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 후기 유대 사역의 후반부(눅 10:51-13:21)
눅-13, 후기 유대 사역의 후반부(눅 10:51-13:21)
10:51-13:21는 넓게는 9:51-19:27까지의 주님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에 관한 내용의 연속 기사이며, 좁게는 9:51-13:21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후기 유대 사역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을 보도하고 있는 9:51-19:27은 정확히 지역별, 혹은 사건별로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는 누가가 예수님의 여행 과정에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으며, 사건(Events) 중심으로 전개하기보다는 강화(Discourses)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을 보도함에 있어서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도 길게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은 주로 이 기간동안 예수께서 베푸신 교훈들Onstructions)과 비유들(Parables)을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렇다고 해서 이 부분의 문맥이 전혀 불규칙하고 서로 상관없는 내용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주제별로 크게 묶여 있다. 전체적으로 유대 및 베레아 사역 부분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과 승리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교훈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다룰 10:38-13:21에서도 역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립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을 제시하는 한편, 제자도와 관련한 교훈들을 다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10:38-42에서는 공관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보도하고 있는 기사로서, 마르다 · 마리아 자매와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제자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일화는 많은 일로 분주한 것보다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우선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이어 11:1-13 역시 주제면에서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곧 기도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누가는 여기서 기도에 관한 교훈이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결과로 주어졌음을 언급하고 있는데(1절), 이는 누가가 기도(Prayer)를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기도에 훈련되지 못한 제자는 제자도의 어느 것에도 훈련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기도문(Lord’ S Prayer)’을 가르쳐 주시고 아울러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다각도로 교훈하여 주셨다.
한편, 누가는 기도 응답의 결과를 ‘성령(the Holy Spirit)’으로 제시하고 있는데(13절), 이는 마태가 ‘좋은 것(Good Things)’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 구별된다. 누가의 연속 저작물인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도와 성령의 역사의 밀접한 관계는 누가가 빈번하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어 11:14-54의 세 문단은 벙어리 귀신 축사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바알세불 논쟁(11:14-28), 표적만 구하는 세대를 향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 및 복음의 진리의 빛을 밝히 볼 것을 촉구하는 등불과 눈의 비유(11:29-36), 그리고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내적 부패성을 폭로하시고 그들에게 거듭 화(화)를 선언하시는 내용(11:37-54) 등을 연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마태복음에서는 6:22,23 ; 9:32-34 ; 12:38-45 ; 23:13-26 등에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이 내용들이 한 곳에 결집되어 있는 것은 기록자 누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누가는 이를 한 곳에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적대적(敵對的) 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아니다. 비록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의 일부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과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나 본문의 사건들은 주님의 후기 유대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실제로 본문과 마태복음의 갈릴리 사역 기간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12:1-13:9까지는 많은 무리들이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12:1), 주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하여 번갈아 교훈과 경고를 주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2:1-12에서는 제자 들을 향해 바라새인들의 외식에 대해 경계령을 내리시고, 또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적대 관계가 형성 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커다란 불안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확립된 종교적 질서 및 권위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마땅히 두려워할 자가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환난에 대비케 하신 것이다.
12:13-34의 두 문단은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유산으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실 것을 요청한 사건(13.14절)에 즈음하여 주신 교훈을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교훈은 주신 대상과 내용이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 주제에 있어서는 사람이 세속적인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먼저 12:15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므로 탐심을 물리칠 것을 직설적으로 교훈하시고 이어 12:16-21에서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유한한 물질을 의존할 때 맞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지적하심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영원한 것에 두도록 촉구하신다.
다음으로 12:22-34에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으로 먹고 입는 것과 같은 문제로 염려하는 것을 극복할 것을 교훈하신다. 사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세상의 물질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질 문제에 대한 염려를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백성들의 삶의 방식과 대조시키며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권고하신다.
이어 12:35-48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교훈인데, 주제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을 교훈한 전(前) 문단과 문맥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하겠다.
이어 12:49-59 역시 종말과 관련된 교훈이다.
이 가운데 전반부 12:49-53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주의 복음으로 인해 이 땅에서는 이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 복음에 대한 자체가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 특히 이 복음의 분쟁적 성격에 관한 교훈은 위에서 주신 일련 의 교훈들, 즉 제자들은 근본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차별성을 나타내야 한다는 교훈들을 제유법으로 요약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후반부 12:54-59에서는 현역사에는 분명히 종말이 있을 것이며 또한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므로 늘 영적으로 각성하여 시대를 분별하는 동시에 그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에 대비하여 회개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신다.
또한 13:1-9은 시대의 징조 및 진리를 분별하여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전 문단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내용으로, 당시에 발생하였던 두 사건 곧 유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 및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과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를 거부하였을 때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3:10-17은 장면이 바뀌어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곱추병을 앓은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안식일 논쟁이 보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18-21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문맥적으로 후기 유대 사역을 보도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안식일 논쟁과 겨자씨 및 누룩의 비유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 세력의 반대와 배척이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권력의 반대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성장해 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여러 가지 차원에서 교훈을 주셨지만, 아무래도 교훈의 주대상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제자도와 관련한 교훈들을 열거해 보면 영적 생활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 세상 권력으로부터의 핍박 및 환난에 대한 자세, 탐심에 대한 경계, 염려의 극복 및 하나님 나라의 우선 추구, 재림을 대비하는 충성스런 자세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많은 일로 분주하기보다 주님을 가까이하고 그의 말씀에 꺼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일에 생활의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세상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쳐야 한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현재의 삶에서 충성스런 종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조용히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 앞에 무릎 꿇는 일은 제쳐두고서도, 분주하게 일하는 것으로만 위안을 삼지는 않는가? 그것이 불의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힘을 가진 자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받을 것이 두려워 진리를 말할 의무를 유기(遺棄)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질에 대한 집착과 염려로 매일의 삶이 혼탁하고 무력하지는 않은가? 본문에서 언급된 주님의 교훈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로 하여금 정녕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 인지를 되물어 보게 한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시며 답답해하시던(눅 12:49.50) 주님의 마음을 이 시대의 제자들은 헤아려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옥스퍼드 주석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눅 11:1-13)
[ 성경묵상 ]
11장 요약 ; 주기도문의 내용에 이어 기도의 원리,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끈기 있는 간구를 역설하고 있다. 한편 누가는 바알세불 논쟁을 유대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기사 직전에 수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이 곧 그들의 불신앙과 외식의 근원임을 논박하기 위해서였다.
11:1-4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데 유용하지만, 기도의 특별한 지침은 이 주기도문이다.
11:5-13 ;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친구나 부자 사이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필요를 청하면 응하는 것이 상례인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구한다면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1:1-13 역시 주제면에서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곧 기도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누가는 여기서 기도에 관한 교훈이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결과로 주어졌음을 언급하고 있는데(1절), 이는 누가가 기도(Prayer)를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기도에 훈련되지 못한 제자는 제자도의 어느 것에도 훈련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기도문(Lord’ S Prayer)’을 가르쳐 주시고 아울러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다각도로 교훈하여 주셨다.
한편, 누가는 기도 응답의 결과를 ‘성령(the Holy Spirit)’으로 제시하고 있는데(13절), 이는 마태가 ‘좋은 것(Good Things)’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 구별된다. 누가의 연속 저작물인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도와 성령의 역사의 밀접한 관계는 누가가 빈번하게 강조하는 내용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악할지라도'라는 말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원죄와 죄를 지을 가능성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
기도는 자연 종교의 가장 큰 원칙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돕고 의무에 복종케 하며, 기도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로써 믿음의 진보를 가지도록 북돋아 주는 것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1절).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자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3:21) 기도하셨고, '물러가사 한적한 것에서' 기도하셨으며(5:16),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6:12). 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셨고(9:18),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변화하셨다(9:28,29).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2) 제자들은 예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그들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청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그와같이 여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 제자 중 하나가 '주여…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늘 가르치시는 분이셨으나 특별히 여기서는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계시다.
1) 제자들의 요청은 이러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1절).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는 그것 자체로는 하나의 좋은 기도이며 필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잘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리스도만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필요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 입과 지혜를 주옵소서. 즉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2) 그들은 또한 이렇게 탄원하였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가르쳐 주옵소서. "요한은 이러한 필요한 의무를 그의 제자들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배우고 싶습니다." 유대인의 기도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영이었지만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간구와 청원의 기도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요청은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주여, 이제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찬양과 송영에 덧붙여야 할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스도는 완전히 간구로 된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기도에는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었다.
(3) 그리스도는 전에 산상설교에서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기도를 가르쳤다(마 6:9-13).
그들은 그들이 요구했던 모든 것이 이 몇 마디 말씀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자신의 말로 부연시키거나 더 상세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 하나가 네 번째 기원이다. 마태복음에는 네 번째 기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다. 즉 "우리에게 우리 몸에 필요한 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므로 그날 그날 해야할 의무에 새롭게 복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기원에도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는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용서에 필요한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을 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또 한 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끝부분에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부분을 비워 두어서 기독교의 원리에 따리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채우도록 했던 것 같다.
2) 그러나 두 기도문은 본질적으로 같다. 본문에는 몇 가지 일반적인 교훈들이 들어 있다.
① 기도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인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철저히 계속해서 그 원리에 맞게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③ 경건한 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④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에 권세를 돌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와 실제는 매우 본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의 원리와 실제가 그 본래적인 것에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는 말은 기도문의 처음 세가지 간구에 대한 언급이다.
⑥ 믿음으로 진실되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른 모든 일들이 더해 질 것을 겸허하게 소망하며 그것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첫 번째 소원과 관심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가 임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⑦ 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절제하며 우리의 능력에 맞게 한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날마다'라는 표현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과 아주 같은 것이다.
⑧ 죄는 우리가 매일 지고 있는 빚이다. 그러므로 말나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 죄는 날마다 쌓인다. 그런데 자비의 기적으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매일 매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보다 더 많이 용서해 주신다.
⑨ 만일 우리가 언제고 우리를 모요하고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진실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⑩ 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죄로 인해서 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지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⑪ 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악에 빠지지 않고 악을 가져오는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다음 내용을 보이심으로 기도할 때 강청할 것과 열심과 끈기를 가질 것을 역설하신다.
1) 강청은 사람들은 대할 때 효과를 가져다 준다(5-8절).
어떤 사람이 때아닌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이웃에 떡 한두 덩이를 빌리러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문을 두드려 잠을 깨움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많은 사과를 했을 것이나 그의 이웃은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자기가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떡을 주어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사람들은 강청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 강청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①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이웃이나 친구의 집에 가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우리는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양식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③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떡을 구하러 갔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선행을 베풀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사고 구하는 것 이상의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④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부주의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곤란을 당하는 것이라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욱더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떡을 구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배려해 주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강청함으로써 화가 난 사람을 이처럼 설복시킬 수 있다면, 무한히 관대하시며 강청함에 화내시지 않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강청할 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합당한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하심 뿐 아니라 그의 말씀도 가지고 있다(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하고 찾을 때는 계속해서 강청하고 똑같은 문을 두드려야 마침내 응답을 듣게 될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10절).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믿음으로 구하면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지시하신 것들 즉, 그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나라가 임하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어 우리는 강청해야 한다.
(5)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심으로 교훈과 용기를 주신다.
1) 세상에서의 아버지의 인자함을 상기시킴: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는 너희 자녀에게 그렇게 몰인정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11,12절).
2) 이 말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에 적용시킴(13절):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에도 그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성령을 구해야 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기도를 잘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게 될 모든 선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는 이 기도가 곧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신다. 너희 천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그는 그의 권세로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좋은 것 일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것들은 성령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된 전부는 아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이 악할지라도 친절하며 빈약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식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 나라, 바알세불 논쟁(눅 11:14-28)
[ 성경묵상 ]
11:14-54의 세 문단은 벙어리 귀신 축사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바알세불 논쟁(11:14-28), 표적만 구하는 세대를 향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 및 복음의 진리의 빛을 밝히 볼 것을 촉구하는 등불과 눈의 비유(11:29-36), 그리고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내적 부패성을 폭로하시고 그들에게 거듭 화(화)를 선언하시는 내용(11:37-54) 등을 연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마태복음에서는 6:22,23 ; 9:32-34 ; 12:38-45 ; 23:13-26 등에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이 내용들이 한 곳에 결집되어 있는 것은 기록자 누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누가는 이를 한 곳에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적대적(敵對的) 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아니다. 비록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의 일부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과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나 본문의 사건들은 주님의 후기 유대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실제로 본문과 마태복음의 갈릴리 사역 기간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1-13절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최고의 선물인 ‘성령’을 주시겠다는 내용으로(13절) 끝나자마자 귀신 축출과 바알세불 논쟁 기사가 시작된다. 이 단락은 이렇게 앞선 단락의 ‘성령’에 대한 언급이 무색할 정도로 곧바로 ‘귀신’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다.
예수의 축사 이적을 다루며 바알세불 논쟁이 이어지는 본 기사는 내용적으로는 막 3:22-30과 마 12:22-37과 병행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의 문맥은 마가와 아주 다르며 세부적 묘사에 있어서도 마태와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먼저 마가복음에서는 이 논쟁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만나러 온 것과 관련하여 소개되고 있는데, 누가와 마태에서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이적과 관련하여 이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양자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으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가복음의 본 단락은 후기 유대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별개의 사건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부적 묘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낸 이적인데, 마태복음에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친 이적이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와 논쟁을 벌이는 적대자가 ‘바리새인들’로 밝혀지고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무리 중 더러’란 표현만 나올 뿐 전혀 적대자의 정체에 대한 분명한 지시가 없다는 차이점들이 있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 하나를 내쫓으셨다. 귀신이 나가니,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으므로, 무리는 놀랐다.
예수께서 한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그 귀신은 바로 벙어리 귀신이었다. 이 귀신이 한 사람을 장악하여 말을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본절부터 시작되는 이 새로운 단락은 기도의 교훈을 제시하는 앞의 1-13절 단락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 누가는 과연 아무런 의도도 없이 벙어리 귀신이 쫓겨가는 기사를 이 자리에 집어넣은 것일까? 물론 이 기사는 누가가 사실에 입각하여 시간적 순서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벙어리 귀신의 축사와 바알세불 논쟁은 예수를 비방하는 대적들이 계속 늘어나며 그들의 공격이 점차 열기를 더해 감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귀신 축출 기사가 기도 관련 교훈 바로 뒤에 나오고, 또 그 귀신이 바로 벙어리 귀신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때 기도하지 못하는 자는 벙어리 귀신들린 자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기도하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본 절에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것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던 그의 제자들이(1절) 예수님의 기도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제 비로소 영적 벙어리의 상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고 그 벙어리였던 자가 말하고 있는 장면을 다룬 본절은 예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을 결론지으면서 새로운 바알세불 논쟁의 전환점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하였다.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는 예수의 능력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부터 비롯되는 능력이었다(20절). 이 사건은 하나의 기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사건에서 예수가 정말 메시야인지 그 증거(마 12:23)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결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적을 행한 사실 자체 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기적은 사단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라고 모욕적인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본절에서는 ‘그들 중의 더러는’이라는 익명으로 나오지만 유사한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사단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고 예수를 매도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마 12: 24)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막 3:22)로 나온다. 아마 본단락에서도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37-54절에서 암시되고 있다.
‘힘입어’로 번역된 ‘엔’은 ‘~안에(in)’라는 영역의 내부를 지칭하는 전치사로서 본문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혀서’라는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예수님이 우두머리 귀신에 들려 벙어리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한편 본절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축사 이적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하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하여 부당하게 평가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귀신의 능력에 사로잡혀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했던 것이다.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그에게 요구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표적을 보여 보라’는 식으로 예수를 시험했다. 여기에서 ‘시험하여’는 ‘악의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눅 20:23 ; 마 16:1 ; 19:3 ; 22:18 ; 막 8:11 ; 10:2 ; 12:15). 그리고 이러한 악한 의도의 시험은 단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애 동안 지속해서 일어났다(마 16:1 ; 19:3 ; 22:18 ; 요 8:6), 이러한 불순한 의도에서의 표적을 구하는 태도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영적 무지 가운데서의 이런 행위들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구하다’로 번역된 ‘에제툰’이 잘 보여 준다. ‘에제툰’은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애써서 찾다’의 의미를 지닌 원형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구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 준다.
한편 이들이 지속적으로 구한 표적은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엘리야가 일으킨 기적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기적을 요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30-40),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는데,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사람을 억압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의 능력이 제어당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본절과 22절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여기서 강한 자는 사단을 가리키며 집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강한 자가 지키고 있는 소유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녀야 할 믿음, 소망, 사랑 등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뜻할 수도 있다. 사단의 나라(18절)가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사단의 나라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
즉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더 강한 자. 곧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그 이전까지 강한 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사단을 물리쳐 이겨 쫓아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셨다. 여기서 ‘이기다’는 의미로 번역된 ‘니케세’는 ‘정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니카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판’과 함께 쓰여 ‘정복할 때’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부정과거 시제는 예수께서 단숨에 적을 물리치시고 정복하신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절의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논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표적 주장들이 있다. 첫째,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긴 것을 뜻한다. 둘째,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을 가리킨다(14절 ; 4:1-13 ; 8:26-39 ; 9:37-45). 셋째,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주장은 모두 예수께서 사단을 이기신 대표적 사건으로서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므로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은 강한 자가 지배하고 있던 세상에 더 강한 자가 오셔서 이전에 강한 자가 신뢰하던 무기를 빼앗고 재물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본절은 마치 전쟁 광경을 묘사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분위기가 역력하다(사 59:16-18).
한편 본절에서 ‘믿던’으로 번역된 ‘에페포이데이’는 ‘설득시키다’, ‘믿게 하다’는 의미를 지닌 ‘페이도’의 완료형으로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이란 뜻을 나타낸다. 또한 ‘무장’이라고 번역된 ‘파노플리안’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릎받이, 그리고 흉배 등으로 완전하게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믿던 무장’이란 표현은 강력하게 무장하여 어떤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장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하게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예수께서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누느니라’로 번역된 ‘디아디도신’의 원형 ‘디아디도미’는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여 주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요 6:11).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 직설법 능동태로 사용되어 사단의 무장을 빼앗고 승리한 예수님이 승리의 전리품(spoils)을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토록 계속해서 분배해 주실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사단으로 인해 빼앗겼던 영적 생명력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 등을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원토록 긴밀하게 교통하게 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신 새로운 시대의 특징임에 분명하다. 사단이 소유한 이런 힘과 영향력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가서야 완전하게 빼앗길 것이지만 본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눅 4:1-13).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편에 서는 것임을 천명하셨다. 14-26절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나고 있다.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면, 그 귀신은 쉴 곳을 찾아서 물 없는 곳을 헤맨다. 그러나 찾지 못하면, 그 때에 그 귀신은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한다.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귀신이 돌아와서 보면, 그 집은 말끔히 청소되고, 잘 정돈되어 있다.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그 때에 그 귀신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 나라를 현실 속에서 성취시키는 표정인 예수의 귀신 축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알세불의 권세를 등에 업고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완악한 양심이 화인 맞아 무죄한 예수를 죽이는 무서운 죄악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실로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힌 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진리를 외면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상태로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되고 만다.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가슴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하였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참된 복이라는 것이 육적 혈통이나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복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본절에 사용된 ‘오히려’란 단어가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해 준다. ‘오히려’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이는 참된 복의 조건은 오히려 영적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 자신이 결국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예수를 낳고 길렀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켰기에 가능했다는 뱅겔(J.A. Bengel)의 지적은 너무나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바알세불(Beelzebul)
‘오물의 주’, ‘귀신의 왕’이란 뜻. 구약 당시 블레셋에서 섬기던 ‘바알세붑’의 헬라어 음역. 구약의 바알세붑이 사탄으로 지칭된 적은 없으나 신약성경에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별칭으로 사용된다(마 10:25; 12:26-27; 막 3:22; 눅 11:15, 18-19). 예수께서 신적(神的) 능력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로부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셨다(마 12:24; 막 3:22; 눅 11:15).(출처 ; 라이프 성경사전)
‘바알세불’은 문자적으로는 ‘똥의 주’, ‘파리의 주’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귀신들의 왕 사단을 가리킨다. 귀신들이 예수의 말에 순종하므로 그가 귀신들의 왕인 사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막 1:34 ; 3:11).
그러나 정통 유대교 사상에 따르면 악한 영들의 세계라도 그곳을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욥 1:6-12). 따라서 바알세불이라고 하여 귀신들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여 다스린다는 식의 사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본문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중간기를 거쳐 오면서 이미 이방의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해 있었고 또한 실제로 귀신의 힘을 빌어 주술적 치료 행위를 하는 있는 사교의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그들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교훈과(막 1:27 ; 2:1-28), 축귀와 병의 치유라는 놀라운 능력을(막 1:26,31 ; 2:12) 나타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자구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에 묶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체험이 없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서는 예수에 대해 바르게 깨달을 만한 영적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러한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행하는 예수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무조건 예수를 배척하며 넘어뜨리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마21:31; 22:2). 동일한 표현으로 마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천국' 곧 '하늘나라', '아버지의 나라'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마3:2; 4:11; 13:11; 26:29). 여기서, '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영역. 이 영역은 때로는 현재적이고 때로는 미래적이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천국 선포 이후에 소개된 영역으로서(눅16:16), 세례 요한은 새 영역 안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그 나라의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마11:11).
② 그 통치자가 다스리는 백성. 구속받은 자들은 한 나라이다(계5:10).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한 자들이다(계1:6).
③ 그 통치자의 다스림 그 자체.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나라에 들어갈 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위의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요, 하나님이 다스리기 위해 친히 택하시고 불러 세우신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통치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모든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으로 ① 현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땅에 임하였다. 사탄에게 굴복하여 죄와 고통과 죽음으로 신음하던 지상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귀신들을 축출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알리셨다(막12:28). ② 종말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not yet)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서 장차 완성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즉, 그 나라는 사탄의 권세를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더불어 권세와 영광으로 장차 임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관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통해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화되고 있음을 알려준다(마10:32; 11:21; 25:41). 즉,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온 영원한 것이다.(출처; 교회용어사전)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전하신 복음 선포의 핵심 메시지였다. 동일한 표현으로 마태는 ‘천국’ 곧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마 3:2; 4:11; 5:19; 13:11).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기 두려워했던 유대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 표현이다. 한편, ‘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권을 지닌 자’, ‘군주’, ‘백성의 지도자’란 뜻의 ‘바실레우스’에서 파생된 말로서, ‘왕권’, ‘통치’(눅 1:33; 행 1:6), ‘왕국’, ‘영토’(마 12:25; 눅 11:17), ‘메시야의 통치’(마 4:23; 약 2:5)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란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영역. 둘째, 그 통치자가 다스리는 백성. 셋째, 그 통치자의 다스림 그 자체. 성경에서는 위의 세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눅 16:16). 이 개념은 세례 요한의 사역 이후에 소개되었다. 세례 요한은 이 새로운 영역 안에 들어섰던 것이 아니라 그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그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복을 누린다(마 11:11). 한편, 이 영역은 현재가 되기도 하고 미래가 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 나라를 선포하시며 가르치셨는데, 특히 사람들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현재적 영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셨고(마 21:31; 23:13; 눅 16:16),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미래의 영역으로도 소개하셨다(마 18:23-35; 22:2; 25:1-30). 즉,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은 권세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한 증거가 된다(마 12:28; 눅 11:20). 그 같은 하나님 나라는 또한 교회 안에 현재 임하여 있다(눅 17:20).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장차 그 나라의 주인이요 완성자이신 메시야의 재림 때에 완성된 모습으로 임할 것이다(마 6:10, 33; 10:7; 막 14:25).
②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 백성을 뜻한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 자체가 나라이다(계 1:6; 5:10). 이유는,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왕권)에 참여하는 복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로서(눅 22:29), 거듭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요 3:3-5). 실로, 그 나라는 회개하는 자(마 3:2),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마 5:10; 행 14:22),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약 2:5), 의로운 자들이(마 25:34)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요(막 10:30),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마 19:16, 23-30).
③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하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금 받고 있는 사람들만이 장차 임할 영원하고 복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막 10:15). 한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서 그 나라의 시민 된 우리를 다스려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 된다(마 6:33). 하나님의 다스림은 단순히 이상적인 내용이거나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나라와 악의 세력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해 가는 역동적인 것이다(마 12:28).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요, 하나님이 다스리기 위해 친히 택하시고 불러 세우신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통치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모든 영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영광되고 거룩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며(마 5-7장),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계 22:20), 늘 깨어 있어(마 25:1-13), 기도하고(마 6:10), 천국 복음을 전하며(마 24:14; 눅 9:60; 행 8:12), 모든 고난과 환난 중에서 인내하고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사 66:8; 행 14:22; 골 4:11; 살후 1:5).(출처 ; 라이프성경사전)
예수와 바알세불 ( 11:14-26 )
본문은 마태복음 12:22이하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특별히 사단을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해 보임으로써 신적인 사명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의 성취를 위한 열심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다. 마태복음에는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쫓겨나와 그 벙어리는 즉시 말하게 되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 감동받았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였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였다(15절).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하고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의 증거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시켜 달라고 도전하였다.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손을 잡아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행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독한 불신자들은 어떤 일을 꾸미든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트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하신다.
1) 사단처럼 교묘한 왕이 자신을 파멸시킬 일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17,18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흉증을 감추려고 생각할 때에도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이러한 비난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분쟁하는 자가 결코 서지 못한다는 것은 공인된 격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나 가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든지 스스로 분쟁한다면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그들이 그리스도가 사단과 협약을 맺었다고 비난한 것은 매우 편파적이고 심술궂은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면 그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찬미했을 것이다(19절). 너희 아들들은 주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너희 동족인 유대인이나 너희의 제자인 바리새인 중 어떤 자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당한 것같이 가증하게 사단과 용납하면서 책망하는 자를 정죄한다는 것은 크나큰 위선이다.
3) 이러한 기적을 확신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밀쳐 냈기 때문이다(20절).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따라서 만일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다." 본문의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가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광대하신 팔을 다 뻗지 않으셔도 된다. 원하신다면 울부짖는 사자도 나방처럼 손가락 하나로 죽이실 수 있다.
4)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귀신과 그들이 힘을 파괴하는 것이었다(21,22절).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셨을 때, 그는 귀신보다 강했으며, 권능으로 그 일을 하실 수 있었으므로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나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지배하시고 이기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볼 수가 있다.
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비참한 상태: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할 그의 마음이 귀신의 소굴이 되어 있다. 그리고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은 귀신의 재물이 되어 버렸다.
거룩한 심령은 거룩한 것의 거처이지만 성화되지 않은 심령은 귀신의 소굴이다. 강하게 무장된 귀신은 이 소굴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할 수 있는 무장을 다한다. 마귀는 온갖 그릇된 생각으로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진리와 거룩함을 대적하게 하는데 이 그릇된 생각들은 곧 마귀가 자기의 소굴을 지키기 위한 요새이다. 강하게 무장된 마귀가 지키고 있는 동안 회개치 않은 영혼의 소굴에는 평안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죄인은 자신을 좋게 평가하여 매우 안일해하며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만만하며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한 길만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면 마귀의 소굴의 평안은 소란케 될 것이다.
② 회개함으로써 오는 놀라운 변화:사단은 강하게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가 승리하신 방식을 보라. 예수께서는 사단이 자기의 소유가 안전하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오신다.
이러한 승리의 증거를 보라.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아 버리신다(22절). 즉 예수께서 친히 그 재물을 소유하신다. 이제까지 사단을 위해 사용되었던 마음과 육체의 재산이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쓰여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분배해 주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승리의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의 목적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과 한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23절).
5) 계약에 의해서 귀신이 나가는 것과 강제적으로 쫓겨나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어쫓김을 당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막 9:25). 반면에 귀신은 스스로 나가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오곤 한다(24-26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적을 패배시키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위선자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그의 마음은 여전히 귀신의 집이다.
㉠ 그러나 더러운 귀신은 나갔다.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동안 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다.
㉡ 그 집은 부분적인 회개로 어느 정도 소제되었다. 그러나 집은 소제되었지만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 집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집이 될 수 없다. 소제함으로 더러운 쓰레기는 치워지지만 죄인을 따라다니던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소제되지만 구석구석에서 눈에 띄지않는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 집은 청소되어도 더러운 것은 벽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집은 일반적인 은사와 은혜를 닮은 것들로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허식이요 눈가림이며 진실된 것도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집은 수리되어도 소유물은 그대로 있는 상태이다. 그 집은 그리스도께 복종한 것이 아니다.
② 배교자의 최후의 상태는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26절).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들어간다. 그들은 환영받으며 거기서 거한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위선은 배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죄의 은밀한 장소가 외적인 신앙고백의 가면 속에 감추어지고 양심이 타락한 곳에 배교의 길이 있다. 그러한 자의 나중의 죄와 형벌은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 배교는 인간의 최악의 상태이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죄는 극도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11:27-28)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구절이다.
(1) 한 다정하고 정직한 여인이 예수의 훌륭한 말씀을 듣고 찬사를 보냈다.
이 선한 여인은 그의 말씀을 찬미하였다.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당신을 밴 태가 복이 있도소이다(27절). "즉 당신을 아들로 나은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땅에 매우 복된자가 되며, 결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신 자의 어머니였다면 나는 참으로 복된 자가 되었을텐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은 귀중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낳고 길러 준 자보다 그의 신실하고 순종적인 제자들이 더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절). 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 육신의 모습에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된다면 그의 어머니처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즉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만이 진정으로 복된 자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