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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믿음의 사람들

은총가득 2020. 11. 16. 14:10

눅 7:1-10 믿음으로 반석 위에 선 백부장

 

 

(누가복음 7장 / 개역개정)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예수님의 설교 - 사랑의 대상과 내용의 확대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을 선택한 후 산 아래 내려와 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힘으로 제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이 정한 테두리를 휠씬 넘어서는 기준을 산 아래의 사람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였고, 원하는 것만 아니라 요구하지 않은 것도 주어야 한다 말씀하였습니다. 누구나 고개를 절래 흔들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요구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은혜로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좋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고,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라 말씀하였습니다.

가버나움으로의 이동 예수님은 설교를 마친 후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랐고 주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누가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고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능력을 나타낸 마을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결국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눅 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결과로 흘러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고 이적과 기적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여러번 살펴본 것처럼 기적과 이적은 성도의 삶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백부장 - 일반적인 이해 오늘 본문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대 지휘관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가장 큰 단위의 군단에서 시작됩니다. 1개의 군단은 약 6000명 가량의 병사로 구성되며 10개의 대대로 나뉘지고 한 개의 대대는 여섯 개의 백인대로 다시 나눠 집니다. 6000명이 600명의 대대로 나누어지고 600명의 대대는 여섯개의 100인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군대의 서열로 따지면 백부장은 고위 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백부장을 우습게 여길 수 없습니다. 보통 백부장이 되기 위해서는 15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군인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기에 군대의 숨은 실세였습니다. 사병들은 백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바쳤고, 백부장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항상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보니 백부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습니다. 고대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백부장은 군기를 잡기 위해 체벌과 기합주는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의로운 자가 아니라 부패하고 부정한 관료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어떤 백부장 - 누가복음의 백부장 하지만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사랑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당시 로마의 노예시장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종은 옷을 입지 못 했습니다. 의복으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구분하던 시대에 옷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종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 병을 고치려 했습니다.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는 소모품처럼 종을 대하던 시대에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둘째,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7:5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B.C 63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폼페이에 함락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권을 잃었습니다. 물론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했던 로마는 보다 효율적으로 유대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제한적인 자치권을 허락했습니다. 사법과 입법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지게 하였고 종교적 모임과 행사를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큰 돌을 머리 위에 얻고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가장 큰 지도자로 여겨지는 대제사장의 선출이 혈통이 아니라 로마의 임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임기도 세습이 아니라 로마가 원할 때까지가 되었습니다. 삶의 깊숙한 부분에는 세리들의 과도한 세금이 문제가 되었고, 군인들의 폭력과 강탈 등이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소개하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이러한 일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 가운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셋째, 백부장은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인들은 백부장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7: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합니다. 이방인과 식사를 하거나 거래를 하면 이를 부정하다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의 평가가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백부장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요청으로 예수님께 장로 몇 사람을 보내 종을 고쳐 달라 부탁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은 그가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개축했습니다. 보다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지어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런 헤롯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그가 행하는 악행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성전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전이 회당보다 휠씬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성전을 개축해준다는 헤롯은 싫어하고 회당을 지어준 백부장은 좋아했습니다. 백부장의 삶에서 드러나는 진심과 선한 행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한계 백부장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권력과 명예가 있었고 재물도 많았으며 유대인들의 신망마저 높았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고, 종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들의 사랑을 얻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완벽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의 바램은 오래가지 못 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종이 죽을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을 모두 이루며 살았지만 자신의 종을 살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력 있는 의사나 좋은 약을 사용해도 종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수고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백부장은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병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17-19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눅 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더욱이 백부장은 평소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사랑하는 종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때문에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불러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던 제자로의 백부장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 없이 “어떤 백부장”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백부장은 누가복음 7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7장 이전에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부장의 모습은 어디인지 모르게 낯이 익습니다. 프랑스 말로 ‘이미 보았다’는 뜻을 가진 데자뷰 현상처럼 백부장은 이미 등장한 사람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설명이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제자의 모습과 여러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넓게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마치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것처럼 로마가 지배하고 통치하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종마저 사랑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지 않아도 될 자들도 사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랑의 방법으로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가 요구하지 않은 것도 주라 말씀하였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세워야 할 회당을 지어주었고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종의 건강을 염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의 모습과 백부장의 삶이 나란히 놓여 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 백부장의 삶으로 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때문에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원했던 제자의 모습으로 살기 원했고 예수님은 그가 바라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문제 - 여전히 율법에 갇힌 자들 백부장의 요청으로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종의 옆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백부장의 종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병의 상태가 매우 위중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간 사이에 사랑하는 종이 죽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만남을 좋아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려 간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거나 자신의 요청을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세상에 공개된 후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북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져 능력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은 보다 쉽게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민족의 어르신이며 존경 받는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인파를 뚫고 예수님께 다가설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유대인의 장로들이 백부장을 대신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백부장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으로 최적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장로들은 백부장의 부탁대로 예수님께 그의 사랑하는 종을 고쳐달라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낫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병든 자를 찾아가 병을 고쳐달라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요구가 거절 될 수 있다 생각했는지 장로들은 4절 말씀에 의하며 ‘간절히’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덧붙여 백부장은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때 장로들이 합당함의 이유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백부장이 유대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부장이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깊숙이 자리한 율법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허락하며 이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내 백성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말했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론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는 인과응보의 세상에서 원인이 없음에도 결과를 우리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일한 것이 없음에도 값 없이 거저주는 선물 같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였습니다.

백부장의 믿음 - 두 가지 소문 유대인의 장로들이 공로를 앞세워 예수님의 도움을 요구하자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백부장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장로들이 백부장의 공로를 말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장로들의 요구를 받아 들여 그의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제자를 선택한 후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을 기다렸던 자들이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병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으로 향한 것은 그의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자 백부장은 자신의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그냥 말씀만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하인을 고쳐달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부장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할 때와 요청이 받아들여졌을 때의 반응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의하면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졌습니다.

첫째는 놀라운 능력으로 모든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능력은 많은 사람의 질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사회에 넓게 퍼져나갔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닌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친 후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 말씀하였습니다. 그 후에 중풍병자를 고치며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녔다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을 고치는 의사로 인식할 때 예수님은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라 말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번째 소문에 주목 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백부장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기 위해 첫번째 소문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장로들을 청해 예수님을 불러 달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은 소문의 능력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자신의 종을 고쳐주기 위해 자신의 집을 찾을 것이고, 소문의 능력이 거짓이라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자신의 집에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백 명의 군인을 거느린 자신의 권위 앞에 거짓이나 사기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중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6절에 의하면 멀지 않은 거리에 백부장의 집이 있으므로 곧 있으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은 첫번째 소문을 바탕으로 두번째 소문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자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교생활이 이루어지는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로마의 압제 속에 힘든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도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오면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의 확신은 첫번째 소문에서 두 번째 소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번째 소문에 집중할 때 백부장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소문을 밟고 두 번째 소문으로 흘러갔습니다. 두 번째 소문을 전하기 위해 첫번째 소문을 과정으로 사용한 예수님의 뜻을 따라 백부장은 첫번째 소문으로 두 번째 소문에 믿음으로 반응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는 백부장 첫번째 소문을 통해 두 번째 소문에 믿음으로 반응한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고백했습니다. 군대에서 아래 병사에게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것처럼, 또한 자신의 종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을 낫게 할 수 있다 말하였습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예수님은 백부장에 비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직적인 관계로 표현하면 백부장은 예수님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시민이며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나라를 잃은 유대인이었으며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명령은 물론이고 백부장의 아래 병사가 명령을 해도 그 말에 따라야 할 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물론이고 자신의 사랑하는 종과 질병마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매우 이상한 점은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지 않은 것입니다. 백부장의 집은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을 것입니다. 넓고 깨끗했으며 먹을 것이 풍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해 두 눈으로 이적과 기적을 보고 예수님과 식사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휠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나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가오려는 예수님을 밀어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베드로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부름을 소개합니다. 조금 다른 면을 보이기도 하나 대동소이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베드로의 부름을 다른 복음서와 아예 다른 배경에서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를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난 후 자신의 죄인 됨으로 예수님을 밀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그를 제자로 받아 주었습니다. 백부장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새롭게 받아들인 후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말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박수 받는 백부장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밀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찾을 수 없던 아주 큰 믿음이 백부장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평가할 때 철저히 믿음 하나만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백부장이 유대인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 주었다 말했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예수님의 평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도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믿음” 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도 ‘믿음’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란 말은 교회에서 매우 쉽게 들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 쓰임새를 보면 믿음이란 단어는 매우 추상적이며 개념적일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주체와 대상이 불확실하거나 그 의미조차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마지막날 우리를 평가할 믿음은 예수님을 대상으로 해야만 합니다. 백부장이 콕 집어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죄로 인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우리를 반드시 건져 낼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을 모른 채 믿었을 때 나오는 행동을 함으로 믿고 있다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석 위에 선 백부장 백부장의 부탁으로 예수님을 찾은 그의 친구들은 집에 돌아가서 매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지 않았지만 말씀만으로 그의 사랑하는 종이 병에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매우 건조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짧게 “집에 돌아가니 종이 이미 나았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극적인 장치들이 배제되고 오직 사실에 근거한 결과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철저하게 백부장에 믿음에 집중하게 합니다. 병이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부장의 믿음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백부장의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가 예수님이 원하는 참된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관리하고 감독하는 유대인을 사랑하고 죽어가는 하인마저 사랑하여 예수님의 도움을 요구한 그는 예수님이 원하는 참된 제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는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믿음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무너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게 됩니다. 따라서 백부장의 믿음을 따라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믿음을 이해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며 예수님이 감탄했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길었던 말씀을 마치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큰 믿음입니까? 아니면 작은 믿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처럼 예수님을 놀라게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걱정스럽게 합니까? 숫자로 표현하면 나의 믿음은 100점 중 몇 점이나 될까요? 진지하게 나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에 대한 고민 속에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 믿음을 더욱 크게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살펴보길 바랍니다. 믿음이 적음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고, 믿음이 낮음에도 분하지 않으며, 믿음이 없음에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일생이 아닌 영생의 문제가 믿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반석 위에 굳게 선 믿음의 성도가 됩시다. 비록 지금 우리의 믿음이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배워간다면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 질 것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눅 7:11-17 위로 받은 나인성 과부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은 산 위에서 열 두 명의 제자를 선택했습니다. 산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자됨의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산상수훈과 평행을 이루는 평지설교가 이어졌습니다. 평지설교의 내용은 사랑의 최대치를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지 않은 것도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하였습니다. 제자됨의 기준을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하나님 수준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찾던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병이 들어 죽어가는 종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나라를 잃은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유지시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의뢰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자신의 죽어가는 종을 고쳐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 했다 말씀하였습니다. 참된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친 예수님은 나인이란 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나인이란 즐거움, 혹은 기쁨을 의미하기에 나인 성은 즐거움의 성이고, 기쁨의 성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슬픔의 행렬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를 때에 사람들은 죽은 자를 메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들이 하나 밖에 없던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말씀하신 후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렸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고 단순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깊고도 넓습니다. 이를 크게 여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전히 제자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넓게 보면 제자들에 대한이야기는 5장에서 6장이라 말을 합니다. 좁게 보는 사람들은 6장만 제자들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7장부터 다른 주제의 이야기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백부장은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참된 제자의 모습이 백부장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계속되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나인성으로 향하며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무리와 함께 했습니다. 홀로 나인성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가르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하며 우리에게 이 사건을 소개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 역시 제자된 입장에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적을 보여줬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조금 더 일찍 자신의 집을 찾았다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의 값인 사망으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 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을 담고 있는 관에 손을 댑니다. 민수기 19장 11절에서 19절은 죽은 사람이나 그의 뼈 혹은 무덤을 만질 경우 부정해진다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돕지 않았습니다. 한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돕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만지면 부정해진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자 장례 행렬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고 또한 해서는 안될 일을 예수님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지 않더라도 과부의 아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말씀만으로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에 관에 손을 댄 후 과부의 아들을 살려 냈습니다. 곁에 있는 제자와 무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5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친 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과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알리는 내용의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사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밀어내고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로 알려지길 원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은 죽은 자의 사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시체나 관을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해 속에 관을 만져 부정해 졌습니다. 죽은 자의 사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죽은 자는 사망에서 풀려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레위가 주최한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그리고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한다 말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죄인 중 하나가 되는 것이 그들을 회개시키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는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자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자신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남으로 예수님이 죽게 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증상인 질병에서 나음을 입는 자들의 모습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으로 흘러갑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안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사망을 가져 가셨기에 우리가 새로운 생명 안에 살게 된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하신 동기는 그녀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있었으나 남편을 잃은 자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 없는 삶 속에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부의 모습을 모른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불쌍히 여겨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과부는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을 살려 달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요구도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해준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합당한 행동이나 철저한 순종 그리고 많은 금액의 헌금이나 헌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선물입니다. 값 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장례가 진행될 때 마리아의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심령에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능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심으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비가 살아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무엇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과부처럼 그들도 예수님께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그들에게 잃었던 오라비를 다시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진다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한 것이 없음에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은혜 받은 자로 그것이 복이라 말합니다.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이와 같이 일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여겨주심으로 복을 누리는 자들 입니다. 구원을 위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의 삶을 옮겨 주었습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정당한 값을 준비하지 못 했지만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겨 우리의 죄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다섯째, 과부의 아들이 관에서 일어났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의하면 이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선지자’ 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말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으며 사람들의 질병은 물론이고 죽음마저 해결할 수 있는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능력이 많은 선지자 중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율법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현재 이러한 율법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다 책망했습니다. 지켜 행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율법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단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다가올 미래에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 곧 그리스도가 오는 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일어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3장 21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입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예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9절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후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불렀습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랍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실로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이적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라는 말했는데 이 말만 듣고 예수님을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고백을 듣고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이 더 큰 일을 보아야 한다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라는 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부모의 집을 떠나며 벧엘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한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했는데 이 일을 인자 곧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될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랍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에 머문 나다나엘의 고백이 더 큰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로 향하길 원했습니다. 나타나엘의 고백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자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 일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이번에는 제자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앞장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예수님은 곧장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말하며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16절에서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보고 싶어도 보지 못 했고,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 말하였는데 베드로가 그 복을 받은 자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이성이나 지성이 뛰어나고 선행과 구제가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고 깨닫게 해야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 했습니다. 관을 박차고 나오는 과부의 아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53절에도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였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산 증인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큰 복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있고, 듣고 싶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고 듣고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온전히 고백하지 못하는 삶 앞에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우리가 누리는 복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능력의 수혜자는 과부입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매우 특별하게 대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허락하며 십일조를 통해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말하였습니다. 편부나 홀아비가 아닌 고아와 과부만 돌보라 말씀하였습니다. 홀로 된 삶은 누구나 힘든 것임에도 고아와 과부만을 지목하여 도우라고 말한 것은 이들이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있던 것을 빼앗긴 자들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있었으나 부모를 잃은 자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있었으나 남편을 잃은 자입니다. 두 다리로 설 때 온전히 걸을 수 있는 자가 한 쪽 다리를 잃은 것처럼 절뚝 거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는 바로 이런 자들을 도와야 한다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에게는 부모가 되어주고, 과부에게는 남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배우도록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말씀하였습니다.

물론 1차적으로 오늘 본문의 과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요셉의 생사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마리아는 남편이 없는 과부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훗날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게 됩니다. 마리아는 남편이 있었으나 남편을 잃었고,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을 잃은 과부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준 것처럼 다시 살아나 어머니 앞에 서게 됩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머니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이를 시기한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은 20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4-35절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 말합니다. 다른 자녀들이 위로를 하였지만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대신 할 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기에 때문입니다. 자녀를 잃은 자에게는 자녀가 돌아오는 것만이 위로가 됩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능력은 죽음에서 살아난 과부의 아들이 아닌 과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긴 자도 젊은 나이에 죽은 자가 아니라 남편을 잃고 아들 마저 잃은 과부였습니다. 능력을 경험한 것은 과부의 아들인데 능력의 수혜자는 과부로 나타납니다. 이는 과부의 아들이 살아남으로 과부는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죄로 인해 남편을 잃고 살아가는 과부 같은 자에게 ‘여자의 후손’ 곧 여자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여자에게 그의 아들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뱀에게 발꿈치를 물려 죽게 됩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처럼 여자의 아들은 다시 살아나 과부의 위로가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음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패배한 것 같던 싸움이 아들의 다시 살아남으로 완전한 승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도 깰 수 없는 사망의 장벽을 깨고 생명을 전해주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과부의 삶을 사는 교회의 위로가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과 무리 앞에서 행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과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과부를 위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로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본문 앞에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로 여기고 있는가 고민해봐야 합니다. 10년을 투명인간처럼 지냈다는 부부의 이야기처럼 긴 신앙생활 동안 예수님을 투명인간으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원하는 것을 주는 예수님으로 따라는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원했는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는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하는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를 통해 무리로 신앙생활을 끝내는 삶이 아닌 제자로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작성자 J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