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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 강화(Discourse on the Mount of Olives)(누가복음 21:5-38)

은총가득 2020. 11. 18. 08:04

 

감람산 강화(Discourse on the Mount of Olives)(누가복음 21:5-38)

 

본단락에서 시작하여 21:38까지의 세 문단은 성 고난 주간(H이y Passion Week)의 셋째 날인 화요일의 말미에 주어진 소위 감람산 강화(Discourse on the Mount of Olives)로서, 예루살렘 멸망 및 성전의 파괴와 종말 및 재림에 관한 복합적 예언 및 교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 제24장 및 마가복음 제13장과 병행되는 부분으로서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다.

먼저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것은 성경 계시의 복합성(the Multiplicity of the Scriptural Prophecy) 문제이다. 성경의 예언(豫言)들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사건의 전후와 시기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는 성경의 예언자들(Prophets)이 다중적 관점(Multiple Perspectives)을 가지고서,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한 사건들과 미래에 반복적으로 발생할 사건들 혹은 궁극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동시에 바라보며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성경의 예언은 예언을 듣고 있는 1차 대상들에게와, 2차 대상들인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 모두에게 구속사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감람산 강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미래에 대한 복합적 관점을 가지고서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멸망과 멀리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동시에 예언 하신다. 예루살렘 멸망 및 종말의 상황에 대한 복합적 예언을 담고 있는 이 감람산 강화는 1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승천 후 닥칠 상황에 대해 당시의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를 살아갈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람산 강화의 전체적 구성 및 내용은 마태복음 제24장과 마가복음 제13장의 내용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를 대할 때 한 사건에 대한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묘사가 대동소이하다는 점은 결코 본문을 소홀히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사건이나 강화에 대한 각 성경 기자의 묘사에서 발견되는 유사성(Similarity)은 곧 각 성경 기자의 공통적인 강조점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반면, 하나의 사건이나 강화에 대한 각 성경 기자의 묘사에서 발견되는 차이점(Dissimilarity)은 바로 해당 성경 기자의 관점 혹은 강조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만일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면 해당 본문에서 각 저자의 관점이나 강조점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말해 주며, 반면 차이점이 사소하다면 각 저자들이 해당 본문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교훈들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전체적인 구성 및 내용에서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 감람산 강화는 공통의 주제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묘사에서의 차이점 역시 소훌히 하지 않으면서 감람산 강화의 흐름과 내용 및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문단인 21:5-19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여러 징조들, 그리고 대박해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후, 그 일이 일어나는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대신 전쟁, 민족 분쟁, 지진, 기근, 역병, 천체의 대변혁 등의 종말론적 징조들(Eschatological Signs)을 언급하신다. 그 다음 예수께서는 대박해에 임할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시는데, 이로써 예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이 성취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의 징조들이 복합적으로 예언됨으로써, 대박해에 임한 자세에 대한 교훈은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시기를 살아갈 성도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 21:20-28의 문단은 예루살렘 멸망과 대환난(20-24절) 및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양상에 관한 예언(25-28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부분에서, 마태와 마가는 종말에 있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환난과 곧바로 연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마 24:21 ; 막 13:19), 누가는 대환난을 언급하기는 하되 종말에 있을 대환난보다는 예루살렘의 멸망시에 임할 환난에 보다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는 점(24절)이 특징이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시에 있을 환난의 양상과 재림시에 있을 대환난의 양상을 연결시키심으로써, 교훈의 대상을 당대의 제자들과 마지막 시기의 성도들에게까지 확대시키신다.

마지막 21:29-38의 문단은 무화과나무의 비유 및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내용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분별할 것을 권면하시며, 한편으로 주의 재림을 부끄러움 없이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하신다. 예수님의 종말 설교의 결말 부분에서 깨어 있으라고 하는 내용은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공통된 요소이지만, 누가는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묘사함으로써 빈번히 기도를 강조하는 자신의 신학적 특징을 여기서도 나타내고 있다.

이상의 감람산 강화에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왜 예수께서 복합적인 시점으로 예언을 제시하셨을까?’하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종말 예언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하는 점이다.

첫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루살햄 멸망은 곧 세상의 종말에 있을 심판에 대한 예표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메시야를 불신하고 배척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그리고 그 예언은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예언의 복합적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성전 파괴 및 예루살렘 성전 멸망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한 불신과 배척으로 심판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로 장차 모든 세상의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역사 속에서 성취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언의 궁극적 목적은 현재의 삶을 신앙으로 살도록 권면하는 데 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시기를 밝히시지 않고 오히려 신앙적 권면을 주셨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종말과 관련하여 시대를 분별할 필요는 있지만, 그 시기에 집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도들은 종말의 특정 시기에 집착하기보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신앙 안에서 현재의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인내(Perseverance)는 환난이 닥칠 때 성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이며, 그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19절 ; 마 24:13 ; 막 13:13).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소망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우리 성도들은 몸의 구속까지를 포함한 온전한 구속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28절 ; 롬 8:9).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환난의 때에는 인내할 뿐 아니라, 세상의 쾌락에 취하거나 삶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며, 그 날이 덧과 같이 임하지 않도록(34절)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36절).

출처 ; 옥스퍼드 주석

감람산의 그리스도 /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이탈리아 / 1430~1516년

 

 

환난의 때에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누가복음 21:5-19)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때가 임박한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환난의 때를 제자들이 어떻게 극복해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주십니다.

[ 질문 ] 성전에 대하여 사람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은 어떤 차이가 나는가?(5-6절)

성전 파괴의 예고(5-6) 성전 건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혜롯 왕이 엄청난 돈을 들여 지은 성전은 굉장히 귀하고 아름다운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흰 눈 덮인 산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결국을 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19:46)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크고 아름다운 것은 무너지지 않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사는 하나님의 전으로 살고 있습니까?

[ 질문 2 ] 환난의 때에 제자들이 가져아 할 자세는 무엇인가?(19절)

환난의 때를 이기는 제자들의 자세(7-19)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의 파괴는 A.D. 70년에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이전에 이미 사도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가 투옥을 당하는 등 유대 땅에서 제자들에 대한 박해가 거세게 일어났습니다(행 12장).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내다보시면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하도록 무장시키십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계속 들려오고,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들이 대항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은 실제로 박해자들 앞에서 담대히 주님을 증언하였습니다(행 4:8-13). 우리는그 어떤 상황이 우리 앞에 닥쳐도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나는 나를 영접하는 사람들 속에서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증인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습니까?

[ 본문 개요 ]

21:5-19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여러 징조들, 그리고 대박해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후, 그 일이 일어나는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대신 전쟁, 민족 분쟁, 지진, 기근, 역병, 천체의 대변혁 등의 종말론적 징조들(Eschatological Signs)을 언급하신다.

그 다음 예수께서는 대박해에 임할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시는데, 이로써 예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이 성취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의 징조들이 복합적으로 예언됨으로써, 대박해에 임한 자세에 대한 교훈은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시기를 살아갈 성도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8-19절은 일차적인 예루살렘 멸망 예언과 세상 끝날 이전 말세의 기간 중에 있게 될 여러 징조들과 교회에 대한 핍박을 다룬다. 그리고 20-28절은 더욱 오묘하게 예루살렘 멸망을 그리스도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의 현상과 관련시켜 복합적으로 예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룬다. 대체적으로 보자면 내용상 8-19절보다는 20-28절이 예수의 재림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된 시기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21:5-9 ;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예루살렘의 파멸을 세상의 종말로 이해한 듯하다(마 2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그 후에 올 세상 종말의 모형으로 인식하도록 하셨다.

21:8-11 ; 종말에 나타날 징조들로는 첫째, 스스로 메시아인 것처럼 자처하면서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의 출현, 둘째, 민족들간의 전쟁과 천재지변 및 하늘의 징조 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해산할 여인의 산고가 시작되듯이 이는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환난의 때에 제자들이 가져아 할 자세

첫째,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더라도 그들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8절).

둘째, 두려워하지 말라.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9절)

셋째, 변명할 것을 미리 생각하지 말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더라도,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10-14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15절).

넷째, 인내해야 한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우리를 넘겨 주어 우리 중의 몇을 죽이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인내해야 한다(16-19절).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다.

영혼을 얻기 위해서, 즉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놀람, 감탄) 예수께서 이르시되

몇몇 사람이 성전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5-19절까지에는 예수께서 수난 주간 제3일 화요일에 주신 그 유명한 감람산 강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마 24,25장 및 막 13장과 병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종말과 그리스도 재림에 관계된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소계시록(Little Apocalypse)’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 가운데 5,6절은 감람산 강화가 주어진 동기가 되는 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일차적으로 A.D. 70년에 발생할 예루살햄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성전 안에 계시다가 성전 밖으로 나오실 때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 24:1 ; 막 13:1), 누가는 마치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계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주신 것처럼 묘사하였다. 왜냐하면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성전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질문한 ‘미석’과 ‘헌물’은 성전 내부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가가 이처럼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다르게 기록한 이유는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여러 가르침들과 치열한 논쟁의 절정으로서 성전 멸망을 다룸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맞이할 최후의 심판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붕괴된다는 것은 이제 짐승의 희생을 통한 구약 제사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흘린 보혈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에 대한 심판적 의미도 가진다. 누가는 이러한 심판의 의미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성전에서 일어난 것처럼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확실히 누가의 관심은 장소적 이동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과 관련이 있다(1절).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1-4절)에서도 예수께서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가르침을 베푸셨다고 기록하였다. 5절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미석과 헌물을 보고 제기된 질문이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의 시발점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누가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마태와 마가의 장소적 이동을 통한 내용 전개 방법 대신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전개시킨다 (6절).

마가는 병행 본문(막 13:1-4)에서 교차 대구 구조를 사용하여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강조하였다(막 13:1 의 원문 구조 분석 참조). 그러나 누가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킴으로써 동일하게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성전의 화려한 외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이 아니라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경건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진실된 믿음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성전의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질문한 사람을 제자로 기록한 반면(마 24:1 ; 막 13:1)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기록하였다. 몇몇 학자들은 성전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 성전 밖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질문함으로써 성전과 관련하여 두 번의 질문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석으로 번역된 ‘리도이스 칼로이스’는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된 희고 큰 대리석을 가리킨다. 이 돌은 주로 성전의 기초와 기둥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직접 성전을 목격한 바 있는 A.D. 1 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헤롯 성전에 사용된 미석의 크기는 가로 11.4m 세로 3.7m, 높이 5.5m가 되는 엄청난 규모의 돌로서 특히 성전 입구에 있는 미석은 그 높이가 무려 12m나 되었다고 한다.

헌물’로 번역된 ‘아나데마신’의 원형 ‘아나데마’는 ‘아나티데미’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성전에 바쳐진 물건’ 즉 ‘봉헌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 헌물들은 왕이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성전에 바친 물건으로서 성전을 장식하고 전시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대표적인 헌물로는 B.C. 19년에 성전을 재건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이 바친 사람 키만한 황금 포도송이가 있었다(Josephus). 이렇듯 성전은 아름답고 화려한 헌물로써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다(요 4:20-24). 안타깝게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성전의 외형적인 면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더욱 치중하듯 자신들의 외형적 신앙의 모습만을 내세우는 위선자가 되고 말았다.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날’로 번역된 ‘헤메라이’의 원형 ‘헤메라’는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예비된 날로서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현실 가운데 드러나는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A.D. 70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Titus)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성전이 화염에 휩싸여 전소될 때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40여 년 이후에 이루어질 이러한 일을 하나님으로서의 예지 능력을 가지고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6절은 성전 파괴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A.D.70 1년 로마의 디도 장군의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남지’로 번역된 ‘아페데세타이’는 ‘아피에미’의 미래형이다. ‘아피에미’는 ‘놓다’, ‘남겨 두다’, ‘허락하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본절에서는 부정어 ‘우크’와 더불어 ‘놓다’, ‘남겨 두다’란 뜻으로 쓰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을 정도의 철저한 파괴와 멸망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이처럼 누가는 ‘아피에미’의 미래형과 부정어 ‘우크’를 사용하여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기록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아피에미’의 가정법 과거 ‘아페데’와 ‘우 메’란 부정어를 미래 직설법에 대한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하였다(마 24:2 ; 막 13:2). 즉 마태와 마가는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마치 독자로 하여금 성전 파괴가 세상의 마지막날로 인식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성전 파괴를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많은 종말적 사건들 중 하나로 기록함으로 성전 파괴와 함께 이 세상의 역사가 종결될 것이라는 오해를 막아 준다. 사실 누가는 이미 종말에 관한 묵시적 가르침을 기록한 바 있다(눅 12:35-48 ; 17:20-37). 예수님의 이러한 묵시적 가르침은 인자가 올 때를 항상 준비하라는 메시지로서 인자의 도래를 준비치 못한 자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을 가르친다.

누가가 이러한 동일한 묵시적 내용을 6절 이후부터 다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마태와 마가의 독자들에 의해서 오해될 수 있었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그리고 예루살햄 성전 파괴 이후에 바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예수께서 재림할 것을 기다렸다. 누가는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상황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 예루살렘의 멸망과 인자의 도래를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재림의 지연이 예수님의 예언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며, 또한 인내심으로 기다리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눅 21:20-28).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7절은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질문의 주체를 다르게 기록한 점이다. 누가는 ‘저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질문자들이 청중들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제자들이 질문한 것으로 기록했고(마 24:3), 마가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질문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그 이름까지 기록하였다(막 13:3). 이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의 ‘저희’를 예수님의 12제자들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막 13:1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 ‘선생’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본절의 ‘저희’도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른 데서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 마가와는 달리 제자들을 포함하여 청중들에게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가르친 것처렴 묘사했는데, 이는 7절 이하에 계속 주어질 교훈이 단지 제자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점까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 가운데 살아갈 만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암시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는 장소적 배경의 차이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서 나와 감람산에 앉아서 대화를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이러한 장소적 변화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으며 마치 성전 안에서 계속적으로 가르침을 베푸시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장소 이동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를 구태여 밝히지 않았던 것은 당시 제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이 하나님 임재의 처소로서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성전 파괴와 관계된 것이므로 성전에 대한 독자들의 잔상(殘像)을 지우지 않음으로써 교훈의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마가가 이 교훈이 주어진 위치를 ‘감람산에서 성전에 마주 대하여’로 기록하여 타락한 성전에 대하여 반감어린 표현을 쓴 것과 비교된다.

7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언을 듣고 질문한 두 가지 질문 중 첫번째로서 성전 멸망의 시기를 질문하는 내용이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우리에게 이르소서’라는 말을 생략하고 ‘그러면’이라는 비교적 약한 뜻의 ‘운’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단어 사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느껴지는 제자들의 간절한 궁금증에서 오는 은밀한 분위기가 누가복음에서는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의 대화 수준으로 떨어지는 듯한 효과를 준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종용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마 24:3 ; 막 13:3) 예수님의 묵시적 교훈의 비밀성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반면 누가는 공개적이고 일반적인 톤(tone)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 ‘이런 일’로 번역된 ‘타우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 파괴를 가리키고, ‘있겠사오며’로 번역된 ‘에스타이’는 ‘에이미’의 미래형으로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법으로서 A.D.70년에 일어날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당시 이 질문을 하였던 사람들은 성전 파괴를 곧 이 세상 종말로 여기고 질문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복합적으로 예언하셨다.

마태와 마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과 혼재시키며 묘사하고 있다(마 24:3 ; 막 13:4). 누가도 당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반영하여 성전 멸망과 세상의 종말 현상을 복합적으로 기록하고 있기는 하나 마태와 마가보다는 비교적 뚜렷하게 분리시킨다. 그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규명하기 어려우나 이러한 누가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에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란과 의구심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7절은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언에 대한 제자들의 두 가지 질문 중 두번째로서, 성전 파괴가 일어나기 전에 발생할 징조에 대한 질문이다.

누가는 마가가 사용하였던 ‘모든 일들’이란 표현을 생략하였다. ‘모든 일들’이란 표현은 마태가 기록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과 관련된 것으로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여러 징조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와 마가는 성전 파괴와 세상 종말의 징조들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성전의 멸망과 세상의 마지막 날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 원인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후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사람들의 혼란과 당혹감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하여 재림 지연 사상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성전 파괴를 종말 때 ‘성취될’ 일로 봄으로써 성전 파괴와 함께 세상 종말의 때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성전 붕괴 사건을 단순히 개별적인 하나의 사건인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성전 파괴와 종말 시기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말세에 일어날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즉 포괄적 의미에서 말세를 예수님의 승천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 사이에 있게 될 시간 개념으로 본다면, 성전의 파괴는 이 세상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징조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누가는 본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바로 그리스도 재림의 시점인 종말과 연관되어 일어난다는 성급한 생각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하여 거듭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여 성전 파괴와 종말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예수님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A.D.70년에 있을 성전 파괴와 관계된 예언이고, 이차적으로는 말세 기간 중에 있을 성도의 고난과 관계된 예언이며,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우선 예수님의 예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8-19절은 일차적인 예루살렘 멸망 예언과 세상 끝날 이전 말세의 기간 중에 있게 될 여러 징조들과 교회에 대한 핍박을 다룬다. 그리고 20-28절은 더욱 오묘하게 예루살렘 멸망을 그리스도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의 현상과 관련시켜 복합적으로 예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룬다. 대체적으로 보자면 내용상 8-19절보다는 20-28절이 예수의 재림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된 시기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예수님의 승천 이후 곧 재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많았고 이들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 또한 많이 등장했다. 누가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또한 장차 성전의 멸망과 동시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짓 그리스도들의 미혹은 더욱 늘어날 것이므로 이러한 경고는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빗나간 관심이 야기시킬 문제를 본절에서 지적하셨다. 그들이 궁금해서 질문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때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오히려 종말을 잘 준비하지 못하고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될 수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주된 관심은 세상의 마지막 때보다는 오늘이라는 현실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기억하며 오늘의 하루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때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말세가 다가왔다고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유혹하더라도 이들을 쫓지 말고 하루하루 오직 참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쫓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어도 겁내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말세의 기간 동안에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자주 듣게 될 것이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란 예수님의 예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우리의 마음의 평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믿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난리와 소란의 소문 뿐 아니라 9절 이하에 기록된 여러 현상들이 징조로 나타날 것 이나 복음의 전세계적 전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재림의 때가 임했다는 성급한 판단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전쟁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A.D.70년에 로마의 말발굽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에 일어났던 알렉산드리아 전쟁, 셀루치아 전쟁, 얌니아 전쟁 둥과 같은 분쟁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역사를 통해 이어져오고 있는 모든 전쟁 그리고 특히 종말이 임박한 시점에서 보다 활발하게 일어날 전쟁들을 가리킨다.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생기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말세의 기간 중에 나타날 다양한 천재지변에 대한 예언이다.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은 묵시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말의 징조였으며(사 13:13 ; 합 2:6 ; 슥 14:4), 또한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이기도 했다(민 16:32 ; 삼하 24:13). 병행 구절에서 마태와 마가는 ‘기근과 지진’ 만을 기록한데 반해 누가는 본절에 ‘전염병’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뚜렷한 차이는 누가의 ‘큰 지진’ 즉 ‘세이스모이 테 메갈로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다.

‘지진’은 묵시적 문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서 구약에서는 신의 현현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였다.

누가는 이런 묵시적 단어 뒤에 ‘큰’이라는 뜻의 ‘메갈로이’를 기록함으로 묵시적 사건의 절정 즉, 세상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의 특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의도적 강조는 당시 팽배해 있던 그리스도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상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멸망 때 이루어질 징조들은 마지막 날이 임했다는 직접적 징조가 아니라 그 징조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실상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은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은 물론 예수 승천 이후 재림 이전까지의 말세의 기간과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에 대한 예언이 겹치는 복합적 예언이다. 즉 예수님의 이 예언들은 예언적 원근법(prophetic foreshortening)이 적용된 것으로서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성전 파괴와 말세의 여러 사건들 및 보다 먼 미래에 발생할 세상의 종말을 동시에 투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단편적 현상을 보고 종말이 임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금물인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병행 기사 가운데 이 문장은 누가만이 기록한 것으로서 누가의 독특한 묵시적 표현법이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본절과 같이 말세의 현상을 표현할 때 땅의 징조와 하늘의 징조로 표현했다(행 2:19,20). 본절도 상반절에서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하반절에서는 하늘에서나타날 징조들을 다룸으로써 말세의 징조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하늘의 징조에 대해서는 ‘큰 징조’, ‘무서운 일’로만 표현할 뿐 땅에 나타날 징조들인 ‘지진과 기근과 온역’과 같은 구체적인 표현은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가리키는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우며 큰 공포를 가져다 주는 천체 이변을 가리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한편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재난의 시작이니라’는 표현을 생략했다. 사실 마태와 마가의 독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가 세상의 마지막 날의 재난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즉 성전의 파괴가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고 세상의 종말로 이해될 소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이러한 오해를 가중시킬 수 있는 ‘재난의 시작’이라는 표현을 생략하고 하늘에 나타날 ‘큰 징조'로 표현함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두 사건 즉 성전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본절을 원어 성경으로 보면 서로 대구를 이루며 강조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큰 지진’으로 번역된 ‘세이스모이 메갈로이’와 ‘큰 징조’로 번역된 ‘세메이아 메갈라’이다. 이 두 단어는 세상의 종말에 땅과 하늘에 나타날 대표적인 징조로서 누가가 세상의 종말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대구적 개념의 단어이다 (25절 ; 행 2:19,20).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겨 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예수님은 12-19절까지 말세의 기간 중에 성도들이 받을 박해를 예고하시고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권면하신다.

성도들이 받을 말세의 박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법정에 서게 되는 고난이고(12-15절), 둘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16-19절).

누가는 이러한 박해들이 말세에 나타날 징조 중 하나로서 거짓 그리스도들의 미혹(8절), 난리와 소란의 소문들(9절), 민족과 나라간의 분쟁(10절), 땅과 하늘에 나타날 무서운 징조들(11절) 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받게 되는 박혜의 궁극적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본절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기록하였다. 마가도 동일하게 두 번 기록하였고(막 13:9,13) 마태는 한 번만 기록하였다(마 24:9).

말세에 받게 될 성도의 고난은 곧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과도 버금가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참고 따라가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뒤에 영광스러운 하늘의 보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여 성도는 고난 뒤에 장차 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공회’는 유대인들의 지방 법원이었고, ‘회당’은 공회보다 작은 유대 법정으로서 가벼운 안건을 다루던 곳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공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방인 독자를 위하여 ‘옥’이라는 단어로 ‘공회’의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 여기서 ‘옥’으로 번역된 ‘휠라카스’의 원형 ‘휠라케’는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본서와 사도행전에서 ‘옥’을 성도들이 핍박받는 장소의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눅 22:33 ; 행 8:3 ; 22:4).

가는 성도들이 받게 될 고난에 대해 유대와 이방 세계의 박해를 포함하여 본절에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핍박의 장소인 ‘회당’과 이방인들의 박해의 장소인 ‘감옥’에서 성도들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도들을 향한 박해와 핍박의 범위는 광범위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13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축소할 수 있다.

첫째로 ‘증거’로 번역된 ‘마르뒤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그 무엇을 전파하는 행위를 나타내기보다는 ‘증거’, ‘증인’이란 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관련을 갖는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본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재림시 참 그리스도인으로 증거받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비록 세상의 법정에서 범법자로 재판을 받지만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세상적 기준에 의하여 고난을 당한 것은 마지막 주님 앞에서는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역 성경에 의해서 주로 지지를 받는 견해로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가지게 됨’을 뜻한다(NASB, It will lead to an opportunity for your testimony ; KJV, And it shall turn to you for a testimony). 공동번역은 이러한 영어 번역처럼 본문을 ‘너희에게 증거 할 기회가 될 것이다’고 번역하였다. 표준새번역은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문맥으로 볼 때 이 두가지 견해는 모두 가능하다.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명심해서,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하지 말아라.

14절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결심하라’로서 원문으로 볼 때 문장의 서두에 나온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병행 구절과 달리 처음부터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적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법정에 섰을 때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명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리 연구하다’는 뜻의 ‘프로멜레탄’의 원형 ‘프로멜레타오’는 ‘준비하다’, ‘예행 연습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변명하다’로 번역된 ‘아폴로게데나이’의 원형 ‘아폴로게오마이’는 ‘자신의 무죄 언도를 위해 말하다’, ‘비난 책임 등에서 벗어나려고 스로 말하다’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누가는 인간의 법정 앞에서 고난을 피하기 위해 예상되는 질문을 앞에 두고 예행 연습하는 것과 같은 어떠한 인간적인 준비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 15절에 나옹다.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나는 너희의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

"구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토마"는 입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입에 담긴 말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적재적소에서 우리가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눅 12:12).

누가는 본절에서 ‘가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14절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구변(口辯), 구재(口才)’로 번역된 ‘스토마’는 문자적으로는 신체의 일부인 ‘입’을 가리킨다. ‘스토마’는 ‘입’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흐’의 역어이다.

히브리어는 때때로 신체 부위로써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특색을 갖고 있는데 바로 이 경우가 거기에 해당한다. 즉 신체 기관으로서의 ‘입’은 그 기능적인 면이 강조되어 ‘말’과 ‘언어’란 뜻으로 전용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발언’, ‘유창한 언변’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마 21:16 ; 시 8:3). 특히 다른 사람의 말을 대언하는 것을 나타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70 ; 행 1:16; 3:18,21 ; 4:25). 따라서 본문에서 ‘구재, 구변’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말씀을 뜻한다.

그리고 ‘지혜’로 번역된 ‘소피안’의 원형 ‘소피아’는 본절에서 성령 하나님과 관련된 지혜로서 인간이 가진 세상적 지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선물로 부여받게 된 지혜를 가리킨다(행 6:3 ; 엡 1:17 ; 골 1:9).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누구나 이러한 지혜를 가질 수 있다. 스데반을 보더라도 핍박자들 앞에서 성령의 지혜로 유창한 설교를 했다(행 6:10). 이와 같이 성도들은 박해받을 때마다 성령이 주시는 구재와 지혜로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바로 이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마 10:20 ; 막 13:11).

한편 헬라어의 강조 용법은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거나 그 단어를 문장의 서두에 둠으로써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강조한다. 특히 화자 자신의 의지적 행동을 강조할 때에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반드시 그 일을 시행할 것을 강조한다. 본절에서도 예수님은 1인칭 주어 ‘에고’를 문장 처음에 기록하여 바로 자신이 직접 구재와 지혜를 주실 것을 이중으로 강조하고 계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직접 주시는 구재와 지혜는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것’이다.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줄 것이요, 너희 가운데서 더러는 죽일 것이다.

본절은 말세의 기간 동안 성도들이 가족과 친척 및 친구들로부터 당할 핍박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은 예수님이 이전에 이미 가르치셨고(눅 12:52,53 ; 마 10:21,22), 선지자 미가의 예언에도 나올 정도로(미 7:5,6) 말세에 나타날 징조로 보편화된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는 공관복음서마다 기록되어 있으나 강조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가족으로부터 받게 될 핍박에 대해 기록한 데 반해(마 24:21 ; 막 13:12) 누가는 보다 상세하게 친척과 친구의 핍박까지 기록하고 있다. 누가의 기록이 마태와 마가보다 더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유대 관계가 전혀 없는 타인으로부터의 핍박과 비교할 때 자신과 가까운 친구와 친척,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의 박해와 배신은 정말 참기 어려운 핍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배반과 핍박으로 인해 인간 사회를 지탱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끈인 가족 관계까지 파괴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말세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할 주체가 가족과 친지로부터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 혹은 민족(마 24:9)이 될 것이다.

여기서 ‘미움’으로 번역된 ‘미수메노이’의 원형 ‘미세오’는 ‘증오하다’, ‘무시하다’는 뜻으로 무관심과 경시 및 적극적으로 증오하는 마음까지 가리킨다. 즉 이는 원수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단어이다(마 5:43).

예수님은 말세의 기간 중에 성도들이 당할 박해 예고 및 성도의 자세에 대한 권면을 다룬 본문(12-19절)의 서두 부분(12절)과 결론 부분(17절)에 수미쌍관적으로 ‘내 이름을 인하여’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박해의 원인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신앙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 뒤에 장차 올 영혼의 구원과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 보호의 축복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신앙의 결과임을 암시한다(18-19절).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머리털’로 번역된 ‘드릭스’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단어이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완벽함을 강조할 때 종종 사용된다(마 5:36 ; 행 27:34). 이러한 용례는 구약 성경에도 나타난다(삼상 14:45 ; 삼하 14:11 ; 왕상 1:52).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 대한 완전한 보호의 약속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앞의 내용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자는 법정에 끌려가서 핍박을 받을 것이고(12절),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16절).

/ 따라서 본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영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19절).

/ 성도들은 이 땅에서 육적으로 아무리 심한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할지라도 본질적 존재라 할 수 있는 영혼은 어떠한 상함이나 변형도 없을 것이다(Plummer).

/ 어떤 학자는 ‘너희’를 교회로 이해하여 종말에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온전히 보호받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J. Weiss).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생명을 얻어라."

본절은 말세 기간 동안 성도들이 받을 고난(12-19절)에 대한 결론인 동시에 18절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다. 마태와 마가는 병행 구절에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기록하였다(마 24:13 ; 막 13:13).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는 무거운 짐이나 힘든 시련이나 박해의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고수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얻으리라’로 번역된 ‘크테사스데’의 원형 ‘크타오마이’는 ‘소득을 가지라’란 의미로 본절에서는 영혼의 참 생명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 표현은 마태와 마가의 ‘구원을 얻으리라’보다 더 구체적인 표현이다. 누가는 말세에 모든 박해를 견디는 ‘인내’가 곧 ‘영혼 구원’으로 이어짐을 밝힘으로써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베시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개선 / 줄리오 로마노의 작품 / 제작년도 1537년경 / 소장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가 티투스 황제의 개선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로마 유적의 조각을 토대로 그려져 마차 등에서 조각적인 특징이 강하고, 풍경 묘사가 뛰어나다.

 

 

심판의 예언 ( 21:5-19 )

(1) 화려하고 장엄한 겉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감탄해서 말했다.

그들은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다(5절). 주님께서도 분명히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성전 외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시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가 성전에 대해서 말한다면 분명히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도 그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6절).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 건물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3) 주님 주위에 있던 자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서 성전이 파괴될 시기에 대하여 물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읍니까(7절). 장래 일에 대해 알고 싶어 연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더욱 묻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그 예언을 확증할 수 있는 현재의 징조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이루어질 때를 말해주는 미래의 징조에 대해 물은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신다.

1)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틀림 없이 듣게 될 것이다(8절).

메사야의 이름을 도용한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올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내가 그로다'하리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재건될 때가 가까웠다"고 덧붙일 것이다. 제자가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읍니까"하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첫 대답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은(그런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속임수에 빠질 염려가 많다. 저희를 좇지 말라.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의 교훈이 하나님의 복음임을 확신한다면, 다른 그리스도나 다른 복음에 대해 귀 기울이지 말도록 하자.

2) 분명히 민족 간의 난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10절). 즉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처처에 지진이' 그리고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음시대에는 영적인 심판이 보편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인 심판(temporal judgements)을 행하시기도 한다.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1절). 그러나 "두려워 말라. 이것들은 보고 다른 사람들은 떨게 될 것이나 너희는 떨지 마라(렘 10:2) 무서운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말라. 현재 상태에 최선을 다하는데 열중하라. 왜냐하면 아무리 두려워 한다고 해도 사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더한 것이 있다. 끝은 곧 되지 아니할 것이며 갑자기 닥치지도 아니한다. 두려워 말라. 너희들이 벌써 용기를 잃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닥칠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3)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징조와 표적이 되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너희에게 손을 대리라. 이것은 박해받는 자들의 고통일 뿐만 아니라 박해자들의 죄가 되기도 한다." 한 민족의 멸망 앞에는 항상 그들의 죄악이 깔려 있다.

①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은 앉아서 고난의 값을 세어야 한다. 본래가 유대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그들은 너희를 회당에 넘겨주어 거기서 너희에게 채찍질하리라." 그들은 너희를 옥에 넘겨주며 너희에게 채찍질하리라. 그들은 너희를 옥에 넘겨주며 너희는 내 이름을 인하여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 가리라. 바로 네 친지 즉 너희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리라(16절). 너희를 "피흘려 저항하는 자"라고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그들은 모든 사람 즉 복음의 빛을 견딜 수 없는 모든 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왜냐하면 복음의 빛으로 인해 그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변화받기 싫어 하는 악한 세상은 위대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미워한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을 이겨내며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고통을 건지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3절). 이렇게 너희들이 목표가 되며 공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의 혹독한 고통과 악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미움으로 인해 너희가 선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너희 가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용기를 가지며 즐거워 함으로써 너희가 전하는 것을 너희가 믿으려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를 붙드신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곁에 계시며 너희를 인정하시며 너희를 도우시리라.

또한 너희가 충분히 답변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14,15).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14절). 너희 자신의 지혜를 믿지 말라. 그때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너희를 도우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말라.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너희를 도우실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재와 지혜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고난을 받을 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지혜는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데 필요하며, 구재는 그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아는데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변론할 자들은 스스로 대답할 수 있도록 구재와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자신을 위해서 대적들이 능히 반박하거나 대항할 수 없는 답변을 할 수 있게 된다(행4,5,6장). "너희들이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전혀 해를 당치않게 하리라."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18절). 그들 중 몇은 목숨을 잃을 터인데 머리털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라.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마 10:30)고 말씀하셨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한 투자라면 그것을 손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몸을 바친다면 망하지 않고 도리어 풍성히 받게 될 것이다. "충분히 보상하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무엇인가를 잃는다 할지라도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잃게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침착한 마음을 가져서 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자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절). 항상 특히 어려운 시기에는 영혼을 얻는데 주의해서 영혼이 병들거나 영혼을 얻는데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행할 바 의무이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것이다. "너희 영혼을 얻으라. 자유의 몸이 되라. 슬픔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감정을 잘 조절하라." 우리 영혼을 얻게 하는 것은 바로 인내이다. "인내의 보호를 받으라. 이성을 잃게 만드는 생각들을 모두 삼가라."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