는 이제 죄악의 도가 넘쳤기 때문이다" (마 23:36).
4.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나타날 심판일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자업자득한 것이리니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나 "이는 여호와께서 하신 일" 이라고 하리라.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일은 무서운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가 심판하시려는 자에게는 화로다!
5.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에게 임할 멸망을 상징해 줄 심판이 된다. 이 말씀이 그 사실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행 13:14). 우상 숭배 때문에 갈대아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예루살렘의 파멸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거역한 대가로 당한 로마인에 의한 그들의 파멸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어서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패역을 행하는 자에게 기이한 심판이 있지 않겠는가?"
Ⅱ. 그 선고의 내용은 매우 공포스러우며 특이하다(6절). "보라. 내가 갈대아인을 일으켰도다." 그들 중에 많은 변론과 분쟁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으니, 이는 곧 그들의 죄악이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을 일으키리니, 이들은 그들과 변론하고 분쟁하니, 그것이 그들의 심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 분쟁하면서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잡아먹는 때에, 보편적인 황폐로 평화를 이룩할 대적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알맞는 일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분쟁적 당파는, 로마인들이 와서 "그들의 처소와 나라를 탈취했을" 때, 서로에게 화근이 되었다. 갈대아 사람들은 그 경고된 파멸의 도구가 될 것이며, 비록 그들이 불의하게 행하더라도, "여호와의 의를 이루고" 이스라엘의 불의를 징계할 것이다.
1.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들에게 징계의 매의 역할을 할 백성에 대한 설명을 보자.
(1)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 이며, 잔인하고 광포하니, 그들이 행하는 것은 폭력과 분노로써 행해진다. 그들은 경솔한 권고와 맹렬한 혈기를 부리며, 확신을 가지고 사업을 진척시킨다. 그들은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으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 잔인한 백성의 손에 던져진 자들의 형편은 비참한 것이다.
(2) 그들은 강하며 굳건하니, 아무도 그들 앞에 서지 못하며 누구도 그들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7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그들이 평야로 보내는 용맹한 군대로 유명하다(8절).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게" 추적하며, "저녁 이리보다 사납다." 그리고 이리는 하루 종일 굶주린 후에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는" (시 104:20) 흑암을 기다리는 저녁 무렵에 가장 포학스럽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기병대는 매우 많을 것이다. "그 기병은 멀리 퍼지리니 그들이 원방에서부터 즉 그들의 나라 전역에서부터 오며, 그들이 침입한 나라의 전역에 퍼질 것이며 그 나라를 강탈하여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노략을 재촉하여, 그들의 노략에 속하리니(사 8:1 각주), 그들은 독수리가 식물을 움키려 할 때 땅을 향하여 날음같이 날아 그가 노렸던 먹이에 달려들 것이다."
(3) 그들 자신의 뜻을 자기들의 율법으로 삼을 것이며, 그들은 인륜의 법, 평등의 법, 명예의 법 따위에 의해 통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을 것이다" (7절). 탐욕과 혈기가 그들을 다스리며, 이성이나 양심이 그들을 다스리지 않는다. 그들의 원칙은 Quicquid libet, licet-즉 내 뜻이 내 법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Sic volo, sic jubeo; stat pro ratione voluntas-즉 이것이 내 원이며, 이것이 내 명령이다. 그것은 내가 택했기 때문에 행해져야 한다. 이런 원수로부터 무슨 호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 불의하고 무자비했던 자들, 즉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않던" 자들은 당연히 보응을 받으며, 그들을 불의와 무자비로 취급하는 자들의 손에 빠질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2. 이 무시무시한 나라에 의해 시행될 공포의 집행에 대한 예언이 있다. "그들은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닐 것이다"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순식간에 갈대아 군대가 그 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굴복시켜 온 세계를 정복시킬 듯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정복하였다.
혹은 이스라엘 "땅의" 넓은 것으로 다녔으니, 그것은 전부 그들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다. 여기 예언된 것은 이런 것이다.
(1) 그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것을 마치 자기 것같이 취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리니," 이는 그들에게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이며, 칼로 획득한 것이다.
(2) 그들은 온 정력을 다하여 전쟁을 촉진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 강포를 행하려 오는데" (9절) 칼로 문제의 권리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옳건 그르건 간에 강탈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동풍과 같이 마셔버리리니" (한글 개역과 다름), 그들의 모습은 광포하고 두려워 한 번 보면 그들이 마음내키는 모든 것을 차지할 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동풍이 꽃과 꽃송이를 따내어 날리듯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동쪽으로 향해 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도 읽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 유다 동편을 바라보아 그들이 강탈한 모든 노획물들을 그리로 가져가려고 생각한다.
(3) 그들은 수많은 포로를 취하여 바벨론으로 보낼 것이다.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며" 더 취할 것이 있는 한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
(4)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반대를 무시해 버릴 것이다(10절). 그 비탄에 빠진 유대인들은 그 지위 높은 자들을 의지하여, 그가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갈대아인의 승전 무기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아! 갈대아인들이 그것들을 초개같이 만들리라. "그들은 열왕을 멸시하며" (그는, 원본에 있듯이 느부갓네살을 뜻하는데, 그의 성공에 부풀어 올라 남을 멸시하리라) 그에게 대적하려고 생각하는 군대장관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방백을 치소하며," 그를 상대도 안 되는 것처럼 대한다. 그들은 그들의 요새와 산성을 두른 마을들을 의지하는가? "그는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으리니" 그에게는 그것이 약하게 될 것이며, "모래를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다" (한글 개역과 다름). 흉벽을 쌓기 위해 던져진 소량의 흙은 그들을 치기 위해 그가 바라는 모든 이득을 그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조롱하며 놀림감으로 삼으리라.
(5) 이 모든 것에 의하여 그는 참아 보지 못할 교만으로 거드럭거리리니, 그것이 그의 멸망의 원인일 것이다(11절). "그 때 그의 마음은 변화되어" 더 악해질 것이다. 백성과 임금의 마음은 모두 점점 교만해지고 무례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의 권리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다른 백성의 권리를 주장하게 될 때도 역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형편이 펴면 마음도 역시 교만해진다.
이 승리에 찬 임금은 이성, 평등, 중용의 모든 한계를 "지나쳐 행할" 것이며, 그 모든 속박을 파기하여 "득죄하되,"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취한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 벨과 느보는 갈대아 사람의 신들이었는데, 이들은 이 신들에게 자기들의 성공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강퍅하게 우상 숭배를 행하였으며, 참람하게도 그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했다하여 그들의 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훨씬 강하다고 주장했다. 영화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거나 우리 자신이 만든 신들에게 돌림으로써,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을 모독하는 것은 득죄임을 명심하자(이는 교만한 백성에게 공통된 득죄이다).
본 대문의 끝맺는 말은 환난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말의 위안을 준다. 즉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나아져서 구원에 합당하게 될 것이라고 소망되는데, 바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들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더 악해져서 멸망에 합당하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찰 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 즉 하나님을 대적하여 들어 올려진 마음은 "타락의 앞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호소 (하박국 1:12-17)
이 예언자는 백성에게 전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연후에,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자기가 본 중한 경고의 짐에 눌린 자신의 심령을 편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아직도 그는 불평으로 가득차 있다. 만일 그가 주위를 돌아 본다면 그는 오직 이스라엘이 행한 강포를 볼 뿐이다. 만일 그가 앞을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행하여 진 강포를 볼 뿐이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우울한 광경인지를 말하기가 어렵다.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 놓는다. 하나님의 교회에 임한 재난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 임한 재난, 그리고 패역를 보면 우리도 분기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러나 우리는 후회 중에 불평하기에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생각을 품거나 그와의 교제를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은 악하니 항상 악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을 개조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만유로부터 그에게 영광를 돌리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므로, 세상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결심을 하고 우리 자신을 더 선하게 하여 복락된 세상을 바라야만 한다. 갈대아인의 놀라운 번성이 이 예언자로 하여금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탄원 속에서 우리가 살필 것은 다음과 같다.
Ⅰ. 갈대아인들이 갈수록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권세 밑에서, 그가 설정하고 준수하기로 결정하며, 그 자신과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는 데 필요로 하는 참된 사실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할 우리를 지지해 줄 기쁜 생각을 제공할 것이다.
1. 아무리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시며, "우리의 거룩한 자" 이시다. 승리에 찬 갈대아 사람들은 그 힘으로 자기들의 우상을 삼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라" (렘 10:10, 11)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1) 그는 "여호와" 이시니, 곧 모든 존재, 권세, 그리고 완전의 기초이시다. "우리의 반석은 그들의 것과 같지 않도다."
(2)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백성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우리가 이처럼 심히 멸망했으며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임했으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았으며 그와의 관계를 끊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를 부인하지 않았고 그가 우리를 부인하시지도 않았다(시 44:17). 우리는 허물진 백성이며 그는 멸시받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우리의 소유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그의 예배에 대해 강퍅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3) "그는 나의 거룩한 자이시다." 이는 예언자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사랑하며, 거룩하심을 인하여 그를 사랑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거룩한 자이므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성결자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실 것이니, 그가 나의 거룩한 자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룩하지 않으나 나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2.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계신다.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 현세의 생활에서 환난 아래 놓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계시다는 사실은 크나큰 계속적 위로가 된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1) 그의 본성의 영속성. 만일 그가 만세 전부터 계신다면 그는 영원까지 계실 것이며, 우리는 일시적이며 가시적인 것들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 불가시적이며 영원하신 하나님 속에서 충분한 소망과 도움를 가진다는 이 첫 원칙을 의지해야 한다. "주는 영원으로부터 계시지 않나이까? 그렇다면 주는 주의 영속적인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 주님 자신께 영원한 이득이 돌려지게 하기 위해서 주의 영원한 팔을 드러내지 않으시리이까?"
(2) 그의 언약의 유구성. "주는 예로부터, 주의 백성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시며(어떤 이들이 이렇게 이해한다), 우리가 귀로 듣고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위대한 일들을 옛날에 행해졌으며, 과거 어떤 때와 같이 아직도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주는 하나님이시며 변하시지 않으시니이다."
3. 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교회를 보유하실 것이다. 주는 영원부터 계시며,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이름이 때로는 위태로울지라도 멸절하지 않으리라. 사도들과 같이(고후 6:9), "경책당해도 죽지는 않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도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시 118:18).
예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속성으로부터 교회의 영속성을 추리하는가 보라.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았고" 그러므로 내가 사는 한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했다. 그는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진 반석이시니 "지옥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으리라."
4. 교회의 원수들이 그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며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계획되며 방향이 정해진다. "주께서 그를 두셨나이다. 주께서 그를 세우셨나이다." 갈대아인들에게 힘을 주셨으며 그들로 강한 백성으로 삼아 그의 계획 속에서 그들이 해야 할 것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이스라엘에게 어떠한 적대 세력도 행사할 수 없으며, 단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탈취하며 노력하도록" 허락하였다(사 10:6).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니, 힘센 사람의 힘이 그로부터 나오며 그를 의지하고, 그의 견제 아래 놓여 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여기까지는 올 것이나, 더 이상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시는 자는 그 제정하신 것 이상을 행하지 않으리니, 이는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손이며 그의 손이 막대기이다(시 17:14). 그리고 그는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으며,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요하며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그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 악인들이 그들을 대적하도록 풀어 놓아질 때, 그것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개혁하여 바로잡기 위하여 된 것이다. 그들은 죽이는 검이 아니라 마음에 깃든 어리석음을 몰아내기 위한 막대기로 쓰여진다.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다" (사 10:7). 인간이 어떤 재난을 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선을 끌어내시며, 우리는 "그의 계획이 선" 것을 확신한다. 이 사실은 교회의 환난과 재앙을 참작해 볼 때,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5. 악인의 사악함이 잠시 승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니 악을 시인하지 않는다(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도다." 이 예언자는 갈대아인이 지극히 약탈하고 불경함에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큰 승리를 이룬 사실을 살핀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되며 인간의 처지가 하나님께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일어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제일 원칙인 "하나님께서는 죄의 후원자나 조성자가 아니시며 그럴 수도 없다" 는 사실을 믿고 그 생각을 누른다. 하나님이 스스로 패역을 행하실 수 없듯이, 그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 오히려 그것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이다." 그는 세상에서 범해지는 모든 죄를 보시니, 그것은 그에게 득죄요 그의 눈에 가중한 것이며, 그것을 행하는 자는 그로 인해 그의 공의에 저촉되기 쉽게 된다. 하나님의 품성에는 그의 거룩한 법에 위배되는 저 악성과 악행에 대한 증오가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죄인들과 화해할 방편을 즐거이 찾으셨으나, 결코 죄와 화해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원칙을 준수할 결심을 해야만 한다. 비록 그의 섭리의 백정이 잠시,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것과 상치하는 것 같더라도 그리해야 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는 그것을 장려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시 5:4, 5). 본문은, 하나님께서 간과하시는 패역은 특히 압제자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해진 재난을 뜻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할 이유를 발견하시나, 그것을 시인하지는 않으신다. 이것은 발람의 경우와 부합되니(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의 분노에 의한 재앙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는 원인이며, 그들은 그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추측해내지 않는다. 환난의 도구가 자기들을 증오한다 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그리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징계하시는 그 중에 사랑을 나타내신다.
Ⅱ. 그는 이 참혹한 현실이 다음과 같은 사실과 부합되기 어려움을 발견한다. 즉 "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신줄 우리가 확신하온데, 왜 무신론자들은 주께서 그러하신지 아니신지를 알려는 유혹을 받나이까? 어찌하여 주는 자기 백성을 궤휼한 갈대아 사람들에게 방관하시며,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일에 승리를 주시나이까? 왜 주는 주의 이름을 참람되게 하며, 주의 이름을 경외하고자 하는 주의 서원한 백성들을 이처럼 잔인하게, 불신적으로 취급하는 주의 철천지 원수들을 놔두시나이까? 우리는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것은 욥에게(욥 21:7; 24:1), 다윗에게(시 73:2, 3), 예레미야에게(렘 12:1, 2) 임한 유혹이었다.
1.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시며 죄인들을 참으셨다. 그는 "그들을 방관하셨다." 그는 그들의 사악한 행동과 계획을 전부 보셨으나 그들을 억제하거나 벌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의 의도를 촉진하며 잘되어 번성하도록 그들 앞에 모든 것을 날라오도록 놔두셨다. 아니다. 그가 그들을 방관한 것은 그들에게 견제와 책망을 안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마치 그들에게 미소를 짓고 호의를 베풀어 주는 듯이 격려와 원조를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이 사악한 길로 행할 때 "잠잠하셨으며," 그들에게 아무 말도 안하시고 그들에게 멈추라고 명하시지도 않았다. "이 일들을 당신이 행하셨으며 나는 잠잠했나이다."
2. 그의 인내는 악용되었으며, 이 악한 행사와 행사자들에게 "선고가 신속히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악을 행하는 준비를 더욱 더 충분하게 하였다."
(1) 그들은 거짓되며 속이기를 잘했으니, 아무도 그들을 신용하지 않았고 그들을 확신한 자도 없었다. 그들은 "궤휼히" 행한다. 평화와 우호의 깃발 아래 그들은 가장 사특한 계획을 시행하며, 어떤 일도 양심에 거리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들은 자기보다 낫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학대하기를, 마치 카인이 아벨을 증오하듯 "그의 행함이 악하고 그의 동생의 행함이 의롭다고" 하여 그러한 것과 같이 한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그가 그를 부끄럽게 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선한 사람들을 삼키니, 이는 선한 자들이 그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유대인이 갈대아인들 자신만큼 악하거나 더 악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훨씬 더 의로운 자가 있어서, 갈대아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3)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를 물고기를 잡듯하였다. 이 예언자는 불평하기를, 하나님의 섭리가 약한 자를 건져내어 강한 자의 먹이가 되게 하였으니, 사실상 그들은 "바다의 어족 같게" 되었다고 했다(14절). 그래서 그들은 서로 서로 잡아 먹기를, 큰 생선이 작은 생선에게 하듯하며(3절), 그리하여 결국 공통적인 원수에게 당하였다. 그들은 "주권자 없는 곤충, 또는 헤엄치는 동물" (이 단어는 "물고기" 를 가리킬 때 쓰인다. 창 1:20) 같아서, 그들을 서로 잡아 먹지 못하게 하거나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줄 주권자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물고기가 어부에게 맡겨지듯이 갈대아인에게 넘겨진다. 저 교만한 압제자들은 양심없이 그들을 죽이되, 사람들이 생선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갈대아인들은 아무 어려움없이 그들을 죽이며, 사람들이 생선을 잡듯이 매우 쉽게 잡으니, 저항하지 못하고 보호되지 않으며 무장 안한 고기를 잡듯하며, 그들을 잡는 것을 수고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락으로 여긴다. 그들은 그물에 가까이 오는 고기를 닥치는 대로 모두 다 잡는다. 그리고 그들은 손을 대는 것은 모두 다 자기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고기잡는 방책을 알고 있듯이, 그들도 약탈하고 파멸시키는 다양한 방책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은 하나하나 "낚시로 취하며," 어떤 것들은 종류별로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은다." 그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써서, 그들은 그들을 통하여 부하게 되리라고 바라던 자들을 오히려 멸망시킨다.
(4) 그들은 취한 것으로 영광을 삼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직하게 얻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들은 착취와 사기에 의해 번성한다. 그들은 많이 소유하며 최상의 것을 가진다. 그들의 땅은 비옥하여 거기서 많은 소산을 얻는다. 그러므로,
[1] 그들은 스스로 큰 자만에 빠져 매우 즐거워한다. 그들은 즐겁게 산다(15절).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의 부가 막대하고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여 그것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욥 31:25). "영혼아 평안히 쉬라" (눅 12:19).
[2] 그들은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서로 대단히 좋아하며, 자신의 재간과 경영을 서로 찬양한다. 그들은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한다." 그들은 그처럼 많은 돈을, 비록 부정직하게 취했지만, 모은 것에 대해 스스로 박수를 친다. 우리 속에 우리의 외적 번영을 자신에게로 영광 돌리려는 경향이 있으며,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고 말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하자. 이것이 우리 자신을 우상화하며, 우리 자신의 것인 초망 그물에 희생을 바치는 것이니, 이는 넵둔이나 다곤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우상 숭배의 하나이다.
그들로 이처럼 그들의 그물을 받들게 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소득이 풍부해" 졌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재물로 신을 만드는 자는 만일 그물로 재물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초망 그물을 신으로 삼을 것이다.
Ⅲ. 끝으로, 예언자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이 인류의 파멸자들을 항상 놔두어 이처럼 번성하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그에 관해 하나님께 아뢴다(17절). "그가 그물을 떨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배불러 강포와 압제로 그들의 이웃으로부터 갈취한 것으로 그들 자신의 그릇을 채울 것입니까? 그들이 잡은 것을 그들의 그물에서 떨어내고, 다시 바다에 던져 더 잡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계속 이 악한 길로 가도록 놔두시겠습니까? 그들은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열국의 많은 사람과 재산이 그들의 그물에 희생되어야만 합니까? 마치 사람에게서 그들의 영토를 강탈하는 것이 작은 일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영광을 도적질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또 그는 그들의 침해된 권리를 옹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투기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언자는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물러났다. 마치 시편 기자가 했던 것과 같다(시 74:2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소서."
하박국 1장 주석
성 경: [합1:1]
ꃨ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다만 본서에만 나와 있을 뿐이고(3:1), 그의 이름이 전형적인 히브리어도 아니다. 특히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는 경우는 하박국을 포함하여 세 명뿐이다(학 1:1;슥 1:1).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하박국은 직업적인 선지자였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남달리 엄중한 예언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는 '짐'(burden), '예언'(prophecy). '신탁'(oracle)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중성을 나타내며,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장 첫머리에 나와서 강조되어 있다.
성 경: [합1:2]
ꃨ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물음은 애가의 전형적인 형식이다(시 6:3;13:1,2;80:4;89:46;렘 12:4;슥 1:12). 그것은 앞의 동사 '내가 부르짖어도'의 히브리어 '솨와예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는 위기 상황을 나타낸다.
ꃨ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강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는 자기 동료마저 해칠 정도로 도덕적으로 극심하게 파괴된 상태를 가리킨다(창 6:11). 여기서는 통치 계급이 불의의 편에 서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한 당시의 암울한 현실, 즉 유다 왕 여호야김의 폭정을 가리킨다. 하박국은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하박국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본절에서 1장 전체에 걸쳐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긴장은 2장에 이르러 하나님에 의해 부분적으로 옹호되고, 3장에 가서는 보다 충분하게 확증되고 하박국의 믿음이 입증된다(C.E.Armerding).
성 경: [합1:3]
ꃨ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 2절과 마찬가지로 '어찌하여'의 히브리어 '라마'는 애가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시 10:1;44:23,24;74:1,11;80:12;88:14)문장 전체를 강조한다. '간악'의 히브리어 '아웬'과 '패역'의 히브리어 '아말'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서로 관련되어 등장하는 용어로 여기서는 민수기의 축복 내용(민 23:21)과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로써 민수기의 약속과 상반된 현재 상황을 부각시키는 듯한다(3:2). 이 단어는 각각 '죄악'(evil)과 '불화'(trouble)로 번역할 수 있으며(NIV), 공의가 왜곡되고 사회적인 억압이 팽배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렘 6:7;20:8; 겔 45:9; 암 3:10).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번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없이 방관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B.C.609-598)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다(렘 22:3,13-17).
ꃨ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 '변론과 분쟁'(strife and conflict)은 평행어로서 분노와 알력으로 인한 다툼을 일컫는 말이다(잠 15:18; 렘 15:10). 이는 이스라엘 민족간에 일어났던 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의 심각한 사회상을 묘사한다.
성 경: [합1:4]
ꃨ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트'는 모든 권위의 가르침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잠 3:1;4:2),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규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규례는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며, 레위인 제사장들에 의해 중재되었고(레 10:11;신 33:10),간혹 통치권자가 중재하기도 했다(신 17:8-11). 그런데 율법에 기초하여 시행되던 공의가 율법의 해이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당시의 사회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사는 모습이 팽배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합1:5]
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문맥상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고, 독자로 하여금 말하는 사람이 바뀌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임의로 번역한 듯하다.
ꃨ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 '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우'와 '하비투'는 주로 함께 사용되었고(대상 21:21;시 10:14), 여기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ꃨ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타메후 테마후'는 칼 동사와 히트파엘 동사가 합쳐져서 매우 강조되어 놀라움의 최고 절정을 의미한다. 이로써 당시 이스라엘에게 닥칠 일의 심각성이 어떠한지 나타낸다. 그 일은 예루살렘의 몰락으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위기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성 경: [합1:6]
ꃨ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갈대아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세딤'은 앗수르 서판에 의하면 '칼두'(Kaldu)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두는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옆에 페르시아만과 바벨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였고, 도시가 거의 없었다. 그곳 거민들은 소규모의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했으며,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R.L.Smith). 그러다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B.C.625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바벨론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IDB).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갈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훌의 아들 게셋의 후손이었다(창 22:22).
성 경: [합1:7]
ꃨ 그들은...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 본절에서는 앞에서 언급된 침략자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한다. 갈대아 사람들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포악하고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열국들을 지배하고 다스렸다.
성 경: [합1:8]
ꃨ 그 말은 표범보다...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 본절의 표현들은 바벨론의 군대가 맹렬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표범과 이리는 사자와 더불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동물로 나타나기도 한다(렘 5:6; 호 13:7,8). '독수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쉐르'는 썩은 고기를 먹는 '콘돌'(vulture)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먹이를 사냥하는 독수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본절은 바벨론군대가 이스라엘을 빠른 속도로 공격할 것을 의미하고,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낸다.
성 경: [합1:9]
ꃨ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 '강포'라는 표현은 앞에서 언급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강포를 일삼았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강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시 7:16; 잠 1:18,19). 특별히 '모래같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기력하게 국외로 끌려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을 다스리던 갈대아 왕 느부갓네살 왕 때(B.C.597) 20여년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25:1-8).
성 경: [합1:10]
ꃨ 열왕을 멸시하며...그것을 취할 것이라 - 본절은 갈대아 사람들의 성격과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은 독단적인 거만함, 조급하고 야만적인 심성, 자제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공격성은 맹렬하였으므로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도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벨론 사람들은 스스로 절대적인 통치권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고 다른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성 경: [합1:11]
ꃨ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 갈대아인이 바람이 휩쓸듯이 빠르게 열방과 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격화하여 득죄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이들은 책임을 모르고 회개하지도 않고 도리어 창조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를 깨뜨린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긴 하지만,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성 경: [합1:12]
ꃨ 선지자가 가로되 -앞에서(5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표현으로 문맥의 전환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첨가한 번역이다. 또한 본절은 복잡한 평행법의 전형적인 예이다. 즉, 첫째 행과 둘째 행이 대구를 이루고, 셋째 행과 넷째 행이 대구를 이룬다. 또한 첫째, 둘째 행은 셋째, 넷째 행과 평행을 이룬다.
ꃨ 여호와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 첫째 행에 해당하는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명칭인 여호와(출 6:2-8)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해보는 것으로 보인다. '만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뎀'은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고(신 33:27; 시 55:19), 지난 역사의 불특정한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시 44:1; 77:5,11). 특별히 '전부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미'는 본 구절이 과거 출애굽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C.E.Armerding). 이와 같은 역사 회곡적인 표현은 본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6-8절;3:2,3).
ꃨ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 이는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선지자의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연결되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생명을 유지시켜 구속하시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ꃨ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며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 본 구절도 평행적인 대구를 이룬다. 특별히 '여호와'와 '반석'을 같은 의미로 대조시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강조한다. 또한 '심판'과 '경계'라는 개념도 상호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사 11:3,4)으로 두행이 서로 보완적이면서 같은 의미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심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무질서의 요인들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통치권과 권위를 회복하는데에 그 의미가 있다. 또한, 이와 대조를 보이는 '경계'의 히브리어 '호키아흐'는 '옳고 정의로운 것을 정립한다'는 법률적인 의미를 기본적으로 함축하지만, 그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는 범죄자를 교화한다는 차원에서(레 19:17;욥 5:17; 시 6:1) 사용되어 파괴적인 의미보다는 구속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결코 없다.
성 경: [합1:13]
ꃨ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참아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관해 좀더 진전된 논의를 펼치기 위해 앞에서(3,5절) 언급된 적이 있는 '보다'의 히브리어 '라'와 '참다'의 히브리어 '하비트'라는 동사를 반복한다. 여기서 하박국선지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에게 당면한 현실사이에서 보여지는 모순을 부각시킨다. 그렇지만, 그 의문조차 무작정 회의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기초한다.
성 경: [합1:14]
ꃨ 주께서...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 앞에서 언급한 논의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아인들에게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히게 될 일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고기'나 '바다의 어족'이라는 표현은 인간 이하의 상태를 암시하거나(창 1:26,28; 9:2; 시 8:8; 전 9:12) 정상적인 인간 사회에서 기대되는 조직이나 지도력을 결여한 무기력한 상황을 가리킨다.
성 경: [합1:15,16,17]
'낚시', '그물', '초망'등은 갈대아 군대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앞에서(11절) 언급된 것처럼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권세를 신격화하여 기뻐하고 그것을 의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에서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교만이 가득한 상태를 묘사한다. 그들이 번성하는 현실은 선지자로 하여금 더욱 큰 의문을 갖게 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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