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9-12장 주석
전도서 9장
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이 모든 일.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들이 번영하는 문제.
궁구하며. 솔로몬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음을 써서 노력하였다.
의인. 사람의 행위가 그의 사람 됨을 알려준다. 그의 열매로 그를 알게 될 것이다(마 7:15~20).
하나님의 손. 그분의 뜻이 최상이다. 손은 그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한다(신 33:3; 사 62:3).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삶의 다양한 경험들의 배후에 어떤 목적이 숨어 있는지 알기란 어렵다. 이러한 경험들의 대부분은 어떤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작용을 보여 준다(참조 갈 6:7). 때때로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볼 때 최상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태를 번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경험은 품성계발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 “all that is before them”[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다 측량할 수 없고,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본질이나 미래에 놓여 있는 바를 꿰뚫어 볼 수 없다. 고대의 여러 역본은 2절의 첫 번째 히브리어 학콜(hakkol)을 1절의 마지막 단어와 같이 문자적으로 “모두”(the all)로 번역하고 그것을 헤벨(hebel), “헛되다”로 해석한다. 이것은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본문에서 단지 매우 유사한 글자 하나, 즉 b (ㅂ)자를 k (ㅋ)자로 바꾸어 놓은 것을 나타내는데(참조 19쪽), 어느 쪽이나 쉽게 서로 엇바뀌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번역들은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개정표준역」)로 해석한다. 참조 2절 주석.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것. 대체로 동일한 기본적인 경험들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온다. 자연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마 5:45). 비와 햇볕, 폭풍과 순풍이 선인이나 악인에게 한결같이 이르러 온다(참조 욥 9:22).
일반이라. 같은 단어가 룻 2:3; 삼상 6:9에는 “우연히”로, 삼상 20:26에서는 “무슨 사고가 있어서”로 번역되었다.
의인.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
선하고…한 자. 「타르굼」을 제외한 고대의 모든 역본은 “악한 자”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데, 이는 평행구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깨끗한 자. 의식적으로 정결한 자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제사를 드리는 자. 신앙생활의 외적이고 의식적인 요구에 매우 세심하게 순응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선인.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맹세하는 자. 참조 레 19:12 주석; 신 6:13; 시 63:11; 사 65:16. 법적인 맹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의무를 이행할 마음이 없는 자이므로 그의 양심이 그로 하여금 “맹세하기를” 두려워하게 한다(참조 민 5:19~22). 그리스도의 가르침(마 5:33~37)과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약 5:12)을 비교하라.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악한 것이니. 솔로몬은 아직도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악이 가득하여. 모든 죄에는 이성과 건전한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새 세상에서 누릴 영원한 삶보다 이생의 향락을 더 좋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문자적으로 “그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참조 욥 30:23; 사 14:9; 38:18; 겔 32:18).
4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소망. “소망”으로 번역된 이 강세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왕하 18:19; 사 36:4에서는 “의뢰”로 번역되었다. 이 말의 동사 어근은 “의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참조 시 25:2; 26:1; 28:7).
산 개. 성경에서 개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천시(賤視)당하는 동물로 묘사되고(출 22:31; 삼상 17:43; 잠 26:11; 벧후 2:22), 오늘날에도 동방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개는 사악한 악인을 상징한다(시 22:16; 59:2, 6, 14; 사 56:10, 11; 계 22:14, 15).
죽은 사자. 사자는 위엄과 힘의 상징으로 설명되기 때문에(잠 30:30), 하나님과 그리 스도의 상징으로 제시된다(계 5:5; 참조 호 13:4~7).
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산 자는…알되. 그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수도 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참조 시 88:10~12; 115:17.
상. 이 말은 악인들이 당할 사망이든지(계 20:11~15) 의인들이 받을 불멸이든지(참조 계 21:1~4; 마 16:27; 고전 15:51~54) 간에 어떤 영원한 상벌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이생에서 수고의 결실을 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름. (“the memory of them”[그들에 대한 기억]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들에 관한 기억을 가리키지, 죽은 자들의 정신적인 기억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기억”, “회상”을 뜻하는 제케르(zeker)라는 단어의 의미와 구약의 용례에서 분명해진다. 예외 없이 그것은 사람들이나 어떤 사건들에 관한 “기억”에 쓰는 말이지 기억의 기능에 관한 언급은 아니다(욥 18:17; 시 31:12; 112:6).
잊어버린 바. “잃어버린 바.”
6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그 사랑함. 사랑과 증오와 시기는 대개 살아있는 동안에 강력하고 지배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죽으면 그것들은 기능을 상실한다.
없어진 지. 히브리어에는 이 동사가 단수 동사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감정들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분복. 사람이 살았을 때는 맡은 역할이 있고, 그가 한 수고의 보상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죽으면 그의 모든 역할은 끝난다. 욥(욥 14:10~14)은 시편의 시인(시 30:9)과 선지자 이사야(사 38:10)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진리를 피력(披瀝)한다.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너는 가서. 솔로몬은 삶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권고한다. 즉 인생의 허무와 공평치 못한 것같이 보이는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빈둥거리며 앉아 있지 말라는 권고이다.
네 식물을 먹고. 여기서 빵과 포도주는 생활의 모든 필수품과 사치품들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참조 창 14:18; 신 33:28).
너의 하는 일. 하나님은 이생의 복들을 풍성히 주고 사람들이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축복들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 데 사용했느냐 아니면 그들의 동료 인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데 썼느냐에 기초하여(마 25:31~46) 의인과 악인들을 구별할 날이 온다(말 3:18).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의복. 흰옷은 명절 때에 입었고,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천사들은 흰옷을 입고 나타났으며(막 16:5; 요 20:12), 요한은 영생을 얻은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계 6:11; 7:9; 19:8), 그것은 그들의 순결한 품성과 기쁨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향기름. 문자적으로 “기름.” 몸을 식히기 위해서 또한 향수로서(참조 시 23:5; 암 6:6)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동방의 풍습이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는 것은 금식이나 애도의 표로 생각되었다(삼하 14:2; 마 6:17). 기름은 또한 하나님의 가장 풍성한 축복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었다(시 92:10; 104:15; 참조 사 61:3).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즐겁게 살지어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네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관조(觀照)하라”로 해석된다. 결혼은 최상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 제정되었고, 가정은 작은 천국이 되어야 했다(참조 잠 5:18, 19; 18:22).
분복. 한 남자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꼭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사람은 삶이 부여하는 특권과 책임들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당하는 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사후에는 이생에서 놓쳐버린 기회들을 만회할 호기(好機)가 다시 없을 것을 깨닫고 삶이 부여한 임무를 다하는 데 정성을 쏟을 것이다(요 9:4; 참조 갈 6:10).
네가…들어갈. 죽음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기 때문이다(고전 15:22; 참조 전 3:19~21 주석).
음부. 히브리어 셔올(s∨e’ol). 이것은 죽은 자들의 상징적인 영역을 가리킨다(참조 삼하 12:23; 잠 15:11). 전도서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셔올을 언급한다. 솔로몬은 셔올에서의 무의식 상태를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참조 전 3:19~21 주석).
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빠른 경주자. 하나님은 사람과는 달리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힘의 자질에 의존하지 않는다(삼상 14:6; 17:47).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부당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같이 보이는 이러한 외적(外的)인 자질이 아니다.
시기와 우연.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당한 시기, 즉 정확한 순간이 있다. 적절한 그때를 놓쳐버리면 그가 그 임무에 쏟아 붓는 때늦은 열심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일의 일부 혹은 전부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사람. 문자적으로 “그 사람.” 사람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정관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자기의 시기. 이것은 어떤 불행한 일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죽음에 관한 말일 것이다.
올무. 갑작스런 재앙을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시 91:3; 124:7; 잠 1:17; 6:5; 호 7:12).
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크게 여긴 것. 문자적으로 “훌륭하게 여긴 것.” 말하자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 이 장소의 크기는 보잘것이 없었기 때문에 몇 명 되지 않는 그 성의 방어자들은 간단하게 공격자들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랬다.
큰 임금. 주석자들은 솔로몬이 말한 성읍이 실제로 있었다면 어떤 특별한 성읍이었을까 하고 오랫동안 추측해 왔다. 하지만 전도자의 마음속에 어떤 성읍이 있었는지 또 “그 큰 임금”이 누구인지를 결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이것은 베일에 가려진 어떤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가난한 지혜자. 문자적으로 “가난하나 지혜로운 남자.”
있어서. 문자적으로 “그가 찾아내어서.” “그”는 아마도 그 성읍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건진 것이라. 참조 삼하 20:13~22. 거기서는 한 성읍이 어떤 지혜로운 여인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위기가 지나가자 그 구원자는 무시당하고 잊혀졌다. 요셉의 경험(창 40:23)을 참조하라. 대중의 갈채는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다. 이 가난한 지혜자는 세상에서 잊혀졌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지혜가 힘보다 낫다. 참조 7:19. “힘”으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전사(戰士)의 힘에 대하여 사용된다(참조 렘 9:23, 여기서 이 말은 “용맹”으로 번역되었다).
멸시를 받고. 이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완전히 무시되어 일축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의 봉사가 끝나자 그 사람 자신은 멸시를 받고 한쪽으로 밀려나갔다.
그 말. 그의 판단의 정확성은 증명되었지만 그의 추가적인 권고의 말은 환영받지 못하고 수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17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종용히. 참조 사 30:15.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 격동의 시기에는 선동 정치가들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국가의 큰 손실로 이어진다.
18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병기. 오늘날의 세계는 원자탄과 수소폭탄을 비축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패괴케. 한 개인이 국가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 줄 수도 있다(수 7:1~4).
전도서 10장
1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죽은 파리. 문자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파리들”, 곧 죽음 직전에 있는 파리들. 동방나라들은 파리떼와 다른 해충들 때문에 특별히 고통을 당한다. 만약 많은 파리가 죽어 향기름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썩으면 향기름은 못 쓰게 될 것이다.
향기름. (“the ointment of apothecary”[약제사의 기름]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향수 제조자”가 더 나을 것이며, 문자적으로 “혼합자” 혹은 “조제자”이다.
악취가 나게 하는 것. 문자적으로 “악취를 풍기게 하다”, “발효시키다”, “부글부글 끓게 하다.”
적은 우매. 이 절의 마지막 부분은 문자적으로 “지혜와 존귀보다 더 비중이 큰 것은 적은 우매이다”이다. 단 한 번의 어리석은 행동이 좋은 평판을 망쳐 놓을 수 있다. 조심스럽게 살아온 일생이 그러한 결과로 파멸로 끝날 수도 있다.
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 오른쪽은 은혜와 존귀와 성공의 편으로 간주되었다(참조 창 35:18; 눅 1:11 주석; 시 16:8, 11; 110:5; 마 25:31~34).
왼편에. 왼편은 죄악과 불운의 편으로 여겨졌다. 오늘날도 동양의 어떤 나라에서는 왼편 은 불결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있는 이 비유는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계획은 연약하고, 실천이 불가능하고, 일관(一貫)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불운과 실망의 원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3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길에 행할 때에도. 이 말은 다른 사람과 섞여 자기 사업차 돌아다니는 때를 말한다.
지혜가 결핍하여. 그는 보통의 지성과 상식의 부족을 드러낸다.
각 사람에게…말하느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 반영되는 판단력의 부족은 그가 어리석은 사람임을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는 다른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4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주권자. ( “the spirit of ruler”[통치자의 영]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루아흐(ruah.), “호흡”(참조 민 5:14 주석). 여기서는 이것이 사람의 성질 혹은 마음의 기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삿 8:3에서는 루아흐가 “노(怒)”로 번역되었다.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그대가 맡은 직책을 사임하지 말라. 보복의 정신으로 취한 성급한 행동은 정서의 불안과 건전한 판단력의 결핍을 나타낸다. 나아가서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역풍을 맞게 된다. 윗사람의 일시적인 노여움을 참는 것이 더 낫다.
공순(恭順)이…을 경하게 하느니라. “유순함이…을 무효케 하느니라”가 더 좋은 번역일 것이다. 말하자면, “유순함”이 미리 선수를 써서 주권자가 더 큰 노를 발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5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한 가지 폐단. 우매하고 전제적인 군주, 즉 포악한 행정자는 그릇된 판단을 하기 쉽다. 그가 가진 권세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잘못된 판단의 불행스러운 결과의 파장은 그만큼 더 광범해진다. 어떤 한 왕이 무절조(無節操)한 신하들 곧 아첨하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총신(寵臣)들을 자신의 주변에 둘러놓았을 때 그의 판단과 행동의 폐해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6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높은 지위. 때때로 세상일에서 우매자 중의 우매자가 지혜로운 자로 높임을 받음으로써 나라에 재앙을 불러들인 경우가 있다.
낮은 지위. 출신과 사회적 신분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어 충성스러운 동기로 나라를 섬길 준비가 된 자들이 무시당하고 버림을 받는다.
7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종들은 말을 타고. 솔로몬 당시에는 특권층의 사람들만이 말이나 노새를 탔고(삼하 18:9; 왕상 1:38; 대하 25:28; 에 6:8; 렘 17:25),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짐승을 타야 할 경우에는 나귀를 이용했다. 초기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왕이나 왕자들일지라도 나귀나 노새를 탔다(삿 5:10; 10:4; 참조 왕상 1:33).
방백들은…걸어 다니는도다. 이 말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8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함정을 파는 자. 참조 시 7:15; 57:6; 잠 26:27. 이 말은 정부에 대해서 역모를 꾸미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같은 동료를 해치려고 악을 도모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담. 곧 “벽”(참조 민 22:24; 스 9:9; 사 5:5; 겔 42:7; 호 2:6; 미 7:11).
뱀. 회반죽을 넣지 않고 거칠게 쌓은 동방나라들의 담 속의 갈라진 틈새는 뱀이나 전갈 같은 생물들이 숨을 만한 멋진 장소가 되었다(참조 암 5:19).
9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요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떠내는. 여기에 사용된 형태의 히브리어 동사는 “채석하다” 혹은 “쪼아서 만들다”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채석장의 암벽에서 쪼아 뜬돌을 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일을 하는 데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왕상 5:17에 있는 “돌을 떠다가”라는 말도 같은 동사에서 온 말이다. 신 19:14을 근거로 어떤 주석자들은 이 표현이 지계석을 옮기는 것에 관한 언급이라고 한다.
나무를 쪼개는. 참조 신 19:5. 여기에 돌을 떠내는 사람에 관하여 앞에 한 말의 평행구가 있다. 아마도 솔로몬은 화목을 베는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실상 그 일은 그렇게 큰 위험이 없고, 그냥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10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철 연장. 도끼의 머리(참조 왕하 6:5).
날을 갈지. 문자적으로 도끼날을 갈 때에 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다.”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렘 4:24에서 “진동하다”로 나타난다.
지혜는…유익하니라.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를 잘하면, 좀 더 적은 노력으로 그 일을 이루어내기 때문에 결국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능숙한 준비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스도인은 품성 건설의 과업을 위하여 영적 장인(匠人)이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들을 구해 사용해야 한다.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열심과 아울러 지식도 있어야 한다(참조 롬 10:2).
11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방술(方術)을 베풀기 전에. 곧 “뱀이 마법에 걸리기 전에”(「개정표준역」). 이 의미는 만약 뱀을 길들여 부리는 사람이 뱀에게 마법을 걸기 전에 뱀이 그를 물어버린다면 그가 술객으로서 가졌을지도 모르는 재능의 그 어떤 것도 소용없게 된다는 뜻이다.
술객은 무용하니라. 문자적으로 “혀의 소유주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기에 “술객”이라고 번역된 “혀의 소유주”라는 구절은 분명히 뱀을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뱀을 부리는 일은 분명히 쉬쉬 소리를 내는 속삭임으로 이루어졌다.
12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은혜로우나. 듣는 자들이 받아들일 만하다는 뜻이다(참조 시 45:2; 잠 22:11; 눅 4:22). 명랑한 말들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자기를 삼키나니.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타락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수치를 자초하게 된다는 뜻이다(참조 잠 10:8, 21; 18:7; 29:9).
13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우매. 우매자는 입을 열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쏟아 놓을 뿐이다(참조 잠 15:2; 17:12; 사 32:6).
끝. 우매자가 말을 그칠 때는 허튼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말을 많이 하거니와. 문자적으로 “[말을] 늘이거니와.” 그는 자신이 말하는 주제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으면서도 이것저것 그리고 온갖 것에 대하여 지껄인다(참조 딤전 1:7).
사람. 우매자의 말을 듣는 사람을 말한다. 우매자의 말은 그 말의 뜻은 물론이요 그가 말하는 내용까지도 이해하기 곤란할 때가 흔히 있다. 십중팔구는 사람이 우매할수록 가장 신비한 것에 관해서는 더욱 독단적인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문자적으로 “그를 곤하게 한다”, 즉 우매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곤하게 한다.
알지 못함이니라. 우매자는 너무나 숙맥이어서 시내에 심부름을 갔다오라고 하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자신이 심부름 가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길마저 잃어버린다(참조 잠 10:26; 28:6; 전 4:5). 바보가 아니면 길 잃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시내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을 것이다(사 35:8).
16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왕은 어리고. 문자적으로 “왕은 젊고.” 이 말은 젊음, 즉 흔히 생각과 건전한 상식의 부족으로 특징지어지는 나이를 강조한다(참조 사 3:4).
아침에 연락하는. 이 “위정자들”은 국정을 보살피는 일에 바쳐야 할 시간을 환락과 술잔치로 허송한다(참조 사 5:11; 렘 21:12).
17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귀족.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인격과 선한 행실로 양육된 사람들을 말할 것이다. 이 단어는 자유인 또는 귀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취하려 함. 방종은 도덕적·육체적 저하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모본으로서 행동의 높은 표준을 세워야 한다.
기력을 보하려고. 식욕의 방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신의 필요에 따라 혹은 주로 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마땅한 때에 먹는. 적당한 때, 즉 그날의 의무들을 감당해야 하는 때에.
18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게으른즉. 히브리어 단어의 이중형태는 게으름의 정도를 강조한다. 이 어근이 잠 6:6; 10:26; 20:4; 24:30; 26:13에서도 발견된다.
집이 새느니라. 문자적으로 “물이 새어 나오느니라.” 동방 가옥의 납작한 지붕은 계속적인 주의를 요한다. 지붕이 새는 일은 흔한 일이다(참조 잠 19:13; 27:15). 마찬가지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게으르면 국가적인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잔치. 문자적으로 “빵” 혹은 “음식.”
기쁘게 하는. 문자적으로 “생명을 기쁘게 하는”(참조 시 104:15).
돈. 돈은 그 소유주를 위하여 물질적인 것은 어떤 것이나 다 얻게 해 줄 것이다.
20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저주하지 말며. 생각과 표현에 주의하라는 권고이다. 다른 사람을 강렬한 어조로 성토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하며, 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를 그렇게 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참조 출 22:28).
새. 서로 형식만 조금씩 다를 뿐, 대부분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날짐승. 문자적으로 “날개를 가진 것들.”
전도서 11장
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네 식물. 전통적 해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이나 친절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서 어느 날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가능한 또 다른 해석은 여러 종류의 현명한 모험적 사업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물 위에. 문자적으로 “물의 표면에.”
던지라. 히브리어 샬라흐(s∨alah.), “보내다.”
찾으리라. 참조 눅 16:9. “빵”의 비유가 무엇에 관해서 언급하든지, 그 교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이다.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나눠 줄지어다. 아마도 사업 활동을 한 분야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그것을 다양화시키고 여러 개의 모험적인 사업에 자본을 투자하라는 권고일 것이다. 윤리적인 면에서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함께 사용된 두 숫자인 일곱과 여덟은 적은 쪽보다는 많은 쪽을 향하는 경향을 가진 하나의 부정수(不定數)를 암시한다. 그와 같은 열거의 예증에 관하여는 욥 33:14; 시 62:11; 잠 30:15, 18, 21; 사 17:6; 미 5:5을 참조하라.
재앙. 우리는 홍수와 지진과 전쟁과 사업의 불경기 같은 재난이 언제 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구름에. 이 구절은 “구름이 가득하면 땅에 비를 쏟을 것이다”로 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자연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영역에도 법칙이 있다.
나무가…쓰러지면. 폭풍이 부는 동안에는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을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폭풍에 대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런 연후에는 폭풍을 다스리고자 하기보다는 그것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절을 죽음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설명이라고 하는 기상천외한 해석은 타당한 근거가 없다.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일들은 우리의 영향력 밖에 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을 앞에 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낙담의 계기와 결단을 상실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살펴보는 자. 만약 어떤 사람이 기상 조건을 지나치게 따지고 일하러 나가기 전에 딱 맞는 조건을 요구한다면 그의 농사일은 방치될 것이다.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반드시 완전한 날 혹은 완전한 조건이 구비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는 모종의 위험들을 반드시 감수해야 한다.
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바람. ( “spirit”[영]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4절에서 “풍세”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뼈. 태아의 골격의 성장과 발달은 경이 그 자체이다(욥 10:8~11; 시 139:13~17).
하나님의 일. 참조 7:13 주석.
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침에. 히브리인들은 농사짓는 백성이었으므로 농사일에서 온 예증들은 대개 사업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손을 거두지 말라. 비록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해도 이것이 게으름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결과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이르거나 늦거나 간에 부지런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잘 될는지. 에 8:5에서 “선히”로 번역된 말과 같은 어근에서 왔다.
둘이 다. 불확실성은 무기력이 아니라, 가일층의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은 성공의 서곡이다.
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 천연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나, 능률적으로 일하는 것이나, 안전하게 여행을 하는 일은 빛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6절에 주어진 충고를 따름으로써 우리들은 인생에서 좀 더 충실하고 좀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즐거운 일.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날의 의무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다. 시 84:11과 말 4:2에서 해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을 나타내는 데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즐거워할지로다. 곧 “그로 즐거워하게 하라.” 인생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장수의 복을 받으면 그는 그 시간을 모두 유익하고 행복한 일에만 사용해야 한다.
캄캄한 날. 삶의 역경들은 훈육의 가치를 위해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위험과 손실로부터의 구원은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 어떤 주석자들은 시 88:12; 143:3을 인용하고 욥 10:21, 22를 참조하여 “캄캄한”이라는 표현을 무덤에 적용한다.
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청년. 9절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의 히브리어 얄두트(yaldut)는 젊음과 관계가 있고, 두 번째로 나오는 말의 히브리어 바후르(bah.ur)는 인생의 전성기에 대한 말이다. 첫 번째 것은 시 110:3에, 두 번째 것은 전 12:1에 각각 다시 나타난다.
즐거워하며. 삶에 대한 행복한 기질과 쾌활한 태도는 권장할 만한 것이다. 삶을 보람 있게 해 주는 기쁨들이 있다. 솔로몬의 권고는 지나친 쾌락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고, 삶의 축복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마음. 모든 정당한 욕망과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지만, 방탕과 방종은 마땅히 정죄해야 하고 피해야 한다.
심판. 정신을 일깨우는 사상이여! 사람이 그의 심판주를 만나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직면해야 할 심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거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말 3:5; 계 20:11~15).
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근심. 곧 “화나게 함”, “분노”(참조 신 32:19; 왕상 15:30; 21:22; 겔 20:28), “진노”, “성”(신 32:27; 시 85:4; 잠 12:16; 전 7:9), “원한”(시 10:14). 이 단어의 동사형은 일반적으로 “노를 격발시키다”로 번역했다.
악. 몸을 해치는 것, 즉 주로 육체적 타락을 가져오는 도덕적 부절제를 말한다(참조 고전 6:18, 19; 고후 7:1).
어릴 때. 9절의 서두에 “청년”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다.
청년의 때. 히브리어 샤하루트(s∨ah.arut), 여기서만 이런 어형(語型)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흑색”(참조 아 5:11)을 의미하는 말의 어근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샤하루트의 의미는 확실하지 않지만 앞에서 말한 말투로 보아 인생의 전성기, 곧 사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을 때를 말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샤하루트가 샤한(s∨ah.an), “새벽[이 되기 전에 있는 불그스레한 빛]”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샤하루트는 여기서 “[인생의] 새벽”을 의미할 것이다.
헛되니라. 젊음과 인생의 전성기 모두 신속히 지나간다.
전도서 제 12장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청년의 때. 참조 11:9 주석. 사람은 성년의 초기에 육체적으로 힘의 절정에 이른다. 생명의 활력을 하나님께 바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이때이다.
곤고한 날. 인생 절정기의 활기차고 희망찬 시절과는 대조적으로 쇠약해진 노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노령은 병약과 무기력을 가져오므로 불행과 괴로움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는 뜻에서 그 날들은 “곤고”하다.
아무 낙이 없다. “낙”으로 번역된 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가 문장의 말미에 놓였다. 풍요로운 젊음의 욕망과 의욕과 희망이 사라지면 삶의 열정이 거의 다 없어진다. 바르실래의 경험(삼하 19:34, 37)과 비교하라.
전에…기억하라. (“remember now”[지금 기억하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그리고 기억하라” 혹은 “또한 기억하라”인데, 이는 12장과 11장, 특히 11:9과의 연결을 위해서이다. “지금”(now)으로 번역된 단어는 보통 “그리고”로 번역된 말이며, 영어에서 “now”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어떤 시간관념을 내포한 것은 아니다.
창조자. 히브리어로는 창 1:1에 있는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분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주의 설계자와 창조자로 지적한다. 여기서 히브리어로는 창 1:1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이듯이 창조자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참조 창 1:1, 26, 27).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해. 1절의 곤고한 날, 곧 노령이 되어 가는 때를 예증하기 위하여 사라져 가는 하늘의 발광체들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다. 어떤 주석자들은 약해져 가는 시력에 적용시킨다. 유대인 주석자들은 세부적인 적용에서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우쳐 “해”는 이마, “빛”은 코, “달”은 영혼 그리고 “별”은 뺨을 나타낸다고 한다.
…전에. ( “while”[~할 동안]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2~6절에 기록된 지극히 상징적인 표현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많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주석자들은 다같이 이 일련의 장면들을 육체의 힘이 거의 다 소진된 인생의 황혼기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하나의 비유들을 신체의 해부학적 부위들에 관한 언급으로 설명해 왔다. 훌륭한 문장력을 가진 솔로몬이 1, 5, 7절에서 명확히 밝힌 것처럼, 여기서 노령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체적인 면에서 이 비유의 의미는 노령이 되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본분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너의 삶을 바치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물론 책 전체의 주제이다.
다행히 솔로몬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어리석은 것을 찾는 데 바쳤던 긴 인생의 끝, 즉 그가 이 책 전편에 걸쳐 그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모든 것의 끝 무렵에 그의 창조자를 “기억”했다. 허송세월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솔로몬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에 그가 행복을 찾아 헛되이 헤매던 때에 맛본 실망을 피하라고 기꺼이 권고한다. 그러나 성경이 여기에 사용된 상징들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 상징들 하나하나를 해석할 때에는 주의하는 것이 좋다. 그 어떤 해석도 단지 그 해석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며, 2~6절에 관한 아래의 주석에서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제안에 불과한 것이다.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여기서 유대인 주석자들은 이 구절이, 환난의 때에 많이 울 어서 약해진 시력을 의미한다는 의견을 주장한다. 이 비유는 타고난 신체적 기능이 둔해진 노인들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말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집을 지키는 자들. 이 비유는 아마도 신체가 쇠약해지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광범한 의미로 사용한 것일 것이다. 어떤 유대인 주석자들은 이 표현을 옆구리와 갈비뼈에 적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손과 팔에 적용한다.
힘 있는 자들. 문자적으로 “힘의 사람들” 혹은 “능력의 사람들.” 보통은 다리와 대퇴부에 적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과 발 혹은 척추를 생각한다.
구부러질 것이며. “허리가 구부러질 것이며”가 더 좋을 것이다(참조 1:15; 7:13, 여기에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된다).
맷돌질하는 자들이…그칠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라는 단어가 여성이므로 집안에서 맷돌질하는 여자들을 언급한 말이다(참조 출 11:5; 마 24:41). 어떤 주석자들은 이것을 치아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참조 렘 25:10).
적으므로. 소수의 “맷돌질하는 자들”, 즉 아마도 썩은 치아 몇 개만 남은 그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생명 유지에 필요한 “밀가루”를 마련할 수 없다.
내어다보는 자. 이 단어의 여성형은 동방의 가정의 여자들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좀처럼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흔히 집안의 격자창(格子窓)을 통해서 살며시 밖을 내다보곤 하였다(참조 창 18:10 주석; 삿 5:28; 삼하 6:16).
어두워질 것이며. 침침한 눈으로 격자창 밖을 내다보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문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쌍수(雙數)형태 이므로 문 하나에 문짝 둘이 달린 것을 말한다. 유대인 주석자들은 이 비유를 이를테면 몸에 나 있는 털구멍들 혹은 입의 두 입술에 관한 언급으로 본다.
새의 소리. 이른 새벽에 새 소리를 듣고 잠이 깨는 노인들처럼, 고령의 잠 없는 상태에 관한 비유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음악하는 여자들. 말하고 노래하는 기관, 즉 성대. 아마도 목이 쉬고 약해진 노인들의 목소리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두려워할 것이며. 노인은 흔히 매 발걸음을 매우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그들은 또 큰 길을 두려워한다. 노인들의 뼈는 푸석푸석하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조그마한 사고에도 쉽게 부서지고 치료가 잘 안 되거나 전혀 안 되는 수도 있다. 또 숨이 차고 몸이 뻣뻣하기 때문에 어디든 오르막에서는 힘이 많이 든다.
꽃이 필 것이며. 즉 “꽃을 피울 것이며.” 살구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일찍 꽃이 피는 나무이다. 여기 이 비유는 노인의 백발 혹은 대머리에 적용시켜 왔다. 살구나무의 풍성한 흰 꽃들은 솔로몬의 마음에 노인의 백발을 떠올리게 하였을 것이다.
메뚜기. 아마도 작은 것이나 하잘것없는 것의 상징일 것이다(참조 민 13:33; 사 40:22). 나이 많은 이들은 매우 사소한 것들도 종종 큰 짐으로 생각한다.
원욕이 그치리니. 문자적으로 “서양 풍조목 딸기가 아무 효험이 없게 될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서양 풍조목 딸기에 최음제(催淫劑)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참조 창 30:14 주석). 여기서 번역자들은 “원욕”을 “성욕”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한다.
사람이…돌아가고. 참조 욥 10:21; 눅 16:9.
조문자들. 참조 삼하 3:31; 렘 22:10, 18.
6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은줄. 이 “줄”은 굵고 튼튼한 줄, 즉 밧줄이다(삼하 17:13; 왕상 20:32에서 번역한 것과 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참조하라). 은은 아마도 사람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보물인 생명 그 자체를 말할 것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아 “은줄”과 “금그릇”을 척추와 두뇌에 적용하는 해석들과, 이 글을 쓸 당시에 솔로몬이 아마도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한 성경적 기초를 갖지 못한 것이다(참조 전 12:2 주석).
풀리고. 곧 “딱 하고 소리내며 동강이 나고.” 여기에 나온 묘사는 한 가닥 은줄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커다란 등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줄이 끊어지면 등은 마루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6절의 첫 부분은 문자적으로 “은줄이 딱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까지”라고 해석된다.
항아리. 여러 세기 동안 동방의 여인들은 질그릇 항아리를 가지고 마을 우물로 물을 길으러 다녔다(참조 창 24:14, 15; 요 4:7, 28 등). 여기에 제시된 묘사는 깨져 조각이 난 질그릇 물동이에 관한 것이다(참조 레 6:28; 15:12). 동방의 마을 우물에는 대개 나무로 된 바퀴나 갈고리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밧줄과 물항아리를 갖고 와서 사용하였다. 계속적인 사용과 기후적인 조건들은 마침내 그 바퀴를 닳아 부서지게 한다. 여기에 나오는 샘 혹은 우물은 분명 생명을 상징한다(참조 시 36:9; 요 4:10; 7:37). 6절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은 모두 죽음을 나타낸다.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흙. 사람의 육신적인 부분을 가리킨다(참조 창 2:7).
여전히. 사람의 육신적인 부분은 썩어서 그것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죽을 때 사람은 “티끌 가운데 잠자는 것”이라 한다(욥 7:21; 참조 17:16; 20:11; 21:26). 지금 땅의 티끌 가운데 “잠자는” 자들은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참조 단 12:2; 요 11:11~13, 23~26; 살전 4:13~17).
신. 히브리어 루아흐(ruah.), “호흡”, “바람”, “영”(참조 민 5:14 주석). 루아흐는 겔 37:5에서와 같이 33회는 우리 몸의 “호흡”으로, 117회는 창 8:1에서와 같이 “바람”으로, 76회는 생명력이라는 뜻에서 “정신”(삿 15:19; 수 2:11), “성질” 혹은 “노”(삿 8:3)로, 그리고 “마음”(사 54:6)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되었다. 루아흐는 또 25회는 시 146:4에서와 같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생명의 소인(素因)을 묘사하기 위하여, 3회는 삼상 1:15에서와 같이 감정의 자리, 9회는 겔 11:5에서와 같이 “마음”(mind), 3회는 의지 혹은 의지의 작용, 즉 “마음”(heart, 대하 29:31), 16회는 겔 11:19에서와 같이 도덕적인 품성 그리고 94회는 사 63:10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루아흐는 구약 전반에 걸쳐 기록된 379회의 용례 중 사람에 관한 한 단 한 번도 육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지적인 존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은 성경 자체의 교훈에 관한 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참조 창 2:7; 35:18; 민 5:14; 전 3:19~21; 민 5:2; 9:6 주석). 여기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신 생명의 소인(素因)일 따름이다(루아흐가 “호흡”으로 번역된 전 3:19~21 주석을 참조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도다. 참조 1:2 주석.
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 참조 1:1 주석.
지식. 히브리어의 어순은 “지식”에 강세(强勢)를 둔다. 솔로몬의 기록을 읽을 “백성”은 교육을 받은 계층들이었다.
지었으며. 즉 “정리하였으며”(참조 왕상 4:32).
10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아름다운 말. ( “acceptable word”[받아들일 수 있는 말]로 되어 있음-역자 주). 곧 “즐거운 말”(「개역표준역」). 문자적으로 “기쁨의 말들.” 저자는 자기의 논설에 문학적 세련미를 더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가 글을 쓰는 특정한 대상 곧 이 세상 사물에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권할 작정이었다.
정직하여. 하지만 문학적 형식을 갖추려 했던 그의 노력 때문에 진리가 손상되는 일은 없었다.
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채찍. 이것은 통상 찌르고 행동을 자극하고 결과를 내게 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찔림을 당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지 몰라도, 그것이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었을 결과를 낳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참조 히 12:11.
회중의 스승. 문자적으로 “수집물들의 주인들.” “회중”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아사프(’asap), “모으다”에서 온 말이다(참조 출 3:16; 23:10; 룻 2:7; 욜 2:16). 이 말은 대체로 “사람들을 모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아사프는 무엇이든 모으고 수집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으므로 문맥이 이 수집의 성격을 결정해야 한다. 11절에 있는 시적 대구법에서 “회중의 스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지혜자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이 평행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 둘째 부분을 회중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슬기로운 격언집 혹은 명문집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스승(“스승들”로 되어 있음-역자 주)으로 번역한 말은 그 질과 편제(編制)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전체적인 구절은, “[지혜로운 격언들의] 완벽한 수집” 혹은 단순히 “명문선집”으로 적절히 해석될 수 있으므로 이 시적 대구법의 둘째 부분은 “목자의 명문선집은 잘 박힌 못과 같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리하여 전도자는 이 충고의 말씀들을 가리켜 사람들이 슬기로운 행동을 하도록 그들을 찌르는 채찍이라 하고, 그 말씀들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을 잘 박힌 못과 같다고 말한다.
잘 박힌 못. 잘 박힌 못이나 말뚝은 빼내기가 어렵다(참조 사 22:23). 잘 간추린 요점들과 철저히 가르친 사상들은 마음에 남아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박힌”으로 번역된 말은 대개 “심다”를 의미하고, “확립하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경계를 받으라. 곧 “경고를 받으라.”
여러 책. 솔로몬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책들은 실제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오히려 책의 저자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거나 아니면 책의 주인공에게 영광을 돌리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집필된 책들 중에서 진실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 얼마나 적은가! 분명히 솔로몬은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책들은 모두 다 구해 읽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아마도 그 시대에 꽤 널리 알려진 가나안 문학(참조 제1권, 139~144; 제3권, 49, 50, 58~60, 44; 삿 1:11 주석)과 그 시대에 이미 유명해진 애굽의 지혜문학 등이 있었을 것이다(참조 왕상 4:30).
많이 공부하는 것. 공부는 마치 그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거기에 몰입하게 되는데, 솔로몬이 자신의 삶의 상당 부분을 바쳐서 한 그런 유(類)의 공부는 무익한 것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실용성이 없었으므로 헛된 것이었다. 공부가 공부 그 자체보다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수단이 될 때에만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모든 진리의 창시자가 “지혜의 근본”(시 111:10)이라는 사실이 인정될 때 그리고 공부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거룩한 존재 목적에 일치되게 하고자 그분의 사상을 좇아 그분을 생각하는 수단이 되는 그때에 그것은 감격적인 기쁨이 된다. 이교 저술가들의 철학적 사색이 그리스도인 사상에 기여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참조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44).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조 신 4:10; 6:2; 눅 1:50 주석; 계 14:6, 7.
명령. 히브리어 미츠와(mis.wah). 참조 시 78:1~7. 분명히 도덕적 율법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말이다. 미츠와와 토라(torah), 율법(참조 민 19:14 주석)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될 때는 동의어로 쓰인다.
본분. ( “whole duty”[모든 의무]로 되어 있음-역자 주). 13절의 마지막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이라는 말은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 명령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앞에서 한 말이다. “본분”(duty)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는 없기 때문에 “모든”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람”이라는 말에 덧붙여진 것이다. 같은 히브리어 구문이 3:13; 5:19에서는 “사람마다” 혹은 “어떤 사람에게든지”로 번역되었다.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현명한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삶의 최고 목적으로 생각한다. 바울도 행 17:24~31; 롬 1:20~23에서 같은 진리를 말한다(참조 약 2:10~12).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요 숙명이므로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최상의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사람이 번영일로에 있든지 역경에 처하든지, 그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의 창조자에게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다.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행위. (“work”[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행위는 물론 말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 12:36, 37).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더한 것, 즉 그의 생각으로까지도 순종하기를 요구하신다(참조 마 5:22, 28 주석; 고후 10:5 등).
모든 은밀한 일.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위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는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히 4:13).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도 그분의 정밀한 검사를 받고 있다(삼상 16:7; 시 7:9; 렘 17:10; 참조 행 1:24; 히 4:1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동기까지 읽고 계신다. 그분은 얼마나 많은 진리의 빛이 우리 마음의 어둠을 뚫고 들어갔는지를 아신다. 빛줄기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참조 롬 2:16; 고전 4:5). 최후 심판의 그 큰 날에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이다(마 7:21~27).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노라고 공언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요구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불순종하는 것은 그 충성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것이다(참조 요 15:10; 요일 2:3~6). 하나님의 요구보다 적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참조 막 7:7~9). 왜냐하면 그 큰 날에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마 16:27; 참조 계 22:12).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심판하실 것임―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시 19:7)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의 그 단순성, 포괄성 및 그 완전성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가! 율법의 내용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계명을 쉽게 암기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너무나 원대하며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외형적인 행동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사상, 의도, 욕망 및 정서까지도 살핀다. 인간의 율법은 이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의 율법은 다만 외형적인 행동만을 제재할 수 있다. 인간은 범죄자이면서도 자신의 악행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길 수 있다. 또한 도둑질, 살인, 혹은 간통죄를 범한 형사상의 범인이 되고서도 발견되지 않는 이상 율법이 그를 범죄자로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 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의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심판하”(전 12:14)실 그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기별 216,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