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지혜서 / 시간 개념
성경에 나타난 지혜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지혜
1. 지혜 문학
지혜 문학은 인생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과 성공과 행복의 원리들을 기념비적인 형태로 기록한 문헌들과 구전 및 전승들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인간의 존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대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2. 이집트의 지혜 문학
1) "프타-호텝(이집트의 관리)의 교훈"(주전 2450년경에 쓰여짐)
2) "메리-카-레 왕을 위한 교훈"(주전 2180년경에 쓰여짐)
3) "세바이트": 지도자들과 궁전에서 일하는 관리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편집된 책.
3. 메소포타미아의 지혜 문학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다양하고 풍부한 지혜 문학을 소유함. 크레이머(S. N. Kramer)가 수메르의 지혜 문학을 다섯 종류로 분류함.
가. 격언
나. 작은 소론들
다. 교훈들과 경구들
라. 소론들(메소포타미아의 학교와 서기관들과 관계된 것들)
마. 쟁변들과 논쟁들
♣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
1.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부족 사회에서부터 각 가족에게 주어진 책임을 담당하기 위한 지혜를 전수하기 위하여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지혜 운동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난 후부터였다.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드보라; 삿 5:29; 슬기로운 여인; 삼하 14:2-20) 지혜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히 (삼하 16: 23)에 등장하는 아히도벨이란 모사는 매번 하나님께 물어서 지혜를 구하여 왕에게 조언하였다. 그러나 지혜는 솔로몬 때에 이르러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솔로몬의 부와, 국제적인 접촉,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의 추구와 함께 많은 지혜 문헌들이 산출되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과 솔로몬의 대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여호와 하나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 솔로몬: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9)
* 기도의 응답
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그 이름이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왕상 4:29-31)
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왕상 32-34)
3) 잠언과 전도서를 지음.
4) 솔로몬의 국제적인 명성(왕상 10:5): 스바 여왕의 방문 사건
2. 지혜 문학들의 양식
1) 격언적인 지혜 문학
개인적인 행복과 복지를 위한 원리들을 말하거나 경험상의 지혜를 요약하고 삶에 대한 예리한 관찰 내용을 언급한 것.(예 잠언)
* 시대를 초월해서 남는 격언들의 특징
가. 간결성-기억하기 좋아야 한다.
나. 명료성-의미가 분명해야 한다.
다. 풍미-재치가 있어야 한다.
라. 대중성-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2) 사색적, 명상적인 지혜 문학
삶의 문제나 고난의 문제 등 인간의 기본적인 실존의 문제를 파고드는 '독백', '대화', 혹은 '소론' 등이다.(경험적, 현실적으로 다룸, 예 욥기)
3. 구약 성경의 지혜서들의 특징
1) 국제적(보편성)
현자들은 지혜 문학을 수집할 때에 문화와 국적을 제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서 발견한 인생에 대한 통찰력은 다른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 개인, 복지 중심적
지혜 문학은 주로 개인의 행복과 복지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서나 율법 서에서 강조하는 출애굽 사건이나 선택, 언약과 율법, 여호와의 날, 성전, 제사장 직분, 메시야에 대한 기대, 그리고 위대한 인물이나 사건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지혜서가 "성공적인 삶"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혜서를 세속적인 문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강조하지 않고는 욥기나, 잠언이나 전도서를 읽을 수 없다. 이 책들은 참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이러한 참된 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들
1) 잠언
2) 전도서
3) 아가서
4) 욥기
잠언 (Proverv)
♣서 론
1. 저자와 연대
잠언서의 저자와 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책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여러 명의 저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 기록된 8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1단락(1:1-1:7)
2단락(1:8-9:18)
3단락(10:1-24:34)
(잠 1:1, 10:1)은 이 부분의 저자가 "솔로몬"임을 말해주고 있다.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주전 971-931년)이기 때문에 그가 쓴 잠언은 주전 10세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4단락(22;17-24:34)
이 부분은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고 불려진다(22:17, 24:23). 이 지혜 있는 자의 성격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 말씀들이 기록된 때 또한 불분명하다. 이 부분은 솔로몬이 자기보다 이전에 살았던 지혜 자들의 글을 수집하고, 거기에 자기의 잠언을 첨가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부분이 무명의 편집자가 솔로몬 당시의 지혜 자들의 글을 수집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3) 5단락(25-29장)
이 부분의 잠언은 솔로몬이 썼으나 이것을 편집한 것은 히스기야의 신하들이었다(25:1). 히스기야가 주전 729년에서 686년까지 통치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이때에 편집되었을 것이다.
4) 6, 7단락(30-31장)
이 글은 아굴과 르무엘 왕이 기록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이들이 솔로몬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아라비아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신분과 혈통은 불분명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잠 31:10-31)은 구조와 형식이 다른 부분과 다르기 때문에(히브리 알파벳을 따라 진술함: acrostics) 일부 사람들은 이 부분을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이 책은 최소한 히스기야 시대에는 완결된 형태를 가졌을 것이다(25:1 참조). 그의 신하들이 책 전부를 편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집 연대는 (아굴과 르무엘이 히스기야 이전에 썼다고 가정할 때) 주전 7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물론 저작과 편집은 모든 성경의 신적 저자인 성령의 감독 하에서 이루어졌다. 솔로몬이 이 책의 대부분을 썼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는 당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였고(왕상 4:29,31:31,34), 3,000잠언을 썼다(왕상 4:32, 전 12:9). 아가서는 솔로몬이 청 장년기에, 잠언은 중년기에, 그리고 전도서는 그의 생애 끝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2. 목 적
잠언서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교사를 위해 기록된 일종의 교훈집이다. 이 책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지침서로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옳고 그른 행동들이 무엇인가 를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은 신앙의 원리들을 매일 매일의 삶에 적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실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주고 있다. 잠언서 이 책의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1:2-4,6).
1)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한다.
2)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3) 훈계와 슬기로운 삶을 살게 한다.
4) 어리석은 바를 슬기롭게 한다.
5)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닫게 한다.
잠언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지혜롭고 능숙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잠언은 지혜를 ws해주기 위해서 부모와 교사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잠언을 사용하는 목적은 연소한 자가 지혜와 삶의 기술들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잠언서에는 지혜에 대한 동의어로 몇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이며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은 "호크마"로서 잠언서에 45번이나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서 "호크마"는 장인이나 선원, 가수, 장례 예식에서 대신 우는 자들, 관리, 상담자 등의 기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일이나 그 외의 일을 하는 자들이 그들의 전문 영역에서 지식이 있고 숙련되고 유능할 때 그들은 실력 있는 자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자들을 바로 "호크마"(지혜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한 호크마를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대해 숙련되고 숙달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혜 문학에서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토이(Crawford H. Toy)는 "지혜는....가장 높은 의미에서 올바른 삶에 대한 지식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고대 근동의 문명들도 지혜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와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잠언서의 지혜는 실제적인 총명, 정신적 예민성, 그리고 기능적인 숙련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른 지혜 문서와 일치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도덕적이며, 정직한 삶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혜 문서와는 그 내용이 구별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는 진술은 다른 지혜 문서와 히브리 지혜의 개념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잠언서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주를 경외하는 것은 그 분 자신을 존경하는 것이며, 신뢰와 예배, 순종과 봉사로써 그 분께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는 지혜를 결코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잠언서의 목적은 특별히 연소한 자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되는 삶으로 지혜롭고 능숙하게 접근하도록 계발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3. 수신인
이 책에는 "내 아들"과 "내 아들들"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내 아들"이란 말은 솔로몬이 17번, 지혜자의 말에서 5번, 르무엘의 어머니의 말에서 1번 사용하였으며, "내 아들들"이란 말은 솔로몬에 의해 4번 사용되었다(4:1, 5;7, 7;24, 8;32). 그러면 잠언서 저자가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원래 "내 아들(들)"을 포함하고 있는 구절들은 솔로몬이나 다른 지혜 자에 의해서 궁정이나, 솔로몬의 학생들, 다른 지혜자의 학생들, 또는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구두로 진술한 것이었다. 또한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그들은 때때로 학생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히브리인들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했다. 그러므로 잠언서는 성경 본문 연구에도 유익하지만 교사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지침서로도 유용하다. 이 책은 이러한 교육을 위해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온 중요한 격언들을 수집하여 만들어졌다. 아무튼 이 책은 지혜롭고 경건한 삶에 대한 젊은이(또는 어른)를 위한 위대한 입문서이다.
4. 문학 양식
1) 잠언의 뜻
"잠언"은 히브리어로 "마샬"을 번역한 것인데 아마 "--와 같다", "--와 비교되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에 잠언은 "비교나 비유로 보편적인 경험과 진리를 표현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잠언서 이외에 여러 곳에서 마샬이 발견된다(예 창 10:9, 삼상 10:12, 왕상 20;11, 렘 31:29, 겔 12:22 등). 구약 성경에서 마샬은 "웃음거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신 28:37)에서는 이 말이 "비방거리"로, (왕상 9:7, 대하 7:20, 렘 24:9, 겔 14:8)에서는 "웃음거리"로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마샬은 예언이나(민 23:7) 조소(사 14;4)로 사용되기도 했고, 때로는 "비유", 또는 "풍유"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겔 17:2, 20:49). 여기서 비유적 이야기란 생의 어떤 사건과 흡사한 것을 말한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잠언은 수수께끼와 연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시 49:4, 잠 1:6).
2) 병행법(또는 평행법)
잠언은 모두 시 형식으로 쓰여졌다. 히브리 시의 지배적인 형식은 병행법이다. 히브리 시의 각 문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두 부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시의 내용을 강조해 준다. 그 중에서 두 번째 부분이 첫 번째 부분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경우를 "동의적 병행절"이라고 하며, 두 번째 부분이 첫 번째 부분을 부정하거나 대조하여 강조하는 경우를 "반의적(대조적) 병행절"이라고 하고, 직유 또는 은유로서 내용을 강조하는 것을 "상징적 병행절"이라고 하며, 마지막으로 두 번째 부분이 앞부분을 보충하여 그 내용을 강조하는 경우를 "종합적 병행절"이라고 한다. 다음은 이러한 병행절의 예이다.
* 동의적 병행절: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22:10)
* 반의적 병행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0:1)
* 상징적 병행절: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 라"(10:26)
* 종합적 병행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11:22)
5. 내용
1) 잠언서는 인간의 품성과 행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잠언서는 지혜로운 삶(경건한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이며, 어리석은 자는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다. 잠언서는 이러한 두 가지 삶의 특징과 결과를 반복해서 언급한다. (시 1:6)은 그 내용을 잘 요약해준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기 때문이라"
2) 잠언은 인간의 정서와 태도, 인간 관계, 도시의 삶과 시골 생활, 사업 윤리, 사교, 사회 정의, 가족 관계, 도덕적 표준들, 그리고 마음가짐과 동기 등 매우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잠언서는 현실 세계를 주로 다루고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잠언서는 살아 있을 때에 경건한 삶에 대해 보상과 불의한 삶의 대가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 주로 말한다.
3) 잠언서는 하나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잠언서는 여호와가 87번이나 나온다. 잠언서는 그 분의 본성(주권, 신실, 거룩, 전지, 전능, 정의 등), 그 분의 사역과 축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4) 잠언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강조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주를 경외하고 신뢰할 때에만 경건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잠언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강조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한다.
▶ 잠언서에 나타난 각종 주제들
▷<긍정적인 것(의와 지혜)과 부정적인 것(악과 어리석음)이 대조된 주제들
1. 지혜와 어리석음. 2. 의와 악. 3. 생명과 죽음. 4. 지식과 무지. 5. 근면과 게으름. 6. 질서와 무질서. 7. 성공과 실패. 8. 절제와 분노. 9. 성실과 불성실. 10. 순종과 배신. 11. 정직과 속임. 12. 정의(공평)과 불의(불공평). 13. 진실과 거짓. 14. 존경과 멸시. 15. 칭찬과 비난. 16. 긍지와 멸시. 17. 순결과 부정. 18. 격려와 중상. 19. 평화와 분쟁. 20. 사랑과 증오. 21. 자비와 무정함. 22. 관대함과 탐욕. 23. 기쁨과 슬픔. 24. 희망과 염려. 25. 선한 친구와 악한 친구. 26. 우정과 적의. 27. 풍부와 빈곤. 28. 덕과 수치. 29. 금주와 만취. 30. 신뢰와 근심. 31. 즐거움과 비탄. 32. 조용함과 수다. 33. 만족과 질투. 34. 배움과 배우지 않음.
▷ 기타 주제들
1. 여호와 경외 2. 남편 3. 아내 4. 아버지 5. 어머니 6. 자녀 7. 왕, 통치자 8. 주인 9. 종 10. 창녀 11. 고아와 궁핍한자 12. 사업수완 13. 위선 14. 도적질 15. 비난 16. 폭식
6. 잠언서와 기타 고대 지혜 문학과의 관계
솔로몬의 지혜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었지만(왕상 4:30-31), 그렇다고 그만 지혜자였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에도 지혜자가 있었고(창 41:8, 출 7:11, 왕상 4:30, 사 19:11-12), 에돔에도 지혜자가 있었으며(렘 49:7, 욥 8장), 바벨론에도 지혜자가 있었다(사 47:1, 렘 5 0:35, 단 1:4, 5:8 등). 이집트와 바벨론의 지혜 문학 중 몇 작품은 격언의 수집 물이거나 최소한 얼마의 잠언적 격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의 문학 중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프타-호텝의 교훈"(훌륭한 관리가 되는 길: 주전 2450년경에 쓰여짐).
2) "아멘-엠-오페의 교훈"(왕이 아들을 가르침 교훈집: 주전 1,300-1,900년).
3) 메리-카-레 왕을 위한 교훈"(주전 2180년경에 쓰여짐).
4) "세바이트"(지도자들과 궁전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편집된 책).
바벨론의 격언집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
1) "지혜의 조언"(주전 1,500-1,600년).
2) "아카드 잠언"(주전 1,800-1,600년), 3) "아히칼의 이야기"(주전 700-400년).
이러한 격언 집에는 잠언에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격언들이 발견된다. 이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잠언이 이들 책을 복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잠언서의 몇 몇 격언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또는 바벨론의 것들과 비슷하다고 해서 경전의 영감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잠언서 기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글들이 성령에 의해 감화되게 하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가 정확하게 기록되게 하시어, 그것들이 정경 속에 들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 대부분의 비 성경적인 기록들은 잠언서의 것보다 세속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입장에서 볼 때 우둔하기까지 한 것들도 있다. 또한 잠언서가 강조하는 하나님 경외의 사상은 비 성경적인 격언 집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잠언서가 이들과 유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잠언서는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약 성서에서 본 시간과 영원 -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의 성격 -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들 - 시간을 표현하는 언어의 내용 - 계시와 시간의 관계 - 하나님과 영원 그리고 인간과 시간 구약 성서에서 본 시간과 영원 - 에른스트 예니 교수(스위스 바젤대학 구약학) 구약은 철학적인 체계나 조직신학적인 책도 아니다. 오늘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 일반적인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영원에 대하여 시간의 저편에 대한 추상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나 영원에 대한 추상적 생각은 공간과 같이 희랍철학에서 나온 개념이며 오늘날까지 그렇게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구약에는 오늘 우리가 공간개념, 물리학적으로 시간이나 4차원을 이야기하듯이 추상적인 시간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없다.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개념은 고대에서 나타나고 단순하며, 세계 어디서나, 어느 인간에게든지 공통적인 시간개념이다. 시간은 그 단위가 연속성으로 보는 것, 현재의 시간이 모든 사건에 관련되는 기본 시점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우리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를 아는 기준이 되며, 지난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구약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약에서도 언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형태를 말할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 언어학자나 인류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 개념의 표현은 모든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며 이것을 가지지 않은 족속은 없다고 한다. 히브리어는 이런 시간의 개념을 표현하는데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표현 방법은 달라도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의 표현일 뿐이다. 강조하고 싶은 바는 언어적인 면에서 판단할 때 구약에는 특별한 히브리적 사고로 시간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대로 히브리적 사고와 그리스적 사고 사이에는 원칙적이 대비가 있다고 하나, 언어학적인 면에서는 지지할 수 없다. 히브리적 사고와 희랍적 사고사이의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노르웨이 신학자가 주장한바 있는데, 그가 주장한 것은 사고의 틀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의 표현의 내용을 비교한 표면적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적 사고나 희랍적 사고를 비교하는 것은 할 수 없고, 다만 구약이 어느 수단으로 시간과 영원을 표현하는지 알아보고, 어떤 신학적인 이해와 관련하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 구약에서의 일반적 시간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 > 구약의 고대히브리어는 시간에 대한 일반적 단어인 현재, 과거, 미래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시간 표현에 3-4개의 명사를 가지고 표현한다. (1) 먼저 소개할 단어는 '에트' 이다. 이것은 시간의 길이 곧 시간이 얼마나 긴지의 시간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내일 이때에 내가 우박을 내리겠다' 에서의 내일은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사건은 조금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으며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중에 어느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50:16에 '추수 때에' 라는 구절은 추수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트' 가 사용되는 때는 적절한 시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104:21 에 '주께서는 그들의 시간에 기다리는 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신다.' 라는 표현이 있다. (2) '욤' 이라는 단어가 있다. '날'이라는 말은 밤에 대비해서 쓰는 말이다. 또 24시간을 말할 때도 쓰인다. 어떤 일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말한다. '요셉이 집에 들어왔을 때' 에 '욤' 을 쓰는데 들어가는 날이 아니라 들어간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욤'이 나오면 ' ...는 때' 로 번역한다. (3) '욤'의 복수형은 '야미'이다. 번역하면 '날들'이다. 날들이라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때, 즉 아주 긴 시간을 말한다. 과거나 미래는 이 단어의 형용사를 추가하여 사용한다. (4) '올람' 영원이라고 번역된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히브리어에 없듯이 영원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없다. 영원을 이해할 때 추상적인 영원이 아니라 현재로 봐서 과거나 미래 어느 방향으로도 가능하며 양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시점을 말한다. 이것은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전치사, 부사를 사용한다. '영원전 부터'로 번역하는데 '오래 전에서부터 영원까지' (먼 시간 까지)등으로 쓰인다. 우리가 표현하는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영원까지는 히브리어로 '영원부터 영원까지'로 표현하는데 아주 멀리 떨어진 개념이다. 추상적이지는 않다. 전치사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연계형으로, 올 시간을 표현하는 시간이 있다. '올라'를 영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계약이 아니라 미래의 먼데까지 계속되는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영원의 하나님'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올람'은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영원한 노예'는 일생을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원의 날들' : 오래 전 시대로 표현, 다윗 때나 창세 때를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 까지의 설명은 고전 히브리어의 '올람'의 뜻이다. 성서이후나 그 이후 히브리어 발전에서는 희랍어의 영향으로 '시대', '세상' 의 뜻을 가지게도 되었다. 다시 정리하자. 히브리어는 몇 개의 명사, 전치사, 부사 시간 표현으로 동사를 가지고 구체적인 시간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시간을 표현하는 언어의 내용 > 시간을 표현한 내용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가 가지는 내용과 비슷하다. 시간이나 시점을 말할 때 그 시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의 내용을 히브리어는 중시하고 있다. 현대인은 기하학에서 공간과 내용을 구분하듯이 시간과 시간의 사건을 구분하도록 훈련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브리인들은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진행과 상태를 묶어서 표현한다. 가령 2차 대전 때를 말한다면 1940년대의 몇 년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좋은, 나쁜 시간을 말할 때에는 시간의 질적인 면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대상 29 :30 에 다윗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관한 시간들에 관해 역사를 썼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간은 시간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5:21에 '우리의 날들을 예전과 같이 새롭게 하소서'에 옛적의 좋았던 내용을 다시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시간과 시간의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 그 두 가지를 일치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연대기적인 시간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근거가 없다. 히브리 사람들이 시간에 독특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사건들이 동질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적으로 전혀 상관 없이 사건의 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기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직선적인 시간의 구도가 원형적인 반복적인 시간의 반복성으로 대치되기도 한다고 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배에서 경건한 사람이 구원을 현재적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제례축제에서 해마다 달력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재현된다고 보았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과거의 일어난 일에 몰입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런 반복 또는 재현되는 일들은 예언자들이 미래로까지 투사하였다고 본다. 독일 신학자 발리는 시간의 축약이라고 이것을 말하였다. 갈링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3개의 시제가 있으나 구약의 예언자자적 시간으로는 지금이라는 시간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연대기적인 실존철학적인 범주가 구약에 투사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말한 대로 구약에는 다른 시간과는 구별되는 개념은 없다. 그래서 연대기적인 시간이 단순하게 연대기나 예언서에 들어가 있다. 예들 들면 율법선포, 출애굽을 이야기할 때 각 시대가 거명된 것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신11:18이 그것을 보여준다. "나의 말을 너희 영혼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라". 즉 자녀 시대의 연대기적 시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족보자 연대기에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비록 하나의 단위로 취급 되지만, 아모스 2 :10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내었고 광야에서 40년을 인도하였다' 는 표현에서 과거의 하나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아모스 구절에서 출애굽을 아모스 시대 사람과 묶어 두는데 이것이 시간의 축약은 아니다. 구약에는 역사적인 시간의 개념이 발달되어 있다. 예언자들도 이런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고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반복되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들을 기대한다. 사 43:18-19에 '예전 일을 생각지 말라. 보라 내가 새것을 창조하고 그것이 싹트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시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때 추상적, 희랍적 사고가 필요하다. 물론 시간의 사건을 강조할 때 연대기적 거리는 중요하지 않게 보일 때도 있다. 예언자들은 유명한 문체를 사용하는데 예언자적 완료를 사용했는데 일이 일어날 것을 믿어서 완료형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예언자들이 연대기적 시간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것을 사 7:16에 말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구약에서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 계시와 시간의 관계 > 먼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보면 언제나 계시하실 시점을 택하시고 특별한 구원행동을 주신다. 자연의 세력과 밀착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출애굽사건에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시는 미리 약속을 하시고 그것이 성취되면 다시 새 약속을 주시며 구속사는 시작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목표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시간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법칙성의 것이나 진화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속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건들은 개별의 의미와 함께 연결적인 의미가 있어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나아간다.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사로 파악하는 것은 구약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 구약의 한편에서 보면 사랑의 구속사는 '카이로스'의 면에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재를 강조하는 것이며 순종의 결단을 요구한다. 시 96:7에 '너희가 오늘 청종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가 아니라 시간의 경과가 나타나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경과를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시간 이해의 면인데 고대 중동의 시간 이해와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 (1) 애굽사람의 시간개념 : 시간의 계속 상태를 믿었다. 애굽사람들은 끝없는 시간의 반복이며 어떤 목표나 종말이 없이 각 시대가 계속 새롭게 반복된다고 믿음. (2)바빌론 : 애굽과 비슷하였다. 그들은 시간이란 항구적인 리듬을 가지고 자연이 순환하듯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순환적인 시간 이해는 아마도 각 시대에 반복되는 사건들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세계사적 시각은 형성하지 못했다. 거듭 말하지만 직선적 시간은 구약에 나타나지만 어디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예로 전도서에는 역사적인 사건은 감추어져 있고 창조주의 전지전능성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의식이 약화되었고 자연의 시간의 개념이 부각되어있다. 전도서1:4에 '한시대가 가고 한시대가 오는데 땅은 영원히 머물러 었다' . 또 1:5에 '태양은 어쩌구 저쩌구' 라고 하고 또 전도서 1:9에 '해 아 래에는 새것이 없다'고 한다.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는 아마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내용을 이해 못한 듯 싶다. 이사야 49 :1에 '보라 내가 새것을 창조....' 라고 했다. 구약의 다른 부분에 보면 성경의 역사적인 문맥에 순환적인 시간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11:6-8 낙원이 돌아오고 동물의 세계가 평화를 되찾은 그림이 그 예이다. 반복적인 시간이 지나간 후 나타나는 낙원은 고대중동에서의 보편적인 시대이론인데 변형된 것이 있는데, 마지막 도래한 평화가 다시 새로운 것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지막 국면이다 라고 하여 일반적인 순환논리를 깨고 있다. 지금까지 시간과 계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 하나님과 영원 > 구약은 시간에 대해서 추상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시간과의 관계에서의 교리적인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구약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전능하신 주님으로, 시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으로 보이신다. 모든 것 위에 계시고 시간을 창조한 한 분이신 하나님에서 출발할 때 시간과 관련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그가 시간을 창조했고 실존적인 형태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1장의 창조 역사 기록에 분명히 나온다. 시간은 비로소 시작을 가지게 된다. 시간은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하나님 편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며 시간은 결코 범죄타락으로 세계에 들어오게 된 악한 것이 아닌 선한 것이다. 그래서 시간성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지만 왜 시간성이 있느냐는 것은 피조물을 창조주와 구분하기 위해서이고 창조자는 시간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다. 시90:4에 '천년이 하나님에게는 하루와 같다'고 한다. 전도서에 '시간을 주시고 뺏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피조된 세계가 마지막이 있듯이 시간도 마지막이 있다'고 사 16:9에서 말하고 있다. '태양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고 ...그러나 주님이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실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사66:23에는 마지막 종말의 시간이 어찌 되는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이며 시간성에 얽매여 살고 있으며 시간이 하나님 편에서 어찌 이해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여러구절에 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시간에 대한 생각은 신학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고 제2 이사야가 처음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해 잘 말했다. 창21:33에 초기에 하나님의 이름인 엘 올람(영원한 하나님)이 브엘세바에 나타난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오기 전에 사용하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아마도 팔레스틴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엘세바에서 경배된 엘 신이 야훼와 동일시 된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름이 페니키아 비문 ,우가릿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우가릿 등에 나타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영원성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힘, 활동성을 강조하면서 태양이 영원성의 상징이라고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보듯이 '엘 올람'은 가나안의 자연종교에서 나온 이름이고 제 2 이사야가 말하는 영원한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것이다. '엘 올람'은 피조물과 연관되어 생각했지, 별개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제 2 이사야에 영원의 개념이 니오는데 계시신앙과 창조 신화에서 나온 것이며 그렇게 자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제2 이사야가 사 44:6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영원한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주석을 잘 해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겁을 내고 용기를 잃고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이들에게 해방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주게 되었다. '그는 결코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다'고 하신다. 제 2 이사야에서 야훼께서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며 바벨론도 지배하시지 않겠느냐 그리고 아무 희망없는 바벨론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과 영원하신 하나님은 같은 뜻이다. 그래서 희랍적 영원하신 하나님과는 그 뜻이 비교될 수 없다.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덧 없는 피조세계 이지만 영원한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다. 영원의 개념은 점점 하나님의 성격과 동의어가 되었고, 하나님의 활동과 동일시 되었다. < 인간과 시간 > 우리가 말했듯이 시간성이라는 것은 피조세계의 실존의 양식이다. 욥1:21에 '주님이 주셨으니 주님이 취하신다. 그의 이름이 찬양 받으실 것이다' 라고 한다. 그 외에도 시 90편의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2-3 : 산들이 생기기 전부터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인간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너희 인간들아 돌아가라 하셨다. 인간은 그러므로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피조물'이라고 창6:3에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받았고 다시 반환해야 한다. 오래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면 좋지만 누구나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생명을 드린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약은 말하지 않고 있다. 영원한 인간의 삶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에 왕들에 대해서 '다윗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 라는 것은 고대 동양의 궁중에서 사용하던 문체양식의 과장된 표현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 타락한 인간이지만 이 인간의 창조된 시간성안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뚫고 들어왔다. 그것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시간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면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시간속에 나타내시므로 피조물의 시간성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신다. 구약에 있어서 시간이나 역사는 매우 본질적인 것의 하나이며 의미아 크다. 시간과 계시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의 의미가 있을 수 있고 그 수수께끼 같은 가면을 벗을수 있다. 시간이 인간에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주신 구원을 우리가 붙들도록 하는것이다. 다음과 같은 강조된 것을 보면서 시편 9장이 '이스라엘아 조용히 귀를 기울여라 오늘 너는 주님의 백성이되었다. 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규례를 따라서 행하라' 고 한다. 여기에 시간이 강조되었다. 시간은 인간이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계시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르심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행동이나, 변덕스런 하나님께 맡겨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의 성실과 구원 의지를 분명히 알게 해주고 인간에게 마지막이 온다는 것과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나 출애굽 사건을 자기들의 시대로 현재화했던 것과, 예언자들이 이미 에언이 일어났다고 성취된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나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무시간적이나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것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시간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의 구원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고 더 이상은 아니라는 제한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