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산책

신바빌로니아 - 하박국서의 이해를 위해

은총가득 2021. 1. 21. 15:26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 하박국서의 이해를 위해

 

 

 

 

신바빌로니아.

 

Babylon - Bab (문, gate의 고대 아카드어) + El (신, god의 고대 아카드어) + on (그리스의 명사형 어미)

"신의 문 이라는 의미" 오늘날 이라크가 바로 신바빌로니아이다. 한국의 후고구려가 원고구려의 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다. 후고구려의 근거, 정당성을 원 고구려에서 찾으려 했다. 그런데 신바빌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림1. 신바빌로니아 지도>

 

메소포타미아지역 해발고도 500m를 경계로 상류지방은 앗시리아, 하류지방은 바빌로니아. (성경에는 바벨론이라고 소개됨) 칼데아족은 본래 메소포타미아 남쪽 바깥의 유목민족이었다. 후에 수메르지방으로 들어와 구바빌로니아인들과 동화한다. 나보폴라사르가 칼데아 총독의 지위에 오르고 앗시리아가 혼란상 상황에 자립하여 스스로를 바빌론 왕이라고 칭하며 신바빌로니아를 건국하게 된다. 그후 신바빌로니아는 빠른 속도로 힘을 키워간다.

 

 

신바빌로니아의 최강국 부상

 

나보폴라사르는 곧 메디아의 키악사레스와 손잡고 앗시리아를 공격했다. BC614년 앗시리아의 종교 중심지인 앗수르를 함락시켰다. BC612년에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성경: 니느웨)를 함락시켜 앗시리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그리고 그 직후 네부카드네자르 (성경: 느부갓네살왕)이 바빌로니아의 왕의 명을 받는다.

 

 

므깃도 전투 (Battle of Megiddo)

 

<그림2. 므깃도, 갈그미스 전투>

이집트왕 느고는 앗수르가 붕괴되게 되면 이집트가 위태로와질 것을 염려한다. 이집트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어 바빌론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다. 유다는 앗수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유다왕 요시아는 이집트 군대가 앗수르와 연합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 때 유다는 크게 패했고, 요시야왕은 전사하게 되었다.

 

 

갈그미스 전투 (Battle of Carchemish)

므깃도 전투의 승리로 이집트는 유대의 내정간섭까지 하고 갈그미스까지 올라가서 바빌론니아와 전투를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승리를 거둔다. 패전후 느고왕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유대의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키고 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야호야김 4년 (BC 605년)에 이집트의 왕 느고는 다시 갈기미스로 진격한다.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로니아가 대승을 하게되었다. 이를 계기로 바빌로니아는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이집트까지 이르른다. 이 시기부터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된다. (이 전투후 바빌로니아는 유다의 젊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때 다니엘과 친구들도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 1차 바벨론 포로)

 

참고,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는 서로 떨어진 사건이라기 보다는 같은 사건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집트왕 느고가 앗수르를 돕기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가던 여정에 므깃도에서 유다와 전투를 한 것이고, 그 이후 바로 갈그미스로 올라갔으나 바빌로니아에게 패한 것이다.

<그림3. 므깃도, 갈그미스 전투의 시간적 흐름>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타인 점령

 

갈그미스 전투를 기점으로 팔레스타인지역을 포함 이집트까지 영역을 펼친 바빌로니아는 BC 604년에 유다와 그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BC597년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2차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된다. (이 당시 선지자는 예레미아로, 예레미아는 신바빌로니아와의 동맹을 권유하나 유다는 오히려 바빌로니아에 계속적으로 대적한다)

 

BC587년, 유다는 다시 3차 포로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때 예루살렘은 파괴된다.

 

이시기 네부카드네자르는 내정을 튼튼히 다지는 일도 착수하여 바벨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공중정원, 마르두크 신전등의 수복등 세계 제일의 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바빌로니아의 몰락

 

네부카드네자르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멜 마르두크가 즉위한다. 그 이후 계속적인 사회의 불안정화가 이어주고 이 때 새로이 강성해 지는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정리하며.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신바빌로니아는 갑자기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부상하였고, 이집트를 치고 잠시 중원을 평정하였지만, 그리고 이 결과 유다의 심판자 역할을 하였지만,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페르시아에 의해 패망하고 만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도 신바빌로니아는 오래 버티지 못할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신바빌로니아는 외래 문화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의 정당성의 기초가 구바빌로니아에만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타민족, 타국을 점령한 이후 그들의 문화는 모두 배격하고 오직 바빌론적 요소만 갖추려고 했다. 함무라비 법전, 바벨탑 건축 등 구바빌론의 문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민족이라고 하는 자만심 가득했던 신바빌로니아는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느부갓네살)의 죽음과 함께 매우 빨리 패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토록 세밀하시고 온전하시다!

<그림4. 하박국서의 구조>

 

 

 

하박국서 - 하나님께 악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다!

 

하박국서는 구약의 35번째 책이고, 소신지서에 속한다.

<그림1. 시대적 배경>

 

 

그림에서 알 수 있겠지만, 하박국서는 성경의 역사서로 본다면 열왕기서에 속하는 시대로, 분열왕국시대라고도 불리우고, 포로생활 이전시대라고도 불리울 수 있다. 그만큼 나라가 혼잡하고 질서가 없던 시대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림2. 구약성경 연대기>

 

더 정확히 구분한다고 하면, 하박국서가 쓰여진 시기는 이미 북이스라엘은 패망하였고 남 유다만 있던 시기였으므로 분열왕국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남왕국시대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시기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3. 선지자들이 활동한 시기와 장소>

<그림4. 분열왕국과 예언자들>

 

 

하박국서의 배경.

하박국서에 명시된 역사적 사건은 임박한 바벨로니아 (바벨론)의 침략에 관한 것이었다 (1:6, 2:1, 3:16). 이 사건을 기준으로 보면 1:2-4에 기록된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은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아 왕이 전사한 것 (BC 609), 여호야김 왕의 악한 통치기라고 볼 수 있다.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요시아 왕은 하나님앞에 정직한 왕이었다. 그러므로 의인이었던 요시아의 죽음은 하박국의 불평, 의문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박국서의 구조.

<그림5. 하박국서의 구조>

크게는 두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박국의 불평 (물음)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첫 부분으로 (1-2장), 그리고 하박국의 찬양 (3장)이 두번째 부분이다.

 

이스라엘의 불의와 처벌에 대한 필요성을 하박국은 깨달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 (바빌로니아)를 통해 치신다고 대답을 하신다. 이에 대해 더 큰 혼란에 빠진 하박국 선지자. 어떻게 하나님은 악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실 수 있으실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다시 대답하신다. 누구나 결국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기본적인 도덕적 성품을 재확인 하신다. 하나님은 또 하박국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는 환상을 주신다.

 

이런 하나님의 대답과 환상을 통해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재정립했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하박국은 또 하나님의 선한 목적들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요, 열방의 통치자로서 보좌에 앉아계심을 재확인한다.

 

 

믿음으로 살리라.

<그림6. 하박국서의 주제>

바빌로니아의 거만한 태도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의인의 겸손한 태도가 그저 우연히 비교되는 것 처럼 보이는 하박국서는 복음의 근본적인 원리를 말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그리고 히브리서 10:38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하박국이 직면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통해 얻은 깨달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blog.naver.com/oog91

 


하박국(Habakkuk)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신앙의 문제 -

신앙의 문제 -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참조.합1:1-6,2:1-4,3:1,2:16-19)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참조.합1:1-6,2:1-4,3:1,2:16-19)

 

 

이 글이 뛰어난 문장이라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이 글에는 뛰어난 운율과 생생한 묘사가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묘사된 상황과 저자의 체험간의 놀라운 대조이다. 묘사된 상황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 보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다. 밭은 황폐해 식물이 없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 이상이 배경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서,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찬미자의 노래가 시작된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모든 상황은 가장 불행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고, 이시는 가장 웅울한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자는 행복하고 기쁨에 넘쳐 있다. 그러므로 슬픔의 노래는 찬송의 서곡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우리는 이와같이 자문하게 된다. 이 사람은 광신자인가? 그는 속았는가? 아니면, 그는 이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곧 이것이 지고한 지혜의 노래라는 사실과 찬미자는 삶의 참된 비밀을 소유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단번에 확신케 된다. 먼저 찬송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두번째로 그가 확신을 가진 이유를 조사해 본 후, 마지막으로 그가 누린 기쁨을 알아보자.

 

인간의 체험적 측면에 관한 이 하박국의 예언의 전체적 가치는 이 찬송이 있기 까지의 과정이 밝혀져 있다는 데에 있다. 즉 하박국은 이 승리의 기록으로 본서를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나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뱅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1:2-4).

그는 이렇게 시작하였으나,놀라운 기쁨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서는 그것이 하박국이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나 설교문이 아니라는 데 특징이 있다. 이는 엄밀히 말해 이야기이다. 이 점은 요나서와 마찬가지이다. 요나서 역시 요나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였다. 요나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였었다. 하박국서는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또 하나의 책이다.

 

절망이 나타나는 이 서두의 질문 후에, 저자가 찬송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 과정에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나타난다. 첫째는 그가 매우 솔직한 의심을 통해 확신의 찬송에 도달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성루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께 물음을 통해 찬송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성루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께 물음을 통해 찬송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가 솔직한 의심을 표현하고 기다리며 바라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가장 깊은 비밀을 드러내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처츰에 그는 의심에 싸여 있었으며, 이를 매우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굉장한 무질서 속에 살고 있었다. 앞에 기록된 문장들이 애를 매우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심적 태도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면,또 이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셨다. 즉 그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잔혹함이 만연되어 있었으며, 범죄가 관치고 정욕이 도처에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활동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물음의 요지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리이까"이다. 이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말에는 근저에 있는 믿음이 드러난다. 그러한 한편 거기에는 절박한 의심 또한 명백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이 끔찍한 상황 중에 아무것도 행치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심정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도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또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대해서도 이러한 난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박국이 이 질문을 바로 하나님께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는 이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하바국은 이 문제를 하나님께 물었다. 이와 같이 그는 솔직한 의심과, 피할 수 없는 심적 번민을 겪으며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다.

 

이 솔직한 하박국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하나님은, 비록 그의 종은 하나님의 활동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활동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하나님 자신은 무엇인가를 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박국에게 말한다 해도 하박국이 믿지 못할 일을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제일 처음 하신 대답은 매우 부드러운 말씀으로 여겨진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하박국이 살아 가면서 폭력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음과 임박한 침략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음에 대해,갈대안에 의한 이 위협적인 침략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의 통치 활동은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기 위해 그들의 외부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때, 하박국이 마음 속에 가졌던 생각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는 분명히 나의 지각을 뛰어 넘는 일이다.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갈대안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활동의 정규적인 범위를 벗어나 교만하고 잔혹한 자들을 사용하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바국이 파수하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하였을 때는 그의 삶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었다. "내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기다려서 알아 보리라." 이것이 본서의 전개 과정 중 두번째 단계였다. 그는 접근하는 적을 보았다. 그는 적들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접근하리라는 것을 들었었다. 하나님이.우리가 언제나 그 완전한 의미를 제대로 인용치 못하는 중요한 말씀을 통해 하박국에게 삶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은 바로 그가 망루에서 기다리던 때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여기에는 대조적인 면이 나타난다. 이것을 조심스럽게 해석해 보자. 이 말은 "갈대안인에 대한 너의 생각이 옳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 그 민족은 교만하다. 그것은 하나의 생활 양식이며 태도이다. 이와 대조되는 태도는 "의인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다. "의"는 분명히 옳은 번역이긴 하지만 그 의는 반드시 믿음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의인이 사는 것은 바로 믿음에 의히셔라는 선언이다.

여기에는 교만과 부정직함의 결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멸망하리라는 것이다. 반면에 의인은 산다. 이처럼 이 말씀을 통해 하박국은, 종국에는 반드시 멸망할 생활양식과 반드시 영속할 생활 양식 간의 대조를 정면으로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박국이 찬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일 직후였다. 그 찬미의 표제를 살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3:1)

써틀(Thirtle) 박사는 시가와 그 표제에 관한 뛰어난 저서에서 시기오놋이라는 말은 단순히 "커다란 외침"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성경에서 이러한 표제로 시작하는 시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시편 7편이다. 표제는 시와 노래의 특성을 표현키 의해 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미는 커다란 외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 외침의 성격을 언제나 주변 맥락을 통해 이해하여야 한다. 시편 7편의 외침은 번민하는 인간의 외침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외침은 기쁨에 넘친 인간의 외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박국이 그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에 주의하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의문에 대해 솔직했었다. 그래서 그는 성루에서 기다렸었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고, 그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는 삶의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의 슬픔을 즐거운 송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에 대한 확신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은 모든 역사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이 경우에서, 즉 하박국이 속한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볼 때 그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때,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최초의 기적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당연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박국이 새롭게 깨달았던 사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혼돈이 질서를 찾게 되었다. 오늘날 또한 황무하고 메마른 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님에 대해 깨닫게 되면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35:1).

하박국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근원으로부터 양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사막에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즉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물을 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백성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이 적은 것을 늘리실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광야의 경험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한 여인의 체험이었다. 통의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남아 있던 기름이 부족함이 없이 불어났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양식 없이도 생명을 보존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모세는 산에서 40일을 금식했고,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40일을 금식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양과 소도 죽어 버렷다면, 남아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이것보다 더 심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어떠한 새로운 것도 창조치 않으시고, 감추어진 근원으로부터 아무것도 공급치 않으시며, 적은 것을 불리시지도 않고, 음식 없이 지낼 수 있게 하시지도 않아, 우리가 쇠약해져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그래도 우리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니 결코 자신을 거두어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는 완전한 충만함과 큰 만족이 넘치는 기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박국의 송가는 욥의 위대한 외침과 조화를 이룬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5).

마지막으로 하박국이 누린 기쁨을 살펴보자. 히브리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여호와 앞에서 기쁨으로 뛰어 놀리라. 내가 빙벙 돌리라." 그는 너무 기뻐서 들뜬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춤추며 주위를 맴돌며 외치고 있다. 그의 기쁨이 넘쳐 흐른다. 따라서 그는 오직 그러한 말로써밖에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체험을 누리게 됨이 바로 "여호와"로 인한 것, 또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에 주목하자. 이는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승리의 결과이었다.

이처럼 기쁨에 이르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의심을 표명하게끔 북돋아 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의심을 바로잡음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이 이야기의 가치는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가살고 있는 날은 바로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날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벧후1:19).이 위대한 예언의 말씀에 있는 모든 것의 확증은 그리스도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리라"(빌4:4) 라고 썼던 이유이다.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는 또 말한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는 이 세상이 창조될 때,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다. 그는 감추어진 근원으로부터 주실 수 있었으며,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처럼 적은 것을 많게 불리실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여호와로 인해 기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주변 환경은 가혹할 뿐이다. 우리는 횡포와 잔학, 그리고 압제와 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요히 하나님께 귀 기울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박국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을 들려 주신다. 비록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활동하신다. 때대로 언약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역사하시며 통치하시는 이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의 궁극적인 실현을 위해서 사용될 뿐이다.

 

가나한 자와 부정적인 자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오늘날도 사실이다. 또 믿음이 있는 자가 살아 남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기쁨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비례하ㅣ다. 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례한다. 찬송은 그러한 지식과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카우퍼(Cowper)에게서 우리 시대의 하박국의 송가를 들을 수 있다.

 

뭇 성도 찬미할 때 한 빛이 비치니 큰 은혜 베푸시는 주님의 역사라 우리가 낙심할 때 또 힘을 주시니 비바람 그친 후에 햇빛이 비친다. 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못맺고 논밭이 메마르고 양떼가 없어도 주 함께 계시오니 언제나 기쁘고 주 안에 사는 동안 늘 찬송하리라.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