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산책

히스기야와 산헤립

은총가득 2020. 12. 8. 18:14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

히스기야 당시의 예루살렘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서쪽 구역을 증축했으며, 예루살렘 성 안쪽으로 실로암 못 까지 수로를 뚫었다.

히스기야 터널과 기혼샘에서 실로암 까지의 고도

기존 여부스족속의 수로와 히스기야가 새로 뚫은 터널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 터널의 수직 단면도



실제 사람 한명이 허리를 숙이고 겨우 지나갈 정도의 높이와 넓이이다.

실로암 비문



히스기야 당시의 예루살렘


 

히스기야는 사르곤이 죽자 앗수르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다.
그 뒤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다.(사30:1-7, 31:1-3)
701년. 앗수르 산헤립이 서부 원정을 감행한다.

두로 함락. 반란의 선봉이었던 두로왕 롤리는 키프로스 섬으로 도망한다.

 

당시 두로의 모습

 

 

나머지 반란국들은 대부분 항복한다. 이집트의 다르하카 격퇴.

46개의 유다 성읍 초토화. 유다의 히스기야 항복.(왕하18-20; 대하29-30; 사20, 36-39)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권면을 받게 되고, 산헤립은 뒤이어 퇴각하게 된다.(왕하19:1-37)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보면 들쥐로인한 페스트가 돌았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앗수르 부조 (대영박물관)

남유다에 대한 정벌, 특히 라기스 정복에 대한 기록이다.

앗수르는 포로들에 대해 잔인하게 학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헤립 비문 (대영박물관)

산헤립의 전쟁 승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산헤립은 니느웨에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왕하19:37-38)
엣살핫돈이 왕위를 이음.

 

니느웨 왕궁 정원에서의 산헤립

 

참고 - 연표   blog.naver.com/sni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